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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9-07
 제목  인간론의 의의
 주제어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1.인간론의 의의

1.자신을 찾고 있는 인간

 

"인간이란 무엇인가? 아니 무엇이 인간이고, 무엇이 인간이 아닌가? 아니 나 자신은 누구인가?"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끊임없이 던져 온 이 물음은 아직도 인간은 자신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인간이 이런 물음을 자신에게 던지면서도 그 스스로 대답을 내릴 수 없다는 이 모순 자체가 이미 인간의 신비와 함께 인간의 무지를, 인간의 존엄성과 함께 인간의 가련함을 입증한다. 파스칼은 이 점을 짧은 경구로써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인간이란 얼마나 해괴하고, 얼마나 진기한가?

     

     

    얼마나 괴물같고, 얼마나 혼돈스러우며,

     

     

    얼마나 모순되고, 얼마나 신통한가?

     

     

    만물의 심판자이자 지상의 힘없는 벌레.

     

     

    진리의 관리자이자 불확실과 오류의 무더기,

     

     

    우주의 영광이자 수치.('팡세' 중에서)

     

     

델피 신전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써 유식하다는 당대의 온갖 지식인들의 무지를 폭로하고 그들을 창피하게 만들었던 소크라테스처럼, 오늘 우리는 "나 자신을 알라"는 자신의 요구 앞에 무지와 당황을 경험한다. 우리는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고 살아간다. 특히 나 자신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군가 나는 자신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폭로한다면, 스스로 죽고 싶거나 그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을까? 아마도 소크라테스도 정적(政敵)에 의해 죽임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인간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에 독배형에 처해진 것은 아닐까? 아니 혹시 그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면서까지 인간의 무지를 여지없이 드러낸 후에 그가 구원자로 환영한 죽음으로부터 해답을 갈구한 건 아닐까? 이것은 영원한 수수께끼에 속한다. 이것을 풀지 못해도 우리는 그럭저럭 살아갈 수는 있다. 우리는 역사로부터 뭔가 배울 수는 있지만, 역사가로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러나 나 자신이 누구이며, 나는 어디로부터 왔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럭저럭 살아 갈 수 있을까? "이런 골치 아픈 문제로 고민하느니 당장 살아가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절박한 항의를 하는 사람이 아직 많겠지만, 그렇다고 "왜 사느냐고 물으면 웃지요!"라고 대답하는 것으로써 인간의 도리를 다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아니 소크라테스의 교훈처럼 모른다는 것 자체가 실상은 가장 잘 아는 것이 아닌가? 무지가 지식의 출발점이 아닌가? 모든 지식이 이 무지의 자각과 폭로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지가 지식의 종착역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가? 인간은 지식의 보고(寶庫)와 천지(天地)를 두루 다 돌아보았는가? 아직 다 돌아보지 않았든지, 대답없는 이 질문의 탐험길에서 낙오하거나 자포자기했든지 간에 우리는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를 몰라서 앓고 있고, 또 굴러 떨어지는 바윗돌을 영원히 올리도록 저주받은 시지프처럼, 끊임없이 질문하고 회의하고 절망하고 희망한다. 이러한 운명의 굴레 자체가 이미 인간됨의 본질이 아닌가? 그렇다면 인간은 이미 반쯤은 해답을 내린 셈이 아닌가?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노래 '하숙생'은 이미 인간이 하숙생임을 정의해 놓고 부르는 노래가 아닌가? 이로써 해답은 이미 다 내려진 것이 아닌가? 인간은 하숙생으로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는가? 어디 있는지도 모를 안식처를 찾는 것보다는 하숙집을 제 집으로 알고 체념, 아니 만족하며 사는 게 더 유익한 게 아닌가?

그러나 체념하든 만족하든 간에 인간은 여전히 그 속에서도 영원한 자기의 모습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그림자만으로 만족한다는 그 자체를 통하여서도 자신의 본 모습이 어딘가 있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전제, 아니 희망한다. 비록 이 사실에 대한 꿈이 한여름 밤의 꿈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인간은 꿈을 꾸며 산다. 아니 지금 인간은 긴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른다. 현실은 긴 잠과 긴 꿈이며, 언젠가 깨어날 때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는 않을까? 여하튼 인간은 자신을 찾고 있다. 자신을 찾고 있다는 바로 이 사실을 통하여 인간은 이미 인간으로서의 길을 들어서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답없는 대답을 향한 힘찬 탐험의 길을! 우리 모두 이 길을 다함께 가 보자.

