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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8-15
 제목  폴 틸리히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의 상관관계
 주제어  [폴틸리히] [신론]
 자료출처  金均鎭 연세대 교수  성경본문  
 내용

틸리히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의 상관관계

(The Corelation between god and man according to P. Tillich)

金均鎭 (현대와 신학, Vol.12 No.-, [1989])

 

 

 

I. 틸리히의 "중재의 신학" 신학의 역사를 회고할 때 모든 신학은 의식적이든 아니면 무의식적이든 언제나 "중재의 신학"이었다. 또 신학은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전승된 진리와 그 시대를 중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전승과 그 시대를 중재하는 것은 신학의가장 근본적인 과제라고 하겠다. 그 시대의 문제들과 가능성과 관계없는 신학은 그 시대에 대하여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 반면 기독교의 전승과 관계 없는 신학은 그 시대의 흐름에 영합하는 기회주의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기독교의 전승된메시지의 정체성과 그 시대에 대한 의미를 언제나 유의해야 한다. 파울 틸리히(1886-1965)는 이 두가지 문제를 유의하면서 신학과 시대를 중재하려고 하있던 20세기 초반기의 가장 대표적인 신학자였다.1) 그의 신학은 철저히 "중재의 신학"이고자 한다.2) 이 과제를 위하여 그는 "상관 관계의 방법"(Methode der Korrelation)을 발전시키고 그의 신학 전체를 이 방법에 근거시킨다. 그의 조직 신학은 물론 문화, 예술, 학문, 정치에 대한 그의 종교적 해석은 "상관관계의 방법"에 따라 맺은 열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현대세계의 세속화를 받아들이며 인간의 자율성을 인정한다. 그는 모든 종교적인 타율과 세속적 통치에 대한 기독교의 요구를 거부한다. 그는 자율성을 가진 인간에게 그의 존재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제시하고 현대문화의 잘못된 방향 곧 종교에 대한 적대적인 방향을 시정하고자 한다. 틸리히의 견해에 의하면 신학의 과제는 기독교의 영원한 메시지를 그 시대에 대하여 해석하고 그 시대에 대한 메시지의 타당성 내지 의미를 제시하는 데에 있다. 그것은 "기독교의 메시지를 진술해야 하며" 이와 동시에 "모든 시대에 대하여 이 진리를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3) 이러한 과제를 가진 신학은 언제나 두 극 사이에 서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와 이 진리가 수납되어야 할 그 시대의 상황이라고 하는 두 극 사이의 긴장관계 속에 서 있다. 보수주의의 오류는 소위 "무시간적인" 진리에 집착하고 그 시대의 상황에 대하여 관련성이 없는 과거의 진리를 선포하는 데에 있다면, 자유주의의 오류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그 시대의 종교적 질문들을 다루는 데에 있다. 신학의 올바른 과제는 이러한 일방성을 극복하고 기독교의 전승된 진리와 그 시대의 상황을 중재하며 양자의 상호 관계를 회복하는 데에 있다. 참 신학은 "답변 하는 신학", "변증적 신학"이다. 그것은 그 시대의 "상황이 제시하는 문제를 답변한다. 그것은 영원한 메시지의 힘 속에서 그리고 그 시대의 상황이 제공하는 개념의 수단을 가지고 그 시대 상황의 문제들을 답변한다"(12) 이리하여 신학은 기독교의 전승된 메시지를 그 시대에 대하여 변증한다. "변증적인 신학은 답변하는 신학이다" 그것은 "질문과 답변, 상황과 메시지, 인간의 실존과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상호 관계시킨다.(15)

 

이러한 통찰에서 틸리히는 바르트의 신학에서 그가 발견하는 "이분법의 신학"을 반대하는 동시에4) 트뢸취익 신학에서 발견하는 "종합의 신학''을 반대한다.5) 이 두 가지 신학의 일방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그의 신학은 상황 속에 포괄되어 있는 문제를 분석하여 내고, 이 문제들에 대한 답변을 기독교의 메시지에서 발견하여 제시하고자 한다. 문제와 답변의 상관관계를 통하여 메시지와 시대 생활의 상관관계가 형성된다. 여기에서 틸리히가 보는 문제는 어떤 문제인가? 이 문제는 궁극 이전의(vorletzte)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 문제, 제약된 문제가 아니라 무제약의 문제 곧 절대적(unbedlngte) 문제이다. 다시 말하여 그것은 존재의 근거와 삶의 의미에 대한 "실존적 문제"이다. 이 문제가 드러날 때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계시를 통하여 답변하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문제와 답변, 메시지와 상황을 연결시키는 틸리히의 상관관계의 방법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세계의 존재론적 상관관계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문제에 답변한다. "하나님의 답변의 인상(Eindruck) 속에서 인간은 그의 문제를 제기한다·"(75) 그러므로 신학은 "인간의 실존 속에 포괄되어 있는 문제들"을 끄집어 내고 "하나님의 자기계시 안에 있는 답변들"을 이 문제와 관련하여 제시해야 한다.(ib.) 이 논문에서 우리는 틸리히의 조직신학적 사고에 있어서 초석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하나님과 인간의 존재론적 상관관계를 해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메시지와 그 시대를 중재하고자 한 신학의 한 모델을 제시하는 동시에 그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해명함으로써 중재의 올바른 방향을 암시하고자 한다. 이 논문의 연구 범위는 주로 틸리히의 조직신학 제1권에 제한되어 있음을 미리 밝혀 둔다.



