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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신학용어사전  작성일  2007-08-02
 제목  신개념의 철학적 분석 -L. Wittgenstein의 입장을 중심으로-
 주제어  [신론]
 자료출처  엄정식  성경본문  
 내용

I.서론

서양철학사를 통해서 신(神)의 문제는 존재론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혹은 가치론적으로 항상 중심적인 주제가 되어 왔다. 존재론적으로 볼 때 그것은 여러 존재자들 중에 하나인지 혹은 이 존재자들을 창조한 초월적 존재인지, 아니면 존재자들 전체를 지칭하는 내면적 존재인지 등이 논의되었다. 인식론적 차원에서는 그러한 존재를 인식하는 방법이 무엇이고 또 그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가 문제되었다. 끝으로 가치론적 차원에서는 진선미(眞善美) 및 성(聖)과 같은 중요한 가치와 신의 관계가 어떠하며 특히 이러한 가치를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와 관련해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등이 규명되었다. 이처럼 ‘신’이란 주제는 단순히 종교철학만의 과제가 아니라 철학 전반에 걸쳐서 마침내 부딪쳐야 하는 궁극적인 문제의 성격을 띄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도 철학사의 전개에 따라 그 성격이 많이 달라진 것이 사실이다. 플라톤이 일자인 선(Agathon)의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그것의 인식을 철학적 탐구의 최종목표로 설정한 이래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와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를 거쳐 오캄(William of Occham)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은 존재론적 확실성을 추구하려는 경향을 보여 마침내 중세적 절대자의 표현인 완전한 존재로서의 신개념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데카르트(R. Descartes)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코기토(cogito)명제를 철학적 알키메데스 점으로 규정한 다음 서양의 근대철학은 자아중심의 인식론적 확실성의 추구라는 성격을 띄게 되었으며 신의 존재에 관한 논의도 이 인식론적 자아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데카르트를 비롯한 합리론자들의 경우에 잘 나타나 있듯이 신의 존재는 일종의 생득적 관념(idea innata)에 의해 직관적으로 확실한 것이든가, 흄(D. Hume)과 같은 경험론자들이 주장하듯이 감각적 지각을 통해 형성되고 상상력에 의해 각색된 추상적이고도 인위적인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러한 대립을 종합하고 지양하기 위해 칸트(I.Kant)는 비판철학을 시도했고 여기서 순수이성의 한계를 분명히 설정해 주었는데, 그에 의하면 신의 존재증명은 이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칸트의 비판철학이 등장하자 신의 존재를 비롯한 종교적인 문제는 윤리적이고 예술적인 문제들과 함께 가치론적 차원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종교적 가치도 다른 가치들처럼 삶을 구성하고 고양시키는 여러 요소들 중에 하나이며 신의 개념도 그러한 가치를 승화시키고 추상화한 결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신에 관한 가치론적 논의는 현대철학에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는데,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이 시대를 풍미하고 있는 반형이상학적이고 과학주의적인 사조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며 이러한 사조의 영향을 받아 철학적 개념을 명료화하는 데 역점을 두는 분석철학이 등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넒은 의미의 분석철학은 “철학은 곧 언어의 분석”이라는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입장을 반영한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철학의 임무가 존재 그 자체를 규명하려는 형이상학적 탐구가 아니며 의심할 여지가 없이 확실한 진리에 도달하려는 인식론적 추구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나 진리, 지식이나 자아 혹은 정신이나 물질 등과 같은 철학적 개념들의 의미를 분명하게 밝히고 그것들이 제대로 이해될 수 있도록 돕는 작업 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철학적 개념들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뜻으로 쓰이는지 이해할 수 있다면 전통적인 철학의 주요 문제들은 스스로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종교철학에서도 예외가 될 수 없으며 특히 ‘신’이란 개념을 명료화함으로써 많은 종교적 문제들이 해소된다고 주장하다. 가령 웨스트팔(F.A.Westphal)은 이러한 입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 준다.

신의 개념에 있어서 명료성이 충분하지 않으면 신의 존재에 대한 논변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신(그러한 것이 있다면)의 본성에 관해 완전한 이해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한다.

일종의 인격으로 취급되는 어떤 존재에 관해 언급할 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고 있는 우리의 그 언어를 활용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할 뿐이다. 어휘와 표현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러한 것을 작동시키거나 활용할 줄 안다는 뜻이다. 종교적 담화에서 볼 수 있듯이 어휘들이 제대로 이해되고 있는 상황이나 맥락과 괴리되어 그 자연스런 역할과 상충되는 기능을 하게 될 때 우리는 이러한 현상에 주의를 기울이고 여기서 생기는 문제들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1)

그는, “어떤 유형의 말들을 자기가 이해한다고 생각하거나 확신한다고 느끼는 것만으로는 그것을 반드시 이해한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2)
이와같이 오늘날 분석철학에서는 신의 존재나 본성 혹은 신의 인식이나 삶과의 관계 등을 직접적으로 논의하기보다는 그러한 논의들이 지니는 의미가 무엇이며 ‘신’이란 말이 실제로 어떤 뜻으로 쓰이는지, 한마디로 신의 ‘개념’에 관하여 논의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철학의 다른 주제들과 마찬가지로 존재론이나 인식론 혹은 가치론적 추구보다는 의미론적 측면에 더 큰 비중을 두는 접근방법인 것이다. 물론 신개념에 대한 철학적 분석이 신의 존재나 인식 혹은 신의 가치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증명하고 그 본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신개념의 정확한 분석이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분석철학이 철학적 명제와 개념들에 대한 의미분석을 강조하더라도 그 방법이 매우 다양하고 특히 언어관의 차이에 따라 분석의 방식도 달라진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분석철학의 초기에는 무어(G.E.Moore)의 경우처럼 언어의 명료화를 통해 관념론을 극복하고 상식적 차원의 실재론을 옹호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여기서 자극을 받고 러셀(B.Russell)은 명제논리학을 이용하여 인위적 언어를 창출하였고, 이것을 바탕으로 논리적 원자론이라는 또하나의 실재론을 제시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철학적 분석은 비트겐슈타인(L.Wittgenstein)의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 의해 완성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논리적 실증주의의 대표적 철학자이기도 한 에이어(A.J.Ayer)는 그러한 분석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준다.

철학적 분석이 요청되는 상식적인 명제들은 우리로 하여금 잘못된 추론을 하게 하거나 거짓 물음을 제가히게 하고 또는 무의미한 가정을 하도록 고무시키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국가에 관한 명제가 철학적 분석을 필요로 하게 되는 까닭은 그러한 명제가 국가를 확대된 사람과 같은 것으로 다루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며, 물질적인 사물들에 대한 명제가 철학적인 분석을 필요로 하는 까닭은 그러한 명제가 현상적인 세계 ‘뒤’에 어떤 물리적인 세계가 존재한다고 하는 신념을 고무시키기 때문이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또한 정관사나 기술구를 포함하는 명제가 철학적인 분석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은 그러한 명제가 현존하는 실재물을 요철하기 때문이며, 존재명제가 철학적 분석을 필요로 하는 까닭은 그러한 명제가 존재론적인 논의를 야기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은 이러한 모든 위험요소들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제거시키려고 애쓰는 것이다.3)

그러나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철학적 분석은 다양하고 언어관의 차이에 따라 그 양상이 서로 다르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논리적 분석에 대해 분명하고도 세찬 거부감”을 표시하였는데 후기에 들어와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언어적 수단들의 다양성과 그 수단들이 사용되는 방식의 다양성, 즉 단어와 문자의 다양성을 논리학자들이 언어의 구조에 대해서 언급했던 것과 비교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논고」의 저자를 포함해서)4)

