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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9-03
 제목  불트만의 기독론
 주제어  [불트만] [기독론]
 자료출처  위르겐 몰트만(이신건 옮김)  성경본문  
 내용

Ⅰ. 서론

 

불트만(Rudolf Butmann, 1884-1976)은, ‘2천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현대인에게 어떤 관련을 맺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궁극적으로 순수하게 역사적 연구 결과에 근거를 둘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불트만은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구별을 강조하고, 케리그마(keryma)의 기독론을 주장하였다.1) 불트만에 의하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약성경의 선포 곧 케리그마신화적인 용어로 이해되고 서술되었다. 이 신화적인 용어가 1세기에는 적합한 타당성을 지녔었지만 현재에는 진정한 뜻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세계와 인간의 실존에 대한 이해가 1세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현대인은 신약성경의 신화적인 세계관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현대의 과학적이고 실존적인 세계관은 이제 신약성경의 세계관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폐기하게 된 것이다.2) 자유주의적 접근은 난해한 ‘신화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르낙(Harnack)의 방법을 따라서, 신화적인 ‘껍질’(husk)과 윤리적인 ‘핵심’(kernel)을 구별하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신약성경 안에 있는 신화적인 요소들을 인식하고, 이 신화들 안에 내재하는 보편적인 진리를 발견하고자 하였다. 불트만은 이러한 접근방법을 거부하였다. 그는 신학의 근본적인 임무가 이러한 신화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자유주의신화적인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써 기독교를 비역사적인 종교로 전환시켰으며, 케리그마 속의 그리스도의 선포를 문화적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종교와 윤리의 무시간인 원리로 환원하였다.3) 불트만의 신학적 관심사는 ‘복음이 현대인에게 어떻게 해석되고 전달되어야 하는가’하는 문제였다.

 

그는 신약성경의 비신학화(非神話化)와 실존론적 분석이라는 두 가지 접근방법을 통해 이 과제를 수행하고자 하였다. ‘비신화화’는 복음의 진리를 둘러싸고 있는 신화적 표현이나 사고를 벗겨내는 것이다. 실존론적 분석은 1세기의 언어로 기록된 복음을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실존의 현실에 일치하는 용어로 전환하는 것이다.4) 이와 같이 신약성경 학자였던 루돌프 불트만의 주된 관심사는 기독교 신앙을 현대의 지성인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위하여 신약성경에 대한 실존주의적 해석의 방법을 채택했다. 그것은 이 신약성경의 메시지가 개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개인의 신앙적 반응을 촉구하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다.5)

 


Ⅱ. 신학적 배경

 

불트만은 현대인이 지니는 자연과학적 합리적 사고에 대해 기독교 신앙의 메시지가 지니는 의미를 해명하려고 했다. 불토만의 신학적 사고에 영향을 준 두 가지 중요한 원천은 역사비평적 자유주의 신학과 하이덱거의 실존주의 철학이다.

 

1. 자유주의 신학

 

