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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7-24
 제목  고대교회의 선교
 주제어  [선교]
 자료출처  김영도  성경본문  
 내용

Ⅰ. 도입

Ⅱ. 선교의 방법

Ⅲ. 선교의 조직

Ⅳ. 선교의 훈련

Ⅴ. 맺는 말

 

김영도 교수는 고려대학교(B. A.)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M. B. A.)와 장로회신학대학교(M. Div.)를 거쳐 미국 Princeton신학교(Th. M.)에서 수학하였으며, Union신학교(Ph. D.)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영남신학대학교에서 역사신학 전임강사로 봉직하고 있다.

 

Ⅰ. 도입

 

예루살렘 함락(70년) 이후 180년까지 지중해 연안의 거의 모든 중요한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180년 이전에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1)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2)에 교회들이 존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77년 이전에 오늘날의 프랑스 지역이었던 고울과 리용3)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185년까지 오늘날의 독일4)에 기독교 공동체들이 생겨났으며, 200년경 영국5)에 기독교가 존재했음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선교는 교회의 사역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였다. 이 사실은 고대교회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였다. 기독교의 형성기에 해당했던 고대교회의 시기에 교회의 모든 제도와 삶은 선교를 중심으로 해서 구축되고 발전하였다. 따라서 고대교회의 선교를 고찰함에 있어서 “지리적 팽창”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 고대교회의 제도적 정비, 신학적 작업, 그리고 전도활동 등 교회의 모든 사역을 선교의 차원에서 파악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먼저 고대교회6)는 선교의 방법으로서 신학화의 작업과 사회적 참여(Christian presence)를 통해 복음의 확산을 꾀하였다. 둘째로, 고대교회는 선교의 조직으로서 카리스마적 운동(charismatic movement)과 계층질서적 조직(hierarchical structure)을 형성하였다. 마지막으로, 선교의 훈련으로서 고대교회는 세례와 성만찬을 이용했는데 이들을 통해 증인으로서의 기독교인의 신앙의 강화와 재강화를 추구했다. 따라서 필자는 고대교회의 선교를 포괄적으로 이해함에 있어서 위의 세 가지 측면, 곧 선교의 방법, 선교의 조직, 그리고 선교의 훈련을 중심으로 해서 기술하고자 한다.

 

Ⅱ. 선교의 방법

 

1. 신학화의 작업

초기 기독교는 주님의 임박한 재림을 믿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지성적으로 설명하려 하거나 교회를 조직구조화하려 하지 않았다. 초기 성도들은 신앙의 내용상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단순한 신뢰를 특징으로 했으며, 조직구조상 추상적인 교회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재림의 지연으로 인해 그리고 내외적인 도전에 대처하기 위하여 교회는 신앙의 내용을 형이상학화 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선교적 요구에 대한 반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도적 교부들의 시대가 지나고 2세기 변증가들의 시대가 이르면 기독교는 이미 지적인 작업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급속한 성장의 과정 속에서 교회는 외적, 내적 도전들에 직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기독교는 자신의 종교적 산실(産室)이었던 유대교 및 동방에서 유래한 밀의종교들(the mystery cults)과 세력의 확산을 위해 경쟁해야만 하였다.7) 한편, 교회는 외적으로 이방 지성인들의 사상적 핍박과 정치가들의 물리적 핍박에 대처해야만 하였다. 마지막으로, 내적으로 교회는 분리주의와 이단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였다. 이러한 도전들에 대처하기 위해서 고대교회에 신학화의 작업이 요청되었다. 이를 위해 교회는 철학들을 원용하였다.8)

기독교는 그 자체에 형이상학이 없었기 때문에 철학으로부터 이를 빌어와야만 하였다. 교부들은 영혼의 비물질성, 하나님의 초월성, 그리고 구원의 탈역사성 등의 측면에서 기독교와 매우 유사한 플라톤주의로부터 그 방법론을 원용하게 되었다. 한편 윤리사상을 정립하기 위하여 기독교는 스토아주의로부터 로고스사상, 만인평등사상, 그리고 극기사상(impassibility) 등을 배우게 되었다. 대부분의 변증가들과 그 이후의 과학적 신학자들은 철학을 부인하기보다도 “참된 철학(true philosophy)”을 추구하였다. 그들은 이를 기독교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기독교가 초기부터 철학화의 과정, 혹은 문화적 변용(culural adaption)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 교회의 선교의 장(場)이 그리스­로마 문명이라고 하는 고도의 문명 사회였기 때문이다.9) 종교들과의 경쟁으로부터 철학들과의 경쟁으로 기독교는 그 활동영역을 넓혀가야만 하였다. 종교들이나 철학들의 형이상학적 이원론(metaphysical dualism)이나 서민들의 운명론10)이 제공할 수 없었던 영생의 확신과 선행에의 열망을 기독교는 제공할 수 있었다. 한편 교회의 성장과 더불어 교회의 사회적 신분이 향상되게 되었다. 교회 내부에 많은 지성인들이 존재하게 되었는데, 이 사실도 기독교가 지적인 작업을 수행하게 된 이유들 가운데 하나였다.

