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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8-21
 제목  판넨베르그의 보편사적 해석학
 주제어  [판넨베르크]
 자료출처  김이태 교수  성경본문  
 내용  

판넨베르그(W. Pannenberg, 1928- )는 약관 30세에 교수가 되어 60년대부터 세계적 명성을 얻고, 65세에 정년은퇴할 때까지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활약한 개신교 신학자이다.1) 그는 금세기 20년대부터 거의 반세기에 걸쳐 서구 개신교 신학계를 지배하던 ‘말씀의 신학’으로부터 주도권을 이어받아 현대 신학사조의 주류를 이루는 ‘역사의 신학’을 정립한 바있다. 판넨베르그 신학사상의 특징은, ‘성서’에로만 정향하여 그리스도 신앙의 특수성 내지 절대성을 제시하는 데 주력을 경주하는 개신교 신학자들의 일반적 경향과는 달리, 실제로 발생한 ‘역사’(歷史)에로 정향하여 그리스도 신앙의 보편성을 제시하려고 진력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 신앙의 보편성 요청은 사도적 교부시대부터 제기되어왔다. 판넨베르그는 이 보편성 요청의 타당성을 신학 방법론적 사유안에서 제시하려고 시도하는 데에서 학자로서의 치밀성을 보여준 바 있다. 판넨베르그의 신학사상은 현대 역사적 상황속에서 그리스도 신앙의 보편성 요청을 적절하게 제시하는 시범적 시도라고 간주 할 수 있다. 60년대 신학계에 사상적 전환을 이룩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판넨베르그의 해석학적 입장을 파악하고자 한다. 주로 70년대까지 발표된 작품분석을 통해서 그의 해석학적 통찰을 구명하려고 한다. 우선 판넨베르그 해석학의 기본 취지를 파악하고, 이어서 그의 해석학의 방법원리를 이해하고자 시도할 것이다. 그리고 판넨베르그 신학사상의 중심이자 해석학의 지평으로 규정되는 ‘보편역사’의 실상을 구명한 뒤에 비판적 사유를 간단히 첨가하고자 한다.


1. 판넨베르그 해석학의 기본 취지


신학자로서의 판넨베르그의 해석학의 기본입장은 현대 해석학적 통찰의 지평안에 위치한다. 그에게 있어서 신학적 해석학의 문제 설정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 개재하는 역사적 간격(歷史的 間隔) 내지 상위성(相違性)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대한 물음에서 생겨난다. 신학적 해석학은 역사적으로 유일회성을 지닌 과거의 계시사건이 오늘날 어떻게 인간을 만나고 어떻게 이 현대인을 위한 현실적 구원의 진리가 될 수 있는가를 구명하는 과제를 지닌다.

신학은 하느님의 역사적 계시의 현실화를 위해 진력하는 가운데 이중적 역사적 간격을 오늘날에 와서 점차적으로 더욱 분명하게 의식하게 되었다. 신학은 과거의 계시사건 자체와 이에 대해서 보도하는 성서적 증언 사이에 개재하는 간격에 대해서도 더욱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다. 판넨베르그는 오늘날 그리스도 신학이 처해있는 새로운 문제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다. “사실과 의미 사이의 괴리, 역사와 케뤼그마 사이의 괴리, 예수의 역사와 이에 관한 신약성서의 다채로운 증언들 사이의 괴리가 현 신학의 문제성을 일면을 드러내고 있다. 다른 편에서, 우리는 신약성서 텍스트의 사고세계와 우리 자신의 현재 사이에 개재하는 엄청난 괴리를 발견하게 된다. 현대 해석학은 이와 같이 전적으로 변모된 상황속에서 변모하기 이전의 내용을 반복하는 역사적인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2)

판넨베르그 해석학은 ‘말씀의 신학’의 해석학, 특히 불트만계열의 ‘실존론적 해석학’과의 쟁론관계 속에서 그 특성을 잘 드러낸다.

바르트나 불트만처럼 ‘말씀의 신학’을 전개하는 신학자들은 하느님의 계시사건을 구체적 역사안에 정초하지 않고 신학을 전개하였다. 판넨베르그는 이러한 ‘변증법적 신학’이나 ‘실존론적 신학’과 같은 ‘말씀의 신학’의 해석학적 입장을 비판한다.3) 그는 하느님의 계시사건을 애당초부터 인간의 실존성취와 관련시켜서 파악하고, 인간의 물음과 하느님에 대한 물음을 동일시하는 것은 신앙의 주관주의와 개인주의에로 이끈다고 지적한다. 여기서는 과거의 당시와 현재 사이에 개재하는 역사적 상위성의 문제가 진지하게 고려되어 있지 않으며, 세계 안에서 현실적으로 발생한 역사(歷史, Geschichte)가 인간의 역사성(歷史性, Geschichtlichkeit)에로 용해되어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구체적인 세속역사(Profangeschichte)와 ‘구세사’(Heilsgeschichte)를 구별하는 쿨만(O. Cullmann, 1902- )등이 전개하는 재래의 ‘구세사적 신학’이나 ‘말씀의 신학’이 해석학적 문제 설정의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라고 보고 ‘보편역사의 신학’의 정립을 요청하고 나선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사실과 해석 사이의 상위성을 역사적 인식의 차원에서 초극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해석과 역사비판적 지식을 보편역사 안에서 화해 내지 조정하고자 시도한다. 여기서 판넨베르그는 사실(Faktum: 경험과학의 대상)과 의미(Sinn), 또는 가치(Wert: 윤리학과 형이상학의 대상)를 분리하였던 칸트의 유산을 버리고 이를 통합시키려 했던 헤겔(G. W. F. Hegel, 1770-1831)의 노선을 따른다.4) 판넨베르그는 한 역사적 사건이 역사의 맥락 내지 관련성 안에서만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역사 외부로부터의 해석에 의존함으로써 역사로부터 결코 헤어날 수 없음을 간파하고 보편역사를 역사적 사건이해의 지평으로 규정하게 된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보편역사를 해석학의 지평으로 규정하는 데 있어서, 그의 스승인 하이델베르그(Heidelberg) 대학교의 구약학자 폰 라드(G. von Rad, 1901-1971)가 정립한 바 있는 전승사(傳承史, Überlieferungsgeschichte)개념을 원용한다.5) 폰 라드에게 있어서 역사는 하느님에게서 발해진 약속과 실제로 이루어진 성취가 긴장속에서 펼쳐지는 전승사건의 과정이다. 전승사는 전승들의 계승 속에서 사실과 그 의미가 교합되어 진행하는 과정인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폰 라드처럼 실재적 역사(Wirkliche Geschichte)와 해석된 역사(Gedeutete Geschichte)를 대치시키는 실증주의적 역사관을 거슬러 사실과 그 의미의 원천적 통합을 주장한다.6) 판넨베르그는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학’에 나타나는 역사적 해석학과 신학적 해석학의 이원론에 반대하고 두 해석학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과거에 발생한 사건을 역사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판넨베르그는 현대 신학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 사실과 의미,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이성과 신앙 사이의 상반성 내지 괴리를 ‘보편역사적 해석학’의 입장에서 해결하려는 것이다. 과거 역사적 사건 속에서 발생한 하느님의 계시에로 접근하는 길은 실존이나 초역사에로의 길이 아니고 역사적 탐구의 길밖에 없다고 보고, 역사적 사실에서 하느님의 역사(役事)를 제시하려는 노력에서 우리는 실존론적 해석학과 구별되는 판넨베르그 해석학의 특유한 취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해석학적 취지는 그리스도 신앙이 내세우는 보편성 요청의 타당성을 하느님 계시의 장(場)인 역사속에서 제시하려는 신학적 취지로부터 나온다고 볼 수 있겠다.


2. 판넨베르그 보편사적 해석학의 원리


판넨베르그는 1963년에 발표한 저명한 논문, “해석학과 보편역사”(Hermeneutik und Universalgeschichte)에서 자신의 해석학적 입장을 체계적으로 개진한다.7) 그는 여기서 과거와 현재사이에 개재하는 역사적 상위성을 극복하려는 현대 해석학에서의 노고를 고려하고, 특히 전승사적 내지 ‘영향사적 해석학’을 전개하는 하이델베르그의 철학자 가다머의 해석학적 통찰을 비판적으로 원용하면서 그 나름의 고유한 해석학적 입장, ‘보편사적 해석학’을 정립하고자 시도한다. 그가 가다머의 해석학적 통찰에 거의 결정적으로 의존하기는 하지만, 가다머가 전승된 텍스트의 해석을 하나의 ‘대화’와 비견하고, 언어의 진술 기능을 부정적으로 평가는 데 대해서는 이견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판넨베르그는 언어의 대상관련성(Gegenstandsbezug)과 언어와 사회적 생활의 유대관계를 깊이 통찰하고 언어의 진술 기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 1889-1951)과 분석적 언어철학의 입장에 동조하고 있다.8) 판넨베르그가 현대 정신과학자들이 전개하는 해석학적 제이론을 자신의 해석학적 사유에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음은 1973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 『과학이론과 신학』(Wissenschaftstheorie und Theologie)에서도 역력히 발견할 수 있다.9)

판넨베르그는 가다머의 해석학적 통찰에 의지하면서 현대인에게 도전해오는 과거사건의 역사적 상위성은 이질적인 그대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는 신약성서의 저서들도 일차적으로 하느님에 대해서 보도하고, 그리고 세계와 그 역사의 사건들 안에서의 하느님의 역사를 보도하며, 인간에 대한 성서의 보도들 역시 하느님과 그의 역사에 대한 보도에 의해서 규정되는 데 비해서, 불트만은 역전된 관점을 지니고 있음을 비판한다. 판넨베르그는 불트만의 제자들인 푹스와 에벨링의 언어사건의 해석학 역시 역사를 인간의 역사성 안에로 용해시키는 실존신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해석학의 역사적 상위성의 문제를 적합하게 처리하였다고 보지 않는다.10) 판넨베르그는 가다머가, 1960년에 출간된 역저 『진리와 방법』(Wahrheit und Methode)에서 과거와 현재사이에 개재하는 역사적 상위성의 문제를 진지하게 취급합으로써 해석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결정적인 진보를 이룩하였다고 본다. “가다머는 해석되어야 할 텍스트의 역사적 상황과 해석자의 현재 사이에 개재하는 상위성이 효력을 발할 수 있도록 진력한다. 바로 이 상위성이 현재의 이해를 향한 텍스트의 요청을 표현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가다머에게서는 좁은 의미에서의 해석학적이고 역사적인 동기들이 서로 삼투(滲透)한다. 여기서 역사적 상위성은 이해경위 자체를 위해서 결정적인 의미를 획득한다.”11) 판넨베르그는 실존론적 신학의 입장과는 달리, 과거와 현재의 역사적 상위성을 지양하지 않고 그대로 존중하면서, 두 지평을 포괄하는 하나의 포괄적 지평이 이룩되는 가운데 이해가 형성된다는 가다머의 통찰에 전적으로 동감하고 있다. 그런데 판넨베르그는 이해성취에서 요청되는 포괄적인 지평을 보편역사로 규정함으로써 가다머의 해석학의 입장을 벗어나서 그 나름의 ‘보편역사의 해석학’을 정립하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2.1  ‘지평융합’으로서의 이해규정

판넨베르그는 해석학에서 관건이 되는 ‘이해’(Verstehen)를 규정하는 데에서 가다머의 통찰을 원용한다. 가다머는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 그리고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기점을 넘어서 그 나름의 해석학적 입장을 정립하였다.