II. 존재로서의 하나님 먼저 틸리히는 하나님을 "존재"(Sein)라고 정의한다. "Sein"이란 우리 말로 쉽게 나타낸다면 "있음"을 뜻한다.6) 그것은 "다른 존재자 옆이나 위에 있는 한 존재자의 실존"이 아니다. "만일 하나님이 한 존재자라면 그는 유한성의 범주들 특히 공간과 실체의 범주들에게 예속되어 있을 것이다."(273) 그는 많은 존재자들 곁에 있는 한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 자체" 곧 "있음 자체"(Sein-Selbst)이다. "만일 그가 존재 자체가 아니라면 그는·‥ 제우스가 운명에 예속되어 있는 것처럼 존재에 예속되어 있을 것이다."( ib.) 또한 틸리히에 있어서 하나님은 "존재의 근거(Grund)"라 불리우기도 한다. 그는 이 세계의 많은 존재자들 가운데에 한 존재자가 아니라 그들의 존재 근거이다. 그는 존재자들의 한 부분적 현실이 아니라 "현실의 궁극적 근거"이다. 그러나 그는 모든 존재자들을 통하여, 그들의 전체성을 통하여 파악되지 않는 신비로 남아 있다. 다시 말하여 그는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의 "심연"이다(96) 그는 모든 존재의 "Grund인 동시에 Abgrund''이다.(133) "존재", "존재자체", 존재의 "근거와 심연"으로서의 하나님은 틸리히에 있어서 "존재의 구조의 근거"라 불리우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이 구조에 예속되어 있지 않다. 이 구조가 그 안에 근거되어 있다. 그는 이 구조이다.(276)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이 구조에 참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유한한 방법으로 참여한다. 그들은 유한하기 때문이 다. 이와 같이 다양한 개념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을 이게 틸리히는 "비존재"(Nichtsein)와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비존재란 "존재의 부정''이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비존재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이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고 그에게 "일종의 존재를 부여한다"(219) 모든 존재자는 본래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없었음 즉 비존재로부터 온다. 이와 동시에 그들은 아직 …가 아니며 언젠가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달리 말하여 그들은 존재하는 동시에 "아직 … 가 아님"이라는 비존재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언젠가 비존재로 돌아갈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여 모든 존재자는 비존재로부터 와서 비존재에 참여되어 살다가 비존재로 돌아 갈 것이다. 이러한 비존재는 단순히 존재의 결함을 뜻할 뿐 아니라 존재에 대한 위협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모든 존재자들을 무(無)로 폐기시키고자 한다. 이와 같이 비존재라는 하나의 정체된 개념이 파괴적 역동성을 가진 개념으로 이해됨에 따라 존재의 개념도 역동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즉 존재 곧 하나님은 "비존재로 말미암은 위협에 대항하는 무한한 존재의 힘"이요 "무한한 용기의 근거"이다.(79) 그것은 있지않음(Nicht-Sein)에 대립하는 힘이다. 달리 말하여 "존재를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안에 있는 존재의 힘"이다. 하나님을 존재 자체라고 말하는 대신 우리는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 그리고 모든 것 위에 있는 무한한 존재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존재에 내재하는 힘", "비존재(Nichtsein)에 대항하는 힘이다".(273) 존재, 존재자체, 존재의 힘, 존재의 근거로서의 하나님은 틸리히에 의하면 "내재성과 초월성"을 동시에 가진다:1) "존재의 힘으로서의 하나님은 모든 존재자와 모든 존재자의 전체 곧 세계를 초월한다.… 존재자체는 모든 유한한 존재를 무한히 초월한다.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정도의 차이가 없다. 양자 사이에는 절대적 단절, 무한한 '비약'(Sprung)이 있을 뿐이다."(275)7) 2) "다른한편 모든 유한한 것은 존재자체와 그의 무한성에 참여한다." 만일 그렇지않다면 유한한 존재는 그의 존재를 폐기하려는 비존재의 위협을 이기고 존재할 수 있는 힘 곧 존재의 힘을 갖지 못할 것이다. 그는 비존재로 돌아 갈 것이다.(ib.) 존재자체의 이러한 양면성으로 인하여 모든 유한한 사물들과 존재자체 곧 하나님은 마음과 같은 양면적 관계를 가진다. 1) "모든 사물은 무한한 존재의 힘에 참여한다." 2) "모든 사물은 단지 유한한 방법으로 존재의 힘에 참여하여 모든 존재는 그들의 창조적 근거를 통하여 무한히 초월된다."(ib.) 그럼 틸리히가 하나님을 모든 유한한 존재자들이 참여되어 있는 존재 혹은 존재자체로 보는 동기는 어디에 있는가? 틸리히는 하나님을 많은 존재자들 가운데에 한 존재자로 보는 것을 철저히 거부한다. 만일 그가 이러한 존재라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을 하나의 인격적존재로 생각할 때 바로 이러한 위험성이 나타난다. 인격적 존재로서의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인 인간과 같은 부류에 속한 존재, 많은 인격적 존재들 가운데에 한 인격적 존재가 될 것이며 더 이상 그들의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인격적 하나님이란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같은 한 인격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격적인 것의 근거이며 자기 자신 안에 인격성의 존재론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274)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모든 다른 존재자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틸리히는 하나님을 "존재", "존재자체", "존재의 힘",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문제되는 것"(영어로 "궁극적 관심")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이 과연 성서 안에서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인가, 하나님이란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문제되는 것"에 대한 "상징"에 불과한가의 문제는 틸리히의신학 전체에 대한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다.8)