Reimarus(1694-1768) 때까지는, ‘역사적인 인간 예수, 신약성경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교회신조의 그리스도가 동일한 한 분’이라고 하는 믿음이 그리스도 교회공통의 전제였다. Reimaarus가 최초로 복음서에서 발견되는 예수상과 실제의 역사적인물이 매우 다르다는 주장을 했다. 그는 역사의 예수와 사도들의 설교에 나타난 예수의 차이를 구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6) 불트만은 『공관복음전승사』를 통해 궁켈(Herman Gunkel)의 양식 비평적 분석과 역사 비평적 방법을 도입하여 공관복음서 안의 자료를 비판적으로 연구했다. 그는 전승된 예수의 말씀 대부분이 환경의 영향을 받은 초대교회가 새롭게 구성한 것이며, 공관복음서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전기가 아니라 교회의 신앙을 위해서 만들어진 예배서라고 주장했다. 복음서는 교회의 케리그마이며, 선포된 그리스도는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신앙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트만은 공관복음서 기록의 역사적 신빙성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7) 양식사 연구는 공관복음서가 구두로 전승되어온 작은 단위들이 모아져서 형성된것이라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한다.8) 따라서 불트만은 우리들이 예수의 생애와 인격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실상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 문헌은 이에 대해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단편적으로 또는 전설적으로 산재해 있는 것 외에 예수에 대한 다른 문헌은 없기 때문이다. 최근 약 150여 년동안 예수의 생애와 인격에 대해 저술한 것을 보면, 대부분 환상적인 소설과 같은 것이어서, 우리들이 예수의 생애와 인격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9) 그래서 불트만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의 말씀으로 기록한 모든 내용이 실제로 예수에 의해 선포된 것이었다는 증거는 없다고 본다. 예수의 말씀 중 많은 부분이 공동체 자체 내에서 형성되고, 공동체에 의해 수정 보완되었다는 것이다.10) 다시 말하면, 예수의 선포와 예수에 대한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선포 사이에는 상당한 불일치와 불연속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11) 불트만은 ‘양식비평’(form criticism)이라는 학문적 방법을 복음서에 철저하게 적용하였다. 신약학자인 불트만은 역사의 예수에 대하여 부정적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복음서의 자료들은 헬라적인 사고방식으로 뒤덮인 예수상을 제시하고 있다. 신약성경은 역사의 예수에 대한 관심이 없으며, 신앙의 그리스도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12) 불트만은 바르트와 더불어 19세기의 신학이 하나님보다는 인간을 신학의 중심으로 삼았다고 보았다. 불트만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형태의 계시에 대한 반응을 통해서, 곧 ‘케리그마’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그는 바르트와 달리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상황이라는 측면 안에서만 해석하였다.13)


2. 실존주의 철학

 

불트만이 케리그마를 이해하는 해석학적 착상은 하이덱거의 현존재 분석이라는 실존철학의 방법에 근거한 것이었다. 하이덱거의 현존재 해석학은 불트만에게 성경이해의 해석학적 기반을 제공하고, 비본래성으로부터 본래성으로의 실존적 결단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하였다. 불트만은 하이덱거의 ‘선이해’ 개념을 그의 해석학적 신학에 적용하였다.14) 불트만이 보기에, 고대의 텍스트와 현대의 독자를 연결시켜 주는 질문은 인간실존에 관한 것이었다. 고대의 신화적인 우주관과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기자들은 어느 시대에나 동일한 실존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15)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결코 객관적으로 말할 수 없고,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것과 관련해서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대한 개인적 신앙의 반응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다.16) 그래서 불트만은 역사적예수를 신학적인 문제로 취급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 기독교 신앙의 근거를 두었다.17) 불트만은 실존주의를 신학에 가해지는 외부적인 영향력으로 보지 않고, 신약성경 메시지 자체의 핵심 정수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았다.18) 성경을 실존주의적 언어로 해석한다는 말은 곧 성경을 해석자가 살고 있는 시대의 언어로 해석한다는 뜻이 된다.19) 불트만은 실존적인 진술과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진술 사이에 엄격한 구분을 하고 있다. 각각의 영역은 서로 분리되는 것이다. 중첩되는 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십자가 사건이다. 십자가 사건은 순수한 역사의 사건인 동시에 세상 구원의 사건이기 때문에 하나의 역설이다.20) 따라서 불트만의 의도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객관적사실을 제공하려는 것이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역사적 예수의 현상과 실존적으로 만나게 하려는 것이다.21)

 


Ⅲ. 케리그마기독론

 

1.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

 