2.1.1 가다머는, 앞에서 살펴 본 바처럼, 이해의 해석학적 순환구조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모든 이해, 따라서 모든 해석(解釋, Auslegung)과 전달에서 작용하는 ‘전이해’ 개념을 그 나름대로 규정하고 있다.12) 가다머는 인간 현존재가 미래의 가능성을 지향하여 기투된 존재일 뿐 아니라, 먼저 과거로부터 유래하는 존재임을 해석학적 사유에서 진지하게 취급한 것이다. 가다머는 역사가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역사에 속하여 있다고 보면서, ‘선입견’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전승역사로부터 전래되어 현존재를 규정하는 ‘전이해’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이해 자체도 주체성의 행동이라고 생각하기보다,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중재되는 전승과정에로 들어서는 것으로 생각하자는 것이다.13)

인간의 전이해는 그가 유래하는 전승으로 말미암아 제약되어 있기 때문에, 가다머에 의하면 해석학적 순환은 ‘이해를 전승의 운동과 해석자의 운동의 교환관계’로 파악된다.14) 그리고 참된 이해란 텍스트에서 거론되는 사상(事象)과 제휴되어 있어야 하고, 전승에 접속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인간이 전승과 항상 똑같이 친숙하지는 않다. 전승은 이타성과 친숙성 사이에서 고유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 ‘사이’ 안에 해석학의 참된 장(場)이 있다고 가다머는 보는 것이다. 여기서 해석학 일반의 중요문제, 시간적 간격의 역사적 상위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문제는 해석자가 자신을 저자와 그의 작품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시간적 간격을 어떻게 극복하고 이해를 성취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가다머는 텍스트의 역사적 상황과 해석자의 현재 사이에 개재하는 간격 내지 상위성을 지양시킬 것이 아니라, 이를 의식적으로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면서 연결시키는 이른바 ‘지평융합’을 형성케함으로써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15) 지금 전승된 텍스트를 해석하려는 해석하려는 해석자의 역사적 지평과 과거의 텍스트의 지평은 우선 동일하지 않다. 두 지평의 상위성을 확인하는 것이 해석경위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해석자의 현지평은 고정, 경직되어 있지 않고, 변화내지 확대가 가능하다. 이해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해석자의 지평에 있어 처음에는 낯설고 이질적이던 실재가 그 지평과 함께 해석자에 수용될수 있을 정도로 그의 현지평이 확대된다고 가다머는 본다. 이러한 과거의 지평에로의 입장전치는 해석자가 자신의 부분성뿐만 아니라, 해석해야 할 낯선 텍스트의 부분성을 극복하는 ‘보다 높은 일반성에로의 고양’을 의미한다는 것이다.16) 이렇게 지평의 융합이 이루어질 때 전승이 비로소 해석자에게 이해될 수 있다. 이해란 결국 서로 연결되어 있는 두 지평의 융합이 이루어지는 경위인 셈이다. 가다머는 이렇게 이해를 ‘지평융합’으로 파악함으로써 역사적 사고를 해석학의 원리 정립에 수용하고 있다.

가다머는 이러한 이해경위가 성공적인 대화 속에서 발생한다고 본다.17) 대화자들은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가운데, 대화가 시작되기 이전의 상태에 머물지 않고 서로의 공동적인 상태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대화가 시작될 때의 대화자의 부분적인 지평들이 새롭고 포괄적인 지평에로 고양되는 지평융합이 성공적인 대화 속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2.1.2 이 점에 있어 판넨베르그는 가다머와 견해를 달리한다.18) 판넨베르그는 방법적으로 성취되어야 하는 해석은 대화 속에서 생기는 것과 같은 비사유적 이해와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본다. 대화가 성공적이어서 대화자들이 서로를 이해할 때에, 이러한 이해를 성취케 하는 포괄적인 지평은 반드시 명시적으로 주제화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대화 속에서는 부분적인 개별주제에 관해 이해가 이루어짐으로써, 전체적으로 서로 의사가 소통됨을 나타내고자 한다. 개별주제에서 이루어지는 이해는 이를테면 전체안에서 이해가 이루어짐을 가늠하는 텍스트가 되는 셈이다. 대화자들이 서로 동의하게 되는 실재 전체가 명시적으로 대화의 주제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석을 방법론적으로 전개해 나갈 경우에는 이해경위가 명시적으로 사유되어야 한다고 판넨베르그는 보고 있다. 해석의 적정성 여부는 이해경위의 명시적 사유를 통해서만 검토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전승된 텍스트의 사고세계와 구별되는 해석학의 사고세계가 각기 나름의 위치를 지니면서도 서로 관련을 맺을 수 있게 되는 하나의 종합을 구하고, 하나의 포괄적인 이해지평을 명시적으로 정식화할 것을 요청한다. 그래서 이 포괄적 지평이 텍스트의 지평과 함께 해석자 자신의 지평까지 함께 포괄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검증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해석자 자신의 삶은 이 포괄적 지평 안에서 성취되는데, 이 지평을 정식화하려는 노력은 전승된 텍스트를 방법론적으로 해석하라는 요청 이외에 다른 근원을 지닐 수 있다고 판넨베르그는 보는 것이다.19)

판넨베르그가 여기서 뜻하는 다른 근원이란 진리 전체를 추구하려는 인간의 기본자세를 말한다. 사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삶의 전체성을 실재의 전체성과 유대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실재의 전체성을 의식하고자 추구함으로써 비로소 실재의 전체성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대화 속에서 이해가 이루어질 경우에도 그 추진력은 하나의 진리를 추구하는 데 있다. 이것은 하나의 진리가 만사를 포괄하는 진리로서의 주제가 되지 않을 때에도 그러하다. 진리의 단일성을 추구하려는 동일한 노력이 포괄적인 지평을 기획토록 추진하는 것이다. 방법론적인 텍스트 해석의 특수 요청이 이러한 지평의 기획을 촉구하는 것은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전승된 내용의 방법론적 해석이 실재를 전체로서 이해하려는 인간의 기본과제에 참여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해경위에서 결정적인 사항은, 새로 기획된 지평은 텍스트의 ‘어떠한 것’뿐만 아니라, 텍스트의 복합적인 전체 실상을 함께 포착할 수 있기에 충분해야 한다는 것이다.20)

이제 문제는 역사와 현재의 인간 삶 사이의 조정이 사유적으로 어떻게 가능한가를 밝히는 것이다. 가다머는 현재의 진리를 역사를 통하여 전체적으로 조정하는 헤겔식의 입장은 실현 불가능하다고 보았다.21) 가다머는 역사와 현재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조정의 개방성을 강조한다. 그는 현재의 지평이 항상 체험에 의하여 규정되는데, 이 체험과정은 본시 부정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성숙하고 현명하게 되는 것은 그저 단순하게 체험을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항시 새로운 체험에 개방되어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에벨링은 언어의 진술성격을 언어의 인격적 전달성격에 대치시키고 진술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22) 그런데 가다머는 언어의 진술 기능을 인격적 전달 기능에 대치시키려 하지 않고, 진술을, 언급된 말의 의미와 상황에 적합한 이해를 위한 지평을 형성하는 ‘진술되지 않은 것의 무한성’과 대치시키고자 하였다.23) 그는 진술이 포괄적인 지평을 사라지게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모든 진술된 말은 하나의 무한한, 발언되지 않은 의미 배경을 지닌다는 가다머의 통찰은 이해의 문제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해석학의 일차 과제는, 전승된 텍스트의 말을 그것의 원천적이면서 발언되지 않은 의미연관성에로 전치시키고서, 저자가 우리 해석자에게 전승한 이 텍스트의 말을 작성할 당시의 상황으로부터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판넨베르그는 이러한 작업은 진술된 것의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본다.24) 함축된, 발언되지 않은 의미지평은 진술을 파악함으로써 비로소 이해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다머의 논증은 진술의 발언되지 않은 의미지평에 유의하지 않고 진술을 추상적으로 취급하는 경우에 해당하리라는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가다머의 논증을 따르면, 해석자가 언어의 진술형식을 능가하거나, 진술형식의 뒷전에 처지지 않게 되고, 해석자로서 발언되지 않은 것에 대한 본래의 진술 속에서 함께 작용하는 것을 진술화하게 된다고 본다. 그는 해석이 저자를 이해하려는 한, 바로 해석을 통해서 저자가 텍스트를 작성할 당시 그에게도 무의식적으로 함께 작용하던 모든 것이 비로소 실제로 진술화되고 명시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해석된 텍스트야말로 그것의 의미 지평에 관하여 이전에는 알지 못하던 정도로 객관화된 텍스트이다.”25) 대화에서는 사상(事象)을 언어화, 즉 진술화하는 일이 생겨난다. 사람들은 대화의 주제가 되는 사상 안에서 자신을 알려줌으로써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이 사상관련성은 해석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해석은 대화와는 다른 구조를 지니기는 하나, 여기서도 텍스트의 진술로부터 거기서 뜻하는 사상(事象) 전체를 언어화, 진술화하는 것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가다머는 현재의 진리를 역사를 통하여 전체적으로 중재시키려는 헤겔식 입장으로부터 떠나  결코 하나의 절대지식에로 지양될 수 없는 인간 체험의 유한성을 지적한다. 그런데 판넨베르그는 가다머가 해석학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묘사하는 현성들은 기묘하게도 그가 바로 회피하려는 보편적 역사관념의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지적한다.26) 이 점은 가다머가 해석학적 사건을 ‘지평융합’으로 새로 정식화하는 데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텍스트를 해석할 때에, 해석자는 텍스트의 당시와 저자의 현재 사이에 개재하는 역사적 상위성이 해석학적인 가교가 놓여짐으로써 보전되어 머물고, 텍스트의 배후에서 언급되지 않은 의미지평 즉, 텍스트의 역사적 상황에 대해 물어야 하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텍스트가 생겨난 역사적 지평을 계발할 필요가 있다고 판넨베르그는 말한다. 그리고 텍스트의 역사적 상황이 해석자의 현재와 사리적(事理的)으로 연결되는 길은 텍스트가 작성되기에 이른 당시의 상황과 현재 사이에 개재하는 역사의 연관성을 묻는 길뿐이라고 그는 보고 있다. 판넨베르그는 텍스트의 이해는, 당시를 현재와 연결시키되, 오늘 당장 현전하는 것뿐만아니라 현재 가능한 것의 미래지평과도 연결시키는 전체 역사와의 연관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현재의 의미는 미래의 빛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상황을 현재의 상황과 함께 미래의 지평과도 함께 실제로 연결시키는 역사관만이 해석자의 제약된 현재지평과 텍스트의 역사적 지평을 융합시키는 포괄적인 지평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당시의 현재가, 서로의 역사적 고유성과 상위성이 포괄적 지평 속에서 서로 존속하면서, 둘 모두를 포괄하는 역사연관성의 단일성 안에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가다머는 전승된 것의 언어성의 체험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세계역사의 철학의 사변적 주장’을 회피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판넨베르그는 가다머의 이러한 입장은 난점을 지닌다고 보고 있다.27) 이해는 항상 텍스트 안에서 진술된 사상(事象)을 통하여 중재된다. 그러나 이 사상은 텍스트 속에서, 해석자의 현재지평이 아니고 텍스트가 생성된 역사적 상황과 함께 연관된, 언급되지 않고 머문 지평의 전체 안에서 언어화된다. 이렇게 해석자와 텍스트 사이의 관계의 언어성에 대한 사유는 지평융합을 통해서 메워져야 할, 두 지평의 역사적 상위성의 문제로 이끈다. 판넨베르그는 이 관계의 언어성에 대한 사유만으로는 이 상위성의 간격을 메울 수 없다고 본다. 간격을 메우는 것은 진술된 사상이 역사적 실재임이 시야에 드러남으로써 진술된 사상의 영역 자체에서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8)


