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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buddistic-human.pdf   (0.8M)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9-07
 제목  현대인의 인간이해
 주제어  [인간론]
 자료출처  이신건  성경본문  
 내용

3. 현대인의 인간이해

1. 이성적 인간(Homosapiens)

 

오늘날까지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인간에 관한 이념은 '이성적 인간'의 이념이다. 이 이념은 그리스인의 구상으로서 인류의 자기평가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영향력이 큰 발견의 하나이다. 이 이념은 Anaxagoras, Platon, Aristoteles에 의해서 개념적·철학적으로 최초의 모습을 갖게 되었으며, 이 이념은 인간을 신들이나 동물, 자연물로부터 구별하려고 했다. 이 구별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정신적인 기능인 이성(理性)이다.

Anaxagoras(주전 500년경 출생)는 아테네에 처음으로 하나의 추상적인 철학적 원리인 누우스(Nous)를 도입했다. 누우스는 합리적이고 전능하며 비인격적인, 사유하는 정신의 원리이고, 세계가 합목적적 질서를 갖도록 한 기계적 원인이다.

Platon(주전 427년 출생)은 '동굴의 비유'에서 우리의 일상적 존재를 감옥에 갇힌 것으로 설명하고, 더 높은 곳에 실재하는 이념(Idea)의 세계로 상승·탈출할 것을 가르쳤다. 이념(Idea)이란 완벽한 실재성을 지니는 참다운 유일의 불멸의 원형이다.

Aristoteles(주전 384년 출생)도 인간의 영혼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정신(Nous)에 관해 말했다. 또 그는 순수사유이자 순수정신으로서의 신(神)에 관해 말했다. 신은 오직 지고한 것, 가장 완전한 것만을 사유하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궁극의 완성자이다.

이러한 사상은 스토아(Stoa) 학파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정신적 근거를 마련해 주었는데, 이러한 사상의 특징을 네 가지 설명하면 : ① 인간은 어떠한 자연도 갖지 않는 신적인 동인(動因)인 이성을 소유하고 있다. ② 이 이성은 영원히 동일한 것으로서 세계의 인식을 참으로 가능케 한다. ③ 이 이성의 동인은 충동이나 감성(지각)이 없이도 자신의 이상적인 내용을 실현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정신의 위력, 이념의 힘). ④ 이 이성의 동인은 역사적·민족적·신분적으로 절대 불변한다.

이러한 사상은 몇 가지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 ① 이 이념은 기독교의 창조교리와 연결되어서 서양정신사에서 특색있는 인간관을 형성했다. 따라서 사람의 위치는 더 높아졌다. ② 인간의 이성이 우주이성과 밀접히 관련됨으로써, 이성은 사람과 형이상학의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가 되었다. ③ 자연의 합법적인 법칙인 이성의 발견은 서양의 합리주의적 문명의 뿌리가 되었다.

이러한 '호모 사피엔스'의 이론은 합리주의(Descartes : 사람의 영혼이 바로 이성이다. 사람은 이성에 의한 합리적 판단을 통해서 진정한 인식에 이를 수 있다.)와 경험주의(J. Locke) 그리고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최고의 승리를 거두었고, Kant Hegel에 의해 크나큰 철학적 체계로 발전되었다.

Kant는 오성(Verstand : 감각과 더불어 인식에 도달하게 하는 좁은 의미의 이성)과 이성(Vernunft)을 구분했다. 이성은 본질상 감각의 영역(aposteriori)을 초월한다(aporiori, 선험적 원리). 우리의 이성은 영원한 신, 영혼, 세계의 통일성을 지향한다. 물론 이것은 순수(이론)이성의 대상이 아니고 실천이성의 요청이다. 이로써 칸트는 실천이성의 우위를 주장한 셈이다.

Hegel은 독일관념철학의 완성자로서 이성의 지위를 최고로 높였다. 그에 의하면 우주의 본질은 이성이다. "이성적인 것은 모두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은 모두 이성적인 것이다." 역사는 절대정신인 영원한 신의 보편적 이념이 인간 속에서 자신을 의식하는 역사이며, 이 역사는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 역사의 비이성적 사실(충동, 정열 등)도 이성의 종으로서, '이성의 간계(奸計)'(List der Vernunft)로서 작용한다. 그에게서 인간의 이성은 신격화되었고, 이 이성의 뜻을 실현하는 영웅의 활동이 기대되었다.



(평가)

M. Scheler: "이성이란 그리스인의 고안에 불과하다. 이러한 대규모적인 종교적·형이상학적인 배경은 이제는 더 이상 자명한 것이 아니다. 사유를 통해 붙잡으려는 이러한 이성의 능력은 가설이나 요청이다."

Pascal: "이성의 위대성은 이성의 한계를 아는 데 있다."

* 소위 비이성적이라는 것(자연, 약자, 여성)에 대한 학대의 결과는 인간에게 무엇을 초래하였는가? 이성이 극도로 발달한 20세기는 바로 광기(폭력)가 가장 난무한 시기가 아니었는가? 인간 결코 이성에 의해서만 지배받지는 않는다. 의도, 의지, 욕구, 감정 등으로부터 자유한 이성이 과연 있는가?

 

 

2. 공작인(Homo faber)

 

현대인을 지배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인간의 이념은 자연주의적·실증주의적·실용주의적 이론인 '호모 파베르'(工作人)이다. 이 이념은 무엇보다도 인간 일반의 특수한 어떤 이성능력을 부인한다. 여기에서 인간과 동물과의 아무런 본질적 구별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정도 상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인간은 다만 특별한 종류의 동물의 일종에 불과하다. 소위 사유하는 '정신', 즉 외견 상 충동하는 다른 중심적 의욕과 목적설정의 능력, 가치파악과 가치평가, 정신적 사랑은 인간 이하의 동물계에서도 작용하고 있는 동인들의 추가적 수반현상이며 무활동적인 의식의 반영에 불과하다. 따라서 인간의 일차적인 위치는 이성에 있지 않고 충동(衝動)에 있다. 즉 인간은 '충동적 존재'(Triebwesen)이다. 인간의 사상, 의욕, 고차적인 정서작용도 다만 일종의 '인간 상호간의 충동적 감정의 기호'에 불과하다. 정신이나 이성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독립해 있는 별개의 형이상학적 기원을 지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존재의 법칙 그 자체에 일치하는 기초적인 자율적 법칙성을 소유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우리가 이미 유인원(類人猿)에서 발견하는 최고의 심리적 능력의 발전에 불과하다. 우리가 인식이라고 일컫는 것은 자극과 유기체의 반응 사이에 점점 더 풍부하게 끼어 들어가는 형상의 계열, 혹은 사물이 스스로 만든 기호 내지는 기호의 습관적인 결합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존재이다 : ① 인간은 기호(언어)를 가진 동물이며, ② 인간은 도구를 가진 동물이며, ③ 인간은 뇌수(腦髓)를가진 존재이다. 다만 인간은 동물보다는 더 많은 에너지를 뇌수, 특히 그 피질(皮質)의 기능을 위해 소비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인간이념은 Democritus, Epicurus로부터 Bacon, Hume, Mill, Comte, Spencer, Darwin, Hobbes, Machiavelli, Feuerbach, Schopenhauer, Nitzsche, Freud, Adler, P.Schilder, McDougall, F.Oppenheimer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형태로 완성되어 왔다.

다만 인간을 '충동적 존재'로 환원하는 점에서, 이 이념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영양충동

역사는 근본적으로 '계급투쟁'과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고 보는 소위 Marx적(경제학적) 역사관은 영양충동의 체계 속에서 모든 집단사건의 가장 강력하고 결정적인 동기를 포착하며, 각 종의 정신문화 내용은 다만 변천하는 역사적 상황 하에서 이러한 충동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반현상, 우회현상이라고 본다.

Marx는 (Hegel에 반해)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고 본다 여기서 존재란 경제적인 생산관계를 뜻한다.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하부구조로서의 존재 위에 이에 따라 결정하는 상부구조인 의식(문화, 종교 등)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모든 의식현상(예술, 종교, 철학)은 다만 허위의식(Ideologie = 관념론)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는 다만 사회적·경제적 현실의 표현이다.


2. 생식충동

또 하나의 역사관은 번식과 생식의 체계의 교체 속에서 모든 독립된 변수를 본다. 이 자연주의적 역사관은 생식의 원래적 충동과 이 충동의 양적·질적 결과 속에서 역사의 원동력을 보는 충동이론을 따르고 있다.

Schopenhauer는 우주와 사람의 본질은 이성이 아니라 '의지'에 있다고 했다. 이성은 다만 의지에 봉사하는 종이다. 사람을 이끌어 가는 힘은 이성이 아니고 의지이다. 인간의 본질이 사유, 의식, 이성에 있다는, 고래(古來)로 모든 철학자가 지녀온 이 착각은 제거되어야 한다. 이 의식은 우리의 본질을 싸고 있는 표피(表皮)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무의식적·맹목적·본원적·본질적인 '삶에의 의지'의 충동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인간과 생물계를 이끌어 가는 힘은 생식본능이다. 생식본능은 가장 강렬한 생의 의지의 표현이다('性愛의 형이상학' ⇒ 사랑은 종족보존이라는 유일한 목적을 위한 하나의 기만수단이다!).