불트만에 의하면,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인 케리그마로부터 발생하였다. 역사적 예수의 선포가 그 역사적 전제인 것은 분명하지만, 기독교는 초대교회의 케리그마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것이지, 역사적 예수의 선포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22) 역사적 예수는 요한복음의 예수처럼 자신에 대한 신앙을 촉구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메시야로 선포하지 않는다.23) 초대교회는 예수의 선포를·받아들여서 계속 선포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교사, 예언자이면서 동시에 메시야였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메시야로서의 예수를 선포함으로써, 복음의 전달자였던 예수가 이제는 복음의 본질적인 내용이 된 것이다.24) 메시야로서의 예수에 관한 케리그마는 부활절 신앙을 근거로 나타난 것이다.25) 부활절 신앙과 함께 십자가에 관한 이해가 요구되고, 십자가의 의미는 구원사건으로 연결되어야 했다.26)

 

초대교회 공동체가 예수의 의의와 품위를 표시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인자, 다윗의 자손, 하나님의 아들 등 유대교의 메시야 신앙의 전통에서 취해진 칭호를 예수에게 부과하였다.27) 이와 같이 불트만은 초대교회의 메시지 곧 ‘케리그마’가 신앙의 중심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신약성경 자체가 초대교회의 선포를 기록한 문서로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사실이 아니라,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신앙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의 선포, 곧 복음의 메시지 속에서 부딪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반응인 것이다.28) 그러나 신앙이 과거의 사실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가 십자가라는 과거의 사건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불트만의 주장은 신앙이 역사적 연구에 의해서 확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건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위는 역사적 연구가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29) 그래서 불트만은 신앙의 대상이 역사적 예수의 인격이 아니라 오히려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라고 주장하였다. 불트만은 자신의 이 주장이 종종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 사이의 연속성을 파괴한다는 의미로 잘못 오해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설사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사이의 불일치를 강조한다고 해도, 이것은 결코 역사적 예수와 초기 기독교 선포 사이의 연속성을 깨뜨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30) 케리그마가 아무리 역사적 예수를 신화화했다 해도, 그것이 그를 전제로 하는것만은 분명하다. 그가 없다면 케리그마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트만은 이런 한도 내에서 연속성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케리그마는 예수의 생애의 ‘사실’과 그가 십자가에 못박힌 ‘사실’만을 필요로 할 뿐이다.31)

 

이와 같이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에 관한 견해에 있어서 자유주의 신학과 한치도 달라진 바가 없다. 예수의 생애와 십자가의 사실만을 인정하고,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과 같은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다면, 케리그마와 역사적 예수와의 제한된 연속성이란 주장도 무의미한 것이다. 불트만은 자연히 구원사건에 대한 모든 객관적 보증을 반대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오직 말씀으로서만 만나지며, 또한 오직 구원 행위로서의 말씀에 대한 응답 안에서만 인식될 수 있다. 그러므로 불트만에게는 예수에 대한 성경적 케리그마의 배후에서 역사적 예수를 캐내려고 하는 사람은 신학적으로는 부적절한 질문을 하는 셈이 된다.

 

세계의 구원이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분으로서의 예수를 가르치는 교회의 케리그마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32) 불트만에 의하면, 신약성경은 역사적 예수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사실 이상을 넘어서려고 할 필요가 없다. 바울은 성육신,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선포하고 있다. 그의 케리그마가 필요로 하는 것은 예수의 생애의 사실과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사실뿐이다. 그러나 그는 이 십자가도 예수의 생애에 대한 전기적 관심에서 보지 않고 구원사건으로 보았다.33) 불트만은 성경이 전체적으로 역사적 예수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의 생애를 구성하기에는 그 자료가 충분치 못하다고 본다. 사실상의 그리스도는 설교된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서가 선포하려고 하는 것은 단지 역사적 예수의 옷을 빌어입은 신앙의 그리스도라는 주장이다.34)

 

불트만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앙은 케리그마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 예수의 선포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케리그마 속에서만 발생한 것이며, 신학사상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케리그마와 더불어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이다.35)


