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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8-14
 제목  칼 바르트의 해석학
 주제어  [칼바르트]
 자료출처  송창학  성경본문  
 내용

Ⅰ. 들어가는 말

 

Karl Barths Studierzimmer. Foto: Peter Heman, Basel19 세기 하르낙(A.v.Harnack, 1851-1930)과 헤르만 (J.W.Herrmann, 1846-1922)에 의해서 주도된 자유주의 신학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성서 만으로(sola scrpitura)” 라는 표어로 종교 개혁적 전통을 재 수립하고, “말씀의 신학”을 전개한 칼 바르트(K. Barth, 1886-1968)의 신학을 우리는 소위 “변증법적 신학”이라고 특징 짓고 있다. 몰트만 (J.Moltmann) 역시 바르트의 초창기 “변증법적 신학”을 “하나님 말씀의 신학”으로 특징 짓고 있다. 바르트의 초창기 신학에 대한 이러한 解釋은 바르트의 다음과 같은 말에 起因한 것이다: “애초부터 삶에 대한 우리의 긍정(Ja)은 그 안에 신의 부정(Nein)을 수반하고 있으며, 그 부정(Nein)은 반제(Antithesis)로서 일어나며, 그러나 그것은 본래적이고 궁극적인 종합에 대한 명제가 되는 것을 지시한다. 저 부정(Nein)은 마지막에 다다르는 최고의 진리가 아니다. 세상에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물음에 대답을 주는 부름이다.”   그런데 바르트의 신학적 특징을 “성서의 재 발견” 혹은 하나님 “말씀의 신학”으로 특징 지어 해석할 수 있다면, 바르트의 기독론적 변증법은 어떠한 신학 방법인가? 이러한 질문에 답변하기 위하여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 방법을 분석한다.

 


Ⅱ. 칼 바르트(K.Barth)의 기독론적 변증법

 

소위 20 세기 “변증법적 신학운동”은 1920-1930 사이에 바르트, 고가르텐, 불트만, 부루너, 메르쯔에 의해서 1923년부터 1933년까지 발간된 ?Zwischen den Zeiten?를 중심으로한 일종의 신학운동을 뜻한다. 특히 1919 년 바르트가 탐바허(Tambacher)에서 행한 강연 “사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Der Christ in der Gesellschaft)”이란 논문 속에  “명제”, “반 명제” 그리고 “종합명제”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주제를 전개하는 방식이 다분히 변증법적이다1). 이 강연은 로마서 강해 제 1 판 (1919)과 제 2 판 (1922) 사이에 행하여진 것으로서 로마서 제 2 판의 “변증법적 신학” 방법을 아주 간단 명료하게 소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A. 세속적 부정에 대한 긍정으로서의 그리스도 바르트는 “사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란 논문을 “세상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변증법적 종합명제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즉 그는 “그리스도人”이란 말로 그리스도와 사회의 변증적 종합명제를 제시한다. “그리스도人이란 우리 안에 우리 자신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사람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오히려 그리스도 사역의 超歷史的 혹은 救援論的 普遍性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 안(in uns)”이란 의미를 “우리 위 (uber uns)”, “우리의 배후(hinter uns)” 그리고 “우리를 넘어(jenseits uns)”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바르트는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을 피조물인 인간과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혹은 초월적 結合 내지 綜合으로 해석하고 있다.

 