Freud도 사람을 이끌어 가는 근본적인 원동력을 성적인 본능(Libido)에서 찾았다. 이성적 인식욕구는 다만 리비도 한 가지에 불과하다. 우리의 문화가 리비도를 억제할 때 그 억제된 본능은 무의식 속에 들어가고, 이것이 승화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예술, 종교, 철학이다. 따라서 무의식 속에 있는 성적인 본능은 우리를 지배하는 근본적인 힘이다.

3. 권력충동

또 하나의 자연주의적 역사관은 권력정치적 역사관이다. 이것은 Hobbes, Machiavelli(정치적 권력투쟁 속에서 충동생활의 원동력을 봄), Nitzsche, Adler(권력에의 의지 속에서, 즉 정신화된 권력지향 속에서 충동생활의 원동력을 봄)에 의해 대변되었다.

Nitzsche : "이 세계는 권력에의 의지이며, 그 밖의 어떤 것도 아니다. '영원의 이념', '물(物) 자체', '피안' 등의 표현은 모두가 망상이나 환영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에게 아무런 자비도 베풀 수 없는 공염불(空念佛)에 지나지 않는다."

 

(평가)

Marx: 어떤 사상가도 맑스만큼 현대 세계의 정치구조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가 예언한 것처럼 가장 진보한 산업 국가에서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의 사상은 20세기의 여러 혁명을 낳았다. 그렇지만 어떤 사회도 진보한 공산 사회로 접근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심지어 명백한 공산주의 사회마저도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국가 자본주의의 사례라고 비난을 받았다. 맑스는 인간의 완전함을 신뢰했다. 맑스는 계급 없는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개인적 이해에 매달리지 않고 서로 협동하는 시대를 예견했다. 그는 완전한 사회에서는 풍요와 이타성이 생길 거라고 믿었다. 이러한 사회는 천국의 세속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의 외적 조건이 바뀌면, 탐욕과 이기심이 사라진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공산 사회에서는 모든 갈등이 정말 제거될 수 있는가? 맑스는 인간의 내면적 갈등은 고려하지 않았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 사회보다 더 뿌리깊다.

맑스는 인간 행위의 사회적 결정 요인에 지나치게 편향됨으로써, 생물학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간을 망각한다. 욕구와 필요가 사회의 산물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인간 본성의 생물학적 근거를 완전히 배제할 위험을 낳는다. 철저한 경제적 결정론은 극단으로 흐를 수 있다. 만일 관념이 경제적 이익에 관한 요구에 의해 생긴다면, 그리고 그러한 요구 앞에서 관념이 무력하다면, 어떻게 혁명에 대한 외침이 현실적으로 생길 수 있는가? 인간은 경제적 여건에 좌우되는 무기력한 존재로서 그러한 여건의 산물인가, 아니면 그러한 여건을 통제할 수 있는 존재인가? 분명히 환경이 인간을 만들지만, 맑스는 인간이 환경을 만든다는 것도 믿었다(트리거, 인간 본성에 관한 10가지 성찰 117쪽 이하 참조).

종교, 예술, 가치를 상부 구조, 경제 현상의 반영으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일방적이고 왜곡된 유물론적 이론이다. 혁명(생산 수단의 국유화)에 의해 인간의 심성에 뿌리박힌 이기적 성향, 착취 행위를 제거할 수 있다는 낙관적 견해는 불가능한 것임이 입증되었다. 그리고 역사의 진행은 맑스 자신이 예견한 것과 다르게 진행되고 있다.

Nitzsche: 비록 영원회귀에 도달하는 삶일지라도, 삶을 부정하지 않고 긍정하는 그의 해결은, 가지의 의지대로 창작할 수 있는 자유를 찬양하면서 빈 화폭으로 달려가는 예술가적 삶을 살려는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갖는다. 환경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증대하고 과학과 기술이 우리의 능력을 신장시키면서, 우리는 점차 이 세계의 지배자(니체가 자주 인용한 구절)가 되었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런 믿음이 진보에 대한 믿음과 결부될 때, 겨로가적으로 무제한적인 낙관주의가 등장할 수 있다. 선악의 전통적 범주를 배격하고 원죄와 죄의식의 개념을 유기함으로써, 인간의 행복이 증대된 것은 아니다.

그는 생의 무목적성을 부각시켰으며, 도덕의 주요 개념을 파괴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세계의 객관성을 문제시하였다. 삶이 어떤 방향을 갖는다는 확신은 삶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주장만큼이나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영원회귀에 관한 니체의 사상은 결과적으로 이 두 가지 견해를 거부한다. 우리는 방향도 없고 목적도 없는 끝없이 반복되는 지루함 속에 놓여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상은 인간이 처한 곤경에 대한 암울한 묘사로서 어떠한 처방도 될 수 없다. 오히려 니체는 권력 의지에 의한 지배욕을 옹호함으로써,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하나 더 추가하였다(트리거, 인간 본성에 관한 10가지 성찰 93쪽 이하 참조).

Schopenhauer: 맹목적인 의지만이 절대적 본질인 세계 내에서 어떻게 지력(知力)이 의지를 이길 수 있는가? 이것은 맹목적 의지 외에도 또 다른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게 아닌가?(H. J. Störig, 세계 철학사 下 참조)

Freud: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적 차원을 발견하고 심도 있게 연구한 예언자였다. 하지만 그는 인간을 성적인 충동 에너지의 다발로 보고, 사회 변동과 동떨어진 독립된 존재로 이해하고 있다(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철학을 이데올로기적 상부 구조로 보는 것은 정신을 억압하는 데서 생긴 이론이다(빅터 프랭클). 프로이트는 의미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에게서 의미의 문제는 단지 병리학적인 증상의 의의만을 갖는다. 프로이트와 아들러의 이론은 정신에 대해 적대적이다(칼 구스타프 융). 프로이트는 인간을 과거에 고착시키다. 그는 인간의 발전에 의미심장한 의미를 지니는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산업 사회의 기계적 인간관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과도한 병리적 현상과 상관이 없는 갈등은 아마도 자기 초월의 본질일 것이다. 그는 갈등이 인간의 개방성을 위한 표시이고, 인간의 자기 초월 능력과 과제를 위한 표시일 수도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프로이트이 세계관은 허무주의적이다. 프로이트가 종교를 환상이라고 비판하면서 하늘을 공허하게 만들었으나, 이로 인하여 땅 위에 사는 인간도 공허하게 되었다. 에릭 프롬에 의하면 프로이트는 세계와 존재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관계에 주목하지 못하였다. 그는 초자아가 어떻게 성립되는지만을 확정지었을 뿐이지, 진리와 사실의 문제를 제기하는 데 소홀하였다(김광식, 인간과학과 신학, 47쪽 이하 참조).

20세기의 어떤 사상가도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서로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에 관해 프로이트만큼 강력한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새로운 신화'를 제안했고, 정신분석은 해악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는 인간 합리성의 산물을 불신하도록 만들었고, 인간 의식의 여타 산물에 관해 회의를 제기하였다. 프로이트는 종교를 한낱 환상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종교가 반드시 허위인 것만은 아니다. 도덕과 종교에 관한 그의 입장은 본질적으로 니체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트리거, 인간 본성에 관한 10가지 성찰 141쪽 이하 참조).

 

3. 진화하는 인간

현대의 학문분야에서 인간을 '열린 존재'로 이해하는 데 큰 기여를 남긴 것은 역설적이게도 신학이나 종교학이라기 보다는 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물의 현상을 처음부터 고정된 체계로 보기보다는 개방된 체계로 볼 수 있도록 우리의 편협한 마음과 닫힌 눈을 열어준 것은 무엇보다도 우주론과 진화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인간학과 관련하여 우리의 관심을 일으키는 것은 올바른 진화론적 이론에 대한 검증과 판단이 아니라 진화론적 인간이해이며, 그 중에서도 진화론적 우주관 혹은 인간관을 기독교적 가치관 혹은 교리와 결합하려고 시도한 떼이야르 드 사르댕(Teilhard de Sardin)의 이론이다.

