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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9-04
 제목  폴 틸리히의 종교철학이란 무엇인가
 주제어  [틸리히] [철학]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현대 사회의 특징을 설명하자면 여러 가지 말들이 가능하겠지만 아마도 그 중에 하나는 특성화, 전문화일 것이다. 다시 말해 비슷한 부분들을 모으고, 그 모아진 부분들을 다른 부분들과 나누어서 독자적인 한 분야를 만든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나누어진 부분들은 나름대로의 형식과 내용들을 가지고 나름대로의 ‘발전’을 이루어 나간다. 헌데 그 정도가 심화되다 보니, 물론 각 부분에서의 놀라운 발전이 있었고 그로 인해 인류가 많은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이제는 서로 서로의 부분들이 서로 간섭할 수 없는, 그리고 상대방을 이해하기도 힘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인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이런 현상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헬레니즘으로부터 시작된, 인간을 영과 육으로 나누는 경향은 그 대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인간을 육체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으로 나누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되었고 그러한 구분에 맞추어 인간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형편이다.

 인간을 분석적으로 이해하는, 미분화하여 이해하는 이러한 시도들은 분명 놀라운 성과를 보였다. 인간을 육체적 측면으로 깊이 연구하여 의학이 발달하였고, 인간의 정신적 측면을 깊이 연구하여 정신 의학과 심리학, 철학 등이 발달하였고, 인간의 사회적 측면을 깊이 연구하여 사회학, 인류학, 경제학 등이 발달하였다. 이러한 발달들은 분명 인간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데 공헌하였고 일면으로는 인간의 삶을 더 풍성하게 하는 데 공헌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들이 진정 인간을 바르게 이해한 것일까. 오늘날 사회학에서 보는 인간 이해와 철학에서 보는 인간 이해는 서로에게 얼마나 공유되어질만한 것인가. 심리학에서 보는 인간과 종교학에서 보는 인간은 얼마나 같은 종류의 인간인가. 그리고 이러한 나누어진 학문 분야들 간의 연구 결과를 총합한다면 인간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가능할까.

 전체는 부분들의 합보다 더 크다. 인간은 단순한 물리적 총합이 아니라 유기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학문적 연구 결과들의 단순한 총합이 인간을 온전히 설명하지는 못할 것이다. 너무도 추상적인 말이겠지만 인간은 인간 그 자체로서 봐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심리학적인 측면에서의 인간, 철학적 측면에서의 인간, 경제적 측면에서의 인간, 인류학적 측면에서의 인간 등등, 인간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작업을 시도하는 것도 유익하겠으나 그 ‘작업 나눔’의 한계 효용을 넘어서 버린 것이 오늘날의 학계의 현실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지나치게 철저한 나눔과 다른 분야를 고려지 않는 전문화 등이 인간을 깊이는 있으되 부분적으로, 아니 파편적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한 인간에 대해 어찌도 그렇게 다양한, 하지만 통합하기 어려운 설명들이 많이 있는지. 오늘날 학제간 연구가 활기를 띄고 늘어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단점들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삶을 전체로 보는 눈

 근대화의 시기는 그러한 미분이 주도적인 시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성을 중시하는 합리주의 풍토는 인간의 육신과 감성을, 그리고 인간의 이성과 감성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을 인간의 삶에서 배제시키기 시작했다. 아니 적어도 인간과 세계에 대한 학문적 이해에 있어서는 감성과 육신, 그리고 인간 너머의, 하지만 인간에게 그 실마리가 있는 그 무엇을 소외시켰다. 그러한 경향이 가장 두드러진 학문은 무엇보다도 철학이었을 것이다(이에 반기를 들고 이성에 의해 덮여진 인간의 다른 모습을 다시금 부각시킨 것이 슐라이어마허, 프로이트, 푸코 등의 공적일 것이다). 나누어 이해하는 것은 때로는 매우 효율적이고 정확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심도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나눈다’는 것 자체는 나누고 난 후 선택되지 못한 다른 부분에 대한 소외를 불러일으킬 위험을 늘 갖고 있으며, 그보다 더 큰 위험은 하나의 전체를 나눔으로 인해 전체만이 가질 수 있는 ‘신비’를 파괴하게 된다는 것이다. 단순한 부분의 총합은 유기체적 전체가 갖는 신비를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과 세계를 이성이라는 합리주의적 기준에 의해서만 바라봄으로써 이성을 넘어서는 것과의 끊임없는 교류 속에 있는 인간의 깊이를, 인간 존재의 근원을 놓쳐버릴 위험도 갖고 있다. 틸리히는 이 마지막 위험에 가장 크게 주목한다. 