 

2. 사회 참여

 

그리스­로마 문명은 관용과 융화를 이상으로 삼았다. 로마제국은 여러 이민족들로 구성된 사회였기 때문에 사상적으로 다원주의를 표방하였다. 로마 황제들에게 있어서 모든 정책의 최우선은 제국의 연합의 유지에 있었다. 그러나 제국의 말기는 탐욕과 경쟁의 시기로 변모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많은 사회적인 역기능들이 양산(量産)되었다. 한편 로마법은 공평성(equality) 혹은 정의(justice)를 특징으로 하였다. 그러나 그 공평성은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를 전제로 하는 공평성이었다. 결국 이러한 법정신은 사회적인 모순과 부조리를 부채질하는 결과를 낳았다.

교회는 소리 없이, 그리고 댓가를 기대하지 않으면서 사회적 병리현상들을 치유하려고 노력하였다.11) 주종, 남녀, 노유, 그리고 빈부를 구분하지 않고 사회의 모든 계층에 사랑의 손길을 뻗쳤다. 이러한 사랑의 봉사를 위해 주일 대예배 때에 구제헌금을 거두곤 하였다. 헌금 이외에 기름, 곡식, 계란, 치즈, 고기, 올리브, 빵, 그리고 포도주를 수집하였다. 교회의 예전적 필요 이외의 모든 부분은 가난한 자들, 포로된 자들12) 그리고 죄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교회는 애찬(agape)을 계속하였는데, 그 이유는 바로 구제의 동기 때문이었다.13) 교회는 구제의 대상을 차별하지 않았으며 교인들이 자신들의 사유재산권을 행사하려고도 하지 않았다.14) 과부들은 구제의 특별한 대상이었는데(딤전 5:9 참조),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그들은 아마 당시 만연하고 있던 영아 유기의 희생물이 되었던 유아들을 구출하여 양육하는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독교가 로마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은 가난한 사람들의 주검을 처리하는 데 참여하는 것이었다. 로마 당국은 극빈자들의 자발적인 조직이었던 장례조합(burial collegia)에 합법적인 자율권을 부여하였다. 교회가 범제국적인 장례조합에 참여함으로써 대중의 환심을 살 수 있었다. 예컨대, 공동묘지를 구입하여 최소한의 비용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제공하였다. 교회는 핍박을 피하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우회적인 방법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가 노예제도의 폐지를 위하여 조직적인 항거를 시도한 적은 없으나, 교회 내부에서 사회 신분상의 차이가 문제된 적은 거의 없었다. 교회 내에서 노예들은 “형제들”로 지칭되었으며, 성직자를 선출함에 있어서 그들은 동등한 권리를 행사하였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감독이 되기도 했으며,15) 순교자의 반열에 들기도 했다.16)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노예들을 자진해서 석방하기도 하였으며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들을 노예들의 몸값으로 제공하고 스스로 노예들이 되기도 하였다.17) 결국 교회는 노예제도의 붕괴를 위한 씨앗을 뿌린 셈이다.

기독교인들이 이방인 지성인들에게 가한 가장 큰 충격은 아마도 죽음을 대하는 자세였을 것이다. 한 이방인 의사는 기독교의 사상적인 단순성을 조소하면서도 순교시에 죽음 앞에 당당한 모습과 걱정을 제어하는 광경을 보고 격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18) 한 이방 지성인은 이 단순하고도 무지한 사람들이 “철학자들과 같이 죽어가더라(died like philosophers)”고 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스틴도 기독교인들의 순교의 광경을 보고 회심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19) 성도들의 “침묵의 순교”는 이방 세계를 향한 “웅변의 설교”였던 것이다.

