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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9-07
 제목  기독교의 인간이해
 주제어  [인간론]
 자료출처  이신건  성경본문  
 내용

4. 기독교의 인간이해

1. 피조물로서의 인간

1. 우주 속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세계의 형상 : Imago mundi 로서의 인간)

구약성서의 창조기사에 의하면, 인간은 다른 모든 피조물들 중의 한 피조물로 나타난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인간은 주위의 다른 피조물(자연)에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 인간은 다른 피조물처럼 연약하고 사멸적인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인간(Adam)은 땅(Adama)과 결부되어 있고, 땅에 의존되어 있고, 땅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이다. 이처럼 인간은 철저히 자신을 다른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유한한 존재로 이해하며, 그들에 의존해서 살아야 할 존재로 이해한다.

그렇지만 창조는 특별한 시간의 순서를 갖는다. 즉 인간은 마지막 피조물이고, 하늘과 땅, 빛과 어두움, 땅, 식물과 동물은 인간의 창조를 준비하기 위해 창조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또한 최고의 피조물이기도 하다. 인간은 창조의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서 있으며, 창조자는 인간을 중심으로 삼아 세상을 인간의 거주지로 짓는다. 인간창조의 과정도 다른 피조물의 창조와는 다르게 장엄하고도 정성스러운 것으로 나타난다.

P기자의 창조설화에서 하나님은 인간창조를 위해 자기결의("∼ 하자")를 3 번이나 반복한다. 이것은 완전히 유례(유비)가 없는 창조활동을 나타내며, 이 점에서 우리는 인간의 유일하고도 독특한 우주 안의 위치를 확인한다(L. Scheffczyk).

그렇지만 인간이 창조의 목적이나 창조의 왕관은 아니다. 창조는 인간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 피조물이 하나님과 함께 인식하는 안식일을 위해 창조되었다. 안식일은 창조의 완성이요 왕관이다. 세계의 창조는 안식일, 곧 창조의 잔치, 전 세계의 구원, 영광의 나라를 지향하고 있다. 세계의 창조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세계의 메시야적 준비이다. 그러므로 창조의 내적인 근거는 하나님과의 계약(K. Barth)이 아니라 장차 올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이다.

그러나 안식일 이전에 인간은 하나님의 마지막 피조물로서 자기 안에서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체현한다. 인간이라는 복잡한 체계는 삶의 진화의 보다 간단한 모든 체계들을 가지 안에 포함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다른 피조물들은 인간 속에 현존해 있다. 인간은 '세계의 형상'(Imago mundi)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모든 다른 피조물들을 대변한다. 그는 그들을 위해 살고 말하고 행동한다. 인간은 세계의 형상으로서 '제사장적인 피조물'이요 '성만찬적인 존재'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창조의 사귐을 책임진다(J. Moltmann). 창조물은 인간에게서 유일한 선물과 은혜이면서 동시에 의무와 과제이기도 하다(L. Scheffczyk).


2. 인간창조의 목적

인간이 창조된 목적은 무엇인가? 수메르와 바벨론의 창조설화에서는 인간이 창조된 목적은 '신들의 멍에를 메고 가기 위한' 것에 있다. 즉 신들이 매일 무거운 고역을 인간에게 지우기 위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아트라카시스 서사시'(The Atrachasis Epic)에서는 인간창조의 설화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매일 고된 노동의 책임을 진 하층계급의 신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들은 회의를 소집한 후, 인간에게 그 고역을 맡기기 위해 인간창조를 결정하였다. 그래서 신들은 고역의 멍에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인간창조를 축하했다. 수메르에서는 아주 고대로부터 대대적인 민중부역이 있었는데, 그것은 언제나 성전건축과 종교의식을 위한 것이었다. 인간은 바로 이런 부역을 위해, 신들을 섬기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바벨론의 아카드 제국의 창조설화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 제 6 편도 같은 내용을 전해준다 : 마르둑(Marduk) 신은 이렇게 말한다 : "내가 피를 모으고 뼈를 만들겠다. 내가 야만인을 창조하겠다. 그의 이름은 '사람'이라고 하겠다. 진실로 야비한 인간을 나는 창조하겠다. 그는 신들을 섬기는 책임을 맡을 것이다. 신들이 편안해지도록!"

그러나 P(제사)문서의 창조설화에서는 인간창조의 목적과 목표가 완전히 다르게 나타난다. 인간창조의 목적은 신들의 사건과 전혀 관련을 가지지 않으며, 땅과 지상의 사건과 관련맺고 있다. 즉 인간창조는 세계내적인 기능, 즉 세계성의 특징을 갖고 있다. 여기서 인간창조의 목적은 신들을 섬기는 일이나 신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의 세계를 향하고 있다. 즉 인간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며, 모든 생명들을 다스리도록"(창 1:28), 즉 복을 받도록 지음받았다. 여기서 인간들은 신을 위해서 결정되었다기 보다는(수메르, 바벨론 설화) 하나님의 인간을 위해서(인간축복) 결정된 것으로 나타난다. 제사문서(성전건축과 성전제의를 강조하는 P기자)가 이처럼 인간창조의 목적을 성전건축과 예배행위에 제한하지 않고 전 인류와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그는 처음부터 인류역사의 안목에서 인간을 이해했고(창 10장에서 민족계보와 대조하며 한 민족의 역사를 제시함), 인간창조의 목적을 전 인류의 축복에 관련시킴으로써, 인간해방과 세속긍정의 의미를 부각시켰다(C. Westermann).

3. 인간의 기원(?)

성서는 우리에게 인간의 생성, 인간의 기원에 관한 자연과학적이고도 보편타당한 지식을 전달해 주는가? 만약 우리가 성서의 '창조설화'를 그렇게 이해한다면, 성서의 증언들을 오해하고 만다. 성서는 통일된 자연과학적 지식의 정보를 주려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래서 인간형성에 관해서도 통일된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 성서의 증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인류의 창조주이다"는 메시지(창조신앙)를 시대마다 다른 자연인식과 종합하면서, 자기의 동시대인들에게 새롭게 증언하려는 관심을 가졌다. 그러므로 성서의 창조설화들은 새로운 경험들을 통해서 수정되고 변화되는 '해석학적 과정' 속에 있다. 그것들은 세계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증언들로서, 세계를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새롭게 경험하도록 인도하며, 언제나 새로운 종합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 미래적 개방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성서는 창조에 대한 어떠한 교리(도그마티즘)도 허용하지 않는다(C. Westermann, J. Moltmann).

1) 인간형성에 관한 가장 오래된 표현은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 "(창 2:7). 사람이 흙(땅 혹은 먼지)으로 지음받았다는 표현은 구약성서에서 흔히 나타난다.

 

창 3:19 : "네가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창 3:23 :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 지를

 

갈게 하시니라."

 

창 18:27 : "아브라함이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시 90:3 :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

 

시 103:14 :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 104:29 :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 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가나이다."

 

시 139:15 :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받은 "

시 146:4 :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욥 4:19 :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욥 10:9 : "주께서 내몸을 지으시길 흙으로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

 

려 보내려 하시나이까? "

그런데 인간이 흙으로 지음받았다는 표상은 원시 문화권에서 오래 전부터 널리 알려진 것이다. 이 표상은 아프리카, 그리스, 바벨론, 유다, 에집트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적인 표상으로서 고대로부터 전승되어 왔다. 창 2:7의 표현도 주변세계의 표상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고 그보다 훨씬 더 고대로 미치는 전역사(前歷史)에 뿌리를 두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와 에집트의 문헌들도 오래된 전역사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에집트 : 창조주 크눔(Khnum) 신을 새겨 놓은 비문에 아멘호렙 3세 왕의 아들이 흙으로 지음받았다고 묘사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바벨론) :『길가메쉬 서사시』

길가메쉬는 여러 신들이 만들어 초인간적인 모습을 갖는 존재인데, 길가메 쉬의 2/3는 신이고 1/3은 사람의 모양을 갖고 있다. 그 몸 모양은 들의 황 소와 같았다. 그의 공격은 비길 데 없이 강했다. 그가 우룩 성소에 도착하 자, 그곳의 귀족들은 방에서 우울한 상태에 빠진다. 길가메쉬는 밤낮으로 공격하여 아들과 딸들을 죽이고, 귀족의 약혼녀인 용사의 딸을 죽인다. 하 늘의 신들은 저들의 슬픈 탄식을 들었다. 하늘의 신들은 우룩 성소의 주들 이다. 그 신들 중에서 아루루 여신이 그렇게 강한 야생황소와 같은 길가메 쉬를 만들어 내어 놓은 것이다. 하늘 신들은 아루루 여신을 불러 말하길, 그대가 길가메쉬라는 인간을 창조했으니, 이제 그와 비슷한 인물을 창조하 라. 그 둘이 서로 경쟁함으로써 우룩 성소가 평화를 되찾게 하라고 했다. 아루루 여신이 이 말을 듣자마자 아누 신이 명한 것을 마음에서 만들었다. 아루루가 손을 씻고서 진흙을 떼어내어 집어 던졌다. 그녀는 엔키두, 힘있 는 용사를 만들었다.

J기자는 오래 전에 내려오는 전통적인 설화를 수용해 반복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J기자는 특히 두 가지 점을 부각 시키고 있다.

ⓐ 인간은 연약한 재료를 갖는 존재이고, 제한된 성격을 갖는다.

ⓑ 인간은 땅에서 유추할 수도 없고, 땅도 인간에서 유추할 수 없다. 인간과 땅은 모두 같은 단어(원래 피부, 표면을 의미했음)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인간(아담)과 땅(아다마)은 함께 서로 속해 있다. 땅은 인간을 위해 있고, 인간은 땅에서 살기 위해 존재한다.

2) '흙으로 지음받는 인간'에 관한 성서보도는 단 하나의 장면 즉 '코에 생기를 불어 넣음으로 사람이 살아 있는 존재가 된 장면'(창 2:7)과 결합되어 있다.

이런 표상도 다른 문화권에서 존재하고 있다.

에집트 : 여신 하소르(Hathor)가 크눔(Khnum) 신이 창조한 인간의 입과 코에 생명의 표식(ankh)을 붙여 줌.

바벨론의 인간창조 설화에도 창조신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음.

그리스 :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의 인간창조에도 이와 유사한 행위가 나타남(흙으로 사람의 몸을 만들고 이에 신들에게서 취한 불로써 생기를 줌.).

이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이 흙으로 지음받고 하나님의 생기(숨)로 인해 산 생명이 되었다"는 J기자의 설화도 그 이전에 이미 있던 표상을 수용한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오해를 반박할 필요를 느낀다.

ⓐ 하나님이 인간의 코에 생기(루아흐)를 불어 넣었다는 것은 인간에게 신적인 그 무엇이 함께 부여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H. Gunkel : 인간은 하나님과 유사하다. 그의 숨은 신적인 것의 빛을 발하는 것이다 ? ). 루아흐를 그리스적 혹은 현대적 영(혼)의 개념으로 해석해선 안 된다. 이런 해석은 필로(Philo)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서, 그 후에도 현재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A. Dillmann : 인간의 영적인 생명력). 루아흐(생기, 생명의 호흡, 숨)는 단순히 생명력, 호흡을 불어 넣음, 인간에게 생기를 줌(Lebendigkeit, das Einhauen des Lebensatems, die Belebung des Menschen)을 뜻한다. 이로써 "인간은 불멸하도록 창조되었다"는 주장은 탈락된다.

창 2:7은 신적인 질료가 흙(인간) 속으로 유출되어 둘어갔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신적인 생명력이 흙에게 부여되었음을 말한다(그러나 이것은 다른 피조물과 비교할 수 없는 친밀한 신인관계를 표현한다.).

ⓑ 하나님의 루아흐(생기)가 인간의 몸(흙)에게 주어져서 비로소 사람은 생명을 갖추게 되었다(숨을 쉬게 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몸 속에 '살아있는 영혼'(lebendige Seele)이 들어 갔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로서 전체적으로 이해된다. 네페쉬 하야는 생명이 없는 물체, 어떤 시체와는 다르게 산 생명체를 뜻한다. 창조자가 동작을 시켜 놓은 호흡이 비로소 인간을 살아 있는 네페쉬, 곧 생명체, 산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몸과 영혼으로 이루어졌다는 이해는 배제된다. 또 인간이 살아있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그가 단지 살아 있는 존재로서만 대상화될 수 있다는 것, 어떤 인간상이나 인간론도 인간의 고유한 본질(인간성)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뜻하는 의미 : 모든 인간은 항상 전능자의 기운 덕분에 생명을 유지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는 생명이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 선물임을 의미한다(예수의 부자상인, 부자장사꾼 이야기 참조하라.).

3) 시편 139:13-16은 창 2:7과는 다른 각도에서 인간의 창조를 묘사하고 있다.

    주께서 내 장부(신장)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짜 놓으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되었나이다

 J기자의 창조설화가 어떤 의미에서는 신화적이라면, 지혜시의 창조신앙은 더욱 지성적이고 솔직한 편이다. J기자가 하나님을 도공으로 보았다면, 시인은 직공으로 보고 있다. J기자의 창조이해도 그 당시로서는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으나, 시인의 창조이해는 훨씬 더 의학적이고 구체적이다.

시인은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의 창조의 기적에 의해 조직된 것임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내면까지 투명하게 살펴 본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는 자신이 만든 독립적인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자신의 존재와 본질의 근원을 하나님에게서 찾아 그것을 하나님의 창조행위로 고백하며, 그런 고백을 하는 순간을 바로 태초의 창조의 시간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는 자기의 어머니의 몸 속에서 자라나는 모든 과정이 위대한 직조자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그는 인간의 몸 전체를 '직물'(織物)로 이해하고 있다.

인간을 "땅의 깊은 곳에서 지었다"는 표상은 '모든 산 자의 어머니인 땅에 대한 고대의 신화적 이미지에서 유래한다(출생의 신비를 나타내는 시적 이미지로 사용함). 고대인들은 인간이 곡식처럼 땅 속에서 싹터 오른다고 생각했다. 이런 표상(표현)을 통해서 시인은 인간의 출생이 인간의 계획이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설명한다. 은밀하게 창조하는 하나님만이 태초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인간이 싹트는 태아모습도 하나님이 명백하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2가지 특징 : ⓐ 어머니의 몸 속의 창조라는 현실적 창조이해, ⓑ 자연발생적 인간출생이 아닌, 하나님의 행위와 섭리에 근거하고 있는 인간의 형성에 대한 신앙고백).

4) 욥기 10:10f.의 창조이해는 훨씬 더 지성적이고 해부학적이다.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가죽과 살로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뭉치시고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이것은 개인적인 창조신앙의 고백으로서 시편보다 훨씬 더 새롭고 정확하게 인간의 생성과 출생에 대하여 표현하고 있다. 가죽과 살로 입히고 뼈와 힘줄로 뭉쳐(얽어) 놓았다는 표현은 시편 139:13, 15와 비슷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할 때에 젖처럼 쏟고 엉긴 젖처럼 굳게하였다는 사고는 완전히 새롭고 독특한 사고이다. 이것은 젖같은 남성의 정액이 여성의 자궁 속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것과, 수태된 이후에 태아의 단단한 몸짓이 형성되는 것을 창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종교적, 신화적 창조이해와는 달리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관찰과 분석에서 인간형성을 표현하고 있다(C. Westermann, L. Scheffczyk, J. Moltmann).