2.3 보편사적 해석학의 정립 요청

판넨베르그는 진리개념 자체를 본질적으로 역사로 파악하고 있다.29) 그는 진리를 상대적으로 해소시키려 하지 않고, 진리의 단일성을 각 사상(事象)의 시간을 초월한 동일성으로 생각할 수 없음을 말하고자 한다. 진리는 역사의 흐름의 전체로서 포착될뿐이라고 그는 보고 있다. 인간이나 자연, 건축, 법률 등에 대한 추상적 일반 개념만이 시간을 초월하여 동일하게 생각될 뿐이며, 이 시간을 초월한 일반성에 이의 추상성과 긍정적 진리가 위치한다는 것이다. 이 일반 개념들은 이 개념들이 뜻하는 사상(事象)의 역사에로 지양됨으로써 비로소 본연의 진리에로 이를 수 있다고 판넨베르그는 말한다. 그는 모든 인식이 사상에 대한 추상적 일반적 개념으로 시작하나, 이러한 시초의 추상적 표상들은 사상들의 역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개별화되어 이해되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판넨베르그는 가다머와는 달리 이처럼 한 텍스트의 사상이해는 이 사상의 역사의 기획을 요청한다고 주장한다.30) 이러한 기획의 지평 속에서만 역사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제약된 텍스트의 사상전망들과 해석자의 현재의 사상전망들이 사리적으로 서로 관련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각기 다른 사상영역들이 서로 함께 속하기 때문에, 해석학적 과제는 이러저러한 특수한 사상영역의 역사의 기획뿐만 아니라, 상이한 모든 사상영역의 변화하는 관계를 포괄하는 보편역사의 기획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보편역사의 맥락 안에서만 텍스트의 ‘당시’가 해석자의 ‘오늘’과 비로소 연결되어 이들의 시간적이고 역사적인 상위성이 말소되지 않고, 이 둘을 연결시키는 역사의 연관 속에서 보전되면서 가교가 놓이게 된다.”31)

판넨베르그는 가다머와 함께 사람들이 전승된 텍스트를 대하고 탐구하는 본래의 주된 관심은 해당되는 사상의 현대 전망이 의문스럽다는 점에 근거한다고 보고 있다.32) 그래서 전승된 텍스트들은 해석자의 현재의 사상이해와 관련하여 해석자 자신과 상관하다는 것이다. 문제되는 사상의 진리가 현재의 전망 속에서도 아직 궁극적이고 절대적으로 소여되어 있지 않고 의문스럽게 머물고, 앞으로의 체험에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전승된 텍스트 역시 현재의 전망 속에서도 가치를 드러내지 않은 사상의 새로운 면모에 유의하라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승된 텍스트가 자신의 역사적 의미로써는 현재 사상의 문제성을 해결치 못한다 하더라도, 문제를 보다 훌륭하고 독창적으로 해결하도록 자극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승된 텍스트를 목전에 현전하는 사상의 지평과 관련시킬 뿐만 아니라. 현재의 미래지평과도 관련시킴으로써, 현재의 사상이해의 문제성과 관련시켜서 사상에 대한 현재이해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게 하는 해석학적 요청의 의미라는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가다머의 이러한 견해 속에서 불트만의 영향을 느끼고 있다.33)

보편사적 해석은 전승된 텍스트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 텍스트의 배후를 추적하여, 여기서 추구된 사실 내지 사건을 해석자의 현재까지도 포함시켜서 보편사적 의미연관성 속에서 구론하는 것이다. 이처럼 보편사적 해석양식은 일종의 우회로를 택한다. 즉 해석자가 텍스트의 배후에로 우회하여 텍스트에 깔려 있고, 여기서 증언되는 사건에 이르러 해석자 자신의 현재에로 이르는 가교를 설정하려는 것이다. 실제로 모든 사건은 그 고유성과 의미를 사건의 연관성, 맥락속에서만 지닐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해당사건으로부터 가까운 주위일 뿐, 처음부터 보편역사 자체가 관건이 되지는 않는다. 특정인물 내지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들이 처해 있던 시대와 그들과 밀접한  생활주위의 지평에서부터 이들을 파악하는 것으로 족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생활주위나 저 특정시대는 보다 폭넓은 사건의 연관성 속에서만 본연의 의미를 정확히 드러낸다. 그리고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 내지 인물들을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들과 밀접한 인근 생활주변과 시대를 넘어서 보다 넓은 연관성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의 의미가 깊으면 깊을수록, 연관시켜야 할 관련사항이 그만큼 더 포괄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유별난 사건과 인물의 참된 의미를 최소한 대략적으로나마 올바로 파악하려면 이들의 배후와 관련된 시대 및 생활주변을 파악함은 물론 보편역사의 차원에서의 의미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먼저 이해되어야 할 과거사건과 해석자의 현재사이에 개재하는 역사적 간격은 지양되지 않고 온전히 보존되어야 한다.34) 과거사건의 ‘당시’가 당시성을 버리고 현재의 한 가능성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당시’는 더 이상 ‘당시의 것’이 아니고 역사는 지양된다. 당시는 당시의 것으로 현재와 관련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과거와 현재 사이에 맺어지는 연관은 해석자가 자신의 현재에 만족치 않고, 보다 바람직한 현존재의 성취를 위해 역사적 유산에 대해서 물을 때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물음을 통해서, 현재 인간이 자신의 현존재의 가능성을 이해하는 데 익숙하게 된다는 것을 지적한 불트만의 해석학은 딜타이와 하이데거의 해석학과 함께 이정표적 사상이라고 본다.35) 현재의 인간존재의 가능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전승된 텍스트에 대한 물음을 제기해야 하는 필연성 속에서 불트만은 전승을 통해서 현재의 인간이 ‘요청’되고 의문시된다고 보았다. 판넨베르그는 이점이 불트만이 이룩한 본연의 발전이라고 본다. 불트만은 역사로부터 인간이 자신의 자기이해에 대한 ‘요청’, ‘물음’을 체험하고 책임져야 하는 ‘결단’에로 부름받았다는 점에서 딜타이와 구별된다고 보았다.

전승된 텍스트가 당시의 형태로서 해석자에게 주장을 내세울 때, 해석자는 이 요청에 대해 미리 제한을 가할 수 없고, 자신을 당시의 특수성에 내맡겨야 한다고 판넨베르그는 말한다.36) 해석자는 텍스트가 관련되어 있는 당시의 상황을 자기 자신의 현재 상황과는 상이한 대로 파악해야 하고 이 상이성을 현재와 관련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해석자의 전이해 내지 문제 설정이 전승된 텍스트에 의해 유동적으로 변화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적인 것의 역사적 간격이 보전되면, 당시 발생한 사건이 현재와 맺어지는 유대는 오늘을 당시와 잇는 역사연관성 속에서밖에는 달리 이루어질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학적 문제 설정은 보편역사에로 귀착된다고 판넨베르그는 지적하고 있다.37)

판넨베르그는 현재에 대해 전승된 텍스트가 지니는 ‘요청’ 적용의 정당성이 있다고 본다.38) 전승된 텍스트가 제기하는 요청을 현재에 적용하는 문제는 불트만 이래 신학적 해석학에서 큰 역할을 담당해오고 있다. 물론 전승의 요청은 항상 되풀이하여 의문스러운 것으로 머문다. 이 요청은 현재 문제성을 위한 전승된 것의 개현시키는 힘을 통해서 매 현재에 자신의 정당성을 새롭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판넨베르그는 전승된 텍스트로부터 도대체 개현하는, 열어 젖히는 힘이 나아갈수 있다는 것은, 현재의 사상이해가 절대적 이해가 아니고 유한한 전망에 사로잡혀 있으며, 의문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의문스러운 점을 지니고 있는 현재의 실재이해는 개방된 미래에 직면하여 전승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사상(事象)이 일찍이 이에 대해서 말하고 기록된 것을 고려하지 않고는 이해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다머가 강조하는 전승된 것의 적용의 중요성이 자리하고 있다고 판넨베르그는 보고 있다. 그는 적용이 해석학적 과제 일반의 한 소인을 형성하며, 특히 법률적이고 신학적인 해석학에서 중요함을 지적한다.39)

판넨베르그는 적용이 역사적으로 구명될 텍스트의 자기이해를 넘어서 현재의 가능성을 지향함으로써 ‘당시와 오늘을 조정하는 과제’를 지니는 한, 적용의 문제는 다시 보편사적 문제성에로 이른다고 말한다.40) 여기서 전승전체의 단일성이, 전승된 텍스트와 통교하는 가운데에서 생기는 적용 실적을 판단할 수 있는 지평을 비로소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승된 텍스트를 현재의 사상의 문제성에 적용하는 것의 합당성은 현재 상황과 당시 상황 사이에 개재하는 역사적 상위성을 고려하면서, 아울러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상황을 연결시키는 것에 대하여 고려하지 않고는 검토될 수 없다고 판넨베르그는 보는 것이다. 그는 전승 전체에 대한 역사적 사유가 현재 특정한 행동을 취할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하며, 전승된 것을 현재의 문제해결을 위해 적용토록 한다고 딜타이처럼 생각하고 있다. 물론 판넨베르그는 보편역사의 기획이 자신의 사변적 요청을 통하여 이러한 가능성들을 개현시키는 대신에, 오히려 은폐시킬 수 있음을 시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획의 부정성은 모든 인간적 사고에 불가피하게 속하고, 따라서 보편역사의 기획에도 속하는 유한성을 시사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러한 사실은 보다 개선된 보편역사의 기획을 요청함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41)