떼이야르가 일평생 몰두한 것은 우주의 내적 구조와 발전에 관한 이론이었으며, 또 이 우주 안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와 임무에 관한 이론이었다. 우주를 내적으로 결합되고 전체성을 지닌 하나의 분명한 현상으로 서술하고 그 전체성 안에 내포된 의미를 탐구한 그의 '우주적 현상론'은 그 중요한 부분으로서 무엇보다도 세계 현상의 내면적 의미를 찾고자 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그는 지구를 우주의 전형적 표현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그의 탐구가 도달한 지구의 모습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진화하는 하나의 통일체로서 계속적이고도 끊임없는 제 사건과 제 상태의 흐름을 갖는 지구의 모습이었다. 진화의 과정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그것은 곧 물질(지질권)과 생명(생명권) 그리고 정신(정신권)이다. 문제는 이 세 영역 간의 발생적인 연쇄관계였다. 즉 지질권에서 어떻게 생명이 발생하며, 생명권에서 어떻게 정신권이 발생했느냐의 문제인데, 떼이야르의 견해에 의하면 물질과 생명의 관계, 동물적 생명과 인간의 관계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있지만, 역시 근본적인 유대와 본질적인 결합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전이(轉移)에 관한 이론은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다. 그러나 떼이야르에 의하면 이 전이가 증명되거나 설명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이 전이가 얼마나 타당한지는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분야에서 만물이 어떤 정도를 넘어서면, 즉 임계점(臨界點)에 도달하면, 모든 종류의 비약 즉 상태변화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출현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진화의 과정은 점진적인 복잡화와 내면화의 방향을 향해 일어난다. 즉 만물은 더욱 조직적인 형태를 지닌 물질로 응축되어 가며, 이 복잡화의 과정에는 의식의 증대화가 수반된다. 즉 복잡화의 증대와 함께 정신현상의 증대 혹은 점진적 성장이 식별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생명이 점차적인 발전을 거쳐 오랜 후에 고도의 복잡화에 도달했을 때, 거대한 진화과정 안에서 또 한번 이와 꼭같은 결정적인 상태의 변화가 생겨야만 했다. 즉 물질이 활성화(活性化)한 후에, 생명이 인간화(人間化)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혀 새로운 현상이 생명에서부터 나타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인간의 출현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의식적 사고력이다. 인간은 반성하고 의식하는 존재라는 점 때문에 동물과는 건널 수 없는 틈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동물과 다를 뿐만 아니라 전연 별개의 존재이다. 그것은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상태의 차이에서 오는 질적인 차이다. 인간의 출현은 연속선 상의 불연속성, 상상할 수 없던 전혀 새로운 변화였다. 인간의 출현은 심적 집중이 최고도에 달하여 결정적인 상태변화가 생겨났을 때에 일어났다.

그러므로 아무리 인간이 동물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하더라도, 동물계의 보잘 것없는 어떤 부산물만으로 생각될 수는 없다. 인간은, 그 근원에서부터 볼때는, 동물계의 먼 역사 속에서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우주 안에서 돌이킬 수 없는 전혀 새로운 하나의 정신현상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인간은 우주 안에서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은 진화의 최첨단에 서 있으며, 자신의 자연환경보다 탁월하고 존엄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주의 진화는 인간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진화는 진행 도중에 있으며,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하여 뻗어 나간다. 세계는 인간 안에서 또 인간을 통하여 더 큰 완성을 향하여 계속 움직이고 있다. 전적으로 미래를 지향하는 존재는 우주 안에서 오직 인간뿐이다. 당연히 미래에 대한 책임도 인간에게 있을 따름이다.

여기서 떼이야르는 자연법칙의 확실성과 불변성을 가정하고 있기에, 마치 결정론적 세계관을 보여 주는 듯하다. 그러나 이 법칙은 미래를 열어 주는 법칙이고, 또한 자연법칙은 인간의 자유와 상호작용을 이룬다는 점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는 결코 결정론적 역사관을 대변하진 않는다. 그는 우주의 진화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자유와 책임, 인간의 협력과 연대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인류진화의 과정이 더욱 더 다양화하고 특수화하는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진화의 인력인 사랑의 힘에 의해 자유롭고 친밀하게 교제하는 인류의 통일을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떼이야르의 사상이 신학에게 특별한 매력을 주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론적 진화해석에 있다. 그에 의하면 온 창조는 창조의 본래적 정점(頂点)인 그리스도에게 집중된다. 만물은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하고, 그리스도에 의해 통일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그는 초자연계만이 아니라 자연계의 목표와 절정이다. 그는 진화의 최종적 수렴점(收斂點)이요 진화의 오메가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인류진화의 에너지, 원동력일 뿐만 아니라 그 종점이요 목표이기도 하다. 즉 우주발생은 생명발생을 거쳐 정신발생으로 끝맺는다. 그러나 정신발생은 그리스도발생에서 완성된다. 그리스도는 결국 인류를 하나님에게로 이끌고 간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 된다.

이와 같은 떼이야르의 인간이해는 인간에게 장엄한 통일성, 탁월한 존엄성을 가져다 준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활동이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파루시아)를 촉진한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우주 안에서 인간은 가장 높은 지위를 누리며, 우주의 드라마 안에서 인간의 비젼은 우주 끝과 하나님에게까지 미친다. 전통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신학이 떼이야르의 사상과 근본적으로 심각하게 충돌한다고 생각하는 점은 진화론적 우주-인간 이해이다. 보수적 신학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성서기사를 과학적 본문으로 읽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전통적 교회가 수 십 세기 동안이나 자명한 진리로 인정된 지동설(地動說)을 성서본문을 근거로 억압, 반대해 왔듯이, 성서라는 무기로써 진화론을 무조건 매도하고 있다. 진화론은 과학의 검증대상이지 신앙의 판단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창조는 원칙적으로 태초의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와 관련된 것이고, 그래서 신앙고백의 대상이지 과학에 의해 입증도 반증도 되지 않는다. 그 반면에 진화는 유(有)에서 유(有)가 발생하는 법칙 혹은 유(類)에서 유(類)가 발생하는 법칙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신앙되어져 온 '계속적 창조'(creatio continua)는, 어떤 형태의 진화론이 더 합리적인 것인가와는 상관없이, 차라리 진화론적 창조관과 더 잘 조화된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과거의 선행적 조건이나 원인 없이 갑작스레 발생하지 않는다. 물론 인과론이 무너지거나 인과론으로 설명될 수 없는 영역이 있음도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연속성이 불연속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듯이, 불연속성도 연속성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절대적 불연속성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창조설화는 인간이 땅 혹은 흙에서 빚어졌다고 한다. 이처럼 인간은 그 유래상 땅에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와 정성이 여기 작용했다고 한다(손으로 빚고 숨을 불어넣음). 이 설화는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는 질적으로 다른 고귀한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각별하게 강조하고 있다. 그렇지만 인간(아담)은 피조물인 땅(아다마)의 소산이자 그 열매이다. 그리고 땅과 인간 혹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성 혹은 연속성은 오늘 날 진화론의 패러다임이 아니고서는 달리 설명할 합리적 설명이 없다.

전통적인 창조론이 진화론을 반대하는 또 하나의 큰 이유는 진화론이 하나님의 창조행위 혹은 섭리를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진화론자가 무신론자는 아니며, 떼이야르는 경건한 카톨릭 사제이기도 했다. 진화는 결코 무신론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자연의 법칙을 규명하려는 학문일 뿐이다. 신앙의 자유는 여전히 남아 있다. 창조신앙에서 볼 때, 진화는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의 과정으로 수용될 수 있고, 이 때에 하나님은 진화를 통해 창조하는 분으로 고백될 수 있다. 자연법칙과 자유가 상반되는 것이 아니듯이, 창조와 진화, 하나님의 섭리와 피조물의 의지가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태초의 창조에 비해 계속적,진화적 창조는 하나님의 단독적인 행위가 아니라 피조물 안에서의, 피조물을 통한 하나님의 협동과 동반행위이다. 그러므로 계속적 창조에는 하나님의 자유와 함께 피조물의 자유가 열려 있다.

또 보수적 신학은 그 보수적 인간이해를 통하여 인간과 사회 전반을 매우 비관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종종 '열린 사회'의 적이 되곤 했다. 이 신학은 '위를 향해'(즉 하나님 혹은 피안적 천당으로) 열린 인간을 강조하면서도, '앞을 향해'(즉 인류의 미래와 이 땅에 오는 하나님의 나라로) 열린 인간은 매우 억눌러 왔다. 그리하여 이 신학은 결국 '위'(초월)에 대한 불신을 조장해 왔다(칼 맑스의 종교-하늘비판: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 인간의 절망적 죄성과 그 비극적,구조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역사에 개입하고 역사를 교정하는 하나님의 인내와 관용, 용서와 구원의 은총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궁극적으로 '은총의 낙관주의자'일 수 밖에 없다. 그럴진대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더욱 더 우주와 사회, 인간의 진화와 완성을 믿는 경건한 진화론자가 되는 데 아무런 모순을 느낄 필요가 없다. 떼이야르가 바로 그러한 자에 속한다. 그는 신앙과 과학을 아무런 모순도 없이 통일시키고, 우주적 진화와 종교적 구원을 아무런 역설도 없이 일치시켰다('우주적 그리스도'는 바로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의 핵심적 사상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그는 성서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과 진화의 비젼을 하나로 통일시켜서, 과학의 이름으로 종교를 불신하고 종교를 아예 미신 정도로 취급하는 현대인에게도 열려 있는 종교적 메시지를 남길 수 있었다. 그의 '열린 우주'와 '열린 인간'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념은 오늘 우리에게 인간과 우주에 대한 무한한 신앙적 경외감을 갖게 해 주었다.

물론 그의 진화론적 인간이해에도 문제점이 없진 않다. 진화론적 문명이해는 덜 진화된 문명 혹은 인간에 대한 도태를 정당화하거나, 무분별한 진보주의를 낳을 수 있다. 이리하여 약한 인간과 문명 혹은 자연이 인간의 진화론적 진보주의의 희생물이 되거나 그렇게 되도록 강요받을 운명에 처할 수 있다. 진화 혹은 진보라고 해서 모두가 다 선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예수는 만물의 진화의 완성자만이 아니라 만물을 갱신함으로써 만물이 그 목표에 도달하도록 만드는 만물의 구원자이기도 하다. 만물의 구원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면 비역사주의에 빠질 수 있지만, 만물의 진화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면 밀림 속의 살륙, 생존투쟁(生存鬪爭)과 적자생존(適者生存)의 냉혹주의에 빠진다. 하나님은 진화를 통하여 만물을 구원하지만, 바로 구원을 통하여 만물을 진화시키는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진화(만물의 진보)의 관념은 구원(만물의 완성)의 관념에 의해 보완되어야만, 기독교 신학 안에서 적절히 그 고유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진화의 관념은 구원이 초시간적, 일시적 사건이 아니라 기나긴 역사를 통과하는 시간 속의 사건임을 밝혀 준 구원사(救援史)의 신학을 자연으로까지 확대한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기독교 신학 안으로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더욱 더 갖게 된다.