2. 비신화화와 기독론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의 인격이 초대교회에서 곧 신화로 바뀌게 되었다고 보았다.36)케리그마에는 예수라고 하는 역사적인 인물 대신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화적인 형태가 나타나 있다. 케리그마에서는 예수·그리스도가 인간들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고,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기적으로 부활하신 분으로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37) 그래서 불트만은 1세기의 신화적인 세계관과 20세기의 과학적인 세계관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오는 모순이, 오직 신약성경의 ‘비신화화’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신약성경의 신화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고자 노력하는 자유주의자들과 달리, 불트만은 신약성경의 신화적인 구조를 해석하고자 한다.38) 자유주의 신학의 두드러진 특성은 역사비평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 역사비평의 방법이 독단적 신학으로부터 자유로운 학문을 가능케 하고, 신앙의 기초가 될 역사적인 참된 예수상을 보여줄 것으로 믿었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바로 이 역사비평의 방법은 자기 파멸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다.

 

역사적 연구는 결코 신앙의 기초가 될 어떤 결론에 이를 수 없다. 왜냐하면 역사적 연구의 모든 결론은 상대적인 타당성만을 가질 뿐이기 때문이다.39) 신약성경 문헌에 대한 역사비평적인 연구 결과, 학자들은 신약성경이 신화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은 이 신화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불트만은 신화를 제거하면 진정한 메시지인 ‘케리그마’도 상실되기 때문에 신화의 제거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자유주의 신학은 케리그마를 윤리적인 원리로 환원하여 기독교를 비역사적인 종교로 만들었다.40) 그래서 불트만은 신약성경의 신화를 제거하지 않고 실존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신학적인 프로그램이 신약성경의 비신화화로 규정되는 것이다.41) 불트만은 신화적인 개념들 배후에 있는 보다 깊은 의미를 회복하려고 시도하는 해석학적 방법, 즉 해석과 주석의 방법을 비신화화라고 불렀던 것이다.42)

 

이와 같이 불트만은 신약성경이 신화로 구성되어 있다는 전제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신약성경의 신화적 요소는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첫째, 하늘의 존재가 세상 속에 임하는 극적인 이야기이다. 초대교회는 예수의 근본적 의의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영지주의의 ‘구원자 신화’를 수용했다.

둘째, 과학 이전의 우주론이다. 신화적 세계관은 세계가 하늘, 땅, 지하의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의 선재성, 죽음, 부활 등도 신화적인 세계관에 의한 표현이다.

 

셋째, 하나님을 인간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고 활동하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신적인 것을 인간적인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43) 신화적인 표현은 현대인에게 무의미하다. 신화적 세계관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 과학 이전 시대의 우주론이다. 따라서 신약성경의 신화적인 표현은 현대인의 복음 이해에 중대한 장애가 된다. 불트만은 현대인이 신약성경의 케리그마를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신약성경을 현대인의 과학적 세계관으로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재해석의 방법이 ‘비신화화’이다.

 

따라서 비신화화는 성경의 진리에 대한 당시의 해석을 현대의 해석으로 고치는 것이다.44) 불트만에게 있어서 신화는 세상적인 것으로부터 이끌어낸 상징주의적인 표현으로서 다른 세상의 어떤 것을 나타내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이러한 개념들은 실체의 본질을 나타내는 문자적인 표현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문화적으로 채색된 실체의 본질에 대한 개념일 뿐이다.45) 그러므로 하나님이 문자적으로 사람이 되셨다는 사상은 믿을 수 없으며, 논리적으로도 모순이 된다. 신약의 기독론은 예수의 가르침보다는 제자들의 믿음을 표현한다. 그리고 교회의 전통적인 기독론은 신약으로부터가 아니라, 특히 4,5세기 교회의 신학연구로부터 생성되었다.46) 성경은 신화적 세계관의 기초 위에서 사고하고 있으며, 선포는 신화적인 언어로 말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비신화화를 통하여 신화적인 언어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불트만은 비신화화의 프로그램이 현대인들에 대한 복음 전파의 과업을 촉진시켜 준다고 주장했다.47)


3. 실존주의와 기독론

 