가다머는 헤겔의 절대개념의 체계가 인간 체험의 지양할 수 없는 유한성을 무시하고 비약을 범하였다고 올바로 지적하였다.42) 헤겔에게서 미래는 더 이상 개방된 미래로서 생각될 수 없다. 미래가 항상 되풀이하여 놀라움을 자아내게 하는 체험들을 가져 온다는 점에서, 미래의 개방성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지양할 수 없는 인간 체험의 유한성을 오인하는 자세와 개별적인 것을 일반적인 것 속에로 예속시켜버리는 추상화 내지 일반화의 경향은 함께 속한다. 이 점들은 보편역사철학을 기획한 헤겔의 기도(企圖)가 문제점을 안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가다머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직시하고 그 나름대로 또 다른 보편역사의 체계를 시도하지 않는다. 실제로, 인간 체험의 유한성과 함께 미래의 개방성 그리고 개인적인 것의 고유독자성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이를 보전하는 보편역사관을 기획하는 과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역사의 전체는 그 종말에 가서야 전모를 드러낼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판넨베르그는 신학자로서 이러한 문제성들을 진지하게 고려하면서도 보편역사의 관념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역사의 종말이 잠정적으로 알려진 종말로 이해될 수 있으며, 역사 종말에 대한 우리 지식의 잠정성에 대한 사유 안에서 미래의 지평이 개방되고 인간 체험의 유한성이 보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잠정적이고 선취적으로 도달된 종말로부터 소여된 전체로서의 역사관은 오늘날 이스라엘-유다전승과의 맥락속에 선 예수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는 역사이해임을 지적한다.43)

이처럼 판넨베르그는 해석학의 주제가 보편역사의 문제로 귀착된다고 규정한다. 그는 현재와의 역사적 상위성을 지닌 전승된 텍스트의 이해는 개방된 미래의 지평과 현재 행동을 취할 가능성을 부여하는 지평을 다 함께 내포하는 보편역사적 사고 안에서만 방법적으로 사리에 맞게 취급될 수 있기 때문임을 가다머의 전승사적 해석학의 통찰을 비판적으로 원용하면서 치밀한 논리 전개로써 제시하였다. 판넨베르그는 이와 같은 보편역사적 해석학의 정립을 통하여 그리스도 신학의 보편성, 요청의 타당성을 방법원리면에서 제시하고 있다.


3. 해석학의 지평으로서의 보편역사 이해


판넨베르그는 해석학의 문제해결을 위해 보편역사의 기획을 요청한다. 그런데 종결되지 않고 계속 진행중인 역사의 과정속에서 보편역사관이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우리는, 해석학의 지평으로 규정된 보편역사를 판넨베르그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가까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44)

판넨베르그는 ‘말씀의 신학’과 구별되는 ‘역사의 신학’을 정립하려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그는 바로 해석학의 문제가 보편역사의 기획을 요청한다고 보는 한편, 보편역사적 관점이 바로 이스라엘-그리스도교적 신(神) 사상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강조한다. “시간의 간격이 어떻게 메워지고, 텍스트와 해석자가 공동의 지평을 통해서 어떻게 유대를 이룩할 수 있는가 하는 해석학적 문제는 보편역사의 물음에로 귀착된다. 그러나 보편역사적 사고 자체가 성서적 신(神)사상에 그 근원을 갖고 있다. 성서적 하느님으로부터 비로소 전체 실재가 최종목표를 지향하는 항상 새롭고 유일무이한 사건들의 역사로 이해되어왔다. 유다 묵시문학과 그리스도교 역사신학을 통하여 보편역사의 테마가 근세의 역사철학에 계승된 것이다. 보편역사가 성서적 신 사상 없이 도대체 단일성으로서 이해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45) 판넨베르그가 1959년, 독일 부퍼탈(Wuppertal)에 소재하는 베텔 부퍼탈 신학대학의 동료 강사들의 모임에서 행한 강연 “구원사건과 역사”의 서두는 그의 역사관을 읽을 수 있는 명제로 시작한다. “역사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가장 포괄적인 지평이다. 모든 신학적질문과 답변은 세계앞에서는 아직 감추어져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이미 계시되어 있는 미래를 지향해서 하느님이 인류와 함께 그리고 인류를 통해서 당신의 전창조와 함께 이룩하시는 역사(歷史)의 틀 안에서만 의미를 지닐 뿐이다.”46) 판넨베르그는 전체로서의 역사를 하느님의 역사(役事)요, 계시로 파악하고 있다. 판넨베르그는 소위 ‘판넨베르그 서클’의 구성원들인 하이델베르그의 동료 학자들과 함께 1960년 10월 발표하고 편찬해 낸 [역사로서의 계시](Offenbarung als Geschichte)에서 자신의 입장을 명제화하여 정립한다. 여기서 그는 하느님의 자기 개현(Selbsterschließung)으로서 계시의 엄격한 개념이 헤겔에게서 최초로 드러났다고 말하면서, 그의 역사관이 헤겔의 역사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47)

판넨베르그는 역사신학의 출발점이 실존론적 ‘말씀의 신학’에서처럼 의문에 처해지는 인간 실존으로부터 제기되는 하느님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역사적 전체성으로서 세계역사에서 수행되는 하느님 증명이라고 한다. 보편성 요청을 내세우는 그리스도 신앙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느님의 역사적 계시라면, 신앙의 대상도 마땅히 역사적 탐구방법에 속해야 한다는 것이다.48) 그리고 판넨베르그는 신앙의 역설성을 강조하고 신앙의 결단성격에 집착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역사 안에서의 하느님계식의 명증성에 대해 확신하는 듯하다. “신성(神性)의 특수 현현과는 구별되게 역사의 계시는 보는 눈을 가진 사람 누구에게나 열리어 있다. 역사계시는 보편적 성격을 지닌다.”49) 판넨베르그는 ‘구세사가’인 쿨만처럼 계시를 역사로 이해한다. 그러나 쿨만이 세속역사의 사건들과 신앙에만 도달 가능한 구세사의 사건들 사이의 질적인 구별을 고수하기 때문에, 판넨베르그는 쿨만의 입장으로부터 간격을 취하는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자신의 역사신학의 관점이 역사적으로 실증될수 있다는 주장을 표방한다. “이러한 유형의 역사신학은 원칙적으로 역사적으로 검증될 수 있다고 한다는 점에서, 재래의 구세사적 사고와는 구별된다.”50) 이 때문에 판넨베르그는 실제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을 파악하는 데에서 시작하여 이 사건이 지니는 하느님 계시의 성격을 구명하고자 한다.

판넨베르그가 영국 역사가 콜링우드(R.G. Collingwood)의 입장에 의지하여 적용하는 역사적 탐구방법은 원칙적으로 도달가능한 모든 역사현상을 파악코자 한다.51) 그런데 그는 모든 역사적 관심은 선택을 내린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이 역사가의 개성에 의해 제약되기도 하지만, 신학적 관심자체가 이러한 선택적 경향을 지닌다고 말한다. 판넨베르그는 신학적 역사적 관심은 즉시 나자렛 예수의 종말론적 역운(終末論的 歷運)으로 이끌거나 참조토록 하는 소여성을 즐겨 택하는 경향을 지닌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선택 경향이 신학적 역사관안에서 이스라엘 하느님의 보편요청을 제기하고, 나자렛 예수가 이 하느님의 권위를 결정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교정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다른 모든 역사적 사건이 이 종말론적 사건과 연유되고 접촉된다는 것을 가능한 한 발견하여, 이스라엘 하느님과 나자렛 예수 안에서 발생한 그의 계시의 보편성이 확증된 것으로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52) 그는 모든 유형의 역사적 소여성, 역사적 사건들을 향하는 것이 역사탐구의 법칙이라 말하고 신학적 역사탐구는 역사적인 개별 사건탐구를 초자연적 가설로 대치시켜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강력히 표명한다.53)

판넨베르그는 이러한 역사탐구의 입장에서 창조로부터 종말까지의 보편역사를 하느님의 계시로 파악한다.54) 그런데 헤겔에 있어서는 역사 자체가 하느님의 현현이었다. 그는 역사를 이미 완성된 전체로 보았다. 헤겔 이래 그리스도 신학에서 하느님의 직접적인 계시관이 두드러지게 강조되는 데 반해서, 판넨베르그는 하느님의 역사적 계시의 간접적 성격을 강조한다.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성서증언에 의하면 신(神) 현현의 양식에서와 같이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역사행업(歷史行業)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성취되었다.”55) 그는 하느님의 역사적(歷史的) 계시가 하느님에 대해 간접적으로 무엇인가를 계시하는 하느님의 행업으로서의 사건들이라고 본다. 그는 말씀의 신학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감도(感導)의 의미로서의 말씀은 계시로서의 역사(歷史)를 구성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권위적 계시 요청을 내세우는 것에로의 복귀를 의미할 것이다.”56) 하느님의 행업으로서 개별적인 역사적 사건은 하느님의 부분적인 계시를 중재시킬 뿐이다. 하느님의 충만한 자기 계시는 역사(歷史)가 전체로서 계시로 이해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나 역사의 최종 의미는 그 종말에 가서야 온전히 드러난다. 그런데 역사과정이 진행중인 현재 어떻게 보편역사의 기획이 가능한가?

역사는 인간의 삶이 영위되는 포괄적 틀(Rahmen)이다.57) 인간은 전체 역사의 의미가 지금은 아직 감추어져 있음을 체험하고 있다. 역사의 어느 사건의 의미도 자체로는 명료하게 규정되거나 파악될 수 없다. 여하한 역사적 사건의 의미는 다른 역사적 사건, 시대적 상황과의 관계와 상위성 속에서 드라나게 된다. 역사과정이 진행되는 현재 역사적 사건들의 본연의 의미는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미래에 가서야, 최후 미래에 가서야 의미를 전체적으로 드러낼 것이다. 지나간 사건과 현재사건의 의미는 기나긴 전승사 내지 영향사 속에서만 개현된다. 이 과거와 현재 발생하는 사건의 의미는 역사의 총체가 시야에 들어올 때에야 온전하게 드러날 것이다. 역사 전체로부터 개별적인 사건 내지 인물 본연의 의미가 전모를 드러낸다.

