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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9-03
 제목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학
 주제어  [불트만] [해석학]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은 금세기 20년대부터 거의 반세기에 걸쳐 현대 개신교 신학 형성과 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끼쳐온 개신교 신학계의 거장이다. 불트만은 바르트와 함께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유래하면서, 이와 결별하고 '변증법적 신학'을 전개하였으며, 바르트와는 달리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비판방법(Historisch-kritische Methode)을 계속 계발시키고, 20년대에 마르부르크(Marburg) 대학교의 동료 철학교수였던 하이데거(M. Heidegger)와 교우관계를 통해서 심화된 실존철학의 인식을 도구로 이용하여 실존신학(實存神學, Existentialtheologie)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하나의 독자적인 신학사상을 형성하였다.


불트만의 해석학, 실존론적 해석학(實存論的 解釋學, existentiale Hermeneutik)은 성서의 탈신화론화에 관한 그의 견해가 1941년에 개진된 이래 개신교 신학계에서 강력한 찬반 논쟁에 부딪치게 되었다. 학문 방법론적인 차원에서 이 해석학의 입장을 반대한 대표적 신학자가 성서적 해석학을 전개하는 동시대 신학자였던 바르트(K. Barth, 1886-1968)라 할 수 있다. 바르트는 변증법적 신학(Dialektische Theologie)을 통하여 자유주의 신학을 거슬러 인간이 오로지 청종하며 대하게 되는 전혀 이질적인 분으로서의 하느님을 드러내려 하면서 하느님 말씀의 권위를 그릇된 인간이성의 주장을 거슬러 관철시키려 하였다. 그런데 바르트는 교회의 현 복음선포 속에서의 하느님 말씀의 현실화를 강조한다. 그는 신앙의 초역사적 핵심에로의 관심을 근거로 내세움으로써 계시를 역사적 논란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취지를 드러냈다. 그는 복음선포를 통한 신앙의 핵심은 초역사적이요, 그리스도의 육화는 원초역사(Urgeschichte)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 신학이 하느님의 말씀을 위격화하여 실재세계와 격리된 초자연주의로 도피함으로써 계시진리의 보편성은 상실되기에 이르렀다고 봄이 타당하다. 신학의 영역이 이성의 힘으로 도달될 수 없고 검증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것으로 규정됨으로써 신학은 다른 정신과학과의 대화 등을 포기하는 것으로 판정받고 있다.
수많은 신학자들이 - 그중에는 한국 신학자들도 있다-실론론적 해석학을 둘러싼 논쟁에 참가하였다. 불트만 자신은 반대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견해를 시종일관 반복해서 옹호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글을 한 번도 읽지 않고 그의 사상을 평가하는 것을 개탄한 바 있다.
 


1. 불트만 해석학의 기본 입장

 

불트만 해석학의 기본입장은 '탈신화론화' 계획과 '실존론적 해석'에 관한 그의 입장에서 드러난다.

 

1.1  성서의 탈신화론화의 취지

신약성서의 탈신화론에 관한 불트만의 견해는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오늘날까지 기독교 신학계에서 많은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탈신화론화' 계획에서 문제시 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신앙 자체이다.
'성서만으로'의 신앙원리를 고수하는 개신교 신학자인 불트만에게는 근세 역사적 사고의 지평속에서의 신앙과 복음의 이해가 일생에 걸쳐 관건이 되는 문제였다. 그는 신앙의 규범원리로서의 성서말씀을, 과학의 영향을 받으며 생활하는 현대인들이 하느님의 담화(Anrede)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해시키는데 관심이 있었다. 그는 신약성서의 표상세계와 우리 현대인의 표상세계 사이에 개재하는 깊은 격차가 성서말씀의 담화성격을 차단하여 결과적으로 신앙을 어렵게 한다고 보았다. 현대인의 세계관이 과학과 기계기술로 규정되어 있는데, 신약성서의 세계관은 신화론적이기 때문이다. 성서의 신화론적 표상 이면에서 보다 깊은 의미를 다시 발굴하려는 시도가 바로 성서의 탈신화론화 계획이다.


 1.1.1   불트만에 따르면 신화론은 인류의 유아기 시대에서의 인간실존의 특정한 이해의 표현이다. 극소수의 추상적 개념이 사용되고 철학적이고 심리학적인 개념들이 아직 계발되지 않았던 때에 인간들은 구체적 연사(演辭)로써 자신의 삶과 세계의 실재에 관하여 거론하였다. 신화론은 계산 가능하고 측정가능한 세계내 사물 외부에 있는 세력(Krafte)속에 인간과 세계가 자신의 근거와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신화론은 가시적이고 이해가능한 세계의 피안적 세력들임을 드러내는 제신들에 대하여 마치 인간들에 대하듯이 거론한다. 신화론은 요컨대 "그 안에서 비세상적이고 신적인 것이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것으로, 피안적인 것이 차안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예컨대 하느님의 피안성이 공간적 요원성으로 생각되는 표상양식"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초월적 실재에 내재적인 세계적 객관성이 부여되어 있다.


불트만은 신약성서에서 바로 이러한 신화론적 표상양식이 발견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신약성서에서의 세계란 그 창조가 구약의 히브리 성서에서 묘사되고, 궁극적으로는 고대 바빌론의 우주관을 반영하는 세계였다. 이 세계는 중심부의 땅 지구와 상부의 하늘과 하부의 지하세계, 세 층으로 이루어진 우주였다. 지상세계에서 이해되지 않는 사건들은 천상세계에서의 선신(善神)-어쩌면 하느님 자신일 수도 있다- 으로부터의 직접적인 작용이나 지하세계로부터의 악신(惡神)의 직접적인 작용의 탓으로 돌려졌었다. 여기서 하느님은 별과 빛의 세계인 하늘[天國, Himmel]에 거처한다. 이 진술은 하느님이 세계외부에 있으며, 초월적이라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다. 추상적 초월관념을 표현할 수 없는 사고가 자신의 지향을 공간 범주로써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세계위에서 공간적으로 요원히 떨어져 있는 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옥의 표상도 마찬가지이다. 악의 초월관념이 끊임없이 인류를 찾아드는 무시무시한 세력으로 지옥표상을 통해서 표현되고, 지옥이 음지나 땅밑에 있는 것으로 표상되는 것이다.


불트만은 신약성서가 자신의 본연의 내용인 구세사건에 대해서도 신화론적 언어로 말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스도가 이 지구상에서 한 인간으로 나타나 기적을 행하고, 악신을 구축(驅逐)하고, 인간들의 죄를 보속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사망하고, 사흘만에 부활하여 하늘 나라로 승천하고, 얼마 후 하늘의 구름위에서 우주적 혼돈과 사자(死者) 부활과 심판을 통하여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이룩하기 위하여 다시 올 것으로 선포한다. 불트만은 이러한 표상들이란 당대의 후기 유다이즘의 묵시론과 영지적 구속신화(靈知的 救贖神話)의 신화론으로부터 유래하는 요소들로 형성된 신화론적 진술로 보고 있다.


불트만은 현대 인간들이 고대 세계관의 소산인 이러한 신화론적 표상들을 글자 그대로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음을 지적한다. 그는 신화론적 세계관이 경이적 발달을 이룩한 과학으로 규정된 현대적 사고와 생명세계 속에서 더 이상 재생될 수 없는 과거지사임을 강조한다. "전기불과 라디오를 사용하고, 질병이 생겼을 때에 현대 의학수단을 요청하면서 동시에 신약성서의 정령세계(精靈世界)와 기적세계(奇蹟世界)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과학적 사고에서는 우주에서의 '위'와 '아래'에 대한 이야기가 의미를 상실하였다고 본다.
신약성서의 신화론적 표상에 대한 비판은 불트만에 따르면 현대과학적 세계관에 못지않게 현대 인간의 자기이해로부터 나온다. 인간은 오늘날 자기 자신을 항시 초자연적 세력의 개입에 개방되어 있는 존재로 이해하지 않고, 자기자신의 사고와 원의와 감흥 등을 자신에게 돌리는 폐색된 본질로 이해한다고 불트만은 간주한다. 때문에 신약성서가 인간에 관해 말하는 바를 현대인이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한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아무도 자연과 역사의 과정이 초월적 세력의 직접적인 개입을 통하여 중단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자기자신의 생(生)의 의의가 이를 통해서 결정될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트만은 이 때문에 성서의 신화론적 표상은 현대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하는데 장애가 되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는 신화내용 자체를 전면 부인하여 폐기하는 과학주의나 자유주의 신학과는 달리 문제를 해결하는 자세를 보인다. 자유주의 신학은 복음이 밀접하게 매여 있는 신화론적 표상을 배제하고, 신약성서의 진리를 비판적으로 환원 처리하였다. 그래서 복음을, 특정한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기본사고에로, 종교적 동기를 띤 관념론적 윤리가 아니면 신비적으로 채색된 종교심이나 신심에로 환원하였다. 여기서 예수는 스승과 예표로서 교육적 의미나, 경신례적인 상징으로서 종교사회적 의미만을 지닐 뿐이다. 불트만은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의 환원방법을 거슬러서 신약성서가, 하느님이 세계구원을 작용케 한 하나의 역사적 사건에 관하여 거론한다고 확신한다. 불트만은 인간의 구원이 역사적 인격 예수에 매여 있음을, 예수의 인격 자신이 결정적 구원사건임을 고수한다. 하지만 그는 신약성서 속에서의 복음이 오늘날에 효용성을 지니려면 성서를 탈신화론화하는 것 이외의 다른 길이 없다고 보고 있다.
요컨대, 불트만은 성서의 신화론적 진술을 무의미하다고 간주하여 제거하려 하지 않고 해석하고자 한다. 탈신화론화는 성서복음의 폐기를 뜻하지 않고 과거시대의 세계관인 성서 속에서의 세계관을 벗어남으로써 복음이 신화론적 세계관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게 하는 작업이다. 불트만은 신화론적 표상속에 영속하는 가치가 있다고 보았고, 이것을 복음선포의 대상인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재발굴하려 시도한 것이다. 이로써 문제는 성서해석의 문제로 귀착된다.