4. 과정 중에 있는 인간

 

만물이 변화의 과정에 있다고 가르치는 과정철학도 현대학문 중에서 '열린 인간'의 창조에 기여하는 학문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과정철학이라는 용어는 특히 1902년과 1930년 사이에 영국과 미국에서 전개된 화이트헤드의 철학에 중심을 두는 특정한 철학학파에 한정되는 용어이다.과정철학의 핵심은 "과정이 곧 실재이다"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현실적인 것은 하나의 과정 중에 있고, 과정 중에 있지 않은 것은 충분히 성숙된 현실이 아니다.

과정철학도 대개의 서양철학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철학 특히 헤라클리투스(Heraclitus)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는 동시대의 사상가인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와는 정반대로 실재의 근원을 유동과 변화에 두었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는 '형성'에 선행하며, 모든 변화의 바탕에는 영속적이고도 근원적인 실재가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 철학의 기초와 형이상학의 시조가 되었고, 헤라클리투스의 사상보다 더 강력하게 서구사상을 지배해 왔다. 그에 반해 헤라클리투스는 존재, 실재 혹은 실체, 본질 등의 정적 개념보다 형성, 과정, 진화 등의 역동적 개념을 더 강조해 왔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우리는 동일한 강을 결코 두 번 건널 수 없다"는 문장 속에서 잘 표현된다.

과정철학의 대변자인 화이트헤드(A. N. Whitehead) 헤라클리투스의 사상과 함께 플라톤의 철학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비록 플라톤이 과정철학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사상과 과정철학은 일치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흔히 '유기체의 철학'이라고도 불린다. 왜냐하면 그의 철학은 실재의 상호관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깨달음에 의하면 실재란 복합체 즉 유기체이며, 이 복합적 통일체 내의 각 요소들도 역시 유기적인 단위를 이룬다. 그러므로 유기체의 개념은 모든 실재를 관계성과 통일성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시간적 과정은 한 현실재에서 다른 현실재로의 전이(轉移)와 합생(合生)이다. '전이'의 과정에 대한 강조는 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시간은 불균형하게 과거로부터 현재를 통하여 흐른다. 그러기에 시간의 실재를 부정할 수 없으며, 시간이 순환한다는 교리도 인정할 수 없다. 모든 순간은 새로운 것이고 반복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다. '합생'의 과정에 대한 강조는 '영원한 현재'의 경험을 강조한다. 모든 순간은 하나의 현재이며, 이런 의미에서 무시간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합생의 순간에서 과정의 매 단위는 주체적인 직접성을 향유한다. 다만 매 단위의 합생이 완성되면, 그것은 다시 과거가 되어 새로운 과정 안에 놓이게 된다.

화이트헤드는 인간도 단일한 본질로 보지 않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속되는 현실 사태의 연속성으로 본다. 그는 전통 철학에 의해 개체적 본체로 여겨진 인간을 복합적이고 시간적 본성을 갖는 지속적 대상으로 본다. 그러나 지속적 대상이라는 개념도 실재에 대한 추상적 개념이지 실재 그 자체는 아니다. 실재 자체는 일련의 연속적인 현실 사태들이다.

과정철학은 한 편으로는 서구 문화의 원자적 개인주의와 고립주의에 반대하고, 독립성을 능가하는 이상으로서 만물의 상호의존성에 우월한 가치를 부여한다. 인간의 구체적인 경험의 순간들은 다른 경험들을 포함하고 그것들에 의존하는 만큼 더 풍부해진다. 인간은 다른 경험들에 대해 개방하면 할수록 더 깊은 실존의 향유를 경험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른 실재들과 분리되어 있는 존재로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구체적인 예가 인간의 '몸'이라는 실재이다. 몸은 추상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독립적 자아가 아니라 외계와 연결되어 있다. 몸이란 인간이 세계 안에 자리를 차지하며 세계의 일부를 이루는 방식이다. '영혼'도 시간 속에서 지속하다가 영원으로 돌아가는 어떤 본체적인 형상이 아니고, 자아를 규정짓는 조정 사태들의 연속체이다. 즉 영혼은 개인의 경험들의 조정된 흐름, 생명의 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정철학은 다른 한 편으로는 지속적인 인격적 존재의 특징으로서의 윤리적 독립성, 현재의 자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책임도 여전히 인정한다. 인간은 선조로부터 인과적 영향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비록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진정한 회개와 전향을 일으킬 수 있다. 그는 미래를 선택할 수 있고, 그에 대한 책임을 경험할 수 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을 신학적으로 수용한 과정신학은 창조적이고 응답적이며 설득적인 사랑의 하나님을 강조함으로써, 전통적인 하나님의 개념 즉 불변하며 무감각한 절대자로서의 하나님, 지배적인 통제적 힘으로서의 하나님, 우주적 도덕가로서의 하나님, 현상의 묵인자로서의 하나님, 남성으로서의 하나님에 수정을 가한다. 그리고 과정신학은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응답적인 사랑에 열려 있는 영적 실존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을 강조한다. 즉 자신의 자아에 대한 책임감을 충분히 간직하면서도 하나님의 창조적 사랑에 대해 개방하는 삶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응답적 사랑에 대해 개방하는 자아는 자신의 죄에도 불구하고 용납됨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며, 자기집중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다른 사람들을 향해 사심없는 관심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과정신학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열린 인간의 형태를 지원하고 공동체적 삶의 양식을 권장한다.

실재를 과정으로 보는 과정사상은 기독교의 하나님 신앙과 창조 이해와 일치하는 면이 넓다. 하나님은 창조와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활동하고 섭리하는 분이고, 만물을 새롭게 하는 분이라는 통찰은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핵심사항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세계를 창조하고 인도하는 분이라는 전통적 신앙고백은 하나님이 창조의 과정 안에서 피조물을 자신의 목표를 향해 설득하는 최종적 작용인(作用因)이라는 과정신학의 사상과 일치한다. 과정신학이 하나님을 이전의 세계 안에서 현실화되지 않았던 새로운 요소를 재현실화하는 분으로 보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중생(重生) 혹은 신생(新生)의 가능성, 궁극적인 새로움, 부활의 가능성을 믿는 기독교 신앙과 일치한다.

과정신학의 하나님은 자유와 피조물의 자기-창조성을 위한 여지를 열어 주는 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설득적 사랑에 힘입어서 끊임없는 창조적 변화, 새로운 가능성의 현실화를 위해 활동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순수 보수주의자는 우주의 본질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것이다"(화이트헤드). 이것은 창조의 보존과 갱신, 문화적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위임(委任),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제자로서의 삶으로 부르는 그리스도의 소명(召命), 피조물의 창조와 재창조(거듭남)를 위해 활동하는 성령의 역사(役事)에 대한 신앙과 일치한다.

그러나 과정신학이 '무로부터의 창조'를 부인하는 것, 하나님에게 악(惡)에 대한 책임의 일부분을 돌리는 것, 주체의 불멸(영생, 부활)이 아닌 주체의 영속적 소멸과 객체의 불멸을 믿는 것 등은 기독교 신앙과 조화시키기 어려운 부분이다. 아마도 이것은 과정사상이 과학적 통찰에 근거한 탓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과정신학은 진화론적 신학과 더불어 과학의 시대에서 과학적 사고와 삶의 양식을 추구하는 현대인에게 과학적 패러다임을 빌려 '열린 마음으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학으로 하여금 '열린 인간'을 창조하고 고무하도록 자극하고 고무한다. 그러므로 과정신학적 인간이해는 '열린 인간'의 한 유형으로서 신학을 설득하고 신학의 창조적 변형에 기여하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5. 철학적 인간학

'철학적 인간학'(哲學的 人間學)이란 인간에 관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학'이라는 용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1596년에 최초로 '인간학'이라는 제목 아래 저서를 내놓은 자는 프로테스탄트 인문주의자인 카스만(O. Casmann)이다. 이것이 18, 19세기부터 생물학, 인종학, 민속학의 분야로 발전되었고, 19세기 후반부터는 인류학이 첨가되어 오늘 날에 이르러 이와 같은 분야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용어가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과 인간이 우주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가장 포괄적으로 연구하는 분야는 종교적 인간학 혹은 철학적 인간학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철학적 인간학은 이전의 생물학적, 물리적 인간학과 구분된다.