또한 바르트는 신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 곧 인간적인 것의 분리를 기독론적으로 극복한다. 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인간 되심(Gottes Menschwerdung)”이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분리를 극복하는 새로운 운동이다.   “위로부터 아래로”의 운동, 곧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인간 되심”은 흙으로 빚어진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 사이에 가로 놓인 담을 넘어오는 하나의 “수직선적 (die senkrechte Linie)” 운동은,  신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 곧 “인간적인 것”의 기독론적 극복을 뜻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수직선적” 운동 속에서 “전적 타자 (Das gnaz Andere)”로 계신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 이 때에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이 주어지고,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us) 새로운 피조물로 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분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극복되는 과정은 어떠한 변증법적 특징을 갖고 있는가?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수직선적인 운동”, 즉 “하나님의 인간 되심”을 소위 명제 (Thesis), 반명제 (Antithesis), 그리고 종합명제(Synthesis)란 변증법적 용어를 빌어서 설명한다. 그런데 바르트의 변증법적 전개에는 “동시성(Gleichzeitigkeit)”의 특성을 갖는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께서 자신의 義를 세우는 것을 동시적으로 본다. 이러한 동시성을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상의: 역자주) 긍정적인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서 의도했던 부정이다. 반면에 하나님 위에 근거한 것이 아닌 모든 긍정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시적이며, 역설적인 진술은 명제에 대한 반명제 그리고 그 반명제와 명제의 종합으로서의 종합명제라는 식의 발전적 혹은 헤겔적 변증법을 뜻하지 않는다. 바르트는 오히려 종합명제에서 반명제를 본다. 그리고 명제를 반명제의 前提가 아니라, 오히려 반명제 속에 있는 부정과 긍정 사이의 갈등을 극복해야 하는 종합명제의 전제로 본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독특한 변증법을 설명한다: “근원적인 것은 종합명제(Synthesis)이다, 이 종합명제로부터 반명제(Antithesis)가 나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또한 종합명제로부터 명제(Thesis)자체가 나온다.” 이를 다시 바꾸어서 다음과 같이 얘기 한다: “단지 명제로부터 참된 반명제가 나올 수 있다. 참된 반명제란 근원적으로 종합명제에서 나오는 반명제를 뜻한다.” 바르트는 자신의 변증법 도식을 구원사적으로 보충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이 세상의 창조주이시기에 구원자가 될 수 있고, 구원자이시기에 동시에 종말의 심판주가 될수 있다. 그래서 그는 역사의 종합으로서의 종말론을 시간의(역사의) 끝에서 보지 않고, 인간과 하나님의 갈등이 극복된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 사건에서 본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역사의 참된 시작도 창조로부터 보지 않고, 역사의 종합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본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히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역설적 갈등이 기독론적으로 종합되는 것은, 바르트에 의하면, 쌍방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에 의하면 “종합은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된다.” 다시 말하면, “명제 속에서 의도되었던 종합 명제는 반 명제 속에서 단지 찾아졌고”, 밝히 드러났을 뿐이다.  역사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종말은 이미 창조에서 계획된 것이고, 그것은 반명제에 대한 극복 속에서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바르트는 새로운 종말론을 정립한다: “최후의 것, 終末 (εσχατον), 곧 종합은 다음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마지막에 이르는 연속(Fortsetzung), 그 결과(Folge) 결론(Konsequenz)이 아니라, 반대로 모든 잠정적인 것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고, 그러나 또한 바로 (이 잠정적인 것과의 단절)이기 때문에 근원적인 의미을 갖고, 그 잠정적인 것을 움직이는 힘이다.” 이 말은 終末이 이 歷史의 연속이나, 역사적 결과 혹은 끝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것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종합명제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전혀 다른 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아니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을 때에, 우리는 전혀 다른 세계의 백성이 되고, 전적으로 다른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즉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을 입는 것이다(고전 15:53).  바르트에 의하면,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미 창조 때에 하나님에 의해서 계획되고, 목적되었던 것이다. 즉 새 하늘과 새 땅은 먼저번 하늘과 땅이 인간의 죄악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파괴되어서 다시금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 안에서 계획되어지고 목적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탈 세상적으로 이 세상을 부인함으로서 소유 것이 아니라, 창조의 목적이며, 이 역사의 歸港地를 희망함으로서 소유하는 것이다. B. 부정과 긍정의 양면성에 대한 역설적-동시적 해석 바르트는 “사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란 논문에서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예리한 분리를 전제하였던 것과 같이, 그의 논문: “성서적 질문과 통찰과 전망(Biblische Fragen, Einsichten und Ausblick, 1920)” 에서도 성서가 제공해 주는 “하나님 인식”과 우리들이 알고 있는 모든 세속적 지식, 역사적 의미, 그리고 삶의 가치를 철저히 二分하여 대립시킨다.   

 