불트만은 신화론적 표상들이 상징들이나 비유들로서 종교의 언어를 위해서 필요하고, 그리스도 신앙을 위해서도 필요한 상징들이나 비유들로서 적용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신화론적 개념들이 필연적으로 상징 또는 비유들을 통해서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가를 아는 것이 문제가 된다. 신화론적 표상 이면에 있는 신화 본연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신학적 사유의 과제이다.


1.2.1 불트만은 신화속에 인간 실존의 특정한 이해가 표현되어 있다고 본다. 신화속에서 인간은 그가 몸담고 생활하는 세계가 불가사의한 비사(秘事)로 가득 차 있으며, 자신이 세계와 자기생명의 주(主)가 아니라, 알려진 현실 세계 피안에서 작용하고, 인간 현존재에 근거와 한계와 목적을 설정하는 세력에 지배되어 있다고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신화는 이러한 세력들에 관하여 불충분하게 거론한다. 하지만 신화가 객관적인 세계상을 제공하려 하지 않고, 인간이 자신이 점유할 수 없는 세력에 의하여 어떻게 예속되어 있는가를 말하려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신화의 본질 속에는 인간이 자신의 세계속에서 자기자신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시사하는 하나의 이해가 표현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트만은 탈신화론화의 기준이 바로 신화 자체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신화가 해석되어야 하되 우주론적으로가 아니라 인간학적으로, 실존론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주론적이 아니라 실존론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신화를 대할 때 이것이 인간을 위해 무엇을 의미하고, 구체적 인간 실존을 위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불트만은 말한다. 때문에 신약성서의 신화론은 객관화하는 표상내용에 대해서 질문되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표상 속에서 표현되는 실존이해에 대하여 질문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신화가 비판적으로 그저 간단히 제거될 것이 아니라, 신화론적 표상 속에서 발해지는 실존이해에 관하여 묻는데 탈신화론화의 적극적 의도가 있는 것이다.
불트만이 신약성서의 신화론적 표상들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 그의 부정적 의도보다 그 속에 내포된 실존이해를 정리하려는 긍정적 의도가 강조되어야 하겠다. 불트만에게서 탈신화론화는 해석학적 방법, 곧 해석양식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해석을… 실존론적 해석이라 일컫는다. 이 해석이 해석자의 실존 질문에 의하여 움직여지고 역사 속에서 작용하는 실존이해에 대하여 묻기 때문이다." 이제는 성서 속에서, 인간 실존이해에 관해서 무엇이 거론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해석학적 원리를 발견해야 하는 과제가 나타난다. 탈신화론화가 해석학적 방법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불트만이 어떠한 해석학적 원리를 가지고 성서해석에 임하는 가를 고찰할 단계에 이르렀다.

 

2.2  실존론적 해석학의 원리


불트만이 어떠한 해석학적 견해를 가지고 성서해석에 임하는가를 보기로 한다.
2.2.1  해석학적 물음은 본시 전승된 역사적 문헌들의 이해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는다. 하나의 역사적 문헌으로서의 성서이해도 이 해석학적 질문의 지평에서 이루어진다. 과거로부터 전승된 문서 본문의 해석을 위해서 문헌학(Philologie)은 해석학적 규범들을 개발하였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문헌학에서는 고대 그리스-로마 본문이나, 성서 또는 법률주석에 이들이 적용되었다. 여기서 해석자는 작품의 구성을 분석해야 한다고 보았다. 개별적인 것은 전체로부터, 전체는 부분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외국어 본문이 문제가 될 때에는 해석은 문법규칙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이 해석은 개인적인 언어 사용과 저자의 문체와 당대 시대 언어사용의 관찰을 통하여 보완된다. 그리고 장소와 시간의 인지가 해석의 전제이다.


이러한 해석학적 규범들이 하나의 본문을 이해하는 데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이미 쉴라이어마허가 간파하였다. 그래서 그는 '문법적 해석'은 '예감적 해석'이라고도 불리우는 '심리학적 해석'을 통해서 보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심리학적 해석이란 하나의 작품을 그 저자의 생의 소인을 통하여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해석자는 작품이 생성된 경위를 자기자신 속에서 추구성(追構成)해야 한다. 이것은 저자와 해석자가 공동적인 인간 존재로서 상호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쉴라이어마허는 보았던 것이다. 인간들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개인들이 상호연관속에서 인류의 단일성을 이 연관의 기반으로 전제하는데 정초하고 있다. 개인들은 인간적인 것이 문제가 되고, 인간으로서 인간을 위해 의미있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종족의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공동적인 종족의식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말과 형용(形容), 그리고 억양과 어조와 표정까지도 인간존재의 다양성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개체들간의 이해를 가능케 한다고 쉴라이어마허는 본 것이다.


쉴라이어마허의 해석학적 관점은 딜타이에 의하여 수용되어, 정신과학의 보편적인 방법론으로까지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앞에서 이미 살펴 본 것처럼, 딜타이는 쉴라이어마허의 심리학적 해석기점에 머무르지 않고 역사를 해석학의 대상 영역에로 확장시킨다. 그에게도 이해는 하나의 작품 발생의 독창적 경위를 재구성하는 심리적 추형성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딜타이는 본문과 연사들만을 저자들의 '표현'으로 파악치 않고, 인간행동과 연관된 모든 사건을, 이를테면 예술과 음악활동들을 인간의 '표현'으로 이해하였다. 모든 역사적 사건을 인간정신의 작용으로 보는 딜타이는 역사의 모든 사건을 인간 생의 표현으로 포착할 수 있었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고정된 생의 표현'들이고, 해석자는 이렇게 감관적으로 소여되고 파악될 수 있는 역사적 문헌들과 유품들에서부터 자신을 표현하는 심혼적 생(心魂的 生)을 인식해야 한다고 딜타이는 보았던 것이다. 이제 주석자가 저자를 이해하려면 저자와의 공통성을 지녀야 하는데, 딜타이는 이 공통성을 심혼적 생의 근친성 속에서 본 것이다.


2.2.2 쉴라이어마허와 딜타이에 의하여 역사적 사건을 순전히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관조양식(主體-客體 圖式)을 탈피하여 생동적인 역사적 이해양식이 도달되기에 이른 것이다. 불트만은 이들에 의하여 계발된 역사적 이해관점을 원용하되 자신의 실존론적 인간관에 입각하여 이를 지양하고 실존론적 해석학의 원리를 정립하려 하였다.
인간이 비인간적 존재들처럼 단순히 현전하지만 않고, 자유로운 실존성취 속에서만 참으로 인간적이라고 하는 통찰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역사적 존재임을 시사한다. 불트만은 역사적 원천(Quelle)은 현전하는 것(Vorhandensein)만을, 사실(Tatsache)만을 전승하지 않고, 이 속에서 인간실존의 가능성이 진술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역사(Historie)의 중심주제는 현존했던 실존의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현존한 것을 단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과거의 인간존재의 가능성을 의식에로 가져와 자신의 존재-가능(Sein-Konnen)의 가능성으로 현재화 하는 것이다.


