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site   게시판   메일   M1000선교사홈   Mission Magazine
 

 

  사전등록   히,헬 폰트받기
 현재위치 : HOME > 문서보기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9-04
 제목  헤겔과 맑스의 노동개념
 주제어  [헤겔] [맑스] [노동]
 자료출처  양운덕(고려대 철학과)  성경본문  
 내용

1. 머리말

인간의 생활에서 노동과 노동생산물을 제거하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그것들이 없이는 인간의 생활이 불가능할 것이다. 노동은 인간의 생활, 인간의 세계, 인간 자신의 바탕을 이룬다. 그러면서도 "네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고는 밥을 먹을 수 없다"는 성스러운 말씀은 인간의 노동이 저주받은 것임을 지적한다. 이때의 노동은 고통을 의미하며, 고통스러운 노력에 의해서만 자연 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인간의 예속상태를 나타낸다. 고대 희랍의 아리스토텔레스는 노동을 인간의 불행, 자기상실로 이해한다. 그는 물질세계와 접촉하지 않고 정치적 활동(praxis)에 종사하면서 자기를 실현시키는 시민계급에 비하여, 노동하는 노예계급은 제작(poiesis)에서 자신을 자기가 만든 산물에 양도(alienate)하여 자신의 힘을 상실한다고 본다. 실제로 인간들, 특히 노동하는 사람들은 노동을 힘든것, 피하고 싶은 무거운 짐, 자신을 갉아먹는 것, 천하고 보잘것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노동하지 않는 편안한 삶을 꿈꾼다. 노동은 이런 부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인간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가장 기본적인 생산활동이다. 노동은 자연에 예속되는 것이면서, 이 예속을 벗어나도록하는 것이기도 하다. *) 인간은 노동함으로써 자연을 인간에게 유용한 것으로 변형시켜, **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인간의 자연, 인간의 세계를 만듦으로써 자연의 구속을 벗어나게 한다. 노동은 물질 속에 힘겹게 뚫고 들어가 그 물질에 인간의 틀을 부여하여 그것을 인간화한다. *** 이러한 노동은 사물을 형성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인간 자신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이 글은 노동에 대한 다양한 관점 가운데 헤겔과 맑스의 노동관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먼지 헤겔은 노동을 인간과 자연, 주체와 객체의 통일이란 틀에서 이해한다. 그는 노동이 주객을 통일시키는 한 형식이며, 노동은 주체가 자연대상에 자신의 고유한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노동산물에 자신을 사물로 표현하고 이렇게 하여 자신을 대상 속에 실현시키는 것으로 본다. 맑스는 이러한 헤겔의 관점을 수용하면서도 노동을 정신의 발전단계로만 취급하기를 거부하고 유물론적 틀에서 인간과 자연간의 현실적 상호작용으로 이해한다. 특히 맑스에게서는 노동개념이 그 이론의 기초에 해당되는데, 그에 따르면 노동은 인간의 (물질적) 생활과 인간의 세계를 만들며, 인간자신을 생산하는 본질적 행위이다. 맑스는 노동을 사회적 관련 하에서 이해하기 때문에 노동이 구체적으로 어떤 현실적 조건에서 행해지는 가를 분석하는 데 중점을 둔다. 그는 특히 자본주의적 현실에서 노동이 소외된 모습을 보이는데, 이 소외의 원인이 노동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현실적 조건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현실에 대한 변혁을 소외극복의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2. 헤겔의 노동개념 ****

1) 노동의 의미―주체의 대상화

여기에서는 헤겔의 노동개념을 통해 그의 관념론적 주·객통일론의 특징을 살피고 동시에 헤겔의 근대 시민사회에 대한관점을 이해하고자 한다.

먼저 그의 노동개념은 독일 관념론의 주객통일론과 연관을 갖는다. 관념론에서는 로크처럼 노동을 시민사회를 받치고 있는 재산의 근원으로 보거나, 국민 경제학에서처럼 노동을 가치를 생산하는 원천 또는 가치의 척도로 파악하는데 주안점을 두지 않는다. 1) 노동은 인간의 실천척 활동성 (praktische T?tigkeit) 의 틀안에서 인간이 자신을 구성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독일 관념론은 주·객의 변증법을 가장 중요한 축으로 본다. 먼저 칸트는 주·객통일을 인식주관의 선험적 형식에 인식되는 객관적 질료를 포섭하는 과정으로 해명하고자 하고(인간의 주관적 형식으로 현상세계를 구성함), 피히테는 이것을 선험적 자아가(경험적) 자아(Ich)와 대상적인 비아(Nicht-lch)를 정립하고 이 자아가 자기를 가로막는 장벽인 비아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쉘링은 이러한 주관적 주·객통일론이 객관인 자연의 자립성을 무시한다고 비판하고 객관적 주·객통일론을 내세우는데, 이것은 정신(주관)과 자연(객관)을 대등하게 무차별적 동일자의 두 계기로 이해하고 양자의 직접적인 통일을 시도한다. 즉 자연은 잠자는 정신이고, 정신은 깨어있는 자연이므로 자연=정신이다. 헤겔은 절대적 관념론의 입장에서 칸트, 피히테의 주관주의적 결함과 쉘링의 통일철학을 극복하려고 한다. 그는 정신과 자연을 자립적인 두 계기로 인정하면서 양자의 대립을 정신의 운동을 통해 매개시키고자 한다. 따라서 헤겔은 이것을 정신과 자연의 즉자적 동일성이 분열되고 이 분열이 다시 통일되는 과정으로, 즉 정신의 자기소외와 이 소외의 극복과정으로 설명한다.

이것을 노동개념과 연결시켜 보자. 이때 노동은 자기를 형성하는 인간의 (이론적, 실천적) 활동성의 한 형태인데 피히테는 인간의 실천을 세계의 낯설음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본다. 즉 자아는 자신을 대상적으로 객관화하여 이렇게 객관화된 자기에게서 다른 모습으로 있는 자기를 되찾음으로써 세계와 자신의 분리를 극복한다. 자아가 대상이 바로 자기의 산물임을 인식한다면 대상은 더이상 자기를 가로막는 것일 수 없을 것이다. 2)

쉘링은 자아를 설명하면서 자아는 자유롭게 자신을 규정하여 자신을 객관세계로 대상화시킴으로써 자기에 대한 의식에 도달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자신이 객관적인 것이 되는 이러한 대상화는 동시에 자신이 그 객관적인 것의 한계 때문에 제약받고 부자유스러워지는 측면을 갖는다. 따라서 자아는 다시 이 제한을 넘어서야 한다.

헤겔은 이러한 흐름을 이어 받아 정신이 자기를 객관화하고 그것을 다시 극복하는 연속과정을 자기실현의 변증법으로 전개한다. 그는 노동이 이러한 주·객변증법의 한 단계라고 본다. 그는 노동이 자아와 대상이 매개되는 중심(Mitte)이며, 인간은 노동하면서 자연을 변화시켜 '인간적 자연'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양자를 일정하게(물론 완전하지는 않지만) 통일시킨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에서 주체는 자기가 대상과 통일되어 있는 모습을 본다고 이해함으로써, 주체가 자기를 대상속에 표현하는 행위, 즉 자기외화, 자기대상화로 본다.

이와 다른 측면에서 헤겔은 영국의 국민경제학이 노동가치론에 기초하여 시민사회 (B?rgerliche Gesellschaft)를 분석하는 것과 관련하여 시민사회를 '노동과 욕구의 체계'로 파악하고 시민사회에서 나타나는 노동의 특성을 분석한다. 그는 원자화되고 개체화된 시민들의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시민사회가 (공동체가 아닌) 개체들의 사적 노동(私的勞動)과 그 산물의 교환에 의해 결합된 체계인데, 이 사회의 근간인 사적 성격(私的性格)이 시민사회를 위기에 빠뜨린다고 본다. 그래서 헤겔은 공적인 국가에 의해 시민사회를 조절.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제 헤겔의 노동관을 간략하게 소개하기로 하자. 그런데 논의를 복잡하게 하지 않기 위해 헤겔 자신의 시기상의 관점 변화를 일일이 소개하지 않고 그 전반적 성격을 포괄적으로만 밝히고자 한다. 특히 이 장에서는 「예나시기의 강의안」(그 일부가 實在哲學), 『논리학』, 『미학강의』등을 주로 참고할 것이다.

그러면 노동을 통해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매개되는 가를 살펴보자. 인간은 먼저 자연 속에 있는 생명체(des Lebendige)이다. 그런데 이 생명체는 다른 동물과 달리 자연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생활에 알맞도록 일정하게 바꾸어 놓음으로써, 자신의 생활에 필요한 물품(Lebensmitte)과 자신에 알맞는 생활환경을 마련한다. 즉 이 생명체는 자기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자기를 제약하고 구속하는 자연대상을 자신의 활동을 통해 부정한다. 헤겔은 이러한 내용을 독특하게 표현한다. 즉 생명체는 다른 존재자와 관계하면서 타자를 부정하는 작용을 매개하여 자기와 관계하는 존재, 또는 대상과 관계하면서 자기로부터 벗어나 있다가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는(sich reflektieren) 존재하고 본다. 생명체가 이처럼 생명에 대립되는 타자일반을 부정하는 생명과정(lovens prozess)은 생명체가 타자 속에서 자기를 유지하고 자기를 현실적으로 확보해나가는 과정이다. 생명체는 자기에 대한 부정(대상·객체)을 자기 행위에 의해 부정함으로써 자기를 긍정한다.