 

2.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서의 인간

1. 신학적 인간학의 출발점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

우리는 신학의 모든 주제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제 각기 다른 관점으로부터 볼 수 있고, 그래서 상이한 출발점 혹은 착안점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제 각기 다른 개념을 갖고서 "인간이 무엇이냐?"에 대한 답변을 내릴 수 있다. 또 우리는 서로 다른 틀(패러다임)을 가지고 동일한 내용을 제 각기 해석할 수 있다. 기독교 신학에서도 인간을 규정하는 출발점, 개념 혹은 틀은 다양하다. 하나님의 피조물(세계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 죄인(악마의 형상), 종말론적인 구원의 대상(칭의-성화-영화), 인간과 공동체(가정, 교회, 사회, 세계 혹은 우주), 물질과 생명, 전인 혹은 영-혼-육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인간학이 가장 중요시하는 인간이해의 열쇠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이다. 비록 이 개념이 성서를 통틀어 비교적 자주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이 개념을 기독교적 인간이해의 출발점으로 삼아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는 것은 매우 오래된 전형적인 신학전통이 되어 왔고, 이러한 관점에서 연구된 성서적, 조직신학적 결과들은 교회사 혹은 신학사 만큼이나 다양하고 화려하다. 그러므로 본인의 연구는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고 전혀 새로운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시도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단지 지금까지의 논의된 '하나님의 형상' 이론들을 다시금 정리, 요약, 비판하고 본인의 관점에서 새로이 해명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 결론을 가지고 현대의 인간학의 결론 특히 '열린 인간 이해'와 대화하고 그 상관관계를 규명하려고 한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의 어원과 기원 및 그 의미는 무엇인가? 형상(첼렘)과 모양(데무트)은 히브리어 원문에 접속사 없이 나란히 나온다(우리의 형상, 우리의 모양으로). 그러나 70인역(LXX)과 라틴어역(Vulgate)에서는 두 어휘 사이에 접속사 '와'(그리고)가 삽입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접속사의 삽입은 '하나님의 형상' 해석사에서 비극적으로 작용하였다. 앞으로 다루겠지만, 이러한 두 용어 간의 구분은 희랍적 인간이해와 결합되어 인간을 두 가지 구조 내지 본질을 갖는 이원론적 실재로 해석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래서 접속사 '와'의 단순한 삽입은 오늘 날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형상' 이해에 복잡한 해석과 오해를 낳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에서 두 어휘는 아무런 의미의 차이가 없다.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고 한다면, 첼렘은 '짜르다', '베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하고(동물이나 사람의 모습대로 조각되는 광경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단어), 데무트는 '∼와 비슷하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하여 '비슷한 모양'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두 단어는 사람이 어떤 점에서 하나님과 같은 존재이며, 하나님을 대표하는 존재라는 사상을 나타낸다. 그러나 몰트만에 의하면, 첼렘[imago]과 모양[similitudo]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전자는 석고상을 가리키고, 후자는 비슷함을 가리킨다. 전자는 밖을 향하여 대리하는 면을 표현하고, 후자는 안을 향한 반사의 면을 표현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명제의 기원은 논쟁적이다. 인간이 하나님(神)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이야기는 많은 고대의 동양 신화들에서도 볼 수 있다. P기자는 아마도 '에집트의 왕의 신학'을 수용한 것 같다. 고대 에집트에서 파라오는 '지상에 있는 신의 형상'으로 간주되었다. 파라오는 땅 위에서 다스리는 하나님의 초상, 그의 대리자, 그의 임명을 받은 자, 땅 위에 있는 그의 광채와 그의 현현방식이다. 파라오는 그의 제국의 모든 지방마다 자신의 초상을 세워 자신의 현존을 표시한다. 이 초상은 신의 형상인 파라오의 주권과 영광을 드러내는 표지이다. 시편 8편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을 왕과 같은 사람으로 묘사한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고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표상이 이러한 '에집트 왕의 신학'으로부터 유래했다면, 사람은 땅 위에 세워진 대리자, 그의 주권의 표지, 땅 위에 있는 그의 영광으로 이해될 수 있다. 사람은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간접적 자기계시이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단지 왕만이 아니라 인간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기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표상에는 하나의 혁명적인 잠재력이 숨어 있다. 군주가 아니라 사람이, 남자와 여자 사이에 아무런 차별이 없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대리자, 하나님의 광채이다. 역사적으로 P문헌 속에 '왕의 신학의 민주화'가 들어 있든지 들어 있지 않든지 간에, 이 구절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정치사에서 '민주화'의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바벨론, 에집트에서 오직 왕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 일반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에집트에서도 이 표상의 민주화를 입증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메르와 바벨론의 창조신화를 지적했다. 수메르와 바벨론의 창조설화에서는 인간이 창조된 목적은 '신들의 멍에를 메고 가기 위한' 것에 있다. 즉 신들이 매일 무거운 고역을 인간에게 지우기 위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아트라카시스 서사시'(The Atrachasis Epic)에서는 인간창조의 설화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매일 고된 노동의 책임을 진 하층계급의 신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들은 회의를 소집한 후, 인간에게 그 고역을 맡기기 위해 인간창조를 결정하였다. 그래서 신들은 고역의 멍에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인간창조를 축하했다. 수메르에서는 아주 고대로부터 대대적인 민중부역이 있었는데, 그것은 언제나 성전건축과 종교의식을 위한 것이었다. 인간은 바로 이런 부역을 위해, 신들을 섬기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바벨론의 아카드 제국의 창조설화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 제 6 편도 같은 내용을 전해 준다. 마르둑(Marduk) 신은 이렇게 말한다 : "내가 피를 모으고 뼈를 만들겠다. 내가 야만인을 창조하겠다. 그의 이름은 '사람'이라고 하겠다. 진실로 야비한 인간을 나는 창조하겠다. 그는 신들을 섬기는 책임을 맡을 것이다. 신들이 편안해지도록!". 그러나 성서는 그 어디에서도 모든 인간이 다같이 신의 부역을 감당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록 에집트의 왕조신화가 '민주화'의 방향을 지시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P 기자가 하나님의 형상 개념을 수용하여 이를 탈신화하고 민주화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하나님의 형상 '에 대한 종래의 견해들

1. 인간의 특별한 내면적 자질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견해들

헬레니즘적 유대교의 고대 전통은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정신에 집중시켰다. 하나님의 형상은 신적인 로고스의 복제이다. 클레멘스(Clemens)오리겐(Origen)에 의하면 내면적인 정신적 인간은 하나님 자신과 같이 불가시적이고 비신체적이고 파괴될 수 없고 죽을 수 없다. 여기서 플라톤적 유산이 교회 안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와 달리 터툴리안(Tertullian)은 스토아 사상을 더 강하게 따르고 있다. 정신-영혼의 불멸성과 함께 그는 의지의 결정능력을 우리가 신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사실의 표지로 보았다. 이레네우스(Iraeneus)는 자연적인 하나님의 형상과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모습을 구분한 최초의 신학자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인간의 합리적이고 자유스러운 성품, 곧 인간의 합리성, 이성이다. 물론 이성에는 인간의 자유성, 결정할 수 있는 능력, 결정에 대한 책임성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타락으로 인해서도 상실되지 않는 성품이다. 하나님의 모습이란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신성의 의복)이다. 이것은 타락으로 상실되고 구속의 과정에서 다시 회복된다. 필로(Philo)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정신적 능력, 혹은 정신적 우월성으로 보았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으로 나누는 전통은 헬라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다. 필로의 설명은 고대교회에 의해 수용되었고 오늘 날까지 널리 다양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에게서도 우리의 내면적 정신적 인간은 삼위일체의 본래적 형상이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주로 인간의 지성 혹은 이성에서 찾는다. 그에 의하면 우리의 내면적 인간은 참으로 "삼위일체의 형상"(Imago trinitatis)이다. 우리의 외형적 육체적 인간 안에는 단지 "하나님의 흔적"(vestigia Dei)만이 있을 뿐이다. 정신적 인간은 내면적인 자기확신 가운데서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자신과 대면함으로써, 하나님 안의 사랑의 대화를 지시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사색을 물리쳤지만, 하나님의 형상의 자리에 대한 물음에서 우선적으로 영혼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명제를 받아들였고, 현대에까지 물려주었다. 예를 들면, 칼빈(Calvin)도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 인식, 의와 거룩함에서 실현된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 그 모든 능력의 질서와 건강을 경험하는 영혼 안에서 실현된다고 보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영혼'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 비록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외형 속에서도 빛나고 있긴 하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형상이 자리잡고 있는 장소는 인간의 '영혼' 속이다. 플라톤과 함께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그는 하나님의 형상의 좌소(座所)로서 불멸의 영혼을 강조한다. 영적인 것에의 집중화와 세계와 관련을 맺는 외형의 상대적 평가절하는 모든 진술을 각인한다.

2.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외형에서 찾는 견해들

헤르만 궁켈(H. Gunkel)은 창세기 5장 3절("아담이 130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과 같은 외모, 외형으로 보았다(신인동형동성론). 비록 그는 정신적인 것을 배제하진 않았지만, 첫 인간이 모양과 외모에서 하나님과 닮았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려고 했다. 궁켈 이래로 현대의 주석가들은 창세기 5장 3절을 지적하면서 '첼렘'이라는 단어가 '조각, 주조형상, 동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중에서도 폰 라트(v. Rad)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상이 원래에는 신체적 외관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예언가들에게서 "엘로힘과 같이" 창조된 인간은 인간과 같은 외관을 가진 주(主)와 상응한다. 데무트라는 단어에 조심스러운 거리유지가 내포되어 있지만, 에스겔(1:26)도 역시 "인간의 형태와 비슷한" 그 무엇만을 말한다. 물론 곧바른 모습에서 육체적 형태가 정신적 광휘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전인'이나 '인간 자신'으로 추상적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말할 때, 정신에 의해 관통되는 곧바른 몸의 형태를 주목해야 한다. 침멀리(W. Zimmerli)에 의하면 인간은 그의 외모가 실제로 닮았다는 뜻에서 하나님의 형태의 모형(Abbild)이다. 쾰러(L. Köhler)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직립형태이다. 슈탐(J. J. Stamm)도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을 형태의 닮음에서 찾았다.

3. 하나님의 형상을 나-너의 대면적 관계로 보는 견해들

칼 바르트(K. Barth) 에밀 브룬너(E. Brunner)는 현대인의 이성의 자율성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자들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서, 하나님의 형상론의 그리스도 중심적 측면을 철저히 관철시킨다. 여기서 이들은 분명히 마틴 부버(M. Buber)의 인격주의적 대화철학('나와 너의 철학')을 따르면서 "인간학적 전환"을 수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파악하는 설명에서 신학적 결정은 철학적 결정과 결합된다. 현대철학적 사고는 인간에 대한 정적이고 물적인 관점에서부터 관계적이고 활동적인 관점으로 옮아갔다. 이러한 경향에 일치하여 두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의 자리가 특별한 영혼의 능력이나 우리의 몸의 형태에 있다고 주장한 종래의 명제는 좋지 못한 객관화로 해석하면서, 그에 반해 인격적인 만남 가운데 그때마다 실현되는 근본적인 하나님 관계를 내세웠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존재와 그 구조, 그 성향, 그 능력 등에 관한 인간론적 묘사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거절했다. 그는 그러한 시도가 철저히 잘못되었다고 비판하고, 창세기 2장 27절("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더라.")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존재의 대면(만남)의 기능 속에서 찾으려고 했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의 형상과 모습은 인간존재가 대면(Gegenüber, 서로 마주 봄) 속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 대해 나와 너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또한 인간과 인간이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서로 대면한다는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다(Analogia relationis - 하나님과 인간 간의 관계의 유비). 왜냐하면 이러한 대면적 관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도, 그리고 하나님 안의 삼위일체적 관계 안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나-너의 관계 속으로 들어오는 분이다. 따라서 인간이 동료인간을 향하여 이와 동일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사실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관계성과 구별성(삼위적 관계와 구별)과 상응하도록 창조되었다. 인간은 그의 동료인간을 향해 '너'가 되며, 따라서 그에 대해 책임적인 존재인 '나'가 된다. 이 대면성을 제거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신성을 제거하고 인간으로부터 인간성을 제거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관계론적인 하나님의 형상은 정적인 것(Status)이 아니며, 인간에게 덧붙여 있거나 인간 안에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에, 타락과 함께 상실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바르트는 주석가들의 통찰을 수용하며, 교회적 전통과 갈라선다. 하나님의 형상은 오로지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의 헌신 안에 근거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결코 인간이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 소유물이 될 수 없다. 근본적으로 바르트는 인간이 하나님의 파트너로 결정되었다고 가르치는 종교개혁자들의 명제를 수용한다. 하나님의 파트너가 되도록 결정된 이러한 인간의 규정과 그리고 인간 상호 간에 파트너가 되도록 결정된 인간의 규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성취된다. 순종을 위한 그의 자유 안에서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은 유일하게 상응하는 응답을 얻는다. 이와 함께 하나님-인간의 사귐의 비밀이 계시된다. 교회라고 하는 하나의 여자에 대한 그리스도의 자기헌신 안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뿐만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혼인적 동거관계도 완성된다. 이로써 바르트의 인간학은 철저하고 완전하게, 그리고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인간과 그의 실존을 인간 예수의 주석 안에서 이해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신학적 인간학이 되었다. 무능한 자기초월의 교만 안에 있는 인간의 자기기획(自己企劃)으로서의 '존재의 유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약의지 안에서 열려지는 관계들의 모방으로서의 '신앙의 유비'라는 철두철미한 방향전환은 상응의 전 구조를 드러낸다.

브룬너(E. Brunner)도 비록 하나님의 형상을 실질적 형상과 형식적 형상으로 나누어 설명하긴 하지만, 이를 관계성으로 푼다. 하나님의 형상의 실질적 측면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경외하는 반응, 하나님께 감사하며, 전 생애를 다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는 반응을 말한다. 이러한 온전한 반응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죄로 인해 상실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의 형식적 측면은 인간의 책임성,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반응할 수 있는 능력, 동료 인간에 대한 책임성(반응 가능성)을 말하며 자유, 양심, 이성, 언어 등이 이것의 내용을 이룬다. 이것은 인간존재의 불변적 구조의 일부분이다. 이것은 남용될 순 있지만 제거될 순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구조성은 인간존재 그 자체와 동일시되며,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소유하고 있는 존재의 특질과 동일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식적, 본질적 구조성은 오직 인간이 삶을 멈추는 곳에서만, 저능과 미침의 경계선에 있을 때에만 중지된다.

