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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9-03
 제목  불트만의 실존론적 기독론
 주제어  [불트만] [기독론]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1. 성서에 대한 실존적 접근

 

불트만은 조직신학자가 아니라, 신약성서신학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체계적인 논술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신약성서의 해석의 맥락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오늘 나에게 구원 사건으로 고백되고 선포되어지도록 할까 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기독론적 사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성서해석학을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불트만의 성서해석학은 19세기의 여러 해석학의 입장들, 그 중에서도 특히 역사주의 또는 역사 실증주의적 성서해석학의 문제점과 한계에 대한 대안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세기의 성서해석학의 다양한 입장들(합리주의적, 역사학적, 관념론적, 생물학적, 심리학적, 종교사학파적)에 있어서 해석학의 본래적인 입장, 즉 본문이 검증되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독자에게 자신의 요구와 주장을 내세우고 독자의 실존을 규정하기 위해서 있다는 견해가 포기되어졌다고 비판한다. 이 입장들은 주석이 독자의 관심(tua res agitur)에 의하여 결정되지 아니하고, 주석가의 중립적이고 공평한 태도에 의해 진행되어야 하며, 그 목표는 잃어버린 역사를 재구성하는데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불트만에게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물음은 우리가 역사를 대면함에 있어서 우리를 향한 역사의 요구와 주장, 우리에게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말하려고 하는 역사의 주장을 우리가 인정하는가 이다. 불트만은 중립적이고 관조적인 주석과 본문의 요구를 붙드는 입장을 취하는 주석 사이의 구분은 부적절하고 거짓된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사실상 중립적인 해석이란 없기 때문이다.

 

불트만에게서 본문의 의미와 그 의미에 대한 주석가의 접근 가능성에 대하여 묻는 것은 곧 역사와의 만남으로부터 출현하는 우리의 실존의 가능성들에 대하여 묻는 것이다. 우리는 본문이 보여주는 저자 자신의 진정한 실존함의 가능성으로서의 실존 개념에 대한 해석 방식을 이해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 때 우리는 우리 자신과 살아 있는 관계성 안에 서 있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처럼, 즉 참으로 우리 자신의 실존을 시초적으로 성취시키는 '나'와 '너'의 관계성 안에서 본문을 만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실존은 바로 이러한 관계들 안에서 발생한다. 그들 안에 우리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들이 우리에게 있어서 시간적인 사건들이며, 결단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사건들인 것처럼 역사와의 실존적인 만남은 우리의 결단을 요구하는 시간적인 순간들 안에서 일어난다. 신약성서 주석의 독특한 성격은 무엇인가? 불트만에 의하면, 그것은 곧 인간은 자신을 위한 실존의 질문을 제기하고 자유로운 행위의 가능성을 소유하고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실존을 자기의 수중에 장악하고 있지 못하다고 하는 신약성서의 선언이다. 이 모든 것은 오직 신앙의 경험 안에서만 발견된다. 신약성서는 심지어 인간은 스스로 신앙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이 앎은 오직 신앙의 주석으로부터만 오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올바르게 질문을 제기하기를 원한다면, 이 질문조차도 '신앙하는 질문'이어야 한다. 신앙하는 질문을 위한 이 준비성은 성서주석의 자리가 비실제적이고 추상적인 일반적 상황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말씀의 교회의 전통 안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나 자신을 시간에 의해서 조건되어지는 개별자로서 외부적으로 볼 때가 아니라, 오직 내 자신이 실존적으로 말씀의 전통 아래에 설 때에만 이와 같은 신앙을 하는 질문을 위한 준비성이 있을 수 있다.