인간은 역사를 어떤 앞에 소여되어 있는 것으로서만, 마치 그의 주위한경이나 자연처럼 관찰할 수 없다. 그 자신이 역사의 한 조각이며, 그가 역사를 향할 때 자기 자신에게도 향하기도 하는 때문이다. 역사에 관해 말함으로써 그는 동시에 자기 자신에 관한 어떤 것도 특정한 양식으로 진술한다. 불트만에게서 역사와의 올바른 교제는 역사와의 '대화'이다. 인간은 중립적 관찰자로서가 아니라, 자신이 역사적 세력에 의하여 움직여짐을 알고, 그 때문에 역사의 요청을 들으려는 용의가 되어있는 자로서 이 대화를 이끈다. 역사와의 해후를 통하여 인간은 지금까지 미지의 사실에 대한 인지를 결과로 지니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결단을 요청하는 이해를 결과로 지닌다. 물론 역사와의 해후에서는 역사적 본문과 원천들, 과거의 사실들과 사건들이 관건이 된다. 그러나 인간은 이들을 주체-객체 도식 속에서 자기 자신의 실존을 아끼면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을 이들에게 개현하고, 이것을 자기 자신의 가능성으로 이어받음으로써 이해한다는 것이다. 역사와 역사적 본문과의 해후 속에서 언급된 것을 단순히 정보 전달로서 수용하지 않고, 이를 긍정하거나 부정하면서 이해한다. 이런 점에서 이해는 불트만에게서 동시에 항상 결단이다.
불트만은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스스로 역사 안에 서고 역사를 위한 책임에 참여하는 사람에게만 가능하다고 말하며, 인간의 역사성에서부터 자라는 역사와의 해후를 실존적 해후라고 일컫는다. 역사와의 이 실존적 관계는 역사이해의 기본전제이다. 이것은 역사의 객관적 내용이 실존적으로 살아았는 주체에 의하여 이해될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역사이해 관점에서 관찰적인 자연과학에서 타당성을 지니는 주체-객체 도식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음이 드러난다.


불트만은 이러한 역사관을 피력함으로써 성서해석자와 성서 본문이 서로 각기 폐쇄된 요인들로서 대치하는 것을 저지하고자 한다. 이러한 주체-객체 분리는 본문지향과 역사성 속에서의 실존으로서 인간 본질에는 적합치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석자와 본문의 두 소인이 3차적 본질로서 이해의 성취속에서 마주서게 한다. 이제 본문 자체에도 정당하고 인간품위에도 부합하는 이해가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하여 어떤 조건이 필요하며, 어떤 전제들이 충족되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불트만은 저자와 해석자 사의의 근친성을 이해 가능성의 조건으로 규정한 딜타이가 실제로 모든 이해해석의 전제들을 발굴하였다고 본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전제를 정확히 규정하는 것이다. 불트만은 쉴라이어마허나 딜타이와는 달리 저자와 해석자의 개성에 대한 사유, 그리고 그들 심혼의 경위와 천재성에 대한 사유대신에, 이해의 전제로서 해석자와 본문속에서 언어화되고 있는 사건과의 생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필요로 한다고 보고 있다.
해석은 불트만에 의하면 해석자와 저자가 말이나 질문 가운데 있는 사건에 대해 동일한 생의 연관을 지님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들은 동일한 생의 연관속에 서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이다. 본문속에서 관건이 되는 해석자의 사건과의 이 관계가 이해의 전제라고 불트만은 규정한다. "해석은 항상 본문 속에서 -직접 또는 간접으로- 표현되는 사건들과의 생의 관계를 전제한다." 이 관계는 그 속에서 해석자가 처해 있는 생의 연관을 통하여 설정되어 있다고 불트만은 본다. 그리고 한 국가, 한 사회에서 생활하는 자만이 과거의 국가적이고 사회적인 현상들과 그 역사를 이해할 수 있으며, 음악과 관계를 자기고 있는 자만이 음악에 관해서 다루는 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요컨대 본문에서 직접 간접으로 표현되고 있는 사건에로의 선행적 생의 관계는 이미 특정한 선지식을 자체로 내포하고 있으며, 불트만은 이것을 '전이해'(Vorverst ndnis)라고 일컫는다. "성서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사건과 해석자의 생의 연관이 전제되고, 이로써 하나의 전이해가 전제되어 있다." 이것은 선입견이 전제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불트만은 성서학자이고 그의 신학작품은 신약 본문주석에서 엄격히 성취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본문들이 무엇을 말하고자하는가를 알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경주한다. 이것은 불트만이 본문의 진술 지향에 제약을 가할 수 있을 선입견을 주석에서 경원시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결과에 관한 무전제성은 모든 과학적 연구에서처럼 해석에서도 자명하고 절대적으로 요청되고 있다." 불트만은 신약주석에서 디벨리우스(M, Dibelius, 1883-1947)와 함께 양식사학(樣式史學, Form- geschichte)을 결정적으로 적용하였다. 양식사학은 성서의 개별본문들이 이들이 생성된 상황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하고 공동체의 관심이 전승된 자료의 형성과 선택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가를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트만은 역사비판양식을 통해서 얻어진 성서주석이 성서 본문요청을 다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본다. 즉 성서본문이 역사적으로 존재하고 선택을 통하여 결단에로 호출된 존재로서 인간에 맞서는 진술을 하려고 할 때, 이러한 성서주석이 문제시 된다. 성서가 자신을 증언으로 이해하고 신앙을 새로이 불러일으키려 하기 때문에 성서 본문은 명백히 이 요청을 내세우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불트만은 성서를 실존적으로 이해하려 시도하면서, 본문이해의 전제로서 전이해에 관하여 거론하는 것이다. 그는 한 생의 연관성에 입각한 사건의 특정한 이해는 주석에서도 전제되고, 이러한 의미에서 어떠한 주석도 무전제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이 이해를 전이해라고 부른다." 불트만은 이러한 전이해에 입각하여 문제제기와 해석이 비로소 가능하다고 밝힌다. 본문속에서 표현되는 사건과 해석자가 갖는 생의 관계가 이해의 전제이고, 이 생의 연관이 본문을 향하여 문제제기도 규정한다고 보고 있다. "사건에 대한 관심이 해석을 유발하고 해석에 문제제기와 목표점(Woraufhin)을 부여한다." 이러한 관심없이 본문들은 침묵할 것이고 진정한 해석은 일어나지 않을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해석학적 사유에서 본문 질의를 이끄는 전이해를 의식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이해를 제거하지 않고 의식에로 올리고, 그것을 본문이해 속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문제로 내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요컨대 본문에 대해 질문하는 것, 본문의 요청을 듣는 것이 필요하다." 문제제기의 가능성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전이해들의 많은 형태가 있기 때문에, 성서주석을 위해 어떤한 전이해가 적합한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2.2.3 그런데 성서에서 관건이 되고 있는 사건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역사(役事)이다. 불트만은 자연적 인간은 하느님과 선행적 연관을 가지지 않고 하느님의 계시 즉, 바로 그의 계시를 통해서만 그에 대해서 알수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역사에 대하여는 전이해가 있을수 없다는 모순은 순전히 외견상의 모순임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건속에서 실재가 되는 하느님의 역사에 대해서나, 세계안에서 발생하는 다른 사건들에 대해서나 전이해를 가질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전승으로부터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하여 듣기 전에는 그 죽음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을 순전히 자의적(恣意的) 소여성으로가 아닌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한계 내에서 이 사건들이 자신의 의미성과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성격을 얻게되는, 역사적 가능성에 대한 전이해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불트만은 하느님의 역사(役事)로서 사건에 관한 보고의 이해는 하느님의 역사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한 전이해를 전제한다고 단정한다. 하느님의 계시 이전에는 하느님이 누구이고, 하느님의 역사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알 수 없다는 반론에 대해서 그는 "인간은 하느님이 누구인가를 그에 대한 질문 속에서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대답한다.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물음과 추구 속에서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가 표현된다고 불트만은 보고 있다. 그는 아우구스티노의 말이 이 점을 뜻한다고 보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께로 조성하셨고,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 휴식하게 되기까지는 불안합니다."(Tu nos fecisti, et cor nostrum inquietum est, donec requiescat in te). 불트만에게 이 말은 인간이 하느님의 구체적 역사적 계시 이전에 이미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 서 있다고 보는 '고전적 표현'이다. 인간이 이러한 양식으로 하느님에 대한 물음으로 움직여지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계시 속에서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식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계시 이전에 존속하는 인간의 하느님과의 관계는 상이한 형태로써 표현될 수 있다. 불트만은 이 생의 관계가 직접적이며 말로써 표현된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질문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제기하는 '행복'과 '구원'과 세계와 역사의 '의미'에 대한 질문 속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은 매 경우마다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 그의 현존재의 본래성에 대한 물음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현재와 순간적인 것 속에서 본래의 그가 아니라는 것을, 되어야 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항상 미래를 향하여 있고, 그 앞에 놓여 있는 본래성을 향하는 도상에 있음을 불트만은 지적한다. 인간의 생이 이처럼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의 실존에 대한 질문으로 움직여지는 중에 의식적으로나 또는 무의식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질문으로 움직여지고 있다고 본다. 그러기에 "하느님에 대한 물음과 나 자신에 대한 물음은 동일하다"고 한다. 불트만은 이로써 하느님의 역사에 대한 진술의 전이해가 동시에 주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하느님에 대한 전이해는 그에 대한 선입견을 뜻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역사에 대한 전이해를 통해서 해석자가 하느님의 역사에 관한 보고서로서의 성서를 이해할 수 있는 전제가 채워졌다. 중요한 것은 해석자가 자기 자신의 실존에 대한 물음과 이로써 하느님께 대한 실존적 질문으로 움직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본문이 보고하는 사건과의 여하한 관련 가능성이 배제되기 때문에 이해적 해석이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이 전이해 개념을 통해서 불트만은 성서에서 보고되는 하느님의 역사에 대한 접촉점을 발견하였다고 할 수 있다.
불트만은 전이해 개념을 통하여 하느님의 역사의 초월적 성격과 그의 피안성을 고수하는 한편, 인간의 역사적 실존의 지속성을 보존하고자 한다. 여기서 지속(Kontinuum)은 인간 자신, 바로 말해서 그의 본래성에 대한 물음 속에서 표현하는 하느님에로의 규정성을 형성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계시와의 해후 속에서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전이해가 의식 속에로 들어올려지게 된다. 이것으로 역사적 자료로서의 성서의 해석을 위한 불트만의 개념성이 기술되었다고 볼 수 있다.