불트만은 신약성경의 신화를 실존철학의 용어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며, 그러한 해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초월적 실재를 이 세상적인 용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사고의 형식이 신화라고 정의하였다. 이 신화적인 이야기는 실존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임박한 세계의 마지막에 대한 종말론적인 신화이다.48) 종말론적인 신화는 인간 실존의 ‘지금 여기’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들이 자기 자신의 죽음의 현실에 직면해야 하며, 실존적인 결단을 내려야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심판’은 세상의 종말에 일어날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 자신의 심판이라는 현재의 사건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근거한 것이다.49) 십자가를 믿는 것은 속죄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의 철저한 결단이며 헌신이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참된 자아와 하나가 되는 결단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새로운 삶의 시작인 부활의 경험으로 이어지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고 인식하는 것은 그의 십자가를 속죄함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선언이 아니라,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언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불트만의 기독론은 구원론에 종속된다고 볼 수 있다.50)

 

불트만에게 있어서, 신화라는 ‘껍질’은 케리그마라는 ‘핵심’을 내포하고 있다. 이 신화적인 ‘껍질’을 현대의 실존적인 용어로 번역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선포의 핵심이 회복되고, 현대인들에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51) 불트만은 파루시아가 어떤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신자가 실존적 케리그마에 직면하여 이미 일어난 사건이이라고 본다. 제4복음서의 ‘실현된 종말론’은 복음서의 편집자가 이것을 인식하였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불트만은 제4복음서가 인간 실존의 의미로 종말론적 신화를 재해석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스도는 과거의 현상이 아니라 항상 현재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며, 일반적인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존적 결단을 요구하는 구체적인 선포인 것이다.52)

 

불트만은 바울과 제4복음서가 케리그마의 기초로서 공관복음서들보다 기독론적인 가치가 크다고 본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제4복음서는 역사적 예수라기보다는 초대교회 케리그마의 원천이다. 이 사실은 기독론적인 중요성을 감소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증대시키는 것이다.53) 불트만은 하나님의 행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그리스도 사건’ 과 동일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불트만은 Historie와 Geschichte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Historie는 사건들의 연속으로서의 과거를 다룬다. Geschichte는 실존적 관련성으로 접근하는 과거이다. 과거의 사건들이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문제라는 관점에서 고려되는 것이다. 케리그마는 Historie의 예수상으로부터 Geschichte의 예수상으로의 변화와 관련이 있으며, 이것은 현대의 인간 실존의 문제와 그리스도의 관련성과 일치하는 것이다.54) 불트만은 예수의 생애와 죽음이 객관적 역사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부활은 제자들의 삶 속의 경험, 곧 제자들의 주관적 경험의 요소라고 보았다. 그것은 제자들의 개인적인 경험적 역사(Geschichte)라는 본질적인 의미로는 ‘역사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공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역사(Historie)의 요소는 아니다.55) 십자가는 공적인 역사 속에 일어난 순수한 사건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불트만은 여기에 중요한 수정을 가하여 첨가한다.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탐구는 나사렛 예수가 종말론적이고 구원론적인 의미를 소유하고 있음을 드러내 줄 수 없다. 오직 신앙만이 십자가가 구원을 실현하는 사건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구원사건으로 이해된 십자가는 객관적인 역사 속의 사건으로서의 십자가에 기초를 두고는 있지만, 제한되지는 않는다.56) 불트만은 비신화화를 통하여, 부활에서 절정을 이루는 우주적이고 묵시적인 드라마로부터 신화의 껍질을 제거하고, 나사렛 예수의 역사가 지닌 실존적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십자가와 부활은 참으로 현세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은 신앙에 의해서 하나님의 행위로서 인식되어야 한다.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의 심판의 행위,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로서 케리그마 속에서 연관을 맺는다. 이와 같이 케리그마는, 역사적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듣는 사람의 결단의 필요성을 전하는 것에 관한 것이며, 종말론적 순간을 과거로부터 ‘지금여기’ 에서의 선포로 전환하는 것이다.57) 복음서 비평은 과학적인 문제이지만, 복음 안에 있는 케리그마는 실존적인 문제이다. 신약성경의 실존적인 케리그마의 문제들은 과학적이고 비판적인 연구와 충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서로 구별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해된 신학은 신약성경의 실존적 의미에 관한 것이다.58) 따라서 신앙은 실존적 결단이라고 정의된다. 신앙은 실존적이 아닌 것에 의해 증명되지 않는다. 역사나 비판적 연구가 신앙을 정당화해 주지 못하며, 우리에게 보다 큰 신앙의 확신을 주지 못한다. 케리그마와 같은 종류의 실존적인 어떤 것만이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불트만은 케리그마 속에 선포된 그리스도가 복음서의 역사적 예수와 관련된다고 믿는다. 그는 복음서 안에 예수에 대한 진정한 자료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는 예수에 관해 확인된 역사적 사실이 케리그마를 더욱 더 믿을 만하게 만든다고 믿지 않는다.59) 불트만은 케리그마가 구원사건으로서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설교라고 주장했지만, 그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속죄와 용서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모든 이론들을 배척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 즉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의 개개인들에게 주어질 때 지속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다.