 틸리히는 세계를 한정자(限定者)와 무한정자(無限定者)와의 관계적 차원으로 구성한다. 한정자는 말 그대로 한정된 존재이다. 그리고 무한정자는 한정자에 의해 한정지어질 수 없으며 모든 한정자들의 존재의 근거이다. 그러기에 틸리히는 무한정자에게 ‘존재한다’, ‘존재’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 무한정자는 어떻게 한정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가. 틸리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 즉 모든 한정자를 통하여 무한정자가 드러난다고 보고 있다. 즉 한정자로 하여금 존재하게 하는 것이 무한정자이고 한정자로 하여금 그 모습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근원이 무한정자라 보고 있다. 그런 면에서 무한정자는 한정자를 통해 드러난다. 다시 말해 무한정자는 눈에 보이는 자연 사물과 인간, 인간이 활동하는 모든 것의 총체인 문화를 통해, 즉 모든 한정자를 통해 드러난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틸리히가 이 보다 더 강조하는 것은 무한정자가 한정자 안에 드러나기는 하나 한정자 안에, 또 한정자에 의해 제한되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즉 한정자나, 한정자들이 행하는 문화나 그 어디에도 무한정자가 내재해 있지만 그 어느 한정자와 한정자의 문화도 무한정자를 충분히 담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한정자의 의미 내용이 한정자를 통해 표현되는 무한정자의 의미 형식 안에 다 담길 수 없다는 것이다. 틸리히는 이러한 역설-무한정자는 한정자를 통해서만 한정자에게 드러나되, 어느 한정자도 무한정자를 온전히 담을 수 없다-의 긴장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무한정자와 한정자의 관계를 제대로 유지하는 관건이라 보고 있다. 이러한 역설의 긴장 관계는 ‘무한정자-한정자’, ‘의미 내용-의미 형식’, ‘타율(신율)-자율’, ‘종교-문화’라는 대칭 쌍들로도 표현되어진다.

 틸리히에게 무한정자는 한정자를 가능하게 하지만, 역설적으로 모든 한정자를 몰가치 하게 만드는 절대 비판의 정신이기도 하다. 틸리히가 이성을 중시하는 합리주의의 긴 터널 끝에서 심각하게 고민하였던 것은 그러한 무한정자를 다시금 온전히 인간의 삶에서 드러나게 하는 것이었다. 즉 합리주의에 의해서 인간의 뒷켠으로 밀려났던 무한정자의 의미 내용을 다시금 부각시키려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부각시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 내용을 기존의 의미 형식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틸리히는 글의 서두에서 당시의 문제를 무한정자의 내용과 인간에 의해 표현되는 무한정자 형식의 불일치라고 보고 있다. 틸리히는 이성을 유일한 도구로 사용하여왔던 비판적 합리주의는 무한정자를 적절히 담지해 낼 형식이 될 수 없다고 본다. 또한 감성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무한정자의 내용에만 집중하려는 비현실적인 낭만주의도 무한정자를 담아낼 형식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판하고 있다. 틸리히가 무한정자의 내용과 형식의 불일치를 그렇게 중요한 문제로 생각하는 것은 그와 같은 불일치가 인간 의식의 통일성을 파괴하고 나아가 종교와 문화 모두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같은 사고가 무한정자에 대한, 그리고 무한정자와 한정자와의 존재론적 관계에 대한 긍정-신앙-을 전제로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틸리히는 근대화와 산업사회의 세속화에 의해 허물어져가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더 나아가 인간의 종교, 즉 의미세계를 지켜내고자 하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틸리히 이전에 서구 신학계에서 있었던 자기 보존의 노력들, 즉 모든 세속화와 합리주의 논의를 부정하는 근본주의, 철저히 합리화의 물결을 쫓아 이신론적인 문화종교로 변해 가는 자유주의 양자 모두가 진정한 해결이 되지 못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비판적 방법은 사물의 본질(Was)에 대하여 도달하지 못하고, 직관적인 방법은 사물의 객관적 사실(Daβ)에 도달하지 못”1)하기 때문에 틸리히는 새로운 해결을 모색하고 있다. 합리주의가 가지고 있는 비판적 방법이라는 ‘쓸모 있는’ 의미 형식과 어떠한 형식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무한정자의 의미 내용을 조화시키고자 비판적-직관적 방법(메타 논리적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방법을 가장 잘 충족시킬 수 있는 모형 틀로 ‘역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論外로, 틸리히의 해결 방안이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해결책으로서 제시된 바르트의 해결 방안과 어떠한 유사성과 차이점이 있는지는 또 다른 흥미 있는 비교 거리가 될 수 있을 듯 싶다).