 

2.3 '실존철학'과의 상관관계


성서의 내용은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인간적이고 역사적 말로써 전달되어 있다. 즉 인간에 의하여 편찬되고, 역사 속에서 발생되어 역사를 통하여 전승되어 있는 문서로 전달되어 있다. 불트만은 역사의 한 사건 속에서 발생한 그리스도 계시의 역사적 증언으로서 성서 문서들이 다른 역사적 증언들과는 다른 별도의 특수한 양식으로 해석될 수 없음을 명백히 한다. "성서 문서들의 해석은 다른 모든 저작과는 다른 이해 조건 밑에 놓여 있지 않다." 이를테면 신약성서주석을 위한 특수 해석방법이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을 불트만은 하고 있다. 이 주장은 현대 성서해석학에서 최상의 공리(公理)와 같은 역할을 해왔고, 또 이 공리가 끼친 영향은 크다. 불트만은 주석자의 작업이 신학적으로 되는 것은 작업의 전제들과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대상을 통해서라고 말한다.


2.3.1 성서해석자는 다른 역사적 문헌해석자와 같이 적합한 정신적 도구 즉, 본문에 필요한 개념성을 필요로 한다. 성서가 하느님의 역사에 관한 진술들, 그래서 인간 실존에 관한 진술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 실존에 대하여 사리적(事理的)으로, 방법적으로 기술하는 개념성이 있어야 한다고 불트만은 보고 있다. 해석을 이끌어가는 개념성을 얻는 것은 불트만에게는 신학의 과제가 아니라 철학의 과제이다. 이로써 올바른 철학에 대한 물음이 등장한다. 물론 불트만은 전적으로 완전한 체계의 의미에서 올바른 철학이란 있을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즉 모든 질문에 해답을 주고 인간 실존의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철학이 있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불트만의 물음은 간단하다. "오늘날의 어떤 철학이 인간 실존을 이해하는 데 가장 적합한 전망들과 표상들을 제공하는가?" 불트만에게서 올바른 철학은 인간 실존과 함께 주어진 실존이해를 적합한 개념성으로써 계발하여 노력하는 철학작업이다.


불트만은 이 '올바른 철학'을 『존재와 시간』에서 드러난 바있는 초기 하이데거의 철학 속에서 발견한 것으로 믿는다. 신약 성서주석에서 실존이해가 관건이 되고 있는데, 하이데거의 실존분석이 인간 실존을 사실적이고 개념적으로 가장 적절하게 분석하는 개념성을 제공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초기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이 성서주적을 위해 적합한 개념들을 제공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불트만이 그의 신학을 하이데거의 실존분석을 해석학적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그는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이 실존구조 속에 무엇이 있는가를 순수하게 현상학적으로 기술하지만, 내용적인 실존이상(實存理想)을 제공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그는 실존철학의 중립성 때문에 이 철학이 성서주석을 위한 적절한 개념들을 제공한다고 보았다. 실존의 구체적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성서에서 찾는다고 보는 불트만은 이 해답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하이데거의 철학의 도움을 청하되, 여기서 해답들의 내용이 미리 판단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실존철학이 나 자신의 실존에 대한 물음에 해답을 주지 않는 가운데 나 자신의 실존을 내 개인적 책임 앞에 세운다. 그리고 이것을 하는 가운데 성서의 말씀을 위해 나를 개방하도록 만든다."


이제 초기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의 실존분석이 어떻게 기술되는가를 간략히 일별하여 불트만의 신약성서에로의 실존적 접근 이면에 하이데거의 인간 실존분석이 얼마나 밀접하게 자리잡고 있는가를 보기로 한다.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의 원의에서 벗어난 특정한 장(場)에 존재한다. 그는 이미 소여되어 있는 그의 처지성에 피투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은 세계내-존재이다. 그런데 인간은 타존재자들처럼 세계내에서 단순히 현전하지만 않고 자기 자신의 관계를 가지는 현존자이다. 그에게는 자기 자신의 존재가 문제가 되고 있다. 소여된 처지에서 단순히 현전하지만 않고 자기 자신을 비로소 실현시켜야 하는 존재로서 인간은 기투(企投, Entwurf)이다. 그는 '피투된 기투'(geworfener Entwurf)이다. 단순히 현전하지만 않고 기투하는 인간 존재는 실존이다. 이 실존은 고정된 속성에 의해서보다는 가능성에 의하여 구성되어 있다.


세계내-존재로서 인간은 세계와 일상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관심'이라고 일컫는다. 인간의 관심은 일상적으로는 주위에서 만나게 되는 사건이나 사물에 쏠리지만, 핵심에 있어서는 항상 자기 자신의 존재양식과 상관되고 있다. 이 관심은 죽음으로 말미암은 자신의 무존재(無存在)의 가능성에 대한 공포에서 체험된다. 인간은 죽음을 외부로부터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죽음에 속해 있다.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는 것을 체험한다. 인간 현존재는 죽음에 의해 한정된 유한한 시간성 위에 입각하여 존재하고 있다. 시간성은 인간 실존을 규정하는 본래 근심의 의의이고 현존재의 기본이며, 한계이자 지평이다.


유한하게 실존하는 현존재는 세계내-존재의 일상성 속에서 존재와 명현적은 아니나 비주제적으로 항상 관계하고 있다. 인간은 항상 존재에 대해서 실존적으로 묻고 있다. 존재에 대한 질문자는 스스로 존재하고, 그의 질문 자체가 존재의 특정한 양식이다.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실존적으로 가지게 되는 존재에 대한 물음은 적어도 존재에 대한 함축적 이해를 요청한다. 여기서 순환성격이 나타난다. 존재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현존재의 존재를 규정하고, 현존재의 존재를 규정하기 위해서 존재가 무엇인가를 이미 알아야 한다. 맹백히 존재에 질문을 제기하는 현존재는 선험적 조건으로서 존재이해(비주제적이고 함축적이기는 하지만)를 전제한다. 존재의 함축적 이해를 지닌 인간은 존재에 대해 특정양식으로 관계한다. 그는 일상인으로서 소여된 처지에서 자족하고 안주함으로써 결국은 스스로 소외되어 퇴락한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으로 말미암은 무존재의 가능성 체험을 통하여, 양심을 통하여, 퇴락된 일상적 자아에서 초월하여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존재 속에 자신을 맡기는 가운데 자시 실존의 본래성을 회복하는 탈존(脫存, Ek-sistenz)일 수도 있다.