1. 막스 쉘러

20세기의 철학적 인간학의 시조(始祖)로서 지속적이고도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자는 막스 쉘러(M. Scheler, 1874-1928년)이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 니체, 베르그송, 딜타이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지만, 그의 철학에 큰 영향을 준 자는 현상학(現象學)의 대변자요 그의 스승이기도 한 훗썰(E. Husserl,1895-1938년)이다. 그의 철학적 인간학의 기본사상을 보여주는 책은 사망 몇 주 전에 쓰여진 소책자 '우주 안의 인간의 위치'(Die Stellung des Menschen im Kosmos, 1928년)인데, 비록 이 책은 100 페이지에도 미달하는 작은 책자이지만, 그의 유일한 철학적 인간학의 저서로서 현대의 철학적 인간학을 탄생시켰고, 그 이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 기념비적 명저가 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서양의 인간론의 바탕을 이루는 세 가지의 이념으로서 유대교적, 기독교적 인간이념(하나님의 피조물, 죄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상)과 고대 그리스적 인간이념(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상) 그리고 현대의 인간이념(진화론에 근거한 자연과학적 인간상)을 들고, 이 세 가지 유형의 인간학이 서로 아무런 공통점이나 상호보완적 성격을 지니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는 인간에 관한 통일된 관념을 갖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새롭게 규명하기 위한 야심찬 시도를 감행했다. 그는 한 편으로는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비교함으로써 자연체계적 개념에서 본 인간상을 규정하려고 시도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다른 생명체와는 달리 인간에게만 특수한 위치를 부여하는 본질적,철학적 개념에서 본 인간상을 규정하려고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그는 생명체의 심적인 세계의 여러 단계를 나누었다. 즉 그는 외적인 관찰의 대상으로서는 객관적 현상으로 나타나지만 내적으로는 마음(정신, 영혼)으로서 표현되는 생명체의 주관적,자각적 현상의 단계를 네 단계로 나누었다.

1) 최하의 첫 심적인 단계로는 식물의 본질을 이루는 무의식적,무감각적,무관념적 '감정충동'(感情衝動)이 있다. 이 단계에서는 감정과 (영양적, 성적) 경향성, 목표성이 아직 분명히 구별되지 않는다. 이것은 예를 들면 광선에 대한 식물의 반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반응은 항상 동일한 것이지만, 아무런 감각, 연상작용, 조건반사도 없다. 그래서 식물은 기억능력, 학습능력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다. 동물의 감정충동은 식물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성장과 생식을 위한 일반적 충동이다. 감정충동은 인간에게도 존재하고 있다. 모든 충동과 일시적 감정의 통일체를 의미하는 인간의 충동은 뇌수 계통에 자리잡고 있고, 일차적으로는 저항의 체험으로 나타난다.

2) 둘째의 심적인 단계는 '본능'(本能)이다. 이것은 무의식적,무감각적,무관념적 감정충동에 뒤따르는 두 번째의 심적인 본질의 형식으로서 하등동물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 본능의 특징은 의미-목적 지향성(자신이나 남의 완전함과 유익, 특정 목적에 합당함), 주기성(週期性), 반복성(유형적으로 반복하는 상황들만을 향해 관여하면서 언제나 종에 유용한 구실을 함), 유전성(경험과 학습에 의해 습득되거나 전문화될 수 없음)에 있다.

3) 셋째의 심적인 단계는 '연상기억'(聯想記憶)이다. 이것은 동일한 행동의 횟수에 의존하여 이전의 행동에 따라서 자신의 행동을 개변하여 가는 능력으로서 모든 동물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행동개변(行動改變)은 생활에 적합한 방식으로, 기교적으로, 서서히 그리고 끊임없이 일어난다. 이런 능력은 습관에 의해 획득되고 전문화될 수 있으며, 파블로프(I. P. Pavlov)가 발견한 '조건반사'(條件反射)라는 기억에 기초하고 있다. 이런 기억의 원리와 모방과 모사(模寫)라는 두 현상들 간의 연관에 의하여 전통(傳統)이라고 일컫는 것이 비로소 생겨나는데, 일회적이고 개인적인 체험의 사건을 자각적으로 상기하고 다수의 상기작용들을 상호 간에 동일한 것으로 끊임없이 확인해 나가는 능력은 인간에게만 있는 고유한 능력이다. 그리고 연상의 원리는 본능과는 달리 개체의 생명체를 종적 예속성(種的 隸屬性)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생명을 풍요하게 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해 준다. 즉 본능으로부터 해방된 충동은 쾌락의 원천이 된다(자위행위의 예). 그러나 생명의 기쁨이나 정신적 기쁨보다 순전히 기능적, 상태적, 감정적 쾌락을 더 지향하는 생활태도는 개인과 민족의 노후현상을 드러낸다. 하지만 인간은 정신적 쾌락과 기능적 쾌락을 구분하는 가능성을 동물보다 더 크게 갖고 있기 때문에, 비록 동물 이하의 상태로 떨어질 순 있어도 결코 하나의 동물일 수는 없다.

4) 넷째의 심적인 단계는 '실천적 지능'(實踐的 知能)이다. 이것은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여 이전의 행동의 횟수와는 상관없이 갑작스럽게 의미있는 행동을 하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연상기억과 구분된다. 이것은 선이나 복리를 다른 것보다 더 나은 것으로 선택하는 능력, 생식의 과정에서 동족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능력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러한 실천적 지능은 갑적스럽게 솟아오르는 통찰, 생산적,창조적 사유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동물(침팬지)에게도 아주 단순한 지능적 행동이 있다고 보는 자가 있는 반면에(W. Köhler), 동물에게는 기억과 본능 외에는 아무 것도 없고 지능은 인간의 전유물이라고 보는 자들도 있지만, 몇 개의 경우에는 동물에게도 부정할 수 없는 지능적 행동이 있다(동물들의 매장행위, 쾌적한 것보다 유용한 것을 택하는 우선적 선택능력, 선물, 융화, 우애와 같은 요소들).

이처럼 생명체의 심적인 현상의 제 단계를 구분한 쉘러는 이제 '우주 안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를 탐색한다. 동물도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인간도 다만 양적으로만 동물과 차이가 있을 뿐이지 질적으로는 동물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존재인가? 아니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동물과 차이점을 갖는가? 쉘러에 의하면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점은 단지 지능과 선택능력에 있지는 않다. 인간의 본질과 특수한 위치는 그보다 더 높은 단계에 있다. 즉 인간이 동물과 본질적으로 차이점을 갖도록 하는 새로운 원리 즉 미지수 X가 존재하는데, 이것을 쉘러는 정신(Geist) 혹은 인격(Person)이라고 부르고 있다.

정신 혹은 인격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쉘러에 의하면 모든 종류의 명령, 압박, 의존성, 구속성으로부터의 해방에 있다. 쉘러는 이것을 '세계개방성'(世界開放性)이라고 부른다. 동물은 충동과 환경 즉 세계에 고착되어 있는 반면에, 인간은 무제한적으로 세계로부터 벗어나 개방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는 환경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다. 식물과 동물은 자기의식이 없고 자기를 소유하거나 지배하지 못한다. 그 반면에 인간은 정신집중, 자기의식, 대상화의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런데 쉘러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집중, 대상화의 능력은 세계의 한 부분이 아니라 세계 밖에 있다. 정신 혹은 인격은 생명의 진화에 근거해 있지 않고, 오로지 만물의 최고 원인인 신(神) 자체에 근거해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자신과 이 세계를 초월할 수가 있는 것이다.

쉘러는 자연과학적 인간상과 그리스적 인간상과 기독교적 인간상을 통일시키고 종합한 인상을 준다. 그는 이 세 가지 인간상을 생명체의 심적인 현상의 도식 안에서 다같이 수용하면서도, 자연주의적, 동물적 인간이해로부터 시작하여 합리주의적, 이성적 인간이해를 거쳐 초이성적, 신앙적 인간이해로 진화하는 인간상을 그렸다고 볼 수 있다. 즉 그는 충동적인 존재(식물)로부터 시작하여 본능적인 존재(하등동물)와 연상기억의 능력과 실천적 지능을 갖는 존재(고등동물)를 거쳐 이 모든 것을 지니면서도 이것을 벗어날 수 있는 정신적, 인격적 존재(인간)로 진화하는 인간상을 대변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기독교적 인간상에 도달한 것 같다. 그리하여 그는 전통적인 제 인간이해를 상호 보완하고 통일시킬 수 있는 하나의 의미있는 인간상을 제시했다. 그래서 그가 실증주의적 관점으로부터 출발하여 초실증적 영역 즉 인격과 정신의 영역에까지 이르는 폭넓은 인간상을 제시한 점은 인간학의 분야에서 그가 남긴 독특한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도 결국에는 인간을 무한히 '열려 있는' 존재로서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그의 '세계개방적 존재로서의 인간이해'는 앞 장에서 설명한 '진화론적 인간이해'와 '과정신학적 인간이해'와 함께 '열려 있는 인간'을 지원하고, 그래서 기독교의 인간이해를 지원한다. 기독교는 이러한 인간이해를 선교를 위한 '접촉점'을 설정하는 단초만이 아니라 질문(열림)과 대답(계시)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는 단초로서도 수용할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런 철학적 인간학은 기독교적 인간이해의 인식의 지평을 확대시키는 데에도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다시 부연해서 말하자면, 열린 정신적,인격적 존재로서의 인간이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기독교적 인간이해와 접촉하고 질문-대답의 구조 안에서 후자와 관련맺으며, 또 후자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해석학적 패러다임으로 활용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쉘러는 때로는 식물과 동물을 과대평가하거나 인간을 과소평가한 점 외에도, 인격의 개념을 너무 추상적으로 설명하거나 인격을 신적인 본성을 갖는 것으로까지 지나치게 절대화한 점은 비판의 여지를 남긴다. 그리고 그가 최종적으로 신의 영역 안으로까지 인간이해를 확장시킴으로써, 인간의 특수성과 존엄성을 한없이 높여 놓았다고 하더라도, 그가 이해한 신은 초기와는 달리 사물 이전이나 그 후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사물과 함께 있는 신이다. 즉 이 신은 영원히 세계를 현실화하는 가운데 존재하는 신, 미완성의 신, 생성되어 가는 신이다. 그리고 신이 생성되는 유일한 장소는 인간, 인간의 자기의식이다. 그러므로 이 신은 대상화할 수 없는 신이다. 따라서 여기서 유대교적, 기독교적 인격신론은 무너지고 신비주의적 범신론(汎神論) 혹은 만유유심론(萬有唯心論)만이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무로부터의 창조' 신앙도 무너진다. 신의 생성은 인간에 의존하고 인간은 신의 생성에 의존한다는 쉘러의 사상은 헤겔의 사상보다 더 철저히 세계내재적이다. 여기서 신도 결국에는 시간의 생성물이 되고 말며, 신을 생성시키는 시간 외에는 절대적인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셈이 된다.