 

2. 실존론적(실존주의) 해석학

 

불트만의 해석학은 슐라이에르마허와 딜타이의 해석학적 과제와의 연속성 상에서 그리고 하이데거의 실존적 인간 이해(특히 전기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해석학)의 틀 안에서 이해되어질 수 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해석을 유도하는 전제와 가능성이 저자와 해석자가 인간으로서의 공통된 인간성을 가졌고 또 해석학적인 재창조나 반복에 의해서 공통된 경험의 감수성(민감성)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고 보았다. 한편 딜타이는 해석학의 전제하에 가능성이 '역사적' 존재로서의 '친화성'으로 보았다. 딜타이에 따르면, 모든 역사적 사건들과 역사적 삶의 표현들이 인간 정신의 결과이며, 그러한 인간 정신의 구조와 가능성에 역사가와 해석자 자신이 참여하기 때문에 과거의 역사적 사건들과 역사적 삶의 표현들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슐라이에르마허와 딜타이는 저자와 본문의 해석자 사이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경험적 혈족 관계 또는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인간 경험의 가능성이 역사적 해석의 전제와 가능성이 된다고 보았다. 불트만의 해석학은 이들과의 연속선상에 있다. 불트만도 성서의 본문을 인간의 실존적 구조와 그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 이 인간의 실존구조의 요소 가운데 하나가 사람이 물음을 제기하는 질문자로서 또는 물음을 받는 대담자로서 역사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역사적 해석에 있어서 작용하는 전제는 '해석자 자신의 삶 연관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본문에 표현된 주제에 관계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삶과의 관계에서 본문을 보려고 하느냐에 따라 본문은 제각기 달리 읽혀질 수 있다. 불트만은 아무런 전제 없이 역사적 연구가 가능하다고 과신하는 순진한 역사주의(naive historicism)를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불트만은 하이데거 이해의 선구조 개념을 수용하여, 해석을 인도하는 전제 또는 질문이 되는 것은 바로 '전이해'라고 하였다. 하이데거는 이해의 선구조를 '먼저 가짐', '먼저 봄', '선파악'으로 이해했다. 불트만에 의하면, 모든 이해를 위한 해석은 반드시 어떤 전제를 필요로 하며, 그것에 의해 유도된다. 이해 또는 해석은 언제나 특정한 질문 방식 또는 특정한 목적에로 정향되어 있다. 그것은 결코 전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해와 해석은 언제나 해석자가 본문에 대하여 묻는 주제에 대한 전이해에 의해 인도되어진다. 오직 그러한 전이해의 기초 위에서만 질문의 방식과 해석이 가능하다. 뷸트만에 의하면, 질문의 방식은 질문자의 삶에 근거한 관심으로부터 자라난다. 그리고 모든 이해하는 해석의 과제는 이 관심이 해석되어져야 할 본문 안에 또한 모종의 방식으로 살아 있으며, 본문과 해석자 사이의 의사소통을 구축한다는 사실이다. 딜타이가 말한 바와 같이 이해를 가능케하는 전제는 본문에 표현된 주제와 해석자의 삶의 관계 또는 유사성이다. 해석자와 저자는 동일한 삶의 맥락 안에서 주제에 대한 동일한 삶 관계를 갖고 있다. 이것이 이해의 전제이다. 이와 동일한 이유로 모든 해석은 주제가 속하여 있는 삶의 맥락으로부터 자라나는 전이해를 포함한다. 나의 삶의 맥락과 환경 또는 삶의 방식 안에서 의미가 없는 대상이나 행위의 방식은 이해할 수 없으며, 번역할 수도 없다. 이해의 과정은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는 과정과 유사하다. 어린아이가 언어를 이해하고 말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은 환경과 친밀해짐과 더불어 그리고 삶의 맥락과의 인간적 친화성으로 더불어 발생한다. 불트만에 의하면, 다양한 해석의 목적들 중에서 궁극적으로 그 목적은 인간 실존이 발생하는 삶의 영역에서의 역사에 대한 관심에 의해서 주어질 수 있는데, 이 때 우리는 우리의 가능성들을 획득하고 발전시키며, 이러한 가능성들에 대하여 숙고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가능성들에 대한 이해에 이르게 된다. 해석의 목적은 자기 자신의 실존으로서의 인간 실존에 대한 질문에 의해 주어질 수 있다. 불트만에 의하면, 역사적 현상에 대한 궁극적인 의미의 이해는 자기 자신의 실존으로서의 인간 실존의 가능성들에 관하여 본문에 물음을 제기하는 이해이다. 여기에서 '가장 주관적인' 해석이 '가장 객관적인' 해석이 된다.