III. 존재로서의 하나님과 유한한 존재자 그럼 존재로서의 하나님과 유한한 존재자들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은 바로 위의 문장에 제시되어 있지만 좀 더 자세히 기술하여 보기로 하자. 하나님이 존재, 존재자체, 존재자들을 존재하게 하는 힘이라고 할 때 모든 존재자들은 하나님에게 참여하고 있고 하나님은 그들의 존재의 힘으로서 그들안에 내재한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모든 사물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 혹은 존재자체에 참여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들은 존재자체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의 힘을 얻어 존재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은 비존재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존재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비존재에 참여한다."(219) 모든 피조물은 "비존재를 포괄한다." 그러나 피조물은 비존재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힘을 지니고 있으며, 존재의 힘은 존재자체에의, 존재의 창조적 근거에의 참여이기 때문이다."(292) 이와 같이 모든 사물은 존재 자체에 참여하는 동시에 비존재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유한하다. 그들은 비존재로부터 왔고 비존재를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유한하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집약적으로 말한다: "피조물이란 두 가지를 뜻한다. 그것은 신적인 삶의 창조적 근원에 뿌리박고 자기자신을 자유롭게 실현하는 것을 뜻한다. 창조는 피조물의 자기실현에서 성취된다…그러나 이 성취는 창조적 근원으로부터의 분리를 통하여, 본질과 실존의 단절을 통하여 일어난다."(295) 하나님과 피조물의 이러한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에게도 해당한다. 인간은 실존한다. 실존한다는 것은 그의 본질로부터, 궁극적으로 존재자체로부터 분리되어 있음을 뜻한다. 그는 존재자체 안에 근거되어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 위에"서서 그의 유한한 자유를 실현하기 위하여 존재의 근거를 버렸다. 이제 그는 비존재에 참여하고 있다.(294) 조직신학 제2권에서 틸리히는 이것을 좀 더 분명히 말한다. "실존한다" 혹은 존재한다는것은 절대적인 비존재로 "나와 있는 것 (heraussteht)", 그리하여 "두 가지 안에 다시 말하여 존재와 비존재 안에 동시에 있는 것"을 말한다.9) 종합적으로 말하여 실존한다는 것은 "절대적 비존재로부터 나와 있으면서도 그 안에 머무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유한한 존재, 존재와 비존재의 통일성을 뜻한다.10) 인간은 바로 이 유한한 존재 곧 존재와 비존재의 통일성이다. 그는 "존재에 참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존재에 참여하고 있다."(219)달리 말하여 인간은 하나님에게 참여하는 동시에 비존재에 참여하고 있다.



IV. 존재론적 요소들의 긴장관계 안에 나타나는 불안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세계의 모든 사물들은 존재하는 한 존재자체에 참여하는 동시에 비존재를 자기 안에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존재를 폐기하고 그를 비존재로 삼키려고 하는 위협을 당한다. 모든 사물들은 실존하는 한 이 위협을 피할 수 없다: "비존재를 통하여 제한된 존재가 곧 유한성이다. 비존재는 존재의 '아직 아님'(Noch nicht)으로서 그리고 '더 이상 아님'(Nicht nicht)으로서 나타난다. 그것은 존재를 가진 것을 존재의 종식을 가지고 위협한다. 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해당한다…."(222) 그러므로 세계의 모든 사물들은 존재하는 한 비존재에 대한 불안을 벗어날 수 없다. 이 불안은 다음의 세 가지 쌍의 존재론적 요소들의 "존재론적 긴장관계"들의 파괴와 이로 말미암은 "존재론적 구조"의 파괴에 대한 불안으로 나타난다 :11) 1) 개체화 - 참여(Individualisation-Partizipation) :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고자 한다. 그는 자기를 다른 존재로부터 구분하고 개체화시킴으로써 자기 동일성을 가질 수 있고 개체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무관계성과 고독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으며 그들에게 참여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은 개체성의 상실과 집단화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개체화로 말미암은 고독의 위협을 당하는 동시에 참여와 관계성으로 말미암은 개체성의 상실과 집단화의 위협을 당한다. 달리 말하여 ''자기 관계성(Selbstbezogenheit)은 세계와 사귐이 그 속에서 상실될 수 있는 고독의 위협을초래한다. 그 반면 세계 안에 존재함과 세계에의 참여는 완전한 집단화(Kollektivierung), 개체성과 주체성의 상실의 위협, 그리하여 자아가 그의 자기 관계성을 상실하고 포괄적인 전체의 단순한 한 부분으로 변형될 수 있는 위협을 초래한다."(233) 그러므로 인간은 개체화와 참여, 고독과 집단화 사이에서 흔들리며, 한쪽이 상실됨으로써 다른 한 쪽마저 상실하고 그리하여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을 느낀다. 이 불안은 사실상 비존재로부터 온다. 2) 역동성 - 형식(Dynamik-Form) : 이 두 가지 요소들도 하나의 존재론적 긴장관계를 형성하며 이 긴장관계가 파괴될 수 있음에 대한 불안을 일으킨다. "역동성은 존재가 그 속에서 실제로 있을 수 있고 비존재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지는 형식을 추구한다. 이와 동시에 역동성은 경직된 형식들 속에서 상실될 수 있으므로 위협을 받는다. "역동성이 형식을 깨뜨리고 그 자신을 관철할 경우 카오스가 생성될 수 있다. 그 반면, 형식이 고정되어 버릴 경우 역동성이 상실되고 모든 것이 경직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의 생동력이 그 속에서 상실될 수 있는 궁극적 형식의 위협에 대만 불안 속에 있는 동시에, 생동력과 의도성(Intentionalit?t)이 그 속에서 상실될 수 있는 카오스적 무형식의 위협에 대한 불안 속에 있나."(ib.) 3) 자유-운명(Freiheit-Schicksa1) : 인간은 운명의 필연성으로 인하여 그의 자유를 상실할 수 있는 위협을 받는 동시에 자유 안에 있는 우연성으로 인하여 그의 운명을 상실할 수 있는 위협을 받는다. 그는 자기의 운명에 대하여 자의적으로 (wullk?rlich) 저항함으로써 자기의 자유를 지키고자 하는 위험 속에 있는 동시에, 자기의 운명을 포기함으로써 자기의 운명을 구하려고 하는 위험 속에 있다. 자유롭고자 할 때 그의 운명이 상실될 수 있는 반면, 운명을 구하고자 할 때 자유를 상실할 수 있다. 결정론과 비결정론(Determinismus, Indeterminismus) 사이의 오랜 논쟁은 자유와 운명의 존재론적 긴장관계가 객관적으로 나타난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두 극 가운데에 한 극을 인정하는 점에 있어서 타당하지만 다른 극을 부인하는 점에 있어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결정론자는 운명을 인정하지만 인간의 자유를 보지 못하는 반면, 비결정론자는 자유를 보지만 인간의 자유가 운명의 그물에 얽혀 있음을 보지 못한다. 인간은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 우연한 행위들이 일어나는 무대에 불과하지도 않지만 운명의 기계에 불과하지도 않다. 그는 "자유와 운명의 동일체"이다.(235) 그러나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한 극이 상실됨으로써 다른 극이 상실되고 그리하여 비존재에 삼켜질 수 있는 불안 속에, 다시 말하여 비존재의 위협과 불안 속에 있다. 인간은 존재하는 한 존재론적 긴장관계를 파괴하고 그를 비존재로 폐기시키려고 하는 비존재의 위협과 이로 말미암은 불안을 벗어날 수 없다. "유한성은 자신의 존재론적 구조를 상실하고 이리하여 자신의 자아를 상실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유한하다는 것은 위협을 받는다는 것을 뜻한다."(ib.) 그러므로 인간은 존재하는 한 불안 속에 있다. 이 "불안은 극복될 수 없다. 어떠한 유한한 존재도 그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224)12) 이 불안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존재하기 위하여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이 용기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 틸리히에 의하면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에 관한 질문은 유한한 존재 안에 주어져 있다. "하나님은 존재 안에 포괄되어 있는 문제에 대한 답변이다."(193) "하나님의 문제를 존재 안에 포괄되어 있는 문제로 발전시키는 것"이 신론의 과제이다.(196)