그런데 헤겔은 이 과정에서 노동을 단순히 생명체의 보존으로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주·객통일의 한 단계로 본다. 즉 생명체는 자기 밖에 있는 대상을 실천적으로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나감으로써 대상에 대한 자신의 실재성 (Realit?t)을 표현하고 객관화하고자 한다고 본다. 3) 그러므로 헤겔이 볼 때 노동은 욕구충족수단이면서 동시에 주체의 고유한 자기표현 행위이다. 나무라는 질료를 깎고 다듬어 책상을 만들게 되면 나무에 일정한 인간의 틀(형식, 목표)이 부여된다. 책상은 이제 나무가 아니라 책상이 된 나무이다. 주체는 이 나무-책상과 현실적으로 관계하여 이것에 자신을 새겨넣고 그것을 자신의 산물로 만든다. 이러한 산물들은 자연적 대상이 아니라, 인간적 대상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속으로 파고들어가 자연을 인간의 것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헤겔은 이렇게 변화된 대상들(노동산물)이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는 점보다도 그것들이 인간자신을 나타낸 것. 인간 자신을 외화시킨 것임을 강조한다. 즉 그는 노동과정에서 인간이 자신을 외면적인 것, 객관적인 것으로 만들어 그렇게 객관화된 자신을 자기 앞에 현전시킨다고 이해한다.

헤겔은 객체를 부정하는 주체의 노동을 주체와 객체가 통일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이때 이 과정이 통일이라고 하는 것은 이 과정에서 한 쪽(주체)의 다른 쪽(객체)에 대한 일방적인 부정이 아니라, 대상을 부정하는 주체 역시 부정되면서 새로운 통일을 이룬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그러면 먼저 대상이 어떻게 부정되는 가를 살펴보자. 노동과정에서 대상은 일단 자립적인 것으로 노동주체에 저항한다. 이때 이 자립성을 부정하기 위해 대상을 소멸·무화(vernichten)시키려는 일면적인 파괴행위는 일시적인 충족은 줄 수 있지만 지속적인 충족을 주지 못하고 결국 노동과 노동주체까지 파괴해버리고 말 것이다. 노동과정의 한 요소이면서 이 과정에 전제된 객체가 사라지면 노동은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헤겔은, 노동과정에서 대상에 대한 직접적이고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내용을 산출'하는 '형성작용'이 이루어 진다고 본다. 4)

노동은 대상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자립성을 일정하게 제거하고 약화시켜서 그것을 노동의 목적에 알맞게 곧 주체에 알맞게 변화시키는 것이다. 즉 노동은 대상을 지양(aufheben)하여, 일정한 내용을 낳도록 부정하는 작용이다. 5) 따라서 대상은 노동과정과 노동산물에서 없어지지 않고 다른 모습으로 있게 된다. 즉 인간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있던 것(Ding an sich)이 인간에 대한 것, 인간을 위한 것 (Ding f?r den Menschen) 으로 있게 된다.

또 노동주체의 측면에서 볼 때 주체의 매개되지 않은(un-mittelbar : 직접적인) 욕구는 대상과 부딪치고 맞싸우는 과정에서 그 직접성, 개별성이 매개되어 (일정한 자연의 질서·법칙을 받아들이면서) 인간적 욕구로 고양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적 욕구는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것이지만 노동과정에서 그 내용이 구체화되고 현실화되면서 노동산물로 객관화된다. 이처럼 노동은 대상을 노동주체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면서 대상과 자기가 통일되어가는 과정이다.

"이 활동에서 주어진 객체는, 주관성이 그의 일면성을 벗어나 그 자신이 객관화되는 것과 같이, 주관적으로 정립된다.…… 욕구의 충족을 통하여 주체와 객체의 즉자적 동일성이 정립되고 주관의 일면성과 객체의 '가상적 자립성'이 지양된다." 6)

인간은 처음에 무기적 자연(un-organische Natur)과 대립하면서 이것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인간의 욕구와 자연의 대상성은 노동이란 매개중심에서, 욕구는 자기를 매개된 형태로 현실화하고 대상은 그 자립성을 포기하면서 노동산물로 바뀐다. 이 생산물은 양자가 서로 부정된, '이중부정'의 결과이다. 여기에서 주체는 대상 안으로 들어가고 대상은 주체의 고유한 형식을 받아들인다. 이것은 주체가 객체화되고, 객체가 주체의 형식으로 되는 것이다. 헤겔은 이처럼 주체가 자신을 대상으로 나타내는 것을 '자기를 사물로 만듦(sich-zum-dinge-machen)', 7) 즉 자기의 對象化 (vergegenst?ndlichung) 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처럼 자신을 객관화하는 주체는 사물화 된 자신의 모습에서 자신을 확증하고 자신이 대상화된 정도만큼 자신을 실현시킨다. 이러한 노동과 노동산물에서 주체와 객체는 서로 분리되어 추상적으로 고립되어 있다가 하나의 종합을 이룬다. 물론 헤겔은 이러한 노동에 의한 종합을 완전한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이제 노동개념을 『논리학』의 「목적론」(Teleologie)에 따라 이해하면, 8) 노동과정은 주관적 목적, 수단, 실현된 목적의 3각관계가 빚어내는 통일과정이다. 이때 주관적 목적을 실현시키는 수단은 합목적적인 활동인 노동과 노동도구이다. 이것을 매개로 주관적 목적은 객관적 목적, 실현된 목적이 된다. 헤겔은 이 과정을 목적의 자기운동으로 설명한다. 목적은 그것이 목적 자체로(Zweck an sich) 있으면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자신을 구체화하고 실현시키기 위해 목적은 스스로를 외면적으로 정립하게 된다. 목적은 전제된 것으로 자기와 무관하게 (gleichg?ltig) 독립성을 유지하는 객관과 관계하여 대자적인 목적 (Zweck f?r sich : 자기를 벗어나 객관과 대립하는 목적)이 되고 이 객관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즉 목적이 자기를 객관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객관을 부정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객관은 목적의 질서에 편입되고 목적에 의해 재구성된다. 이렇게 해서 주관적 목적은 객관 속에서 실현된 목적이 되며, 이 '실현된 목적'에서 목적과 객관이 통일된다. 이때 노동은 즉자적 목적을 '실현된 목적'으로 산출하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이 과정에서 노동은 자기 목적이 아니라, 목적이 자기를 실현시키는 과정의 담당자 (Tr?ger) 역할을 한다. 즉 노동은 주관적 목적을 객관화하는 하나의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 9)

그러면 이러한 이해에 기초하여 노동행위의 수단이 되는 노동도구에 대해 헤겔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가를 보기로 하자. 헤겔은 노동의 결과물이면서, 노동을 보조하는 도구에 노동의 보편적 성격, 이성적 본성 (Vern? nftigkeit) 이 나타나 있음을 강조한다.

노동주체는 노동과정에서 노동도구(Arbeitsmittel, Werkzeug)를 사용한다. 이 도구는 주체가 노동과정에서 부딪치는 자연대상의 강한 저항을 손쉽게 이겨내기 위해 자신과 자연 사이에 도구를 끼워넣어 이 도구가 자연과 부딪치고 소모되도록 하고 이렇게 해서 주체 자신의 노력을 절약하면서 도구자체가 이 과정을 매개하도록 함으로써 자연의 폭력을 자연자체를 통해 제거하여 자연을 쉽게 제압하기 위한 것이다. 즉 [인간]↔[자연]의 관계를 [인간]←[도구인 자연물]→[자연]으로 바꿈으로써 [도구인 자연물]↔[자연]의 관계가 전면에 드러나게 하고 자신은 한발 물러서서 이 과정을 주관하게 된다. 헤겔은 이것을 인간의 지혜(List)라고 부른다. 10)

이러한 도구는 노동의 산물로서 그 속에 주체와 노동능력이 대상화되어 있다. 그리고 이 도구는 노동과 대상을 매개하게 된다. 노동이 노동주체와 대상을 매개하는 중심이라면, 노동도구는 이 노동과 대상을 매개하는 중심이다. 헤겔은 이러한 도구가 '노동의 존속하는 현존'이며 노동과정의 '이성적 중심 (vern?nftige Mitte)' 이라고 부른다.

"도구는 현존하는 이성적 중심이며 실천적 과정의 현존하는 보편성이다. 도구 속에서 노동작용은 존속성을 지닌다. 도구는 그것에 의해 노동하는 자와 가공된 산물로부터 홀로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도구에 의해 노동의 우연성이 영속적인 것으로 된다." 11)

도구는 한번 행해지고 소멸되는 개별적인 노동행위에 비하여 지속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다. 그러고 도구는 노동의 규칙(Regel)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규칙에 따라 노동하면 주체가 자연스럽게 도구에 대상화된 일정한 노동능력, 일정한 수준을 갖추게 되어 노동이 보편적인 수준으로 고양된다. (예컨대 가장 간단하고 원시적인 도구인 깬돌만 하더라도 그것이 맨손이나 돌 그대로를 사용하는 경우보다 노동의 질을 한단계 높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도구는 계속 축적·발전됨으로써 그것이 담고 있는 발전된 노동능력을 노동주체에 넘겨준다.) Ⅰ.두브스키는 헤겔의 노동개념을 해석하면서, 도구는 주·객에 대한 제 3 자(das Dritte)로서, 이것은 자연의 일부인 동시에 합목적적 행위(노동)의 수행자(대행자)라고 본다. 인간의 노동과정은 도구를 통하여 객체에 옮겨져 객체를 변형시킨다. 이때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므로(도구의 노동대행) 자신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있다. (도구는 그 자체가 주객의 통일체로써, 주관과 자연사이에 있는 중심이며 '매개된 매개'이다.) 12)