2.3.2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이, 참된 인간 존재가 비인간적인 타존재들과는 달리 단순히 현전하는 성격만을 지니지 않고, 실존성취 속에서만 오로지 현존한다는 것을 잘 제시한다고 본다. 이 철학이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수단과 세력의 힘으로 자기 자신을 안전케 하려 추구하여, 결과적으로는 자신을 상실하게 될 비본래성으로부터 호출하여 탈존하는 가운데 그의 본래성에 이르도록 촉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실존철학이 인간의 인격적 실존의 자기이해를 인간에게 보증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고 본다. 나 자신의 실존의 자기이해는 나의 '여기서 그리고 지금'(Hier und Jetzt)의 구체적 실존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존철학이 나 자신의 실존에 대한 물음에 해답하지 않는 가운데 나 자신의 실존을 나의 인격적 책임에 내놓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로 하여금 성서말씀에 개방케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철학적 분석은 실존이 추상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 진술들은 무시각적으로 진실할 뿐이고 '여기서 그리고 지금' 제기되는 순간의 문제에 대한 해답들은 아니다. 철학적 인간 분석 즉, 실존론적 인간이해는, 실존의 자기이해-실존적 자기이해-는 여기서 그리고 지금에야 나 자신의 이해로써 실재가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실존적이고 인격적인 자기이해는 실존이란 추상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를 말하지 않고, '여기서 그리고 지금'의 구체적 인격으로서의 나의 생을 지시한다. 이 이해는 그 안에서 나의 자아와 타자에로의 나의 관계가 동시에 이해되는 이해행위라는 것이다. 내가 나를 이해하는 가운데 나는 타자들을 이해하고, 전체 세계는 새로운 성격을 받는다고 불트만은 본다. 내가 이들을 새로운 빛 속에서 본다는 것이다. 이렇게 참으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고, 나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새롭게 통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자기이해를 무시간적 진리로서 유일회적으로 받아들인 확신으로 소유할 수 없고, 이 자기이해는 늘 새롭게 쇄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적 실존분석은 하이데거가 보여주듯이, 미래에 대한 개방이 인간 실존의 본질적인 존속부분임을 보여주고, 인간이 온전한 인격적 의미에서 실존하려면 미래에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고 설명하는 수밖에 없다고 불트만은 본다. 그리고 철학적 분석이 미래를 무(das Nichts)로밖에는 달리 특징짓게 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개방성은 공포를 받아들이는 자유, 무에 직면하여 공포로부터 자유로움을 뜻하는데, 스스로는 아무도 이 자유를 위해서 결단을 내릴 수 없다고 불트만은 보고 있다. 이 자유로움은 신앙 속에서만 선사될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신학자로서의 불트만은 철학자들과는 다른 견해를 표명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2.4 해석학적 원리의 적용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느님의 역사(役事)인 계시에 대하여 내용적으로 모른다고 하여도, 하느님과 그의 역사에 대한 전이해를 가지고 있다. 불트만은 하느님을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 속에서 묻게 된 분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성서주석을 위한 전이해는 성서에서 표현되는 인간 실존의 이해에 대한 물음 속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성서 텍스트 주석에서도 그는 성서에서 표시되는 인간 실존의 이해에 대해서 묻는다. "인간 실존이 성서 속에서 어떻게 이해되는가?" 그는 이 물음을 가지고 주석자가 모든 역사적 연구와 역사적 문헌의 주석의 최종 동기인 동일한 이유로부터 성서주석에 임한다고 본다. 볼트만에 의하면, 역사이해를 통해서 인간은, 인간 가능성의 이해와 자기 자신의 가능성의 이해를 얻는다는 것이 앞에서 짧게 시사되었다. 불트만은 역사탐구의 최종 이유를 인간 실존의 가능성을 의식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2.4.1 불트만에게 있어 신약성서의 실존론적 해석의 필요성은, 하느님에 대해 인간은 자신의 현존재의 질문 속에서 동시에 묻게 되는 분으로서만 알고 있다는 사실의 결과로 생겨난다. 전승된 텍스트의 인간의 자기이해 가능성에 대한 물음의 전제로서 인간 실존의 질문성 강조는, 인간이 역사 속에서 인간에 의해 형성된 것을 이해하며 감지함으로써 비로소 자기 자신의 인식에 이른다는 딜타이의 통찰과 상통하면서, 동시에 불트만은 이것을 초극하고 있다. 불트만은 전이해를 전승된 텍스트의 요청으로부터 응답이 주어지는 질문의 개방성에만 국한시키고, 사유를 통해서 다양한 전승 전승의 추적이 가능하다고 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불트만에게는 텍스트가 질문 없이는 해답으로서 이미 규정된 해답을 뜻하지 않는다. 전이해의 질문성격은 한 텍스트의 내용에 관한 사전견해를 텍스트 자체와의 해후를 통해서 수정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준다고 불트만은 보고 있다.


불트만이 신약성서의 내용들이 인간 실존의 이해 가능성으로서만 중대하게 된다고 간주함으로써 종국에 가서는 항상 실존의 '본래성'과 '비본래성'의 대립이 문제가 된다. 과거시대의 텍스트들은 역사적 과거지사를 주석자의 현재와 연결시키는 지향을 가지고 있다. 불트만은 현존재 가능성의 이해를 위한 전승된 질문의 불가피성 속에서 전승을 통한 인간의 피질문적 성격을 본다. 그래서 진정한 이해란 그에게는 해석되어야 하는 작품 속에서 제기된 문제, 작품 속에서 만나게 되는 요청의 청종(廳從)을 뜻한다. 여기에 불트만의 실존론적 성서이해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그의 전신학사상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 비중을 차지하는 기점이 놓여 있다.


불트만은 교회의 전통과 설교들이 성서 속에서 우리의 실존에 관한 전권적(全權的) 말들을 듣는다고 말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는 성서를 다른 문학작품과 구별하는 것은 "나에게 성서속에서 특정한 하나의 실존 가능성이 제시되는데, 내가 선택하거나 거절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제시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성서가 나에게 친히 인격적으로 겨냥되어 있고, 나에게 실존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가르칠 뿐 아니라, 나에게 실제적 실존을 부여하는 말이 된다는 것이다. 불트만은 이것을 인간이 미리 앞서서 계산할 수 없는가능성이라고 말한다. 이 가능성은 나로 하여금 성서을 들을 때에만 실재가 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서관에 입각하여 성서 내용을 이해하게 하는 실존론적 해석학의 원리를 여기서 적용한다.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본래적'이고 '비본래적' 실존 묘사가, 신앙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결단할 때에 신약성서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신앙의 새로운 삶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실존의 구체적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유도하기 위해서 하이데거의 실존분석의 도움을 청하면서 불트만은 신앙인으로서 그 구체적 해답을 그리스도 신앙, 특히 신약 성서에서 찾으려는 것이다. 그는 해석자가 텍스트를 통하여 인간 생의 다양성을 미학적으로 관찰하지 않고, 역사로부터 자기 이해에로의 한 가지 '요청', '질문'을 체험하고, 책임있는 결단에로 호출되었다는 데서 실존론적 해석의 의미를 본다.


2.4.2 불트만은 신약 속에서 대답되는 두 가지 실존양식이 있다고 구분한다. 즉 그는 비신앙적이고 비구속적인 실존과 신앙적이고 구속적인 실존을 구별한다. 이 두 실존양식은 인간이 항상 미래로 지향되어 있고, 자신의 본연의 것을 획득하려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문제는 단지 인간이 어떤 양식으로 그의 본래성에 이르려 하고, 어떻게 이를 획득하거나 망실하는가이다.