IV. 유한성의 범주에 나타나는 불안과 하나님에 대한 질문 틸리히에 의하면 비존재로부터 오는 존재의 위협과 이로 말미암은 불안은 유한성의 범주들 안에도 나타난다. 말의 형식인 동시에 존재의 형식인 범주는 모든 사물들의 "존재"를 나타내는 동시에 그들이 예속되어 있는 "비존재"를 나타낸다. 이제 틸리히는 시간, 공간, 인과율, 실체의 네 가지 범주의 존재적 요소(=긍정적 요소)와 비존재적 요소(=부정적 요소)를 분석하고 이 두 가지 요소의 갈등에서 오는 불안을 이길 수 있는 용기에 대한 질문을 하나님에 대한 질문으로 해석한다.


1) 시간 : 시간은 "유한성의 중심적 범주"이다.(226) 시간의 긍정적인 요소는 새로움을 향한 창조적 과정이라는 점에 있다면, 시간의 부정적인 요소는 "모든 시간적인 것의 허무성", 쉬지 않고 흐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재의 순간을 고정시킬 수 있는 불가능성"에 있다. 인간의 자아와의 관계에서 시간의 부정적 요소 곧 허무성은 "불안"으로 나타나고, 시간의 긍정적 요소는 "용기"로 나타난다. 구체적으로 말하여 시간의 허무성은 죽음에 대한 불안으로 나타나는데, 이 불안 속에서 비존재가 내면으로부터 경험된다. 이 불안은 모든 순간순간마다 잠재적으로 현존하여, 인간의 존재 전체를 포괄하여 영과 육을 형성하고 정신적 삶을 규정한다. 불안은 존재의 피조물적인 성격에 속한다. 그러나 인간은 비존재와 관련되어 있는 동시에 존재자체 곧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존재의 용기를 얻는다. 이 존재론적 용기로 인하여 그는 불안을 이기고 현실을 인정한다. 현실을 인정한다는것이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는 아직 그 자신의 것이 아닌 미래를 표상할 수 있는 동시에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과거를 회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거기에서 소외되어 있는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미래에 대하여 자기의 현재를 방어해야 하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의 존재론적 용기의 궁극적 근거에 대한 질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227)