그런데 헤겔은 도구의 긍정적 측면과 함께 부정적 측면도 지적하고 있다. 노동도구는 노동과 대상을 매개하는 역할을 넘어서서 그 자체가 독립된 힘을 가지고 인간을 구속하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그는 노동 공정이 분업화되면서 노동이 단순한 행위로 환원되고 기계의 동작이 그 행위를 대체하면서 노동이 단순화, 파편화, 추상화되면서 인간의 능력을 하나의 '고정된 점'에 묶어 버리고, 노동주체가 기계의 부속품이나 조수로 전락하는 부정적 측면이 강화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2)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나타난 노동의 의미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자기의식 장에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노동의 의미를 보다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자기의식은 자기에 대한 의식, 곧 자기의 자립성에 대한 의식이다. 헤겔은 자기의식이 데카르트처럼 자기의 자기에 대한 사고에서 확보된다고 보지 않고 자기의식적 존재(인간)들간의 상호관계에 의해 확보된다고 본다. 즉 자기의식은 다른 자기의식과 관계함으로써만 현실적인 자기의식일 수 있다고 본다. 13)

먼저 자기의식은 자기의 자립성을 (배타적으로) 주장한다. 그런데 다른 자기의식 역시 자신의 자립성을 주장하므로 서로의 배타적 자립성이 충돌하게 된다. l4) 그러면 자기의식은 자신 만의 자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자기의식을 부정하려고 한다. 헤겔은 이것을 승인투쟁(Anerkennyngs Kampf)이라고 부르고, 이 투쟁을 거쳐 한 자기의식이 다른 자기의식을 지배하게 된다고 본다. 즉 생명을 건 싸움에서 승리한 쪽이 주인이 되고 패배한 자는 자기의 자립성을 포기하고 다른 자기의식을 승인하고 그 노예가 된다. 이때 주인의식은 대자적 자립적 의식이고, 노예의식은 대지적, 비자립적 의식이다. 이 주·노 관계에서 주인은 지배자로서 다른 자기의식을 노예로 부림으로써 자신의 자립성을 승인받는다. 주인은 이제 자신의 생활을 위해 노동할 필요가 없고, 단지 노예를 부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므로 노예는 주인의 '욕구'를 떠맡아 주인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하여 노동하도록 강요받는다. 노예는 노동하며 자립성이 부정된 산물을 주인에게 바치고 주인은 그 산물을 향유하게 된다. 여기에서 노동하는 노예는 대상의 저항에 부딪쳐 대상을 완전하게 부정하지 못하고 대상을 가공(be-ar-beiten)하는데 비해, 주인은 노예의 노동에 의해 가공되어 자립성이 부정된, 저항하지 않는 대상(딱딱한 나무가 아니라 포근한 의자, 거칠고 질긴 날고기가 아니라 연하고 맛이게 구운 고기, 등)을 소비함으로써 사물을 부정하고 자기를 긍정한다.

그런데 헤겔은 이러한 승인이 일방적 승인, 가짜 승인임을 폭로하고 이 과정에서 주·노관계가 역전된다고 지적한다. 여기에서 자립적인 것처럼 보였던 주인은 사실은 비자립적인 의식이며, 주인의 채찍이 가하는 '공포'속에서 주인에게 '봉사'하기 위해 '노동'하는 노예가 사실은 '자기의식의 진리'이며, (자기도 모른채) 자기의 자립성을 객관화 해 나가고 있다고 밝힌다.

헤겔은 이러한 역전의 계기로 공포, 봉사, 노동을 든다. 그러면 이러한 계기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비자립적인 노예를 자립적인 존재로 만드는가를 보기로 하자. 노예는 주인의 지배를 받으면서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공포가 아니라 자기 생명 전체를 위협하는 전면적 공포를 겪는다. 이 공포 때문에 노예는 자신의 존재가 모조리 뒤흔들리게 되어 자연적 현존에 안주하는 태도를 스스로 부정하고 자신의 자연적 한계를 넘어서야만 한다. 헤겔은 이리한 공포가 노예에게 숨겨진(자기의식의) 부정적 본성 (Negativit?t) 을 일깨운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성은 노예가 주인에게 봉사해야하기 때문에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노예자신을 규제하고 절제하여 스스로를 도야(bilden)하게 한다. 15)

이러한 주관적·내면적 자기 형성(Bildung)은 노동이라는 객관적 계기에 의해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자기형성으로 외화된다. 노예는 노동함으로써 대상을 가공하고 변형하여 대상에 주체의 형식을 부여한다(Form-geben ; Form-ieren). 주체는 이러한 형성행위에서 대상의 내용과 자신의 형식을 통일시켜 대상의 소원함을 지양한다. 이것이 바로 주체가 자신을 대상으로 만듦 (Vergegenst?ndlichung) 이며, 자기를 대상에 외화 (ent?uβ erung) 함이다.

"노동은 '저지당한' 욕구이며, '억제된' 소멸, 또는 사물을 '형성(Bilden)'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상과의 부정적 관계가 바로 이 대상의 형식으로 바뀌게 되고 마침내 존손하는 것(Bleibendes)으로 되는데, 이것은 오직 노동하는 자에게서만 대상이 자립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러한 '부정적' 중심, 또는 '형성하는 행위'는 개별성, 또는 의식의 순수한 대자론재로써 이제 이 대자존재는 노동에서 의식 밖에 지속적인 기반(Element)으로 나타나게 된다. 즉 노동하는 의식은 이렇게 하여 '자기에 의해 만들어진' 자립적인 존재를 '자기자신으로' 보게 된다." 16)

노동하는 노예는 대상의 소원한 부정태를 깨트려 자기를 지속적인 요소로 정립하고 그 자신이 대자적 존재임을 자각한다. 가공된 노동산물은 노예의 '고유한 작품(Werk)'이다. 17) 이러한 계기들의 상호작용으로 노예는 자신의 자립성을 주·객관적으로 획득하게 된다.

그러면 주인의 자립성은 왜 문제가 있는 것인가? 주인은 노예라는 매개자를 통해서만 자립적일 수 있다. 즉 노예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노예에게 노동을 맡기고 사물과 현실적으로 관계하지 않기 때문에 현실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존재가 된다. 또 주인은 노예가 노동하여 바친 산물, 자립성이 부정된 사물을 직접적으로 소비할 뿐이다. 이러한 소비는 어떠한 지속적인 요소도 남기지 못하고 끝없는 소멸의 늪에 빠져 버린다. 끝없는 욕구충족은 계속 소멸될 뿐이므로 주인은 자기를 확증해주는 어떤 것도 갖지 못한다. 따라서 주인의 자기의식의 자립성을 지탱해 주는 것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18)

이와 달리 노예는 사물과 현실적으로 관계맺고 사물의 저항을 이겨내며 노동함으로써 대상에 자신의 형식을 부여하고 대상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나간다. 이렇게 대상을 자기의 것으로 형성하는 노동은 곧 자신을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므로 노예는 가공·형성된 산물 속에 자기가 나타나 있음을 보게 된다. 이제 대상과 싸우는 과정에서 자기를 상실했던 노예는 자기를 되찾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의 형식으로 자기 앞에 있는 자신의 산물(대상화·객관화된 자기)에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주어져 있다. 이렇게 되면 자기의식의 자립성은 주인이 아니라 노예에 의해 객관화되고 확보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노동의 긍정적 의미를 강조하는 H. 홀츠는 노예가 사물을 가공함으로써 자연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를 얻게되며, A. 꼬제브는 노예의 노동이 자연과 주인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온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19)

이처럼 노예를 자각(selbst-bewusst)하게 하는 노동은 주·객통일의 측면에서 이해해야 하는데 노동산물에서 주체와 대상은 통일되어 주체는 대상으로, 대상은 주체의 형식으로 있게 된다. [주체↔대상]=노동⇒ [노동산물 : 주체=대상] 그런데 헤겔은 노동의 긍정적 의미와 함께 그 한계를 지적한다. 헤겔은 노동이 주체와 대상을 완전하게 통일시킬 수는 없다고 본다. 노동에 의한 산물은 자기를 대상화하는 것이지만, 이때의 자기는 대상으로 있는 자기에 불과하고 자기와 대상은 여전히 분리된 측면을 가질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마르쿠제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노예에 의해 형성된 대상 일반은) "아직 대상성으로, 자기의식의 타자로 그에게 대립된다. 그 안에서 충족감을 누렸던 자기의식은 그의 본질이 아직 대상성의 방식으로 있음을 발견한다. 그것은 그가 그 자신으로 참되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대상성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는 세계에 대해 부정적인 관계로 대립하고 있다." 20)

책상이란 노동산물을 예로 들어보자. 책상은 노예를 자립적인 것으로 만들어 준 것이고, 책상에는 노예가 새겨져 있지만 책상은 여전히 자기를 벗어나 있다. 나무의 자립성은 부정되었지만 책상자체의 자립성은 여전히 자기와 대립하고 있다. 그것은 주체의 것이면서 여전히 주체 밖에 있고 주체를 완전하게 표현하지도 않는다. 이때의 주체는 책상이란 대상적 현존에 제한을 받는다. 헤겔이 볼 때 주체는 노동을 통하여 대상을 자기의 것으로 형성하지만, '대상성' 자체가 지양되지 않는 한, 대상의 자립성은 소외된 것으로 남겨진다. 헤겔은 이처럼 노동을 통한 대상화가 (노동의) 소외를 가져온다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소외(주·객의 분리)를 지양하기 위해서는 노동을 넘어선 새로운 단계의 주·객통일이 필요할 것이다. 헤겔은 이처럼 노동의 소외를 넘어서기 위해서 노동자체를 넘어서게 된다.(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노동하는 자기의식의 제한된 자유를 사유하는 자기의식-스토아주의·회의주의·불행한 의식-의 자유로, 이어서 이성·정신의 단계로 고양시켜 보다 완전한 주·객동일성을 인식하는 길을 제시한다)