이것은 철학적 분석에 있어서 유일하고 최선의 방법이란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어느 특정한 방법에 집착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우리가 신의 개념을 분석함에 있어서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는 분석의 다양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 다양성의 기술을 통해서 우리를 언어의 실제적 상황 혹은 “삶의 형식” 그 자체에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이제 비트겐슈타인의 전,후기 사상을 다른 입장들과 비교함으로써 그의 신개념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II.논리적 형식과 “신비적인 것”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사상과 신개념의 분석을 이해하려면 그가 영향을 주고 받은 입장들, 가령 러셀의 논리적 원자론이나 에이어의 논리적 실증주의의 입장들과 비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들과는 여러가지로 비슷한 점이 많이 있지만 종교언어, 특히 신개념에 관한 한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종교에 대한 태도에서도 나타나는데, 이러한 태도가 반영된 그의 철학적 분석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이제 그의 「논고」를 중심으로 해서 그러한 특징을 살펴 보기로 하자.
「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러셀과 프레게(G.Frege)의 영향을 받아 논리의 본질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언어와 어떠한 관계를 가지며, 논리와 언어가 어떻게 세계의 실상을 드러낼 수 있는지의 문제를 규명함에 있어서 우선 논리가 존재론적인 함축을 지닌다는 사실을 전제로 그 논변을 정리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1.세계에 관하여 사고하거나 언급하려면 사유 혹은 언어와 세계 사이에 무엇인가
공통적인 데가 있어야 한다.
2.이 공통적 요소는 양자 사이의 구조이다.
3.한 쪽 구조에 관한 지식은 다른 쪽 구조에 관한 지식으로 유도한다.
4.논리는 언어의 구조에 관여하며 그것을 드러낸다.
∴5.논리는 세계의 구조에 관여하며 그것을 드러낸다.
∴6.논리의 본질을 탐구함으로써 언어의 본질을 규명하고 결국은 세계의 본질을 인
식하는 것이 철학의 목표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명제의 의미는 그것이 그려내는 원자사실(atomic fact)이 되며 “명제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이 진리일 경우 사례가 된다는 것을 안다는 뜻이다.”5) 다시 말해서 그것을 하나의 사실로 확인할 수 있는 경험적 방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검증하려면 “실재와 비교해야 한다”는 것이다.6)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실재와의 비교를 가능하게 하는 경험적 방법인지를 제시하지 않고 어떤 명제가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조건만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그는 언어와 세계의 동형성(isomorphism)을 전제로 함으로써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이며 세계의 한계가 곧 언어의 한계이기도 하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언어 즉 논리의 구조와 세계의 구조가 공통성을 지닌다면 서로 그 한계를 넘나들 수가 없고, 따라서 논리가 세계의 한계를 초월하지 않는 한 어떤 것이 실제로 초월하다고 논리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트겐슈타인은 「논고」 그 자체를 의미있게 말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의 명제들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해명의 역할을 담당한다. 즉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이 명제들을 발판으로 하여 딛고 넘어가 올라섰을 때 이것이 결국은 비의미적(nonsensical)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말하자면 그는 지붕 위에 올라간 다음에는 사다리를 버려야 한다) 그는 이 명제들을 초월해야 한다. 그러면 이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것이다!7)

그렇다면 이러한 맥락에서 종교적인 언어와 세계를 초월하는 신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논리의 본질을 이해하고 세계의 구조를 규명함으로써 과연 그것을 초월하는 존재의 정체를 드러낼 수 있을까.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의 문제는 더욱 높은 것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신은 이 세계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지 않는다”(6.432)는 것이다.8) 허드슨(D.Hudson)이 잘 지적해 주는 바와 같이 이것은 신이 이 세상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거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가 “초월적이라고 생각되는 한 이 세계 속에서 자신을 나타낼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 뿐이다.9) 따라서 신은 어떤 사례에 관한 그림이 될 수 없고 종교적 명제도 의미 있게 말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10) 「논고」의 그림이론에 의하면 언어는 사실인 세계를 그리는 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초월적인 신은 논리적인 언어로 표현될 수 없음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허드슨은 신의 초월성 개념에는 몇 가지 다른 뜻이 있다고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그는 공간적 및 시간적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는 점에서 초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는 그의 피조물이며, 그는 세계 속에서 활동한다. 그러나 그는 세계 자체가 아니며 세계의 일부도 아니다.
둘째, 신의 활동과 성격은 인간이 관찰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존재의 활동과성격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초월적이라고할 수 있다. 그는 무한히 창조적이고, 무한히 현명하며 무한한 사랑의 신이다.
세째, 신은 인간이 개념화할 수 없다는 점에서 초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논리로는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신이다. 그는 모순된 실재이며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실재이다.11)

이중에 그 어떠한 경우에도 「논고」의 그림이론으로서는 초월적인 신의 개념을 의미있게 분석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존재의 부정이 의미를 지니거나 진위를 가진다는 것도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의미의 영역을 초월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의미있게 “말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신비적인 것”이기도 하다.12)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러셀이나 에이어와 같이 실증주의적 경향이 강한 철학자들에게는 만족스러운 것이 못된다. 가령 러셀은 「논고」의 발문에서 “일종의 지적인 불안감”을 준다고 지적하며,13) 후에 “비트겐슈타인은 잠언들을 발설하고는 독자에게 그 심오성을 최대한으로 측정하도록 맡겨버린다”고 빈정거린다.14) 논리적 원자론의 세계에는 차지할 자리가 없고 한정기술(definite description)에 의해 허위로 밝혀질 수밖에 없는 초월적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러셀에 의하면 “프랑스의 현재 왕은 존재한다”라는 문장은, “하나의, 오직 하나의 인간이 있는데, 이 사람은 현재 프랑스왕이다:Ex(Qx‧(y)(Qy≡x≡y)”라는 논리적 형식으로 번역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번역된 이 문장은 사례가 될 수 없는 그 무엇을 서술하기 떄문에 의미는 있지만 허위임이 드러난다.15) 이와 마찬가지로 “신은 존재한다”를 고유한 논리적 형식에 담으면,

“어떤 것이 있는데, 오직 그 하나만 전지하고 전능하며 전선하다”

가 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그 무엇인가 규정되지 않은 것이 ‘전지, 전능, 전선’이란 속성을 지닌다고 단언할 뿐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논리적으로 말해서 원자문장의 ‘주어-술어’형식을 갖추지 못하고 있으며 어떤 사실을 기술하지 못하는 일반문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이것은 존재시사적(existential)이기 때문에 허위인 진술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말할 수 없는 것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분명히 비의미적(non-sensical)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의미있는 문장을 분석적으로나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것으로 구분하는 논리적 실증주의자들에게 “신이 존재한다”는 문장은 무의미한(meaningless) 진술일 수밖에 없다. 가령 에이어에 의하면, “진술은 분석적이거나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을 때, 오직 그때에만 문자 그대로(literally)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고 여기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러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진위를 가릴 수 있다는 뜻이다.16) 더구나 이 원리를 제시한 사람은 「논고」의 비트겐슈타인 자신이라고 주장하는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검증의 조건을 구체화하지 않음으로써 불완전한 원리로서 남겨 두었다. 그러나 허드슨이 잘 지적해 주는 바와 같이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비트겐슈타인이 이러한 분석에다가 경험주의자의 인식론을 추가시킴으로써 그것을 구체화하고자 하였다.17) 그렇다면 이러한 원리를 신의 존재여부에 적용할 때 어떠한 현상이 나타나는가. 그들이 신개념을 무의미한 표현으로 단정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허드슨은 “신이 존재한다”는 명제를 예로 들어 논리실증주의의 관점에서 볼때 이것이 무의미한 명제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유신론자들은 대부분 이 명제를 분석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신”이라는 단어가 곧 “존재하는 분”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신은 존재한다”는 명제가 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한 우리가 “신”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정의함으로써 참인 명제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정의된 ‘신’이라는 단어가 현실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지의 문제는 그대로 남게 된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는 명제는 분석적 명제 이상이어야 한다.

그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그것은 경험적으로 시험할 수 있는 명제인가. 유신론자들이 신을 경험세계를 초월하는 실재로 정의한다면, “신은 존재한다”는 명제는 경험에 의해 검증될 수도 없고 반증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명제는 검증원리에 의해서 문자 그대로(literally)무의미한 것이 된다.18)

이와같이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비트겐슈타인의 검증조건을 겅험적으로 구체화함으로써 그가 단순히 비의미적이고 신비적인 것으로 남겨 두었던 신개념을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노이라트(Otto Neurath)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그래서 사유되지 않는 것은 언어가 갖는 한계의 표현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이렇게 말한다.

「논고」의 결론인 “말로 표현할 수 없는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는 적어도 문법적으로 오해를 자아낸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것처럼 들린다. 차라리 “진정으로 형이상학적인 태도를 벗어나려면 ‘무엇에 관해서’가 아니라 그냥 ‘침묵할’ 일이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19)

이처럼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하여 비트겐슈타인과 논리실증주의자의 차이는 러셀과의 차이 못지 않게 심각하다. 따라서 종교언어와 신개념의 의미에 관해서도 입장이 서로 현격하게 다르다. 러셀에게 “신이 존재한다”는 진술은 의미가 있지만 사실을 서술하지 않기 때문에 허위가 되는 반면, 논리실증주의자들에게 그것은 검증의 방법을 구할 수 없으므로 진위를 결정할 수 없고, 따라서 무의미한 것이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게는 그 진술이 우리가 유의미하게 말할 수 있는 논리적 한계를 벗어나므로 진리임을 확인할 수도 없지만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해서도 안된다는 뜻으로 ‘비의미’ 혹은 ‘초의미(trans-sensical)’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신은 우리가 의미를 논리적으로 규정할수는 없지만 그 존재를 인정해야 하는 그 ‘무엇’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을 「논고」의 맥락에서 지탱하기는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신이 세계 속에 그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존재 x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주장할 수 있는가. 하르트낙(Justus Hartnak)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논고」의 목표는 세계의 ‘심리적’ 구조가 아니라 ‘논리적’ 구조를 해명하는 일이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만약 x가 논리적으로 사유할 수 없다면 표현될 수도 없고 따라서 그것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 그는 이것을 게임과 비유해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게임이 너무 복잡해서 누구든지 그규칙을 배우는 것이 심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것은 쓸데없는 얘기일지 모르나 그런 게임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떤 게임이 있는데 그 규칙을 따라가기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면, 그런 게임이 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20)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논고」의 비트겐슈타인으로서는 말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우며 동시에 신 개념을 명확하게 밝히지 못했음은 물론 그러한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도 없게 된다. 사실 그는 「논고」를 집필할 당시 초월적인 인격신 같은 것이 실재로 존재한다고 믿은 것 같지는 않다. 피처(G.Pitcher)는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해준다.

