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site   게시판   메일   M1000선교사홈   Mission Magazine
 

 

  사전등록   히,헬 폰트받기
 현재위치 : HOME > 문서보기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9-04
 제목  남미 해방신학의 여러 논란
 주제어  [해방신학]
 자료출처  허호익(상명여대 학회지 제15집 1983.2)  성경본문  
 내용

<차      례>

         Ⅰ. 머리말                                Ⅳ. 외 정치 참여를 하는가?

         Ⅱ. 해방신학의 배경                       Ⅴ. 왜 계급투쟁인가?

         Ⅲ. 해방신학의 성서적 근거                Ⅵ. 왜 폭력을 사용하는가?


Ⅰ. 머리말


해방신학은 최근 일련의 사태와 언론의 보도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기독교 신학의 한 형태이다. ‘많이’ 알려진 것이 반드시 ‘정확히’ 알려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입장을 달리하는 이들의 몇 가지 쟁점의 신학적 성격과 의미를 간추려 보려고 한다. 먼저 해방신학이 라틴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하는 제3세계의 신학으로 태동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정치 사회적 배경을 살펴보고, 해방신학이 기독교신학의 주제로 부각되는 성서적 신학적 근거에 입각하여 해방신학의 기본적인 주장들을 서술하려고 한다. 그 다음으로 해방산학으로 인해 논란이 되고 있는 몇 가지 쟁점 즉, 교회의 정치참여와 계급투쟁 및 폭력의 문제를 해방신학의 주장에 근거하여 그 신학적 의미를 서술하려고 한다.


Ⅱ. 해방신학의 배경       

해방신학은 라틴 아메리카의 상황을 떠나서 이해될 수 없는 상황적인 신학이다. 라틴 아메리카는 16세기 초 스페인과 포르투칼 해양제국에 의해 식민지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식민지화 과정에서 원주민 인디안의 무참한 학살이 감행되어 브라질의 경우 1,300만의 원주민이 16세기 말에는 200만으로 감소하였고, 페루는 정복군과의 전쟁과 전염병으로 전체 인디안의 인구가 3분의 2로 감소할 정도였다. 그 후 여러 세기에 걸친 식민지 지배로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서의 지배 피지배 계급간의 계층분화와 지배예속관계가 확연하여졌다. 이러한 식민지 국가의 불리한 처지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하여 비로소 독립국가를 이룩한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전후(戰後)의 세계적인 경제개발과 근대화 운동에 가담했다. 1950년에만 해도 자급자족의 경제성장을 낙관하고 경제개발을 위해 우선 <대외의존 성장>의 단계를 거치게 되었다. 그러나 10년 이상의 경제개발 정책에도 불구하고 선진국과의 빈부격차 뿐만 아니라, 자국 내에서조차 빈부의 격차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벌어진 구체적인 통계를 접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멕시코에서는 부유한 상위 20%와 빈곤한 하위 20%의 소득비율이 1950년에는 10:1이었으나 1969년에는 16:1로 악화된 것이 통계로 나타났다.

소수의 다국적 기업에 의한 경제적 의존이 심각한 종속체제를 야기했고 이로 인해 <종속체제의 내국화(內國化)>가 생겨났다. 이러한 내외적 신식민지주의로 인한 빈곤의 악순환뿐만 아니라, 오랜 식민지 지배의 잔재로 야기된 잦은 군부의 쿠테타와 소수의 독재정치 그리고 다수의 문맹자(文盲者)와 소수 종족의 문화적 소외 등으로 지배 피지배의 계층분화와 종속관계가 여전히 신식민지 현상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이러한 신식민지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오랜 경제개발정책과 민주화 민권운동과 문맹퇴치운동 등의 점진적 개혁운동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사태는 더욱 악화일로(惡化一路)에 놓이게 되자 이러한 소극적 개혁운동으로는 자신들의 근본적인 처지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새로운 인식이 고조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식민지 통치자의 후예인 유럽인들이 현재 남미 각국 전체 인구의 15~20%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정부, 군부, 교회, 광산, 상업, 산업체 등 전 분야를 장악하고 국가의 대부분의 부를 독점하고 있는 반면에, 전체 인구의 60~70%로 점하고 있는 원주민들을 노예화, 절대빈곤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 남미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그들의 현실을 ‘예속’으로 파악했다. 라틴아메리카는 처음부터 종속국가였으며, 경제적으로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는 압제받는 대륙이라 정의한다. 자본주의 대국(중심국가)의 개발의 세력확장으로 인해 빈곤한 주변국가의 저개발이 가속된다. 그들의 저개발과 그로 인한 절대빈곤은 다른 대국(大國)의 개발의 부산물이며, 이러한 종속관계가 내외 경제사회구조 전체를 지배한다는 이른바 <종속이론>이 대두하였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신학은 구원을 그 기본소식으로 선포하여 왔다. 출애급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업의 성취는 성서의 가장 큰 주제로 등장한다.