3) 시민사회에서의 노동의 의미

헤겔의 시민사회에 대한 분석은 그의 객관정신론의 일부이다. 그의 객관정신론은 (자유로운) 의지에 관한 규정으로, ① 그 의지가 즉자적이고 외적으로 나타난 추상법, ② (자유)의지가 내면화된 도덕, ③ 양자의 통일로서, 자유의지의 즉자대자적 현존인 인륜의 계기를 갖는다. 특히 인륜은 가족·시민사회·국가란 발전단계로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가족은 즉자적이고 직접적인 보편성을, 시민사회는 대자화된 특수성을, 국가는 보편과 특수의 통일로서 구체적 보편, 구체적 자유를 실현시키는 단계로 파악된다. 시민사회 (b?rgerliche Gesellschaft : bourgeois society)는 인륜의 한 계기로서 (즉자적 보편성을 지닌) 가족을 단위로 하는 특수성, 즉 개별자의 특수성에 기초한 욕구와 충족의 체계이다. 시민사회는 각 개별주체의 욕구체계, 원자적 욕구의 체계인데, 이때 개별 주체는 중세의 신분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난 근대사회의 자유로운 시민이다. 이러한 시민 (B?rger)은 소유·재산의 주체인 법적 인격(Person)으로서 자기재산과 자기자신에 대한 처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율적 존재이다.

근대시민사회의 주체인 이러한 시민, 시민계층 (B?rgertum, 부르조아지 bourgeoisie)은 자신의 재산권을 자신의 자유의 외적, 물질적 기초로 삼는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의 내적계기는 도덕적 주체로서 자기결정(Selbstbe-stimmung)한다는 점이다. 각 개인들은 이러한 계기들에 기초하여 가족의 대표이자, 시민사회의 주체이며, 국가의 일원이 된다. 그런데 시민사회와 시민계층의 기본 원리는 보편성이 아니라 특수성(자기추구)의 원리이다. 따라서 시민사회의 구성원 각자는 자기를 목적자체로 삼고 자기의 욕구를 충복시키기 위하여 노동하고 소유하고 서로 관계한다. 여기에서 각자는 자신의 개별적,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데, 이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자신의 욕구·충족은 타인의 것에 의존하게 된다.

"시민사회에서는 각자가 자신에게 목적이고 자신 이외의 모든 타자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타자와 관계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 따라서 이 타자들은 특수자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된다. 그러나 특수한 목적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하여 보편성의 형식을 얻고 타자의 복지를 함께 충족시킴으로써 자신을 충족시킨다." 21)

이처럼 시민사회는 상호의존하는 각 개인들의 노동과 욕구충족을 통하여 욕구를 조절하고 개인들을 충족시키는 욕구의 체계(System der Bedurfnisse)이자, 노동의 체계이다.

이때 노동은 주관적 욕구와 (그것을 만족시키는) 대상을 매개시키는 활동, 즉 자연에서 직접적인 것으로 주어진 질료(Stoff)를 일정한 욕구에 맞도록 가공하는 행위이다. 시민사회의 근간이 되는 재산은 이 노동에 기초한 것이다. 개별자는 노동하여 대상을 자기의 것으로 형성함으로써 그 대상을 점유취득(Besitznahme)한다. 이것이 사회적으로 '승인'되면 개별자의 재산(Eigentum)이 된다.

"내가 어떤 것을 나 자신의 힘(Gewalt)안에 가지는 것이 점유이며…… 자유로운 의지로서 나는 점유에 의해서 자신을 대상화하고 그것을 통해 현실적 의지로 된다는 점이 소유를 형성한다. 소유는 단순히 욕구 충족의 수단을 확보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것으로서의 소유를 통한 자유의 현존인 점에서 자유가 소유의 본질적인 목적이다." 22)

헤겔은 이처럼 소유를 '자유의지의 외화'로 본다. 따라서 개별자는 자신의 소유에 기초하여 자유를 확보한다.

그런데 이러한 욕구와 노동의 체계에서 욕구는 그것이 특정화되고, 특수한 측면으로 분할되어 다양해지고 이에 따라 세련되게 되는데, 이것을 충족시키는 노동체계 역시 다양하게 분할·분화된다. 그래서 각자는 분할된 전체의 일부로 기능하면서 타자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산물을 생산하고 자신도 타자의 산물로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키게 되어 서로 의존하게 된다. "그는 다수의 개인들의 욕구를 위해 노동한다. 이 다수도 각자 다수의 욕구를 위해 노동한다. 따라서 각자는 다수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그의 다양한 욕구충족은 다양한 타인의 노동에 의해 성취된다." 23) 즉 각자는 분할된 노동에 참여함으로써 서로 의존된 상태에서 서로가 타자를 위한 산물을 생산하여 서로를 보완한다. 그래서 이들은 각자의 산물을 서로 교환하는 관계를 맺게 된다.

헤겔은 이러한 상호의존의 체계에서 개인들의 주관적 이기심은 타자 모두의 욕구충족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바뀐다고 지적한다. 이처럼 개별자가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서로 의존하는 연관 안에서 교환가능한 산물(상품)을 생산함으로써 보편적인 욕구충족이 가능해지는 데, 헤겔은 이것을 개체의 운동을 통해서 보편이 실현되는, 또는 개체(특수)의 욕구충족을 이용하여 보편성이 매개되고 실현되는 변증법적 운동으로 이해한다. 부연하면, 개별자가 자기목적을 추구함으로써 그가 의식하지 않은 타자 일반의 이익이 증진되는 개체와 보편의 변증법이 이루어진다. 24)

이러한 개별자들의 상호의존관계는 개별자들이 노동산물(상품)을 상호 '교환'하는 관계로 나타난다(이때 교환은 계약 (Vertrag)으로 이루어진다). 각자는 타자의 욕구를 위한 산물을 생산하고 이것을 서로 교환함으로써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각자는 교환에서 타자의 욕구를 충족시켜 서로를 승인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때 시민사회는 보편적 교환의 체계인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환에는 일정한 척도가 필요한 데 이 척도는 가치(Wert)이다. 이것은 (특정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사물의 질적 측면-사용가치-과 다른 것인데) 한 사물을 다른 사물과 교환할 때의 양적 크기이다. 이 가치에 의해 사물들은 동일한 기준에 의해 비교될 수 있게 된다. 예컨대 같은 가치(등가)를 갖는 사물들은 사물 자체가 같은 것은 아니지만 동등한 것으로 여겨진다. (가치는 질적으로 다른 사물을 비교하는 보편성이고, '추상적 사용가치'이다) 25)

이 가치는 노동에 근거한다.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대상을 인간의 욕구에 알맞게 형성했기 때문에 이 대상은 인간에게 유용한 사용가치를 갖는다. 그런데 이러한 사용가치란 질적인 가치는 보편적 교환과정에서 그것의 양적 규정인 교환가치로 지양된다. 따라서 보편적 교환을 매개하는 가치는 인간노동의 양적 규정인 교환가치이며, 이것은 화폐로 표현된다.

이러한 노동산물의 교환은 노동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어 개인의 노동을 타인의 욕구·노동과 연결시킨다. 이러한 관계에서 노동은 타인의 욕구라는 추상적인 욕구와 추상적인 노동을 지향하게 된다. 헤겔은 이러한 관련에서 개별적 노동이 개별성을 넘어 보편적인 것으로 고양된다는 긍정적 측면과 함께, 분업과 교환의 체계에서 노동의 분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생기는 부정적인 측면도 지적하고 있다.

"노동에서의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요소는 수단이나 욕구의 특수화로 가져오고 동시에 생산을 특수화·세분화하여 노동분업을 낳는 추상성이 있다. 개인의 노동은 분업을 통하여 더욱 단순화되어 그 추상적인 노동의 숙련도 및 생산량은 더욱 증대된다. 동시에 숙련성과 수단의 이러한 추상화는 다른 욕구의 충족을 위한 상호간의 의존성과 상호관계를 완벽한 '필연성'으로 완성시킨다. 생산활동의 추상화는 노동을 한층 기계적인 것으로 만들어 드디어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그에 대신하여 기계를 등장시키게 된다." 26)

헤겔은 이처럼 상호의존, 교환의 사회체계가 갖는 분업체계에서 노동의 성격 역시 분업화된, 분할된 노동과정으로 발전되고 이에 따라 노동의 소외가 심화된다고 본다. 이러한 노동의 부정적 측면에 대해서는 법철학에서보다도 『예나시기의 강의안』에서 특히 강조되고 있다. 분업에 의한 노동능력의 일면화·파편화·불구화에 의해, 노동의 기계화에 의해 노동과정은 노동주체에게 낯선 것이 된다. 헤겔의 『예나 강의안』에는 맑스가 『경제·철학초고』에서 소외된 노동을 분석하는 것을 연상시키는 구절들이 많이 보인다.

"인간이 노동을 종속시키면 시킬수록, 그 자신은 더욱 비참해지며,……노동이 더욱 기계적이 되면 될수록 노동의 가치는 더욱 저하되고, 그에 따라 그는 더욱 많이 일해야 한다. 노동이 추상화될수록 노동은 추상적 활동이 된다.……노동의 가치는 노동 생산성이 증대되는 데 비례하여 감소한다.……개인의 능력은 무한정하게 제한되고, 공장노동자의 의식은 극도로 우둔해진다." 27)

헤겔은 소외된 노동의 이러한 특성들을 지적하면서, 노동이 공허하고 의미없는 행위로 되며, 포괄적이고 풍부한 인간의 힘이 일면화 되어 분할된 작업공정에 얽매이고, 한 '점'에 고정되어 단조로와지며 기계의 부속품이 되어버린다고 비판한다. 이렇게 된다면 자기를 대상화하는 행위는 기껏 자기를 대상에 잃어버리고 매몰시키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헤겔은 이러한 소외의 측면이 분업화된 노동의 벗어날 수 없는 특성이라고 본 듯하다.