 

2. 인간론의 의의

 

인간의 지식은 엄청난 속도로 폭발적으로 증가해 왔다. 인간은 우주의 끝을 엿보며, 물질과 생명의 마지막 신비까지 탐험하고 있다. 이리하여 인간은 만물의 심판자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다른 눈부신 학문적 업적에 견주어 말한다면,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에서는 정말 매우 초라하고 무지한 상태에 처해 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토인비의 말대로, "인간의 사회는 높은 수준의 가치에로 올라가 있지만, 인생은 무엇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명백한 대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R. May, 백창영 역,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 문예출판사, 서문에서 재인용).

막스 쉘러(M. Scheler)도 "지나온 어느 역사적 시기에 있어서도 현대에서처럼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문젯거리가 된 적은 결코 없었다...어떠한 시대에 있어서도 인간의 본질과 기원에 관한 제 견해가 우리 시대에서보다 더 불확실하고 애매하고 다양한 적은 없었다."(철학적 인간학, 10, 137 이하)고 말한다.

말르브랑쉬(Malebranche)도 말한다: "인간의 지식 중에서 인간이 꼭 탐구할 만한 지식은 인간에 관한 지식이다. 그러나 이 지식이야말로 그 완성 면에서나 그 발전 면에서 가장 뒤지고 있는 실정이다"(M, Buber, 인간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재인용, 10).

롤로 메이(R. May)에 의하면 현대인의 불행이 1. 공허한 인간군상 즉 텅빈 느낌, 공허감, 2. 고독감, 3. 불안과 자기 존재에의 위협(불안)에 근거하고 있다고 규명한 후, 그 원인을 1. 현대사회에서의 가치관의 상실, 2. 대화를 위한 언어상실, 3. 인간의 고향인 자연에 대한 무관심, 4. 비극의식의 상실 외에도 5. 자아의식의 상실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 불행의 원인들 중의 하나는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데에 있다. 인간은 기술 등에서는 자신을 얻었는지는 몰라도 인간 자신에 대해서는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지나치게 단순한 기계적인 견해로 말미암아 결국 인간은 자신에 대한 존엄성, 다양성,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하튼 갖가지 인간의 행동이나 태도의 근저에는 일정한 인간학적 입장 즉 인간의 어떤 자아상이 깔려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삶에 대한 해석을 내리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철저히 말하자면, 인간은 원래 그 스스로 인간학자일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M. Landmann). 인간은 겉보기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할 순 있어도, 자신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누구냐?", "하나님을 믿느냐?"라고 질문받을 때에는, "알 수 없다", "경험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관심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당신은 누구냐?"고 질문받을 때에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 설사 그렇게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 대답을 통하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저렇게 정의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 속에 있는 마음이 알고 있다(고후 2:11). 비록 죄가 인간의 자의식을 방해하고 있더라도, 비록 인간이 자기 인식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더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독한 가운데서 자신에 대해 질문하고 대답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칸트(I. Kant)에 의하면 철학의 분야는 다음의 네 가지 질문으로 귀착된다: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 나는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 3.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4. 인간이란 무엇인가? 첫째 물음에 대해서는 형이상학이 대답하고, 둘째 물음에 대해서는 윤리학이 대답하고, 셋째 물음에 대해서는 종교가 대답하며, 넷째 물음에 대해서는 인간학이 대답한다. 그런데 앞의 세 물음은 마지막 물음과 관련되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이 모두를 인간학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논리학 강의 편람, 부버의 앞 책 중에서 재인용, 10).

그러므로 인간이 가장 날카롭게 탐구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다(S. Kierkegaard). 여기서 신학적 인간학의 필요성이 생겨난다. 모든 복음선포는 실제로 자연적인 자기 인식을 전제하고 평가한다. 모든 목회상담적, 선교적 대화는 자기인식을 목표로 삼으며, 인간의 자연적,심리적 인식을 평가한다. 모든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형태들은 특정한 인간론을 전제로 삼고 있으며, 모든 정치이론 혹은 사회이론은 특정한 인간론으로부터 파생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학과 교회가 세상 사람들과 대화하고 그들을 선교하기 위해서는 인간이해가 필요하며, 대화와 선교는 필연적으로 인간론의 바탕 위에서 해야 할 수 밖에 없다(E. Brunner, Dogmatik 2, 57 이하). 그래서 판넨베르크가 "그리스도교 신앙은 자신이 진리임을 주장하려면, 그 주장을 변증해야만 한다. 오늘 날 이 변증은 종교가 인간됨의 본질에 ? 속해 있는지, 아니면 거꾸로 인간을 소외시키는지 논쟁하는 가운데서, 인간됨의 해석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Anthropologie in theologischer Perspektive, 15.)고 말한 것은 매우 지당하다.

 

>> 목차고리 : 신학인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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