종속이론은 두 가지를 전제한다. 하나는 종속체제가 가져온 지배 피지배 계급이 심각한 계층분화와 이로 인한 계급투쟁의 불가피성이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종속체제는 점진적인 개혁으로 해결되지 않으며 사회혁명의 수단을 통한 근본적이며 질적인 변혁을 일으키지 않으면 종속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자각이다.

어쨌든 이러한 예속관계를 용의주도하게 분석하고 문제삼게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을 논하게 되었다. 예속과 해방은 밀접한 상관관계에 있다. 라틴아메리카는 그들의 현실을 예속 또는 종속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해방이라는 주제를 자신들의 실존적인 문제로 취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예속의 현실을 라틴아메리카 교회로 하여금 해방운동을 그들 교회의 당면과제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Ⅲ. 해방신학의 성서적 근거   

해방신학을 말할 때 먼저 제기되는 문제는 왜 해방이 기독교 신학의 주제가 될 수 있으며 그 성서적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신학은 구원을 그 기쁜 소식(福音)으로 선포하여 왔다. 출애급이라는 역사적 구원사건과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속(球速)사업의 성취는 성서의 가장 큰 주제로 등장한다.

애급에 살던 유대인들은 종살이하는 땅에서 압제와 강제노동과 인권유린과 강제산아제한의 고난을 당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훼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명한다. “나는 내 백성이 에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의 아우성 소리가 들려온다. 또한 에집트인들이 그들을 못살게 구는 모습도 보인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에집트에서 건져(구원해) 내어라”(출 3:7-10) 출애급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훼를 구원의 하나님으로 믿게 되고, 이 구원의 하나님이 창조의 하나님이라는 신앙을 갖게 된다. 그들은 구원신앙과 창조신앙을 관련시켰다. 창조신앙에서 죄의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된다. 죄로 인해 창조가 진통을 겪게 된다. 창조설화는 최초의 죄(원죄)에 대한 최초의 구원행위로 묘사된다. 이스라엘 신앙은 창조는 ‘최초의 구원 행위’이며 구원은 ‘새로운 창조’로 이해한다. 

그러나 출애급 사건은 약속땅 가나안을 향한 여정의 시작이므로,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 구원의 약속이다. 이 약속을 보증키 위해 야훼 하나님은 광야 시내산에서 이스라엘백성과 계약을 체결하고 십계명(율법)을 수여한다. 구원의 완성을 위해 계약을 준수할 의무가 주어진다. 압제의 땅에서 벗어나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한 구원의 긴 여로가 시작된다.

가나안을 정복하고 왕정(王政)을 세웠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또 다른 압제의 상황에 직면한다. 솔로몬의 불의 한 통치는 바로의 압제를 방불케 한다. 약속의 당에 정착했으나 이제는 자기 백성의 왕을 통해 새로운 압제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언자들이 등장하여 왕들의 율법위반의 범죄와 불의를 규탄한다. 약속의 땅에서조차 야훼의 율법을 저버린 죄 때문에 구원의 성취가 불가능하게 되자 예언자들은 ‘구원의 날’을 선포하게 된다. 야훼의 날에 대한 종말론적 희망이 메시야 예언으로 발전하게 된다.

때가 차서 구원의 날이 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救世主)로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자기 백성을 그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이다. 예수의 사역(使役)과 교훈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도 모두 죄와 구원이라는 구속론적 의미로 이해되어 왔다.

이러한 정통적으로 성서와 신학의 주제로 알려진 ‘죄와 구원’이라는 용어를 해방신학은 보다 포괄적이며 현대적 용어인 <예속과 해방>이라는 개념으로 재해석한다. 사실상 죄와 구원으로 번역되고 이러한 의미를 뜻하는 성서의 원어는 상당히 다양하여 각각 10여 개 정도를 성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해방신학은 이러한 정통적인 죄와 구원을 포괄적 의미로 새롭게 분석한다.