제 1차 세계대전 전의 비트겐슈타인은 독단적으로 반기독교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톨스토이를 읽고난 후에 이 태도는 누그러졌다. 그후 그는 진정한 종교적 신앙을, 가장 단순한 사람의 신앙일지라도, 어쩌면 특히 그것을 존경하였다.21)

이어 그는 비트겐슈타인이 신을 믿고 싶고 또 그럴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여의치 않다는 사실 때문에 서글퍼하였다고 지적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종교적 신앙을 가졌다든가 혹은 종교적인 인간이었던것은 아닌 것 같다. 이러한 점들을 증언한 다음 맬컴은, “그러나 나는 어떤 의미에서 종교의 가능성이 그에게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자기 자신은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동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상당히 흥미를 느꼈던 ‘삶의 형식’, 이것은 「철학적 탐구」의 표현인데 이 형식으로 종교를 바라보았다고 믿는다”는 것이다.22)
한편 비트겐슈타인은 종교를 삶의 다른 형식과 구분하였으며 특히 과학과 달리 합리적 근거로 종교를 받아들이거나 실험과 관찰에 의해 신을 증명하려는 시도에 강한 반발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맬콤은 그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전한다.

그는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나 종교에 합리적 근거를 제시하는 시도들을 못참아 했다. 내가 언젠가 키엘케고르의 말을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했음을 아는데 어찌 그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라는 뜻으로 인용했을 때 비트겐슈타인은, “이 사람아! 그건 무슨 증명의 문제가 아니야!”라고 외쳤다.23)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비트겐슈타인은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종교에 대해 일관된 태도를 유지한 것이 분명하며 그의 신개념에 대한 의미론적 분석에도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된다. 그는 「탐구」를 중심으로 한 후기의 사상에서도 종교언어가 「논고」의 맥락으로 의미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하였고, 따라서 신개념도 논리적으로 분석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전기의 사상이 논리적 틀 속에서 절대적으로 명료하게 말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후기의 사상은 그러한 사고의 틀이 세계를 바라보는 여러 관점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그러한 틀 속에서의 명료성도 결국은 상대적인 것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전기와 후기의 사상에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고 서로 양립될 수 없는 부분도 많이 있지만 종교와 신개념에 관한 한 그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닌 것으로 나타난다. 피처는 「논고」와 「탐구」의 연계성에 관하여 이렇게 지적한다.

「논고」와 「탐구」 사이의 엄청난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약간의 유사점이 있다. 아마 이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 책 모두 감각의 한계를 설정하여 지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경계를 지시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 사실일 것이다.24)

이제 이 경계를 중심으로 해서 그의 후기사상 속에 신개념이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는지 좀더 자세히 살펴 보기로 하자.


III.종교적 언어게임과 신개념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사상을 집약시킨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 )」를 우리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새로운 언어관에 입각한 포괄적 의미 이론이고, 둘째는 철학을 이론의 정립이 아니라 일상 언어와의 충돌을 해소시키는 일종의 행위로 보는 철학관이며, 셋째는 이러한 철학관을 근거로 해서 정신의 본성에 관한 잘못된 견해 위에 정립된 전통철학에 관한 비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여기서 이러한 점들을 모두 살펴볼 수는 없지만 그의 종교관과 신개념의 분석이 이 세가지 요소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고 또 서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특히 의미론을 중심으로 살펴 보기로 한다.
우선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일종의 그림으로 보고 의미를 어떤 어휘가 지칭하는 대상으로 이해하는 「논고」의 다음과 같은 이유로 거부한다. 언어를 물론 그림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극히 제한된 범위 안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논고」에서의 「그림」은 특정한 색안경을 통해서 본 세계에 대한 그림에 지나지 않으며,더구나 그것은 그렇게 바라보는 관점을 의식하지 않은 채 보아낸 그림일 뿐이다. 실제로 사실들이 논리적 형식을 가지고 있다는 견해는 분명하지도 않거니와 진리가 될수도 없다. 세계를 사실의 측면에서만 조명하여 세계와 존재를 설명하는 것은 사실을 기술하는 문장 형식들로만 구성하기 마련이므로 바로 그것이 세계를 기술하는 유일한 방식이 될 수는 없다. 또한 그것을 이상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이른바 “이상언어(ideal language)”의 풍부함과 섬세함과 완벽함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견해인 것이다. 그는 「청갈색 본(The Blue and Brown Books)」에서 이렇게 말한다.

철학에서는 이상언어가 일상언어와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은 잘못이다. 이것은 일상언어를 우리가 마치 개량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언어는 전혀 나무랄 데가 없다.25)

가령 「논고」에서 그가 말하는 단순명제도 절대적으로 단순한 것이 아니고 맥락에 따라 단순하다고 할 수도 있고 복합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단순성이나 복합성은 사물이나 사건 혹은 명제 자체에 내재해 있는 절대적 성질이 아니라 언어적 맥락의 차이를 나타낼 뿐이다. 이와 같이 절대적 단순성을 포기하면 전혀 다른 의미의 이론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논고」에서 고유명사의 의미는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이고 동시에 절대적으로 단순한 여러 대상의 의미는 바로 이 대상이 된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단순한 대상을 말하는 것이 무의미해진다면 이러한 식의 의미는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가령 ‘예수’라는 고유명사도 절대적 실재가 못되므로 의미가 유지될 수 없다. 따라서 이 이름에 대응되는 것은 그 이름을 지닌 ‘그 무엇’ 혹은 지칭체이지 그 의미가 아니다. 이것을 혼동하면 예수가 죽었을 때 그 이름의 소유자가 죽은 것이지 그 의미가 죽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로부터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예수’라고 불리우던 사람은 죽었어도 그 이름은 그대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아 고유명사가 지칭하는 것은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탐구」의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의미를 찾으려면 어떤 이름이나 문장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찾으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뜻으로 쓰이는지 이른바 “언어게임(language game)”을 잘 살펴 보아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그는 언어현상을 일종의 게임과 비교하는데 거기에는 사람이 개입되고 다양할 뿐아니라 일정한 규칙을 지닌 사회적 행위라는 점에서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는 일종의 게임이라고 규정하며 그는 이것을, “언어와 그것이 얽혀 있는 행동들로 구성된 전체”라고 정의한다.26)
한편 비트겐슈타인은 숨바꼭질, 장기, 공차기 등 여러 게임에 공통된 요소가 없듯이 언어 속에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공통된 요소가 없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언어게임에는 공통점보다 어떤 ‘관계’ 같은 것이 있을 뿐인데 그것을 그는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라고 부르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언어라고 부르는 것 모두에 공통되는 그 무엇을 제시하는 대신, 이 현상을 모두가 하나의 낱말로 표현될 수 있는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다른 방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들을 모두 ‘언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관계 혹은 이 관계들 때문인 것이다.27)

