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site   게시판   메일   M1000선교사홈   Mission Magazine
 

 

  사전등록   히,헬 폰트받기
 현재위치 : HOME > 문서보기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8-16
 제목  디트리히 본회퍼
 주제어  [본회퍼]
 자료출처  목창균 교수  성경본문  
 내용

 

서 론

 

20세기 후반 신학의 가장 큰 특징은 신학의 가장 큰 특징은 신학의 강조점이 바뀐데 있다.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으로, 하늘로부터 땅으로, 저승에서 이승으로, 말씀의 전파보다는 인간의 인간화가 강조되었다. 한마디로, 세상성에 대한 발견과 관심이 고조되었다. 1960년대 이후 기독교는 전반적으로 세속화되고 신학은 급진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신학적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본회퍼였다. 그의 핵심사싱이자 혁명적인 개념인 무 종교적 시대와 무종교적 기독교, 혹은 성인된 세계와 성서 개념의 비종교적 해석은 기독교 신학계에는 큰 충격을, 젊은 신학자들에게는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세계신학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특히 그가「옥중 서간」에서 주장한 “성서 개념의 비 종교적 해석”은 기독교이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세속화신학, 사신신학, 상황윤리등이 그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고, 정치신학, 혁명신학, 해방신학이 간접적으로 연관되어있다. 이러한 급진 신학의 중심에는 항상 본회퍼의 사상이 자리잡과 있다. 비기독교인까지도 사로잡는 본회퍼의 매력은 그의 삶과 사상의 일치에서 찾을 수 있다. 히틀러의 독재정권에 용기있게 항거하고 저항한 끝에 투옥되어 39세에 처형당한 그의 삶은 그가 강조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의 삶의 실현이었다. 따라서 그의 사상을 이해하기위해서 그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Ⅰ. 생애와 저작

 

1906년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명문가 집안의 쌍둥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저명한 신경정신과 의사였고 어머니는 경건한 신앙의 소유자였다. 그는 열 살때 모차르트를 연주할 정도로 음악에 재능이 있었으며, 한때는 전문음악가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1923년 튀빙겐 대학에 입학 다방면에 걸쳐 폭넓게 공부했다. 특히 그가 로마를 방문했을 때, 베드로 대성당을 보고 교회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훗날 그리스도와 교회를 신학이 중심 주제로 삼았다. 1924년 베를린 대학으로 학교를 옮겨 100여 년의 전통을 지닌 자유주의 신학의 본산지 베를린 대학은 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쇠퇴하기 시작한 자유주의 신학의 마지막 보루였다. 자유주의 신학을 대중화 시킨 하르낙이 정년 퇴임중임에도 강의는 계속하고 있었으며 저명인사들이 교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본회펴는 이들을 통해 자유주의 신학과 역사 비평적 방법에 익숙하게 되었다. 이웃에 살며 친하게 지냈던 하르낙은 본회펴를 사랑했을 뿐 아니라 교회사를 전공하기를 권했지만 본회퍼는 조직신학을 더 좋아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 역시 조직신학에 관한 것이다. 1928년 그는 목사로 활동하기도 했다.1930년 베를린 대학에서 강사자격을 얻었으며 베를린 대학 교수로 활동하면서 그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열성적이었다. 본회퍼의 삶에 결정적ㅇ니 영향을 미친 두 사건은 히틀러의 집권과 2차세계대전이었다.  그것은 순수하게 신학 연구에 몰두하던 신학자 본회펴를 투사로 만들어 일생을 투쟁과 항거로 일관하게 만들었다.

 

전자는 그가 고배교회운동에 참여하여 교회 투쟁을 하게했으며, 후자는 그로하여금 히틀러 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지하 저항운동에 가담하게 했다. 나찌당은 1932년 의회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하여 의회를 지배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1933년 1월 30일 제3공화국의 총통이 되었다. 나찌당은 기독교와 빈족주의적 사회주의를 종합할 뿐만 아니라 독일 교회를 장악하려는 시도로 “독일 기독교 신앙 운동”을 조직했으며 많은 목사들이 여기에 가담했다. 따라서 독일 기독교는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루트비히 뮐러를 중심으로 한 “독일적 그리스도인들”로 나찌당을 지지하고 민족적 기독교를 주장하여 기독교를 게르만화하고자 하는 기독교 운동이다. 본회퍼가 속한 “옛 프러시아 연합교회”는 유대인이 교회내에서 직책을 가지는 것을 금지했다. 다른 하나는 뉘밀러가 주도한 독일 복음주의 고백교회 운동이다. 이 운동은 독일적 기독교 운동에 항거하여 일어났으며 1934년 조직화되었다. 바르트가 기초한 이 신앙 고백서가 “바르멘 선언”이다.