이러한 관점은 이미 1902년에 리델(W. Riedel)에 의해 시도된 것이다. 이미 그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은 - 분명히 빌헬름 헤르만(W. Herrmann)과 같이 -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제에 집중된다.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은, 하나님이 인간과 교제할 수 있고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고 인간이 그분을 이해할 수 있고 그분에게 대답할 수 있다는 사실, 요약하면 종교적인 능력 혹은 소질(Anlage)에 있다. 물론 리델은 바르트와는 정반대로 이 교제를 "종교를 위한 능력 혹은 유비"와 관련시킨다. 마아그(V. Maag)에게서도 인간이 하나님과 유사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인간이 그의 창조주와 관계를 맺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4. 자연에 대한 인간의 통치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견해들

이런 견해는 종종 다른 해석들, 즉 인간에게 주어진 정신, 이성, 의지는 피조물에 대한 지배를 가능케 한다거나, 하나님의 대표성(대리성)은 나머지 피조물에 대한 지배 안에서 성취된다는 등의 해석과 밀접히 결합되었다. 볼프(H. W. Wolf)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를 높이는 임의적 행동 안에서가 아니라 책임적인 임무수행자로서 과제를 인식한다. 그의 통치권리와 그의 통치의무는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모방적인 것이다. 그로쓰(H. Gross)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참여하는 데 있다. 또한 오버홀처(J. P. Oberholzer)도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은 생산력과 자연 지배의 능력에서 드러난다고 말한다.

3. 앞의 견해들의 문제점들

지금까지 살펴 본대로 한 편으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견해들은 그것을 인간의 본질적 구성으로 보느냐 아니면 기능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크게는 둘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구성적 요소로 보는 견해도 그것을 인간의 내면적 특성 혹은 본질(이성, 영혼, 의지 등)에서 찾느냐 아니면 인간의 외형(외모, 직립 등)에서 찾느냐에 따라서 둘로 나누어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기능으로 보는 견해도 역시 그것을 관계의 기능으로 보느냐 아니면 통치의 기능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둘로 나누어진다. 물론 학자들에 따라서 본질과 기능을 밀접히 연결시키는 자들도 있는가 하면, 이 둘을 엄격하게 분리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리고 기능과 통치의 구분도 때로는 모호할 수가 있다. 그래서 이 네 가지 견해들을 학자에 따라서 엄밀하게 분류하는 것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강조점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대체로 앞에서 말한 대로 네 가지 범주로 나누어 보는 것이 무리가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 네 가지 견해들을 어떻게 판단하고 해석하느냐의 문제가 남아 있게 된다. 여기서 본인은 성서적-신학적 인간학의 범주 안에서 이 네 가지 견해의 문제점들을 지적해 보고자 한다.

1. 미래적, 종말론적 특징의 간과

성서적, 기독교적 인간이해의 중요한 열쇠가 되어 온 문장 즉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 혹은 모습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문장은 구약성서에서 단 3번(창 1:26-28, 3:1-3, 9:6) 직접적으로 나타나며, 시편 8편에서 간접적으로 나타난 것을 제외하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신약성서에서는 야고보서 3장 9절에서 비슷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주로 인간이 새롭게 변화될(혹은 입게 될)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말한다(고후 3:18, 골 3:9-10, 엡 4:22-24는 심령이 새롭게 되고, 새 사람으로 지음받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신약성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그리스도론의 전제로 삼아 말하고 있다(고후 4:4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임, 골 1:15 -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임, 히 1:3 -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그 본체의 형상임). 그래서 신약성서는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중재하기 때문에,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그를 닮아야 한다고 말하며, 인간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도록 지음받았다고 말한다(롬 8:29). 그러므로 그리스도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향하여 창조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선물(Gabe)이면서도 인간의 과제(Aufgabe)이다. 사실 P문서도 선물보다는 과제에 더 강조점을 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은사인 동시에 임무이며, 서술인 동시에 명령이다. 그것은 과제인 동시에 희망이요, 명령인 동시에 약속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에게 주어진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미래의 약속, 종말론적 희망이다. 즉 사람의 존재는 종말론적 과정 속에 있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안에 주어져 있기보다는 언제나 인간 앞에 서 있다.

초대 기독교 신학자들, 특히 테오필로(Theophilo), 이레네우스(Iraeneus), 클레멘스(Clemens)에 의하면 최초의 창조는 아직까지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나이에 이르기까지 접근해 나가는 과정 안에 있는 유아적 시작이다.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에게서도 창조의 시작은 자연과 정신의 보편적 침투의 발전목표로 변화되었다. 그를 뒤이어 리하르트 로테(R. Rothe) 에른스트 트뢸취(E. Troeltsch)도 인간 피조물이 창조의 당시에 점차로 질료의 원상태로부터 만들어졌듯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암호도 상실된 시초의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라 역사적 발전 속에서 달성되어야 할 목표를 말한다고 장한다. 브룬너(E. Brunner)도 이런 비슷한 본문을 지적한다. 칼 라너( K. Rahner) 주변의 카톨릭 신학자들도 조심스럽게 아담의 기원을 그리스도 중심적 목표점으로 해석한다: "시작이 그 종말을 향한 분명한 시작인 한에서, 그리고 시작이 종말에서야 비로소 자기에게 이르는 한에서, 원초론과 종말론은 내적으로 서로 속해 있다." 이와는 반대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그를 따르는 종교개혁자들은 원초적 상태를 최고로 완전한 상태로 묘사했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았을 뿐만 아니라 피조물들도 그들에게 직접 개방되어 있었고, 그들은 수고하지 않고도 동물들의 세계를 지배했다. 인간의 존귀함이 화려하게 그려지면 그려질수록, 원상태의 순수함의 상실도 더 강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형상은 마귀의 형상으로 변질되었다(WA 42, 47, 22: "Haec et similia mala sunt imago Diaboli, qui ea nobis impressit."). 그러자 다음과 같은 질문이 불가피하게 제기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인간이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되었다면, 어떻게 그는 저 원초적인 존귀함을 알 수 있는가? 어떻게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다시금 하나님을 향해 열 수 있는가?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비록 왜곡되었지만 하나님의 형상의 나머지가 남아 있다고 했다. 이 남은 형상은 정통주의에서 계몽주의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다시금 "위대한 일의 담지자"가 되었다.

그러나 인간을 처음부터 완성된 존재로 창조된 것으로 보지 않고 종말론적 목표를 향해 늘 새롭게 창조되는 열린 존재로 본다면, 구원은 단순히 원래적 형상으로의 회복이나 복귀로 볼 수 없으며,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 완전히 사라졌느니 혹은 얼마 남았느니 하는 논의도 부적절하다.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원래적 형상을 회복할 뿐만이 아니라 그 종국적인 형상을 입도록 규정되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노선을 따르는 대개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의 이러한 종말론적 특징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대체로 고대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의 틀 안에서 사고하느라 구원사의 시간적, 종말론적 특성을 간과하였고,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도 이런 틀 안에서 해석함으로써, 인간구원의 종말론적 역동성을 쉬이 잃어 버렸다.

2. 인간의 본질과 기능의 분리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본질(구조)적 측면과 기능적 측면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전체성(全體性)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인간의 구조성과 인간의 기능성을 함께 포함하여야 한다. 기능과 구조는 하나님의 형상의 근본적인 두 가지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구조적 측면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맺고 있는 다양한 관계성과 소명들 속에서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을 행하도록 기능하게 하는 모든 은사들과 재능들이 총체적으로 인간에게 부여된 상태를 지칭한다. 기능적 의미에서 본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어 작동하는 인간의 올바른 기능성을 의미한다. 다른 한 쪽을 희생시키면서 어느 한쪽을 강조하는 것은 편협한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에릭슨(M. J. Erickson)의 견해를 청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관계적 견해는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을 알고 의식적으로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다는 진리를 제대로 파악했다. ...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전적으로 관계의 문제로 보는 견해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 우리는 바르트브룬너가 전적으로 실존주의로부터 유래한 반실재적인 가정들 때문에 길을 잃었다고 결론내리지 않을 수 없다. 이 견해는 인간의 독특성은 실체적이기보다는 형식적이야만 한다는 입장으로 귀결된다. 눈을 돌려서 견해를 살펴보면, 우리는 이 견해가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성경의 묘사에 나타난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 곧 인간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행위 바로 뒤에 지배의 명령이 뒤따라 나온다는 통찰력 있는 생각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형상과 지배의 실행 사이에는 최소한 긴밀한 연관이 있음은 분명하다. ... 그러나 이 견해에도 또한 난점들이 있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배의 실행과 동일시한 명백한 언급이 없다. 오히려 이 두 개념을 구분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암시들이 있을 따름이다. 바꾸어 말해서 인간은 지배를 실행에 옮기도록 명령받기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존재로 이야기된다. ... 따라서 기능적 견해는 형상의 결과를 취하여 그것을 형상과 동일시하는 것 같다. ... 형상은 일차적으로 실체적인 또는 구조적인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형상은 인간의 본성 그 자체 안에 있는 어떤 것이며, 인간이 창조된 방식 안에 있는 어떤 것이다. 형상은 인간이 소유하고 있거나 행하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존재를 가리킨다. 그는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관계적이고 기능적인 견해들은 형상 그 자체보다는 형상의 결과, 기능, 역할 혹은 적용에 초점을 맞춘 견해들이다. 관계를 경험하는 것과 지배를 실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긴 하지만, 그것들 자체가 형상이라고 볼 수 없다. 형상은 인간의 구조 안에 있는 어떤 것으로서 인간의 목적 성취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들을 가리킨다. ... 형상 그 자체는 이 관계들과 이 기능이 작용하는 데 필요한 일단의 자질이다. 이 자질들이란 하나님의 자질들이 인간 안에 반영된 것으로서, 경배, 인격적 교류, 일을 가능하게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자질들을 소유한 존재로 생각한다면, 인간도 그와 같은 자질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때때로 공유적(共有的) 속성(피조물인 인간 안에서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발견될 수 있는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속성들이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을 구성한다. 이 속성은 어떤 한 가지 속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의 인간은 인격성 혹은 자아 전체를 포괄하는 어떤 본성을 가진다. 지성, 의지, 감성이 여기 포함된다. 이것이 인간의 형상으로서, 인간이 하나님, 동료 인간과의 거룩한 관계를 가지는 것과 지배를 실행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인간은 본질과 기능 면에서 분리할 수 없는 전체적 인간이다. 어떤 한 부분을 강조하는 대가로 다른 한 부분을 약화하거나 멸시하는 것은 인간을 전체로서 보지 못하게 한다. 본질과 기능은 인간을 드러내는 두 측면이고 인간을 바라보는 두 관점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결코 분리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 인간의 내면과 외면의 분리

인간의 구조와 기능을 분리하는 것 못지 않게 인간을 내면과 외면으로 분리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구조의 특정한 부분에 제한하려는 것도 문제가 있다. 이러한 태도는 인간의 전인성(全人性)을 약화하거나 부인할 염려가 있다. 이런 경향은 헬라 철학, 특히 플라톤의 영향으로 인해 생겨난 것으로서 기독교 인간이해에 많은 부정적 영향을 남겼고, 지금도 그 영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능한 한 신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분리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다. 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 인간 안에 있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모습을 덧붙여진 무엇으로 간주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동일한 모습은 인간의 어느 한 부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현존하도록 부름받은 그대로 인간은 그의 존재 전체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폰 라트(v. Rad)의 주장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부분적인 속성에 있지 않고 전 인간의 구조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형상은 창조주와 인간 간의 상응관계(대면성)로 푸는 베스트만(Westermann)도 인간존재 그 자체,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다. 이것은 인간존재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존재를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4. 인간의 전체성, 전인성, 연대성의 파괴

앞에서 지적한 세 가지 문제점은 앞의 세 이론들이 적용되는 구체적 현실 혹은 정치사회적 영역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일으킨다. 즉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전체로서 다른 피조물들과 달리 하나님에 의해 고귀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뒷받침하고 인간다운 사회를 창조하는 데 결정적인 구호로서 작용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종말론적 특징의 간과, 구조와 기능, 내면과 외면의 분리는 계급주의적 삶의 형태를 낳고,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의 본래적 의도와 달리 자신-이웃-사회의 파괴를 초래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형상을 종말론적 과정 안에 있는 열린 실체로 보지 않는 견해는 인간의 현 상태를 절대화하여 미화하거나 멸시하게 만든다. 먼저 이런 견해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신을 미래적, 종말론적 관점으로부터 희망 안에서 보게 하지 않고 현 상황으로부터 단정적으로 규정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신을 현 상황에서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 즉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 보게 하거나,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 즉 악마의 형상으로 - 바라보게 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이런 태도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태도에서 가장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 즉 인간은 다른 사람들, 특히 죄인이나 약자를 미래의 희망의 관점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비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 현 상황으로부터 단정하여 억압하고 멸시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형상을 구조와 기능으로 분리하는 견해는 인간의 특정한 부분을 미화하거나 멸시하도록 만든다. 즉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는 인간조차 무턱대고 인간으로 찬양하거나, 거꾸로 기능을 잘 행하지 못하는 인간을 멸시하는 결과를 낳는다. 인간에 대한 단순한 본질주의적 이해는 인간의 기능과 역할을 간과할 위험을 갖고 있는 반면에, 인간에 대한 단순한 기능주의적 이해는 인간의 존엄성을 쉽사리 기능과 역할 혹은 업적으로 환원할 위험을 갖는다. 전자는 인간계발과 교육, 상호부조와 협력을 무시할 위험을 갖는 반면에, 후자는 기능이 약한 신체, 인간들(어린이, 여성, 장애자, 미성숙자 등)을 제거하거나 억압, 멸시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위험을 범한다.

셋째로 하나님의 형상을 내면과 외면으로 분리하는 견해도 마찬가지로 인간을 계급화하는 데 기여한다. 이 견해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본성이 지닌 어떤 한 가지 양상으로 환원되는데, 신학사에서 그것은 특히 인간이 지닌 지성적 국면이나 영혼적 국면으로 환원되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은 각 사람 안에서 다르게 나타나고, 또 각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만약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지성으로 환원되면, 더욱 더 지성적인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형상을 더 많이 지닌 존재가 된다. 그래서 정신적인 일을 하는 자는 정치적인 일이나 육체적인 일을 하는 자보다 우월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즉 학자, 남자나 문명인은 다른 사람들, 즉 노동자, 여자, 어린이나 미개인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만약 하나님의 형상이 영혼으로 환원되면, 인간의 육체성은 죄악시되거나 멸시, 비하되고, 성직자는 가장 높은 계급을 향유하는 특권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육체성 혹은 감정이나 본능에 가까운 성향이나 그런 부류의 사람들(어린이, 여성 미개인)은 억압되거나 도태되어도 좋다는 정당화도 여기서 생겨난다.

이처럼 앞에서 거론한 문제점은 하나님의 형상의 본래적 의미와 목표와는 달리 인간 자신, 사회를 계급화하고 그래서 다른 종류의 존재들을 억압하는 데 이바지한다. 그래서 이것은 인간의 전체성, 전인성, 공동체성 혹은 연대성을 심히 훼손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는 일에 도리어 방해가 된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표상에는 하나의 혁명적인 잠재력이 숨어 있다. 인간의 특정한 부분이 아니라 인간 전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군주가 아니라 사람이, 남자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특정한 문화와 계급, 인종의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전 인류가 동등하게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대리자, 하나님의 광채로 창조되었다. 그리고 죄와 악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도록 부름받았다.