죄란 무엇인가? 죄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로 하나님 없이 하나님처럼 살려는 하나님을 떠난 상태 즉,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구체화되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율법의 대 강령이며 그리스도이 새 계명이다. 해방신학은 죄를 하나님과 이웃과의 절교라 정의한다. 죄는 구체적으로 이웃 사랑의 거부이며 그것은 인간세계의 모든 빈곤, 불의, 압제, 절망, 소외 등등 인간의 온갖 고통의 궁극적 원인이다. 1968년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에서 채택한 메델린(Medellin)의 18인 주교선언문은 이러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한다. “하나님은 때가 되자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셔서 사람이 되게 하였다. 성자는 죄가 인간을 굴복시킨 모든 예속상태에서 만민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그 예속이란 기아와 비참, 압제와 무지, 불의와 증오 등을 말하며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이기심에 근원을 두고 있다.” 그들은 사회 경제 정치적 <종속관계>를 죄의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상황으로 본다.

그럼 구원이란 무엇인가? 해방신학은 구원을 양적구원과 질적구원으로 구분한다. 종래의 구원은 항상 ‘외교인(外敎人)의 구원’만을 문제삼고 구원은 이승에서 죄의 치유를 받고 후세에서 영생을 얻는 것이며 이를 위해 제도적인 교회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양적 개념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구원은 저 세상상의 일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의 친교요, 인간과 인간의 교제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인간실재 전부를 내포하는 인간완성이며, 보편구원을 생각할 때 누가 구원을 받을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교회라는 테두리 안팎을 모두 포함하는 현세의 변혁과 완성이 질적인 개념의 구원이다. 인간과 현세와 역사의 변혁과 완성을 달리 말하면 해방이다. 해방신학은 구원과 해방을 같은 개념으로 파악한다.

해방신학은 죄를 예속으로 구원을 해방으로 이해한다. 구원은 죄의 종노릇(롬 6:1) 즉 죄의 노예상태에서의 해방이다. 그리스도의 구원행위는 “우리를 해방시켜 우리도 자유의 몸이 되게 하는 것”(갈 5:1)이다. 구세주 그리스도는 해방자 그리스도이다. 여기서 해방신학은 구원과 해방의 함수관계를 철저히 인식한다. 그러나 인간구원을 경제적 사회적 해방으로만 보는 무신론적 형태의 해방운동은 소극적인 것이므로 참되고 완전한 해방은 넓은 안목에서 정치적 해방과 역사를 통해 달성되는 인간해방과 죄로부터의 해방과 하나님과의 친교라는 포괄적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해방신학은 영성(Spirituality)과 성사(Secramentum)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는다. 성령은 자유를 주는 자유의 영(고후 3:17)이다. 영성은 엄밀한 의미에서 성령의 지배인데, 성령을 통해 신앙실천(복음의 생활화)이 가능해진다. 해방운동은 구체적인 신앙실천이므로 여기서 영성은 해방의 영성으로서 압제받는 이웃을 위한 회심으로 이해된다. 성사(聖事)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친교)인데 그것을 역사내의 실재로 이해한다. 교회의 제도적 의식이 아니라 구원의 보편적 역사적 성사라는 것이다.

해방신학은 성서적 좌와 구원을 예속과 해방으로 재해석한 것이므로 성성 신학적 근거가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Ⅳ. 왜 정치 참여를 하는가?

해방신학의 또 다른 문제는 왜 기독교회와 기독교 신학이 해방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정치 사회적인 문제에 깊숙이 관여하느냐는 질문이다. 정치와 종교는 엄연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심심찮게 제기된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먼저 교회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어야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다(엡 1:23).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사신 것이 교회이다(딤전 3:5,15). 교회(ecclesia)는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무리이며, 교회(church)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Kuriakon →Kirche →church)에서 유래한 말이다. 교회의 첫 말은 그리스도이므로 먼저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메시야, 즉 구세주이다. 세상을 자기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요3:16) 이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세상 만민의 구원을 이루셨다.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분부는 “너희는 가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고 ‥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 28:19-21)는 것이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이 사람들을 세상에 보낸다”(요 18:18)고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름과 분부를 받은 교회는 ‘이 세상과 이 세상 모든 사람들’과 분리된 채로 존재할 수 없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 한가운데로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방신학은 종례의 성속(聖俗)의 구분이나 세계와 교회의 양분법적 사고를 거부한다. 이 세계 안에 존재하면서, 이 세계를 선교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교회를 은둔적이며 비 세계적인 것(non-world)으로 볼 수  없다. 해방신학은 교회와 세계를 양분하는 분리주의를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는 낡은 사상으로 간주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 나라와 세계건설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여 교회와 크리스챤의 현실참여의 분명한 성서적 근거를 제시한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이 세상 한가운데로 오신 것처럼 교회는 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통한 새로운 세계의 건설을 위해 이 세상 한가운데로 파견된 하나님의 전위대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 속에 현존하는 교회는 이 세계의 정치적 역사적 차원을 회피할 수 없다. 오늘의 이 세상은 산업사회이며, 이 세상 사람들의 대부분이 산업노동자이므로 교회의 선교는 자연히 산업선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해방신학은 산업 경제적 종속을 문제삼는 것이다.