2) 공간 : 시간과 마찬가지로 공간도 유한성의 범주이기 때문에 존재와 비존재, 불안과 용기를 결합시킨다. 존재한다는 것은 공간을 가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자기를 위하여 공간을 얻으며 공간을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먼저 신체, 땅, 집, 도시, 세계등의 "물질적 공간"을 얻고자 하며 나아가서 직업, 영향권, 단체, 역사적 시대, 문화의 장소 등 "사회적 공간"을 얻고자 한다. 아무 공간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공간을 얻고자 하는 모든 존재의 노력은 "존재론적 필연성"이요 "유한한 존재의 공간적 성격의 결과(Folge)이며 인간의 본질적 자질(Wesensqualit?t)"이다.(228) 이와 같이 모든 존재는 공간을 가지고 있지만 이와 동시에 궁극적으로 자기의 것이라 살 수 있는 공간을 가지고 있지 않다. 모든 유한한 존재는 "땅 위에 있는 순례자"이기 때문에 그가 가진 공간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다. "유한성이란 아무런 특별한 공간도 갖지 않음을뜻한다. 그것은 모든 장소를 결국 상실하며 이리하여 그의 존재를 상실함을 뜻한다."(228) 달리 말하여 모든 유한한 존재는 존재하는 한, 공간을 가진다. 그는 존재자체와 관계되어 있다. 이와 동시에 모든 유한한 존재는 자기의 공간을 상실함으로써 비존재로 돌아갈 수 있는 위협 앞에, 다시 말하여 비존재의 위협을 당한다. 그는 존재자체와 관계되어 있는 동시에 비존재와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안"은 자기의 공간을 상실할 수 있으며 아무런 궁극적 공간을 갖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아무 특별한 공간도 갖지 않으며 아무런 궁극적 공간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최후의 불확실성 (Unsich-erheit)을 뜻한다. 유한하다는 것은 불확실하다는 것을 뜻한다.''(228) 이 불확실성으로 인하여 인간은 불안을 느낀다. 이 불안을 인간은 억압할 수 있으나 추방할 수 없다. 인간은 존재하는 한 비존재에 참여되어 있고 그래서 자기의 공간을 상실하고 존재하지 않게 되는 비존재의 위협을 피할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인간은자기의 현재를 인정하고 자기의 현재와 함께 공간을 긍정하는 용기를 얻는다. 이 용기가 그에게 있기 때문에 그는 공간 상실의 위협에 저항하고 자기의 공간을 유지한다. 모든 사물은 "존재론적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며 이 받아들임을 통하여 확실성을 얻는다. 그러나 이 용기가 어떻게 가능한지, "어떻게 한 존재가 공간의 일시적 상실이나 궁극적 상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발견할 수 있는가? "의 문제를 모든 사물은 벗어날 수 없다.(229)


3) 인과율(Kausalit?t) : 시간, 공간과 마찬가지로 인과율도 존재를 나타내는 동시에 비존재를 나타낸다. 인과율은 어떤 사물이나 사건의 원천을 가리킬 수 있는 힘이다. 어떤 사물이 인과율적으로 설명될 때 그 사물의 실재(Realit?t)가 인정되며 비존재에 대한 그 사물의 저항의 힘이 인정된다. 그러므로 "원인을 찾는다는 것은 어떤 사물의 존재의 힘을 찾는 것을 뜻한다."(ib.) 그러나 어떤 사물이나 사건의 원인을 찾는다는 것은 것은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도 "존재할 수 있는 그 자신의 힘을 갖고 있지않음을, 사물들이나 사전들은 아무런 Aseit?t(a+se, 자기 자신으로부터, 필자)를 갖고 있지 않음을 전제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인과율에 따라 그들의 원인을 찾는다. 따라서 "인과율은 자기 자신에게 근거할 수 없는 모든 사물들의 무능력을 나타낸다…. 그것은 모든 사물 속에 있는 비존재의 심연을 강력히 나타낸다."(229) 모든 사물들이 "자기 자신 안에,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통하여 존재할 수 없으며 'Aseit?t'를 갖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그의 존재 자체에 있어서 "불안"을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피조물이다. 그의 존재는 우연하며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은 아무 필연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존재의 필연성의 결핍에 대한 불안을 느낀다. 그러나 인간은 "용기"를 얻는다. 인간은 이 용기를 통하여 모든 유한한 것의 인과율적 의존성에 대한 불안을 극복한다. 이 용기 없이는 어떠한 생명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용기가 어떻게 가능한가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다. 인과율의 고리와 우연성에 의존하고 있는 존재가 이 의존성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이 의존성에 대립하는 필연성을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 인정할 수 있는가?


4) 실체 : 모든 유한한 존재에 있어서 존재와 비존재의 공존을 묘사하는 네번째 범주로서 틸리히는 실체를 말한다. 실체는 생성 소멸하는 "현상의 흐름 밑바닥에 놓여 있는 것, 어느 정도 정적이고 자기자신 안에 근거되어 있는 것"을 가리킨다.(230) 이러한 실체가 있기 때문에 변화가 가능하다. 모든 것을 그들의 기능과 과정 속에 있는 것으로 보는 기능철학이나 과정철학에 있어서도 실체의 문제는 부인될 수 없다. 물론 모든 것은 변화의 과정 속에 있고 가능 속에 있다. 그러나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 "과정 속에 서 있는 것"곧 실체의 존재를 우리는 언제나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그 무엇에 대하여 말할 때 그것(범주로서의 실체)은 언제나 현존하고 있다."(231) 이와 같이 모든 유한한 것 속에는 실체가 있으나 이 실체는 변화로 인하여 상실될 수 있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모든 유한한 존재자는 "그의 실체가 상실될 수 있다는 불안에 차 있다. 이 불안은 계속되는 변화와 실체의 궁극적 상실과 관계되어 있다. 모든 변화는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의 … 비존재(Nichtsein dessen, was sich ver?ndert)를 드러낸다. 변화될 수 있는 실재는 비존재에 대항하는 실체성과 존재의 힘과 저항을 결여하고 있다."(231) 변화하는 것 안에서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것을 찾고자 한 희랍철학의 노력은 자기의 실체와 동일성을 상실하고 비존재로 돌아 갈 수 있음에 대한 불안의 표현이다. 이 불안은 달리 말하여 "변화 속에 포괄되어 있는 비존재의 위협에 대한 불안"이다.(ib.)