2. 헬무트 플레쓰너

헬무트 플레쓰너(Helmuth Plessner)는 그의 책 '유기체의 제 단계와 인간'(Die Stufen des Organischen und der Mensch, 1928년)에서 쉘러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게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려고 했다. 그의 인간학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개념은 '탈중심성'(脫中心性)이라는 개념이다. 그에게도 '정신'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진 않지만, 이것 대신에 그리고 이것을 나타내는 다른 이름으로서 바로 '탈중심성'이라는 개념이 중심에 차지한다. 즉 그에 의하면 인간은 탈중심적 위상을 갖는 존재이다. 고등동물은 식물과는 달리 생명표현의 중심을 그 자신에게서 갖고 있다. 이 중심은 진화의 과정 속에서 중심적인 생명조직을 점차로 발전시켜 나가면서 더 강화된다. 그 반면에 인간은 이 중심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도 넘어선다. 즉 그는 자신의 중심을 자신 안에서만이 아니라 자신 밖에도 가진다. 동물의 생명이 중추적(中樞的)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이 중추성을 깨뜨리지 않으면서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서 탈중추적이다.

이런 설명을 통해서 플레쓰너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거리를 갖고서 입장을 취하는 능력, 자기반성(自己反省)의 능력을 갖고 있음을 지적한다. 즉 인간의 중심은 그 자신으로부터 구별하고 자신과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전적으로 자신을 반성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이 제 2의 중심은 '순수자아' 혹은 '대상화될 수 없는 자아'이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을 소유하고 인식하며 체험할 수가 있다. 그 반면에 동물은 주위 영역과 자기 신체를 지배하고 체험하며 자기를 형성할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을 체험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동물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제 2의 중심, 순수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플레쓰너는 이 순수자아의 근원을 생명 밖의 어떤 원리 즉 신에게서 찾지 않는다. 즉 그는 모든 생명에 대립되어 있는 독자적이고 자립적인 원리를 끌어오지 않는다. 그에게서 탈중심은 인간의 진화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생명 자체의 구조적 수정이다.

탈중심성은 생명권을 이탈하여 그것과 마주 설 수 있는 인간 특유의 존재방식이다. 이 탈중심적 위상에서부터 인간을 볼 때, 인간은 삼중적 위상(位相)을 갖는다. 즉 그는 하나의 생명체로서는 '신체'요, 신체 속에서는 내면적 생명 즉 '마음'이요, 신체 밖에서는 양자(신체와 마음)와 관계를 맺는 '정신'이다. 이 삼중적 위상에 상응하여 인간은 세개의 세계를 갖는다. 즉 신체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존재하는 물(物)의 세계로서 외계(外界)요, 마음은 신체 속의 세계로서 내계(內界)요, 정신은 인간 특유의 탈중심적 위상형성에 의해서 형성되고 존립하는 정신의 세계로서 공동세계(共同世界)이다. 그런데 정신은 인간의 탈중심적 위상형성에 의해서 성립하므로 양면성, 대립성 혹은 역설성(逆說成)을 나타낸다. 즉 정신은 세계 속에 있으면서도 세계와 대립하며, 자신 속에 있으면서도 자신과 대립하며, 주관이면서도 객관이다. 그리고 인간의 탈중심적 위상으로 인하여 인간은 다른 생물과 다른 법칙 속에서 산다.

1. 자연적 인위성(人爲性)의 법칙: 다른 생물은 그의 생물학적 중심 속에 완전히 몰입되어 있으나, 인간의 존재방식은 그의 중심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본성적으로 인위적인 삶을 지향하도록 규정된 존재이다. 즉 그는 다른 동물들처럼 자연적인 모습 그대로 직접적으로 살아갈 수 없고 인위적인 수단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살아야 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탈중심적 위상으로 인하여 인간은 균형이 잡혀 있지 않고, 시간적, 공간적 자리가 없으며, 구조상 고향이 상실되어 있으므로, 스스로 균형을 유지해야 하고, 그 무엇으로 되어 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문화적 존재가 된다.

2. 매개된 직접성(直接性)의 법칙: 동물은 그의 위상적 중심 속에 몰입되어 있으므로, 그의 삶은 직접적인 것이요 따라서 그 무엇에 의하여 매개된 것이 아니다. 그 반면에 인간은 그의 삶의 중심에서 이탈한 탈중심적 존재이므로, 그의 삶은 자기 바깥에 놓여 있는 점 즉 탈중심적 중심에서 의식되고 매개된 것이다. 인간의 문화적 창작활동은 바로 이런 법칙으로부터도 설명될 수 있다.

3. 유토피아적 입장의 법칙: 인간은 자신의 구조적 무근저성(無根低性) 즉 탈중심성으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해 공허감을 품게 된다. 인간은 이런 공허감 속에서 자신의 일면성, 개별성, 이 세계의 개별성을 의식한다. 이리하여 그는 현존재 전반의 절대적 우연성을 통절하게 의식하게 되고, 이것을 통하여 인간은 결국에는 그 자체 속에 머물러 있는 필연적 존재 즉 절대자, 세계근거 혹은 신의 관념에 도달한다. 인간의 종교는 바로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설명될 수 있다. 종교는 자연과 정신이 인간에게 줄 수 없는 것 즉 궁극적인 것을 인간에게 가져다 준다. 즉 종교는 인간에게 궁극적 결속과 공속, 아늑함, 운명과의 화해, 삶과 죽음의 처소, 세계관, 고향을 가져다 준다. 결국 인간은 그 구조적 탈중심적 위상성으로 인하여 신앙을 필요로 하는 존재, 유토피아를 바라보고 동경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플레쓰너 쉘러가 '정신'이라는 개념으로 다소 모호하고 종교적으로 설명했던 내용을 '탈중심성'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그보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탈중심성'의 개념도 쉘러의 '세계개방성'의 개념과 거의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그에게서도 정신은 자기집중의 능력과 함께 세계와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에게서도 인간은 다른 생물과 다른 독자적이고 특수한 위치를 부여받는다. 그도 인간을 구조적으로 '열린 존재'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쉘러의 인간이해를 물려받고 있다.

단지 쉘러에게서는 인간정신의 세계개방성이 세계 안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되어 가는 신(神) 안에 근거하고 있다면, 플레쓰너에게서는 인간정신의 탈중심성이 이런 초월적, 자립적 원리에 근거해 있지 않고 인간생명의 자체적 구조수정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왜 자신의 생명에게도 대립될 수 있고 해가 될 수 있는 이런 구조적 수정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인간은 왜 동물적인 생명을 초월하여 새로운 진화를 감행했는지 그 이유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이 부족하다. 그에 반해 쉘러에게서는 인간생명의 이러한 자기초월은 인간 안에서 영원히 생성되어 가는 초월적 신의 자기운동 안에 근거해 있다. 그러나 플레쓰너에게서는 인간의 탈중심적 위상이 필연적으로 형성되고 존립되는 기반이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쉘러에게서는 비록 인간이 다른 생물보다도 훨씬 더 발전된 중심적인 신경조직을 갖추면서 자기집중의 능력을 점차로 강화시켜 왔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자신 안에서의 신의 영원한 생성 아니 신 안에서의 인간의 영원한 생성을 지향하고 있다. 즉 인간의 궁극적 특성은 동물에 반해 본질적으로 세계-자기초월(개방)적이다. 그러나 플레쓰너에게서는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탈중심적 중심을 갖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자기중심성과 탈중심성의 상호관계도 모호하다. 아마도 그 이유는 가능한 한 종교적 전제(A poriori)를 버리고 철저히 실증주의적 관점(A posteriori)을 시종일관 유지하려는 태도에 있는 것 같다. 이에 대해서는 겔렌의 설명을 들어보는 것이 유익할 것 같다.