어떻든 시민사회는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주체(시민)들이 사적 소유에 기초하여 욕구와 노동의 체계, 상호의존과 보편적 교환의 체계를 유지한다. 헤겔은 이러한 시민사회가 갖는 긍정적 의미(공동체의 억압으로부터의 객체의 해방)를 인정하면서도 그 일면성과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다. 시민사회는 특수성(개체)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시민사회의 이러한 사적 성격(私的이고 原子化된 主體, 私的 所有, 絶對的 個人主義)은 필연적으로 우연성, 자의에 의해 개체들간의 충돌과 희생을 낳을 수 밖에 없다. 28) 개별자의 사적 이익의 추구는 조화가 아니라 결국 상호충돌과 부조화를 낳게 된다. 사립과 (경찰)행정에 의해 소유권을 보장하고 소유와 교환관계에서 발생하는 일탈과 불법행위를 일정하게 규제한다고 하더라도 개별자의 우연성, 자의에 의한 맹목적인 경제법칙과 부의 불평등을 막을 수 없다. "시민사회가 부의 과잉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충분하게 부유하지 못하다는 것, 즉 빈곤의 과잉과 천민계급 (Pobel)의 출현을 방지하기에 충분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 폭로된다." 29) 헤겔은 이러한 사회적 빈곤이 과잉집중된 부의 귀결이며, 부의 다른 얼굴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위기를 내포한 시민사회는,

"개별자의 근원적 필연성·우연성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폐기하는 일련의 적대관계를 산출한다. 이 적대관계로 말미암아 사회와 개인의 현존은 상호파괴될 위험에 부딪친다. 개별자의 노동, 즉 개인의 존재가능성은 전체의 우연적이고 뒤얽힌 상태에 내맡겨진다. 대중은 건강에 나쁘고 안정치 않은, 개인의 재능을 제한하는 공장노동, 매뉴펙쳐노동, 광산노동 등에 내던져진다. 방대한 대중을 고용해온 산업부문이 유행이나 외국의 새로운 발명에 의한 가격폭락으로 돌연 파산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스스로를 구제할 수 없는 절대다수는 빈곤에 내던져진다. 거대한 부와 생계가 불가능한 극심한 빈곤의 대립이 발생한다.……이러한 필연성은 개개인의 생활을 완전한 우연성에 맡겨 버린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개개인의 생활을 유지시키는 실체이기도 하다." 30)

헤겔은 시민사회가 안고 있는 이러한 내재적 위험을 공적이고 보편성을 지닌 국가에 의해 구제해야 한다고 본다. 이때의 국가는 보편성의 원리를 바탕으로 시민사회의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보편성, 개별자 간의 충돌, 계층간의 대립을 지양시키는 장치이다. 헤겔은 이러한 국가가 근대 시민계급을 옹호하고 이론적으로 대변하는 근대계몽사상이나 사회계약론의 주장처럼 개별자의 소유와 개인적 자유를 보호해주기 위한 보조정치가 아니라, 개별자의 본질이자 실체에 해당되는 보편성을 제도적으로 실현시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인륜적 이념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국가는 시민사회의 특수성을 지양하고 욕구와 노동체계를 공공성, 보편성의 원리에 의해 재조정함으로써, 노동의 공적 성격과 분배의 사적 성격의 대립을 해소하여 실체적인 자유를 구현하는 것이다.

헤겔이 내세우는 참된 근대국가의 원리는 고대국가에서와 같이 특수성이 보편성에 억압, 희생되는 형식도 아니며, 보편성을 파괴하는 고립되고 소외된 원자적 특수성에 빠져있는 형식도 아니다. 그것은 특수와 보편, 개체와 공동체가 매개되고 통일되는 형식, 개체의 주체성에 기초한 실체적 통일을 추구한다. 31)

헤겔은 자유주의자의 이상향인 시민사회, 부르조아 사회를 비판하고 그 특수성의 원리를 인륜적 공동체에로 지양시키려는 시도가 국가지상주의, 전체주의 국가철학으로 평가될 수는 없지만, 입헌군주제란 외양을 띠고 있는 그의 국가관이 과연 헤겔자신의 이상인 보편과 개체의 자각되고 조화로운 통일을 현실적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예컨대 맑스는 헤겔의 국가는 사실상 시민사회의 부가물로, 시민사회의 모순을 은폐하고 있는 외적 강제, 외적 필연성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32)

3. 맑스의 노동개념

1) 몇가지 전제

맑스는 노동에 대해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인간이 노동하는 인간이며, 노동·생산을 통해 자신의 사회와 자기자신을 생산해내는 존재라고 보았다. 맑스는 노동을 다른 연관으로부터 따로 떼어내어(추상적으로) 문제삼지 않고 항상 노동을 사회적 형태와 관계속에서(구체적으로) 문제삼고 있다.

논의를 간략하게 하기 위해 그의 토대·상부구조론을 통해 노동·생산의 의미를 살펴보자. 토대인 생산관계는 바로 사회의 물질적 생활을 생산하는 관계이다. 이것은 생산력과 함께 물질적 생산의 한 계기이다. 맑스가 생산이 아니라 생산관계를 사회의 토대로 본 것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관계를 주로 나타내는 생산만을 분석해서는 계급사회에서의 지배·피지배관계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를 주요한 축으로 봄으로써 계급사회에 대한 이해와 혁명적 변혁을 견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생산관계는 생산이란 보편적 계기를 특정한 사회관계로 구조화시켜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해내기 위한 틀이다.

생산은 항상 특정한 시기 특정한 사회의 구체적 생산형태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생산일반'이 특정한 생산형태들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생산형태들을 일반화한 것(특정한 형태들로부터 일정하게 추상한 것)이 '생산일반'이다. 이것을 (관념론적으로) 전도시켜 생산일반이 각각의 개별적 형태로 자신을 구체화한다거나 각 형태들을 산출한다는 논리는 위험한 것이다. Marx는 유물론을 지지한다. 그의 유물론은 사회·역사의 현실적 운동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사회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기계적 유물론을 비판한다. 이 유물론은 의식에 대해 물질의 우선성, 우월성을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의식을 단순히 물질적 구조의 파생물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하고 의식을 인간의 자연적 신체구조에만 관련시켜 두뇌의 신경생리학적 과정의 결과로 볼 뿐이다. 33) 또, 포이어바하의 유물론은 관념론에 반대하여 인간을 자연적 인간, 살과 피를 지닌 인간으로 파악하면서도 인간의 사회적 측면을 중시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인간을 생물학적, 생리학적 대상으로 이해하거나 수동적 존재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 34) 맑스는 인간을 '사회적 관계의 총체(ensemble)'로 보면서, 인간이 사회적 실천·노동의 주체이며 이 사회적 실천에 의해 인간 자신이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의식도 단순히 생물학적 구조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실천에 의해 만들어지고 변화된다고 본다. 이러한 관계를 맑스주의적 입장에서 물질·의식·실천의 연관 속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입장이 된다.

"물질은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그 외부에 존재하기 때문에 물질은 자기원인이며 자기자신을 통해 존재한다. 이에 비해서 의식은 물질의 발전산물이며, 물질에 의존적이고 자기자신을 통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의식은 사회적 실천을 매개해서만 성립하고 발전할 수 있다. 그런데 실천은 바로 인간사회의 물질적 존재방식이며 또한 물질의 최고 운동형식의 물질적 존재 방식이다. 인간의 사회가 성립하면서 인간의 사회는 실천과 의식을 매개하여, 실천과 의식으로부터 독립되어 존재하는 자연을 이론적·실천적으로 동화시키고 그것을 변혁시키며 그것을 인간의 목적에 알맞게 변형시킬 능력을 얻는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의 구체적·역사적·대상적 활동을 통하여 물질을 사회의 형태로 변혁할 뿐만 아니라 물질을 인간의 물질적·사회적 관계 형태로 변혁한다. 나아가 인간은 자신의 힘, 능력, 지식등을 발휘하여 자신의 의식까지 변혁함으로써 자기자신도 변혁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물질·의식·실천의 변증법적 상호관계는 객관적으로 발전된다." 35)

이러한 상호변증법을 제대로 파악한다면 유물론과 실천을 유리시키지 않고 그 내적 관계를 (유물론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노동의 소외 문제를 다루게 되는데, 이것은 소위 '소외론자'들이 노동의 소외를 '소외일반'의 한 부분이나 한 형태로 파악함으로써 맑스의 본질적인 문제를 애매하게 만드려는 시도와는 무관한 것이다. 여기에서 노동의 소외를 문제삼는 것은 자본주의적 노동형식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며, 노동의 자본주의적 형태가 어떻게 구조적인 소외를 낳는가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또 이것은 맑스를 전·후기로 구분하여 전기의 인간주의적 맑스나 후기의 과학적 맑스만을 강조하는 일면적이고 편의적인 해석을 거부하고 맑스를 통일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맑스는 후기에 『자본론』 등에서 '소외'개념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후기 사상을 소외와 관련시켜 파악한다고 해서 그 틀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본론』 등을 과학적 사회분석이란 이름으로 경제학교과서로만 읽고 이해하는 편협함을 벗어나게 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2) 노동-인간의 자기생산, 자기실현

그러면 먼저 노동개념을 사회적 관련을 추상하고 인간과 자연간의 현실적 매개란 관점에서 정리해 보기로 하자.