그리고 현재로는 인간의 진리 자체가 온전히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58) 역사의 의미연관성의 전체속에서 인간의 진리와 본질은 이미 지금이 아니라, 완성된 전체에 직면하여서 인식되고 적절하게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모든 시대의 인간은 자신과 직접 관련되는 역사의 의문점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자그마한 삶의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고 존속케 하는 전체역사의 의미에 대해서 전실존을 걸고 묻는다. 보편역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사실상 모든 시대의 인간을 규정하고 사로잡는 물음이라고 볼수 있다. 인간의 구체적 현존은 이 역사의 보편적 지평속에서 영위된다 그 때문에 어느 한순간도 인간은 보편역사의 의미에 대한 포괄적인 물음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셈이다. 그런데 역사의 단일성, 보편성은 역사의 의미를 온전히 부여하는 종말에 가서야 드러나게 될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이 보편사적 지평을 구약성서적 계시관과 유대시킨 것이다.59) 역사는 개별적인 우연적인 사건들로 이루어진다. 이 역사적 사건의 ‘우연성’이 역사의 ‘단일성’내지 ‘보편성’에 의해 흡수되거나 지양되어서는 안된다. 반면에, 개별적인 우연적 사건들 사이에 보편적 의미연관성이 가능한데, 이는 역사가 하느님의 역사적 행업(歷史的 行業)으로서 계시인 한에서 가능하다고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 역사를 초월하면서, 개별적 역사사건들을 가능케 하고 역사의 단일성이 초월적으로 정초되어 있다는 견해를 판넨베르그는 피력하고 있다.60)

구약 속에서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위한 역사적(歷史的) 행업속에서 간접적으로 계시되고 인식된다. 여기서 역사와 하느님의 계시는 불가분리적으로 함께 연계되어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 발생한 하느님의 역사적(歷史的) 계시는 잠정적이며, 새로운 계시에 의해 대치가 가능하다.61) 예기치 않았던 새로운 사건들이 앞서 발생했던 사건들을 해소시키고 이 역사(歷史)의 하느님의 다른 면모를 드러낸다. 구약의 단계에서는 모든 인간과 시간, 그리고 전체 역사를 포용하는 구원행업 속에서의 하느님의 보편적 계시가 발생하지 않고 있다. 야훼는 당신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개별적인 역사행업(歷史行業) 속에서 강대한 분으로 계시하였을 뿐이다. 하느님이 모든 사건의 주님으로서 등장할 때에, 그가 인류의 역사를 종말로, 완성에로 이끌 때에 비로소 이 하느님의 하나님임의 보편적 계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후기 이스라엘의 묵시문학적 희망은 인류역사의 주로서의 하느님의 자기 현시를 목표로 지향하고 있다. 묵시훈학적 희망은 ‘사자(死者)의 부활’(Auferstehung der Toten)을 모든 인간에게 하느님의 권세와 영광이 드러나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역사계획이 숨겨져 있는 지혜와 그 의미가 계시되는 사건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이 후기 유다 묵시문학적 사상의 대두와 함께 전체 실재를 포용하고 종말론적 사건 속에서의 의미부여를 지향하고 있는 보편적 역사지평이 열리게 되었다고 판넨베르그는 보고 있다.62) 보편역사의 구세사에로의 확대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예언을 통해서 성취되기는 하였다. 하지만 이스라엘 하느님의 보편성에 대한 직관은 묵시문학의 단계에 이르러 최초로 체계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묵시문학가들에게는 야훼의 법이 전체세계사건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의 전체만이 야훼의 신성을 궁극적으로 계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모든 사건의 종말에 가서야 야훼가 한 분이자 유일한 하느님으로 궁극적으로 계시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묵시문학의 전통에서 ‘사자들의 부활’이 포괄적이고 보편적 사건으로서 역사의 종말에 가서 발생하는 하느님의 자기 계시사건으로 기대된 것이다.63) 판넨베르그는 나자렛 예수의 역운, 특히 그의 부활속에서 역사의 종말이 앞당겨져 선취적으로 발생하였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 사건을 보편적인, 모든 역사를 포괄하는 자기 현시 속에서의 하느님의 종말론적 계시로 규정한다. “하느님의 신성의 보편적 계시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으나 나자렛 예수의 역운(歷運)속에서 모든 사건의 종말이 선취적으로 발생한 한, 비로소 실현되었다.”64) “그리스도 사건은 고립된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이 사건이 이스라엘과의 하느님 역사(歷史)의 지체인 한, 이스라엘 하느님의 신성을 계시한다.”65) 판넨베르그는 예수의 등장과 역운 속에서 지금까지 어떠한 새로운 사건이나 체험으로 능가되거나 추월되지 않은 궁극적 실재와 진리가 발생하였다는 점을 사자 부활과 창조의 쇄신을 기대해온 유다 묵시문학적 전통에 연관시켜 강조하고 있다. 그는 보편역사적 성격을 띤 유다 묵시문학에서 기대되었던 말시적(末時的) 사자 부활사건이 나자렛 예수에게서 종말론적 실재로서 역사 안에서 현실적으로 발생하였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판넨베르그 그리스도론의 본연의 중심과 출발점은 예수 부활사건이다.66) 그는 부활사건의 보편역사적 의미를 규정하면서 그리스도론의 기본문제를 새로 제기토록 한다. 그는 예수 부활 안에서의 하느님의 보편적 신성의 계시성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적(史的) 유일회성을 모든 시대의 인간을 위한 그의 보편적 의미와 중재시킬 수 있다고 본다. “초대 그리스도교 사상의 지평속에서 예수의 부활은 역사의 종말이 그에게서 이미 사건이 되어서, 그 자신과 그의 메시지와의 관계여하에 따라 모든 인간의 궁극적 운명이 결정된다고 예수가 부활 이전에 주장한 것이 지금 예기치 않은 형식으로 확인되었음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도래하는 하느님의 주권을 통하여 이끌려지게 될 역사의 종말이 예수의 등장과 역운속에서 이미 현존하는 실재가 되어 있어, 이를 테면 예수로부터모든 사건과 인간의 전체성이자 본질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적 전승은 예수안에서의 하느님의 궁극적인 계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다.”67) 판넨베르그는 그의 그리스도론을 부활 전 예수가 내세웠던 전권요청의 성격을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여기서 그는 예수의 등장과 메시지에 나타난 특수한 면모를 지적한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면서, 자신의 현존 속에서 하느님의 전권능을 행사하였다. 예수는 인간의 운명이 그 자신에 대한 입장 표명에서 결정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예수는 하느님만이 내세울 수 있는 권위를 감히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예수의 판결과 행동 속에서의 하느님 판결의 성취는 하느님에 의한 확인을 필요로 한다고 판넨베르그는 보고 있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은 예수가 내세웠던 보편적 요청에 대한 하느님으로부터의 확인이라는 것이다.68) 그리고 예수의 부활 속에서 하느님의 종말적 역사행업의 묵시문학적 희망이 성취되었다고 판넨베르그는 본다.69)

판넨베르그가 예수의 부활을 종말론적 실재로 파악하는 점에서, 그는 ‘말씀의 신학’을 전개하는 불트만과 푹스와 견해를 같이한다.70) 불트만에게서 그리스도 사건은 세계사의 종말을 의미한다. 예수의 부활은 보편적 부활의 시작을 뜻하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현재의 실존이 종말론적 실존이고, 역사는 종말론에 의하여 삼켜졌다고 보여진다. 불트만에게서는 종말이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므로 보편역사적 과정의 의미에서 역사는 끝난 것이다. 불트만은 그리스도 사건이후 종말을 단순히 미래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현재적인 것으로 이해하여서, 역사의 과정을 미래로부터 현재 안으로 들어와 현실화되어나가는 종말의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이제 역사는 결정적으로 이미 성취된 종말의 지평속에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불트만의 종말론을 ‘현재적 종말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71)

판넨베르그는 이에 대해서 예수 부활과 함께 발생한 종말이 잠정적으로 사전에 발생하였음을 강조하여 역사의 틀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종말]은 역사의 테두리 안에서 단지 잠정적으로 선취되었을 뿐이다.”72) 그리고 예수의 인격속에서 역사의 종말이 이미 선취되었다는 진술의 의미 역시 묵시문학의 역사관의 테두리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역사가 결코 끝나지 않았음을 역설한다. 판넨베르그는 오히려 역사의 종말이 이미 현존한다는 사실을 통해서 전체로서의 역사이해가 비로소 가능하다고 말한다.73) 하지만 그는 역사의 종말인 예수 그리스도가, 세계사건을 포괄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원리로 이용될 수는 없다고 본다. 종말의 개벽인 예수 부활은 인간의 이성에게는 다마스커스로 가던 바울로의 눈을 멀게했던 것과 같은 빛과 같다는 것이다. 그는 종말이 그토록 신비스럽고 엄청나고 파악할 수 없는 양식으로 우리 가운데 현존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종말의 선취로부터 역사의 흐름을 계산해낼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처럼 판넨베르그는 역사의 종말의 선취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도 인간의 역사인식의 유한성과 잠정성을 아울러 고려한다. 한 개별적인 사건이 역사의 종말에 가서야 자신의 온전한 의미를 제시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도 해당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등장과 역운 속에서 본래 무엇이 발생하였는지를 종국적으로는 아직 모르고 있다. 그러나 이 유보(留保)자체가 저 사건의 궁극성에 속한다. 이 궁극성은 진전하는 시간과 이 시간에 매여 있는 인식의 역사적 상대성 한가운데에서는, 예수의 역운에 속한 의미의 인식이 아직 종결되어 있지 않음으로써 가능하다”74) 판넨베르그는 우리 현대인이 종말의 ‘이미’(Schon)와 ‘아직 아니’(noch-nicht) 사이의 긴장관계속에서 살아간다고 본다. 그런데 이 ‘이미’와 ‘아직 아니’의 긴장성은 그리스도인의 주관적 체험에 위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역사에 위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종말론적 전망 속에서의 역사의 새로운 성격을 보존하고자 한다.

판넨베르그는 하느님을 만사를 규정하는 실재(Die alles bestimmende Wirklichkeit)라고 부르고 있다.75) 그래서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는 모든 실재의 전체와 관련을 맺게 마련이라고 그는 본다. 하느님에 대해 거론하고 실재의 전체에 대해 거론하는 것은 똑같지는 않으나 서로 제약한다는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어떤 양식으로건 하느님을 생각지 않고 실재 전체에 대해 거론할 수 없으리라고 본다.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모든 유한한 실재의 전체성에 대한 생각을 함축한다는 것은, 실재의 전체가 아직 종결되어 있지 않고 완성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되어서 아직 현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당하다고 그는 말한다.76) 이것은 실재의 전체성이 현전하는 것이 아니요, 아직 개방된 미래를 지향하는 역사의 과정으로 생각되어야 하는 것을 말할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만사를 규정하는 실재로서의 하느님은 인격적이기는 하나 역사의 하느님으로 생각되어야 하리라는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이스라엘과 그리스도인의 하느님은 당신을 개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아직 종결되지 않은 역사의 하느님으로 드러냈음을 지적한다.77)