그러나 인간은 "용기"를 가지고 개체적 실체와 존재의 보편적 실체를 없애고자 하는 비존재의 위협과 불안을 받아 들인다. 그러나 이러한 용기가 어떻게 가능한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를, 다시 말하여 존재의 요소와 비존재의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는 유한성의 네 가지 범주들을 기술하였다. 이 범주들은 "모든 유한한 것 속에 있는 존재와 비존재의 통일성을 나타낸다." 틸리히는 각 범주에서 부정적인 것으로 말미암은 위협에 대한 불안을 제시하면서 이 불안을 받아 들일 수 있는 용기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 용기의 문제를 그는 하나님의 문제와 결합시킨다. 네 가지 범주들은 "비존재의 불안을 받아 들일 수 있는 용기의 문제를 제기한다. 하나님에 관한 문제는 이 용기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이다.(Die Frage nach Gott ist die Frage nach der M?glichkeit dieses Mutes, 232)


V. 요약 : 존재론적 상관관계 속에 있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의 본래의 존재 혹은 "본질적 존재"로부터 나와 있는 것을 말한다. 그는 실존한다. 그는 실존의 상황 속에서 존재한다. "인간의 실존의 상황은 소외의 상황이다."13) 그는 자기의 본질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그는 존재 곧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있다. 그러나 틸리히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 곧 존재로부터 분리되어 실존의 상황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에게 참여되어 있다. 그는 존재하는 한 존재에 참여되어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14)


바로 여기에 틸리히가 말하는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 사이의 상관관계가 있다. 이 상관관계는 틸리히에 있어서 존재론적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인간에게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안에 선천적으로 주어져 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든 없든, 믿음의 결단이 있든 없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다. 그는 존재하는 한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존재자체이고 인간은 존재하는 한 존재자체와 관련되어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 곧 존재 혹은 존재자체와 관련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상관관계는 존재론적인 것이다. 그런데 틸리히에 의하면 하나님과 인간의 상관관계는 언제나 위협을 당한다. 인간은 비존재로부터 오기 때문에 그리고 언젠가 비존재로 돌아가기 때문에 비존재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곧 인간의 존재를 파괴하고 인간을 비존재로 폐기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유한한 인간은 존재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불안을 느낀다. 그는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지만 이 관계 곧 존재자체와의 관계가 파괴됨으로써 비존재로 돌아갈 수 있다는 불안 속에서 인간은 실존한다. 그러므로 불안은 인간의 실존의 기본정조(Grundstimmung)이다. 이 불안을 틸리히는 위에서 기술한 세 쌍의 존재론적 요소들의 상호 긴장관계를 통하여, 그리고 네 가지 존재론적 범주들의 양면성을 통하여 제시한다. 그러나 인간은 존재 자체 곧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 불안을 받아들이고 계속하여 존재할 수 있는 존재의 힘 내지 존재의 용기를 얻는다. 하나님은 존재의 용기를 주는 "존재의 힘"이다. 비존재의 위협과 이로 말미암은 불안 속에 있는 인간은 이 위협과 불안을 극복하고 존재하기 위하여 언제나 존재의 힘 혹은 존재자체를 질문할 수 밖에 없다. 그는 존재하기 위하여 언제나 존재자체를 문제로 삼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존재자체 곧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문제되는 것"(was uns unbedingt angeht)(20) 혹은 궁극적관심(ultimate concern)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질문은 인간에게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의 유한한 존재 안에 포괄되어 있다. 비존재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인간은 의식적이든 아니면 무의식적이든 하나님 곧 존재자체에 관하여 질문한다. 그는 하나님에 관하여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존재는 비존재의 위협을 당하고 있고 하나님은 이 위협을 받아들이고 존재하게 하는 "존재의 힘''이기 때문이다. 이 힘이 인격화 된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새 존재''이다.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인격적인 삶 속에 "존재의 힘''이 실현되어 있다.15) VI. 틸리히의 문제점과 신학의 중재적 과제 위에서 우리는 틸리히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이 어떤 과계에 있는가를 기술하였고 이 관계를 우리는 상호관계라고 전제하였다.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세계의 모든 피조물을 존재론적 상관관계에서 보려고 한 틸리히의 신학은 틸리히 자신이 살던 그 시대와 하나님의 메시지를 중재하고 이 메시지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연관성 내지 타당성을 제시하고자 한 위대한 시도였다.16) 그러나 틸리히의 신학은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기술함으로써 이 논문을 끝내기로 하자.


첫째, 틸리히에 있어서 인간의 손재 자체는 곧 하나님에 관한 질문이다. 모든 인간의 존재에 있어서 하나님이 문제되고 있다. 거꾸로 말하면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문제되고 있다"(unbedingt angeht) 그런데 이 하나님에 관한 질문 곧 존재 자체에 관한 질문은 "왜 그 무엇이 있고 왜 무는 있지 않느냐''(Warum ist etwas, warum ist nicht nichts?)는 "존재론적 문제"로 제기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인간의 존재 안에 포괄되어 있다. 인간은 "존재에 대하여 질문하는 존재자이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틸리히의 이러한 생각이 성서를 통하여 정당화 될 수 있는가?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질문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 오심으로써 일어나지 않는가? 예를 들어 하나님이 미디안 광야에서 희망 없는 목자의 생활을 하던 모세에게 찾아 왔을 때 모세는 하나님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즉 그가 누구냐고 질문한다. 그리고 모세의 이 질문은 하나님의 백성을 노예생활로부터 이끌어 내야 할 사명과 관계되어 있지 존재냐 아니면 비존재냐 하는 철학적 문제와 관련되어 있지 않다.