 

우리가 케리그마에 대하여 반응할 때,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의 경험이 된다. ‘믿음’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를 의미한다.60)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것은 객관적인 사건의 관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며,나 자신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의미한다.61) 기독교의 부활 신앙은 역사적 사건에 관심을 갖지 않고, 구원의 사건, 곧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실존적 체험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매일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해야 한다.62)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지나간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말씀의 선포 속에서 반복되고 현재화되는 종말론적인 사건이다.63) 불트만에게 있어서는 케리그마의 역사적 근거에 대한 질문은 무의미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오직 케리그마로서만 만난다. 케리그마는 역사적 지식의 매개자가 아니라 현재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건이며, 이 사건 속에서만 그리스도는 현재화된다.
그래서 김영한은 불트만의 케리그마기독론이 그리스도의 역사적 인격이 없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의 기독론이라고 규정하고 있다.64)

 


Ⅳ. 결론

 

자유주의 신학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에 집중하여 윤리적 모범으로서의 그리스도만을 인정하는 오류에 빠졌다. 불트만은 구원론적 시각에서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에 주목하여 기독교 진리의 핵심에 접근하고 있다. 그는 케리그마를 실존적으로 해석하여 현재의 신앙적 결단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성례전적인 기독교 이해와 일치하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케리그마가 복음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중심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은, 불트만이 현대 기독론의 형성에 끼친 가장 중요한 공헌이라고 볼 수 있다.65)

불트만의 프로그램은 고대의 복음과 현대정신을 통합하는 방법을 제공해 주었으며, 기독교의 메시지가 현대인들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하여 말해줄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는 진리란 단순히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영혼을 사로잡는 것’이어야 한다고 보았다.66) 그러나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고, 케리그마 속의 역사를 부정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토대 지체를 부정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무시한 불트만의 케리그마 기독론은 결국 기독론 자체의 기초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다. 불트만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초월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는 실존주의의 개념에 의한 비신화화의 방법으로 고대의 메시지를 현대의 지성에게 전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이성에 의한 진리인식이라는 인본주의적 관점을 절대화하고 있다.

 

불트만은 계몽주의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과 동일한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그와 동일한 오류를 피할 수 없었다. 불트만은 실존주의 철학을 신약학에 적응함으로써 지나치게 단순화된 주해의 경향을 가져왔고, 한쪽 측면만을 말하는 기독론을 낳게 되었다. 그의 실존적 해석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과 현재의 신앙 경험을 과도하게 분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앙을 역사 연구의 결과에 매이지 않게 하겠다는 시도에서도 불트만은 지나쳤다. 몰트만(Moltmann)이 지적했듯이, ‘구체적 역사성’은 항상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를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지, 그 역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신앙의 표현으로서 예수의 역사를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이 그 역사 때문에 존재할수 있는 것이다.67)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강조는 기독교 신앙의 공동체적이며, 사회적인 차원을 제외시킬 위험이 있다. 그는 개인의 현재적 삶에 있어서의 결단의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공동체 속에서의 영적 성장에 주목하지 못하여 그의 기독론은 교회론과의 연속성을 결여하고 하고 있는 것이다.68) 그래서 신불트만주의 학자들은 그들의 출발점을 다시 역사적 예수에게서 취하였는데, 그것은 역사적 예수가 신앙의 그리스도에 대한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69)

