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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7-30
 제목  간추린 루마니아 역사
 주제어  
 자료출처  루마니아 소망교회  성경본문  
 내용

1. 루마니아 (루마니아어: 로므니아)

루마니아인(루마니아어:로믄)이라는 말은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 Roma의 라틴어 표기로 로마누스 romanus에서 유래되었다. 라틴어 로마누스는 라틴어를 사용하지 않는 민족을 말하는 바르바루스 barbarus와 반대되는 말로 로마 시민을 일컫는 말이다.

106년 다치아 Dacia 왕국(고대 루마니아 왕국)이 로마의 속주로 병합된 이후, 다치아에 거주하고 있던 토착민들은 카라칼라 Caracalla 황제가 로마 제국을 통치하던 212년에 로마 제국의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계속되는 이주 민족들의 침입으로 271년 로마 제국의 군대와 행정부가 다치아에서 철수하였고 그 이후에 다치아에 정착하고 있던 로마인과 다치아인들의 혼합 민족인 로마화된 다치아 민족은 자신들을 다른 이주 민족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로마인(roma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현재 루마니아의 국호인 '로므니아는 역사적으로 볼 때 한참 이후에 나타난다. 즉, 로므니아라는 용어는 1764년 독일어로 된 역사자료에서 맨 처음으로 사용되었고, 그 이후 1816년에 그리스어로 된 지리와 역사에 관한 2편의 옛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1838년 루마니아 작가 이온 헬리아데 러둘레스쿠는 루마니아의 세 지방인 문테니아 Muntenia 지방(짜라 로므네아스크 또는 발라히아 Valahia라고 부른다), 몰도바 Moldova 지방 그리고 트란실바니아 Transilvania 지방을 통합하는 하나의 명칭으로 로므니아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당시 로므니아라는 용어는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지만 아직까지 민족국가로서의 의미를 지니지는 못하였다. 국호로서의 로므니아는 루마니아가 민족국가로서의 기초를 다지는 1859년, 즉 몰도바 지방과 문테니아 지방이 통일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2. 루마니아 민족의 기원

로마제국의 트라이안 Traian 황제는 105에서 106년 사이에 있었던 다치아 Dacia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다치쿠스 Dacicus라는 첨명을 가진 트라이안 Traian 황제는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트라이안의 기둥(Columna lui Traian)'이라는 이름의 기념비를 세울 것을 다마스커스의 건축·조각가인 아폴로도르 Apolodor에게 명하였다. 현재 이 기념비는 로마에 있으며 더 정확하게 말하면 캄피도글리오 Campidoglio 근처에 있는 트라이안 광장에 있다. 대리석으로 된 이 기념비는 높이가 40m이고 직경은 거의 4m 가량 되는 거대한 돌기둥이다.

'트라이안의 기둥'은 루마니아 민족의 기원과 관련이 있는 중요한 기념비이다. 그 이유는, 다치아인과 로마인들이 두 차례(A.D. 101∼102년, 105∼106년)에 걸쳐 전쟁을 치르는데, 이들이 전투하는 모습이 기념비에 조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루마니아인 들의 선조인 다치아인들과 로마인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155개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기념비에는 로마인들과 다치아인들의 옷차림, 그들이 사용하고 있었던 무기류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장소를 이동했고 전쟁에서 어떤 전략과 전술을 사용했는지 등이 묘사되어 있고 이 외에도 카르파치 산맥이나 다뉴브강 등 당시 다치아의 풍경과 요새들, 아폴로도르 Apolodor가 건설한 다리, 다치아인들과 로마인들간의 전투 장면, 다치아인들이 로마인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모습 등이 묘사되어 있다. 이 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당시 다치아의 데체발 Decebal 왕이 단도를 가지고 자결하는 모습이다. 사실상, '트라이안의 기둥'은 루마니아 민족뿐만 아니라 루마니아 언어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리고 트라이안 황제는 다치아인들과 가장 격렬하게 전투를 치른 도브로제아 Dobrogea 지방의 아담클리시 Adamclisi 지역에 '트라이안 전승 기념비(Trofeul lui Traian)'을 세우라고 명령하였다. 실제로 이 전승기념비는 로마인들의 풍습과 관련이 있다. 즉, 로마인들은 전쟁에서 승리를 할 경우, 전투를 치른 전쟁터에 적군의 무기를 피라미드 모양으로 한 곳에 모아 두었는데, 로마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의미하였고 그들은 이것을 전승기념비라고 불렀다.