불트만은 비신앙적 인간은 현존하는 것, 가시적인 것, 그리고 점유 가능한 것으로 생활한다고 특징짓는다. 이러한 인간은 자신의 미래와 본래성을 '소유함으로써' 본래성을 획득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인간은 세상의 자산소유를 통해서나, 위대한 도덕적 실적달성을 통해서 자신의 생을 안전케 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시적이고 점유 가능한 것에 집착함으로써 무상한 것에 집착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이러한 인간의 생은 무상성과 죽음에로 퇴락케 된다는 것이다. 오류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본래성을 획득하려 추구하고, 그 때문에 자기 자신을 참된 미래 앞에서 폐쇄시키는 데에 있다. 불트만은 인간의 이러한 자기 강대성(Eigenm chtigkeit)이 인간의 죄로 지칭됨을 지적한다. 그는 바울로와 함께 이 죄를 인간의 자기 칭송(自己稱頌, Sich-r hmen)으로 특징짓는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을 인간으로서 주장하고, 이로써 자신을 신으로 만들고자 도모하는 것을 뜻한다. 이와 반대로 불트만은 신앙적, 구속적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낸 안전물들을 포기하고 비가시적인, 점유 불가능한 것으로써 생활한다고 규정한다. 이러한 인간은 자신을 하느님의 조물로 이해하고, 자신의 삶을 하느님으로부터 선사받으려 한다. 만사를 하느님으로부터 기대하고, 그리고 자신으로부터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하느님께 대한 극도의 헌신 속에서 인간은 자시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이러한 자유 속에서의 진정한 생은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신앙을 통하여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비가시적이고, 불가지적이고, 점유 불가능한 것이 이제 사랑으로서 인간을 만나고, 죽음이 아니라 생을 뜻하는 미래를 현시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실존하는 것은 '종말론적으로 실존하는' 것을 뜻하고 '새로운 조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2.4.3 불트만은 인간의 자기이해란 인간에 의하여 항구하게 일회적으로 점유되지 않고 하느님 말씀과의 해후 속에서 항상 새로이 성취되어야 한다고 본다. 성서의 실존론적 해석은 하느님 계시의 비중을 현재의 복음선포, 즉 케뤼그마(福音宣布,        , kerygma)에 둔다. 불트만은 복음선포의 말씀이 신앙의 근거, 유일한 근거임을 강조한다. 그에게 예수의 위격과 복음 속에서의 케뤼그마의 역사적 근거에 대한 물음은 무의미하다.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를 그의 '메시아 의식'이나 '내면성', 또는 그의 '영웅주의'와 함께 재구성하기 위해 케뤼그마를 '근원'으로 사용하면서 케뤼그마 이면으로 되돌아가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지나가 버린 육신에 따른 그리스도일 것이고, 역사적 예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설교된 분이 주님이라고 선언한다. 불트만은 신앙이 본질적으로 케리그마와 상관하고, 역사적 제시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케뤼그마를 믿는 데서 신앙이 드러난다고 본다. 불트만에 따르면 케뤼그마의 진리를 위한 유일한 기준이 있다. 즉 하느님의 계시라는 주장을 가지고 우리를 만나는 말씀이, 우리가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은총으로써 우리의 생을 얻으려 하는가의 결단에로 호출하는 것이다. 불트만에게서 역사적 계시사건은 결국 케뤼그마에 집중되어 있다. 그는 '케뤼그마' 개념에 '자기이해'의 개념이 통교한다고 본다. 케뤼그마 속에서 우리를 만나는 하느님의 계시역사(啓示役事)는 우리에게 자신의 새로운 이해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선포가 우리 자신에 관하여 우리의 안목을 새로이 열어주고, 하느님 계시의 빛 속에서 우리 자신을 우리의 구체적 생의 관련 속에서 새로 이해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불트만이 신앙을 새로운 '실존이해' 또는 새로운 '자기이해'라고 일컫기도 하는 것이다.


불트만은 요컨대 신앙만이 성서에서 표현되는 하느님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고, 이에 관해서도 오로지 인간 실존과의 관계속에서만 거론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하느님 역사의 인간 실존과의 관계를 표현하고, 하느님의 계시사건을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끌어들이는 것이 성서의 탈신화론화와 연결된 성서의 실존론적 해석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불트만은 그리스도 신앙에 도전하는 근세의 역사적 사고에 자신을 실존론적 해석의미에서의 신약성서의 탈신화론화 계획을 가지고 내세웠다. 이 계획을 통해서 그는 피안과 차안의 관계, 구세사와 세계사의 관계를 새로 해석하였다. 그는 역사적 사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하느님의 역사적 계시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실존론적 해석의 방법은 불트만에게 있어 신앙의 역사와 하느님과 맺고있는 관계의 동시성을 고수하는 수단을 형성한다고 간주할 수 있다. 불트만의 다음 진술은 이러한 의미로서 받아들여져야 하겠다. "우리 실존에 대한 질문에로 정향되어 있는 이 해석은 실존론적 해석이다. 성서 저서에 대한 이 해석의 비판은 신화론적 진술의 소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해석에 본질이 있다. 이것은 공제과정(Subtraktionsverfahren)이 아니라 해석학적 방법이다."

 

 

2. 실존론적 해석학에 대한 비판적 사유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학은 1941년 발표된 『신약성서와 신화론』이래 개신교 신학계에서 격렬하게 전개된 논쟁이 보여주듯이 긍정적인 수용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사실상 불트만의 해석학은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그 속에는 불트만의 신학적 기본사상인 그의 성서관, 세계관, 인간관, 신관, 그리스도관, 역사관, 종말관, 그리고 신앙관 등 대부분의 주요 신학 주제들이 요약되어 담겨 있고, 이들은 각기 개별적으로 깊이 연구, 토의되어야 할 요소를 지니고 있다. 신학 방법론으로서 불트만의 해석학을 고찰하는 여기서 이들 문제점들에 관하여 충분하게 언급하기란 불가능하다. 이 해석학의 긍정적인 성격과 몇 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수 밖에 없다.


2.1 탈신화론화 계획에서의 불트만의 취지는 시대에 적합한 신학을 위해 정당하고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이 계획이 오늘날과는 상이한 역사적 시대와 상황과 표상 세계 속에 담겨진 복음으로 하여금 해당 이해지평에서 새로이 말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학자 라너도 탈신화론화 계획에서 의도된 바가 올바로, 그리고 동시에 과감히 수행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계시의 요청이 오늘날의 인간으로부터 자신과 자신의 현 존재 조건을 관통하는 것으로 체험되도록 표현하려는 것이 불트만의 탈신화론의 기본 취지이다. 이 취지는 오늘날 절실하게 요청되는 전반적인 그리스도 신학 쇄신을 위해 긍정적으로 수용되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실존론적 해석학에서 '전이해'를 둘러싼 논쟁은 그리스도 신학 해석학의 핵심을 건드리는 문제이다. 바르트는 성서해석에서의 불트만의 '전이해' 적용이 진정하고 올바른 이해를 어렵게 만들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보고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과 그의 전이해로부터 하느님이 무엇을 행하고 말하였는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하는지가 미리 결정되어서는 안된다. 요컨대 인간적 이해의 척도가 하느님 계시를 위한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해석학의 문제는 바르트에게 수위권(首位權), 차서(次序)의 문제이고, 하느님의 계시가 인간적 전이해의 통찰보다 우선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과 자신의 전이해를 자기이해와 모든 이해, 하느님의 말씀과 계시의 척도로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바르트의 견해는 정당하고, 여기에 이의 가 제기될 수 없다. 그런데 이 사실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계시의 말씀이 '말씀의 청자'(H rer des Wortes)로서 인간을 전제하고 인간의 이해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시는 수용될 수 없을 것이고, 계시에 부속된 신앙은 인간의 신앙일 수 없을 것이다.


불트만의 '전이해' 개념은 해석학 일반에서의 소위 '해석학적 순환' 문제와 관련된다. 이해가 문제될 때마다 하나의 순환구조가 제기된다. 해석학적 순환은 이해 속에서 부분적인 것은 전체로부터 이해되고 전체는 자신의 부분적 요소들로부터 이해된다는 것을 뜻한다. 고대 수사학에서 이미 알려지고 쉴라이어마허 이래 해석학에서 명백히 이해구조로 규정된 이 문제가 하이데거에 의하여 심화되고 첨예화되었다. 하이데거는 이해자인 인간을 이 순환에 편입시켰다. "그에게 있어 해석학은 본래 자기 자신을 세계와 역사속에서 이해하면서 주석하는 자의 해석학적 본질에서부터 규정하려는 노력이다. 말하자면 세계 속의 존재자로서 실존은 세계를 자기이해의 지평으로 기획한다. 각 사물내지 사건의 이해는 그 가능성의 조건으로 사전에 이해된 세계전체를 요청한다. 인간의 현존에 대한 전이해는 세계안에서의 실존과 더불어 주어진다는 것이다."