 

Ernst K?semann은 불트만의 역사적 회의주의는 과장된 것이며, 신앙의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 사이의 관계성을 위태롭게 했다고 지적했다. Paul Althaus도 케리그마와 역사적 예수를 분리시킨 것이 불트만의 문제라고 지적했다.70) 부활절 이후에 전파된 그리스도는 역사적 예수와 연속성 속에 있으며, 이 연속성이 없는 신앙과 선포는 의미가 없게 될 것이다. Pannenberg는 역사와 신학의 분리에 근거한 불트만의 신학을 문제시했으며, 계시의 역사적 사건을 단지 실존의 의미에서만 이해하는 케리그마 신학을 비판했다.71) 그는 신학을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사건들, 특히 예수의 부활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았다. Gullmann은 구속사와 예수의 역사는 비신화화론을 위해서 제거되어야 할 테두리가 아니라, 초대교회 선포의 중심을 결정하는 기초라고 밝힌다.72)

 

불트만은 역사적 사실보다 실존적 의미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복음의 역사성을 부정하며, 기독교의 객관적이며 역사적인 토대를 파괴하는 동시에 신학을 주관적인 영역으로 축소하는 결과가 되었다. 불트만은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신화로 취급하고 그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역사에 기초한 기독교를 신화에 기초한 기독교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불트만은 신화라는 개념을 성경에 적용하여, 성경의 기독론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신약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성경의 저자들이,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한 전승, 그리고 고대 근동의 종교로부터 유래한 자료들을 편집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현대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불신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불트만은 하이덱거의 실존철학의 영향을 받아 신학이 인간 실존에 관계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의 신학은 역사성과 객관성을 결여하고, 인간 중심적인 신학이 되고 말았다. 그는 역사의 전 과정을 외면하고, 현재 속의 인간의 실존에만 관심을 집중하였다. 케리그마가 구체적 역사의 기반을 상실한다면, 기독교 신앙의 내용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되고 만다. 불트만이 이런 오류에 빠지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계몽주의적인 전제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합리성을 절대시하는 인간 중심적인 전제에서 출발하여,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1세기의 신화적인 세계관으로 묘사되었다고 주장하고, 이를 20세기의 실존철학적인 언어로 해석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케리그마를 강조하는 불트만의 기독론은 근본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동일한 전제와 방법론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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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Grath, Alister E. The Making of Modern German Christology.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4.
Ramm, Bemard L. An Evangelical Christology. New york: Thomas Nelson Publishers, 1985.

 

 