해방신학은 신학의 기능을 신앙실천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신앙의 사회적 정치적 실천을 더욱 강조하게 된다. 신학이 갖는 기능으로서 영성과 신앙예지의 합리적 기능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신학은 기독교 신앙실천(Praxis)에 관한 비판적인 고찰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종속체제가 가져온 지배 피지배 계급의 심각한 계층분화와 계급 투쟁이며 이는 점진적 사회개척에 의해서 종속체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신앙실천은 구체적으로 사랑의 실천인데 교회가 사랑해야 할 보이는 이웃인 라틴아메리카의 대부분의 민중들은 압제의 고통에서 허덕이고 있으며, 이러한 압제와 고통의 궁극적 원인은 예속체제이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종속체제의 극복은 점진적 개혁으로 불가능하며 투쟁을 통한 사회변혁의 실천이 불가피하다. 종속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투쟁의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신앙실천은 역사적 투쟁과 변혁을 실천하는 해방운동이며, 해방신학은 인류의 역사를 해방시키는 변혁의 신학으로서 정치와 사회문제에 깊숙이 관련을 맺게 된다.

그러므로 해방신학은 정의와 우애가 군림하는 새 사회를 건설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신학이며, 불의를 없애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고 투신한다. 이 신학은 착취당하는 사회계급이 압제자들에 항거하는 투쟁에 적극적이고 유효하게 투신하는 실천을 통해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이 해방신학자들의 주장이다.

해방신학의 신앙실천을 강조한 것은 “행함이 있는 믿음”(약 1:17)을 강조한 것으로서 전혀 문제시 될 수 없다. 문제는 신앙실천이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을 위한 계급투쟁과 폭력의 불가피한 사용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실제로는 이 문제로 인해 교회 안팎에서 여러 논란이 제기된 것이다.


  Ⅴ. 왜 계급투쟁인가?

해방신학은 이 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인류가 압제자와 피 압제자, 생산수단의 소유자들과 자기 노동의 대가를 착취당하는 자들, 다시 말해서 서로 적대하는 두 개의 사회계급으로 분열되어 있는 데에 있다고 한다. 이것뿐만 아니라 분열에는 대립과 투쟁과 폭력이 수반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계급투쟁에 대한 종교적 견해가 무엇이냐는 것과는 상관없이 현실적으로 계급투쟁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은 인정해야 한다고 항변한다.

해방신학이 계급투쟁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종속체제와 사회계층분화가 현저한 남미의 특수상황을 인정한다 해방신학이 지나치게 피 압제자들의 상황만을 문제삼고 편드는 편협하고 일방적인 것이며, 따라서 신학적 보편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이 대두된다. 해방을 급진적인 변혁과 혁명으로 이해하고 자유를 쟁취나 군림으로 파악함으로 압제의 근본적인 문제와 해방의 궁극적인 목표에 대한 이해가 용공적일 가능성이 짙다는 것이다. 해방신학은 계급투쟁의 현실만을 주장했을 뿐, 계급투쟁의 신학적 의미와 성격을 충분히 분석하고 명확히 전개하지 못했다. 물론 그들이 정의와 사랑으로 지배되는 계급 없는 사회를 위한 계급투쟁의 자기 기만을 답습하거나, 자유와 해방을 압제자로부터의 쟁취로 파악할 오류를 범하기 쉽다. 기독교 신학의 해방운동은 이 두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들은 압제의 양면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 압제는 언제나 두 면을 가진다. 한 편에는 착취자가 있고 다른 쪽에는 희생자가 있다. 따라서 압제자는 비인도적(inhuman)이 되며 압제받는 자는 비인간화(dehumanized)된다. 그러므로 압제는 두 면으로 인간성을 파괴하는데, 압제자는 악행(惡行)으로 피압제자는 고난으로 인간다움이 파괴된다. 압제자는 범죄자이며 피압제자는 현실적으로 고난 당하는 자이다. 압제의 이러한 양면성 때문에 해방의 과정은 양면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압제받는 고난에서 피압제자를 해방하는 일은 압제의 죄로부터 압제자를 해방시키는 일과 함께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피압제자의 문제는 사실상 뒤집어 놓으면 압제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압제자가 있으므로 피압제가 있게 된다.