 틸리히가 제시하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논점은 인간이 종교적인 지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인간 존재의 본성이라고 보는 것이다. 또한 종교의 본질이라고 보는 점이다. 그 지향의 대상은 무한정자이다. 틸리히는 그러한 지향의 대상을 무한정자로 이해하며 종교를 ‘무한정자에 대한 경험’이라고 부르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무한정자와 한정자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무한정자에 대한 경험인 종교는 하나의 기능에 한정되어질 수 없는 것이 된다. 

 틸리히는 위에서 간략히 본 것처럼 서구 그리스도교 신앙과 합리주의 철학이 겪고 있는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 서로 나누어져 별개의 것으로, 각자의 불가침의 영역을 주장하는, 하지만 그러하기에 인간에게 하나의 통일된 의미세계를 제공하지 못하고 인간의 삶을 분열과 혼란으로 이끄는 신앙과 이성의 문제를 종합하고자 한다. 무한정자의 의미 내용과 의미 형식을 역설을 통하여 일치시키고자 시도함으로써 무한정자와의 관계를 잃고 세계를 기능적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이성과 신앙이라는 각 부분들로 쪼개진 삶을 살아야 하는 혼란을 겪는 인간에게 하나의 의미 세계를 제공하고자 한다. 그리고 학자들이 평하듯이(틸리히는 신앙과 이성의 문제를 종합해낸 마지막 신학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틸리히는 철저한 존재론적 사유를 통해 의미 형식과 의미 내용의 불일치를 해소해낸다.

 틸리히의 가장 큰 공로는 인간의 존재의 근거인 무한정자(글의 후반부에서 틸리히는 ‘절대자’라는 표현을 사용한다)의 가치를 충분히 살려내면서 인간에게 하나의 통일된 의미세계를 제공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의식의 통일성을 제공하여 인간 삶의 기반을 튼튼하게 제공할 수 있었다는 점이며 부분 부분으로 파편화 되어가던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하나로 묶어내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이다. 실제 틸리히는 무한정자와 한정자 간의 역설의 관계를 토대로 문화의 문제, 종교의 문제 등을 설명해내고 있다. 즉 인간 삶의 한 부분으로서,한 기능으로서의 문화와 종교가 아닌 인간 삶의 전체로서, 무한정자가 한정자에게 드러나며, 한정자가 무한정자로부터의 직관적 앎(타율-계시)을 드러내는 표현(자율)으로서의 문화와 종교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삶을 부분으로 나누어 보기보다는 전체로 바라보게끔, 그것도 인간이라는 유한한 존재로서만이 아니라 무한한 초월자와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게끔 하였다는 점에서 충분한 가치가 있고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교 신학자들과 신앙인 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를 전체로 보는 눈

 그렇다면 틸리히의 이러한 논의가 다원적 현실의 오늘에도 그대로 통용되어질 수 있을까? 틸리히와 오늘의 시대가 갖고 있는 문제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렇다. 틸리히에게는 의미 내용과 형식의 부조화와 그들 간의 충돌이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의미 내용과 형식간의 부조화는 오히려 상당 부분 해소되어 가는 듯하나 의미 내용과 또 다른 의미 내용간의 충돌이 본격화되고 있다는 큰 차이가 있다. 물론 틸리히의 시대에 다른 종교의 의미 세계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지금과 마찬가지로 존재하고 있었다-그는 자신의 삶의 만년에야 다른 의미 세계를 가진 종교가 있음을 실존적으로 느끼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기에 도쿄 등지에서 다른 종교에 대한 연구와 대화를 시도하였으나 그에 대한 신학적 사유가 본격화되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개인적 아쉬움이겠지만 틸리히가 한 10-20년 더 살아 그에 대한 본격적인 대답을 할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고, 또한 어떠한 ‘종합’을 시도했을지도 궁금하다. 틸리히가 ‘종합’ 이외의 결론을 내릴 수도 있었을까?). 틸리히의 신학과 종교철학 사상들은 상당 부분 서구의, 혹은 그리스도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나와 같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만으로는 틸리히의 사상이 큰 가치가 있겠으나 타 종교인과 공존을 바라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틸리히의 사상이 얼마만큼 가치가 있을지 의문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틸리히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서구의 존재론적 사유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비록 틸리히의 사상이 상당히 무한정자의 내재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세상 모든 것을 그 무한정자와의 존재론적 관계(인격적 관계라는 직접적이고 제한적인 서술보다 존재론적이라는 일면 애매하면서도 포괄적인 용어로 서술한다는 것) 하에서 설명한다는 장점이 있으나 외재적인 초월에 대해 관심이 적었고 그 타당성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양 종교인들과 현대의 세속화된, 탈 근대주의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큰 설득력을 보이기 힘들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보편윤리를 위한 하나의 윤리적 요청은 될 수 있으나 신앙의 충돌을 궁극적으로 해결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분명 틸리히의 ‘궁극적 존재’와 그에 대한 ‘인간의 궁극적 관심’이라는 신학 용어는 일원적 다원주의의 형성에 큰 사상적 기반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인들의 입을 통해 말해지는 일원적 다원주의는 다른 종교인들에게 적어도 포괄주의라는 비판을 받기 쉬울 것이다. 