3. 아놀트 겔렌

아놀트 겔렌(Arnold Gehlen)은 그의 책 '인간 - 그의 본성과 세계 안의 위치'(Der Mensch - seine Natur und seine Stellung in der Welt, 1940년)에서 현대적인 철학적 인간학을 대표하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특히 네델란드의 해부학자 볼크(Ludwig Bolk)의 영향을 받아 인간을 '결함을 지닌 존재'(Herder의 용어임)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인체의 여러 기관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특성들은 하나의 정체현상을 빚고 있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태어날 때부터 이미 모든 면에서 미숙하고 의지할 곳이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외부환경의 공격에 방어할 수 있는 본능을 갖지 않기 때문에, 즉 인간의 본능이 저지되거나 퇴화되었기 때문에, 결함을 지닌 존재일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인간에게는 본능의 저하, 제약 대신에 지각과 학습능력이 보상으로 주어져 있다. 결함을 보충하기 위하여 인간은 '세계개방성'을 갖는다(이런 의미에서 그도 쉘러의 '세계개방성'이라는 개념을 수용한다). 먼저 인간은 지각세계의 개방성을 갖는다. 인간의 감각기관은 무방비상태로 개방되어 있어서 세계 내의 온갖 지각가능한 것이 인간을 향하여 밀려오고 쏟아져 들어온다. 인간은 세계 내의 모든 지각요인에 대해서 개방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은 표상세계의 개방성을 갖는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표상(表象)의 힘에 의하여 세계의 제한을 벗어나 공간적으로 자유로운 세계, 풍부한 내용과 가능성을 지닌 세계에 관여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세계의 개방성을 갖는다. 세계도 이에 대응해서 무한한 풍부성, 가능성, 다양성, 개방성을 갖고 있다. 인간에게는 폐쇄적으로 규정된 본능도식이 없기 때문에, 세계도 무한한 가능성 속에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처음에는 세계개방성을 당혹감과 부담감 속에서 소극적으로 체험한다. 그러므로 그는 우선 세계개방성이 주는 부담을 감면해야 한다. 그 다음엔 인간은 생활에 부정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을 자신의 힘으로 긍정적인 조건으로 변화시켜 나간다. 인간의 본능적 결함을 보상하는 것은 특히 언어와 문화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문화를 창조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는 언어 속에서 상징적인 우주를 창조함으로써, 그에게 닥쳐오는 다양한 자극으로부터 벗어난다. 인간은 그의 세계를 극복함으로써, 자신을 창조한다.

쉘러에게서 인간의 정신, 인격이 최고의 존재근거인 신에서 기인한 반면에, 겔렌에게서 인간은 엄격한 의미에서 자기창조적이다. 이런 점에서 그도 플레쓰너와 같은 입장에 서 있다. 인간의 세계개방의 능력을 위하여 굳이 신이라는 초월적 근거를 끌어대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이나 종교도 단지 인간의 창조물, 세계극복의 부산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예술과 마찬가지로 환상에 근거하고 있다. "신들의 세계는 단순한 오성의 대상도 아니고, 이성의 대상도 아니며, 오로지 환상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쉘링)는 것이다.

겔렌도 인간을 개방적 존재, '열린 존재'로 보는 점에서, 쉘러 플레쓰너의 노선에 서 있다. 그러나 그는 그 누구보다도 실증주의적 관점에서 인간을 통일적으로 고찰하여 철학적 인간학의 체계를 집대성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인간의 특수성을 견지해 나갔다.

그러나 그도 실증주의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비록 인간의 세계개방성이 인간진화의 하나의 필연적인 궤도수정이라는 점을 용인한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세계개방성이 인간의 본능적 한계라는 결함을 극복하기 위한 창조적 부산물이라는 점을 용인한다고 하더라도, 종교를 단지 인간학적 입장에서 인간의 상상물로만 보는 것은 종교의 본질을 다 꿰뚫어 보았다고 할 수는 없다. 실증학문의 입장에서 볼 때, 신은 어디까지나 가설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는 개념이기에 애당초 배제할 수 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신에 대한 신앙은 단순히 생물학적 기원에서만 완전히 해명될 수는 없다.

그리고 인간이 본능구조의 상대적 결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중심적인 본능체계를 더 강력히 발전시키려고 하지 않고, 왜 이를 보상하는 문화적 창조행위에 몰두하는가? 보상은 문제의 적극적 해결책이 아니고 소극적 우회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동물보다 더 비겁하고 무능한가? 왜 인간은 자신의 생물학적 가치마저도 넘어서서 예술과 종교에 몰두하는가? 예술과 종교는 인간의 부정적 결함을 긍정적인 요소로 바꾸어 놓으려는 시도라는 겔렌의 주장은 이런 질문 앞에서 그 적절한 대답을 제시하기 어렵다. 그렇더라도 그에게서 인간이 본질적으로 '위를 향해' 그리고 '앞을 향해' 무한히 열려 있는 존재임을 실증적으로 규명한 그의 이론은 기독교가 반갑게 여길 선교와 신학의 '접촉점'이지, 그 무신론적 경향 때문에 무조건 배척할 이론만은 아니다.

 

6.동양적 인간이해

1. 불교의 인간이해

불교에서 보는 인간은 정지되고 고정된 어떤 실체로서의 인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불성(佛性)을 내포한 존재이다. 단지 이 불성이 인간조건이라는 무명(無明)에 의하여 가리워져 있기 때문에, 선입견과 편견으로 짜여진 지금의 나의 고정관념을 마치 인간의 참된 모습으로 오해하는 데서 진실한 불성이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불성도 어떤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다. 불성은 중도(中道)를 말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이렇다 하고 집착하자마자, 불성은 상실된다. 인간에 대해서도 이렇다 저렇다는 인간의 속성을 고집한다면, 이미 인간성의 본질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인간성의 무한능력을 인정하고 일체의 것에 대한 고정된 생각을 일단 부정하는 데서 참다운 인간성이 드러난다. 불교는 이러한 인간성의 구체적인 모습을 청정자성(淸淨自性), 자재(自在), 편만(遍滿) 등의 용어로 설명해 왔다.

열반경(涅槃經)은 불성의 네 가지 덕을 상(常), 낙(樂), 아(我), 정(淨)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떠한 실체가 아니다. 우리의 본성이 언제나 있고 즐겁고 변함없고 깨끗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성은 우리의 집착과 그로 인한 무명에 의하여 은폐되어 마치 현상에 나타난 모습 그대로를 진리인 양 착각함으로써 불성인 진리 자체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종교로서의 불교는 규범의 현실을 통하여 도덕적 인간성을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현실적 고뇌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라는 인생론적 입장에서 인간성을 해명하고 있다. 특히 불교는 현실의 차별상의 다양한 인간존재의 양상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미 인간에게는 더럽고 추잡한 면이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 즉 인간이 아닌 타자인 초월자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인간적 조건에 의하여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진 무명에 의하여 일어난 가상(假相)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자아의 자주적 주체성을 강조한다. 인간이란 무제한적 능동성을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무한자재(無限自在)의 불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宋錫球, 佛敎의 人性論(大乘起信論을 중심으로)

* 성철스님 법어집(1집 7권) "자기를 바로 봅시다"(장경각, 1987) 참조

"선악의 시비는 허황한 분별이요, 현실의 참 모습은 영원하고 무한한 절대진리 위에 서 있습니다. 모순과 갈등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으며, 평화와 자유로 수놓은 행복의 물결이 항상 넘쳐 흐르는 탕탕무애한 광명이 가득 차 있습니다."(9)

"고통은 아주 없고 행복만이 꽉 찼으니 극락, 천당 빛을 잃고 부처님도 할 말이 없습니다... 성인과 악마는 부질없는 이름이니, 공자와 도척이 손을 맞잡고 태평성세를 축복합니다...대립과 투쟁은 사라지고 평화만이 넘치는 이 세계를 눈을 들어 역력히 바라보며 함께 찬양합시다."(13)

"일체의 본모습은 유무를 초월하고, 유무를 포함하여 물심이 융화하여 피아(彼我)가 상통합니다."(14)

"악하다 천하다 함은 겉보기뿐, 그 참모습은 거룩한 부처님과 추호도 다름이 없어서, 일체가 장엄하며 일체가 숭고합니다."(18)

"인간은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 오셨습니다."(19-20)

" 중도(中道)가 부처님이니 중도를 바로 알면 부처님을 봅니다. 중도는 중간 또는 중용(中庸)이 아닙니다. 중도는 시비선악 등과 같은 상대적 대립의 양쪽을 버리고 그의 모순, 갈등이 상통하여 융합하는 절대의 경지입니다. 시비선악 등의 상호 모순된 대립, 투쟁의 세계가 현실의 참모습으로 흔히 생각하지만 이는 허망한 분별로 착각된 거짓 모습입니다...시(是)가 즉 비(非)요, 비가 즉 시이며, 선악이 융합하여 선이 즉 악이요, 악이 즉 선이니 이것이 원융무애한 중도의 진리입니다...만법이 혼연융합한 중도의 실상을 바로 보면, 모순과 갈등, 대립과 투쟁은 자연히 소멸되고 융합자재한 일대단원(一大團圓)이 있을 뿐입니다.. 대립이 영영 소멸된 이 세계에는 모두가 중도 아님이 없어서 부처님만으로 가득 차 있으니..."(21-22)

"일체 만물은 서로서로 의지하여 살고 있어서, 하나도 서로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이 깊은 진리는...연기(緣起)의 법칙이니 만물은 원래 한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물과 불은 상극된 물체이지만, 물과 불을 함께 조화롭게 이용하는 데서 우리 생활의 기반이 서게 됩니다."(23)

"천지가 한 뿌리요, 만물은 한 몸이라. 일체가 부처님이요, 부처님이 일체이니 모두가 평등하며 낱낱이 장엄합니다."(27)