둘째, 틸리히에 의하면 하나님 곧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문제되는 것"이 신학의 대상이다. "신학의 대상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문제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문제되는 대상과 관계하는 문장들만이 신학적이다."(20) 그렇다면 우리에게 일시적이며 상대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신학의 대상이 될 수 없는가?17)

지금도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굶주림과 질병의 문제, 인종주의 문제, 경제적, 정치적 억압과 불의의 문제는 신학의 대상이 될 수 없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틸리히의 "중재"의 한계를 발견한다. 그가 시도하는 중재는 하나님과 이 세계의 구체적 문제를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 신론의 경우 틸리히는 비존재의 불안을 극복하고 존재하려는 인간의 실존적 문제와 하나님 사이를 중재시키는데, 이 중재에 있어서 인간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세계적 문제들은 제외되어 있다. 하나님과의상관관계 속에 있는 인간은 이러한 문제들을 가진 구체적이고 사회적인 존재가 아니라 이 모든 문제들로부터 추상화된 존재 곧 소위 "실존적 존재''이다.


세째, 유한성의 존재론적 구조에 대한 틸리히의 분석도 추상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틸리히에 의하면 모든 유한한 존재자들은 존재 자체에 참여되어 있는 동시에 비존재에 참여되어 있으므로 비존재의 위협과 불안을 당하는 동시에 이것을 이기고 존재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이것이 모든 유한한 손재자들의 존재론적 구조이다. 틸리히의 이러한 분석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음을 우리는 지적할 수 있다. 유한한 존재자들의 가장 절박한 불안은 무엇일까? 그것은 생존에 대한 불안이 아닌가? 굶주림, 질병, 실직 등으로 인하여 생존이 위태로워질 때 가지는 불안이 가장 절박한 불안이 아닌가? 오늘날 인간은 생태계의 오염과 파괴로 인하여, 인간 자신이 만든 문명의 이기들로 인하여 생명의 불안을 느끼고있다. 이러한 불안은 틸리히가 분석하는 실존적 불안에 비하여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불안이다. 그것은 인류가 정말 살아 났느냐 아니면 멸망하느냐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개체화와 참여, 역동성과 형식, 자유와 운명의 긴장관계로 말미암은 불안, 유한성의 범주들 곧 시간, 공간, 인과율, 실체의 부정적 요소로 말미암은 불안은 오늘날 개인의 삶과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적인 위협과 불안과는 거의 관계없는 추상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세계 도처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질병과 정치-경제적 독재와 인종차별주의로 인하여 신음하고 있으며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 핵무기로 인하여 세제가 초토화 될 수 있다는 불안,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물론 우리는 이 불안을 직접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불안이 최소한 우리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오늘날 인류가 당하고 있는 이러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불안과 삶의 위협에 대하여 틸리히는 침묵하고 있다. 이것은 틸리히의 신학적 사고가 20세기 초의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결과로 보인다.18)


네째, 틸리히에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는 유한한 존재자들의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들을 있는 그대로 존속케 하는 기능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물론 틸리히는 유한한 존재의 "자기초월"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나 유한한 존재의 자기초월은 그의 존재론적 특성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하나님의 존재로 말미암은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존재는 유한한 존재자들이 당하는 "불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제공할 뿐이다. 이 용기를 가지고 불안을 받아들이고 그리하여 존재자들이 생존케 하는 기능을 틸리히의 하나님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존재의 위협과 불안을 야기하는 원인을 찾고 이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그것을 현실적으로 극복하게 하는 하나님의 기능에 대하여 틸리히는 침묵하고 있다.19) 인간과 상관관계 속에 있는 틸리히의 하나님은 인간의 삶의 현실을 변화시키는 기능을 가진다기보다 이 현실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불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줌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계속하여 생존케 하는 기능을 가질 뿐이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과 인간의 상관관계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미래를 향하여 새로움을 일으키게 하는 역동성의 근원이라기보다 주어진 현실 속에서 불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용기를 통하여 인간이 계속 생존한다 할지라도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와 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고 하나님은 이러한 문제들과는 관련없는, 단지 인간의 실존적, 내면적 불안의 문제와 관련된 분으로 이해되고 있다.20)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세계의 고난 속으로 오셨고 고난당하는 인간과 그의 세계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은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 기다리던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다스리는 현실 곧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실현하는 데에 있다. 하나님의 영원한 메시지와 시대 상황의 참된 중재는 틸리히가 말하는 비존재의 위협과 울안을 극복할 수 있는 "존재의 문제"에 대한 "답변"에 있다기보다 불의와 대립과 갈등과 억압으로 가득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데에 있다. 하나님의 메시지와 그 시대의 참된 중재는 예수께서 매일 기도하라고 가르쳐 준 바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오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죄악으로 가득한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데에 있다. 하나님의 메시지와 그 시대의 상황을 중재하려는 신학이 이 목적을 지향하지 않을 때 그것은 마르크스가 지적하듯이 또 하나의 세계해석이 될 수 있으나 세계변화를 일으키는 데에 기여하지 못할 것이다.