4. 삼중적 관계 안에서 본 '하나님의 형상'

우리는 앞에서 인간이 전체(全體)와 전인(全人)으로서 그리고 인류의 공동체성(共同體性)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향하도록 창조되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런데 인간의 종말론적인 규정, 전체성, 전인성과 공동체성(연대성)은 어떻게 드러나고 실현되는가? 인간은 고독한 개인으로서는 결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잠재적인 존재, 종말론적 지향성을 갖는 존재라고 할 때, 이것은 인간이 그 스스로 자신 안에서만 완결될 수 없으며, 완성의 도상에서 타자인 그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 무엇과 관계맺고 있다는 점을 내포한다. 인간이 본질과 기능으로서, 전체로서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본질은 기능 안에서 드러나고 기능을 목표로 한다. 존재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임무로 나타나지 않는 은사는 없고,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존재는 없다. 그런데 임무와 행동은 타자인 그 무엇을 전제하고 그것과의 관계를 요구한다. 즉 인간은 고독한 개인으로서는 결코 자신의 역할, 임무, 은사, 사명 혹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전인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이 정신이라는 것은 인간이 그 무엇을 향해 지향하고 개방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인간이 육체라는 것은 인간이 이 세계와 관련맺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정신과 육체로서 그 무엇과 관계맺는 존재이다. 그리고 인간의 공동체성도 타자와의 관계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혼자로서는 인간일 수가 없다. 인간은 관계 안에 있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의 진정한 의미와 본질도 '관계 안에 있는 인간'의 모습 안에서만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그 어떤 대상 안으로만 한정할 수 없고 환원할 수 없다고 앞에서 말했다. 그렇다면 그 어떤 대상 안에서 규정할 수 없는 인간은 바로 관계 안에서만 규정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무엇이라기 보다는 그 무엇과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본질과 기능은 그가 맺는 관계 안에서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을 내포한다. 우리는 이 점을 성서를 근거로 삼아서 규명해 보고자 한다.

1.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인간(창 1:26a)

인간창조의 텍스트는 일차적으로 인간에 관해 말하기보다는 인간창조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인간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기로 결심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결의("∼하자")와 상세한 규정(하나님의 형상에 따른 창조), 이 두 특징적인 요소는 창조주 하나님이 자기 자신과 관계되는 그 무엇을 만들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을 지시한다. 즉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과 상응하는 피조물, 그분이 말씀할 수 있는 피조물, 말씀에 귀기울이는 피조물을 창조했다는 데에 하나님의 형상의 일차적 본질이 있다. 즉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자신과 상응하도록, 다시 말하면,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서 무엇인가 일어날 수 있도록 창조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학적 개념이기 이전에 신(神)학적 개념이다. 먼저 그것은 창조되는 사람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기 전에, 자기의 형상을 스스로 만들고 그것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말한다. 먼저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과 관계를 맺는 하나님의 관계'를 말하며, 그 다음에야 '하나님과 관계맺는 인간의 관계'를 말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땅 위에 있는 그의 형상과 영광이 되게 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인간과 관계를 맺는다. 사람의 본질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이러한 관계로부터 생겨나며, 이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갖는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이 자신의 편에서 하나님과 상응하는 바로 거기에 있다. 자신의 영광을 땅 위에 있는 그의 형상 속에서 빛나게 하는 하나님은 자신을 이 형상 속에서 거울과 같이 반사한다. 인간은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대리자, 하나님의 대칭(반사),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책임있는 인간, 하나님을 사랑, 신뢰, 복종, 예배하는 인간, 하나님에게 기도, 감사, 응답, 반응하는 인간, 하나님과 교제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말한다(Coram Deo).

바르트에 의하면 이 관계의 기원의 비밀은 하나님 안의 세 존재방식의 인격적 대면이다.. 결정적인 연결고리는 '선택하는 하나님'(KDⅡ/2, 111.)과 '선택된 인간'(KDⅡ/2, 124.)인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은총의 선택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자유 안에서 사랑하는 자로 계시하며, 동시에 인간은 순종 안에서 응답하는 자로 계시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 간의 영원한 은총의 계약이 수립되었다. 유비의 완전한 내용은 이로부터 나오거나 이 중심의 주변에서 집약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불가피한 관계 안으로 놓여졌다. 따라서 하나님 없는 인간은 참 인간이 아니다. 예수 안에서 인간됨은 "하나님과 함께 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음은. . . 가능성이 아니라 인간됨의 존재론적인 불가능성이다." 예수 안에서 인간은 항상 하나님의 처분에 내맡겨졌다. 왜냐하면 인간은 원초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 안에서 "함께 선택되거나 이 은총을 향해 선택된 피조물"로서 인간은 감사히 청종하며 책임적으로 순종하는 자기헌신 안에서 존재한다. 바로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자유를 갖는다. 예수 안에서 계시된 진정한 자유는 결코 열려 있다고 하는 두 가능성 사이의 추상적인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 안에서 확증된 피조적 존재를 기쁘게 붙잡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모든 '현존' 속에 있다. 영혼 뿐만 아니라 사람 전체가, 개인 뿐만 아니라 인간 공동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트만에 의하면 성서의 전통에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가 나타나고 인식될 수 있는 한 장소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거울이 되는 '사람의 얼굴'이다(고후 3:18, 4:6, 고전 13:12, 출 34:33-35, 마 17:2, 계 1:16).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향하심, 그의 돌보는 관심, 목적을 지향하는 그의 현존을 보편적으로 상징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의 얼굴에 집약되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근원적인 규정과 함께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인식하리라는 종말론적 약속을 이미 갖고 있다. 이를 몰트만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관상학적 이론'이라고 말한다.

2. 남과 여, 동료인간과의 관계 안에 있는 인간(창 1:27)

하나님의 형상이 존재하고 실현되는 또 다른 관계는 사람들의 성적인 차이와 사귐에 있다. 인간이 남과 여라는 두 성(性)을 갖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간의 존재, 인간의 규정은 두 성 안의 그의 존재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은 여기서 사회적 존재로 이해되고 있다. "독자적, 개체적 인간은 반쪽 인간이다"라는 침멀리(W. Zimmerli)의 표현은 지나치지만(고독한 존재도 여전히 온전한 인간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 사귐으로 결정된 존재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사귐은 하나님 자신과 상응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사귐 속에서 자기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신적인 복수(우리)는 하나님 안에서도 구별과 통일성이 있음을 지시한다. 이것은 자신 안에서 풍부한 사귐의 관계를 맺는 하나님을 지시한다. 하나님 안의 이 구별과 통일성은 인간들의 사회적 삶을 결정한다. 인간을 남과 여로 창조한 하나님은 남성적인 하나님이나 여성적인 하나님일 수만도 없고 중성적인 하나님일 수도 없다. 이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녀의 삶의 사귐을 규정하는 삼위일체적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는 모든 종류의 이론적, 실천적 차별, 남과 여의 성적인 우위는 없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의 형상 속에서 나타난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의 '인성'의 의미는 동료인간을 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인간성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기는 존재가 아니라 당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신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당신을 향하는 존재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이것은 훼손된 인간됨이 아니라 진정으로 완성된 인간됨이다. 예수는 진정한 인간성의 본질을 드러내심으로써, 우리에게 다음을 가르친다: "모든 인간의 인간성은 그의 존재가 다른 인간들과 함께 있도록 결정된 점에 있다." 서로의 눈을 바라봄으로써만, 함께 말하고 서로에게 귀를 기울임으로써만, 서로 도움으로써만, 우리는 다른 인간들과 참으로 만날 수가 있다. "참으로 자연적인 인간은 ... 그의 마음의 자유 가운데서 그의 동료인간과 함께 하는 인간이다." 이러한 '인간존재의 파괴할 수 없는 연속성'(Kontinuum)은 남자와 여자의 이중성 안에서 그 자연스런 자리를 갖는다. 사실 이러한 연속성은 세계 안에서 소유할 수 있는 상태로서 인간의 임의처분의 권한에 내맡겨져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함에 근거해 있다. 여기서 바르트는 동료인간성의 지평 안에서 유비의 고리를 취한다: "인간 예수는 동료인간을 위한 인간이다. ... 인간은 동료인간과 함께하는 인간, 당신과 함께 하는 나, 여자와 함께 하는 남자이다."

3. 세계와의 관계 안에 있는 인간(창 1:26a, 2b)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에게 만물의 통치권을 부여한다. 만물의 통치권은 하나님의 형상에 '별도로 첨가된' 부차적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적 요소이다. 인간은 만물의 통치자를 이 땅에서 대리하는 존재이다(하나님의 통치의 대리자). 여기서 세계는 비신화화된다. 이 세계 안에는 어떠한 신성한 것들, 신비의 영역들도 없다. 인간은 모든 세계를 다스릴 수 있다(세계의 세속성). 그리고 인간에게 위임된 세계통치권의 성격은 무조건적인 우월성을 뜻한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류에게는 세계를 마음대로 취급할 수 있는 전권이 주어져 있다("정복하라, 다스리라."). 그리고 인간이 부여받은 통치의 대상은 우선적으로는 세계의 땅 전체이고 그 다음엔 동물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두 가지 오해가 있다. 세계 정복은 인간을 위험으로 몰고 가서는 안 된다. 환경의 오염이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파괴하도록까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세계정복이 기술이라는 새로운 신화를 통해 인간을 노에로 만들어선 안 된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이외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통치권에만 부여된 것이지, 인간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세계의 주인이 되려는 민족과 인종과 국가는 결코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대리자, 땅 위에 현존하는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괴물이 될 뿐이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서만 신적으로 정당화된 지배를 행사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람의 인격을 영과 육체로, 사람을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인류를 여러 계급으로 나누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과의 바른 관계는 단순히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아니다. 아담에게는 에덴 동산을 가꾸며 돌보는 임무가 주어졌다. 이것은 섬기는 자세의 지배, 보존을 의미하지 착취로 오해되어선 안 된다. 땅 위에 있는 사람의 지배는 하나님을 위한 하인들의 지배이며, 하나님을 위한 땅의 지배이다.

5. 신학적 인간학과 철학적 인간학의 대화

현대의 철학적 인간학은 우주 안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특수한 위치와 본질을 '세계개방성'(쉘러, 겔렌), '탈중심성'(플레쓰너)이라는 개념으로 요약하였다. 그 이후로 이제 '세계개방성' 혹은 '탈중심성'이라는 개념은 현대인의 인간이해에 결정적인 중심축을 이루는 용어가 되었다.

그렇다면 현대인의 이러한 인간이해를 신학은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는가? 신앙적-전승적인 기독교의 '하향적 인간학'이 실증적-철학적인 현대의 '상향적 인간학'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 것인가? 본인은 앞의 논문에서 이 문제를 차후의 과제로 남겨 놓은 적이 있는데, 여기서 이제 이 문제를 간단히 다루어 보고자 한다. 이 과제는 대체로 세 가지 가능한 관점에서 풀어 갈 수 있다.

1. 선교를 위한 접촉점의 가능성

첫째의 가능성은 '열린 인간 이해'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이해시키기 위한 선교적 혹은 대화적 '접촉점'(E. Brunner : Anknüpfungspunkt)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즉 '세계개방적이고 탈중심적인 인간'과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실현하는 인간'은 '열린 인간'이라는 접촉점 위에서 서로 만나고 대화할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래서 상향적 인간과 하향적 인간은 서로 비켜 가거나 배척하지 않고, 이러한 '열린 인간'이라는 공통분모 안에서 만나서 자신을 해명하고 변호하고 대화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접촉점을 위한 이러한 대화는 그리스도인의 편에서 선교를 위한 준비일 뿐이지, 아직은 선교의 목표가 제시된 것은 아니다. 즉 신학은 철학적 인간학의 결론을 갖고서 죄나 편견 혹은 전통이나 이기심 등으로 인하여 닫혀 있어서 복음을 배척하는 인간을 '개방시키는' 준비를 할 수는 있지만, 이 단계에서는 그에게 아직 복음이 무엇이며, 그가 왜 복음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설명할 수는 없다.

2. 질문과 대답의 상관관계의 가능성

둘째의 가능성은 현대인의 질문의 구조에 맞추어 복음의 대답을 해명해 주는 '상관관계'(P. Tillich : Method of correlation)의 가능성이다. 인간의 세계개방성과 탈중심성은 세계에 대해 혹은 세계를 넘어서 개방하는 인간, 중심적 자아를 넘어서 제 2의 자아를 지향하고 그것마저 무한히 넘어서는 인간을 지시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인간은 어디를 향해 자신을 개방하는가? 인간의 개방성은 무한한 자기초월성인가 아니면 그 어떤 대상을 향한 지향성인가? 이 질문에 대해 상향적 인간학은 대답을 줄 수 없다. 이것은 단지 자신을 초월하여 세계에 대해 무한히 열려 있는 인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어도, 세계를 넘어서는 개방성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하는지는 분명히 말할 수 없다. 물론 쉘러(M. Scheler)의 이론에서는 인간의 개방성은 인간 안에서 형성되어 가는 신(神) 자신의 개방성이다. 그래서 인간은 잠재적인 가능성 안에 있는 신과 함께 완전한 신성의 실현을 향한 범신론적이고도 신비적인 목표를 갖는다. 그러나 신앙을 전제하지 않는 여타 다른 인간학자들은 개방성과 탈중심성의 목표를 분명히 제시하지 않는다.

여기서 신학적 인간학은 그 '하나님의 형상'의 이론으로써 하나님과 인간과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진정한 인간됨의 규정을 대답으로 제시할 수 있다. 하나님에 의해 그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그 무엇을 향해 열려진 존재로 창조된 인간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신학적 인간학은 철학적 인간학의 구조와 상관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전자는 후자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신앙에 기초하여 대답한다. 즉 인간은 하나님과 이웃과 세계를 향해 열려진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인간은 이웃과 세계마저 넘어서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해 질문하는 존재라는 것을 복음은 말한다. 이런 점에서 판넨베르크의 견해는 옳다고 여겨진다: "인간의 무한한 의존성은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질문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세계를 향한 인간의 무한한 개방성은 오로지 세계를 넘어서는 그의 운명으로부터만 귀결된다. ... 환경과 동물의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와 같다. 하나님은 인간의 탐구가 안식하고 그의 운명이 성취될 수 있는 유일한 목표이다."

여기서 판넨베르크는 "주여 내가 당신의 품에 안길 때까지는 내 마음에 아무런 안식을 찾을 수 없었나이다"라고 고백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을 연상시키고 있다. 심지어 판넨베르크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개방성을 지향하는 현대의 인간학은 그 역사적 뿌리를 성서적 사고 안에 두고 있다는 것은 아마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물론 현대의 인간학자들은 대개 이런 결론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논의는 별도로 하더라도, 복음은 현대인에게 세계개방성 혹은 세계의존성의 목표로서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세계를 말할 수 있고, 또 인간을 포함하는 세계를 넘어서는 개방성의 목표로서 하나님을 제시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개방성을 갖는 전형적인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인간을 제시할 수 있다.

