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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9-04
 제목  죄렌 키에르케고르: 역설의 신학
 주제어  [키에르케고르] 역설의 신학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키에르케골은 "19세기 최대의 그리스도교 사상가" 또는 "모든 그리스도교 심리학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불리운다. 그는 또한 칼 바르트의 선구자이다.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만일 어떤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소극적 의미로서나 적극적 의미로서나 시간과 영원은 무한한 질적 차이이며,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 위에 있다고 한 키에르케골의 말을 언제나 기억하는 중에서 구성된 것이다."


 

 <기본 전제들>

 

키에르케골의 전체 사상에는 두 가지 중요한 가설이 있다. 첫째는, 정신적 내면성, 흔히 말하는 주관성의 원칙이 그의 전체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그가 선언한 바에 의하면, 진리는 주관성이며 주관성이 진리이다. 그러나 그것은 주어진, 또는 객관적으로 봉착하는 실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혼이 객관성에 의해 양육받기 때문이다. 그의 말하려는 요점은 냉혹한 객관성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가치도 없다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하는 바와 같이 "다만 너의 덕을 세우는 진리만이 너를 위하여 진리가 되는 것이다" 하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모든 점에 있어서 가치 있는 질문은 "나의 이 비극적인 현실적 존재를 위하여 이 진리가 무엇을 의미하느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알기 위하여 우리는 전력을 기울여 결단하는 행동을 취하여야 하는 것이다. 결단은 다만 진리를 인정한 결과가 아니라 그것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산 본질적인 요소인 것이다. 
 

그는 종교의 객관적 사유라는 두 유명한 사상 양식을 가혹하게 논박하였다. 그 하나는 사변적 신성의 냉담하고 헛된 객관성이다. 그것은 복음을 이념으로 분해시키고 그리스도 안에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특이성을 부정하며 그리하여 사람들에게서 위엄 있는 영적 권위를 박탈하여, 하나님께 소명 받은 자로서의 지상의 의무를 단행할 용기를 상실케 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과 영원에 대한 무감정적인 사유는 용서 받지 못할 범죄 행위이다. 또 하나는 습관적인 교회의 미지근한 객관성이다. 그것은 세상과 짝하여 살며, 영적 영웅심에 위축증을 가져오고, 한 조직체로서의 교회의 얌전하고 번영하는 회원으로 만족하여 구원에 관한 인격적 관심을 상실한 현상을 말함이다. "진리는 주관이다" 하고 키에르케골이 말하였을 때 그는 '결단' 없는 인격적 그리스도교란 것은 빈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회상케 하려 한 것이었다.


 둘째로 지적되는 기본 원칙은, 그가 오랜 고민 과정을 거쳐 마침내 도달한 헤겔 철학에 대한 불신임에 근거한 것이다. 순수 객관성과 낙관적 태도로 사실성을 받아들이려는 헤겔 철학은 정상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가장 나쁜 체계라는 확고한 신념이다. 키에르케골은 단일한 개인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고 그 말씀에 응답하는 것을 선포한다. 헤겔은 그리스도교를, 무엇보다 먼저 총괄적인 형이상학에 의하여 입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키에르케골은 역리적인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광포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골은 자기 자신의 변증법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그의 사상 구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이 방법을 '질적 변증법'이라고 부른다. 각기 절대로 구분된 것을 드러내면서 각기 상대편에 문제를 거는 것이다. 각기 부정하면서도 그 반대편에 의지하는 것이어서, 말하자면 거룩함과 사랑, 은혜와 책임, 영원과 시간 같은 것이다.