압제자도 피압제자도 없는 진정으로 계급 없는 사회를 이루려는 것이 기독교적 해방운동의 과제이며 목표이다. 그런데 피압제자를 해방시키기 위해 그들이 압제받는 상황을 인식시키고, 의식화하여 자신의 해방운동에 참여하도록 일깨우는 일이 용이하다. 압제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압제라는 죄를 인식시켜 압제의 악행에서 스스로 해방 받게 하는 일은 이성적인 호소를 초월하는 종교적인 과업이다. 왜냐하면 피압제자들은 그들의 억압과 고통이 그들에게 자명한 것이지만, 압제자들은 피압제자들의 고통에 무감각하며 그들 자신이 누리는 권력과 부의 죄성(罪性)을 좀처럼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권력과 편익에 대한 욕망만을 예리하게 의식하고 있음으로 해서 여러 근거를 들어 그들 자신의 압제의 죄악을 정당화시킨다.

압제가 얼마나 큰 죄악인가를 알지 못하는 그들을 압제의 죄악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양심의 호소, 도덕적인 힘의 행사, 사회악의 구조적 분석, 폭력적 저항 등으로도 한계가 있다. 그들은 압제의 현실을 정당화하기 위해 제도적인 폭력사용을 서슴치 않기 때문이다. 압제자의 해방을 위해 회개의 실천(praxis of converson)이라는 기독교 신앙적 행위가 요청된다. 죄로부터의 회개와 구원이 압제자의 해방을 위한 적절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압제자들이 기독교 신앙을 통해 압제라는 죄의 현실을 깨닫고 죄에서 해방(구원) 될 대 피압제자의 해방도 동시에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남미의 해방신학이 압제자는 무조건 악하고 피압제자를 의로운 희생자라고 보는 단순한 흑백양단 논리에 대한 비판도 무시할 수 없다. 압제의 양면을 인식할 때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남을 압제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압제받고 있음이 드러난다. 종속이론이 비판받는 점 즉, 선진국과의 종속관계의 내국화 또는 내적 식민주의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대변한다. 따라서 그들은 국외적으로 압제를 받으며 국내적으로는 압제하는 ‘압제받는 압제자(the oppressed oppresser)'이다. 피압제자들도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압제하는 피압제자‘라 할 수 있다. 많은 해방신학의 추종자들이 남이나 자신의 압제받는 측면만을 문제삼을 뿐 자신이 압제하는 면을 은폐하는 자기 모순에 빠져있기 때문에 자기의 가진 것을 나눠주지도 못하면서 상대적으로 자기보다 더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나눠주려고 한다는 비판이다.


  Ⅵ. 왜 폭력을 사용하는가?


해방신학은 종속체제의 근본적인 변혁을 위한 계급투쟁의 과정에서 정치적 효과를 위해 폭력의 사용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압제의 불의를 강경하게 고발하려면 경제적 정치적 세력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해방신학은 압제자들이 기존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제도적 폭력(institutionalized violence)은 정당화되고, 피압제자들이 그 ‘질서’를 변혁시키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대응폭력(counter-violence)을 불법이라 규정하는 그럴듯한 이중평가를 공격한다. 오히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와 불의한 합법적인 폭력을 통해 무죄하게 희생된 수천 명의 죽음을 고려할 때 이에 대응하는 폭력이 오히려 정당한 폭력(justified violence)이라고 주장한다.

오랜 잠정적인 개혁운동의 실패와 한계로 인간 그들의 좌절과 분노를 이해하고, 특수한  압제의 역사적 상황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해방신학이 폭력을 주장한다면 공산주의의 행동강령이나 비 기독교적인 사회혁명이론으로 전락하거나 동일시될 위험이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마 26:52)는 예수의 교훈에 익숙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상황이 어떠하든 폭력적인 저항을 기독교적 행동양식으로 삼을 수 없다고 반론한다.