각 주

1 "그의 신학세계는 기독교 진리를 현대인간의 삶의 상황과 연결시켜 재해석하는 변증신학으로서 특정지워진다" : 김경재, 폴 틸리히 신학연구, 1987, p. 5.

2 P. Tillich, Das protestantische Zeitalter 1948, S. 14.

3 P. Tillich, Systematlsche Theologie, I, Stuttgdt, 1955, S. 5. 지금부터 본문의 괄호 안에 기록된 숫자는 이 책의 페이지를 가르킨다.

4 바르트와 틸리히 신학의 방법적 차이에 대하여 : 박봉랑, 폴 틸릭에 있어서의 말씀의 槪念과 그 批判, in : 基督敎思想, 1958, 11월호, p.245.

5 lbid., S. 11 f.

6 김 경재 교수도 "존재"라는 말을 우리 말로 "있음"으로 번역하며 "존재로서의 하나님" 이라는 말만큼 "가깝고 구체적으로 현실적인 것은 없다"고 말함: 김 경재, 폴 틸리히 신학연구, p.585.

7 그러나 하나님이 "존재의 근거"이고 모든 존재자들을 존재하게 하는 "존재의 힘"은 혹은 "있음 자체"라면 어떻게 그의 초월성이 보장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8 틸리히에 있어서 하나님의 대상성과 인격성이 부인되는 것에 대한 비판에 관하여 H. Gollwitzer, Die Existenz Gottes im Bekenntnis des Glaubens, 5. Auff. 1968, S. 129 lf.

9 이에 관하여 P. Tilltch. Systmatische Theologie, II, Stuttgart, 3. Auf1. l958. S. 26. 10 Ibid., S. 27.

11 김 경재에 의하면 존재론적 요소는 "모든 있는 것들의 있음의 양식을 틀지우는 구조적 양극들"을 말한다. 김 교수의 이 말은 틸리히가 말하는 "존재론적 요소"가 무엇인가를 적절히 설명한다 : 김 경재, 폴 틸리히 신학연구, p. 61.

12 인간의 실존에 대한 틸리히의 이러한 분석은 Heidegger의 실존분석과 매우 유사하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실존한다"는 것은 본질을 떠나서 "세계 안에 있음"을 뜻하며 세계 안에 있음은 "본향에 있지 않음"(Das Un-zuhause)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실존의 "기본적인 상태 (Grundbefindlichkeit)는 불안이다. M. Heidegger, Sein und zeit, 1967. S. 184 ff.

13 P. Tillich, Systematische Theologie, II. S. 31.

14 하나님과 인간의 이러한 관계는 Heidegger가 말하는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와 매우 유사하다. 하이덱거에 의하면 존재자는 그의 존재에 있어서 ''존재와 관계한다', ''이 존재자에게는 그의 존재에 있어서 이 존재 자체가 문제되고 있다." : M. Heidegger, Sein und-Zelt, S. 12, 틸리히의 표현을 따른다면 존재는 모든 존재자에게 "절대적으로 문제되는 것"이다. 틸리가 말하는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세계의 상관관계는 하이덱거의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적용한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15 P. Tillich. Systematische Theo1ogie, II. S. 131.136. 이에 관하여 김경재, 폴 틸리히의 신학연구, p.78 ff.

16 G. Strecker(Hrsg ), Theo1ogie im 20. Jahrhundert, Stand und Aufgaben, Uni-Ta-schenb?cher 1238, 1983, S. 370. "틸리히의 관심은 하나님의 현실을 인간과 그의 세계의 현실과 관계시키며 이 속에서 그들의 변증법적 통일성을 제시하는 데에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틸리히의 신학은 변증법적 신학이다."

17 J. Moltmann, Was ist heute Theologie? 1988, S. 87. 틸리히는 하나님을 인간학적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에 관한 질문"은 틸리히에 있어서 "인간의 자기경험으로부터 생성된다. 틸리히에 의하면 유한성은 비존재로 인한 인간의 실존의 위협에서 경험되며 이 속에서 무 자체가 경험된다. 여기에서 생성되는 질문은 비존재보다 강하기 때문에 비존재를 극복할 수 있는 존재에 관한 질문이다." : Ibid., S.88 f.

18 그러므로 틸리히는 실존주의를 "기독교의 자연적인 동맹자"라고 말한다. 이에 관하여 P. Tillich. Systematische Theologie, II, S. 33ff ; Religion und Kultur, 1959, in :Die ver1orene Dimension, Stundenbuch 9, (1962), S. 64 ff.; Auf der Grenze, Aus dem Lebenswerk Paul Tillichs, 1962, S. 42; Existentialanalyse und religi?se Symbole, 1956, GW V, S. 223 ff. 그러나 실존주의의 영향은 그의 사고의 한계를 형성한다.

19 틸리히 신학의 이러한 문제점은 틸리히가 그 시대를 풍미하던 하이덱거의 실존주의 철학이 말하는 존재의 개념을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과 동일시함으로써 야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W. Weischedel은 틸리히가 보편적이고 철학적인 존재의 개념을 하나님과 동일시한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고 비판함;W.Weischedel, Paul Tillichs philosophische Theologie, Ein ehrerbietiger Wiederspuch, in; Der Spannungsbogen, 1967. S. 98f.

20 틸리히의 하나님 표상에 대한 바르트의 비판에 관하여 K. Barth, Antworten und Fragen an Paul Tillich, in Tillichs GW VII. S. 226 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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