거대한 돌로 만들어진 아담클리시의 트라이안 전승기념비는 둥근 원주모양으로 되어있는데, 이 기념비는 당시 54개의 돌덩어리로 조각되었지만 현재에는 49개만이 남아있다. 또한 이 기념비는 로마의 트라이안 광장에 있는 기념비와 모양이 똑같고, 다치인들과 로마인들의 모습과 생활양식, 그들의 옷차림과 무기 그리고 머리모양 들이 조각되어 있다. 다치아인들과 로마인들의 모습 및 생활양식은 아담클리시에 있는 기념비보다 로마의 기념비에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이들 두 기념비에 묘사되어 있는 당시의 모습들은 루마니아 민족의 기원을 밝히는데 결정적인 자료가 되는데, 예를 들어 현재 루마니아의 어떤 지역에서 착용하고 있는 루마니아인 들의 전통적인 복장은 실제로 이 기념비에 조각되어 있는 것과 일치하고 있다.


루마니아 민족의 기원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

9∼10세기의 다양한 역사문헌들은 다뉴브강과 흑해 그리고 카르파치 산맥 사이에 어떤 한 민족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의 이러한 역사문헌들에서는 현재의 루마니아인 들이 "블라흐 , "발라흐  그리고 "볼로흐 라는 용어로 기록되어 있는데, 위의 용어들은 독일어에서 유래하고 있다. 즉, 고대 독일인들은 켈트족을 부르기 위해 발흐-발라하walch-walach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또한 중세에 들어와서 그들은 독일 남부의 바바리아 Bavaria 주와 오스트리아에 거주하는 고대 로마인들을 부르기 위하여 발흐walch와 벨헤welche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 이후 이 용어는 독일인에서 슬라브인으로 그리고 슬라브인에서 비잔틴인으로 전수되었고, 결국 이 용어는 로마 화 된 민족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발라흐 valah 인, 즉 현재의 루마니아인 들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9세기 아르메니아인 모브세스 크호레마찌 Movses Khoremaţi가 기술한 연대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1035년-1040년 사이에 편찬된 터키 최초의 연대기인 오구즈나메 Oguzname에서는 모브세스 크호레마찌가 기술한 연대기보다 더 구체적으로 발라흐인들에 대하여 기술되고 있다. 이 외에도 850년에 작성된 역사자료에서도 발라흐인들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현재 그리스의 카스타마니토우 Kastamanitou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다.

10세기 11세기에 접어들면서 다뉴브강 북부에 거주하고 있었던 블라흐 vlah 인(루마니아인) 들에 대한 다양한 기록들이 나타난다.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틴 Constantin VII세(913-959)는 블라흐인들을 르호메이 rhomei 인(비잔틴인)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로만 roman, 즉 로마인이라고 불렀다. 서슬라브어로된 최초의 연대기 - Cronica lui Nestor, Povestea anilor de demult - 에서는 블라흐 vlah 인들이 볼로흐 voloh 인으로 기술되어 있고, 다뉴브강 유역에 정착하고 있었던 블라흐인들은 그 이후 이 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마자르인들에 의해 점령되어 통치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11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는 다뉴브강의 북부에 거주하고 있던 블라흐 vlah 인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역사문헌에서 언급되고 있다 Gesta Humgarorum, Gesta lui Simon de Keza, Chronicum Budense, Chronicum Pictum Vindobonense, Chronicum Dubnicenese 등.