그런데 나자렛 예수에게서 유다 묵시문학에서 기대되었던 말세적 사자 부활사건이 발생하였다.78) 유다 묵시문학의 기대는 모든 인간의 부활을 지향하는데, 이 사건은 지금까지 예수에게서만 발생하였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부활사건은 역사 종말의 선취이고 종말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종말론적 실재가 예수 부활속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에, 일반적 사자 부활의 종말론적 미래는 예수 부활의 종말론적 사건과 양적 상위성을 지닐 뿐, 질적 상위성을 지니지 않는다고 판넨베르그는 보고 있다.79) 예수 부활에서 발생한 종말의 선취는 여하한 세계내적사건에 의해서도 능가되거나 추월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예수의 등장과 역운 속에서 역사의 종말이 이미 현전하는 실재가 되어서, 여기서부터 실재의 전체성이, 모든 사건과 모든 인간적 삶의 본질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예수 안에서의 하느님의 궁극적 계시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었으며, 예수를 하느님의 종말론적 계시자로 선포하여왔다는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예수의 역사가, 아직 종결되지 않은 하느님의 궁극적 미래가 임박한 것으로 각인되어 있고 이 하느님의 궁극적 계시의 선취인 한, 이 선취로부터 예수와 함께 발생한 건의 궁극성을 확실케 하고 실현하는 충동으로 나아간다고 본다.80) 그래서 예수의 역사는 새로운 역사를 자아낸다는 것이다. 예수의 역사로부터 나아가는 충동을 통하여 인간과 세계의 실재가 변모하기 때문에 이 실재의 전체성을 규정하는 힘으로서의 하느님의 이해와 예수 안에서의 그의 계시이해 역시 변화된다고 판넨베르그는 말한다. 그래서 하느님의 계시는 예수의 역사 속에서 궁극적으로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종결되어 현전하는 어떤 것은 아니며, 예수의 역사 역시 이러한 의미에서 아직 종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는 그분의 주권이 여전히 도래중에 있는 역사의 하느님의 계시로서 항시 새로 이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판넨베르그는 역사의 전체성이 나자렛 예수 안에서 발생한 하느님 계시전승의 과정 안에서 늘 새로 구성되는 셈이라고 말한다. “예수 안에서의 계시와 함께 역사의 전체성을 구성하는 하느님이 역사의 과정에로 친히 진입하면서, 동시에 이 역사의 미래로서, 이 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바와는 구별되어 머물거나 늘 새롭게 자신을 구별하는, 도래하는 하느님으로서 진입해 들어왔다.”81) 판넨베르그는 하느님은 당신의 종말론적 계시의 과정 속에서 역사에 내재하고, 역사의 전체성을 예수의 역사라는 역사내적 사건으로부터 내심(內深)으로부터 규정하여서 당신을 하느님으로서 만사를 규정하는 실재로서 드러낸다고 보고 있다.

판넨베르그는 그리스도교적 전승의 해석학적 과정 속에서 실재의 전체성이 예수로부터 늘 새롭게 나타난다고 본다.82) 이로 말미암아 해석학적 과정은 정지되지 않고, 이 전체성을 확실케하고 실현시키려는 노력을 통해서 그리고 이러한 가운데 드러나는 전체성 내용의 제약성 체험을 통해서 실재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특징지어지는 새로운 단계의 과정이 촉진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유형의 전체 이해는 선취에 의거하기 때문에, 전체의 모든 새로운 이해는 전체를 지향하면서도 전체가 아닌 순전한 선취로 자신을 드러내는 한, 자체 안에 모순을 지닌다고 판넨베르그는 지적한다. 이것이 개별적인 단계에 해당한다면, 단계에서 단계로 이끄는 과정 역시 궁극적인것(하느님의 미래자체)의 선취의 단일성으로서 예수의 역사 안에서 이 역사의 석명(釋明)으로 이해되리라고 판넨베르그는 말한다.83) 그는 역사의 전체성의 개현된 지평속에서만 현재는 그리스도교적 전승사의 원천으로서 예수의 특수성이 보전되어 머물면서, 이 특수성으로부터 그리스도교 역사의 해석학적 과정을 진행시키는 바, 현재를 변모케 하는 충동들이 나아가야 하도록 자신의 위치를 이해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84)

판넨베르그는 역사적 탐구에 의하여 도달가능한 예수의 역사적 사건을 종말의 사전사건화(事前事件化)로 이해하면서, 이 선취된 종말사건으로부터 나아가는 전승과정을 보편역사로 규정한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은 보편역사적이고 묵시문학적 지평속에서의 부활사건해석으로써, 역시 보편역사관을 정립했던 독일 관념론 안에서의 하느님의 역사계시 표상과 유대되어 있는 단점과 문제들을 극복한 것으로 믿는다. “전체 역사만이 한 분 하느님의 신성을 증명하고, 이 결과가 모든 역사의 종말에 가서야 비로소 생겨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사건이 역사의 종말을 앞당겨 발생시키는 한, 개별적 사건인 그리스도 사건이 하느님의 계시로서 절대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같은 이유에서 종말의 사전 발생으로서의 그리스도 사건은 후대에 어떤 사건에 의해서도 추월될 수 없으며, 인간이 종말의 개방된 미래를 향하여 가는동안에는 그 의미가 온전히 파악되지 않은 채 머물 것이다.”85) 그는 모든 인간의 하느님이라는 이스라엘 민족의 하느님이 나자렛 예수 안에서 자신의 신성을 궁극적으로 계시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보편역사 기획을 요청하는 해석학적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믿으며 여기서 인간의 보편적 물음에 대한 보편적인 해답을 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4. 비판적 맺음말


지금까지 판넨베르그 해석학의 실상을 파악하고자 시도하였다. 그의 해석학의 입장에 대한 간략한 평가를 내리고자 한다.

4.1 판넨베르그의 해석학은 금세기 50년대 까지 주도적이었던 ‘말씀의 신학’ 계열의 해석학적 입장의 일방성 내지 편협성을 지양하고 신학적 해석학사에서 ‘역사의 신학’시대의 문을 열어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희망의 신학’과 ‘정치신학’을 전개하는 몰트만과 멧츠 같은 신학자들의 해석학적 입장들이 구별점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판넨베르그가 정립한 보편역사의 신학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판넨베르그의 해석학적 기본 통찰에는 그의 신관, 역사관, 세계관, 그리스도관, 종말관, 인간관, 성서관, 신앙관 등 대부분의 주요 신학 주제들이 요약되어 담겨있다. 이들은 각기 개별적으로 깊이 연구, 토의되어야 할 만한 문제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판넨베르그의 해석학적 입장만을 파악하려는 여기서 이 문제들에 관하여 개별적으로 충분한 입장 표명을 하기란 불가능하고 그의 해석학적 통찰이 해석학적 문제제기에서 뜻하는 바를 시사하는 데 그치고자 한다.

이해가 일반적으로 성취될 때, 이른바 ‘해석학적 순환’이 발생한다.86) 해석학적 순환은 이해 속에서의 전체적인 것과 부분적인 것 사이의 교환적 관계가 이루어져서 이해의 단일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지칭한다. 즉 부분적인 것은 전체로부터 이해되고 전체는 자신의 부분적 요소들에 의해 이해된다는 것이다. 고대 수사학에서 이미 주지되어 있었고 쉴라이어마허 이래 해석학에서 명백히 이해구조로 규정된 이 문제는 하이데거에 의해서 심화되고 첨예화되었다. 하이데거에게서 해석학은 본시 자기 자신을 세계와 역사 속에서 이해하면서 주석 내지 해석하는 인간의 해석학적 본질에서부터 이해의 문제를 규정하려는 노력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실재에 대한 전이해는 세계안에서의 실존과 함께 더불어 주어진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불트만은 이러한 해석학적 통찰의 지평에서 ‘전이해’ 개념을 실존신학적으로 규정하였다. 불트만은 세계적 존재자로서 자기 자신의 실존에 대한 질문에로 움직이는 인간의 질문성 속에서 하느님에 대한 전이해가 역사적인 하느님의 계시역사(啓示役事)와 해후하기 전에 이미 형성되었다고 보고, 이 전이해를 하느님의 역사적 계시이해의 가능성의 조건으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계시이해의 전제로 규정된 전이해는 인간의 질문이기 때문에 전판단(前判斷)의 의미로서 규정된 해답은 아니다.  계시에 대한 전이해를 가진 인간이 역사적 계시와 해후할 때에 해석학적 순환과정이 발생한다. 그런데 불트만은 진정한 이해를 해석되어야 할 역사적 작품 속에서 만나는 요청에 청종(聽從)하는 것이라고 봄으로써, 해석자가 전승된 텍스트로부터 자기이해에로의 한 가지 요청을 체험하고, 책임있는 결단에로 호출되었다는 데에서 실존론적 해석의 의미를 보고 있다. 요컨대 그는 모든 역사적 전승내용의 중요성을 자신의 실존론적 해석학으로서 인간 실존의 기본 결단행위의 단순한 분모 속에서 본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보편역사의 신학 입장으로부터 해석학에서의 주요 개념인 ‘전이해’와 ‘해석학적 순환’의 성격을 불트만과는 달리 규정한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역사를 간접적이기는 하나 하느님의 계시로 규정하는 한편, 인간을 하느님이 주도하는 전승역사의 틀 안에서 생존하는 역사적 존재로 보고 있다. 인간은 이처럼 전승과 삶의 관계를 지니는 가운데 실존을 영위하기 때문에, 그가 전승내용에 대해서 지니는 ‘전이해’ 역시 전승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선입견’의 성격을 불가피하게 지니고 있음을 판넨베르그는 가다머에 의존하여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전이해들은 인간들이 처한 역사적 환경에 따라 다양할 수 있음이 아울러 강조된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이해해야 할 전승된 텍스트가 해석자의 현재와 지니는 역사적 간격이 실존론적 문제 설정에 의해 사전에 차단되어, 인간학적 현존이해에 예속되어서는 안되고, 해석자는 당시의 텍스트의 특수성에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해석자는 전승된 텍스트가 관련되어 있는 당시의 상황을 자기 자신의 현재와는 다른 그대로 일단 파악하고 나서 이 상이성을 현재와 관련시키라는 것이다. 당시적인 것의 역사적 간격이 보전되면, 당시적인 것과 현재와의 유대는 오늘을 당시와 잇는 역사 연관성 밖에는 달리 이루어질 수가 없다. 판넨베르그는 이렇게 해석학적 문제 설정이 보편역사의 기획문제에로 귀착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실재이해의 성취는 보편역사의 지평융합으로서의 해석학적 순환속에서 일어난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판넨베르그는 보편역사의 지평융합이 의식적으로 발생하는 가운데 해석자의 전이해나 문제설정이 불트만에게는 아직 사유되지 않은 양식으로 전승된 텍스트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는 보편역사만이 지상 예수의 등장시대와 우리 자신의 현재 사이에 개재하는 간격을 넘어서서 해석학적 문제 해결을 위한 지반을 제공할 수 있다고 본 점에서 신학적 해석학사에서 새로운 장(場)을 개척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그가 모든 사건의 전체성을 봄으로써 모든 사건의 원천에 대해서 해답할 수 있고, 모든 사건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보편역사를 이해의 포괄적 지평으로, 명시적으로 규정하자는 해석학적 입장은 불트만 계열의 실존론적 해석학의 일방적이고 편협한 규정을 지양시켜 진일보하게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 신앙은 계시의 하느님을 오로지 역사의 장(場)에서만 만날 수 있다. 그리스도 신앙은 신화도 영지주의도 아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발생한 사건 위에 정초하여 있으면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타당성을 주장하는 보편성 요청을 내세우고 있다. 계몽주의의 대두 이래 의문시되어온 ‘권위적 신학’의 입장을 포기하고, 구체적 내용이 없는 ‘케뤼그마’의 배후에서 역사적 사건을 향하여 사적(史的) 사실을 신학적 해석학의 원리로 규정한 판넨베르그의 취지는 정당하다. 이 역사의 중재는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적 객관성을 보장하고 아울러 주관적인 종교의식으로부터 신앙을 보호한다. 현대인이 임의로 조종할 수 없는 과거사건의 역사적 상위성이 신앙의 객관성을 보장한다고 말할 수 있다.