 키에르케골은 이상주의적 철학자들이 생명과 종교를 장난감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인간들이 생명을 걸고 지어가는 역사를 어떤 중성적인 명사로 표시하는 물건과 같이 다루고 있다. 그들은 인간 생활이 구성된 가장 중요한 '너'와 '나'와의 관계성을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으려 한다. 이런 것이 계속되면 그리스도교는 죽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헤겔 철학에서 번성한 "이것과 저것 둘 다"라는 사고 양식은 반드시 "이것이냐 저것이냐"로 바뀌어져야 한다고 키에르케골은 선언하였다. 참된 사상가란 그럴 듯한 물건 모두를 다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본직이 난제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합리주의는 적이다. "논리 체계란 것이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존재의 체계란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키에르케골은 특히 인간 정신이 하나님과 일치되어 있다는 헤겔의 교리에 근본적인 반격을 가하였다. 헤겔은 자존자 아닌 인간이 창조주를 믿는 신앙 안에서만 자기의 위치를 바로 찾는다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는 사상누각을 쌓고 오두막에서 살다간 불쌍한 영혼이다. 도덕적 질병을 고치기 위해서 철학자를 찾아간다면 그는 맨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계시란 것은 사람이 그 자신의 본래부터의 능력을 발견하는 것이며 십자가의 불합리는 해소되고 만 것이었다.


 

 <인간 생활의 순차적 단계>

 

1843년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출판되었다. 그 다음 '두려움과 떨림' '반복' 등에 있어서 그는 도덕과 종교의 구별을 밝히는데 주력하였다. '두려움과 떨림'이라는 책에서는 아브라함과 욥의 경험에 대한 문제를 밝혔다. 그 후 한 해 동안 두 편의 저서가 출판되었다. 그것은 '철학적 단편'과 '불안의 개념'이다. 첫 책에서는 영원한 구원이 어떻게 역사적 사건 위에 머무를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 삼고, 둘째 책은 불안이라는 심리적 전체를 가지고 있는 죄의 의미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1845년에 그의 모든 저서들 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책, '생활의 제단계'(Stages in the Way of Life)가 출판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결론적인 비과학적 후기'(The 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라는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 논문에서 그는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냐' 하는 문제를 서술하였다.  1849년에 출판된 '그리스도교의 실천'(Practice in Christianity)을 신학적 부분에서 그의 걸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의 사상은 20세기에 들어서서 겨우 서방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실존주의의 태두로서 가장 중요한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자리잡고 있다.

 

<생활의 세 단계>

 

그는 인간 생활에 세 단계가 있음을 주장한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진전 또는 순환이다. 한 개인이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옮기는 것은 자동적인 자연적 과정이 아니요 감격적인 결단에 의하여 되는 것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한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비약하게 되는 것은 그 배후에 계신 하나님의 변치 않는 임재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는 그 앞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 고요한 압력이 사람으로 하여금 죄 의식에 눈 뜨게 한다.
 첫 단계는 미적, 또는 취미적 단계이다. 미적이란 말은 반드시 미술적이라거나 또는 정욕적이라는 것을 의미함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그는 중립적인 사람이다. 그의 표어는 삶의 기쁨을 누리는 것, 될 수 있는 대로 쾌락을 얻는 것이다. 향락이 목적이다. 그것이 정신적 향락이든, 육체적 향락이든 상관없다. 이 미적 인간은 아무데도 진지하게 가담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취미가 없는 것은 싫어한다. 키에르케골이 말하는 미적 인간은 삶의 통일성과 의의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다. 질적으로 온전히 도락자여서 의무감이 결핍되어 있고 결혼에 의한 가정을 형성하려는 것도 책임지기 싫어하기 때문에 진실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미적 생활은 돌멩이를 연못 위에 팔매질 친 것과 같아서 얼마 동안은 자기 코스를 보존하며 물결에서 물결을 넘어 가지만 한 순간에 어둠과 깊음 속에 가라앉고 절망에 이르게 된다.


 