3. 지평확장을 위한 수용의 가능성

셋째의 가능성은 철학적 인간학의 분야에서 입증된 인간 존재의 현상을 신학적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임으로써, 신학의 차원을 유의미하게 확장하는 '기초신학적 인간학'(W. Pannenberg : Fundamentaltheologische Anthropologie)의 가능성이다. 이 방법론은 먼저 인간의 현상에 주목한 후에, 이것이 종교적-신학적으로 적합한 의미를 갖는지 질문하면서, 비판적으로 이것을 신학에 적용한다.

관계는 열림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관계는 쉽게 배타적 관계 혹은 닫혀진 관계로 변질될 수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교의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는 다른 경험의 인격적 관계나 타 종교의 비인격적인 신앙(신념)의 대상(法, 道 등)에 대해서는 배타적으로 닫힌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열린 사귐의 관계는 다른 종파의 그리스도인들이나 비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는 배타적 관계로 고착될 수 있다. 또 조화로운 세계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찬양적 태도는 혼돈스러운 세계나 다른 세계관에 대해서는 무조건 눈을 감게 만들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분명히 정당성과 함께 위험성도 갖고 있다. 그 위험성이란 자신의 특정한 신념을 절대화하고 스스로 신 아니 우상이 되는 온갖 종류의 독선주의적, 근본주의적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쉽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철학적 인간학의 '열린 인간 이해'는 닫힌 관계로 변질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인간-세계와의 관계의 지평을 확장하는 의미있는 역할을 할 수 있기에, 우리는 판넨베르크의 기초신학적 인간학의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비판적, 초월적, 신비적 신학이 긍정적, 계시적, 정언적(定言的) 신학을 무조건 부정하는 방향으로까지 나아가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말씀을 듣는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한다. 그러나 기초신학적 방법론은 자신의 체계나 신앙 안에 갇혀서 이 세계에 대한 적합성과 책임성을 상실한 신학과 인간을 교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변증법적(辨證法的) 기능을 갖는다. 신학과 그리스도인은 원칙으로 하나님과 인간과 세계에 대해 열려 있음으로써만,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책임을 다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를 존재의 속성으로 갖는'(E. Bloch) '희망의 하나님'(J. Moltmann)에 대한 신앙적 응답을 열린 사랑의 능력 안에서 행할 수 있을 것이다.

 

3. 죄인으로서의 인간

1. 죄인도 하나님의 형상인가?

타락한 죄인도 하나님의 형상인가? 기독교 전통에서 지금껏 "죄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주장이 자주 거론되어 왔지만(루터 등), 성서는 타락 후의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부른다(창 5:1-3, 9:6). 그러므로 인간은 범죄 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잃지 않는다. 즉 인간은 타락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재한다(v. Rad).

그러므로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다, 없어졌다, 취소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칼빈은 타락한 인간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 잔여물이 있다고 말하지만, 종종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 도말, 취소되었다고 말한다. → 비일관성? Hoekma, aaO., 78ff.). 오히려 우리는 죄인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이 박탈된게 아니라 변질되거나 왜곡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변한 것은 인간됨, 인간의 구조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역할, 기능의 방식(Hoekma, 147) 혹은 인간의 능력, 재질, 재능, 이런 능력들의 형태, 본질, 성향, 방향(바빙크, 앞의 책, 147 참조)이다.

2. 죄의 본질

1. 불순종으로서의 죄

창조의 면류관, 세상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에게 불순종한다. "죄는 하나님의 계명의 손상이고, [요한의 정의에 의하면] 율법위반이며 무율법(Gesetzlosigkeit)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이 갖는 구원의미를 왜곡て멸시함으로써 죄를 짓는다."(K Barth)

구약성서에서 죄는 본질적으로 '불순종'인데, 이것은 특히 죄를 의미하는 단어 Päscha(반항), Chet(계명위반) 등에서 잘 표현되어 있다.

신약성서에도 죄는 불순종으로 파악되었다(롬 5:19 -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이처럼 죄는 일시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다.

2. 불신앙으로서의 죄

불순종의 근거는 하나님의 주권에 맞선 인간의 자기소외(Selbstentfremdung)이다. 즉 불신앙의 뿌리에서 불순종이 자라난다. 불신앙은 모든 죄의 원형(Urgestalt)과 원천(Ursprung)이다(K. Barth).

불신앙이란 인간이 그의 전체성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행위를 의미한다. 하나님과의 실존적 일치성의 분열이야말로 죄의 근본적 특성이다. 불신앙은 인간이 자신의 중심을 신적인 중심에서 떼어 놓으려는 충동이다. 인간은 죄를 통하여 자신과 세계의 근거인 하나님과 맺고 있던 자신의 일치성을 상실한다(P. Tillich).

신앙이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의미한다면, 불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왜곡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실현된다면, 죄는 하나님의 형상의 변질로서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단절하려는 인간의 시도 속에서 이루어진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이 범죄 후에도 상실될 수 없듯이, 하나님과의 관계성도 완전히 상실되진 못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왜곡, 변질됨으로써 결국엔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 아니 하나님의 미움을 사는 것(롬 1:30), 하나님과 원수(관계) 맺는 것(롬 5:10, 골 1:21)의 형태를 띈다.

불신앙은 인간이 거듭 자기 자신으로 집중되는 것, 자기 자신 안에서 중심을 갖고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즉 인간의 자기중심성, 자기폐쇄성, 자기충족성을 뜻한다(K. Barth).

인간은 스스로 결정하려고 함으로써, 죄를 짓는다(인간의 자주성, 자율). 인간은 스스로 결정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현실적으로 분리된다(v. Rad). 이처럼 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 없이 살려는 인간의 불신앙을 의미한다.

3. 교만으로서의 죄

하나님이 금한 열매를 따먹으면 눈이 밝아져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뱀의 유혹이 의미하는 것은 창조에서 하나님에 의해 설정된 경계를 넘어서서 인간존재를 확대하는 가능성이다. 즉 순수히 인식론적인 풍부함의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인간 저 편에 있는 신비에 대하여 친숙하게 되고, 그 신비를 지배한다는 의미에서 생을 고양시키는 가능성이다. 즉 인간의 타락은 도덕적 악, 인간 이하의 존재에로의 전락에서가 아니라 영웅주의(Titanismus), 인간의 교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영역에서 일어났다(v. Rad).

인간의 범죄는 단순히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오류, 자기소외, 자기중심성, 자기폐쇄성만이 아니라, 광기와 허풍(영웅주의), 하나님의 영광의 찬탈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고 그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한다. 이러한 혼동 속에서 죄인은 자신을 사이비(거짓) 신(Pseudogottheit)으로 만든다(K. Barth).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Coram Deo)은 하나님과 같이(Sicut Deus) 되려고 한다. 인간은 뱀의 유혹 - "너희는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Eritis sicut Deus) -에 넘어가서, "하나님에 대한 순종보다는 자율(자주)성 안에서 더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v. Rad)

R. Niebuhr에 의하면, 죄의 첫 번째 형태인 교만에는 네 가지의 종류가 있 다.

① 권력의 교만 : 이것은 자기만족, 자기우월을 주장하고 자기들이 안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교만.

② 지적 교만 : 이것은 진리에 대한 자신의 이해의 한계성, 편파성을 알지 못 하고 자신의 지식, 신앙이 남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 람들의 교만.

③ 도덕적 교만 : 이것은 타인이 자신의 높은 독단적인 표준에 일치하지 않는 다는 이유로 그를 정죄하는 사람들의 교만.

④ 정신적(혹은 종교적) 교만 : 이것은 자신의 도덕적 교만을 신적인 권위로 인준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의 교만이다.

< R. Niebuhr,「The Nature & Destiny of Man」, 186ff.>

죄는 온통, 항상 어디서나 교만이다. 인간의 교만은 불순종, 불신앙의 구체적 형태이다(Barth ,그러나 불순종, 불신앙이 인간의 교만의 구체적 형태가 아닐까? 즉 교만은 이것들의 뿌리가 아닐까?)

K. Barth에 의하면, 죄는 교만만이 아니라 동시에 태만, 기만이기도 하다.

교만은 죄의 능동(행동)주의적 형태, 영웅적, 프로메테우스적 형태이고,

태만은 죄의 수동(정적)주의적 형태, 비영웅적 형태이며,

기만은 죄의 이데올로기적 형태이다.

교만은 불순종, 불신앙의 구체적 형태이고,

태만은 은총에 거슬리는 경솔, 슬픔, 절망을 선택하는 행위이며,

기만은 부정과 파괴만을 일삼는 행위이다.

4. 정욕(육욕, 색욕)으로서의 죄

유혹설화에는 범죄가 행해지기 전의 미묘한 감정이 설명된다. 금단의 열매는 인간에게 "먹음직하다"는 야성적인 충동과 "보기에 탐스럽다"는 심미적 충동 그리고 "영리하게 해 준다"는 세속적 명예의 충동을 일으킨다(요일 2:16 - 육체적 쾌락, 눈의 쾌락, 세속적 자랑). 즉 죄는 인간의 정욕으로 표현된다(v. Rad).

Augustinus는 정욕(Concupiscentia 혹은 cupiditas)을 죄의 결과, 형벌로만 이 아니라 죄 그 자체와 새로운 죄의 원인으로도 보았다(서로 다른 해석의 동기). 라틴 스콜라 철학자는 죄와 정욕을 구분했지만, 종교개혁자들은 정 욕 자체를 죄로 이해했다.

Tillich - 정욕도(불신앙과 교만 외에) 죄의 또 다른 표지로서 "현실 전 체를 자신의 자아에게로 병합하려 하고, 전 세계를 자신 안으로 끌어 넣으 려고 하는 무한한 갈구이다."

Niebuhr - 육욕은 죄의 한 형태이다. 육욕(Sensuality)은 권력이나 지식 혹은 미덕을 통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신체적 쾌락을 통해서 자기를 찬양 하는 방법이 될 수 있고, 어떤 의미에서 교만으로부터 유출된다.

K. Rahner - 육욕은 가치와 선에 대하여 의식적으로 취하는 모든 반동적 입장이다(Zum theologischen Begriff des Konkupiszenz, in : H. Ott., 신 학해제, 171.).

바울도 죄를 '탐욕'으로도 설명한다(롬 7:7 - "탐내지 말라는 율법이 없었 더라면, 탐욕이 죄라는 것을 나는 몰랐을 겁니다. 죄는 이 계명을 기화로 내 속에 온갖 탐욕을 일으켰습니다.")


3. 죄의 기원(?)

타락설화에는 '뱀'이라는 동물이 유혹자로 나타난다. 이 뱀은 무엇 때문에 타락설화에 나타나는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무슨 역할을 하는가?

여기서 뱀은 하나님의 대적자, 하나님에게 맞서는 악마 혹은 창조자를 거역하는 존재라고 이해하는 신화적 해석은 거부되어야 한다. 이 본문은 그러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 뱀은 오로지 유혹하는 과정에서만 나타난다(Westermann).

설화자가 생각하는 뱀은 '악마적' 세력의 상징이 아니며 더욱이 사탄의 상징은 아니다. 뱀의 유혹과정은 비신화적인 과정으로 나타난다. 설화자는 가능한 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려고 하기 때문에, 악을 어떤 방식으로든 객관화하지 않으려고 매우 주의하며, 그래서 그는 악을 가능한 한 외부에서 온 세력으로 인격화하지 않았다(v. Rad).

뱀은 '악의 기원'에 관한 물음에 어떤 의미를 주는가? 여기서 악의 기원을 인식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악의 기원은 여기서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악의 기원에 대한 원인론은 전혀 없다(Westermann). 설화전체에 걸쳐서 이 인간의 적대자는 규정하기 어려운 익명 속에 있으며, 해명되지 않고 있다(v. Rad).

W. Zimmerli : "유혹은 절대적으로 설명불가능한 것으로서 갑자기 하나님 의 선한 창조 안에 나타난다. 유혹은 수수께끼로 남겨져 있다."(Komm, z.St., in : Westermann, 325)

그렇지만 우리는 뱀을 팔레스틴 사람들의 생활권 안에서 이해해 보려고 시도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의 생활권에서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역할을 하는 동물학적인 뱀의 종류로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지혜로운 동물? - 아프리카의 설화에도 인간에게 영생을 약속하지만 불멸의 상실을 말하는 전달자인 동물이 나타난다. 그는 허물을 벗음으로써 생명을 연장하기 때문에, 생사를 넘어서는 지식을 갖고 있다. Westermann, 324), 일종의 예언자적 통찰력에 의해 뱀으로 형상화된 악을 보았다. 창 3:14-15의 뱀과 인간의 투쟁설화는 악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지는 않지만, 피조세계 안에 기존해 있는 것으로서 바로 인간을 노리며 숨어서 엿보고, 도처에서 인간과 생사를 건 투쟁을 벌이는 일이다(v. Rad).

그렇지만 뱀으로 상징화된 악을 우리는 저자가 살았던 시대의 배경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뱀은 저자시대에 성행한 풍산신앙에서 생명을 표상하는 통속적인 상징이었다. 그러므로 뱀은 그 시대에 가나안 사람들의 풍산신앙의 배후에서 준동하던 악마를 표상한다(P. E. Ellis, 김원주 역, 연대기 작가의 역사, 유다의 예언자들, 분도, 114). L. Hartmann은 「낙원에서의 죄」라는 논문에서 "저자는 전 인류의 원조의 죄를 그 자신의 시대에 알고 있었던 범위 내에서 전 인류의 근원적 죄로 묘사하였다. 이 죄는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을 피조물에게 돌리는 이른 바「자연 숭배」였다. 저자의 생각에 이교도들이나 하나님 예배에 불충실했던 저자 자신의 동족들이 자연 신을 달램으로써 사람과 짐승의 다산, 농작물의 풍작을 확실케 하기 위하여 거행하였던 징그러운 온갖 의식, 마술은 뱀을 의인화하여 주술적 상징으로 삼았다. 그러나 저자는 오직 야훼 하나님만이 생명나무의 참된 열매를 주실 수 있다고 가르쳤다"고 말한다(같은 책, 114).

(Westermann은 악의 근원을 이스라엘과 대적하는 종교에 있다는 해석을 문제시한다. 창 2-3장에서 아담은 이스라엘을 대표하지 않고 인류를 대표한다. aaO., 325)

※ 물론 뱀은 타락설화가 기록되기 오래 전부터 남근(男根)의 상징 중의 하나였다. 뱀을 풍요의 신으로 숭배한 가나안 사람들은 남근숭배를 통하여 다산(多産)신앙을 표현했는지도 모른다(우리나라의 남근제의, 특히 미륵불에 관련된 출산신앙).

그렇지만 성적인 주제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 - 불순종의 주제 안에 포함된다. 즉 죄가 성적인 것을 의미하기 보다는, 원인론적인 견지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약에 따라 살기를 거부하는 하나의 전형을 다루기 위해 뱀의 상징이 사용되었다.

<존, L. 토펠 , 홍성현 역, 평화의 길., 나눔. 80 참조>


4. 죄의 결과 <삼중적 소외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의 왜곡>

범죄(타락)의 결과는 인간에 내린 하나님의 형벌(인간의 죄책)로 경험되든지, 아니면 인간성의 부패(타락, 오염)로 경험되든지 간에, 하나님의 형상(본래적 인간됨)의 왜곡(변질)으로 나타난다.