마찬가지로 다뉴브강의 남부에서 정착하고 있던 루마니아인 들도 비잔틴 제국의 연대기에 언급되어 있다. 케드레노스 Kedrenos는 루마니아인 들이 당시 자치적인 정치구조를 갖춘 마케도니아 소공국에 976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밝히고 있고 비잔틴 제국의 유명한 역사가인 케카우메노스 Kekaumenos는 블라흐인들을 고대 로마 제국의 식민지 개척자들의 후예라고 서술하면서 트라이안 황제와 데체발 Decebal 왕 사이에 있었던 전투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또한 비잔틴 제국의 다른 역사가인 킨나모스 Kinnamos는 블라흐인들을 오래 전에 이탈리아에서 온 식민지 개척자, 즉 로마인이라 간주하고 있다.

9세기 이후 다양한 역사문헌에서 언급되고 있는 블라흐 vlah 인들은 누구이며, 그들이 다뉴브강 북부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남부에서도 정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하며 그리고 9세기 이전의 역사문헌에서는 블라흐인들에 대하여 언급되지 않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루마니아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볼 수 있다.

유럽의 남동부에 거주하고 있던 블라흐인들은 그들 자신을 로마인이라고 불렀고, 유럽의 모든 고대 로마인(라틴족)들 중에서 단지 이들만이 로마 Roma라는 용어를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 보존하고 있다. 블라흐인들을 의미하는 언어로 표준어에서 다소 형태가 바뀌어진 방언을 살펴보면, 다뉴브강 북부지역의 로므니  루므니와 테살리아 Tesalia와 마케도니아의 아로므니 그리고 달마치아의 루메니 rumeni 등이 있다.

블라흐인들의 민족적인 기원은 동로마제국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역사적으로 볼 때 블라흐인들은 다치아인들과 로마인들이 혼합되면서 이루어졌다. 게타에-다치아(geto-dac)인들은 기원이 트라치아 Tracia에서 유래하는 아주 유사한 민족으로 다뉴브강 하류, 흑해 그리고 발칸 산맥사이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당시에 20개의 다치아 민족이 있었고 그 수도 상당하였다고 전하고 있는데, 게타에-다치아 민족은 기원전 6세기부터 역사문헌에서 언급되기 시작하였다. 즉, 콜루멜라 Columella는 그의 저서 "De re rustica" 에서 다치아인들이 농경에 아주 익숙하였고 철을 가공하는 데에도 능숙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은 당시 다치아인들이 사용했던 도구들이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발견됨으로써 증명되었다. 이 외에도 그는 다치아인들이 도자기를 만들 때 손으로 흙을 빚지 않고 발판을 돌려 도자기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식물학이나 의학 그리고 천문학에서도 다양한 지식을 축적하고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고대 역사가들은 다치아인들에게 있었던 사회계층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는데, 하나는 신부들로 대표되는 상류계급인 '타라보스테스 tarabostes'이고 또 다른 하나는 투사계급인 '코마티 comati'이다.

다치아인들의 신앙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즉, 당시 다치아인들은 '자몰세 Zamolxe'라는 유일신을 숭배하면서 인간의 영혼이 영원하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터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는데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은 이러한 다치아인들의 모습을 보고 경외하였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다치아인들의 종교적인 신앙은 실제로 로마 제국이 세력을 팽창하는데 상당한 걸림돌이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게타에인(라틴어: Getae 루마니아어: get)이 페르시아 왕국에 대항한 유일한 민족으로 간주한 동시에 트라치아인들 중에서 가장 용감하고 정직한 민족으로 규정하였다. 실제로 기원전 326년 3만 명을 이끈 마케도니아의 조피리온 Zopyrion 장군은 게타에인(get)들과의 전투에서 패하였고, 그 이후 마케도니아의 리시마흐 Lisimah 장군은 기원전 300년까지 게타에-다치아인들의 왕인 드로미헤테 Dromihete에게 두 차례에 걸쳐 패하였다.