 윤리적 경험이 둘째 단계이다. 거기서는 냉정한 불간섭의 태도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가능성만을 취급하는 단순한 상상을 넘어 도덕적 존재자로 일어서게 된다. 인격은 도덕적 결단에서 되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열린 새 세계에서는 미적 생활이란 것은 다만 하나의 헛된 지루한 생활로 되어 버린다. 그리고 끝없는 아름다움과 약속이 빛 가운데 드러난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이 둘째 단계의 생활은 키에르케골 자신이 동경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 절정과 결실이 곧, 그가 자기의 결혼까지도 희생시키는 비극을 가져올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그의 내적 고민의 진전에 따라 그의 소망이 끊어진 때, 그는 윤리보다 더 높은 무엇을 발견하는 데 이르렀다. 그가 본 한 가지 사실은 윤리적인 생활이란 것은 파선 당할 수밖에 없고 또한 파괴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어서 그 사실은 참회라는 데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참회란 것은 사람에게서 모든 심혼을 온통 끄집어내는 것이어서 순수한 도덕적 영역에서 본다면, 소망 없는 후회의 고통으로 자기를 정죄하는 현상이다. 키에르케골의 이 도덕적 참회는 도덕 이상의 것을 지적해 주고 있다. 그것은 구원에 대하여 절망의 신호를 보이든지 또는 더 높은 피난처를 향하여 나아가든지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참회는 윤리에서 종교로 향하는 표적이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제3의 단계, 즉 종교 생활에 들어오게 된다. 이것은 도덕과 적대한다던가 도덕의 가치를 부정한다던가 하는  것이 아니나, 그 자체가 어디로 보던지, 도덕과 동일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우리는 순전한 도덕 생활에서 최종의 문제에 봉착하지는 않는다. 고칠 수 없는 충돌을 느끼지 않는다. 영적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다. 우리는 아직도, 모든 것의 배후에 있어서 끊임없이 우리의 결단을 요청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면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믿음'이라는 두려운 발견을 가질 여유가 남아 있다." 가장 깊은 정열, 가장 대담한 그리고 믿음직하지 못한 역설로 그는 격려한다. 믿음의 의미를 가장 잘 예시한 것은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나타나고 있다고 키에르케골은 말한다. 그는 이삭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이다. 좋게 말할지라도, 윤리의 일시적 중단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의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때문에 이를 복종하였다. 이런 관계가 진실하게 되려면, 이성을 거슬러야 하며 모든 설명을 초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믿음이란 절망에서의 비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불합리한 것이 키에르케골에 있어서는 하나님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다는 신념의 기술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불합리의 능력 안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도로 받으리라는 확실성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시간의 전체 영역을 다시 차지할 수 있었다."


 

 그는 여기서 믿음이란 우리에게 주어진 무엇, 우리에게 행해진 무엇으로서 우리의 전존재에 경련을 일으키는, 전혀 불투명하고 불합리한 것임을 보았다. 순수한 윤리적인 범주만으로써는 이것을 포섭할 수가 없다. 진실로 이것은 '하나님'이라는 말을 우리가 입으로 외울 수 있기 전에는 아무 의미도 붙일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믿음의 고투를 통하여 하나님의 절대성을 붙잡을 때, 느껴진 그(하나님)의 거룩함에 환기된 의혹과 두려움의 노우(No)가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생겨진 신뢰의 예스(Yes)에 극복되며 흡수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키에르케골의 사상은 참 자아가 참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였다. 한 사람이 빈 공간 안에서 오직 혼자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광경이다.


 

 그는 [철학적 단편집]에서 신자란 것은 무엇보다도 논리적으로 일치되며, 또는 사색적으로 투명한 인생관을 가져 보겠다는 소망을 전적으로 포기한 자를 말함이라고 정의하였다. 이 수수께끼를 해명하는 데는 믿음이 그 시초가 되는 것이다. 용서받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 믿어질 수밖에 없는 용서의 성질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믿음은 그러므로 역설적이다. 우리가 유한한 지성을 가지고 무한한 실재의 어떤 면에 관련지으려 할 때에는 거기에는 언제나 이율배반적인 '역설'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키에르케골에게 있어서 역설이 넌센스는 아니다. 이성의 불연속성에서 역설이 나온다. 믿음은 이성의 불연속성에서 가능하다. 브룬너는 "막대기를 물에 꽂으면 꺽어져 보이는 것 같이 이 세상 안에 들어 온 하나님 말씀도 그러하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종의 형상을 통하여 나타내셨으며 하나님에 대관한 모든 말씀은 필연적으로 '역설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과 사람, 은혜와 의무, 거룩함과 사랑, 이런 두 이념 사이에 있는 모순성의 방편에 의해서만 우리는 이 모순된 진리, 즉 영원한 하나님이 이 시간 안에 들어오신다, 혹은 죄인이 의인으로의 선고를 받는다든지 하는 진리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변증법적 신학은 믿음의 지식에 속한 것으로서, 비역설적인 이성적 사변으로부터 이 역설적인 성격을 옹호하며 그것을 상대하여 변호하는 사상 양식이다" 하였다. 하나님을 (이성으로)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교도들의 생각이라고 키에르케골은 주장하였다. 믿음을 통해서 확신한다.