아담의 범죄는 창조질서의 교란을 초래했는데, 이 교란은 특히 하나님의 형상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즉 하나님의 형상은 삼중적 소외(하나님 소외, 인간 소외, 자연 소외) 중에서 경험되며, 이 소외는 또한 여러 가지의 부정적 결과(물화 등)를 낳는다. 하나님의 형상의 왜곡은 실로 삼중적 관계성 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1. 하나님 소외(하나님과의 교제의 파괴)

a) 창 3:8f. : 인간은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도피한다.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은 창조주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착란의 표징이다. 이 때부터 두려움은 부끄러움과 함께 인간에게 일어난 치유될 수 없는 타락의 상흔이 되었다(v. Rad).

b) 창 3:22 : 인간은 동산으로부터 추방된다. 인간의 의존관게를 벗어났으며 복종을 거부했고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독립했다. 더 이상 복종이 아니라 그의 자율적 의식과 의욕이 자신의 생의 권리가 되었으며, 이로써 그는 자신을 피조물로 이해하기를 중지하였다. 생명나무를 격리한 것은 형벌인 동시에 인간의 숙명적 죽음에 대한 새로운 확증이다(v. Rad).

⊙ 보론: 죽음은 하나님의 형벌인가?

창 3:19("너는 흙[먼지]이니 흙[먼지]으로 돌아가야 하리라")에서 죽음은 마치 범죄한 인간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형벌처럼 기록되어 있다. Augustinus과 라틴 교부들은 랍비와 바울의 이론에 따라 고난과 죽음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로 생각했다[Hoekma도 이에 동조한다. aaO., 233f. 참조]. 그러나 몇몇 교부들(Clemens, Origenes)과 현대 신학자들(K. Barth, K. Rahner, Moltmann 등)은 이런 인과론적 관계를 부인한다.

v. Rad : 인간 안에 질료적인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인간은 죽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할 수 없듯이, 인간이 '불멸할 수 있는 소지'를 상실했 다고 말할 수는 없다. "너희는 죽으리라"고 창 2:17이 말하고 있지만 죽음 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었다는 데 설화자의 관심이 있 었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① 죽음의 현실성이 언급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적어도 인간이 이런 종말을 알게 되었으며 그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 게 되었고, 이것을 알게 됨으로써, 그의 삶 전체가 우울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음을 뜻한다. ② 범죄 이전에는 인간에게 그런 말씀이 한 번도 들려진 적이 없었으며, 그 때문에 이 말씀은 주제상으로 특별한 중요성을 가지고 형벌의 말씀에 속하게 되었다.

Hoekma : 육체의 죽음이 죄가 가져온 결과의 하나이지만, 삶의 가장 깊은 의미가 하나님과의 교제이기에, 죽음의 가장 깊은 의미는 타락 이전에 인간 이 누렸던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이 분명하며, 이 단절은 영적인 죽음이라 는 사실을 덧붙여야 한다.

c) 롬 1:20f, :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대신에 우상들을 섬기게 되었다. 옛날 사람들은 나무와 돌로 우상을 만든 반면에, 현대인들은 그들이 경배해야할 그 무엇인가를 찾아서 그 옛날보다 훨씬 미묘한 형태로 우상을 만들고 있다(자기 자신, 인간 사회, 국가, 돈, 명예, 소유, 쾌락과 같은 우상들/ Hoekma).

K. Barth : 인간의 우상생산(국가, 문화, 자연, 맘몬, 인물, 에술과 학문, 교 회와 미덕 ? 인간은 이러한 초상들 앞에서 하나님에게 모호한 경배를 드린 다. Rö-1. 18.) - 하나님은 자기 중심적인 소유욕구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인간의 물신숭배는 인간의 사고의 행동을 물화(物化)한다. 인간이 하 나님을 소유하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우상들에 의해 소유되고, 그래서 그들 에게 예속된다. 이로써 인간의 사고와 행동은 소외된다(단네만, 칼 바르트의 정치신학, 57ff. 참조)

하나님과 인간의 혼동, 하나님의 행동과 인간의 행동의 혼합, 물화되고 소외 된 인간(앞의 책 105f 참조), 화해하지 못한 사회(자본의 지배, 자본주의 안 의 인간 존재의 소외와 물화, 관료주의화, KD Ⅲ/4, aaO., 169ff.)

2. 인간소외(인간 공동체의 파괴)

a) 창 3:12f : 서로 사랑하고 돕도록 맺어진 남녀의 관계(창 2:2 -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부부의 반려관계가 죄책의 전가와 더불어 파괴된다. 죄는 함께 저지르지만, 그 죄는 인간들을 하나님 앞에서 결합시키는 게 아니라 개별적으로 고립시킨다(v. Rad).

서로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던 그들이 이제 부끄러워 하게 된다. 부끄러움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혼란의 신호이다(v. Rad).

부끄러움(수치)은 불신에서 나타난다. 이제 남자와 여자는 서로 이용하고 악용하려고 한다(H. Wolf).

b) 창 3:16f. : 여자는 이제 남편의 굴욕적인 지배를 받는다. 남자에 대한 그리움은 성취되거나 안식을 얻지 못하고 굴욕적인 지배를 받게 된다. 그리고 여자는 임신의 수고, 분만의 고통을 받는 고달픈 삶을 살게 된다.

c) 사랑의 파괴 : 간음, 매음, 계간, 수간, 이성모방(동성애), 이런 것들은 창조된 인간성을 위협하고 혼란에 빠뜨리는 것들이며, 피조된 인간성 속에 나타난 사랑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들이다. 하나님과의 파괴된 관계가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곳이 바로 부부생활의 파괴이다(H. Wolf).

d) 형제살해(가인의 아벨 살해), 인간살상(전쟁), 도둑질, 강탈, 무관심, 소외 등.

K. Barth : 화해되지 못한 사회의 특징

① 사적(私的) 존재, 강탈자적(强奪者的) 존재의 이기주의 실현(재산획득과 증식이 지배하는 사회).

② 생존투쟁, 갈등과 적대관계의 사회.

③ 관료화된 사회.

④ 지배-복종의 관계가 수립되는 사회.

요약 : 자유와 평화가 없는 사회, 물화되고 소외된 사회, 형제가 없는 사회, 비사회적인, 원자론적인, 적대주의적인 사회, 은총을 상실한 사회(단네만, aaO., 194f.)

3. 자연소외(자연질서의 파괴, 교란)

a) 창 3:17-19 : 남자의 형벌은 생의 깊은 중심 즉 생계를 위한 그의 노동, 활동, 염려에 내려졌다. 그러나 그 저주는 남자 자신에게 내려진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깊은 데, 즉 모든 인간생활의 가장 깊은 토대, 즉 남자의 활동의 가장 기본적인 영역인 땅에 내려졌다. 여기에도 피조세계에 깊은 혼란을 가져오는 균열, 적대가 있다. 인간과 땅 사이의 유대관계에 단절, 소외가 일어났는데, 이것은 인간과 경작지 사이에 있는 무언의 고투로 표현된다(종신토록 수고함,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냄, 땀 흘림).

그러나 노동 그 자체가 저주로 평가되진 않는다. 노동은 낙원에서도 부과되었다. 단지 노동이 생을 매우 고달프게 만들고, 노동이 실패의 위험 속에 있으며, 노동의 소득이 노력에 비해 너무나 보잘 것 없다는 사실을 설화자는 피조세계 안에 있는 불협화음으로 묘사한다. 이 어구는 인간과 땅 사이의 불가해한 관련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상세히 해명하지 않고 단순히 하나의 사실로 제시할 뿐이다. v. Rad).

b) 인간의 기술남용(지배욕과 불안으로 인한 기술적 가능성의 남용 - 바벨탑 건설!), 자연착취, 오염.

?H. Wolf - 인간이 지배해야 할 물질에게 오히려 인간이 지배를 당할 때에는 언제나 포악한 비인간(Unmensch)이 나타난다(AaO., 375).

5. 원죄(原罪)의 문제와 본질

1) 원죄론은 교의학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가장 어려운 주제 중 하나이다. 원죄론은 인간의 범죄가 단순히 최초의 한 인간 아담의 개인적인 행위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의 집단적, 보편적 행위임을 설명하려는 신학적 개념인데, 이 개념(혹은 표상)의 뿌리는 바울의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롬 5:12f -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

바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일어난 구원의 부편성은 죄의 보편성을 뒷받침해 준다. 즉 죄의 보편성은 구원의 보편성의 전제이다(롬 11:32, Vgl. 3:23f). 그리고 그에게서 보편적인 죽음의 사실이 죄의 보편적 확산을 뒷받침하는 주장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죄는 죽음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로 왔다(롬 5:12).

이처럼 바울은 아담을 인류의 죄의 창시자와 대표자로 본다. 그렇지만 바울은 유전적인 질병처럼 세대를 따라 전달되는 죄의 유전적 숙명에 대해서는 말하진 않는다. 죄의 보편성은 아담의 형태로 설명되고, 아담에게서 유추된다. 모든 개개인은 그 스스로 죄를 짓고 죄의 결과를 겪는다. 그렇지만 바울은 죄의 보편성을 죽음의 보편성에 근거시키면서 죄의 보편적 확산을 말한다. 이로써 전 인류는 아담과 관련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 명제의 근거를 설명하지 않은 채, 단순히 아담과 전 인류의 집단적 관련성을 말하고 있다. 아담은 모든 인간의 원형(Urbild), 총괄개념(Inbegriff)으로 여겨진다(W. Pannenberg).

2) 그리스 교부들은 아담의 죄를 전체 인간의 행위로 이해하면서도, 이에 죄의 유전사상을 결합시키진 않았으나 라틴 교부들, 특히 터툴리안, 아우구스티누스는 유전죄 이론을 대표하였다.

Augustinus : 우리 모두가 범죄한 그 한 사람이었기에 우리 모두는 그 한 사람 안에 있는 것이다. ? 이미 씨눈 상태의 본성이 존재해서 그로부터 우리가 번식되어지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City of God, 13권 14장).

종교개혁자 Calvin Luther도 유전죄 이론을 Augustinus의 노선에 따라 주장하고 있다.

Calvin : 불순한 씨의 후손인 우리는 날 때부터 죄에 전염되어 있다(371). 썩은 뿌리에서 썩은 큰 가지가 나왔으며 여기서 나온 작은 가지에 부패가 전달되었다. 이와 같이 부모에게서 자녀가 부패했고 자녀는 다시 그 후손에 게 대대로 병을 옮겨 주었다. 바꿔 말하면 아담에게서 시작한 부패는 선조 로부터 후손에게 전달되어 끊임없이 흘러간 것이다. ? 어거스틴이 말하는 것과 같이, 죄 있는 불신자든 죄 없는 신자든 사람은 썩은 본성에서 자녀를 낳기 때문에 무죄한 자녀가 아니라 유죄한 자녀를 낳는다(기독교강요, 상 373f).

Luther : 시편 31:7에 따라 죄는 자연적인 출산의 과정에 의해 번식된다. 이것은 결혼(성교)과 출산행위가 죄라는 뜻이 아니라 씨의 죄성을 뜻한다. 죄성을 갖는 아담의 씨로부터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한다. 우리는 아담의 혈 통으로 인해 죄인이 된다(P. Althaus. Theo. M. Luthers, 144).

3) 그러나 오늘날 유전죄로서의 원죄이해는 문제시되고 있다.

a) 바울은 죄의 보편성을 말하지만, 죄가 '전가'된다든지, 아담의 죄로 인한 저주가 어떻게 우리에게 전가되는지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다(Hoekma, 275).

b) 유전죄는 우리에게 우리가 범하지도 않은 죄에 대한 죄책을 전가시키고 있다.

c) 만약 우리의 죄를 시간적て역사적으로 아담에게 소급한다면, 우리의 죄과는 우리의 죄과가 아니게 될 것이며, 원죄는 우리에게 잘못을 지우기 보다는 오히려 그 잘못을 면제해 주게 될 것이다(Pöhlmann, 교의학, 236).

d) 전통적 원죄론은 원죄와 자범죄, 존재적 죄와 행위적 죄의 일치성도 강조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써 죄인이 되는 것이고, 죄인이 됨으로써 죄를 짓는다(E. Schlink, in : 앞의 책, 238).

4) 원죄론의 재해석

원죄는 역사화, 고정화, 인과화, 생리화되어서는 안 된다. 원죄는 생리적 유전의 모델로 설명될 수는 없고 인간의 일치성(P. Althaus), 집단적 인격(J. Fraine), 죄의 연루성(J. Weismayer), 죄의 불가피성(E. Kinder), 죄의 초주체성(H. Thielicke), 비극적 보편성(P. Tillich)의 모델로 설명될 수 있다.

H. Thielicke : 원죄의 개념은 죄 속에서 인격적인 것과 초인격적인 것이 논리적으로 풀 수 없이 서로 얽혀 있음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원죄는 행 위죄와 다른 또 하나의 형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명확한 특징, 즉 죄의 초주체성을 의미하는 것이다(Theo. Ethik. Ⅰ, 465,)

H. G. Pöhlmann : 원죄는 죄가 단지 인간'으로부터'만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 '너머로' 온다는 사실, 인간은 단지 죄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그 '대상' 이라는 사실, 죄는 단지 악한 '것'일 뿐만 아니라 악한 '자'라는 사실을 의미 한다(교의학, 239).

L. Scheffczyk : 원죄는 인간존재 안에서 죄가 인격적인 행위이면서도 힘, 숙명으로 경험됨을 신학적으로 깊이 표현하는 용어이다(Einführung in die Schöpfungslehre, 148).

 

 

4. 전인(全人)으로서의 인간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또한 인간을 어떤 측면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크게 달라진다. 인간을 다른 사물이나 동물과 같이 보느냐, 혹은 개인의 측면에서 보느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보느냐, 아니면 신과 관련된 존재에서 보느냐 등에 따라서 인간을 때로는 물질로, 때로는 영혼이나 정신으로 규정하고 설명해 왔다. 그리고 이 물질, 영혼과 정신의 기능과 그 상호관계도 다양해게 설명되어 왔다. 인간 존재의 신비를 풀려는 인간의 철학적 노력은 "인간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느냐?"의 문제와 관련되어 다양한 답변을 내어 놓았다.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입장들을 소개하고 평가하기로 하자.

1. 철학사에 나타난 다양한 견해들

1. 영혼의 불멸성과 우월성에 입각한 이원론(플라톤)

플라톤은 정신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보다 우월하다고 본 전형적인 철학자였다. 더욱이 그는 영혼을 몸과 반대되는 그 어떤 독특한 것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몸이 영혼을 방해하고 오염하기까지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인간은 몸으로부터 분리되어야 깨끗해진다. 감감적인 지각은 영혼을 제한하며 영혼이 진리와 접촉하는 것을 막는다.