 틸리히의 이와 같은 사상체계가 대화하기에 가장 곤란한 종교는 아마도 불교가 아닐까 싶다. “‘존재’란 없다!”는 명제를 가장 바닥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 측에서는 그러기에 상대방의 있는 실상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그 가치를 충분히 수용하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다원주의 논의에 있어 가장 너그럽고 자신 있어 보여야 할 것이 불교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 불교가 그러한지는 의문이다. 모든 불자들이 그러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리고 물론 불자들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시각이 부정적인 것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교의 배타성에 책임이 있다. 하지만, 불자들이 진정으로 다른 종교에 대해 그렇게 너그러운지는, 그리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그 실상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인 것처럼 보여진다. 특히 타종교와의 대화에 적극적인지, 다른 종교로부터 적극적으로 배우려고 하는지의 문제에 이르면 문제는 더해진다. 그저 ‘그런 것은 우리에게도 이미 다 있다.’라고만 말하며 대화에 미온적이지는 않은지, 그리고 존재론적인 사고 자체에 대한 Allergic response만 보이며 문을 닫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다시 한 번 강조하기는 그리스도교의 많은 부분이(특히 개신교는) 미온적이거나 닫혀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타종교에 대해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것은 사실이다. 진정 불교의 주장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영원한 존재의 근거를 갖지 않은 무상한 것인가? 진정 그리스도교의 주장처럼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만을 믿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 틸리히는 말한다.

“종교는 무한정자에 대한 경험이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적인 무성(無性; Nichtigkeit)의 경험에 기초한 절대적인 실재에 대한 경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존재자(Seienden)의 무성, 가치(Wert)의 무성, 인격적인 삶의 무성이 경험되어진다. 이러한 경험이 철저한 긍정(ein radikales Ja)과 이와 같은 실재성의 절대적인 경험과 부딪치는 곳에서, 경험은 절대적이고 철저한 부정으로 이끌어진다. 이런 뜻에서 절대자는 새로운 현실체도 아니고, 기존의 실재와 병행하는 현실체도 아니고, 기존의 실재를 초월하는 현실체도 아니다. 이러한 현실체들은 아무리 높은 실재라도 ‘아니다!’라는 절대자의 명령을 받기 마련이다. 오히려 절대자는 한정적인 실재를 통하여 모든 것을 동시에 부정하고 긍정함으로써 우리에게 돌진해 오는 현실체이다. 신비적인 언어로 표현하면, 그는 절대적인 그 어떤 존재이든지 아니면 절대적인 비존재이든지 간에 모든 존재를 초월하는 현실체이다. 그러나 여기서 ‘존재한다(ist)’라는 표현은 이미 현실체를 왜곡하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논의하는 대상은 존재의 현실체가 아니라 의미의 현실체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궁극적이며 가장 깊은 의미의 현실체이며, 모든 것의 근거를 파괴하고 새롭게 건설하는 현실체이기 때문이다.”2)

 위의 주장이 불교의 주장과 다른 면이 있는가? 불교도 絶對無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불교의 주장은 현상세계에 대한 통찰이 아니던가. 위의 주장이 그리스도교의 주장을 해치는 면이 있는가? 유대 땅에서 태어난 紀元代의 인물인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보다는 그 예수의 육신으로 이 땅에 임한 절대자의 사랑이 더 핵심이 아닌가.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이라 부르지 않는가. 그런데 그러한 찾아옴의, 낮아짐의, 희생의 사랑이신 하나님이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서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을 구원하지 않겠는가? 그런 하나님을 역사에 가두려 하는가? 불교도 그리스도교도 그 절대자로부터 ‘아니다!’라는 비판을 받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것이다. 절대자의 자리를, 무한정자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인간의 죄악, 무명에 휩싸인 욕심이 아닌가하는 것이다. 


 아직도 답은 모르겠다. 진정 무한정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일 것이다. 여기서 불가지론자였던 칸트처럼 하나의 요청이 성립되는지도 모르겠다(물론 이런 요청을 한다고 하여 무한정자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의 삶이 헛된 것이 되지 않기 위해, 의미의 근원으로서, 모든 인간의 무한정자를 향한 지향이 의미 있는 것이 되도록 한정자에게 ‘아니다!’라고 명령하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적인 존재 그 자체-궁극실재-로서의 무한정자가 필요하다고 느껴진다. 다양함이 가져올 수 있는 모든 가치의 상대화와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세계 전체를, 인류 전체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하나의 세계로 볼 수 있는 보편적인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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