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site   게시판   메일   M1000선교사홈   Mission Magazine
 

 

  사전등록   히,헬 폰트받기
 현재위치 : HOME > 문서보기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9-04
 제목  종교적 실존으로 이르는 신앙의 비약 -키에르케고르의 두려움과 떨림을 읽고
 주제어  [키에르케고르]
 자료출처  이다희  성경본문  
 내용

I. 서론 : 키에르케고르의 생애

 

합리적인 것, 논리적인 것으로 대표되는 합리주의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실존주의의 기반을 형성한 덴마크인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의 사상의 발원은 그의 평범하지 않은 인생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813년 코펜하겐에서 태어난 그는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종교적인 관습을 익히며 자라났다. 그러나 목사가 되기 위해 코펜하겐 대학 신학부에 입학한 그는 아버지의 간섭에서 서서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즈음 그의 7남매 중 5명이 차례로 죽는 불행한 일이 벌어졌는데 키에르케고르는 이를 부친의 죄 때문에 신께서 내린 저주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자신도 형제들 처럼 될 것을 두려워하여 집을 뛰쳐나왔고 그 이후로 짧지 않은 향락생활이 이어졌다. 24세에 이르러 레기나 올슨(Regina Olsen)이라는 여성과 약혼을 하면서 심미적 삶을 마감할 수 있게 되었으나 1년도 채 되지 않아 약혼을 파기하였다. 이후에 베를린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키에르케고르는 기성교회를 비판하고 공격하기를 거듭하며 종교적 실존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이와같이 아버지와 레기네와의 관계는 실존으로서의 그의 삶에 영향을 주었으며 종교적 실존으로의 비약의 발판이 되었다. 키에르케고르의 생애는 세가지의 단계적 실존을 바탕으로 하는 그의 사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심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의 단계가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개별인간이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방법의 차이이며 개별인간은 결단을 통해 다음 단계로의 비약을 이룰 수 있다.

 

그에게 종교적 실존으로서의 삶은 개별인간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개인은 결단을 통해 실존하는 자기자신을 떠맡음으로서 종교적 실존으로의 이행에 성공할 수 있으며 개별인간은 기독교인이 되어서만 '실존'할 수 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개별인간의 실존의 개념은 보편적인 언어로 전달될 수 없음을 알고 철학적 저서가 아닌 단편소설, 수필, 대화록을 통해 개별인간의 실존체험에 대하여 전개해 갔다. 「두려움과 떨림」도 키에르케고르의 실존개념의 간접전달 방식 중 하나이다. 이 저서에서 그는 성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실존체험에 대하여 세 가지 의문점을 제기하고 이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세 단계의 실존, 신앙, 신앙의 역설 등의 개념을 전달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II. 아브라함과 신앙의 기사(knight of faith)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남이 그에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세기 22장 2-12절)


 

위의 이야기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이다. 가장 귀한 것을 요구하는 하나님에게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태도는 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바로 이 점을 출발점으로 삼아 아브라함이 신앙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한 일의 위대함을 표면적으로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을 위하여 '귀한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음이라고 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자기의 모든 재물을 바치는 것을 '귀한 것'을 희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순순히 바치려고 한 것과는 다른 점이 있다. 아브라함의 결단은 윤리적인 의무와 모순되는 것이있고 그곳에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어려운 결단을 아브라함은 한 가지 신념을 가지고 행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이삭을 요구하지 않으실 것이다' 라는 것이었다. 이 신념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모리아 땅에 일찍 도착하지도, 늦게 도착하지도 않게 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이라면 모리아 땅에 서둘러 도착했을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절대복종(infinite resignation)이며 하나님이 아들을 돌려주셨을 경우 느낄 수 있는 윤리적 자괴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도록 만든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절대복종에서 더 나아간 신앙(faith)으로 행동했다. 신앙은 합리적으로 생각될 수 없으며 오직 비합리적인 열정(passion)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신앙의 소유자를 신앙의 기사(knight of faith)라고 칭한다. 절대복종, 신앙, 신앙의 기사와 같은 개념을 가지고 키에르케고르의 문제제기로 들어가보기로 한다.