이러한 언어게임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인간적인 “삶의 형식(forms of life)”을 나타낸다는 사실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것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지는 않으나, “‘언어게임’이라는 용어는 언어를 말하는 것이 행위의 한 부분 혹은 삶의 형식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돋보이도록 의도된 것”이라고 지적하며, 특히 그것은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것, 주어진 것”임을 강조한다.28) 그의 이러한 지적은 우리가 언어를 임의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삶의 형식으로부터 습득된 것임을 보여주려는 데 있으며, 그것은 또한 언어의 영향없이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떄문에 우리의 인식은 삶의 형식을 벗어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이와같이 언어의 기능은 사태를 지칭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므로 어떤 단어의 의미를 알려면 언어게임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의미이론이며, 그가 “의미를 묻지 말고 그 활용을 물어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는 전통적인 철학적 문제의 혼란은 언어의 기능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언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함으로써 생긴 것이므로 이러한 점들을 바로 잡는 것이 철학의 임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종교철학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될 수 있으며, 특히 신개념은 어떠한 식으로 이해될 것인가. 그것을 우리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종교철학의 문제는 종교언어를 잘못 활용함으로써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종교적 언어게임을 잘 살펴 봄으로써 해소될 수 있으며 언어의 기능이 단지 대상을 지칭하는 것만은 아니므로 ‘신’이란 개념도 단순히 어떤 대상만은 아니다. 이제 이러한 점들을 좀더 자세히 살펴 보기로 하자.
우선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탐구」를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서 인용한 한 구절로 시작한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이와같이 다양한 문장에서 적합한 문맥에 따라 반복적으로 활용되는 낱말들을 들으면서 나는 점차 그것이 의미하는 대상을 이해하게 되었고 후에 이 기호들의 발음에 익숙해지면서 나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는 데 활용하였다”고 인용을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이 말들은 인간 언어의 본질에 대한 특별한 그림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이렇다. 언어에 나오는 개별적 단어는 대상을 이름짓고 문장은 이러한 이름들의 집합이고 언어에 관한 이러한 그림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관념의 뿌리를 발견한다. 즉 모든 단어는 의미를 지닌다. 이 의미는 단어와 연관되어 있다. 단어는 대상을 표현한다.29)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러한 언어관은 그의 후기사상에서 거부되고 또 보완된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언어관이 담긴 그 구절을 인용한 것은 물론 그것을 비판하기 위한 전략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언어관을 비판한다는 것은 적어도 간접적으로는 그의 신개념을 비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의 신개념은 그의 언어관과 무관하지 않으며, 그것이 의미있는 단어들은 모두 대상을 지닌다는 의미의 지칭설을 함축한다면 대상으로서의 ‘신’은 이 지칭설의 산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언어관은 단순히 신개념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물질이나 정신, 혹은 자아와 세계 등 모든 존재를 일종의 대상으로 보는 존재론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의 새로운 언어관은 철학비판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으며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와 데카르트의 철학에 관심이 모아지는 것이다. 이점에 대해 커어(F.Kerr)는 이렇게 말한다.

「고백록」에는 은폐된 형이상학적 소망이 연설의 형태, 말의 억양 혹은 “나는 어디에 있으며 누구였는가?”라는 슬픈 질문의 형태로 나타나곤 한다.아우구스티누스는 계속해서 신약성서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로 투영시킨다. 그러나 그가 방탕한 생활로 모두 탕진한 그 먼 나라는 인간조건의 무상성으로 인식된다. 신에 관한 지식은 개인적 추억의 휴식시간에만 추구될 수 있다....「고백록」을 펼치면 기독교인의 영혼과 자아에 대해 데카르트와 근대철학에 큰 영향을 끼친 “영혼에 대한 신학적 주문”에 사로잡히게 된다.30)

커어는 “신학이 포기된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자아의 파라다임”을 제거하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이 의도한 것이었다고 지적하며 이렇게 계속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 있는 구절로 「탐구」를 시작함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은 신학이 사라진 후에도, 자아의 파라다임인 신의 견지에서 본 “나”를 만들어내는 대화의 문맥 속에서 그대로 남아있던 자아의 인식론적 위험성을 탐구하는 것은 사실 5세기 이래 기독교적 자기이해를 형성해온 신학적 인간학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자기의 이러한 작업을 모르고 있었다고 보기는 상당히 어렵다.31)

비트겐슈타인이 실제로 그것을 얼마나 의식하고 있었는지는 가늠하기가 매우 어렵지만 언어현상을 삶의 형식에 근거한 언어게임으로 이해하고, 따라서 어떤 단어의 의미가 정신적인 것이든 혹은 물질적인 것이든 혹은 이것을 초월한 그 무엇이든 간에 단순히 대상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면 간접적으로나마 전통적인 기독교적 신개념에 상처를 입힐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종교언어의 특성에 관한 그의 견해를 통해서 검토해 보기로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본질적인 언어관을 거부하고 의미의 지칭설에 수정을 가함으로써 파생될 수 있는 종교철학적인 문제는 주로 두가지 관점에서 고찰될 수 있다. 하나는 종교언어가 사실 언어와는 다른 맥락이지만 분명히 의미를 지닌다는 소극적인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사실 언어와는 다르더라도 이와 못지 않게 독자적이고 객관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적극적 관점이다. 첫번째 관점에 대해서 그는 특히 과학과 종교의 차이를 강조하고 그 의미도 서로 혼동하지 말 것을 주장한다. 한편 두번째 관점에 대해서는 이른바 “비트겐슈타인적 신앙주의(Wittgensteinian Fideism)”의 성립이 논의되고, 오히려 종교언어의 우위성이나 자율성이 확보될 수 있는지 검토된다.32) 이러한 관점들이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지만 서로 구분해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우선 과학과 종교의 차이에 대해서 그의 관점을 살펴 보기로 하자.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후기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대상들의 본질을 논의하는 것은 언어적 맥락 혹은 언어게임을 떠나서는 무의미한 것이 된다. 그는 그러한 뜻으로 “어법(grammar)이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대상의 종류를 말해준다(신학은 어법의 문제이다)”라고 주장하며,33) 루터(M.Luther)에게도 신학이라는 것은 “‘신’이란 단어의 어법”에 지나지 않았다고 전한다.34) 이것을 좀더 일반화하면 소립자가 단순대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양자역학자들의 언어게임이고 신이 절대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종교인들의 언어게임이란 뜻이 된다. 이와같이 그것이 소립자든 신이든 모든 어휘는 고정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언어게임에서 어떻게 쓰이는지에 따라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낱말은 이를테면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어떤 힘에 의해서 주어진 의미를 지니지는 않으며, 따라서 그 낱말이 실제로 뜻하는 것에 대해서만 어떤 종류의 과학적 탐구가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자. 낱말은 어떤 사람이 거기에 부여한 의미를 지닌다.35)

이와 같이 소립자는 양자역학자들이 의미를 부여할 때 비로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처럼 신은 신학자나 종교인들이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그러나 종교적 언어게임에서 신개념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은 과학적 언어게임에서 소립자 개념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과 전혀 다르다. 소립자의 경우에는 추론과 관찰 혹은 실험을 통해서 그 의미가 형성되고 이것을 다시 확증함으로써 더욱 확고해지겠지만 신의 경우는 이러한 종류의 ‘증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해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이 증거에 의해 믿는다고 말한다는 사실만으로는 ‘신이 존재한다’는 문장에 관하여 당신의 증거가 만족스럽지 못하다거나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36)

그는 또한 이렇게 주장한다.

이것이 부분적으로는 당신이 종교적 쟁점에 끼어들지 않는 이유인데, 그것은 한 사람에게는 확실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럴 수도 있겠지’라고 할 수도 있는 쟁점인 것이다.37)

그리하여 가령 어떤 기독교인이 성경에 나오는 ‘여호아’를 신으로 받아들이고 먼 훗날 그 신이 강림하여 최후의 심판을 할 것이라는 것을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인다고 하자. 이 경우 그가 받아들이는 신은 흰 수염을 길게 휘날리는 근엄한 노인도 아니고 그의 강림은 어떤 구체적인 시기의 특정한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역사적 사건이 될 수도 없다. 따라서 그러한 믿음을 확인하는 방법은 역사적 사실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이 자기 삶의 지표로서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자.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는 최후의 심판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최후의 심판을 믿는지 혹은 믿지 않는지를 어떤 방법으로 알 수 있을까. 그 사람에게 직접 물어서 대답을 듣는다고 해도 충분하지 않다. 그는 어쩌면 자기의 믿음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할른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의 믿음은 확고하며 그 확고한 믿음은 추론이나 상식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삶을 규제하는 것으로서 나타난다.38)

여기서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한 인간의 삶을 규제하는 요소로 나타난다는 것은 그의 신개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신이 존재한다는 종교적 사실을 받아들일 때 신의 구체적인 모습을 표상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종교적 언어게임에서 신개념이 실질적인 역할을 한다는 뜻이고 이 게임의 근거가 되는 종교적 삶의 형식을 규정한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 자신이 잘 지적해 주는 바와 같이,“신이 존재한다”와 같은 종교적 명제의 의미는,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에 대응하는 종교적 사실을 표상하는 역할이 아니라 그러한 명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기능이 신개념의 의미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신의 개념이 옳고 그 개념에 의해 규제되는 삶은 정당하다는 뜻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비트겐슈타인이 종교에 대한 비판을 거부하고 모든 종류의 신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문제삼는 것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그밖에 다른 종교적 사실을 확증하는 데 있어서 과학적 증명에 너무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존스톤(Paul Johnston)은 이러한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해 준다.