하나님 인식과 다른 세속적 지식의 예리한 분리 때문에 하나님 인식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부분적으로도 하나님의 인식에 대하여는 전적으로 무능력하고 또 무능력한 상태로 자라났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그는 성서해석에 있어서 루터의 “성서에 의한 성서 해석(scriptura sacra sui ipsius interpres)"을 수용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하나님 인식”을, 우리가 소유하는 모든 지식의 전제로 본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본다. “하나님 인식”을 세속적 모든 인식의 전제로 봄으로서, 그는 “하나님 인식”과 “우리들의 지식”을 “긍정”과 “부정”의 대립 상태로 본다: “그렇게 우리는 긍정(Ja)과 부정(Nein), 그리고 부정과 긍정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하는 말씀의 위기 속에, 그 위기의 당혹함에, 우리 자신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인간적인 것의 부정과 신적인 긍정은, 바르트에게서, 영원한 분리로 끝나지 않는다. 바르트는 세속적 부정 속에는 하나님의 긍정이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 봄으로서 부정과 긍정의 대립 및 갈등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선택으로 극복한다: “선택사상이란 곤경에서 나온 것 이외는 다른 어떠한 말도, 성서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에 관하여 말해야만 했던 것에 관하여 언급될 수 없고, 들여질 수도 없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의 선택 그 사건 이외는 부정과 긍정의 철저한 분리가 극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 선택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인식”과 세속적 지식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는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에 의해서 쓰여진 성서가 어떻게 모든 세속적 지식 내지는 인식을 초월한 하나님 인식을 제공해 줄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바르트도 성서가 하나의 종교적 문서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서의 증언은 그 속에 하나님에 대한 통찰이 있기 때문에 다른 문서와 다르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우리와 “전적으로 다른 분(totaliter aliter)”이신 예수에 대한 통찰이 성서에 있기에 그렇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통찰이 없는 다른 문서들과 성서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서는 세상적 문서들과 내용상 전혀 다른 타자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제기된다: 어떻게 인간적인 통찰이 “전적으로 다른 분”에 대한 통찰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인간이 “전적으로 다른” 하나님을 통찰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점에 있어서도 바르트는 변증법적 사고를 되풀이 한다. 즉 “하나님 인식”이 모든 다른 인식의 전제가 되듯이. 성서는 모든 종교적 증언의 전제이다. 더 나아가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모든 사건의 전제이며, 동시에 종합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역설적으로 해석한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 통치(Gottesherrschaft)”의 시작이고, 시간이 종식된 “영원(Ewigkeit)”이고, “새로운 세계(die neue Welt)”이다, 이 종합에 대한 통찰이 바로 성서가 우리에게 증언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성서의 증언도 철저히 “변증법적”이다. 그의 말을 빌어서 말하면,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은 “거리로부터(von daher)”,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온다. 결론적으로 바르트가 본 성서의 통찰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통찰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인간의 부정적인 요소들에 대한 부정으로서의 하나님의 긍정이라는 점에서 성서의 증언도 다분히 변증법적이라고 그는 확정한다. 이러한 바르트의 논리 전개는 우선 먼저 성서의 특성, 즉 인간의 종교적 문서와 하나님에 대한 통찰을, 분리시키고, 그 다음 분리되어 있는 내용이 그리스도의 사건에 대한 증언이라는 하나의 사실로 종합함으로서 양자의 분리를 극복하여 성서의 독특성을 증언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전개 방식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은 하나의 사실 혹은 사건이 갖고 있는 양면성을 -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 역설적이면서 동시적으로 - 부정을 긍정으로 그리고 긍정을 부정으로 - 해석하는 방법이다. C. 종합 명제에 뿌리를 둔 명제와 반 명제 바르트는 “신학의 과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Das Wort Gottes als Aufgabe der Theologie)” 에서 우선 먼저 3 가지 문장으로서 강연 제목과 관계되는 명제를 설명한다: “우리는 신학자로서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해야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기에 그리고 바로 인간 자체이기에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없다. 우리는 양자, 즉 우리의 당위와 우리의 무능(할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한다.” 우선 바르트는 “우리는 신학자로서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해야 한다”는 명제을 부정적으로 해석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란 존재는 처음부터 존재 문제을 갖고 있는 수수께끼와 같은 존재이기에 하나님에 관하여 얘기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해야 한다”는 과제는 갖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은 “가능성과 불가능성”, “생명과 죽음”, “영원과 시간”이라는 질적 차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해야한다”는 과제는 여전히 곤궁에 빠진 문제로 남게 된다고 바르트는 강조한다. 그러나 “해야 한다”는 과제와 하나님과 인간의 현실적인 질적 차이 속에 內在해 있는 이러한 변증법적 대립(dialektische Konstration)이 극복 될 수 있는 방법은 “새로운 사건”의 발생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사건”은 인간 편에서 일어날 아무런 가능성이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바르트의 첫 번째 명제는 두 번째 명제, 곧: “우리는 인간이기에 그리고 바로 인간 자체이기에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할 수 없다”는 명제로 넘어가게 된다.