"사탄과 부처란 허망한 거짓 이름일 뿐 본모습은 추호도 다름이 없습니다...일체의 불행과 불안은 본래 없으니 오로지 우리의 생각에 있을 뿐입니다.. 선과 악으로 모든 것을 상대할 때 거기서 지옥이 불타게 됩니다. 선악의 대립이 사라지고 선악이 융화상통할 때 시방세계에 가득히 피어 있는 연꽃을 바라보게 됩니다."(29-30)

"보통 보면 선과 악이 서로 대립되어 있는데, 불교의 중도법에 의하면 선악을 떠납니다. 선악을 떠나면 무엇이 되는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그 중간이란 말인가? 그것이 아닙니다. 선과 악이 서로 통해 버리는 것입니다. 선이 즉 악이고, 악이 즉 선으로 모든 것이 통합니다."(44)

"헤겔의 변증법에서는 모순의 대립이 시간적 간격을 두고서 발전해 가는 과정을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모순의 대립이 직접 상통합니다...그렇게 되면 이것이 극락이고, 천당이고 절대세계다 그 말입니다."(46)

"아무리 좋은 보물도 깨끗한 거울 위에서는 장애가 되고, 거울 위에 먼지가 쌓일수록 거울이 더러워짐과 같이 지식과 학문이 쌓일수록 마음의 눈은 더욱 더 어두워집니다... 허공보다 깨끗한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마음의 눈을 활짝 열고 이 광명을 뚜렷이 바로 봅시다."(12)

"끊임없는 욕심에 눈이 가리워 항상 빛나는 본모습을 보지 못하고 암흑세계를 헤매며 엎치락뒤치락 참담한 비극이 계속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입니다."(14)

"현대는 물질만능에 휘말리어 자기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큰 바다와 같고 물질은 거품과 같습니다. 바다를 봐야지 거품은 따라가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20)

"착각된 허망한 분별인 시비선악 등을 고집하여 버리지 않으면 상호투쟁은 늘 계속되어 끝이 없습니다...시비선악의 양쪽을 버리고 융합자재한 이 중도실상을 바로 봅시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원한 휴전을 하고 절대적 평화의 고향으로 돌아 갑시다."(21-22)

"불교에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절대로 구원이란 없습니다... 모든 존재가 전부 부처고, 모든 처소가 다 정토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사바세계가 있고 중생이 있는가?...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우주법계 전체가 부처 아닌 존재 없고 전체가 불국토 아닌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르고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은 '내가 중생이다', '여기가 사바세계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84-86)... 자기가 본래 부처이지만 눈감고 있으면 캄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눈을 뜨겠느냐 이것입니다...가장 쉬운 방법이며 제일 빠른 방법이 참선(參禪)입니다. 화두(話頭)를 배워서 부지런히 부지런히 참구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 방법이 또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눈을 무엇이 가리고 있어서 캄캄하게 되었는가?... 불교에서는 그것을 탐(貪), 진(瞋), 치(癡), 삼독(三毒)이라고 합니다.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이 삼독이 마음의 눈을 가려서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국토인 여기에서 중생이니 사바세계니 지옥을 가느니 하는 것입니다...그 삼독 중에서도 무엇이 가장 근본이냐 하면 탐욕입니다...탐욕만 근본적으로 제거해 버리면 마음의 눈은 자연적으로 뜨이게 되는 것입니다.

탐욕은 어떻게 하여 생겼는가? '나'라는 것 때문에 생겼습니다...'나'라는 것이 중심이 되어서 자꾸 남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세상은 전부 내가 중심이 되어서 나를 위해 남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지만, 불교는 '나'라는 것을 완전히 내버리고 남을 위해서만 사는 것입니다."(88-91)

참조: 모든 사람이 다 부처님이다 - 선가의 신행이론을 통해본 인간관 (pdf 파일)

 

2. 성리학의 인간이해

성리학(性理學)은 심성(心性)의 수양을 과거 어느 유학보다도 철저히 하면서 동시에 규범법칙과 자연법칙으로서의 이(理) 또는 성(性)을 깊이 연구하여 그 이(理)의 의미를 완전히 실현하려는 유학 중의 하나이다. 한마디로 성리학은 종래의 유학을 형이상학적으로 재구성, 발전시킨 것으로서, 사상적으로는 도교 특히 불교의 영향을 받고 그 영향을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발흥하였다. 그래서 성리학은 불교적인 사상체계와 닮은 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주희(朱憙)에 의해 집성된 성리학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근거하여 인간을 설명한다. 주자는 만물과 인간의 기원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이 우주에는 理와 氣가 있다. 理라는 것은 形而上者요, 生物之本이다.

     

     

    氣라는 것은 形而下의 그릇이다. 氣는 物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킨다.

     

     

    이와 같이 사람과 만물의 본성도 역시 반드시 이 理를 부여받은 뒤에

     

     

    性을 갖게 되고, 또 반드시 이 氣를 받은 뒤에 구체적인 형체를 갖게 된다.

     

     

    (朱子文集, 五十八, 答黃道夫書)

 

다시 말하면, 인간의 존재구조와 우주의 존재구조는 동일하다는 분석이 된다. 이는 인간윤리의 근거를 우주생성론에 두는 매우 정교한 사유체계이다. 인간존재는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理와 氣의 종합을 통해 이루어진 존재인 것이다. 이 때 理로 인해 '本然之性'이 생기고 氣로 인해 '氣質之性'이 생긴다. 인간의 마음은 이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본연지성이란 만물에게 보편적으로 부여된 공통적인 것이고, 순선(純善)한 것이다. 이에 반해 기질지성은 사물마다 타고 나는 정도가 달라서 不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인간은 다른 사물들보다 뛰어난 기질을 타고 난 까닭에 가장 신령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주자의 성리학이 조선에 도입되기 시작한 때는 고려 충렬왕(13세기 후반)이지만, 본격적으로 이론적인 탐구가 전개된 때는 16세기이다. 가장 대표적인 학자는 퇴계 이황(1501-1570)이다. 퇴계의 인간이해도 '理氣二元論'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자의 인간이해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양자는 모두 物我一體觀的 입장에서 인간과 사물의 구조의 존재구조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다. 퇴계도 인간을 존재원리로서의 理와 심신의 구성요소로서의 氣가 종합되어 있는 존재로 파악한다. 즉 인간도 하나의 존재로서 氣를 받아 태어날 때 당연히 원리로서의 理를 내재적으로 가지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며 이는 순수하고 지선하다. 따라서 본성이 그대로 발동하여 情이 된다고 하더라도, 이 정에는 불선이 없다. 이것을 일컬어 퇴계는 '四端의 情'이라고 한다. '四端의 情'이나 '七情의 情'이나 理와 氣가 조화를 이루는 본래의 모습은 선하다. 다만 그것이 발할 때 서로 中絶을 지키지 못하고 균형을 어그러지게 되어 불선이 된다. 그러므로 항시 理와 氣가 어그러지지 않도록 마음을 잘 다스려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퇴계의 수양론의 핵심을 이루는 '敬'이다.

그런데 주자와 퇴계에 의하면 氣의 조화에 따른 현실적인 차별이 선천적으로 인간 안에 내재해 있기 때문에, 이 차별은 인간을 등급으로 나누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인간이해는 신분중심적인 사회를 인정하는 지배이념을 제공하였다.(李滉, 聖學十圖, 韓國思想全集 2, 韓國의 儒學思想, 삼성출판사, 1981.)

3. 민간신앙의 인간이해

민간신앙은 고도의 학문적 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분명한 인간이해를 내세우고 있지는 않다. 단지 무속, 풍수, 도참, 점복, 예언 등의 저변에 깔려 있는 세계관을 토대로 이것들의 인간이해를 살펴 볼 수 있을 뿐이다.

먼저 민간신앙의 기본적인 세계관은 '天人相與'라고 하는 유기체적인 세계관이다. 즉 자연과 인간은 서로 감응하는 존재이며, 인간은 이러한 세계 속에서 인생의 행복을 축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현세성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민간신앙의 성격은 성리학의 현실중시사상과 일치하는 점이 있게는 하지만, 자연과 인간은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인 힘들에 의해 운영된다고 보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성리학과 갈라서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이 초월적인 힘을 주술 등과 같은 종교적 의례에 의해서 장수와 부귀영화, 안락한 생활을 보장해 주도록 할 수 있다고 본다. 이렇게 자연계와 인생계를 움직이는 초월적인 힘들을 인간에게 유리하도록 조정할 수 있다는 사고는 민간신앙의 세계관이 '天地人三才思想'의 연장선 상에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민간신앙의 인간이해는 기본적으로 자연과 인간을 연속선 상에서 파악하는 유기체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유교와 비슷하지만, 대상적인 존재들로서의 신령을 신앙하고 공동체적인 도덕관보다는 개인의 안락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교와 차이가 난다.

민간신앙이 갖는 사회적 기능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규범문화인 유교문화가 갖는 종교적 약점을 보충하며 사회구성원들의 불안요소를 해소시켜 줌으로써, 사회를 안정케 하는 순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피지배계급인 민중들의 현실도피적인 사상을 체계화하여 사회개혁적인 민중운동으로까지 발전하도록 도와주는 역기능이다.

(柳東植, 韓國의 民俗, 宗敎思想, 삼성출판사, 한국사상전집 4,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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