게타에-다치아인들은 부레비스타 Burebista 왕(B.C. 88-44)의 지도하에 강력한 왕국을 이룩하는데, 고대 지리학자 스트라본 Strabon은 고대 로마인들까지도 부레비스타 왕을 두려워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실제로 부레비스타 왕은 로마 제국의 시저 황제에게 대항하면서 폼페이를 지원하였고, 로마 제국 내부의 내부분쟁에도 개입하였다. 하지만 부레비스타 왕은 기원전 44년에 주위 사람들의 음모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였다(시저도 같은 해에 같은 이유로 죽었다). 부레비스타 왕이 죽고 난 이후 다치아 왕국이 분열되면서 자연히 이 지역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게타에-다치아인들의 정치적인 중심지는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남부지역으로 옮겨졌다. 서기 1세기 역사가 플리니우 첼 버트른 과 타치트 Tacit는 이 지역을 다치아라고 명명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용맹한 다치아인들이 로마 제국의 팽창에 걸림돌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다치아인들과 로마인들간의 전투는 피할 수 없었다. 다치아인들과 로마인들 사이의 전투는 두 차례(A.D. 101∼102년, 105∼106년)에 걸쳐 아주 격렬하게 치러졌고, 특히 두 번째 전투에서 다치아인들은 로마 제국의 트라이안 황제에게 패하였다. 당시 다치아의 수도인 사르미제제투사 Sarmizegetuza가 로마 제국에 의해 함락되자 다치아의 왕인 데체발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산으로 후퇴하지만 로마 군대의 추격을 계속 받았고, 결국 그는 로마 제국에 체포되어 끌려가는 대신에 자결을 선택하였다.

다치아는 약 2세기 동안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고, 에우토피우 Euthopiu가 언급하는 것처럼 트라이안 황제 시대부터 로마 제국 문화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다치아는 로마 문화의 영향을 받아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어 2세기초에서 중순사이에 다치아에서 44개의 도시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언급되고 있다.

다치아의 행정조직은 트라이안 황제와 하드리안 왕 그리고 아우렐리우 왕에 의해서 세 차례에 걸쳐 개편되었고 로마 제국에 정복되고 난 이후 다치아인들의 생활양식은 로마 제국의 생활양식을 따랐다. 다치아인들이 로마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한 예로, 당시 다치아에서 사용된 라틴어로 "다치아 펠릭스 Dacia Felix" - 이것은 루마니아어로 '행복한 다치아(Dacia felicit)'를 의미한다 - 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는 동전을 들 수 있다.

결국 위에서 언급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다치아인들이 로마 제국에 정복되고 난 이후 소멸한 것이 아니라 로마화 되었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대 다치아 지역에서 로마화가 강하게 진행된 곳은 트란실바니아 Transilvania 지역과 바나트 Banat 지역 그리고 올테니아 Oltenia 지역이었고, 반면에 문테니아 Muntenia 지역과 몰도바 Moldova 지역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지역에서 보다 상대적으로 약하게 진행되었다. 마찬가지로 농촌에서보다는 도시에서 더 강하게 진행되었다. 그렇지만 라틴어는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전국적으로 보급 확산되었다.

다치아인들이 로마 제국에 정복되고 난 이후 루마니아의 전통적인 장례식이나 루마니아인 들이 손으로 직접 만든 도자기류 등과 같은 다치아의 독특한 문화 요소들은 소멸되지 않고 로마 문화와 함께 공존하였고, 수백 개의 고대 지명이나 강의 이름 등도 보존되었다. 또한 15개의 다치아 군부대의 이름이 돌로 된 비석에 조각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 외에도 몇몇 역사자료에서는 레갈리아누스 Regallianus나 아우렐로우스 Aureolus와 같은 인물들뿐만 아니라 갈레리우스 Galerius 황제와 막시미누스 다이아 Maximinus Daia 황제들이 다치아 출신이라는 사실도 기술되어 있다.