불트만은 이러한 해석학 일반 통찰의 지평에서 '전이해' 개념을 계발시킨 것이다. 그는 세계내 현존자로서 자기자신의 실존에 대한 질문에로 움직이는 인간의 질문성 속에서 하느님에 대한 전이해가 역사적인 하느님의 계시역사와 해후하기 전에 이미 형성되었다고 보고, 이 전이해를 하느님의 역사적 계시이해의 가능성의 조건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앞에서도 소개된 아우구스티노의 말을 인용하는 가운데 이 전이해도 하느님의 주도적 작용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하였다. 그리고 불트만의 '전이해'가 항상 하느님과 실존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역사적 계시와의 해후를 통해서 하느님의 그의 역사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교정되거나 확대되거나 이에 반대하게 된다는 점을 불트만은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면들을 고찰할 때 불트만의 해석학이 인간을 하느님의 계시에 앞서서 이해의 척도로 만든다는 비판은 유연성을 띠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필자의 견해로는 '전이해'가 성서 텍스트 해석에 불가결인 요소이다. 텍스트 해석에서 해석경위를 해석자와 해석된 것과 해석 사이의 관계로 조명하는 과제는 필요하다. 불트만이 숙고된 '전이해'를 가지고 성서해석에 임한 사실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성서의 계시진리는 자연과학의 명제처럼 객관적 검증에 맡길 수 없는 하느님의 자유로운 역사이다. 이로써 역사적 증언으로서의 성서에로의 순전한 대상적 접근이 배제되고 실존론적 이해에 우선성이 주어진다. 내용적 명제진리를 파손하지 않으면서 성서해석에서 신앙진리의 인격적-실존론적 구조에 항상 유의해야 할 것이다. 해석자가 신앙진리와 함께 서는 생의 연관성이 단절된다면 진리는 대상화되고, 신앙이 하나의 순전한 '진실-간주'(眞實看做, F r-Wahr-Halten)로 추락되어 증언의 수용은 외적 긍정으로 머물고, 전(全)실존의 구원 또는 비구원에 관하여 종말론적 언어를 말하는 인격적 결단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 자체'(Deus in se)뿐만 아니라 '나를 위한 하느님'(Deus pro me)의 신학적 의미를 학술방법론적 차원에서 숙고한 불트만의 업적은 신학 발전을 위해서 기념비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2.2  실존론적 해석학의 문제점은 이 해석학이 내용적으로 수행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불트만은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인간 현존재 이해의 표현으로 간주한다. 신약성서들이 세계사건과 세계역사 속에서의 하느님의 역사에 관해서 보고하고, 인간에 관한 신약성서의 진술이 여기서부터 규정되는데, 그는 역전된 길을 취한다. 하느님과 세계와 역사에 관한 진술들을 해석학적 사유에서 차단하고 이들을 순전히 실존이해를 위한 단순한 표현으로 파악하는 것은 성서적 '전이해'를 부당하게 인간학적으로 협소화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인간학이 해석학적 열쇠로 적용되는 데 대한 비판적 사유에 불트만의 실존이해에 대한 비판이 이어져야 한다. 불트만이 성서복음의 관련점으로 지칭하는 실존에는 인간실존에 본질적으로 주요한 사회적 연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바로 양식사학적 연구 인식들이, 신앙의 본질이 얼마나 많이 정신사적 상황과 해당 사회로부터의 예속성 속에서 보여져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사적(史的)으로 제약된 성서복음의 형식에서부터 무시적(無時的) 핵심을 분리시켜서는 순전한 실존성 속에서의 인간과 대결시킬 수는 없다. 여기서는 극복된 객관주의가 (불트만이 지향하는) 순전한 실존성의 다른 그릇된 형식으로 대치될 뿐이다.


불트만에 의하여 대변되는 실존개념에는 육신성(肉身性)의 참된 의미가 결여되어 있다. 인간의 육신성이 사회를 가능케 하는 소인으로 이해될 때, 불트만 신학에서의 인간은 단독자로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고립된 자로서 보여진다는 것이 드러난다. 인간실존의 본질적 규정성으로서 사회적 연관성과 육신성이 배제될 때 역사적 구체성과 책임성 속에서의 실존성취는 종내에 가서는 감축된다. 단축된 이 실존개념으로 말미암아 성서의 많은 진술들이 세계속에서의 신앙생활을 위하여 더 이상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실존개념의 견지는 필연적으로 현재를 독점적으로 강조하고 탈종말화에 이르게 된다. 불트만의 해석학은 이미 언어화된 인간실존 가능성에 대한 질문만을 제기하고, 성서적으로 볼 때 일차적 질문인 미래 가능성에 대한, 전적으로 온전한 새로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약속은 조급하게 충만에로, 미래는 현재에 의하여 흡수되어버린다. 현재가 미래로 들어올려지면 신자는 진정한 구세사를 모르고 탈세계자(脫世界者)로서 이미 종말론적 실존 속에서 생활한다. 자연과 역사는 인간실존의 구현을 위한 진정한 소인이 되지 않는다.
불트만의 해석학은 성서 텍스트와 현대 인간과의 역사적 간격이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 출발한다. 그는 이 역사적 간격을 성서의 요청성격과 이로 말미암아 호출된 인간실존을 통해서 극복하려 한다. 그러나 이 처리과정은 간격을 뛰어넘는 것을 뜻하고, 불트만이 비역사적으로 문제를 처리한다고 보아야 한다. 역사적-육신적 차원을 지닌 인간의 역사적(歷史的)-육신성 구조를 하느님과의 직접적 관계를 위해서 뛰어넘는 것은 타당치 않다. 실존과 대결하게 되는 케뤼그마도 항상 이미 주석이 된 '무엇에 대한' 케리그마이다. 성서의 역사적 내용과 분리된 케뤼그마란 생각할 수 없다.


성서해석은 성서의 원천에서부터 교회의 전승속에 자신을 세우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교회는 신자들의 공동체로서 신약성서 형성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다. 성서는 교회속에서 생성되었다. 교회는 계시사건의 요청이 항상 새롭게 청취되기 위해서 항상 이미 청취되었던 영역이다. 성서의 주석이 문제가 될 때 해석은 성서가 교회의 책이고, 교회의 공간 속에서만 자신의 진술력을 온전히 계발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질문의 지평으로서 항상 교회의 가르침과 교회의 복음선포가 나타나야 한다. 성서주석의 '전이해'는 구체적으로 성서가 맡겨져있는 교회의 복음선포이다. 이 때문에 가톨릭 신학은 개인주의적-실존론적으로 정향된 불트만의 해석학에 대하여 교회와 전통의 본질적이고 대치될 수 없는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가톨릭 신학의 해석학적 원리를 충분히 제시할 수는 없다.

 

 

3.  E. 푹스와 G. 에벨링의 언어사건적 해석학

 

   불트만의 제자들인 푹스(Ernst Fuchs)와 에벨링(Eberhard Ebeling)은 불트만에 의해 특유하게 발전된 신학적 해석학의 취지를 주로 후기 하이데거의 언어철학적 사유에 의거하면서 한걸음 더 이끌어 나갔다. 이들에게서 신학은 그 본질에서부터 해석학으로 규정된다. 그래서 계시와 신앙은 '언어 사건'(Sprachereignis) 및 '말 사건'(Wortgeschichte)으로 규정되어 소위 '언어의 신학', '말씀의 신학'이 계발되었다.

 

   3.1. 푹스의 언어사건적 해석학 


   푹스(1903-1983)에게 있어 해석학은 신학영역에서 신앙의 언어론이다. 그에게서 해석학은 그리스도 신앙이 왜 텍스트에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는지를 제시하고, 텍스트가 이해될 수 있는 조건들을 구명하는 작업이다.
   푹스는 신학을 표준적 텍스트로 보아서 본시 '언어운동'으로 파악한다. 신학은 개념상 말씀과 관계가 있다. 하느님의 역사는 말씀으로써 발생하였고 그 안에서 '객관화'되기도 하였다. 이것이 우리를 위해서 어떻게 '언어'와 '이해'로 이끌리게 되는가가 신학적 해석학에서 늘 문제가 되는 점이다. 푹스에게서 자기이해에 관한 결단은 언어에 관한 결단으로 성취된다. 이 도정에서 언어는 인간의 자기이해를 위해 본질적이다.
   그런데 푹스에게 있어 언어는 본시 사랑의 언어이다. 하느님은 사랑하는 분이고 사랑은 존재에 속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전제 중 하나는 동의(同意, Einverst ndnis)이다. "사랑과의 동의는 그렇지 않으면 폐쇄되어 있을 세계를 개방시키는 시선을 열어 보인다." 이러한 사랑의 언어는 공속성(共屬性)을, 가까움을 이룩하게 마련이다. 사랑하는 분이 이야기를 걸면서 나를 그의 자리에 세워 나는 하느님의 사랑하는 언어운동 속에서 나 자신의 이해에 이르게 되어 내가 다른 경우에 흔히 쉽게 상실할 수 있는 '본래성'(本來性)을 얻게 된다. 성서 텍스트를 사랑하는 분의 언어로 파악한 자만이 비로소 성서 텍스트 이해에 이르고 텍스트와 자기 자신의 올바른 주석에 이른다고 푹스는 보고 있다. 여기서도 '해석학적 순환' 관계가 형성된다. 푹스는 텍스트를 '삶에로 개입하는 결단의 사건'으로 생각한다. 해석학은 '텍스트가 어떻게 물어져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과제를 지닌다. 그래서 해석학적 사유는 텍스트가 말하게 되는 지평을 정리한다.
 