4.2 판넨베르그는 보편역사를 해석학적 기준으로 선택함으로써 헤겔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판넨베르그는 전체성으로 이해된 그리스도교를 새로 이해하고 있어서 ‘그리스도교적 헤겔주의자’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판넨베르그의 신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취된 역사 종말에 대한 보편역사의 의미해석이고자 하는 점에서, 판넨베르그는 헤겔의 역사철학을 묵시문학적-종말론적 관점에서 재수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 판넨베르그가 전개하는 ‘역사의 신학’이 ‘이성의 신학’으로 이어지는 사실에서도, 그의 헤겔과의 밀접한 연관성이 다시 드러난다.

문제는 판넨베르그의 역사관이 성서-그리스도교적 역사관을 충실히 제시하는가 하는 것이다. 몰트만은 판넨베르그의 역사신학이 희랍의 우주신학의 사고구조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하면서, 역사가 진실로 ‘역사적으로’ 이해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87) 몰트만은 계시가 판넨베르그에게서 로고스(λογοζ)의 징표하에 위치하고, 참신한 것에 대한 ‘약속’의 성격을 진실로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사실 판넨베르그가 인간 실존의 역사성 아닌,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에 결정적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실제로 그가 말하는 보편역사관에서 개별 인간의 역운과 역사 안에서 발생하는 온갖 부정적 사건과 고통의 문제가 얼마나 진지하게 고려되고 있는가는 의문으로 남는다. 그리스도 신앙의 걸림돌 성격도 보편역사의 기획 안에서 중화되어버려 그리스도 십자가의 냉엄한 실재가 결과적으로 간과되기에 이른다.


   V. 다른 역사신학 계열의 해석학


   60년대 후반이래 그리스도 신학 조류는 역사신학 계열의 신학사상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그래서 판넨베르그가 주도하는 ‘보편역사’ 신학외에도 몰트만 (Jurgen Moltmann, 1926- )이나 멧츠(Johann B. Metz, 1928- )같은 정행(正行) 위주의 신학노선과 가톨릭 튀빙겐 학파에 속하는 카스퍼(Walter Kasper, 1933- )의 역사신학의 해석학적 입장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역사를 가장 포괄적인 실재로 간주하면서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적 보편성을 제시하려는 취지를 기본적으로 견지하는 한에서 판넨베르그와 공통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치 않고 고유한 해석학적 입장을 간략히 서술하고자 한다.


   1.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의 해석학


   몰트만은 판넨베르그의 역사관에 이의를 제기한다.88) 몰트만에 의하면 신학자에게 문제되는 것은 세계와 역사와 인간존재를 단지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이룩하실 변환에 대한 기대 속에서 이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89)

   몰트만은 판넨베르그의 보편역사의 신학이 실제에 있어서는 희랍의 우주신학의 재수용과 확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판넨베르그가 우주에 대해서 말하는 대신에 역사의 전체성에 대해서 말하더라도 그것은 하느님의 ‘현현’(顯現, Epiphanie)으로서의 세계라는 것이다. 물론 그에게 있어 역사는 미래를 향하여 개방되어 있고 완성되어 있지 않는 한, 하느님에 대한 잠정적인 인식만을 제공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트만은 판넨베르그가 희랍의 우주신학의 사고구조에 사로잡혀 있다고 간주하는데, 그 까닭은 역사가 ‘우주’와 ‘전체성 속에서의 실재’를 드러내는 새로운 개념이 되면 새로운 우주 개념이 형성되고 역사는 더 이상 ‘역사적’으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90) 실제로 판넨베르그의 보편역사의 신학은 전체적으로 이해된 역사로부터의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이해이고 역사이해면에서 다분히 헤겔주의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91)

   몰트만이나 멧츠가 신학이 역사의 이론적해석에 만족해서는 안되고 미래의 이름으로 현재를 변혁시키는 실천에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이면에 『희망원리』(Das Prinzip Hoffnung)의 저자인 블로흐(E. Bloch, 1885-1977)의 영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92) 유다계 독일인인 블로흐는 의식적으로 새로움(Das Novum)의 성서적 범주를 수용하나 동시에 통상적인 그리스도 신앙의 내용을 부정한다. 그에 따르면 새로움은 원칙적으로 이미 있었던 것의 쇄신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하며, 새로움에는 결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전취가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불로흐에게서 새로움은 유토피아 계획이며 급진적인 것의 성격을 지닌다.

   블로흐에 따르면, 종교인 일반,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추구되는 ‘추상적 유토피아’ 계획이 원목표(遠目標)와 고차목표(高次目標)만을 매개하고 직접적인 근목표(近目標)를 뛰어넘는 데 비해, 자신과 같은 네오 맑시스트들이 추구하는 ‘구체적 유토피아’ 계획은 행동의 지속적 전망으로 머무는 고차적 목표를 망각치 않으면서 자신의 시대와 내재적으로 유대를 맺고 있다.93) ‘구체적 유토피아’는 소외된 현실세계 속에서 보다 나은 세계의 건설을 위해 요청되는 실제적 상념들을 생겨나게 하고 미래를 성취할 수 있는 상상력이다. 이에 비해 ‘추상적 유토피아’는 소외된 현실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아무 공헌도 하지 못하는, 실현될 수 없는 꿈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유토피아는 현재의 가능성과 전혀 상관없는 새로운 미래의 상상력을 제시함으로써 오히려 지성을 마비시키고 행동을 촉발시키지 못하게하여 인간을 몽상가로 만드는 이데올로기가 된다는 것이다. 오로지 ‘구체적 유토피아’만이 인간에게 희망을 일깨우고 새로운 미래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 ‘구체적 유토피아’ 계획을 포착하는 인간의 행동이 불로흐에게서 희망(Hoffnung)으로 규정된다. 이 희망은 이념화된 사회에서 인간의 품위를 모독하는 소외형태에 대항하는 자극이다. 이것이 블로흐에게서 역사의 구체성을 상실하지 않고, 이제까지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것을 시도하는 ‘현재적 종말론’(Präsentische Eschatologie)의 의미이다.94)

   몰트만은 블로흐의 네오 마르크스적 희망관과의 비판적 대화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대상인 하느님을, 반복하는 역사 속에서 영원히 현존하는 하느님(희랍의 우주론적 신)으로 파악하지 않고 미래로부터 우리에게 다가오는 약 속의 하느님으로 규정하면서 미래의 차원을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의 고유성에 맞는 유일한 주제로 설정한다.95) 미래를 해석학적 기준으로 만듦으로써 신학은 ‘희망의 학문’이 된다. 즉 미래와 새로움과 미예견적인 것인 것에 대한 희망이 크리스찬 활동의 해석이 된다.

   그리스도 신앙이 본질적으로 역사 종말의 예취적(豫取的) 사건으로서 부활에 대한 신앙이기 때문에 역사 종말의 선취의 현실화로서 교회의 선교활동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이 점에서 단지 해석의 학문 이상이려 하는 몰트만의 신학적 취지는 이해할 만하다. 이들에게서 신학은 ‘파견(派遣)의 해석학’ 즉, ‘파견역사’의 범위 속에서 성서적 증언의 해석이 된다.96)


   2.  멧츠의 ‘정치신학’의 해석학


   멧츠는 이 파견의 해석학적 기점에서부터 미묘하게 오해를 불러 일으킬 염려가 있는 소위 ‘정치신학’(Politische Theologie)을 전개한다.97) 멧츠가 몰트만처럼 네오 맑시스트인 블로흐와 프랑크푸르트 학파Frankfurter Schule)의 ‘비판이론’(Kritische Theorie)의 기본취지를 원용하여 고난과 갈등으로 점철된 사회적 소외현실을 변혁시키려는 정행(正行, Ortho-praxis) 위주의 성격을 강력히 드러내기는 하지만 ‘혁명의 신학’이 아님은 물론이고 신앙을 정치화하려는 신학도 아니다.

   멧츠에게서 정치신학은 정치논리도 아니며 정치사회적 강령을 전개하려 하지도 않는다. 멧츠나 몰트만에 따르면 사회는 인간존재의 가장 포괄적 지평이고 정치는 근세의 전제하에서 대하게 되듯이 인간의 삶과 세계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규정하는 실재의 총체적 차원이다. 그리스도의 신앙진리가 보편적 요청을 내세우는 한, 인간 존재의 포괄적 지평인 사회적 문제에 도저히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 자신이 정치적 입장을 취하기 전에 이미 사회적 제도로서 하나의 정치적 연관성을 지니게 마련이다. 교회가 정치적 이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지배적 권력체제의 시녀(侍女)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자신의 모든 진술의 정치적 함축성에 대해 비판적 사유를 통하여 사회적 실재의 구원에 이바지하도록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것이 ‘정치신학’의 취지이다.

   정치신학은 현대 조직 사회의 탈인격적 체제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여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함으로써 하느님 구원역사(救援役事)의 면모를 사회-정치적 차원에서도 드러낼 수 있도록 하자는 기본취지를 지닌다. 이를테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을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사회의 억압적 세력들에 대해 비판을 가아여 사회전체를 자유로운 분위기로 만들기 위해 투신하였듯이, 교회는 소외된 사회현실의 개선을 위해 투신하자는 것이 이 신학의 기본취지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뒤따르는 제자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사회 안에서 일종의 제2의 제도와 같은 실재로서 국가기관과 같은 정치제도에 대해 비판적 간격을 취하면서, 정치제도가 탈인격적이고 억압적일 경우에 불가침적 기본인권을 수호하여 자유로운 사회 건설에 기여하는 ‘자유의 제도’로서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비로소 구원의 교회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신학’은 신학의 일개 지엽적 영역으로서가 아니라 신학적 사고의 새로운 기점이려 하고 있다.


   3. 카스퍼의 역사신학의 해석학


카스퍼는 가톨릭 튀빙겐 학파(Katholische Tübinger Schule)의 전통을 현대의 정신사조 안에서 창조적으로 계승하려는 자세를 지니면서 후기 하이데거로 부터 유래하는 해석학적 철학이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실천적 결의 속에서의 변증법적 철학, 그리고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 1889-1951)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영미계의 분석철학 등 방법과 형식내용에서 성격을 달리하는 현대 철학사조에서 공동적으로 마치 초제도(超制度, Metainstitution)와 같은 역할을 하는 언어현상에 주목하면서 그리스도 신앙원리를 적어도 기점적으로나마 발견하려 시도하고 있다.98)

카스퍼는 현대 일반 해석학의 학술이론적 통찰에서 보여지는 인간의 삶과 전통과의 관계를 신학을 위한 사전고찰로 수용한다.99)

인간적 삶은 구체적으로 세대의 계승 속에서만 존재한다. 즉 광의의 전통은 인간적 삶과 동일하다. 그런데 인간적 삶은 단순한 생물학적 현상 이상의 것이다. 인간적 삶에는 삶의 의식, 세계에 대한 개방성 그리고 자기 자신의 주위세계를 이룩하려는 자유가 속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삶과 함께 다양한 양상을 띠고 나타나는 특정한 이해방식과 관습, 문화 등의 실천을 이어받는다. 인간의 언어가 이 점을 가장 분명히 드러낸다. 언어는 동시대 인간 상호간에 그리고 선대 인간들과의 접촉을 가능케 한다. 언어는 전통을 가능케 하고 전통의 근거를 이룩한다. 그래서 언어는 본래 모든 인간이해의 초험적 전제이다. 인간 이성도 이에 따라 무전제적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역사적으로 전승되어 있다.