271년 아우렐리안 Aurelian 황제는 이주하는 게르만 민족들의 공격이 점차 빈번해지자 다치아에서 철수하였다. 당시 로마인들은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모든 영토를 이들 이주 민족들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로마 제국이 다치아에서 철수한 시기(271-275년 사이)와 관련하여 역사학자들의 견해가 서로 상이하지만 이들 역사가 중 어느 누구도 그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과 관련한 역사적 사건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신중함을 요해야 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수세기에 걸친 고고학자들의 발굴 작업과 연구를 통해서 신빙성 있는 역사자료들이 하나씩 축적되었는데, 이러한 고고학 자료들은 다치아가 271-275년 이후에도 로마 문화의 영향하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당시의 루마니아인 들은 훈족의 침입이 시작되기 이전까지는 아풀룸 Apulum이나 사르미제제투사 Sarmizegetusa 그리고 나포카 Napoca와 같은 고대 도시에서 거주하였지만, 4세기 말경 로마 제국이 위의 고대도시들에서 철수함에 따라 자연히 이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던 루마니아인 들은 농촌으로 피신하였고 이들은 그곳에서 도자기나 장식품 그리고 로마 제국의 동전을 계속 사용하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비록 로마 제국이 다치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다뉴브강 북부지역에 대한 로마 제국의 지배는 지속되었는데, 실제로 이 지역은 슬라브족이 침입하기 시작한 602년까지 로마 제국의 정치·경제·군사·문화적인 영향하에 있었다.

이주설과 상주설

아우렐리안 황제(260-275)는 다뉴브강의 왼편에 있는 많은 지역을 요새 화하였고, 콘스탄틴 대제가 통치하던 시대에 이 지역에서는 20개가 넘는 요새들이 있었다. 또한 콘스탄틴 대제는 328년에 다뉴브강을 가로질러 오에스쿠스 Oescus 지역과 수치다바 Sucidava 지역을 잇는 다리를 건설하였다.

295-297년 사이 갈레리우스 Galerius 황제는 다뉴브강의 북부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하였고 이로써 다치아는 다시 재건되었다. 즉 고대 다치아의 모든 영토는 다시 로마 제국의 영향하로 들어갔다. 하지만 271년 이후 현재의 루마니아 지역에 거주하였던 루마니아인 들에 대한 역사자료가 매우 부족한 나머지 이 지역에서 루마니아인 들이 계속 거주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데, 즉 현재의 루마니아 지역에 루마니아인들이 계속 거주하였다는 상주설과 이들이 다뉴브강 남쪽으로 이주하였다는 이주설이 대립되고 있다. 실제로 이 시기에 루마니아인 들에 대한 역사자료가 불충분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주설이 주장하는 것처럼 카르파치 산맥과 다뉴브강 사이에 현재의 루마니아인 들이 부재하였던 것은 아니다. 따라서 상주설을 주장하는 많은 루마니아 학자들은 이주설이 이론으로써 확립되기 위한 신빙성 있는 자료를 충분히 제시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주설의 이론에 따르면, 271년 아우렐리안 황제가 다뉴브 강 남쪽으로 철수할 당시 루마니아인들은 로마 제국의 군인들과 함께 철수했다가 다뉴브강 남부지역에서 모여 살면서 13세기 중엽에 문테니아 지방 몰도바 지방 그리고 트란실바니아 지방으로 이주하였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트란실바니아 지방으로 이주한 루마니아인들은 몇 세기 이전부터 그곳에서 이미 정착하고 있던 헝가리인들과 세쿠이 secui 인 그리고 사스 sas 인들과 만났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트란실바니아 지방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통치하에 있었을 당시,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루마니아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인 권리를 획득하기 위하여 싸우기 시작한 바로 그 시기에 대두되었다. 이 지역에서 루마니아인들은 다수민족이었지만, 15세기에 접어들면서 헝가리인과 세쿠이인 그리고 사스인들이 그들간에 법률적인 협정을 맺음으로 인하여 사실상 루마니아인들은 정치적인 권리를 가질 수 없었다. 이주설에 따르면 루마니아인들은 트란실바니아 지방에 대한 어떠한 역사적인 권리도 요구할 수 없었는데, 이러한 주장은 헝가리인들이 1920년 트리아농 Trianon 조약에 반대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이주설과 상주설의 근거가 되는 3세기에서 9세기 사이의 루마니아인들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가 전무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448년 비잔틴 제국의 연대기 편자인 프리스쿠스 Priscus는 아틸라 Attila 왕의 왕궁에서 라틴어를 사용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 외에도 쥬스티니안 Justinian 황제(527-565년)시대 때 문테니아 지방에 거주하고 있던 한 슬라브인이 라틴어를 사용하였다는 사실도 좋은 예이고, 비에르탄 Biertan 지역에서 귀족 제노비우스가 라틴어로 새긴 크리스트교 비문도 그렇다. 마우리치우 Mauriciu 황제(582-602)의 전략·전술서적인 "스타테지코눌 Stategiconul"에서는 슬라브족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던 다치아-로마인들이 다치아에서 600년경 비잔틴 제국의 군대를 인솔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브레제아누 S. Brezeanu를 포함한 몇몇 루마니아 역사가들은 3세기에서 9세기 사이의 루마니아인들에 대한 역사 자료가 거의 부재하다는 것과 관련하여, 중세 초기에는 루마니아인들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에 대한 역사 자료들도 충분하지 않으며, 특히 알바니아인들에 대한 역사자료는 루마니아인들의 경우보다 더 많은 기간동안 부재하였지만 그 어느 누구도 알바니아인들이 역사적으로 알바니아에서 계속해서 존재하여 왔다는데 의심을 가지지 않는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주설에 따르면, 슬라브족이 6-8세기경에 다뉴브강 북부에 정착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역사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만약 루마니아인들이 13세기에야 비로소 트란실바니아 지역에 정착하였다면 당연히 이 지역에서는 헝가리로 된 지명이 사용되었을 것이지만 이 사실도 아직까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외에도 루마니아인들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가 충분하지 않은 것은 중세 초기의 역사가들이 어떤 지역이나 왕국의 이름을 당시 그 지역을 통치하던 가문, 즉 왕가의 이름을 따서 기술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클로비스 Clovis 왕(466?-511)이 지배하던 지역을 역사가들은 프란치아 Francia라고 불렀고,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민족들은 인종학적인 측면에서 아주 다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프랑크 franc 족이라고 기술하였다. 그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비록 프랑크족이 다른 민족에 비해 소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을 정복하고 통치한 지배계급이기 때문이었다.