 

1933년 히틀러가 총통이 된지 단 이틀 후에, 본회퍼는 베를린 방송을 통해 “젊은 세대에 있어서 지도자 개념의 변화”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중도에 중단된 이 연설은 새로운 지도자의 개념을 직책이 아닌 사람에게두는 우상적인 지도자 원리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그는 “교회와 유대인 문제“라는 논문을 발표 유대인 문제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분명히 하였다. 1933년 본회퍼는 런던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 고백교회운동을 계속했으며 이에대한 영국 교회의 지지를 촉구했다. 그는 간디의 비폭력 저항법을 연구하기위해 인도로 갈 계획이었으나 독일 고백교회의 신학교 설립의 요청으로 신학교의 책임을 맡았다. 이 학교는 신학적 연구와 영적 훈련과 실천의 종합을 강조하는 고백교회의 지도자 양성소였다. 1937년 신학교가 비밀경찰에의해 폐쇄되자 「성도의 공동생활」을 저술했다.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길을 해명한 것이다.

 

특히 ”나를 따르라”는 그의 생존시 출판되어 독자들에게 큰 감명을 준 그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그를 세계적인 인물로 만든 저서였다. 1939년 라인홀드 니버와 레만의 주선으로 미국에서 강의하기위해 갔으나 전쟁이 임박한 고국을 떠난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편치않았다. 7월 초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독일로 돌아왔다. 한편 9월1일 히틀러의 군대는 결국 폴란드를 침공했으며, 이에 대응하여 이틀 후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대해 선전 포고를 했다. 1940년 여름, 학교가 폐쇄되고 온갖 저술활동이 금지당했고 독일 군정보부 법률 고문이었던 매부 도나니의 배려로 군정보부의 민간인 정보요원으로 채용되어 뮌헨 사무소에 배속되었다. 한편 도나니를 통해 알게된 지하 저항세력의 히틀러 암살 계획에 적극 가담했다. 미친 운전사가 대로로 자동차를 몰고 간다면 그 자동차에 뛰어올라 핸드을 빼앗고 자동차를 멈추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윤리학」을 저술하기 시작했는데 본회퍼는 그리스도가 교회에 어떻게 관계되는 가의 문제보다 오히려 교회와 그리스도가 세상에 어떻게 관계되는가 문제에 더 관심이 많았다. 1943년 체포되어 형무소에서 18개월동안 반복된 심문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많은 책을 읽었으며 성경을 깊이 연구했다. 현대 세계에 있어서 기독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사색하며 검토했다. 이곳에서 그의 핵심사상인 “성인된 세계”와 “성서적 개념의 비종교적 핵석”에 대한 개념이 형성된다. 그는 세계가 중세 이후 세속화의 과정을 겪어왔으며, 인간은 점진적으로 “성인된 세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신학적 성서적 개념에 대한 종교적 견해를 폐기하고 비종교적 해석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옥중 서간은 20세기 후반의 신학적 흐름을 바꾸어놓을 정도로 큰 영향을 비쳤다. 1945년 4월 9일 새벽, 미군이 그 지역을 해방하기 직전 교수형에 처해졌다.  

 


Ⅱ. 성인된 세계

 

본회퍼는 13세기에 시작된 인간의 자율성을 위한 운동은 이제 완성의 단계에 도달했으며, 인간은 더 이상 종교나 하나님에 의존하여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는 성인된 세계에 이르렀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옥중 서신에서 성인된 세계 혹은 무종교 시대의 도래를 선언했다. 성인된 세계는 종교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이다. 종교가 필요없는 시대가 성인된 시대이며 “당시의 종교적 상황에 대한 진단이다. 그 예측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자율성과 세계이 자주성, 그리고 세계의 비신격화와 세상성의 발견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종교적인 세상의 의미를 극복하고 성인된 세계를 긍정하는 것을 말한다. 본회퍼는 죄와 죽음을 인간 실존의 한계상황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해결하기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는 실존 철학이나 전통적 기독교 신학의 입장을 거부했다. 이것은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신앙을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은 우리가 인간능력의 한계나 급한 상황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것을 부정하는 동시에, 인간이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어려울 때만 해결해주는 해결사나 곤란한 틈을 메워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삶의 중심에서 이해해야 한다. ”한계상황에서가 아니라 삶의 한 가운데서, 인간의 약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강함에의해서, 죽음과 죄가 아니라 삶과 인간의 선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는 성서의 복음으로부터 종교의 옷을 벗겨 버리려고 했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는 인간 자신의 영혼에 대한 관심 또는 세계를 초월한 하나님에 대한 형이상학작 해석을 의미한다. 너무도 젊은 나이에 죽은 그는 신학의 완결을 내놓지 못하여 후대의 과제로 남아있다.

 

 

>> 목차고리 : 본회퍼, 조직신학자 

>> 연결고리 : 본회퍼

 



   


A-Z




  인기검색어
kcm  1750234
교회  937301
선교  892640
예수  842849
설교  746144
아시아  654455
세계  630638
선교회  604692
사랑  596075
바울  591627


[배너등록]
 

 


홈페이지 | 메일 | 디렉토리페이지 | 인기검색어 | 추천사이트 | 인기사이트 | KCM 위젯모음 | 등록 및 조회

KCM 찾아오시는 길 M1000선교사홈 미션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