 

 

3. 비(탈)신화화 작업으로서 실존론적 성서해석학

 

불트만의 실존론적 성서해석은 동시에 비(탈)신화화의 과정을 통해서 수행된다. 그에 의하면, 성서의 세계상은 신화론적이다. 성서의 세계관은 고대 그리스에서 형성된 것이며, 오늘날의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과학적 세계관에 의해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 성서가 시대를 초월하는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면, 현대인들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표현되고 선포되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 성서의 신화론적 표현들은 새롭게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러면, 성서의 신화론적 표현들은 어떻게 새롭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는가? 불트만에 따르면, 현대인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신약성서의 신화론적 표현이지 선포(케뤼그마)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신약성서의 선포의 진리를 현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해서는 신화론적인 표현들 뒤에 숨은 깊은 의미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비(탈)신화화(Entmythologisierung)이다. 성서는 기록될 당시의 신화적 세계관에 의하여 신화론적으로 착색되었지만, 신화적인 껍질, 즉 여가적인 부가물 또는 우연성을 벗기고 그 속에 담긴 케뤼그마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의 과학적 세계관에 적합하도록 새롭게 표현하고 이해해야 하는데, 이 과제가 곧 비신화화이다. 이 비신화화는 실존론적 성서해석을 위한 필수 불가결의 과정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비신화화'의 작업은 성서의 신화론적 세계상을 비판적으로 제거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일'이며, '실존론적으로 해석하는 일'이다. 즉, 비신화화는 성서의 신화론적 세계 표상을 비판함으로써 그 표상에 포함된 인간의 '실존 이해'를 밝혀 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므로, 비신화화는 불트만의 실존론적 성서 해석을 수행하기 위한 이해의 기술이요, 해석학적 방법론이다.

 


4. 실존론적 기독론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불트만의 경우 신약성서는 인간 실존을 위한 구원과 새로운 삶의 메시지이다. 따라서 우리는 실존론적 구원과 새로운 삶의 물음(전이해)을 가지고, 성서 안으로 들어 가야 한다. 이것이 실존론적 성서해석이다. 이 실존론적 성서해석은 동시에 비신화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즉, 그것은 신약성서의 객관화시키는 신화적 언어를 새로운 인간 실존의 가능성을 표현하는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이다. 불트만의 실존론적 성서해석은 곧 실존론적 기독론으로 나타난다. 그의 실존론적 기독론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글은 "세계교회협의회의 기독론 고백"이다. 불트만은 "하나님과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세계교회협의회의 기본적인 신앙고백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에 의하면, '구세주'라는 개념은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실존론적이고 기능적인 의미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하나님'이라는 용어에 있다. 그는 이 용어가 형이상학적인 그리스도의 본성을 표현하는 용어가 아니라, 구원론적인 그리스도의 의미를 나타내는 용어라고 이해한다. 불트만은 신약성서 안에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불리는 선례가 있는지를 연구한 끝에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그에 따르면, 예수가 하나님으로 불리는 유일한 경우는 요한복음 20장 28절의 도마의 고백인데, 이 고백은 형이상학적이거나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감정적이고 실존적인 감탄의 언어라는 것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신약성서 안에서 명시적으로 하나님으로 불리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리고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상황적 맥락은 교의적이라기 보다는 고백적이고 예전적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분의 존재나 본성에 관한 객관화시키는 진술이 아니라, 신자를 향한 그 분의 의미(Christus pro me)에 관한 진술로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불트만은 예수의 성육신의 의미를 실존론적으로 이해한다. 그는 형이상학적인 성육신의 이해, 즉 하나님의 제2 위격이신 성자인 로고스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성육신 사상을 고대의 삼층적인 신화적 세계관에 근거한 신화적 이해라고 본다. 불트만은 묻는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나를 돕는가? 아니면, 나를 돕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인가?" 물론 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후자이다. 성육신의 표상은 실존론적 진술이지 형이상학적인 진술이 아니다.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고백적 진술은(형이상학적, 존재론적 진술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로부터 경험한 변화와 거듭남의 체험의 의미를 표현한 구원론적이고, 실존론적인 진술이라는 것이다. 불트만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다"라는 명제가 객관화되어질 수 있는 실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지는 한, 이 명제는 아리우스, 니케아, 정통주의 또는 자유주의 그 어느 입장에서 이해되어지든지 간에 거짓된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행위의 사건으로서 이해되어지는 것이 정확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주되심, 신성은 언제나 어느 특정한 시간에서의 사건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인격의 영원한 속성도 아니고, 그의 신성에 대한 고백은 영원한 교의학적 진리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질 때, 발생하는 사건이다. 그에 의하면, 가장 큰 오류는 살아 있는 경험 안에서 알려지는 어떤 존재를 검증되어질 수 있는 객체로 개관화시키는 일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두 본성론이라든가 위격적 연합(hypostatic union)과 같은 존재론적 교리를 거분한다. 비신화화를 통한 불트만의 실존론적 성서해석에 나타난 실존론적 기독론의 또 다른 대표적인 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종말론에 대한 그의 해석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예수의 십자가를 대속의 속죄의 죽음으로 이해하는 성서의 구원론적 해석이나 육체적인 부활과 하늘로의 승천에 관한 성서의 믿음은 신화론적이다.