 

 <기독교에 대한 이해>

 

 [결론적인 후기]에서 키에르케골은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며 또 어떤 것이 기독교인이냐" 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기독교인이 되려면 우리는 우리의 최선도 우리의 최악 못지 않게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무조건적 고백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당신 앞에서는 우리는 다만 티끌이요 재로소이다"고 진정으로 하는 고백은 늘 새롭고 통절한 고통을 의미한다. 다만 자연의 안락한 생활로부터 단절되는 고통뿐 아니라 죄와 벌 의식 때문에 오는 더 깊은 고통인 것이다.


 키에르케골에게 있어서 죄의 모체는 불안이다. 심리적으로는 무서움과 걱정에서 생기는 것이다. 절망은(그에게는 사실상 죄와 동일한 것) 그에게 다가온다. 죄는 질적으로 자유에 치명상을 주는 골짜기이다. 원죄는 사실이며 또 죄벌에 해당한다. 우리는 범죄적인 내용을 가지고 와서 계속하여 새로운 죄를 낳고 있다. 하나님과 범죄자 사이에 무한한 심연이 놓여 있다. "만일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땅에 있는 너와의 사이에 무한한 거리가 있다면, 거룩한 그 이와 죄인인 너와의 사이에는 더욱 무한한 거리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하나님과 사람의 구별은 기독교의 죄관에서처럼 날카롭게 드러난 데가 없다고 그는 지적하였다. "죄는 소극적으로나 적극적으로나 하나님께 관련시켜서 예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은 유한하지 않다고 하고, 거기에 붙여 말하기를 그(하나님)는 범죄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모독이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그의 저서에서 어떤 부분은 죄로 인하여 생겨진 간격을 다만 유한성 때문에 되어진 것을 증대시킨 것처럼 표현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시간 안에서의 우리의 온 존재, 하나님 아닌 피조물로 사는 우리의 상대성이 그대로 죄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런 입장에서 그는 마니교와 거의 같은 선에까지 내려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그의 견해에 따르면 모든 참된 신학의 근저에 놓여 있는 것은 '죄' 의식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되어 있는 절대적인 이원론이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장엄하시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직면하여 볼 때 우리는 장엄한 것도 거룩한 것도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항의할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만일 우리가 조금이라도 기독교를 이해하고 또 그것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는 새 생명의 어느 한 부분에 참여한 바가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 지고자로부터 떨어진 거리에 서 있을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이원론은 어떤 추리로 이동시키거나 해결 지을 수는 없는 양식의 것이다. 하나님이 질적 절대라는 견지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적극적인 관계를 설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지음 받은 유한한 존재라는 그 자체가 절대적이 존재자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영원자는 우리 존재의 최후의 피난처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우리를 가혹하게 괴롭히는 분이다. 그 본래의 구조상 끊임없는 반대적 긴장 관계에 사로잡힌 인간 인격의 유일한 도피는 하나님을 향하여 끊임없이 새로 결단하는 좁은 문을 통과하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온갖 행동의 포인트에서 그는 그 '상대적인 것'을 '무조건 적인 데'로 희생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기 순사(殉死)나 또는 무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키에르케골은 하나님을 전혀 이름할 수도 없고 기술할 수도 없는 이로 간주하는 경향을 띄고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 하나님은 '절대 불가지', '전혀 형용할 수 없는 존재'로 표현되었다. 하나님은 헤아려 알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은 모든 참된 신학의 기본 요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절대 불가지'라는 사상은 전자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분리된 견해이다. 성경은 이런 생각을 지지하지 않는다. 예언자들이 말한 것은,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를 계시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계시된 하나님은 그가 그 자신 안에서 참으로 그러하신 대로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맥킨토시, 235-6) 하나님이 성질상 알려질 수 없는 분이라면 계시의 가능성도 물론 없어진다. 그러나 키에르케골의 이론은 '사실적인'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믿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믿지 않는 한, 하나님은 그에게 언제나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믿음으로든지 이성으로든지 이 선언을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불가지성을 말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수긍할 수 없다. (맥킨토시, 236) 성서에서 보면 사람은 하나님과 같지 않다. 그러나 같기도 하다.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지으심을 받았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다. 비록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졌어도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키에르케골은 극단적인 차이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둠으로서 절대적 이원론의 입장으로 나아가고 있다.