요컨대 기독교인들의 사회참여(Christian presence)의 방법은 사회의 병리현상들만큼이나 다양했으며, 이들의 선행은 기독교가 참된 종교, 곧 생명의 종교임을 입증하는 방법이었다. 선행을 통해 기독교인들은 기독교가 사회적으로 유해하지 않으며 도덕적으로 건전함을 증거할 수 있었다.20) 실제로 많은 이방인들은 철학자들의 위선과 기독교인들의 선행을 비교하기도 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선행이 입술의 증거를 대신할 수 없었듯이, 또한 입술의 증거가 선행을 대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Ⅲ. 선교의 조직

 

1. 은사적 공동체

 

신약의 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충성스러운 남은 자들(the faithful remnants), 새 창조(the new creation), 새 이스라엘(the new Israel), 그리스도의 몸(the body of Christ), 그리고 성령의 전(the temple of the Holy Spirit) 등으로 이해하였다. 다시 말해, 신약의 교회는 신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유기체를 지향했기 때문에 경직적(硬直的)인 입법적 질서(the constitutional order)에 무관심하였다. 따라서 신약의 교회에는 선교를 위한 카리스마적 ‘기능들’(사도, 예언자, 그리고 교사)과 행정을 위한 ‘직책들’(감독 혹은 장로 그리고 집사) 가운데 전자가 더 중요하였다.21)

초자연적인 은사들이었던 사도, 예언자, 그리고 교사는 성령에 의해, 양심에 따라 직접 부여되었다. 이들의 기능은 개교회에 한정되지 않았다. 이들은 어느 교회에 가서도 그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들이 바로 순회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의 권위는 보편적이었다.22) 이에 반해 감독 혹은 장로와 집사는 행정적인 필요에 따라 개교회가 선출했으며, 따라서 이들의 권위는 국지적이었다. 요컨대, 신약의 교회는 외적, 제도적 배타성보다도 은사 중심의 배타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복음의 전파에 전념하게 되었다. 선교는 사탄의 세력과의 싸움으로 이해되었으며 이 투쟁을 수행함에 있어서 성령께서 개개 성도들에게 은사를 부여하시는 것으로 보았다.

신약시대가 지나간 후에도 순회 선교사들이 존재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평신도들이었다. 그들은 교회를 세우지도 않았으며, 특정 교회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도 않았다. 그들의 신분과 교육 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많은 군인들, 노예들, 양털 및 가죽 제조업자들, 선원들, 상인들, 여행자들과 같은 개인들이 주로 순회선교의 방법으로 복음을 전했던 것으로 보인다.23)

나중 이방 지성인 켈수스(Celsus)가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기독교의 전도는 교회의식이나 예배를 통해서라기보다 부엌, 시장, 그리고 상점에서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 일은 바로 순회 선교사들에 의해 수행되었다.24) 오리겐(Origen)에 따르면 이들은 “도시들 뿐만 아니라, 시골에도 돌아다니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을 획득하는 것을 주업으로 하는” 자들이었다.25) 고트족의 선교사였던 울필라스(Ulfilas) 이전에 이미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선교사들이 있었다. 이들의 특징은 특정 지역에 정착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던 자들로서 사도, 예언자, 혹은 선생으로 지칭되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2세기에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했으며 지역 단위로 초신자들의 신앙 지도를 위해 활동하였다. 3세기에 가서야 이들의 역할은 감독 중심의 교회(episcopal office)에 흡수되었다.

 

2. 군주적 감독제

 

교회는 새로운 선교적 요구에 부응하여 자신의 구조를 변모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1세기 말부터 교회 내부에 점차 감독, 장로, 그리고 집사와 같은 안수받은 성직자들이 대대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3세기에 와서 교회는 완전히 성직 계층화(clericalization)를 이룩하게 되었는데, 그 특징이 바로 3중적인 사역의 구조를 가진 군주적 감독제(monarchical episcopacy)였다.

교회가 선교를 위해 외부로 눈을 돌리고 내부로 들어온 개종자들의 신앙을 지도하기 위해 교회의 옛 구조를 개조해야만 하였다.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헬라인들의 개종으로 인해 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 최종적인 권위를 가진 단일 인물인 감독이 교회를 통괄하고 교인들을 지도함으로써 예배와 신앙의 연속성을 확보해야만 하였다. 이를 위해 등장한 군주적 감독제는 3중적인 직책, 곧 감독직(the episcopate), 장로직(the presbyterate), 그리고 집사직(the diaconate)의 확연한 구분을 특징으로 하였다. 장로­감독들 가운데 의장에 해당하는 사람이 군주적 감독(a monarchical bishop)으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점차 감독이라는 타이틀은 교회에서 최고의 권한을 행사하던 사람에게 주어졌다.26)