많은 역사가들은 다뉴브강 유역에 고트족, 훈족, 게피데족 그리고 아바르족이 건설한 많은 공국들이 존재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프랑스 역사가인 Lucien Musset은 이러한 공국들의 이름이 시대에 따라 변하였지만 역사 자료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그리고 이전부터 계속 거주해 온 민족이 존재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다뉴브강 유역에서 계속 거주하였지만 역사 자료에서 언급되지 않은 민족은 바로 로마 화된 민족, 즉 현재의 루마니아 민족이라는 것이다. 결국 루마니아인들은 다뉴브강 유역에서 지속적으로 거주하면서 동시에 많은 이주 민족들의 침입을 받았고 또한 루마니아 지역에 침입한 이민족들 중 일부는 자연스럽게 루마니아인들에게 동화되었다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약 천 년간(271년-13세기)에 걸쳐 많은 민족들이 이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주 민족들 중 처음으로 고대 다치아 지역에 침입한 민족은 동고트족이었다. 이들은 271년에서 376년 사이에 카르파치 산맥의 동부 지역 및 다뉴브강 유역 평야 지대의 일부지역을 통치하였고, 로마 제국과 조약을 맺어 다뉴브강 국경지역을 방어하고 있었다. 울필라스(Wulfila, Ulfilas, 311-382)는 동고트족에게 크리스트교를 포교하는 동시에 성서를 고트어로 번역하였지만, 아타나리에 Athanarie 왕은 크리스트교가 동고트족의 단결을 와해한다는 이유로 크리스트교를 신봉하던 사람들을 다뉴브강 남부 지역으로 추방하였다. 그리고 크리스트교 화되지 않은 동고트인들은 375년 훈족이 침입함에 따라 그들도 다뉴브강 남부로 피신하였다.

375년에서 454년 사이 다뉴브강의 북부지역은 훈족의 통치하에 있었다. 아시아의 초원지대에서 온 유목민인 훈족은 판노니아 Pannonia 평야지역을 중심으로 번성하였고, 아틸라 Attila 왕(434-453)이 통치하던 시기에 황금기를 이루었다. 발칸반도 지역에 수 차례에 걸쳐 원정을 하였던 훈족이 트란실바니아 지역에 일시적으로 거주하였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축적된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여 증명되고 있다. 훈족은 454년 네다오 Nedao 지역에서 게피데족(6세기에 멸망한 게르만족)에게 패망함에 따라 트란실바니아 지역과 올테니아 지역의 일부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게피데족은 다른 이민족들보다 온순한 민족으로 다치아-로마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하였지만 558년 롬바르드족과 연합한 아바르족에게 패망하였다. 아바르족은 훈족처럼 판노니아 평야지역에 정착하여 번성하였고, 롬바르드족은 이탈리아 북부지역에 정착하였다.