Marx는 노동을 통해 인간과 자연 간의 현실적인 상호작용을 파악하고자 한다. 노동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활동으로, 노동에 의해 인간의 (물질적) 생활이 가능해진다. Marx는 이것을 노동이 (물질적) 생활을 생산한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산방식에 따라 동물과 다른 인간의 고유한 존재방식이 결정된다고 본다. 따라서 인간의 (물질적) 생활의 생산방식이 인간에 대한 이해의 기초가 된다. 36)

그러면 인간과 자연간의 변증법적 관계를 파악해보자. 인간은 자연 속에서 자연의 일부로 나타난다. 인간은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자연에서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자연은 그에게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을 제대로, 충분하게 주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에 매달리지 않고 자연을 인간의 생활에 알맞도록 바꾸어 놓아야 한다. 인간은 자연에 의해 조건지워지는 존재이면서도 그저 자연의 영향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노동)으로 자연의 일부를 변화시키고 자신의 생활에 필요한 것들(Lebensmittel)을 만들어 낸다. 인간의 역사는 이러한 생산의 역사이고 곧 노동의 역사인 것이다(또 인간은 이러한 생산을 해 나가면서 비로소 인간이 된다. 인간은 처음부터 인간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만들어 왔으며 인간됨 Menschwerdung, 인간화 과정에서 자기가 된다). 인간은 자연과의 관계에서 객체이면서 주체이다. 주체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힘 (Wesenskrafte)을 발휘하여 자연대상을 변화·가공·부정하는 생명활동 (Lebenstatigkeit)인 노동을 한다. 인간은 돌을 깨고 갈아서 석기를 만들고, 쇠붙이를 녹여서 호미나 낫을 만들고, 솜을 자아서 실로 만들고 이것을 짜서 옷감을 만들고, 자신의 거주지를 만들고, 자신이 먹을 것을 만들어 나가면서 자연적 대상에 현실적으로 부딪쳐 그 대상을 자신의 것으로 바꿔놓는다. 인간은 자신들의 생활용품(Lebensmittel)을 생산하여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자신을 긍정하게 되고 나아가 자신들의 생활과 그 지반이 되는 세계까지 생산함으로써 자신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맑스는 이러한 노동산물에 인간의 노동능력 (인간의 고유한 힘)이 객관화된 사물로 표현된다고 본다. 즉 인간이 노동산물에서 자신이 사물의 형태로 나타나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노동과 그 산물에서 자신을 외화(外化), 객관화, 대상화한다고 이해된다. 그러므로 노동은 인간을 객관적인 대상으로 만들어 나가는 대상화행위로, 그 행위에서 인간은 자신을 표현하고 긍정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인간은 자연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사회·역사적 존재이다. 인간이 자신의 세계인 사회를 만듦으로써 인간은 사회 속에서 자신을 만들게 된다. 사회 역시 노동산물의 체계-고도의 물질적 형식-로서 인간이 대상화된 모습이다. 37)

다시 한번 정리해보면, 현실적인 인간은 대상에 의해 조건지워질 뿐만 아니라 대상을 변형, 형성하는 존재이다. 생동하는 고유한 힘을 지닌 인간은 현실의 대상들과 관계하여 자기를 자기 밖에 있는 객관적 실재로 만든다. 맑스는 노동을 인간의 자기대상화 행위로 보고, 노동에서 인간이 자신을 현실적으로 확증하고 실현시킨다고 본다. 이러한 측면은 소외된 노동에 대한 비판의 준거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구조주의적 맑스주의자들(알뛰세, 발리바)은 이러한 '소외되지 않은 노동'은 초기 맑스의 인간주의적 잔재라고 보기도 한다. 이러한 평가는 소외된 노동을 사회구조와 연결시키지 않고 자기실현의 왜곡에 연결시킴으로써 유토피아적 이상을 제시하는 이들의 견해를 공박하는 것이긴 하지만, 맑스 자신이 자본주의를 분석하면서 구체적으로 임노동(Lohnarbeit)을 하는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문제삼을때 노동해방, 즉 소외된 노동의 해방을 목표로 삼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초기의 맑스는 인간을 유적(類的) 存在(Gottungswesen)로 보는데, 이것은 그가 인간의 자유로운 의식적 활동과 생산을 인간의 특성으로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즉 그는 자연을 의식적이고 합목적적으로 변형시키는 생산활동에서 인간의 유적 특성을 찾는다. 38) 그리고 이 생산활동은 개별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협동적으로, 공동체적으로 행해진다. (인간의 언어와 의사소통도 인간의 이러한 공동노동과 관련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생산활동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고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활동이다.

그러면 노동의 특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맑스는 『자본론』 1권에서 노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노동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과정이며,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활동을 통하여 자연과의 물질대사(Stoffwechsel)를 매개하고 규제하고 조절한다. 그는 자연소재 자체에 대하여 자연적인 위력으로 맞선다. 인간의 육체에 속하는 자연력, 팔과 뼈 및 머리와 손을 운동시켜 자연소재를 자신의 고유한 삶에 필요한 형식으로 동화시킨다(aneignen : 자기것으로 함). 인간은 이러한 운동을 통하여 자기 밖에 있는 자연에 대하여 작용을 가하며 이처럼 자연을 변화시킬 때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자연(Natur)도 변화시키게 된다." 39)

이처럼 맑스는 노동을 인간의 생명활동으로서 자연에서 육체를 지닌 인간이 하는 물질대사 활동이라고 본다. 이러한 노동을 통해 인간은 자기자신을 산출하며, 인간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있는 자연(무기적 자연 . un-organische Natur)을 인간의 욕구와 자기실현에 알맞는 '인간적으로 변형, 가공된 자연', 즉 '인간화된 자연(vermenschlichte Natur)'으로 만든다. 40) 이렇게 볼 때 노동은 자연적 소재의 직접태를 부정하여 그것을 인간생활에 알맞게 만드는, 즉 인간적 형식을 부여하는 합목적적 활동이다. 이것을 주체와 객체의 관계로 보면, 노동은 새로운 대상형식을 정립하기 위하여 직접적인 것(des un-mittelbares)으로 주어진 대상의 형식을 부정함으로써 주체의 주관적 계기(욕구·목적)를 대상으로 객관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공된 대상(노동산물)은 주체의 형식이 부여된(ge-Form-t : 형성된) 대상이 되고, 주체의 활동성은 물질화되어 구체적 현실태로 된다. 맑스는 『자본론』의 초고인 「정치경제학 비판에 강요」에서 노동과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전체 과정은 '생산적 소비(produktive Konsumption)'로 즉 '무'로 끝나는 것도, 대상적인 것의 단순한 주관화도 아니고, 그것 자체가 다시 하나의 '대상'으로 정립되는 그러한 소비로 나타난다. 이러한 소모·부정(Verzehren)은 소재적인 것(das Stoffliche)의 단순한 소모·부정(Verzehren)이 아니라, 소모(부정)자체의 소모(부정)이다. 즉 소재적인 것의 지양에서 이 지양(止場)이 지양되어서 그것의 '정립(Setzen)'을 낳는다. 형식을 부여하는 활동(Formgebende Tatigkeit)은 대상과 자기자신을 부정(Verzehren)하지만 이 활동은 그것을 새로운 대상적 형식으로 정립하기 위해서 단지 대상의 주어진 형식 만을 부정하고, 활동 자체의 주관적 형식 만을 부정한다. 이 활동은 대상의 대상적인 것(das Gegen- Standliche) -형식에 대 해 무관한 자립성 (Gleich- gultigkeit) -을 부정하고, 활동의 주관적인 것을 부정해서, 대상을 형성하고 활동을 물질화한다. 생산과정의 결과물은 '산물'로서 '사용가치(Gebrauchswert)를 갖는다." 41)

그리고 『자본론』에서 노동도구를 설명하는 곳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의 활동은 노동과정에서 노동도구에 의해 노동대상을 합목적적으로 변천시키는 것으로 작용한다. 그 과정은 (노동)산물로 귀착된다. 그 산물은 형식을 변형시킴 (Formveranderung)으로써 인간적 욕구들에 알맞도록 바뀐 자연소재로, 사용가치를 갖는다. 노동은 노동대상과 결합된다. 노동은 대상화되고, 대상은 노동이 가해진 것이다(verarbeitet sein)" 42)

맑스는 노동의 이러한 특성을 밝히면서 노동의 세 계기(노동, 노동도구, 노동대상)가운데 하나인 노동도구(Arbeitsmittel)를 설명한다. 노동도구는 노동주체가 노동을 손쉽게 하기 위해서 자신과 노동대상 사이에 끼워넣은 사물이다. 이 도구는 노동과 대상간의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중심으로서 노동행위를 이끌어 나가는 것(Leiter)이다. 도구 자체는 노동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자연소재와 인간노동의 결합체이면서 동시에 노동과 자연소재를 합일시키는 매체이다. 43) 맑스는 노동도구가 생산력의 역사적 발전단계를 나타내는 지표라고 본다. 인간들의 다양한 도구들은 곧 인간들의 (향상된) 노동능력을 담지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에 의해 자연소재의 직접성이 부정되어 인간에게 사용가치를 지닌 노동산물이 산출되는데, 이 생산물들은 인간의 다양한 욕구들에 봉사한다. 인간은 이러한 방식으로 자연을 인간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하고 '제 2의 자연'을 만든다. 그리고 맑스는 이러한 생산방식이 곧 인간의 존재방식을 특징지우면 이러한 세계형성이 곧 인간자신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본다. "인간은 자연을 형성하면서 자기자신을 변형시킨다."