각 주


1 A. E. McGrath는 불트만의 케리그마(kerygma)가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통합하는 원리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케리그마와 ‘신앙의 그리스도’의 개념을 더욱 모호하게 하므로 부적절한 표현이다. A. E. McGrath, The Making of Modern German Christology(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4), 155.
2 Ibid., 155-6.
3 Loc. Cit.
4 목창균,『현대신학논쟁』(서울: 도서출판두란노, 1995), 173.
5 스탠리 그렌츠, 로저 올슨,『20세기 신학』, 신재구 역(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1997), 134.
6 B. L. Ramm, An Evangelical Christology(New York: Thomas Nelson publishers, 1985), 149.
7 목창균, op. cit., 175-6.
8 발터 슈미탈스, 『불트만의 실존론적 신학』, 변선환 역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3), 207.
9 Rudolf Bultmann, Jesus and the Word(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58), 8.
10 Ibid., 12.
11 발터 슈미탈스, op. cit., 215.
12 스탠리 그렌칙츠, 로저 올슨, op. cit., 136.
13 lbid., 134.
14 김영한,『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121-132 참조
15 스탠리 그렌츠, 로저 올슨, op. cit., 141.
16 Ibid., 142.
17 R. 불트만, "최초의 교회의 ‘케리그마’와 역사적 예수", 『현대 역사적 예수 논구』, 전경연 편역 (서울: 종로서적, 1976), 41; 발터 슈미탈스, op. cit., 209.
18 스탠리 그렌츠, 로저 올슨, op. cit., 144.
19 조성노편, 『현대신학개관』(서울:현대신학연구소, 1994), 254.
20 .[20] B. L. Ramm, op. cit., 150.
21 발터 슈미탈스, op. cit., 212.
22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의 선포에 대한 역사적 사료는 공관복음서라고 본다. R. 불트만, 『신약성서신학』, 허혁 역 (서울: 성광문화사, 1976), I.
23 Ibid., 7.
24 Ibid., 30.
25 Ibid., 40.
26 Ibid., 43.
27 Ibid., 46.
28 스탠리 그렌츠, 로저 올슨, op. cit., 137.
29 Loc. cit.
30 R. 불트만, "최초의 교회의 ‘케리그마’와 역사적 예수", 34.
31 Ibid., 35-6.
32 발터 슈미탈스, op. cit., 220-1.
33 Ibid., 222.
34 Ibid., 223.
35 lbid., 224.
36 Rudolf Bultmann, Primitive Chritanity(New York: Meridian Books, 1956), 200.
37 R. 불트만, "최초의 교회의 ‘케리그마’와 역사적 예수", 33.
38 A. E. Mcgrath, op. cit., 157.
39 Ibid., 158-9.
40 스탠리 그렌츠, op. cit., 139.
41 A. E. Mcgrath, op. cit., 157.
42 Rudolf Bultmann, Jesus and Mythology(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58), 45; 목창균, op. cit., 181.
43 Ibid., 179.
44 Ibid., 180.
45 리처드 A. 노리스, 『기독론 논쟁』, 홍삼열 역 (서울: 도서출판 은성, 1998),
46. 46 lbid., 48-9.
47 스탠리 그렌츠, op. cit., 140.
48 A. E. Mcgrath, op. cit., 160.
49 Ibid., 161.
50 죤 마카리, ‘‘불트만", 『현대신학사상 I』, 맹용길 역 (서울: 성광문화사, 1980), 167-8.
51 A. E. Mcgrath, op. cit., 161.
52 Ibid., 161-2.
53 Ibid., 166.
54 Ibid., 167.
55 Loc. cit.
56 Ibid., 167-8.
57 Ibid., 168-9.
58 B. L. Ramm, op. cit., 150.
59 Ibid., 150-1.
60 스탠리 그렌츠, op. cit., 148.
61 목창균, op. cit., 182-3.
62 Ibid., 185.
63 김영한, 『현대신학과 개혁신학』 (서울: 성광문화사, 1996), 119-20.
64 김영한,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154.
65 A. E. Mcgrath, op. cit., 171.
66 스테리 그렌츠, op. cit., 149.
67 Ibid., 150.
68 Ibid., 151. 학생A - 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학생B - 나는 그 질문에 ‘예, 아니오’라는 말로 대답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본다. 나의 삶 전체, 나의 인생 전체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생A ? 그럼,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로서 참이라고 보는가, 아니면 거짓이라고 보는가? 학생B - 나는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로서 참인가, 거짓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쟝발쟝을 구원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 미리엘 주교의 ‘사랑’이 아니었던가? 대학시절 C. C. C.멤버인 ‘학생A’ 의 질문에 위와 같이 대답했던 ‘학생B’는 그 이후 15년 동안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방황하며 타락한 생활을 하였다.
69 클래스 루니아, 『현대 기독론 연구』, 김호남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6), 40.
70 목창균, op. cit., 184.
71 Ibid., 185. 72 김영한,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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