이러한 반론과 비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일부 신학자들은 폭력의 문제를 심사숙고하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 폭력 이외에도 보이지 않는, 성격을 달리하는 폭력이 있음을 전제하고 폭력을 권력 도는 힘의 부당한 사용으로 정의한다. 서부활극에서 악한의 선제공격에 대응하는 폭력을 정당방위로 인정하듯이 두 종류의 폭력 즉, 선제폭력과 대응폭력을 구분한다. 엄격한 의미에서 전자만이 폭력이며 후자는 정당한 폭력이라고 규정함으로써 해방신학이 제도적 폭력과 대응폭력을 구분한 것이 타당하다고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전자는 보다 큰 보이지 않게 합법적으로 계속된 폭력이요 후자는 전자의 폭력을 규탄하는 눈에 띄는 보다 작은 폭력이므로 전자를 폭력으로 탄핵하지 않는 자가 후자만을 폭력으로 몰아 붙이는 것은 자기기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부개척시대보다 복잡해진 현대사회에서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제도적인 선제폭력으로 규정할 수 있는 척도가 무엇인가? 이들은 ①계속적인 법의 파괴 ②헌법의 편괴 ③법률과 헌법에 제정된 인권 탄압 등을 폭력의 기준으로 삼는다. 인종차별이나 소수지배계층의 독재정치는 이러한 범위에 속하는 현저한 선제폭력이므로 이에 대한 폭력적 저항이나 투쟁은 정당한 대응폭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수라도 사랑하고 왼뺨을 치면 오른뺨을 내놓아야 한다는 이상주의적인 비폭력 무저항주의자들의 강력한 항변에 부딪히게 된다. 이 항변에 대해 또 다른 신학자들은 “평화를 주러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으며”(마 10:34) 성전의 장사꾼을 채찍으로 몰아낸 예수의 혁명적 행동과 거룩한 분노를 예를 들어 반론한다. 예수는 사람의 책임적 행동을 가르쳤지 폭력을 묵과하고 순종하는 무 저항적인 무책임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저항을 이상(理想)으로 앞세우는 비폭력은 현저한 제도적 폭력이 행사되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책임회피와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현저한 폭력 앞에서 최후의 불가피한 행동으로 선택한 대응폭력은 비폭력이라는 명분으로 폭력을 묵인 방관하는 것보다 더 책임적인 사람의 행동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사랑의 책임적 행동으로 취한 대응폭력이라 할지라도 폭력은 폭력이므로 그것도 죄임을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대응폭력을 영웅시 할 수도 없고, 폭력적 저항을 통해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수와 증오의 행동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사랑의 책임적 행동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도적인 선제폭력이든 불가피한 대응폭력이든 엄격한 의미에선 폭력은 폭력이므로 둘 다 죄이다. 그러나 이 두 폭력에 따른 죄책의 의미는 다르다. 전자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책이지만 후자는 용서받을 수 있는 채책이다. 그러므로 대응폭력을 사랑의 최후의 책임적 행동으로 선택 할 때는 죄책을 떠맡을 결심이 앞서야 한다. 무죄한 예수도 죄책을 짊어짐으로써 인류의 구원(해방)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응폭력의 정당성만을 주장할 뿐, 불가피한 사랑의 책임적 최후 행동이나 겸손히 죄책을 인수한 결심 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해방신학의 폭력사용은 공산주의나 비 기독교적 혁명운동이 폭력을 정당시하는 자기 의(義)와 교만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결론적으로 해방신학은 남미의 특수한 종속체제 하에서 죄를 예속으로 보고 구원을 해방으로 이해하고 사회변혁을 위한 신앙실천을 강조한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폭력과 계급투쟁의 문제는 더욱 철저하게 고려하지 못함으로서 그들의 해방운동이 비 기독교적인 사회혁명과 동이시 될 위험이 없지 않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참 고 서 적>

 

G. 쿠티에레즈, 해방신학, 성념역, 왜관: 분도출판사, 1977.

J. 몰트만, 정치신학, 전경연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6.

---------, “압제자의 해방”, 기독교 사상 1979. 4월호.

문동환, “해방신학과 한국의 기독교”, 신동아 1975년 2월호.

 



   


A-Z




  인기검색어
kcm  305001
설교  161877
교회  116591
아시아  93075
선교  89294
세계  78918
예수  76834
선교회  67288
바울  63156
사랑  62224


[배너등록]
 

 


홈페이지 | 메일 | 디렉토리페이지 | 인기검색어 | 추천사이트 | 인기사이트 | KCM 위젯모음 | 등록 및 조회

KCM 찾아오시는 길 M1000선교사홈 미션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