선교 사역(missionary outreach)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고안된 군주적 감독제는 이단과 분리주의에 대처하기 위해서도 유용한 수단이었다.27) 전체로서의 감독들은 사도들의 후계자들로서 기독교 신앙의 관리자들(custodians)이요, 이의 해석자들(interpreters)로 인정되었다. 이러한 권위 때문에 그들은 이단과 분리주의에 단호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한편 개교회적으로 군주적 감독들은 교회 내에서 행정의 수반으로 활동하였으며, 타교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교회들의 대표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역사적으로 이그나시우스(Ignatius)는 2세기 초 그의 저술에서 “감독이 없이 아무것도 하지 말 것”을 권고하였다. 그에 따르면 감독은 그리스도, 심지어는 하나님을 대리하는 자였다. 따라서 교회가 수행하던 모든 사명들은 감독의 지도와 감독 아래 이루어지게 되었다.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는 평신도와 성직자 사이의 구분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는 구약의 제사장직의 개념에 기초하여 사도직 계승의 교리(a doctrine of apostolic succession)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군주적 감독제의 완성은 이레니우스(Irenaeus) 때에 와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초기 교회는 단순히 라오스(laos, the people)로 지칭되었다. 이제는 감독의 자리(cathedra episcopi)가 있는 곳이 교회로 불리게 되었다.28)

주변 지역들이 연계 역할을 할 수 있는 주요 센터들에 교회를 세우던 바울의 선교전략 때문에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에 안디옥, 에베소, 고린도,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로마의 상징적인 중요성이 더해갔다. 이들 대교구들은 주변 지역들에 대해 가부장적인 권위를 행사하였다.29) 전체로서의 교회는 선교 사역의 효율화와 역동화를 위해 대교구 중심으로 이웃의 작은 교회들을 연계시켜 나갔는데, 이는 개별 교회에서 군주적 감독제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Ⅳ. 선교의 훈련

 

1. 세례

 

기독교가 용인되기 이전에 세례30)는 기독교인들이 순교자가 될 것을 맹세하는 서약에 해당하였다. 세례교육 대상자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를 증거하겠다는 각오로 세례에 임하였다. 따라서 세례교육은 매우 철저하였다. 왜냐하면 이는 순교자를 양성하는 훈련과정이었기 때문이다.31) 이러한 세례 이해는 터툴리안이 성례전을 의미하던 헬라어 미스테리온(mysterion)을 라틴어 사크라멘툼(sacramentum)으로 번역한 사실에 잘 드러난다. 로마의 군대에서 부하가 상관에게 행하던 충성의 서약을 사크라멘툼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세례시에 피세례자들은 세례의 서약을 해야 하였다. 먼저 서쪽을 향하여 사탄을 부인하고 이어서 동쪽을 향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께 충성의 서약(a trinitarian oath)을 해야 하였다.32) 이 예전은 영원한 출생(renatus in aeternum)의 관문이었다. 세례는 이방문화 곧 사탄의 권세 아래 살던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그리스도의 군사(militia Christi)로서 영적인 싸움에 의연하게 임할 것을 결의하는 표시였다. 이는 성도들이 “사탄의 왕국”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이동하였음을 의미하며, 이 성례를 통해 그들은 증인으로서의 삶을 위한 자격과 능력을 부여받았다. 요컨대 세례의식은 그리스도 군사의 임관식이었으며, 세례교육은 정예 군사를 양성하기 위한 고난도(苦難度)의 훈련이었다.

구체적으로 세례교육 기간은 기독교적인 인격의 함양을 위한 기간이었다. 세례교육 대생자들로 하여금 이전의 이방 풍습과 사고방식을 떨쳐버리고 기독적인 행동양식과 가치관을 몸에 배게 하는 기간이었다. 그러므로 세례교육 대상자들을 모집할 때부터 엄격한 규칙들을 적용하였다. 세례교육을 위한 1차 정밀검사에서 세례교육 신청자들의 신청 동기를 철저하게 캐물었다.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직업들이 살인(군인, 전차수 등), 음란(포주 등), 그리고 우상숭배(화가, 향제조업자 등)와 관련될 경우, 이것들을 포기한다는 전제 아래 그들이 세례교육 대상자로 받아들여졌다. 3년간의 세례교육 기간이 끝난 후 부활절 40일 전에 최종적으로 세례 대상자를 결정하기 위해 2차 정밀검사를 실시하였다. 그들이 3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선행을 실천했으며 기도와 성경공부에 매진하였는지를 최종적으로 심사하였다.33)

 