  푹스는 이렇게 이해된 신앙의 언어론에서 시간이 수행하는 기능에 관해 언급한다.  "계시를 하나의 정지된 공간과 외견상으로만 경과하는 듯한 시간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통하여 공간과 시간이 길과 경위의 운동으로부터 우리를 위한 공간과 우리를 위한 시간으로 이해될 수 있는 곳으로 되돌려 옮기는 것이 관건이다." 이를테면, 푹스에게는 시간이란 사랑이 이룩해주는 '우리를 위한 시간'이다. 그러기에 푹스에게는 사랑이 해석학적 원리가 된다. 오로지 사랑하는 자만이 하느님과 그분의 텍스트를 이해한다. 그 자신이 먼저 사랑받는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석학에서 하나의 생동적인 일이 발생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해석학적 원리란 이해에 진적시키는 힘과 진리를 부여하는 것을 일컫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푹스는 해석자가 하느님과 그의 텍스트도 일차적으로 이성(理性, Ratio)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역사속에서 이끄시는 대화를 통해서 이해한다고 보는 것이다. 

   푹스의 이러한 통찰 안에서 이해는 시간과 체험을 필요로한다. 그래서 마침내는 하느님의 텍스트의 '빛'속에서 주석된 해석자 자신의 역사가 해석학적 원리가 된다. 여기서 푹스는 '전이해' 개념을 이해자와 주석자에게서 찾고 있는 불트만의 입장을 넘어선다. 푹스는 사랑의 언어로 이해된 하느님의 '언어' 안에서 해석자가 전이해자가 아니고 하느님이며, 해석자는 하느님의 의하여 전-이해된 자라고 본다. 이렇게해서 푹스의 해석학에서 '실존론적 해석'은 일종의 방향선회를 드러낸다. 푹스에게서 성서의 텍스트는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사랑의 담화로써 주석한다. 이처럼 성서 텍스트는 언어가 되고 언어는 선물로 보여진다.
   푹스에 따르면, 신학적 해석학에서 일차적으로 관건이 되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과 그분의 텍스트에 의하여 질문받은 자가 아니라, 담화의 상대방이 된 자라는 사실이다. 그에게서 해석학적 문제는 올바른 언어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실존의 역사성이 그에게서는 실존의 언어성으로 제시되고 해석학이 신앙의 언어론으로 파악된 것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신앙진술도 근본적으로 단순한 전승이 아니라 하느님이 인간을 향해 한 말인 언어의 지향적 구조에 참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사건은 결국 언어 사건이라고까지 일컬어지게 된다.

 

   3.2  에벨링의 말사건적 해석학


   에벨링(1912-)에게서도 훅스와 유사한 입장이 개진된다. 일반적으로 해석학이 연사 사건이나 말 사건으로서 이해를 열게하는 이해론과 말의 이설(理說, Lehre vom Wort)이듯이, 신학적 해석학은 '하느님의 말씀론'으로 규정되고 해석학의 대상은 '말 발생 자체'로 파악된다.
   하느님의 말씀은 일반적인 말들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특별한 실재가 아니라 '본시 진실한 궁극적 말씀이다.' 신학적 해석학에서도 일반적인 해석학의 주제 자체인 말로서의 말과 이해로서의 이해가 문제된다. 따라서 진리를 둘러싼 투쟁에서는 신학적 해석학이 비신학적 해석학과 겨루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해석학의 대상은 말 사건 자체인데, 이것은 텍스트와 동일하지 않다. 텍스트는 스스로를 위해서 존재치 않고, 텍스트의 유래(由來)이며, 미래인 '말 사건' 때문에 있다.  


   이러한 에벨링의 견해는 내용에 대한 물음과 말의 능력이 동일했던 고대 이스라엘의 특유한 말 이해와 합치한다. 그래서 말의 진술 기능은 에벨링에게서 평가절하된다. 진술은 여기서 추상적 유형의 말 사건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말의 기본구조는 진술이 아니며 정보(Information)나 의사소통(Kommunikation)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통교의 의미로서의 전달이다. 말의 기본구조는 전달통지(Mitteilung)라는 것이다. 에벨링은 전달로서의 말은 순전한 '이해수단'이 아니라, 말이 올바로 생기는 곳에 실존이 조명된다고 간주한다. 이 견해는 후기 하이데거에게서 볼 수 있는 바, 이해와 언어의 '재래양식'이라고 낙인찍히는 객관화하는 진술과 반대로 '실존의 개현'으로서 전달의 해석과 일치한다. 실존은 전달하고 개현하는 말로서, 말과 언어는 본시 그 본질을 약속에 두고 있다. 그래서 에벨링은 전달로서의 말은 약속(Zusage)이라고 말한다. 말의 이 본질은 연사자가 자신의 말을 통해 신앙을 일깨우는 가운데 말을 통해서 자기 자신에게 약속하고 타자에게 미래를 약속하는 속에서 순수한 충만에 이른다는 것이다.  말과 언어의 의의를 복음 속에서의 하느님의 약속이 채운 것으로 에벨링은 보고 있다. 하느님의 약속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은 바로 말 자체로서 진실되고 궁극적인 말씀이라는 것이다. 에벨링은 이러한 말씀이 발생하는 본연의 장이 해석학적 원리가 드러나게 되는 장이고 이를 인간 양심(良心, Gewissen)이라고 규정한다. "해석학적 원리는 양심으로서의 인간이다."(Hermeneutisches Prinzip ist der Mensch als Gewissen.)


   에벨링은 말과 언어의 의의를 복음속에서의 하느님의 약속이 채운 것으로 보고 있다. 하느님의 약속으로서의 하느님의 말씀은 바로 말 자체 즉, 진실되고 궁극적인 말씀이다. 에벨링에 의하면 복음은 실존을 개현하고 미래를 열어주는 말로서 미래를 폐쇄시키는 법률의 말과 대치한다. 에벨링에게서 언어의 의의는 푹스에게서처럼 윤리적 문제성과 배타적으로 연관되어 개신교 특유의 복음과 율법의 기본구별과 동일한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불트만에게서 실존론적 해석은 이미 실존의 본래적, 비본래적 자기이해의 양자택일을 지향하고, 이 양자택일은 불트만에게서 개신교적 복음과 율법의 교리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의 제자들인 푹스와 에벨링은 케리그마의 호출을 언어의 본질과 연결시킴으로써 이 기점을 더 발전시켰다. 이들에게서 언어는 본래의 의미에서 실존을 개현하고 가능케 하는 '전달'로 파악되었고, 하느님의 면죄와 약 속의 복음은 언어의 본래 본질로 규정되었다. 그에 따라 본래성 현시의 형식적인 실존개념이 그리스도 복음의 구체적인 내용과 동일시되기에 이른 것이다.

 

   3.3  평가


   불트만의 제자들인 푹스와 에벨링은 후기 하이데거의 노선에서 존재의 사건으로서의 언어이해로부터 출발하는데 그들에게서도 역사의 객관성은 별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여기서도 하느님을 위해 자신을 개현하는 인간 실존의 자기성취가 관건이 되고 있다. 언어의 본질이 과실과 사죄의 체험에 있다는 이들의 명제는 언어구조와 언어내용의 다양한 구체적 차원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언어를 해석하려는 노력 가운데에서도 진술의 전영역과 언어의 상이한 사항들이 실존전달 기능에로의 배타적인 조건 때문에 희미하게 된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진술의 형식에 대해서는 인간언어에 있어 아무런 본질적 의미도 인정치 않으려 했던 것과 상통하고 있다. 하지만 언어사건의 분석에서 진술 기능의 후퇴가 필연적으로 언어와 이해의 본래성과 비본래성에로의 형식적 환원을 뜻하지는 않고 있다. 실존론적 철학에서는 특히 이 형식적 양자택일이 본래적 실존의 개현으로 해석되는 특정한 역사적 전승과 유대되어 있지는 않다. 이것은 실존론적 해석학적 신학의 특수징표로 나타난다. 이 신학은 인간실존의 본래성 현시의 형식개념을 그리스도 복음의 구체적, 역사적 내용과 동일시 한다.
   이 신학에서의 기점은 항상 인간적 실존이고, 결정적인 해석학적 원리는 하느님께 대한 질문으로서의 인간 실존이다. 인간실존에서 비롯하는 기점과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물음과의 직접적인 동화는 신앙생활을 주관주의와 개인주의로 이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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