슬라브족은 다뉴브강 유역에서 게르만족이나 우랄 알타이족과 같은 다른 이주 민족들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지만 정확하게 어느 시기에 현재의 루마니아 지역에 왔는지는 알 수 없고, 다만 517-518년 이후에 비잔틴 제국의 다뉴브강 유역 국경지역을 공격하였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6세기 중엽 슬라브족은 카르파치 산맥 주위의 여러 지역에 정착하였고, 7세기에는 트란실바니아 지방에 정착하였다.

크리스트교의 도입

발칸반도에서 슬라브족이 헤게모니를 잡은 동시에 다수 민족으로 부상함으로써 이 지역에서의 민족구성은 급속하게 변하였다. 다뉴브강 남부지역에서 라틴족들은 차츰 슬라브족에게 동화되었고, 슬라브족의 영향은 인명이나 지명, 일상용어, 교회 용어 등 언어학적인 측면에서 특히 강하게 진행되었다. 9세기에 교회 슬라브어는 그리스 정교회의 공식언어가 된 동시에 그리스어와 함께 루마니아 공국들의 법률이나 문서들을 작성할 때에도 사용되었다. 이러한 슬라브족의 영향은 슬라브인들이 루마니아인들에게 동화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반면에 다뉴브강 북부지역에서는 로마 문화의 영향이 지속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이루어졌는데, 그 본질적인 요소는 크리스트교였다. 루마니아의 역사가인 니콜라에 이오르가 Nicolae Iorga가 주장하는 것처럼 크리스트교는 다치아-로마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남부 및 북부 지역에서 로마 문화의 본질적인 요소인 정신, 언어 그리고 생활양식을 유지하게 하는, 즉 로마 제국을 대신하고 구제하는 그런 역할을 하였다.

313년 밀라노 칙령이 선포됨에 따라 크리스트교는 공식적인 종교로서 인정되었다. 하지만 크리스트교는 이보다 훨씬 이전에 다치아와 로마 제국의 속주였던 도브로제아 지역에 전파되었는데, 실제로 디오클레찌안 Diocleţian 황제(285-305)와 갈레리우 Galeriu 황제(293-311)가 통치하던 시기에 몇몇 순교자들이 토미스 Tomis(현재 콘스탄짜)에서 포교활동을 벌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역사자료가 발견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역사자료에는 4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토미스에서 10명의 주교가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다뉴브강 북부지역에서는 울필라스가 고트족에게 크리스트교를 그리스어, 라틴어 그리고 고트어로 포교하였고, 성경을 고트어로 번역하였다. 울필라스와 같이 당시에 포교활동을 벌인 사바 고툴 Sava Gotul도 유명한 전도사였다. 크리스트교의 영향과 관련한 역사적인 사실이나 유물들을 살펴보면, 우선 루마니아어로 된 교회용어를 통하여 루마니아의 선조들이 4세기에서 7세기까지 어떻게 크리스트교 화되었는지 그 과정을 알 수 있다. 크리스트교 용어 외에도 비에르탄 Biertan 지역과 포롤리숨 Porolissum 지역에서는 크리스트교의 종교예식에서 사용되었던 물건들이 발견되었고, 슬러베니  지역과 포롤리숨 지역에서는 2개의 고대 크리스트교 교회유적이 발견되었다.

다뉴브강의 북부지역에서 크리스트교는 조직체계나 계급제도를 갖추고 있지 않았는데, 따라서 이 지역에서 사용된 종교와 관련된 용어들은 라틴어에서 유래한다 실제로 크리스트교는 로마 제국이 통치하던 시기에 도입되어 다치아에 전파되었다.


제공: 루마니아 소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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