전통은 인간적 삶을 인간적 삶으로 비로소 가능케 하는 하나의 상징체계 속에 저장된 전세대의 체험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전통은 언어의 개입을 통하여 인간적 삶과 함께 함축적으로 주어져 있다. 전통은 주체와 수취인을 전제하며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공동체 속에 살아있는 포괄적이고 합일화하는 정신(Geist)이다. 이 하나의 전통(Traditio)은 예의, 관습등과 같이 다양한 ‘전통들’(Traditiones)을 통하여 현시된다. 하지만 전통은 전통들 속에서 용해되지 않는다. 전통들이 ‘실제적 상징’들이기는 하나 전통은 전통들과 동일시되지 않고 전통들을 거스르면서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므로 개별적 전통들의 붕괴가 필연적으로 전통의 붕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통은 결단과 비판, 그리고 새로운 결단을 내리도록 자극하는 가운데 전통들을 결속시킨다. 그러므로 본래의 전통의 효능을 다시 발하도록 하기위해 전통들이 파멸되어야 하는 필요성도 있을 수 있다.

카스퍼는 이러한 일반 해석학적 통찰로서의 인간 삶 속에서의 전통의 의미를 구명한 뒤에 신학적 이해원리를 정립하고자 한다.100)

그리스도 신앙에서 예수는 하느님의 위격속에서의 전통이다. 문제는 하나의 그리스도 전통(위격 안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이 세계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현존할 수 있게 되는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화는 사문자(死文字)를 통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성령을 통하여 일어난다. 성령은 현재 안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전승이다. 하나의 성령은 개별적인 의식, 관습과 인습 속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그리스도 전승의 운반자는 개별자가 아니라 ‘우리’이다. 신자들의 공동체로서 교회는 신앙이 발생하게 되는 초험적 전제이다. 신앙의 내용과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양식인 성령이 거처하는 장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계시진리는 하나의 사건처럼 교회의 교역자들에 의하여 관리되는 고정된 대상이 아니다. 십자가의 순명 속에서 목표에 이르는 한 인간의 삶과 죽음 속에서의 하느님의 자기 전달은 본성상 인간들이나 인간적 요체들에 의해 관리될 수 없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이 자기 전달의 동화 가능성을 성령을 통하여 부여한다. 그리고 성령은 상호 인간적으로, 교회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성서는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현존케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도구로 볼 수 있다. 성서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증언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계시의 종국적 성격은 문서적인 고정화에서 비로소 생겨나는 지속적 공표를 요청한다. 문서화 과정이 계시과정에 함께 속하는 것이기에 여기서 성서의 영감(靈感)이 거론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다른 계시증언에 앞선 성서의 질적 우위성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성서의 정경화(正經化, Kanonisierung) 사실은 성서의 사도성과 일반적 인정을 의미하고 있다. 이처럼 성서는 교회의 전통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 신앙공동체에서 생동하는 성령은 교회생활과 사상 그리고 선포의 증언 속에서 자신을 구현시킨다. 그런데 이 전통의 증언들은 모델과 표정들이지 법률들이 아니다. 이들은 방향을 제시한다.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 안에서 성서의 직접적인 증언이란 불가능하다. 시간의 격차가 사유되어야 한다. 전통의 증언들이 바로 성서의 개입의 연속을 형성하고 있다. 성서의 올바른 주석은 성서의 우위성에 의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성서는 전통 밑에 위치하면서 개별인간들의 성서주석 위에 자리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4. 평가


   앞에서 언급한 이들 ‘역사의 신학’의 해석학적 입장에 대한 간략한 평가를 내리기로 한다.

   5.4.1  ‘희망의 신학’이나 ‘정치신학’, 그리고 ‘성령론적 역사의 신학’과 같은 ‘역사의 신학’ 유형이 개별 인간과 인간 사회, 인간과 세계 사이의 매개가 늘 개방되어 있는 과정으로서의 역사를 인간 실존의 역사성에로 용해시킴으로써 보편적인 그리스도 신앙을 주관주의 및 개인주의적으로 이해할 위험을 안고 있는 ‘말씀의 신학’이나, ‘실존론적 신학’과 ‘초월신학’을 지양하여 실재 전체를 포괄하는 역사의 지평속에서 그리스도 신앙의 보편성을 제시하려 추구한 점은 일단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이 신학적 시도들은 역사적 성격을 가지는 그리스도 계시진리와 현대의 실존체험양식에 부응하는 적합성을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역사의 신학’은 영원의 진리인 그리스도 신앙의 ‘쇄신’을 촉진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는 신학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신앙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 ‘역사의 신학’ 이전의 신학수준에로의 복귀란 있을 수 없다. 관건이 되는 문제는 이들 ‘역사의 신학’을 전개하는 신학자들에 의해서 역사가 정작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가이다.

   5.4.2 판넨베르그는 역사가 그에게 있어서 우주처럼 하느님께 관련되어 있는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이점은 몰트만이 의문시하듯이 부인할 필요는 없다.101) 역사는 판넨베르그에게 있어 하느님의 역사 자체이고 그래서 역사속에 하느님의 간접적인 계시가 있는 것이다. 역사의 종말은 ‘이미’ 예수의 부활속에서 선취되어서 역사의 최종의의는 이 선취된 종말에서 현시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역사관에 헤겔주의적 요소가 자리하고 있다. 헤겔에게서 역사는 자유의 전진 속에서의 보편역사적 과정으로 파악되고 있다. 전진은 점증하는 자유의식 속에서 보여진다. 모든 개별 인간들과 사건들은 전체속에서의 요인들에 지나지 않고 역사는 전진적 상승역사로 포착되고 있다. 헤겔은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을 자유의식의 전진으로서의 한 역사에 통합하려 시도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역사 안에서 최초로 모든 인간이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 서고 모든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동등하고 자유롭다는 의식을 대하게 된다. 판넨베르그는 가톨릭 신학자들인 떼이야르 드 샤르댕(P. Teihard de Chardin, 1881-1955)이나 라너처럼 이러한 역사의 역동적 진화적 발전을 내세우는 현대의 대표자들중의 하나라고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는 전진의 범주만으로 해석될 수 없다. 사회의 산업화 과정에서 빚어지는 경제적 수탈과 착취, 기아현상, 인구초과 및 환경오염 등만을 고려해도 전진사고의 문제성이 드러난다. 호르크하이머(M. Horkheimer), 아도르노(Th. Adorno), 마르쿠제(H. Markuse)와 하버마스(J. Habermas) 등이 주축을 이루는 프랑크푸르트(Frankfurt) 학파는 현대인간이 만사를 숫자화, 대상화 하여 마침내 자기 자신까지 번호화 내지 물상화(物象化)할 위험에 처하여 있음을 올바로 간파하였다.102) 산업사회에서의 인간의 일차원성이 지니는 문제성은 낙관주의적인 전진적 역사관을 의문에 처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실재의 구원이 역사 종말에서의 인류의 진화과정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밖에도 전진적 역사는 순전히 승리의 역사임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다. 너무 짧게 살거나, 너무일찍 태어났거나 너무 늦게 태어날 사람들의 삶은 어쩌란 말인가? 역사속에서 빚어지는 온갖 고통의 의의는 무엇이란 말인가?“ 강자에 의해 무참히 희생되는 무죄한 사람들의 피해는 단지 역사의 오물이란 말인가? 전진의 역사만이 아니라 고통의 역사가 실재 안에 엄연히 자리잡고 있다. 후자를 역사의 오물로 간주하는 것은 희생자들에 대한 또 하나의 새로운 불의일 것이다. 개인을 모두 귀하게 여기는 그리스도 신앙은 일방적인 전진적 역사관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점에서 판넨베르그의 보편역사이해는 수정되어야할 것이다.

   5.4.3 그렇기는 하지만 그리스도 신앙은 역사를 ‘희망의 신학’에서의 몰트만이 그러하듯 미래적(Futurisch)으로만 볼 수는 없다.103) 몰트만에게서 역사적 실재는 소외되어서 자기 자신과의 비동일성 상태에 처해있다. 역사과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선취된 모순의 해소를 지향하고 있다. 실재가 화해되는 세계의 종말은 소외된 기존양식 속에서는 단지 약속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종말관은 이 유다적 역사관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역사적 실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이미 화해되었고 종말이 현역사 속에 현존한다는 것이 그리스도 신앙의 견해이다.

   5.4.4 신앙의 진술이 사회적 실재의 구원에 기여하도록 실천적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정치신학’의 취지는 정당하다.104) 그러나 사회적 실재를 모든 실재의 포괄적 지평으로 간주하는 이 신학의 견해는 협소하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적 차원에 용해되지 않는 실재가 있다는 주장을 그리스도 신앙은 고수해야 한다. 인격의 존엄성은 사회나 제도에 의해 규정되는 실재가 아니다. 인격은 사회관계로부터 독립된 사적인 내밀한 영역을 지닌다. 이 말은 인격과 사회사이에, 인격적이고 공공적인 차원의 영역사이에 지양될 수 없는 긴장상태가 지속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두 실재는 서로를 필요로 하나, 상호간에 상대방 속으로 지양될 수는 없다. 인간은 사회적 차원을 능가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적 노고만을 통해서 지양될 수 없는 소외의 차원을 지니고 있다. 자연이나 치료불능의 질병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고통이나, 인간과 인간사이의 상극성과 고독감으로 말미암은 형이상학적 소외는 사회적 개선활동에 의해서 극복되지 않는다. 이 사실들은 사회가 실재의 가장 포괄적인 지평일 수 없음을 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정치신학’은 보편적 진리이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요청을 축소시킨다고 지적할 수 있다.

5.4.5 카스퍼의 입장에서처럼 신앙의 기본원리를 추구하는 해석학적 형식사유에서는 물론 교회 안에서 현존하는 예수의 성령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는가의 문제가 충분히 취급되어 있지 않다.105) 그에게서 인류와 세계의 구원을 선포하는 그리스도 신앙의 언어가 보편적으로 이해되기 위해서 실재 전체를 포괄하는 지평 즉, 개인과 사회 그리고 인간과 세계 사이의 개방되어 있는 과정으로서의 역사 지평하에서 구원을 갈구하는 인간의 요청에 상응하는 구원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그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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