영혼은 욕망으로 생긴 몸이라는 감옥 속에 갇혀 있다. 그래서 플라톤은 죽음조차도 영혼이 몸으로부터 벗어나는 행복한 탈출의 과정으로 보았다. 영혼은 몸과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에, 다른 세계를 향해 항해해야 한다. 영혼은 이 지상의 현실보다 먼저 존재해 있었기 때문에 지상의 몰락과정에 편승되지 않는다. 몸은 사라질 수 있으나 영혼은 계속 존재한다. 영혼은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 정신적인 세계, 신적인 세계와 관련맺고 있다. 그래서 플라톤에게서는 영혼의 윤회와 재탄생의 사상도 발견된다.

"플라톤의 '죽음의 명상'은 영혼이 우위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사상에 근거한 삶의 태도는 스토아의 삶의 철학 속에 나타난다. 행복과 고난, 건강과 질병, 삶과 죽음에서 흔들리지 않는 감정과 의연한 태도, 영혼의 무감정 속에 부동요성의 힘이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죽음의 명상'은 신체의 저질성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몸의 삶으로부터 생동적인 관심을 빼앗으며, 몸을 영혼과 무관한 껍질로 하락시킨다. 그것은 몸을 마치 땅의 찌꺼기와 같은 것으로 탈정신화하며, 이 찌꺼기를 가지고 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게 한다."(몰트만,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294) 이런 사상은 인간의 존재를 매우 좁게 한정시키며, 몸이나 이 세계를 죄악시하거나 경시하는 사고를 조장한다. 그리고 영혼이 몸 속으로 들어온 곳을 종종 타락의 결과로 보게 한다. 몸과 영혼의 이원론은 오랫 동안 서구사상, 특히 기독교 교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혼불멸의 교리, 구원을 몸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보거나 몸이나 이 세계와 무관한 순수히 정신적이고도 내세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 몸이나 지상적인 것과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금욕적 태도 그리고 성(性)을 비하 억압하거나 죄악시한 것(성욕을 육체적 정욕의 죄로 규정한 것) 등은 의심할 나위도 없이 플라톤 사상의 영향에서 유래한 것이다. "몸의 멸시와 과소평가 때문에 이 관념은 성서의 창조신앙과 결합될 수 없다"(몰트만, 294).

2. 영혼과 몸의 분리와 결합을 강조하는 이원론(데카르트)

데카르트는 매우 분명하게 몸과 영혼의 분리를 주장하였다. 그는 영혼을 정신적인 것, 사유하는 본체로 보고, 몸을 물질적인 것, 연장적인 본체로 보아서, 이 양자를 구분하고 대치시켰다. 정신은 분할할 수 없으나 몸은 분할할 수 있다. 영혼이 없는 몸은 복잡하고 생동력있는 기계이나, 영혼은 의지와 오성, 의심과 상상력 등을 포함하는 사유작용이다. 그래서 데카르트가 이해하는 인간은 마치 '기계 속에 들어 있는 유령'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는 영혼과 몸의 결합을 매우 강조한다. 인간은 통일체이며, 천사가 인간의 몸 속에 들어 있는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영혼이 인간의 몸 속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배 안에 있는 선장'의 모델을 사용한다. 그러나 영혼과 몸의 결합은 선장과 배의 결합보다 훨씬 더 강하다. 선장은 배에 생긴 구멍을자신의 바깥에서 관찰할 수가 없지만, 인간의 영혼은 자기 몸에 생긴 상처를 확인하고 관찰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고통과 불안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영혼이 몸에 첨가된 것이라는 이전의 견해를 수정했다. 몸이라는 기계도 우리와 동일한 감정과 욕망을 알며 진정한 인간을 형성할 수 있게 한다. 이리하여 데카르트는 인간의 통일성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영혼과 몸의 결합은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됨에 본질적인 것이다. 인간은 영혼과 몸의 통일으로서 자기 충족적인 전체, 하나의 본체를 형성한다. 그렇다고 영혼과 몸이 본체의 절반인 것은 아니다. 영혼과 몸은 각각 완전한 본체이지만, 인간의 전체성에서 볼 때는 불완전한 본체이다. 그렇다면 이 두 본체가 어떻게 결합되어 하나의 완전한 본체를 이루는가? 데카르트는 몸과 영혼이 송과선(松果腺)이라는 기관을 통하여 상호작용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이러한 견해는 그 이후 많은 철학자들의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비물질적인 영혼이 어떻게 몸에 작용할 수 있는가? 영혼이 위치한 자리(송과선)를 지적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영혼은 비공간적이고 몸의 어느 곳에도 자리잡고 있지 않다고 말한 데카르트의 견해와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또 몸을 따로 떼어서 자동적인 기계로 보는 이원론적 인간관은 구체적인 현실 전체를 포괄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하나의 견해일 수 밖에 없다. 비록 그가 인간을 일체적으로 보려고 하는 강한 흔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늘 체험하는 영혼과 몸의 일체성을 철학적으로 허용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사람의 주체성이 연장되지 않는 사유 속에 자리잡고 있다면, 사람의 몸은 자동기계들의 대상적 세계로 전락한다. 구체적이고 사유하는 나와 몸의 결합은 완전히 우연적인 것이며 나에게 중요하지 않게 된다"(몰 296). 철학적으로 보건대 영혼은 몸과 관계없이 스스로 존재할 수 있고, 이와 마찬가지로 몸도 영혼과 상관없이 스스로 몸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사유하는 나는 몸 없이도 존재할 수가 있다고 말하였고, 이런 방식으로 영원을 생각했다. 양자의 상관관계는 철학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것이다. 영혼과 몸의 결합은 하나님의 의지일 뿐이다.

그러나 영혼과 몸의 결합은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고유한 본질적인 측면이 아닌가? 진정한 인간의 육체성은 이미 영혼을 함축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사람을 정신화시키는 데카르트의 방식은 육체를 거짓된 비정신성 속으로 추방시키는 대가를 치루고써야만 얻어질 수 있다. 그리고 데카르트에게서 영혼과 몸의 관계는 일방적인 지배와 소유의 관계로 묘사된다. 나는 사유하는 주체이며 나는 나의 육체를 소유하고 있다. 나는 명령하고 이용하는 입장에서 나의 소유물인 나의 육체에 대하여 대치하여 서 있다"(몰, 296이하).

3. 몸의 실체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유물론(포이어바하)

포이어바하는 다른 유물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몸의 배후에 신비로운 다른 존재(영혼)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그에 의하면 신학은 곧 인간학이다. 왜냐하면 신의 이념은 인간성의 투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는 영혼이나 정신의 존재를 부인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틀림없는 유물론자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을 마치 기계에 불과한 것으로 보기 쉬운 '유물론'이라는 말보다 '유기론'이라는 말을 더 애호했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을 살아 움직이는 유기적인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오관(五官)과 연결될 수 있는 것만이 현실적이다. 몸과 영혼, 이 두 본체는 인간 오성이 고립시킨 추상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둘이 어떻게 상호 작용하느냐는 물음은 공허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감각적인 상상 속에서 그려진 사물들 간에는 상호작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감각적인 존재에게만 가능하다. 포이어바하에게는 몸이 곧 영혼이다. 몸은 타인 앞에서, 타인과 더불어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인간이다.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서 하나의 부대 현상이요, 자기 존재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생긴 주관적인 착각에 불과하다. 인간은 타인과의 상호관계 가운데서도 순전히 물질적인 존재요, 유기적인 존재이다. 주관성의 차원에서는 비물질적이고 정신적인 것도 객관성의 차원에서는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것이다. 이처럼 포이어바하는 영혼을 궁극적으로 육체적인 범주로 환원시킨다.

유물론적인 인간관은 인간을 한 특정한 관점에서 볼 때 가능하다. 인간을 대상으로 고정시켜 버릴 때, 개인의 산 경험의 세계를 무시해 버릴 때, 인간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묵과해 버릴 때, 유물론적인 인간관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유물론적 인간관은 사실 상 인간을 연구하기 전에 미리 자리잡고 있던 전제에 사로잡혀서 선택한 결과이다. 여기서 채용한 방법은 물질적인 대상을 파악하기에 알맞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정신적인 요소를 모두 부정하는 것 외에는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없다. 주체적 상황을 무시해 버리면, 몸은 곧 물질적이고 유기적인 연구 대상으로 밖에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인간의 불가사의한 면은 유물론의 결론으로써만 답변될 수 없다. 인간을 그냥 주어져 있는 대상으로 관찰하는 것이 철학적으로 만족스러운 것인가? 인간이 주체임은 인간학적 성찰에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이 문제에서 우리의 일상 생활의 산 경험을 팽개쳐 버리고 어떤 특정한 방법을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일방적인 처사가 아닐까?

4. 정신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유심론(버클리)

아일랜드의 철학자 버클리의 사상은 현실 전체를 정신적인 측면에서 설명하려는 여러 입장들 중에서 매우 흥미롭다. 왜냐하면 그는 결국 물질의 존재를 부인하고 인간의 정신을 가시적인 세계의 중심으로 보기에 이르기까지 극단적으로 흘렀기 때문이다.

버클리의 결론은 물질이란 존재하지 않고 정신(특히 하나님과 인간의 정신)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존재란 무엇이 인간에 의해 지각된다는 뜻이다. 버클리는 먼저 나의 밖에 존재한다고 하는 소위 '외재성'(外在性)의 관념이 허구에 불과한 것임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외부 세계를 듣고 보는 행위를 촉감이나 촉감의 예측으로 환원해 버린다. 그에 의하면 처음 보기에는 인간을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은 사물은 실제로 인간 자신의 경험(촉감적인 경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몸의 현상은 곧 정신에 의존해 있다. 모든 감각적인 사물은 관념이다. 이 관념은 오직 정신 안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물의 존재는 자각되는 데 있다. 이 말은 현실을 증발시켜 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이 구체적으로 지각되며, 그 배후에 숨겨져 있는 본체의 그림자가 아님을 보여 주고자 한 것이었다. 이것의 논리적 결과는 지각된 현상의 배후에 본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물의 존재는 항상 정신과 관계맺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물은 나 개인을 떠나 존재하지만, 그 때에도 궁극적으로는 다른 정신 (하나님의 정신) 안에서 존재한다. 존재는 다같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현존의 상징이기 때문에, 현실적인 것은 무엇이나 만물 안에 있는 하나님의 표현이어야 한다. 이와 같이 자연은 보편적인 상징의 성격을 띤다. 이것을 버클리는 유물론과 무신론의 반증(反證)으로 보았다. 버클리는 몸의 존재도 부인하지는 않았으나, 단지 그에게는 몸이 정신의 현존을 상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인간이 위치해 있는 세계는 결코 대상적으로 만들 수 없는 지평선을 갖고 있다는 것을 버클리는 보여 주었다. 그는 물질적인 세계에 정신적인 성격을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값진 결론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물질을 정신으로 환원할 수 있을까? 그는 몸을 너무나 정신적인 것의 측면으로 보게 되어 이를 대상이나 본체로 생각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그리고 그의 사상의 배후에는 사물과 사물의 관계가 임의적인 관계에 불과하다는 유명론(唯名論)이 깔려 있다. 인간의 존재가 눈 앞에 있는 물질적인 대상으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는 측면을 숨길 수 없는 것처럼, 사물도 완전히 정신(언어와 기호)으로만 환원할 수 없다. 언어와 기호는 우연적이거나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표시하는 사물에 본질적으로 속해 있다. 그러므로 몸은 정신적인 영역 안에서 증발될 수 없다. 유물론과 마찬가지로 유심론도 먼저 이원성을 전제하고 그 후에 한 측면을 다른 측면으로 환원하려고 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것은 항상 필연적으로 선택해야 할 유일한 출발점인가? 항상 이원성을 전제로 삼아 사물에 접근할 수 밖에 없는가?

5. 정신과의 긴장 가운데 있는 몸과 영혼의 통일성(아리스토텔레스)

철학사에서 몸과 영혼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초기의 그는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영혼을 독립적인 실체로 보는 입장을 보였지만, 후기에는 영혼과 몸을 따로 분리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했다. 도장과 도장에 새겨진 무늬가 하나이듯이, 몸과 영혼도 하나이다. 몸과 영혼의 관계는 질료와 형상의 관계이다. 질료는 일정한 형상이 없이 표상할 수 없고 형상이 독립해서 존재할 수 없듯이, 영혼과 몸도 하나로 밖에는 이해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생명의 가능성을 가진 자연적인 몸의 형상이나 몸의 잠재성을 실현하는 힘으로 보았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들과 같은 평면 위에 서 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식물적인 혼, 동물적인 혼, 이성적인 인간의 혼을 구분했다. 이성적인 혼은 지상에서 가장 뛰어난 형태의 영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본입장은 몸과 영혼이 상관관계 속에 존재하고, 그 어느 것도 그 자체로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혼은 몸이 없이 그 자체로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영혼은 몸의 실현이다. 영혼은 몸이 아니지만 몸을 떠나 따로 존재할 수 없다. 몸도 영혼을 통해서만 비로소 몸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로써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명체를 인과론적인 기계로 설명하는 입장에 반대되는 생기론(生氣論)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이처럼 그는 확실히 인간의 통일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반적인 영혼과 정신을 구분하고 정신을 인간에게만 있는 고유한 관조능력으로 이해한다. 정신은 영혼이 아니면서도 영혼과 불가분리적인 관계를 이루면서 활동한다. 정신의 활동은 영혼에 의해 이루어지는 내적인 생활의 일부이지만, 이 가운데서도 정신은 더 고귀하고 신적인 힘으로 나타난다. 정신은 죽음에 종속되기도 하고 영원히 존재하기도 한다. 개인적인 삶의 차원에서 볼 때 정신은 결국 죽는다. 그러나 개인의 생활을 영위하는 정신은 초개인적인 정신의 작용에 의해 비로소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발전시킬 수 있다. 현실적으로 인간 안에 침투하여 사유와 반성을 가능케 하는 정신(수용적인 정신)은 죽음과 함께 없어지지만, 원리적으로 초월해 있는 초개인적인 신적인 정신은 불멸한다. 그러나 이 초개인적인 신적인 정신이야말로 인간의 불멸성을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인적 인간이해의 배후에는 새로운 이원론이 감추어져 있다. 이 이원론은 영혼과 몸의 반대편에 정신을 설정한다. 이것은 결국 플라톤의 인간이해의 영향이다. 정신에 대한 이론은 결국 그의 경험적인 관찰로부터 형성된 전인적 인간이해와 조화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에게서 영혼과 정신의 관계는 항상 모호하고 불확실한 것으로 남아 있다.

2. 전인으로서의 인간

구약성서에서 영혼을 일컫는 히브리어 네페쉬는 원래 호흡과 관련된 말이다(창 2:7 참조). 영혼은 생명력과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영혼은 생명력에만 국한되지 않고 감정과 정서의 소재이다. 영혼은 순전히 정신적으로 이해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곧 영혼이다. 영혼은 전 인격을 뜻하기도 하고 시체를 뜻하기도 한다. 인간은 영혼으로 인하여 하나의 통일체를 이룬다.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영혼이고 동시에 몸(바사르)이다. 인간은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의 합성물이 아니다. 몸은 하나님과 마주하는 인간의 존재, 인간과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의 일시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몸도 하나님을 갈망하는 의미에서 영혼이기도 하다(시 63:1, 84:3).