그런데 노동을 통한 이러한 형성행위가 독일관념론(특히 칸트나 피히테)에서처럼 선험적 주관이 자연을 선험적으로 산출, 구성하는 것과는 엄연히 구분된다. 맑스에게서는 현실적 인간이 자연을 절대적으로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자연을 현실적·대상적 행위를 통해 일정하게 변화시키는 것일 뿐이다. 대상세계 자체를 구성해내는 것이 아니라(즉 칸트에게서처럼 시·공간의 형식을 부여하고 오성 범주에 따라 인식하는 것도, 피히테에서처럼 비아인 자연을 정립하는 것도 아니다) 주어진 대상세계를 가공하는 것이다. 즉 존재자체의 형식을 부여하고 인식이나 자아의 부정적 위력으로 그 존재에서 자신의 형식을 다시 찾아내고 재확인함으로써 절대적 주·객통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형식을 변화시킴으로써 상대적으로(그렇지만 현실적 과정 속에서) 주·객통일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은 자신의 선험적 형식에 의해 구성되어 있는 세계를 자기로 인식함으로써 자기의식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밖에 현존하는 세계를 자신의 틀로 바꿈으로써 자기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관념적인 제약없는 자기 구성이나 창조가 아니라, 현실적이고 제약된 자기 생산이다. 그렇지만 이미 만들어져 있는 집 한채, 밥 한그릇을 인식하는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를 실제로 만들어내고 그곳에서 생활하고 그것을 먹으면서 대상과 자기자신을 파악하는 것이다.

자연을 변형하여 인간화, 사회화, 역사화하는 인간의 대상적 행위는 비록 외적인 합목적성과 압력 밑에서 필연성의 강제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지만(주·노 변증법에서 노예의 노동이 노예를 해방시켜 주듯이) 인간에게 자유를 가져오는 행위이기도 하다. 노동하여 자신의 세계와 자신을 산출하게 되면 인간은 자연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위치를 갖게 된다. 노동은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인간은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 등을 자연에서 구걸하지 않아도 된다). 자연 속에서 '변화된 자연'을 만듦으로써 그 변화된 정도 만큼 자유의 가능성이 확보된다. 들판을 날아다니는 자유로와 보이는 새들은 자연을 변화시키지 못하므로 자연의 신물에 매여있는, 자연의 보이지 않는 우리에 갇혀있는 포로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노동은 필연에 기초한 자유의 행위이며, 인간의 자유를 객관화하고 현실화하는 활동이다 (물론 이때의 자유는 완전한 자유는 아니며, 인간의 노동이 지닌 위력 만큼의 자유이다.)

그러면 헤겔과 맑스의 노동관을 비교해 보기로 하자. 헤겔은 노동에서 주체를 대상화하는 측면(주·객통일)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 측면이 노동과 내적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즉 그에게는 노동행위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물인 자기의 대상화에 의미를 두고 있다. 이를테면 자연의 나무를 베고 깎고 다듬어서 책상을 만들 때, 그 책상에 나타난 자기의 모습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여 주는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노동을 대체시킬 수 있는 것이며, 또 노동을 통해 만든 책상은 자기를 완전하게 나타내지 못하고 다만 불완전한 일치에 그칠 뿐이다. 즉, 책상은 나에게 일정하게 봉사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나를 부자유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헤겔은 이런 한계가 노동자체에 들어있는 것으로 본다. 즉 노동은 자기를 대상화·외화하는 긍정적 측면과 함께 자기 자신이 대상화된 객체에 제한당하는 측면을 지니게 된다. 즉 노동의 자기대상화·외화는 동시에 자기구속·자기소외이기도 하다. 헤겔은 이러한 노동의 부정적 측면이 노동 자체에 근거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노동 자체를 넘어서서 다른 형식의 주·객매개를 찾아 나선다. 대상이 지닌 대상적 특성 자체를 보다 순수하고 비대상적인 형식에서 지양시킬 때 보다 높고 완전한 주객일치가 이루어진다고 본다 (물론 이러한 높은 수준의 일치가 낮은 수준의 일치를 지양시켜 그 단계에 보존하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맑스는 헤겔처럼 노동을 자기대상화와 관련시켜 파악하면서 노동을 대상화의 단순한 수단으로, 그 결과를 얻고 난 뒤에 버릴 수 있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노동은 가장 현실적인 주객일치이다. 맑스가 볼 때 인간이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노동하면서 비로소 인간이 된다. 이렇게 자기를 만드는 노동은 가장 기본적이면서 가장 중요한 인간행위이다. 이러한 노동의 한계는 곧 인간의 한계이다. 따라서 인간이 노동을 벗어남으로써 이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다. 그리고 맑스는 이러한 노동의 한계가 곧 노동이 행해지는 사회적 구조의 한계라고 이해한다. 이것은 헤겔이 노동소외의 원인을 노동자체에서 찾는 것과 달리 노동을 소외시키는 사회적 조건에 중점을 둔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런차이로 인해 헤겔에게서는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동을 극복해야 하지만, 맑스는 노동의 사회적 조건을 극복하고자 한다. 루카치는 이것을 『청년 헤겔』 마지막 장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노동의 대상화와 노동의 소외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헤겔은 이것을 동일시함으로써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노동을 넘어섰지만, 맑스는 노동의 대상화가 소외로 바뀌는 것을 특정한 사회형식, 예컨대 자본주의적 사회구조에서 찾는다. 따라서 헤겔에게서처럼 노동자체를 극복하고 그로부터 해방될 것이 아니라, 소외된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면 될 것이다. 44) 그러므로 맑스의 소외론은 곧 소외를 야기하고, 대상화를 소외로 만드는 사회조건에 대한 비판, 변혁의 문제로 된다. 따라서 헤겔의 노동소외는 보다 높은 주객일치에서 극복되지만, 맑스는 이것을 보다 발전된 사회구조에서 극복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맑스의 노동개념을 정리하면서 노동을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고유한 행위로 보았는데, 물론 구체적인 사회·역사적 관련을 고려하지 않은 순수한 형태의 노동은 하나의 추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추상은 노동의 구체적 형태와 발전을 무시하고, 단순히 노동의 이상적 형태 또는 노동의 긍정적 의미만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각각의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형태로 존재하는 노동의 구체적 형태와 특성을 추상함으로써 그 근본적 특징을 보기 위한 추상이다. 맑스가 『정치경제학 비판 강요』의 서문에서 밝힌 방법론을 원용한다면 45) 앞서 언급한 '추상적' 노동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다양한 노동형태들이라는 혼란된 구체로부터 '노동'이라는 단순한 추상으로 하강했다가 다시 특정한 사회적 형식으로 행해지는 구체전인 노동형태에로 상승하기 위한 과정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노동'의 의미는 이것이 구체적 노동형태들을 보다 잘 설명하고 그것을 평가하는 척도가 될 때 유용한 추상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맑스의 노동개념을 구체화하기 위해 자본주의적 사회성(체)에서의 구체적 노동형식을 살펴보기로 하자.

3) 자본주의적 노동형식-소외된 노동과 물신성.

단순상품생산경제에서는 생산자가 생산물의 소유자이며, 재산과 노동이 공동체속에서 근원적이고 자연발생적인 (naturwuchsig) 통일을 이루게 된다. 이와 달리 서로 고립된 개별주체로 생산하고 사적으로 소유하는 경제에서는 이런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그 통일은 생산하는 소유자에게 낯선 힘으로 대립되게 된다. 이런 경향이 진전, 강화되면서 소유와 노동의 근원적 통일은 해체되고 사회는 상품생산에 필요한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과 노동력을 소유한 무산계급(besitzlose Klasse)으로 분화된다. 자본관계는 이러한 계급분리를 전제하며, 노동력은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되고 그 값에 따라 교환되면서 자본에 포섭되게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노동하는 생산자는 임금노동자(lohnarbeiter)로 되어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에게 판매한다. 이에 대립되는 자본가는 생산수단(자본)을 소유하고 노동력을 구입하여 가치, 궁극적으로는 잉여가치를 생산하고자 한다. 이처럼 자본주의 하에서는 자본과 임노동의 양극관계가 형성되며 이 관계(자본과 노동의 대립된 결합관계)가 자본주의 사회의 기초를 이룬다.

임노동자는 자신의 유일한 재산인 자신의 '노동력(Arbeitskraft)'을 상품으로 자본가에게 판다. 자본가는 노동시장에서 노동력을 생산의 한 요소로 사들여 자신의 소유물인 생산수단과 결합시켜 상품을 생산한다. 이러한 사회관계에서 자본은 생산수단과 노동력상품의 소유자로서 노동과 그 산물들에 대한 지배권(Regierungsgewalt)을 갖는다.

이러한 관계에서 자본가에 의한 노동력의 소비과정(노동과정, 생산과정)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 노동자는 자본가의 지배와 통제·감독 밑에서 노동한다. ㉯ 생산물은 직접 생산자인 노동자의 것이 아니라 자본가의 소유물로 된다. "노동과정은 자본가가 구매한 물건들(노동력까지 포함)사이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 과정의 생산물은 그의 포도주 곳간에서의 발효과정의 산물이 그에게 속하듯이 자본가에게 속한다." 46)

노동과정이 이처럼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으로 행해짐으로써 합목적적 생산활동인 노동은 가치증식(Verwertung)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노동 생산물이 그 생산자인 노동자로부터 분리되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노동산물로부터 분리, 소외된 노동력은 하나의 물건(노동력상품)으로 생산과정에 투입되어 '살아있는 노동수단'으로 소비되고 잉여가치를 낳는다.