 

두 번째 명제가 극복될 수 있는 길은 앞에서 언급한 “새로운 사건”의 발생이다. 이 “새로운 사건”을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 사건으로 특징짓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 사건은 바로 말씀의 화육사건, 즉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사건”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Deus dixit)”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에서 두 명제의 갈등은 기독론적으로, 즉 “말씀의 성육신”, 곧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으로 극복되어진다. 여기서 질문이 제기된다: 어떻게 “해야한다”와 “할 수 없다”의 변증법적 갈등이 “하나님의 화육사건”으로 극복될수 있을까? 바르트가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은, 자기 자신 안에 폐쇄된체 머물어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은 단순히 (자기 자신 안에 머물러 있는: 역자 주) 하나님이 아니다. 그는 또한 무엇인가 다른 존재가 되실수 있는 분이다.

 

자기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하나님이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 바로 하나님이다” 또한 바르트는 하나님을 主-客의 構造(Subjekt-Objekt Schema) 속에서 이해하고자 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은 우리 인식의 대상이 되시는 분이 아니다. 즉 인간은 주체로서 객체인 하나님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도상에 있는 독특하고 고유한 인간 존재(das partikulare Eigensein des Menschen in Wege)”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객체성 속에 계신 하나님이 자신의 충만함을 갖고 인간이 되시는 곳에서, ... 자신을 긍정(Ja)로서 우리의 부정(Nein) 속으로 들어오시는 곳에서, 그 곳에서 만이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되어진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간되심”의 사건이 전제된 곳에서만이, 역설적 해석이 - 부정이 긍정으로, 긍정이 부정으로 - 가능하다. 이러한 전제 속에서 루터의 칭의론(Rechtfertigungslehre: justificatio impii (불경건한 자를 의로 인정함)이 가능하다고, 그는 역설한다. 바르트의 변증법은 이제 역설적 종합에 이른다. 즉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해야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할 수 없다”는 모순이 “하나님의 인간되심”으로 극복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러한 변증법적 도식은 바르트가 “사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란 논문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명제와 반 명제가 종합명제에서 나오는 “주-객 일치 변증법” 즉 “Durch-durch”의 변증법이라고 특징지울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이야기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Ⅲ. 끝맺는 말

 

종교개혁의 신학적 원리였던 “성서만으로”는 20 세기 개신교 신학자 가운데 가장 유명하였던 칼 바르트의 (1886-1968) “변증법적 신학”에 의해서 다시금 회복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바르트는 우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서를 자신의 신학적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바르트가 근세기에 이루어 놓은 신학적 전환 속에, 변증법적 성서 해석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서를 “인간적인 문서”와 “하나님의 말씀” 혹은 성서를 그 내용상 福音과 律法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난 후 그는 이를 다시 화육된 말씀인 그리스도로 결합한다. 이러한 신학 방법을 그의 논문에 따라서 설명하면: 바르트는 우선 먼저 “사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란 통일을 보고, 그 다음 이 사회 속에서 세상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분리하고, 다시금 이 갈등이 기독론적으로 극복 된 것을 기술한다. 더욱이 “신학의 과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 “해야한다”와 “할 수 없다”의 갈등을 극복하는 종합명제가 된다.

 

2) 바르트는 변증법적 展開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 혹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봄으로서의 자신들이 제시하는 종합명제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독론적 변증법을 전개하고 있다. 즉 基督論的 - 화육된 말씀(하나님의 인간되심)으로 - 綜合을 그들 신학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해결점으로 삼는다. 이를 바르트 자신의 변증법적 용어를 빌어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명제의 힘과 반명제의 힘은 근원적이고, 절대적으로 (독자적으로) 태동하고 있는 종합명제의 힘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따라서 바르트의 변증법에서는 헤겔식 변증법이 거부된다.

 

3)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갈등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바르트는 언제든지 神 中心, 더 자세히 말하면 그리스도 中心의 극복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론적 갈등 극복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르트의 변증법은 전체성 속에서 하나를, 그리고 하나 속에서 전체를 보는 통전적 변증법으로 특징지어 질 수 있다. 그리고 양자는 기독론적 갈등 극복이 갖고 있는 양면성을 - 긍정과 부정, 세상적인 것과 신적인 것, 현세적인 것과 종말론적인  것 - 역설적으로 해석한다. 바꾸어 말해서 부정 속에서 긍정을 보고, 긍정 속에서 부정을 본다, 그리고 이 둘이 상존해 있는 현실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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