비트겐슈타인은 과학과 종교의 차이에 주목한다. 가령 그는 신을 믿는 것이 불충분한 가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묘사하는 시도를 비판하는데, 그러한 믿음은 가설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종교비판을 거부하는데, 여기에는 그 대상에 대한 오해가 개입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반대하는 것도 잘못된 생각에 근거한다는 점이다.39)

이와 같이 그의 경우 신개념은 아무 것이라도 좋다거나 종교적 태도는 어떠한 것이든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말하자면 신에 대한 그림에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그 차이에 따라 혹은 그러한 그림의 유무에 따라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이 병이 나서 “내가 벌을 받는다”고 하고, 나는 “병이 나도 그것을 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자. 여기서 사람들이 “그 사람과 정반대되는 것을 믿는가?”하고 물으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의 정반대라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나는 달리 생각하며 다른 방법으로 생각한다. 나 자신에게 다른 것을 말한다. 나는 다른 그림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40)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한다.

어떤 그림이 항상 나를 충고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거나 내가 그러한 그림을 늘 생각한다고 했다고 하자. 여기서 그 그림은 언제나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는 사람들과 그 그림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41)

그렇다면 실제로 ‘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슨 뜻이며 어떻게 기술될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 자신은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입장이 옳다면 어느 특정한 종교적 언어게임에서 ‘신’이란 단어가 어떻게 쓰이는지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제자인 위즈덤(J.Wisdom)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서술해 준다.

신들에 대한 이야기란 무엇인가? 우리가 신을 믿을 때 느끼는 감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힘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 제우스의 천둥소리에 대한 두려움, 영원한 팔에 안겼다는 신뢰감, 모든 것을 총괄하는 눈 앞에서 느끼는 불안정감이다. 그것은 떨쳐 버릴수 없는 죄책감이거나 필연적인 복수의 감정이며 짙은 증오심과 안도의 감정이기도 한 것이다.42)

아마 이러한 신개념은 비트겐슈타인의 종교적 언어게임에서 충분히 이해되고 또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종류의 보편적인 신개념으로 서로 의사를 소통할 수 있으며, 어느 특정한 종교 안에서뿐만아니라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종교인 사이에서도 그 의미가 어느 정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것이 특정한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도 전혀 생소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자연에 대한 신비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혹은 거대한 힘에 대한 경외감 같은 것을 가진 “종교적 인간(homo-religiosus)”라면 문화권에 따라 그 체험이 서로 다를 지라도 어느정도 공통된 경험을 하리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령 기독교의 신개념을 기술하려면 이러한 보편적 서술만으로는 기독교적 언어게임에서 충분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허드슨(D.Hudson)은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 신학자는 신에 대한 기독교인의 그림과 일관성 있게 세계의 기아현상, 속죄 등 이와 관련된 문제에 답변을 제시해야 한다. 그는 신자들이 사용하는 그림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한다.

만약 그가 신이 피조물에 대해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 기아현상이 생겼다고 했다 하자.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신이라는 그림”과 전혀 일관성이 없으므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이 세상의 기아현상은 인간의 이기심에서 나온 것이며,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선사함으로써 자신의 권한을 필연적으로 제한할 수밖에 없는 선한 신이라고 했다 하자. 이러한 답변은 신자들이 사용하는 그림에 나타난 신의 선성과 권한에 대한 더욱 적절한 설명이 될 것이다.43)

그리고 이러한 신개념의 상당히 구체적인 의미는 기독교적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서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그러한 개념을 창출한 서구문화의 배경을 이해하고 그것을 보편화한 서구적 사고방식을 삶의 형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서로 언어게임을 원활히 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언어게임은 삶의 형식이 구체화된 언어적 표현 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게임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사람들 사이에 의견의 일치를 보아야 하고 의견이 일치되려면 동일한 개념의 언어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이것은 궁극적으로 삶의 형식에 있어서의 일치인 것이다. 사실 우리가 서로 의사소통을 제대로 하려면 어떤 단어를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 단어가 활용되는 판단이 공감할만 해야 하고 그러한 공감이 이루어지려면 결국 공감대가 형성될만한 상황을 같이 살아가야 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상황에서의 의견일치를 단순히 “의견에 있어서가 아니라 삶의 형식에 있어서” 만들어진 일치(agreement, Übereinstimmung)라고 말한다.44) 그것은 이해관계로 얽힌 사람들이 토론을 거쳐서 얻어낸 ‘합의’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같이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에 의해 필연적으로 창출된 ‘합일’인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에서 ‘신’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간단히 살펴 보았다. 이 개념은 종교적 언어게임에서 제 기능을 발휘하며, 그렇기 때문에 과학적 증거나 역사적 사실과 같은 비종교적 방법을 통해서 그 의미를 수정하거나 부정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그리고 언어게임은 그 언어사용자들의 삶을 규정하는 형식, 즉 삶의 형식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종교적 언어게임인 “신-이야기(God-talk)”도 이 형식에 바탕을 두고 있고 또 그것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에서 이러한 언어를 ‘말할 수 없는 것’의 범주에 놓고 신개념을 ‘비의미적’인 것으로 규정한 것에 비해서는 상당히 포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것은 의미를 규정하는 ‘형식’을 논리적 형식에서 삶의 형식으로 확장시킨 결과라고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그는 이러한 삶의 형식에 근거한 일상언어가 그 자체로서 완전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작위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몇가지 문제점이 제기된다. 가령 종교언어는 과학언어나 윤리언어 혹은 그밖에 다른 언어와 전혀 상관이 없고 그러한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가. 따라서 신개념은 윤리적, 인식적 혹은 심미적 함축을 전혀 지닐 수 없단 말인가. 더구나 다른 종교 사이에는 물론 같은 종교 안에서도 종파가 다를 경우, 혹은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서 삶의 형식이 다르다면 언어게임도 다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서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해 지는 것인가. 요컨대 앞서 언급한 이른바 “비트겐슈타인적 신앙주의” 문제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제 이러한 우리의 두번째 측면에 대해서 검토해 보기로 하자.


IV.비트겐슈타인적 신앙주의와 삶의 형식

원래 신앙주의(fideism)는 신앙의 자율성이나 우월성을 강조하는 입장으로서 신앙의 합리적 근거를 찾기보다는 독자적인 방법에 의애 신앙을 스스로 정당화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터툴리아누스(Tertulianus)의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absurdum)”는 말에 잘 나타나 있는데, 신을 믿는데 합리적 정당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잘 반영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신개념을 일종의 신앙주의로 해석하게 되는 것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종교언어의 과학적 혹은 역사적 해석을 거부하고 종교적 삶의 형식에 참여한 종교적 언어게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그것이 신앙의 자율성을 함축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적 신앙주의를 강하게 주장하는 대표적 철학자로 맬컴(N.Malcolm)을 들 수 있는데, 가령 안셀름(Anselm)의 존재론적 증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신개념을 제대로 파악해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그 논증의 논리적 형식만 볼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개념이 형성된 인간적 “삶의 형식”을 보아야 하며, 이것은 종교적 삶의 형식에 참여하여 밖에 서가 아니라 안에서 그것을 조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과 그 함축을 “비트겐슈타인적 신앙주의”라고 부르고 닐슨(Kai Neilson)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준다.

1.언어의 형식은 삶의 형식이다.
2.삶의 형식은 주어진 그 무엇이다.
3.일상언어는 있는 그대로 정당하다.
4.철학자의 임무는 언어나 삶의 형식을 평가하거나 비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활용과 관련된 철학적 혼란을 제거하는 데 필요하도록 그리고 그러한 맥락으
로 기술하는 데 있다.
5.각기 다른 삶의 형식인 담화의 다양한 양상은 모두 나름대로의 논리를 지니고
있다.
6.전체적인 맥락에서는 삶의 형식을 비판할 수 없다. 담화의 양상은 제각기 나
름대로의 질서를 지니는데, 자신의 규준이 있고 또 제각기 명료성, 실재성, 합
리성의 기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7.명료성, 실재성, 합리성과 같이 일반적이고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개념들은 조직
적으로 모호한 데가 있는데 그 정확한 의미는 일정한 삶의 방식의 맥락에서만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8.철학자(혹은 누구라도)가 담화의, 혹은 같은 이야기지만 삶의 방식의 모든 양상
을 제대로 비판할 수 있는 알키메데스의 점이란 있을 수 없으니, 담화의 양식은
제각기 합리성과 비합리성, 명료성과 모호성, 실재성과 비실재성의 특정한 자기
규준이 있기 때문이다.45)