 

비신화화를 통하여 예수의 십자가는 더 이상 전통적인 대속교리를 위한 피흘림의 희생제사가 아니며, 부활은 문자 그대로의 역사적 사건으로서 우리의 종말론적 부활의 예표가 아니다. 우리는 더 이상 신화적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십자가와 부활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공통적인 인간의 본질적인 실존의 문제와의 관련성 속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십자가의 메시지는 더 이상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고, 지금 여기 '나'에 대한 심판이다. 십자가는 선포를 통하여 나로 하여금 그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케 한다. 부활이란 신앙 가운데 십자가에 달린 이가 참 삶의 가능성을 창조했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선포를 통하여 나의 부활로 현재화되며, 부활의 삶을 요청한다. 십자가와 부활은 과거의 사건도 아니며, 피안의 사건도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 나에게 일어나는 사건이며, 이는 결단의 의지와 참여를 요구한다. 이 사건은 바로 종말론적 사건이다. 따라서, 종말의 시각은 우주적 종말이나 재난을 동반한 역사적 종국이 아니라, 실존적 결단이 요구되는 현재의 시각을 말한다. 그것은 바로 실존론적인 십자가와 부활의 시간으로서의 역사성(Geschichtlichkeit)이다.

 


5. 결론

 

불트만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역사나 본성이라는 개념과 범주를 거부하고 나름대로 그리스도가 인간적이며 동시에 신적이라는 사실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리스도의 기적은 인간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진다는 사실에 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를 인간화시키고, '역사적 예수'로 환원시킴으로써, 그 분을 객관화시켰다. 반면 정통주의는 한 신적 인격 안에 두 본성이 연합되어 있는 하나님-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객관화시켰다. 불트만은 이 두 입장 모두가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말이 하나님의 행동의 사건으로 경험되어지는 결정적인 순간으로서의 '종말론적인 사건'의 역설을 해소시켜버린다고 비판한다. 그는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를 제시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삶의 근본적인 실존적인 결단을 요청하는 분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종말론적으로 제시하고자 하였다. 오늘날 불트만의 성서해석학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내용은 대략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그의 역사적 회의주의에 관한 사실과 의미의 괴리이며, 다른 하나는 그의 일방적인 실존론적 관심에 의한 비역사주의와 그로 인한 본문의 의미의 협소화이다.


이와는 반대로 후기 불트만 학파(케제만, 보른캄 등)에 의해서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일치성과 연속성, 그리고 상호순환적 관계성이 추구되었다. 더구나, 종말을 단지 한 개인의 비본래적 실존으로부터 본래적 실존으로의 전향, 즉 세계 의존적인 삶의 종국으로서의 역사성(Geschichtlichkeit)의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불트만의 실존론적인 성서해석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역사(historie)의 지평을 상실하고 있다고 비판되어 진다. 각주/미주 1) 윤철호, op. cit., pp. 139-158.

 

 

>> 목차고리 : 신학 > 조직신학자 > 불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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