맑스는 생산과정에서 산출되어 자본가가 전유하는 잉여가치는 자본이 아니라, 노동력에 의해 산출된 것임을 밝힌다(잉여가치 이론). 그는 이것을 밝히기 위해 자본의 구성, 특히 유기적 구성에서 불변자본(원료, 생산설비 등의 구입비)과 가변자본(노동력 구입비)으로 나누어, 불변자본은 자신의 가치를 상품에 단순히 이전시킬 뿐이고, 가변자본만이 가치를 증식시킬 수 있다고 분석한다. 47) 즉 노동력이 잉여가치를 만든다고 본다. 또 그는 이것을 노동시간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노동자는 생산과정에서 자신의 노동력으로 가치를 생산한다. 그런데 그가 그의 생명 즉, 그의 노동력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가치를 생산하는 데에는 하루 노동시간의 일부(필요 노동시간)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그는 하루 노동시간의 남은 부분(잉여노동시간)을 자본가를 위해서, 즉 자본가의 몫이 될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위해서 무보수로 일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하루노동시간의 지불되지 않은 부분, 노동자가 산출한 가치부분을 자본가가 잉여가치로 전유하게 된다. 48)

이러한 관계에서 자본은 노동을 지배하고, 노동의 산물을 수취한다. 그런데 이러한 수취과정은 자본주의 이전의 수취방식이 경제외적 강제라는 형태로 이루어진데 반하여(생산수단을 소유한 생산자가 산물을 생산하고 난 뒤에 이 과정 외부에서 이것을 조세나 공납의 형태로 수취함), 생산과정 외부의 특별한 강제나 수탈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생산과정 안에서 자연스럽게 잉여가치가 자본가에게 이전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자본가는 강제적으로 수탈할 필요 없이 자발적으로 헌납받는 셈이다. 이런 관계에서 노동자는 자신이 만든 잉여가치를 자본가에게 넘겨주고 그렇게 축적된 자본의 힘은 노동을 지배하게 된다. 즉 노동은 스스로 자기를 지배하는 낯선 힘을 만들어내는 셈이다. 그리하여 "노동자의 노동이 갖는 창조적 힘이 자본의 힘, '소원한' 힘으로 되어 자신에게 대립하게 됨으로써……노동자는 오히려 빈곤하게 될 수 밖에 없다" 49) 는 역설적 현상이 생기게 된다.

맑스는 이러한 자본주의 구조에서 노동이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고 부정적이고 '소외'된 것이 되고 만다고 지적한다. 그의 이리한 노동소외에 대한 비판은 자본주의의 사회경제적 현실, 자본주의적 생산에 대한 전면적 비판이다. 그는 『경제학·철학 초고』에서 소외개념을 통해 자본주의적 현실에서의 인간의 총체적 상실을 비판했다. 그렇지만 그의 후기 저작들에서는 이러한 소외의 틀이 표면에 나타나지는 않는다. 이런 사실이 소외개념이 체계의 주변으로 밀려나거나 폐기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초기의 현실에 대한 철학적 비판이 후기에 과학적 분석, 즉 자본주의 사회의 객관적 운동법칙을 구체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으로 발전되면서 그가 초기의 철학적 개념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철학적 개념틀은 이러한 과학적 해명의 바탕을 이루고 그 분석에 침투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자본론』은 자본주의 사회를 '소외된 체계'로 보면서 그 운동 구조를 객관적으로 체계화한 것이다. 즉 자본의 지배하에서 소외된 노동을 보다 구체적으로 밝혀 나가면서 소외된 노동 현실로부터 해방된 생산체계를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때 '소외'는 인간주의 이데올로기의 잔재나 미숙하고 비과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적 모순을 겨냥하고 있다. 그의 노동소외에 대한 비판은 도덕적 설교나 유토피아적 비판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체계에 대한 선전포고이다. 그는 『초고』에서 자본주의의 총체적 소외를 공산주의에 의해서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자본주의 하에서의 노동소외의 양상을 살펴보기로 하자. '소외'란 노동산물이 그 생산자로부터 독립되어 독자적 힘을 갖고 대립되면서 거꾸로 생산자를 억누르고 지배하는 현상, 또는 활동의 산물과 개인들의 상호관계의 산물이 자립화되어 그 산물이 개인들 위에 군림하는 힘을 갖고 그 개인들을 예속시키는 것이다. 50) 맑스는 『초고』에서 소외의 양상이 ㉮ 노동자의 노동산물로부터의 소외, ㉯ 노동과정으로부터의 소외, ㉰ 유적 생활로부터의 소외, ㉱ (소외된 노동을 전유하는) 인간으로부터의 (소외된 노동을 하는) 인간의 소외로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51)

먼저 노동자가 노동산물로부터 소외되는 현상을 보도록 하자. 노동산물이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자본가에게 귀속됨으로써 노동자는 그의 산물과 분리된다. 노동자는 자신에게 속하지도 않을 생산물(상품)을 생산하고 그것을 자본가에게 넘겨준다. 노동자는 자본의 지배하에서 자본에게 필요한 상품을 자기 노동력으로 자본을 위해 생산하게 된다. 이 상품에는 자본의 꼬리표가 붙어 있으므로 상품을 생산하면 할수록 자본의 소유물이 증가하게 된다. 노동자가 자신치 산물에 자신을 대상화시키면 시킬수록 그 힘은 자본의 힘이 되어 자기를 지배하게 된다. 이처럼 그가 생산물에 부여한 힘은 노동자를 벗어나 자립적인 것이 되어 그에게 소원한 힘으로 작용한다.

"노동자는 그가 부를 더많이 생산하면 할수록, 또 그의 생산의 힘과 법위가 증대되면 될수록 그만큼 더 가난해진다. 노동자는 그가 더많은 산물을 만들면 만들수록 그만큼 더 저렴한 상품이 되어 버린다. 사물화된 상품세계(Sachen welt)의 가치 증식이 곧바로 인간세계의 가치절하를 가져온다." 52)

또 맑스는 『강요』에서 이 현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노동산물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산 노동에 자립적으로 대립하는 존재방식을 갖는 '낯선 소유'인 그 산물이 스스로 존립하는 '가치'와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산 노동 자체로부터 영혼을 부여받아, 이제는 '낯선 힘'으로 그 산 노동에 대립하게 된다. ) 노동의 관점에서 보면 산 노동은 노동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활동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산 노동은 자신을 객관적인 조건들로 실현시킨 것이면서 동시에 자기자신을 밀쳐내는 소원한 실재 (Realitat)로 나타내어, 자신을 이 소원한 실재와 대립된, 자기자신에게 속하지 않고 타자[자본-역주]에게 속하는 실재를 정립하여 비실체적(substanzlos)이고 그저 욕구충족에 그치는 (bedurftiges) 노동능력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 살아 있는 노동력은 그의 고유한 현실을 자신을 위한 것(Sein f?r sich)이 아니라, 순전히 타자를 위한 것(Sein f?r anders)으로-이때 순전히 타자를 위한 것은 자신에 대립된 타자의 존재를 말하는데-정립한다. 이러한 노동의 실현 과정(Verwirklichungs-prozess)은 곧 노동의 실현이 저지되는 과정(Entwirtlichunngsprozess)이다.……그것은 산 노동의 고유한 태내에 안겨진 가능성인데, 이러한 생산과정은 그의 외부에 존재하는 현실, 그에게 소원한 현실, 그에게 대립되는 부를 형성하는 것이다." 53)

이처럼 노동산물이 노동자로부터 분리, 대립됨으로써 노동자는 자신의 산물에 예속된다. 노동자는 자기 밖에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것 (Selbsta ndige Aussere-ihm-sein)을 정립하는데, 이것은 그의 고유한 산물, 고유한 객관화이면서 그로부터 독립되어 오히려 그를 지배한다. 54) 이리하여 대상화 (Vergegenstandlichung)는 대상에 예속됨, 대상에 자기를 상실함 (Ent-gegenstandlichung)이 된다. 55)

맑스는 이러한 생산물로부터의 소외가 생산과정에서의 소외와 연결된다고 본다. 즉 노동자의 생산과정 내에서의 생산활동이 소외된 활동이며, 그 결과가 소외된 산물로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56) 소외된 노동은 달갑지 않고, 단조롭고 지루하며(단편화된 과정을 계속 반복해야 하고, 기계의 작업속도에 자신을 맞추어야 하므로), 노동자를 무기력하게 하고 공허하게 만드는 (Entleerung) 것이며, 견디기 힘들고 노동자를 해치고 부정하는 행위이다.

"노동은 무엇보다도 노동자에게 외적인 것으로, 즉 노동자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노동자는 그의 노동 안에서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며, 행복하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불행하게 느끼며, 자유로운 육체적 정신적 힘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육체를 쇠약하게 하고 그의 정신을 황폐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노동자는 노동을 벗어나서야(ausser Arbeit : 노동하지 않을 때) 비리소 자기를 되찾고, 노동하면서는(in Arbeit) 자기를 상실한다(ausser sich).

 

 

>> 목차고리 : 신학 > 종교철학 > 철학자  > 헤겔, 맑스

>> 연결고리 : 철학자 

 



   


A-Z




  인기검색어
kcm  353421
설교  177403
교회  129714
아시아  103235
선교  98342
세계  88584
예수  85292
선교회  75372
사랑  71147
바울  70558


[배너등록]
 

 


홈페이지 | 메일 | 디렉토리페이지 | 인기검색어 | 추천사이트 | 인기사이트 | KCM 위젯모음 | 등록 및 조회

KCM 찾아오시는 길 M1000선교사홈 미션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