닐슨은 이어,“이러한 입장을 받아들이는 비트겐슈타인적 신앙주의자는 종교가 나름대로의 특유한 규준을 가지고 있는 고유하고 아주 오래된 삶의 형식이라고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다”고 지적하며, 그러나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주장들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여하튼 이 쟁점은 비트겐슈타인의 신개념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만약 닐슨이 이해한 바대로 비트겐슈타인적 신앙주의가 옳다면 모든 언어게임은 상대적 성격을 띄게 되고 따라서 종교적 언어게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신개념도 객관적인 의미를 확보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들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언어게임”과 특히 그 근거가 되는 “삶의 형식”이라는 개념을 좀더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언어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언어게임의 마당인 삶의 형식과 연결해 봄으로써 완결된다. 언어를 말하는 것은 언어게임이라는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며 이러한 행위는 삶의 형식의 한 부분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언어게임은 인간의 행위이므로 그 게임의 장소는 바로 인간의 구체적인 삶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한 뜻으로 그는 “하나의 언어를 상상한다는 것은 하나의 삶의 형식을 상상한다는 뜻이다”라고 말한다.46)
그러나 이러한 서술만 가지고는 삶의 형식이 과연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규정될 수가 없다. 더구나 삶은 복잡하고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부분적으로만 기술할 수 있을뿐 전체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며 가능하지도 않다. 따라서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 주어진 것, 말하자면 그것이 삶의 형식들”이라고 그는 말한다.47) 그러나 삶의 형식이 무엇인지 규명할 수 없으면 언어게임은 항상 모호한 것이 될 수밖에 없고 이 게임의 맥락에서만 구체적인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는 어떤 단어나 문장도 동시에 그 의미가 명확하게 밝혀질 수 없다.그런데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삶의 형식을 어떤 곳에서는 하나로 표현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여러 개로 표현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삶의 형식들에는 여러 개가 있고 하나의 언어적 표현에는 하나의 삶의 형식이 반영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모두 합쳐진 전체로서의 삶의 형식, 즉 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적 삶의 형식도 있다. 가령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희망할 수 있을까? 언어의 활용을 터득한 사람만 그렇다. 다시 말해서 희망이라는 현상은 이 복잡한 삶의 형식의 양상들이다.48)

여기서 그는 인간이 먹고 마시고 배설해야 살아갈 수 있듯이 언어를 사용할 수 있어야 인간으로서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형식은 인간의 삶을 다른 존재의 삶과 구분하고 또 가능하게 하는 “인간적” 삶의 형식을 의미하게 된다. 이것은 “삶의 형식”이란 표현도 맥락에 따라 여러가지의 뜻으로 쓰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을 크게 “원초적” 측면과 “문화적” 측면으로 나누고 이명현(李明賢)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언어작용 가능성의 전제조건과 관련하여 제기된 삶의 형식에서 문제되는 특성을 원초적 특성(측면)이라고 본다. 그리고 문화적 측면은 특정언어를 해석하기 위한 준거틀로 동원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저 원초적 특면의 삶의 형식의 일치는 언어일반의 작동 가능성의 근본전제인데 반해, 문화적 측면의 삶의 형식은 인간의 개별언어들을 해석하는 준거틀이다.49)

그는 이어, “삶의 형식은 이처럼 작동가능성의 근본 전제로서 언어와 관계맺지만, 개별언어의 해석의 준거틀로서도 사용된다”고 설명한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그것은 인간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형식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러한 삶의 다양성이 근거하는 형식도 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종교적 언어게임과 신개념의 의미에 연관시켰을 때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
우선 종교적 언어 일반의 작동가능성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종교적’ 언어게임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문화적 측면의 형식이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 현상이 ‘희망’이라는 현상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이고 사자와 같은 동물과 그 경험을 나눌 수 없다는 점에서는 원초적 측면을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삶을 인간적인 것으로 만드는 특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을 나타내는 측면에서의 이 구분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다양하게 표출되는, 그래서 다양한 문화현상을 빚어내는 측면에서 더욱 뚜렷해지는 구분이다. 가령 종교 현상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문화적 측면 중에 하나이지만, 어떤 사회에서 종교현상이 어떠한 식으로 나타나느냐에 따라 그 측면이 다양해지고 동시에 다양한 삶의 형식들이 나타나며 언어게임도 그 종류가 무수하게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형식은 칸트의 ‘본체(noumenon)’ 처럼 비록 그것이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원초적으로 하나가 있을 뿐이지 문화적으로만 다양하게 나타날 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비트겐슈타인적 신앙주의자들이 삶의 형식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다시 해석되어야 하고 그 형식 안에서 자율성을 누리는 명료성, 실재성, 합리성의 규준도 너무 과장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단 하나인 원초적 측면의 삶의 형식에서만 통용될 뿐이지 선험적 형식을 거친 칸트의 현상들(phenomena) 처럼 표출된 문화적 측면에서의 여러 형식들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그 규준들이 조종되고 또 개선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철학적 비판의 여지가 확보될 뿐만 아니라 신개념에 대한 철학적 분석도 의미가 있고, 좀 더 나은 신개념이 어떠한 것인지 제시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닐슨의 비판은 정당하다고 생각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종교적 담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참여자의 이해를 지니지 않으면 안된다는 비트겐슈타인주의자와 입장을 같이 한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실제로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든지 논의되고 있는 그 종교를 받아들이거나 믿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또한 종교의 일차적 담화가 나름대로의 질서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 그리하여 철학은 종교들이나 삶의 형식들과 관련하여 비판을 가할 수 없다는 점에 동의하지 않는다.50)

이 비판이 종교가 인간의 본성을 표출하는 문화현상으로 이해되고 삶의 형식이 문화의 다양한 측면을 나타낸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언어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원초적 혹은 선험적 측면으로 이해되었을 때는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적 신앙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삶의 형식이 그 일차적 담화를 비정합적이고 비합리적 이라고 주장하는 언어게임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경우에는 철학이 종교현상 그 자체를 비판할 도리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입장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신’이란 개념이 삶의 형식을 바탕으로 해서 다양한 언어게임에 등장하였을 때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가령 다음 문장들을 살펴 보자.

1. 신은 존재한다.
2. 신은 초월적이다.
3. 신은 인격적이다.
4. 신은 삼위일체이다.
5. 신은 그리스도이다.
6. 신은 부활한다.
7. 신은 1993년 10월 22일에 부활한다.

여기서 우리는 1로부터 7로 갈수록 신에 관한 기술이 점점 더 구체화되어 가고, 따라서 그것이 통용되는 언어게임의 범위가 좁아지며 그러한 범위를 규정하는 삶의 형식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1)에서 신개념을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무엇’ 혹은 안셀름의 표현처럼 ‘더이상 위대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막연히 규정했을 때 그 명제를 부정하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종교적 심성을 가지고 있다는 기술 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떄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존재 그 자체와 구별되어 초월적인 속성을 지닌다고 주장하면 우선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곤란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그러한 사람들로 형성된 문화권에서는 이 신개념이 언어게임에서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한편 여기서부터 (6)까지는 모든 기독교신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명제들이며 따라서 기독교적 언어게임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적 삶의 형식에 의해서 규정되고 또 거기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7)에 오면 이 신개념이 기독교적 언어게임에서 갑자기 그 기능을 잃게 될 것이다. 물론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휴거’를 주장하는, 더구나 바로 그 날자를 고집하는 사교집단의 한 성원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더라도 그러한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1)부터 (6)까지에 담겨있는 신개념을 참고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1)부터 (7)로 올수록 비합리적이라든가 초합리적이라는 비판을 가할 수 있으며 여전히 합리적이라면 그 근거가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철학적 분석이 의미를 지니는 작업이 될 것이다. 닐슨의 다음과 같은 결론은 이러한 맥락에서 매우 호소력이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마 신이야기는 유령이야기만큼 비정합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고 신의 실재에 관해 납득될만한 개념이 있고 또 신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이야기가 담겨있는 삶의 형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어쩌면 잘못된 것일 수 있으나 상당히 명료하게 유령이야기에 제기되었던 부정적 질의응답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51)

이와같이 좀 더 납득할만한 신개념이 있을 수 있는지 혹은 좀더 합리적인 종교가 무엇인지의 문제를 철학은 유의미하게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와 ‘삶의 형식’이라는 표현을 좀더 포괄적으로 이해함으로써 도출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신개념에 의미를 부여하는 종교적 언어게임의 합리성이나 정합성 혹은 명료성은 어떻게 확보될 수 있는가. 그것은 물론 다른 삶의 형식과 얼마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생각된다. 종교적 삶의 형식이 비록 인간의 본성에 바탕을 둔 원초적 형식의 표현이지만 그것이 유일한 형식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끝으로 이러한 점들을 간단히 살펴 보기로 하자.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종교언어가 과학언어나 윤리언어, 그밖에 어떤 언어로 번역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가령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죽은 뒤에 서로 만나자’...는 표현은 ‘나는 너를 무척 좋아한다’는 표현과 동일하지 않다. 그리고 다른 그 어떤 표현들과도 동일하지 않다. 그 표현은 그 표현이 말하는 것을 말할 뿐이다. 어째서 그 표현을 다른 표현들로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단 말인가.52)