 

III. 신앙의 역설(Paradox of Faith)


 

'목적론적 관점에서 비윤리적 행위가 허용되는가'라는 키에르케고르의 첫 번째 물음은 헤겔의 철학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다. 헤겔을 비롯한 합리주의 철학자들에게 개별자는 보편으로 동화되도록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하는 존재이며 만약 개별자로 남을 경우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그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행동은 비판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반박함에 있어 키에르케고르는 개별자는 보편에 우선한다고 말하며 이를 신앙의 역설(paradox of faith)라고 부른다. 보편이 되어 본 개별자는 보편을 하위의 것으로 규정한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바로 개별의 목적을 위해 보편 윤리의 선을 넘은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목적을 위해 도덕의 선을 넘은 다른 이야기들과는 구별되며 아브라함과 같은 경우는 물론, 비슷한 경우도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트로이 전쟁의 총사령관이었던 뮈케나이 왕 아가멤논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아가멤논은 트로이로 싸우러 가다가 아르테미스의 숲을 지나치게 된다. 그러나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가 또한 어린 사슴의 여신이라는 사실을 몰라서 범한 실수였을까, 아르테미스의 숲에서 사슴 한 마리를 잡는다. 이에 노한 아르테미스 여신은 해변에 정박한 아가멤논의 함선을 붙잡아 두려고 바람을 멈추어 버린다. 이제 아가멤논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여신의 요청에 따라 딸 이퓌게니아를 제물로 바치는 일 뿐이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딸을 바친다. 결국 아르테미스 여신이 딸을 죽게 하지 않고 신녀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을 그는 모른다. 눈물을 머금고 딸을 여신에게 바치는 아가멤논은 대신 나라를 구하게 된다. 뮈케나이의 여인들은 이퓌게니아를 딱하게 여겨 눈물을 흘리면서도 아가멤논의 충성심에 탄복할 것이다.

이러한 비극적 영웅은 즉 보편을 위해 비도덕적 행동을 감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구할 나라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오직 신과 자신을 위해서 이 행동을 한 것이다. 그의 행동이 영웅적인 것으로서 후대에 전해지는 것이 오직 개별이 보편에 앞서는 역설적 신앙이라는 근거에 의해서라면 목적을 위하여 비윤리적 행위가 허용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렇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위에서 언급한 역설적 신앙의 문제를 심화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키에르케고르는 두 번째 문제를 제기한다. 신에 대한 절대적인 의무가 있을 수 있는가? 누가복음에는 바로 이런 의무에 대한 언급이 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니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이 구절은 역설로 이해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가 없다. 자신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증오하라고 시키는 것은 이기적이고 바보스런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진정한 신앙의 기사는 절대적인 의무의 이행을 위해서 윤리가 허락하지 않는 것도 행한다는 것이지 사랑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은 아니다. 윤리적인 관점에서는 아브라함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아브라함의 아들에 대한 증오로 해석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은 진정 아들을 희생(sacrifice) 시키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신께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는 그를 지극히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라는 세속의 역설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비롯한 가족들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은 것은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키에르케고르의 개별자 사상의 핵심적인 내용을 가지고 답을 설정할 수 있다. 보편자로서의 윤리가 모든 이가 알 수 있도록 드러난 것이라면 개별자의 문제는 숨겨져 있다. 숨겨진 개별자의 문제에도 실존의 단계에 따라 정도를 설정할 수 있다. 아가멤논이 딸 이퓌게니아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을 심미적 단계, 말하는 것을 윤리적 단계로 보고 있다. 아가멤논이 이퓌게니아와 다른 이들에게 입을 다물고 있다면 이는 자기자신에게도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도 어려움이 없다. 심미적인 것을 추구하고 개별자에게 부과된 과업을 떠맡지 않으려는 선택하지 않음을 선택함이 바로 이 단계이다.

그러나 윤리적 실존으로서의 아가멤논이라면 이퓌게니아에게 말을 하고 보편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윤리적 실존은 윤리적 책임을 수반하는 보편으로 되어 보는 단계이다. 그러나 종교적 실존의 숨겨진 문제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어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으며 언어로 표현된다고 해도 제대로 전달 될 수 없기 때문에 실로 표현된 것이 아니다. 종교적 실존은 역설적인 신앙의 비약으로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에 개별자로서 그의 문제는 보편자의 언어로는 전달될 수가 없다. 다시말해 비합리적인 신앙의 비약은 말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역설은 역설로밖에 이해될 수 없다는 점은 이로서 분명해진다.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의 아브라함이 보여준 종교적 실존으로의 비약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주체자가 되는 유일하고 진실한 길이다. 실존은 심미적, 윤리적 단계를 거치면서 보편이 되었다가 돌아오는 과정을 통해 보편을 넘어서는 무엇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약의 과정은 자기 자신을 떠맡음이며 신과의 독대(獨對)이다. 이 때 실존이 느끼는 감정은 다름아닌 두려움과 떨림이다.

 

>> 목차고리 : 신학 > 종교철학 > 철학자 키에르케고

>> 연결고리 : 철학자 

 



   


A-Z




  인기검색어
kcm  319175
설교  165157
교회  119286
아시아  95013
선교  91284
세계  81026
예수  78744
선교회  69189
사랑  65087
바울  65013


[배너등록]
 

 


홈페이지 | 메일 | 디렉토리페이지 | 인기검색어 | 추천사이트 | 인기사이트 | KCM 위젯모음 | 등록 및 조회

KCM 찾아오시는 길 M1000선교사홈 미션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