구약성서는 하나님을 영(루아흐)이라고 말한다. 인간도 영을 소유하고는 있지만, 인간은 영이 아니다. 영은 영혼인 인간 안에 움직이는 힘이고, 생명의 모체가 되는 힘의 분위기를 가리킨다. 이 힘은 하나님에게 근원을 두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일시성의 상징인 몸은 영과 반대편에 놓여 있다.

신약성서에서도 특히 바울이 몸(소마)을 말할 때마다, 그것은 전인을 뜻한다. 인간은 몸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이 곧 몸이다. 육(사르크스)은 인간의 육체성에 매여 있는 죄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죄에서의 해방은 육에서의 해방을 뜻한다. 그러나 바울은 헬레니즘의 이원론보다는 구약성서의 노선에 더 가까이 서 있다. 육은 하나님의 영원성에 비추어 본 인간의 허무성을 말한다. 육은 영혼이나 몸과 대칭되는 악한 죄성을 갖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의 본질을 표시할 때 신약성서가 사용하는 단어는 프뉴마(영)인데, 이것은 인간 자신의 특징적인 면을 나타내기 보다는 단순히 인간의 영 혹은 인간을 뜻한다. 영혼(푸시케)이라는 단어도 몸과 대칭되는 의미를 갖지 않고 히브리어의 네페쉬처럼 전인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H. W. Wolf, 문희석 역, 舊約聖書의 人間學, 분도출판사 참조) 이처럼 성서는 전반적으로 헬레니즘의 인간이해와는 달리 인간을 전인으로 이해하고 있다. 인간은 전인으로 창조되고 살고 죽고 그리고 부활에 참여한다(영혼불멸이 아닌 영적인 몸으로의 부활!).

현대사상에서도 이원론의 모델(영혼과 몸, 정신과학과 자연과학, 주체성과 객관성)은 문제시되고 있다. 영혼과 몸은 모델로 인정되지만 독립적인 실체로는 부인된다. 두 측면은 어떤 객관화의 방법을 택하느냐, 즉 안에서 밖으로 접근하느냐 혹은 안에서 밖으로 접근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 두 측면은 서로 의존해 있다. 영혼과 몸은 인간 생명의 단일성의 구성적이고 서로 속한 측면들이지, 서로에게로 환원될 수 있는 측면들이 아니다. 영혼은 인간의 육체성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고, 역으로 인간의 몸도 죽은 육체가 아니라 그 모든 생활양상에서 영혼의 작용을 받고 있다. 정신은 곧 전형적인 인간의 행동의 장(場)이요 항상 변하며 상징을 통하여 가능한 인간과 주변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영혼은 몸에, 몸은 영혼에 매여 있다. 영혼과 몸은 서로 관통하고 침투하며 일체를 이룬다(상호순환의 관계). 인간은 전인이다.

 

5. 참 인간 예수

 

1.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나사렛 예수가 참으로 하나의 인간(人間)이었다는 사실은, 그를 신화적 존재로 보려는 미약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자명한 전제이다. 특히 신약성서는 인간 예수의 온갖 체험(목마름, 굶주림, 슬픔과 기쁨, 사랑과 분노, 수고와 고통, 죽음 등)을 여실하고 솔직하게 증거한다(히 2:17). 예수는 죄인이 아닌 점을 제외하면,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았다(히 2:17). 그러므로 그는 인간의 모든 차원, 모든 경험 안에서 살았다고 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가 단순히 인간이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인간으로서 인간인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느냐는 신학적 질문이다. 신약성서는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또 예수를 통하여 종말론적이고도 궁극적인 방식으로 말씀하시고 행동하셨다는 사실, 아니 하나님이 세상을 예수 안에서 당신과 화해시키고자 했다는(고후 5:18) 사실에 온통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Kasper).

사실 상 신약성서 안에는 통일적인 예수상이 없고 여러 형태의 다양한 예수상이 서로 나란히 존재해 있지만,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통일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를 위해 활동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그리스도 즉 구원자이다. 신약성서는 예수에 대한 다양한 상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점에서 공통되는 기본음조를 지니고 있다(Pöhlmann).

인간은 스스로 죄를 지음으로써(행위죄, 자범죄), 죄인이 되고 그래서 자신을 죄의 감옥 속으로 감금시키기 때문에, 이 감옥을 스스로 열 수는 없다(원죄). 죄의 감옥은 오로지 바깥에서부터만, 즉 하나님에 의해서만 열려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자신의 구원, 해방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소외된 인간이 소외된 인간을 구원할 수 없고, 죄인된 인간이 죄인을 방면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인간의 감옥 안으로 찾아와 인간을 해방시켰다는 것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적 증언이다.

고대교회(특히 칼케톤 공의회, 451년)가 예수는 '참 하나님, 참 인간"(Vere Deus, Vere Homo)으로 규정한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예수가 참 하나님이 아니라면 인간을 구원할 수 없을 것이며, 예수가 참 인간이 아니라면 죄인된 인간을 대속하고 하나님과 화해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고대교회는 오랜 논쟁 끝에 예수의 양성론(兩性論)을 확정지었던 것이다.

신약성서에는 예수를 인간으로 부르는 호칭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두드러지는 인간적인 호칭은 '人子'(인간의 아들)와 '새 아담'이다.

1. 인자(人子)

구약성서의 다니엘서에서는 "세계의 지배자가 누구인지?"가 묵시적 환상을 통하여 그려진다. 다니엘은 여기서 세계사를 환상으로 보는데, 짐승 넷으로 표상되는 네 강대국(바벨론, 메대, 페르시아, 로마)을 통하여 이 세대가 인간적인 관계가 아니라 동물적인 관계가 지배하고 있음을 그린다. 이들의 미래는 몰락이요 심판이다. 이어서 다니엘은 하늘에서 사람의 아들(人子)과 같은 이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에게서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고 모든 백성들이 그를 섬기게 되는 환상을 본다(7:13). 초대교회는 이 人子가 바로 예수 안에서 이 세계의 주, 지배자로 왔음을 고백했다. 인자는 누구인가? 그는 짐승같이 인류를 억누르는 짐승같은 권력들을 정의로 심판하고, 인류(하나님의 백성)를 인자의 인간적 왕국으로 인도한다. 예수는 짐승(야수)같은 인류를 그의 인간적 왕국으로 해방시키는 '인간적인 인간',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미래적인 인간'으로 나타난다. 물론 人子 예수는 다시금 폭력과 강압이 아니라 그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고, 찢겨진 인간의 삶에 화해를 가져와 주었다. 그래서 교회는 바로 예수의 수난에서 예수의 인간성을 보았다(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이 사람을 보라! ). 비인간적인 시대의 한 가운데서 인간의 체현, 인간적 인간의 존재를 예수 안에서 보았다(J. Moltmann).

2. 새 아담

바울은 예수를 '새 아담'으로 선포한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다. 옛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이 들어 온 것같이, 새 아담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들어왔다(롬 5:12-21).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체를 갖추고 이 세상에 들어왔고, 이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의 상황을 변화시켰다. 예수와 함께 이제 인간이 새롭게 규정되고 새롭게 변화되었다. 예수의 오심과 함께 하나의 새로운 구원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2. 오고 있는 인간

신약성서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다(고후 4:4, 골 1:15, 히 1:3). 그리고 인간은 바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도록 지음받았다(롬 8:29).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형상은 인간의 메시야적 소명이다. 그리스도는 땅 위에 있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리스도와의 사귐 속에서 인간은 그가 규정된 바 그대로의 존재가 된다(J. Moltmann).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오고 있는 미래의 인간의 현존, 체현이다. 인자(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안에서 진정 인간적인 인간이 이 세계 안으로 들어온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성의 목표이다. 그는 상실된 인간을 회복할 뿐만 아니라 미래의 인간을 가져온다. 그는 인간의 인류의 목표이다. 그는 인류의 소망이다. 그는 새롭게 피조될 새 인류의 형상이다. 이러한 '새 인간'의 형상을 창조되고 왜곡된 '옛 인간'의 형상의 빛 아래서 고찰해 보기로 하자. 어떤 의미에서 예수는 오고 있는 인간, 미래적 인간인가? 이것을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조명해 보자.

1. 하나님을 위한 존재(인간 앞에서 하나님을 대리하는 인간)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는 언제나 자신보다는 하나님을 더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한 자이다(주기도문!).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에게 돌렸다. 예수는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되어 있었다(눅 23:46). 예수는 아버지에게 순종한 자였다(롬 5:19, 빌 2:8, 히 5:7-9, 12:2). 예수는 전적으로 하나님과 일치하는 자였다(요 10:30, 17:10 등).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만을 신뢰(신앙)하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으며, 하나님의 뜻(나라)에 따라 산 자였다(죄 이해와의 대조적 비교 : 불순종, 불신앙, 교만, 정욕). 이처럼 예수는 하나님을 향해 전적으로 열린 자, 하나님을 위한 존재로서 우리의 존재의 규정, 목표, 오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현존이 되었다. 그는 그의 삶과 죽음 전체로서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고 하나님에게 바쳐짐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킨 화해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되었다. 특히 그의 죽음은 철저히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신뢰한 결과와 그 표현으로서, 하나님과 소외된 이 세계 안에 구원, 화해 즉 하나님과의 일치, 친교의 회복을 가져다 주었다(D. M. Baillie, Kasper). ?

K. Barth : 예수의 '신성'의 의미는 하나님을 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 안 에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불가피한 관계 안으로 놓여졌다. 따라서 하나님 없는 인간은 참 인간이 아니다. 예수 안에서 인간됨은 "하나님과 함께 함"이다 (KD Ⅲ/2, 161).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음은. . . 가능성이 아니라 인간됨의 존재론적인 불가능성이다"(KD Ⅲ/2, 162). 예수 안에서 인간은 항상 하나님의 처 분에 내맡겨졌다. 왜냐하면 인간은 원초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기 때문 이다.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 안에서 '함께 선택되거나 이 은총을 향해 선택된 피조물'(KD Ⅲ/2, 174)로서 인간은 감사히 청종하며 책임적으로 순종하는 자기 헌신 안에서 존재한다(KD Ⅲ/2, 200-217.). 바로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자유를 갖 는다. 예수 안에서 계시된 진정한 자유는 결코 열려 있다고 하는 두 가능성 사이 의 추상적인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 안에서 확증된 피조적 존재를 기쁘게 붙잡는 행위이다.

Kasper : "예수는 하나님의 다스림의 내림(內臨)을 맞이하기 위하여 자신을 온 전히 열어 젖혔고, 하나님의 현존을 위한 빈 양식(樣式)이 되었고 백지가 되었 다"(aaO., 384).

2. 인간을 위한 존재(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대리하는 인간)

예수의 실존의 특이성은 단지 하나님을 향한 그의 전적인 순종, 신앙만이 아니라 이웃을 향한 그의 개방성, 그의 헌신과 봉사에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남을 위한 존재'(Sein für Andere : Bonhoeffer), 위타인간(爲他人間), 공존인간(共存人間 : Kasper, 387.)이다. 그는 특히 가난하고 고통 당하는 자들의 편에 서서 함께 고통당하고, 자신을 주고 봉사한 자였다(막 6:34, 고후 8:9, 빌 2:6 - 종의 모습). "그의 본질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를 편드는 데 있다. 그의 본질은 자기헌신이고 자기포기이다. ?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람이다. 그의 본질은 헌신과 사랑이다. 그의 박애심은 그의 신자성(神子性)의 현현방식(Epiphanie)이다. 이웃인간을 지향하는 그의 초월은 하나님을 지향하는 초월의 표현이다. 그가 하나님께 대해서는 전적으로 수용의 존재(순종)인 것과 같이, 우리에게 대해서는 헌신과 대리의 존재이다. 이중의 초월에서 그는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중보이다"(Kasper, 390).

K. Barth : 예수의 '인성'의 의미는 동료인간을 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러 한 그의 인간성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기는 존재가 아니라 당신으로부터 나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신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당신을 향하는 존재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이것은 훼손된 인간됨이 아니라 진정으로 완성된 인간됨이다. 예수는 진정한 인간성의 본질을 드러내심으로써, 우리에게 다음을 가르친다: "모든 인간의 인간성은 그의 존재가 다른 인간들과 함께 있도록 결정된 점에 있다".(KD Ⅲ/2, 290.). 서로의 눈을 바라봄으로써만, 함께 말하고 서로에게 귀 를 기울임으로써만, 서로 도움으로써만, 우리는 다른 인간들과 참으로 만날 수 가 있다(KD Ⅲ/2, 299-318.). "참으로 자연적인 인간은 . . . 그의 마음의 자유 가운데서 그의 동료인간과 함께 하는 인간이다"(KD Ⅲ/2, 337.). 이러한 "인간 존재의 파괴할 수 없는 연속성(Kontinuum)"(KD Ⅲ/2, 349.)은 남자 여자의 이 중성 안에서 그 자연스런 자리를 갖는다. 사실 이러한 연속성은 세계 안에서 소유할 수 있는 상태로서 인간의 임의처분의 권한에 내맡겨져 있는 것이 아니 고, 오히려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함에 근거해 있다. 여기서 바르트는 동료인간성의 지평 안에서 유비(類比)의 고리를 취한다: "인간 예수는 동료인 간을 위하는 인간이다. . . . 인간은 동료인간과 함께하는 인간, 당신과 함께 하는 나, 여자와 함께 하는 남자이다"(KD Ⅲ/2, 382.).

3. 만물을 위한 존재(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

예수는 인간 앞에서 하나님을 대리하는 자,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대리하는 자일 뿐만 아니라, 창조의 중보자요(골 1:15 - 만물은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하여, 예수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만물의 화해자이기도 하다(우주적 그리스도론).

※ 히 1:3 - 만물을 지탱함.

※ 계 1:17 - 만물의 처음과 마지막.

※ 요 1:3 - 만물의 근원, 빛과 생명.

J. Moltmann :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난 장자라면, 그는 새로운 인 간성의 새 아담일 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의 장자로 이해될 수 밖에 없다"(예수 그리스도의 길, 389).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온 우주의 화해는 진리를 상실당하고 상처받은 모든 피조물들의 칭의와 하나님의 정의의 관철을 뜻한다. 인간과 하나님의 화해, 인간 상호 간의 화해, 인간 자신과의 화해는 자연과의 화해를 직접적으로 포괄할 수 밖에 없으며 ? "(434).

"우주적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영적 차원을 위하여 나는 도마복음의 로기온 77번으로부터 알려지지 않은 예수의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나는 만물을 비추는 빛이다.

     

     

    나는 만물이다. 만물은 나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만물은 내게로 되돌아온다.

     

     

    나무 한 토막을 베어 보라. 내가 거기에 있다.

     

     

    돌멩이 하나를 집어 보라. 그러면 나를 느끼리라.

     

이러한 깨달음으로부터 기도가 다음과 같이 확장되지 않겠는가?: 온 마음을 다하고 온 정신을 다하고 온 힘을 다하여 너희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이 땅도 너희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생명을 거룩히 여기자. 왜냐하면 생명은 거룩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신다."(J. Moltmann : 오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中 Ⅵ. '우주적 그리스도' 참조/이신건 역 대한기독교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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