그러나 여기서 그가 ‘동일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전혀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좋아한다’는 표현 속에는 종교적 의미가 담겨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지는 못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죽은 후에 다시 만나자’라는 표현에는 ‘나는 너를 무척 좋아한다’는 우정이나 애정이 실려있을 뿐만 아니라 이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나의 생물학적 죽음에 관한 기술도 담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그 죽음이 내 존재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종교적 단언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기독교인들이 예수에 대해서 언급할 때 그를 역사적 측면에서만 기술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역사적 의미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종교적 언어게임, 그중에서 기독교적 언어게임에서 그의 모습이 가장 잘 부각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언어게임에서 그의 존재 혹은 ‘예수’라는 고유명사가 아무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아마 예수가 약 2000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살다가 아직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서 못박혀 사망했다는 자연적 현상을 부인하는 기독교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기독교적 언어게임은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 히크(J.Hick)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똑같은 인식론적 유형, 말하자면 사건들을 특유한 방식으로 해석하여 자연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이해하려는 유형이 신약에 관통해 있다. 여기서도 역시 나사렛의 예수라는 한 사나이와 그 사람에 얽힌 사건에 관한 이야기에 애매한 점이 있는 것이다. 그를 정치판에 연루되어서 예루살렘의 성직자들과 충돌하고 결국 제거될 수밖에 없었던 자칭 선지자였을 뿐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필자들처럼 인류를 구제하기 위한 신의 메시아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를 이렇게 보는 것은 신앙을 혹은 신약의 기록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특수한 방식“으로 경험함(experiencing as)”을 나누는 것이다.53)

이와같이 인간이 무엇을 경험한다는 것을 어느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배타적으로 창조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또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과학언어와 종교언어 혹은 윤리언어와 예술언어 같은 것도 어느 맥락에서 좀더 부각되는 점을 강조하는 방식일 뿐이지 그것이 유일한 방식인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종교언어는 그 자체로서 성립될 수 없고 비록 종교적 언어게임 안에서도 다른 언어와 간접적으로나마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언어게임은 궁극적으로 언어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원초적 의미의 “삶의 형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그것은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복합적이며 다양한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종교언어도 종교언어 이외의 언어로부터 자양분을 얻을 때 그 의미가 더욱 명확해지고 의사소통이 원활해지기 때문에 이 언어게임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는 신개념도 종교적 맥락에서 뿐만 아니라 객관적 사실이나 가치의 실재와 연결되어 있을 때 더욱 설득력 있는 개념이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이 종교언어가 오로지 사실적 언어로 혹은 그밖에 비종교적 언어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표현을 다른 표현으로 대체할 수 없다고 했을 때 그것은 종교언어의 완전한 자율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도 좋을 것이다. 그러한 뜻으로 존스톤의 다음 주장은 음미할 가치가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종교적 주장을 반증하고자 하는 것은 조리에 맞지 않는다고 논변을 펴는데, 논증의 규칙은 어느 특정한 언어게임의 한 부분이 되어 거기서 논증을 구성할 때에만 비로소 위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상이한 언어게임은 상이한 개념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문자 그대로 의사소통의 길이 막힌다. 이와같이 종교적 주장의 의미는 종교적 개념으로만 명시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을 다른 개념으로 평가하면 얻는 것이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어게임이 상충될 때(그리하여 다른 관행의 문제일 때) 순전히 개념적 차원에서 이것들을 조정하고자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다.54)

그러나 이것이 곧 개념의 차원을 넘어서 실재와의 관련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뜻이 아니다. 가령 종교적 언어게임이 이루어지려면 일정한 규칙이 있어야 하고 이러한 규칙이 준수됨으로써 신개념도 의미를 지니게 되지만 신개념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 신의 실재를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존스톤은 다음과 같이 지적해 준다.

이러한 점을 받아들이면서도, 비록 언어게임이 실재에 관련되어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일관성이나 정합성의 규준을 측정하는 척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처럼 보통 게임의 규칙들은 ‘임의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일관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규칙들’이 일관되지 않으면 어떤 게임도 규정될 수가 없다는 점이다. 뒤집어 말하면, 하나의 게임이 있다면 숨겨진 모순을 지닐 수도 있다는 것을 함축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일관성이나 정당성에 대해 강한 개념을 도입하고자 하면 실재와의 관련을 통해 언어게임을 정당화하려는 허상으로 퇴행하게 된다.55)

이와같이 신개념이 종교적 언어에임에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것이 의사를 소통하기 위해 정상적으로 기능을 해야 하고 그것이 가능하려면 그 게임의 참여자들이 그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분하지 신의 실재가 합리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루마나(R.Rumana)가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종교는 합리적인 것도 아니고 비합리적인 것도 아니다”라고 지적한 것은 매우 정당하다고 생각된다. 그는 그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것은 믿기 위해 증거를 필요로 하지만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합리적일 수가 없다. 그것은 또한 요점을 벗어나기 때문에 비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종교적 언어를 검토해서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주관적 상태이지 객관적 사실이 아니다. 종교언어는 태도, 감정, 신념 등을 나타낸다.56)

그러나 종교적이든 과학적이든, 혹은 윤리적이든 예술적이든 언어게임은 그 준거틀인 삶의 형식을 전제로 하고 이것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 있으므로 순전히 주관적 상태만은 아니라는 것을 상기해 둘 필요가 있다. 따라서 신개념이 통용되는 종교적 언어게임의 합리성과 명료성과 실재성이 전적으로 자율적 규준에 의해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V.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종교문제에 대한 분석철학적 접근을 비트겐슈타인의 신개념 분석을 중심으로 해서 살펴 보았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적 접근이 분석철학적 방법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고 더구나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가령 라일(G.Ryle)의 일상언어에 관한 ‘논리적 분석’의 방법도 있고 오스틴(J.L.Austin)의 실험적 접근방법도 있다. 이러한 방법들도 신개념에 대한 철학적 분석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 분명하다. 아마 비트겐슈타인의 방법과 보완관계를 이루며 이 문제에 접근하면 더욱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음에 틀림없다.
여하튼 우리는 분석철학의 중심인물인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통해서 전후기 사상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비교하였고 이러한 사상을 배경으로 해서 그의 종교관과 신개념을 추적해 보았다. 그의 입장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하여 전기에서는 러셀 및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견해와 차이점을 살펴 보았으며, 후기에서는 이른바 비트겐슈타인적 신앙주의자들의 입장을 통해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입장이 무엇인지 검토해 보기도 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거쳐 도달한 결론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한 분석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신의 본성을 인식하는 문제에 직접 관여하기보다는 신의 개념을 분석하는 데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분석의 방법은 언어관에 따라 다양하고 그러한 방법을 통해서 얻은 결론도 서로 상이한 점이 많다.
둘째, 비트겐슈타인 자신은 언어관을 바꾸고 새로운 의미이론을 내놓아 전후기에 상당한 차이점을 보이지만 신개념에 관한 한 논리적으로나 사실적으로 분석될 수 없는 한계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러셀이나 논리실증주의자들과의 차이점을 찾아볼 수 있다.
세째, 그러한 차이점은 비트겐슈타인이 러셀과 같은 불가지론자도 아니고 에이어와 같은 무신론자도 아니며 비트겐슈타인적 신앙주의자들과 같이 종교적 상대주의자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상과 같이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분석을 검토하여 몇가지 특징을 찾아내었는데 그것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신개념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신’이라는 개념이 그의 존재적 사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신이 존재한다’는 문장은 객관적 사실만을 서술하고자 하는 문장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 종교적 단체의 한 성원으로 자기자신을 확인한다는 뜻이고 그러한 인간으로서 삶을 살겠다는 결의의 표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순히 종교적 사실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특정한 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거기서 파생되는 이익을 누릴 뿐만 아니라 불이익을 감수하겠다는 뜻이며, 어떤 종류의 선과 미와 진과 성을 추구할 것인지, 다시 말해서 어떤 자세로 삶을 살 것인지를 나타내는 일종의 태도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 속에는 분명히 어느 특정한 신개념이 들어있으므로 어떠한 신개념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자연적인가 초자연적인가, 내재적인가 초월적인가, 인격적인가 원리적인가, 서구적인가 동양적인가, 종교적인가 미신적인가 등에 따라 신개념이 달라지고 또 거기에 따라 삶의 형식이 세분화되며 점점 더 이질적인 언어게임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문화인류학적 혹은 역사적, 사회적 및 정치적 요소가 개입되기 마련인데, 어느 종교적 언어게임이 더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것인지 철학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이것이 신개념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통해서 얻어낸 성과가 될 것이다. 더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기성종교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태도도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그는 종교에 대해서 회의적이지만 어느 특정한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어느 특정한 신개념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종교가 요구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아무런 신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그는 어느 기성종교에 귀의하기에는 너무도 종교적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주