 

 <기독론>

 

 역설의 교리는 그의 기독론에서 가장 문제 거리로 나타난다. 성육신한 인격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대상이며, 인간 이성에는 죽음의 전선에 직면시키는 것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터툴리안의 말이 곧 키에르케골의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성은 피가 터지기까지 그 눈을 깜박이고 있다"는 표현을 하였다. 불합리는 사실이며 이 사실에서 복음의 운명은 좌우된다.

 

(1) 북음의 불합리성에 의하여 그는 그 마음에 갑자기 일어나는 영광을 보며 놀라움의 특수한 감격을 느낀다는 것이다. 예수의 인격은 하나님께 있어서 불합리하거나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서만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까지라도 믿음 안에서 회상한 선한 목적에 비추어 볼 때 궁극적인 의미에서 불합리한 것이 아니다.

 

(2) 비합리적인 역설을 주장함으로써 그는 복음의 도발적인 요소,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십자가의 거침 돌'의 의미를 밝히려 하였다. 사도들이 설교한 것과 마찬가지로, 복음에는 자연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무엇이 품겨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성과 도덕적 상식을 분개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를 강요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 자신과 인격적인 교제를 맺게하여 그것으로 우리의 생사를 결단하는 사건을 삼는다는 것은, 자연적인 감정으로 본다면, 용서할 수 없는 인격 침해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이성의 측면에서 인격체로서 예수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다. 그러나 키에르케골은 말하기를 이 '거침돌'을 복음에서 제거하면 복음의 향기도 제거된다고 주장한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 일컫는 자가 없느니라".


 

 결과적으로 지성의 희생은 명령적이다. 최고의 단계에서 그리스도를 직면할 때에 우리는 모든 반이성을 온통 다 믿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과 사람은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사람' 안에서 그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거저 그대로 소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맥킨토시는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이런 이론대로 따라간다면, 하나님께서 짐승 안에서도 성육신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중세기의 공상도 그리 불합리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인연으로 볼 때 사람과 짐승은 같은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맥킨토시, 241-2)"

 이 역설의 요소가 키에르케골의 사죄와 신생의 교훈에도 파급되었다. 인간성 그대로는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은혜에 접촉할 '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그는 믿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행동은 절대 초자연적인 능력의 형식에 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가 믿음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을 재창조하실 때 그는 과거의 모든 관련을 완전히 단절시키고, 비유로만 아니라 사실로 완전히 새 인격으로서의 존재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 하였다. (당시의 기독교의 부패상을 보고 그는 단절, 적극적인 신앙을 주장하였다.) 단절이 전부이다. 계속성은 아무 할 말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접촉점을 잃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계속하여 인간에게 접촉하고 계신다. 모든 곳에서 하나님은 선수(先手)로 일하신다.

 기독론에서 인간성의 절대적 신성에 복종하는 것은 두 성품의 교리에 어긋난다고 맥킨토시는 말한다.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다는 것과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고난받는다는 것과 같은 말이라는 그의 깊은 신념은 그의 경험에서 출발한다. "고통은 7만리 깊은 바다이며 신자는 거기 매달려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로 더불어 화목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그의 고통과 학대를 우리의 것으로 흡수함으로써만 되어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교회를 향하여 '성도'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있다고 맹렬한 공격을 하였다. 성도는 하나님의 빛을 지니고 다니며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부끄러움을 당하는 자들이다.

 

 결론:

 

그가 가져온 효과는 에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진 믿음을 위하여 너무나 많은 대가를 치르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께로 올라 갈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이 사람에게로 내려와 사람을 속량하실 수 있다는 더 큰 진리를 잊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생애가 하나님의 섭리로 인도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전 인류를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신다는 더 큰 섭리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역사에 하나님의 계시가 없다. 믿음의 눈으로 볼지라도 그 의미는 완전히 감추어져 있다. 그에게는 다만 두 실재, 하나님-사람과 자신의 영혼만이 환하게 보이는 것이다. (실존주의적 나와 너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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