1.Fred A.Westphal, The Activity of Philosophy(N.J.Englewoood:Prentice-Hall, Inc.,1969),p.47.
2.Ibid.
3.A.J.Ayer, "Does Philosophy Analogue Common-Sense?", Proceedings of the Aristotelian Society, supplementary Vol. for 1938 xvi권, p.173.
4.L.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trans. G.E.M.Anscombe (Oxford:Basil Blackwell,1978), ss 12e.
5.L.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trans. D.F.Pears and B.F.McGuiness(London:Routledge & Kegan Paul Ltd.,1961), 4.024.
6.Ibid. 2.223.
7.Ibid. 6.54.
8.Ibid. 6.432.
9.Donald Hudson, Ludwig Wittgenstein: The Bearing of his Philosophy upon Religious Belief(London:Lutterworth Press,1968), p.27.
10.Ibid. p.33.
11.Ibid.
12.Tractatus(op. cit.), 6.522.
13.B.Russell, "Introduction", Tractatus, p.xxi.
14.B.Russell, My Philosophical Development(London:George Allan and Unwin, 1959), p.126.
15.B.Russell, "Knowledge by Acquantance and Knowledge by Description”, Mysticism and Logic (London:Penguine Books, 1953),pp 212-214.
그는 “「웨이벌리」의 저자는 스코트이다”라는 문장에서 “「웨이벌리」의 저자”라는 구 절은 아무 것도 지칭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 문장에서 제거될 수 있다고 믿는다. 마찬가지 이유로 ‘둥근 사각형’이나 ‘현재의 불란서 왕’도 그러한 식으로 분석한다.
16.A.J.Ayer, Language, Truth and Logic(London:Gollanez co.,1946), p.9.
17.Hudson, Wittgenstein(op. cit.), p.22. 그러나 그는 Wittgenstein의 논리적 분석에 의해서 경험론이 함축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18.Ibid.
19.Otto Neurath, "Socialogy and Phisicallism", Logical Positivism, ed.by A.J.Ayer(N.Y.:The Free Press,1959), p.284.
20.Justus Hartnack, Wittgenstein and Modern Philosophy, trans.M.Cranston
(N.Y.:Doubleday & co.Inc.,1965), p.54 그는 “Wittgenstein으로서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이론을 그렇게 용이하게 유지할 수가 없으며, 논리실증주의자들도 그러한 이론은 불합리한 것으로 간주할 충분한 이유를 가질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라고 덧붙인다.
21.George Pitcher, Philosophy of Wittgenstein(N.J.:Prentice-Hall,Inc.,
1964), p.328. 이것은 원래 Russell이 Wittgenstein이 사망하였을 때 그를 회고하
여 기고한 글에 담겼던 내용이다. "Ludwig Wittgenstein", Mind, LX, No.239
(July,1951) 298 참조.
22.N.Malcolm, Wittgenstein:A Memoir(London:Oxford University Press,1962), p.72.
23.Ibid. p.71.
24.Pitcher, Philosophy of Wittgenstein(op. cit.) p.326.
25.L.Wittgenstein, The Blue and Brown Books(N.Y.:Harper & Row,1965), p.28.
26.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op. cit.), § 7.
27.Ibid. § 65,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유사성을 특징 짓는 표현으로 ‘가족유사성’보다 더 좋은 표현을 생각할 수 없다. 식구들간의 여러가지 유사성, 즉 체격, 용모, 눈의 색깔, 걸음걸이, 기질 등은 같은 식으로 서로 겹치며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게임들은 하나의 가족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Ibid.§ 67.
28.Ibid. § 23.
29.Ibid. § 1.
30.Fergus Kerr, Theology after Wittgenstein(Oxford:Basil Blackwell,1986), p.40.
31.Ibid. p.42.
32.黃弼昊는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적 신앙형태주의”라고 번역하면서 비트겐슈타인적 특징 세가지를 열거한다. 그러나 그 특징은 ‘비트겐슈타인적’이라는 말에 담겨 있고 그가 ‘형태(form)’라고 번역한 요소도 역시 여기에 표현된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여기서 ‘형태’는 ‘형식’으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分析哲學과 宗敎」(서울:종로서적,1984) pp.211-213 참조.
33.Investigations § 373.
34.Wittgenstein Lectures, Cambridge 1932-35, ed.Alice Ambrose(Totowa,N.J.:Rowman and Littlefield, 1980), p.32.
35.Wittgenstein, The Blue and Brown Books(op. cit.), p.28.
36.Wittgenstein, ed. C.Barrett, Lectures on Religious Belief(Berkeley: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1972), p.60.
37.Ibid. p.50.
38.Wittgenstein, Lectures and Conversation on Aesthetics, Psychology and Religious Belief, C.Barrett ed.(L.A.: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67), pp.53-54.
39.Paul Johnston, Wittgenstein and Moral Philosophy(London and N.Y.: Routledge,1989), pp.9-10.
40.Wittgenstein, Lectures and Conversation(op. cit.), p.55.
41.Ibid. p.56.
42.J.Wisdom, "Gods" in Classical and Contemporary Readings in the Philosophy of Religion, ed. J.Hick(N.J.:Prentice-Hall,1970), p.442.
43.Hudson, Wittgenstein(op. cit.) p.59.
44.Wittgenstein, Investigations § 241.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고 인간들 사이의 일치가 진위를 결정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진위는 바로 인간이 말하는 것이고 인간이 일치를 보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이다. 이것은 의견에 잇어서의 일치가 아니라 삶의 형식에서의 일치이다.” 그러나 이 구분은 너무 엄격한 뜻으로 이해하면 안될 것이다. 이명현은 그 구분에 대해서 자세히 논의하고 있는데 가령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우리가 삶의 형식에 있어서 일치한다면, 판단에 있어서는 일치한다. 이런 논점으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판단은 삶의 형식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판단은 삶의 형식의 한 양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삶의 형식의 두가지 국면”, 「비트겐슈타인의 이해」, 분석철학연구회편(서울:서광사, 1984), p.238 참조.
45.Kai Neilson, "Wittgensteinian Fideism", ed. S.M.Cahn and D.Shatz, Contemporary Philosophy of Religion(N.Y.:Oxford University Press,1982), pp.238-239. 이와 비슷한 입장을 취하는 철학자로 그는 P.Wintch, G.E.Hughes, P.Geach, S.Cavell, J.M.Cameron, R.Cobwin, W.Hudson 등을 든다. 이 주제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황필호의 “비트겐슈타인적 신앙형태주의”, 「분석철학과 종교」(앞의 책), pp.209-226 참조.
46.Wittgenstein, Investigations(op. cit.), § 19.
47.Ibid. p.226.
48.Ibid. p.174.
49.이명현, “언어의 규칙과 섦의 형식”, 「비트겐슈타인과 분석철학의 전개」, 한국분석 철학회편(서울, 철학과 현실사,1991), p.132.
50.Nielson, "Wittgenstein Fideism"(op.cit.), p.239.
51.Ibid. p.254.
52.Wittgenstein, Lectures and Conversation(op. cit.), pp.70-71.
53.J.Hick, Philosophy of Religion(N.J.Prentice-Hall,1973), p.74.
54.Johnston, Wittgenstein and Moral Philosophy(op. cit.), p.10.
그는 언어게임과 실재와의 관계를 함부로 연관지으면 안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가 확실하게 규명되지 않은 삶의 형식에서 어떤 언어게임의 근거를 찾는 한 종교적 언어게임과 사실적 언어게임 사이의 존재론적 가치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일관성’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점을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접근방식이 위험스러울 정도로 보수적이라는 지적이 언어게임 자체가 본질적으로 혼란스럽다는 이유 때문에 계속 나오고 있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철학적 비판은 바로 그점을 간과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혼란된 언어게임이라는 개념을 내세운다고 해서 변명의 여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한다.
“언어게임 그 자체를 고려할 때 혼란을 말할 근거가 없다. 개념들은 언어게임들 안에서만 규정된다는 사실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하나의 결론은 언어게임 그 자체에 개념적 혼란을 귀속시킬 독립적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본질적으로 혼란된 언어게임이라는 개념 속에 전제가 되는 것은 어법에 대한 독립적 평가의 가능성인데, 그러나 이것은 어법이 어떤 의미로 실재와 관련이 있을 경우에만 가능하고...이러한 생각은 별의미가 없다.” p.10 참조.
55.Ibid. p.221 ft.
56.Richard Rumana, "Wittgenstein:The Language of Religion", Ludwig Wittgenstein:A Symposium on the Centennial of His Birth, ed. by
S.Teghrarian, A.Serafini and E.M.Cook(N.H.:Longwood Academic,1990),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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