이렇게 어려운 관문을 거친 후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에 목양서(the Shepherd)의 저자 허마스나 터툴리안은 세례 후에 범한 중죄들, 예컨대 살인, 배교, 그리고 간음과 같은 것들은 한 차례에 한해서만 용서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34) 그리고 한편 세례를 통해 기독교인들은 과거의 죄의 용서를 체험하며,35) 사탄에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현재적으로 소유하며 미래 영생에의 참여를 확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죄의 체험, 부활의 능력, 그리고 영생의 확신을 소유한 자들만이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위와 같은 엄청난 죄를 범할 리가 없다는 전제 아래 죄를 엄하게 다스렸던 것이다. 잔인성과 부도덕성을 특징으로 하던 후기 고전사회(late antiquity)에서 기독교인들이 삶의 모범을 통해 증거해야 하였기 때문에 교회는 고매한 윤리성을 요구하였던 것이다.36)


2. 성만찬

성만찬은 세례받을 때 하나님에게 행한 최초의 서약을 재확인하는 예전이었다. 그래서 디다케(Didache)는 성만찬을 세례받은 교인들에게 한정하였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두 길(two ways)”을 알고 있으며,37) 기독교의 신비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부들에게 있어서 떡과 포도주는 “영생의 약”이요, 죄와 죽음을 제거하는 “해독제”였다.38) 성만찬은 “진정한 희생(true sacrifice)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교부들에게 이는 단순한 상징은 아니었다. 이 상징은 구원의 효과를 초래하는 거룩하고도 능력있는 상징(sacrum signum)이었다.39) 그런 의미에서 교부들은 화체설과는 다른 실재적 임재(real presence)를 믿었다.40) 이는 기독교인들에게 구원에 대한 가시적인 확신을 가져다 주었다.

교회는 성만찬을 반복함으로써 신앙의 재강화를 추구하였다. 이 예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상기함으로써 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신앙을 재정비하게 만들었다. 주님의 만찬을 통해 주님의 임재를 거듭 체험하고, 주님과 하나됨을 계속 확인함으로써 증인의 삶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현재적으로 소유함으로써 어떠한 상황에서도 신앙을 보수하며 선행을 지속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성만찬은 계속되는 “영적인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실탄을 재충전하는 과정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도들은 “선교의 대열”, 곧 “순교의 대열”에 계속 참여할 수 있었다.

 

 

Ⅴ. 맺는 말

 

고대교회의 선교를 단순히 지리적 확장만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교회의 모든 사역과 조직을 선교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먼저 선교의 방법으로서 교회의 신학화의 작업과 사회적 참여를 고려해 보았다. 교회는 내적으로 이단 및 분리주의에 대처하고, 외적으로 사상적 및 정치적 핍박에 대처하기 위하여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 교회는 사회의 부조리들을 소리없이 처리함으로써 그 영향력을 확대시켜 갈 수 있었다. 둘째로, 선교의 조직으로서 은사적 공동체와 군주적 감독제를 살펴보았다. 은사적 공동체로서 교회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를 소유한 평신도들에 의하여 선교를 수행하였다. 나아가 교회는 감독 한 사람 중심의 구조를 강화함으로써 선교의 사역을 일원적으로 수행하였다. 마지막으로 선교의 훈련으로서 세례와 성만찬을 더듬어 보았다. 세례교육을 통해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영적인 전쟁, 곧 순교의 대열에 참여하기 위하여 성도들은 철저하게 훈련을 받았다. 아울러 성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계속 확인하며 그리스도의 임재를 체험함으로써 신앙의 재강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고대교회가 이러한 독특한 선교의 방법, 조직, 그리고 훈련을 택한 이유는 당시 교회가 처한 상황과 관련이 깊다. 핍박이라고 하는 정치적­종교적 상황 아래서 교회는 생존을 도모해야 하였으며, 후기 고전사회라고 하는 문화적­사상적 배경 아래서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야 하였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고 고대교회의 선교를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1) 180년 북아프리카 누미디아(Numidia)의 스킬리움(Scillium)에 순교의 사건이 있었다. 따라서 180년 이전에 이미 북아프리카에 기독교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순교의 기록인 Passio sanctorum Scillitanorum은 북아프리카 기독교에 관한 최초의 문헌적 증거이다. 이 지역은 카톨릭 학자들의 주장과 달리, 로마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리아에 의해서 복음화 된 것 같다. William Telfer, The Office of a Bishop(London: Darton, Longman & Todd, 1962), 101.

2)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와 오리겐(Origen) 이전에 이 지역의 기독교는 매우 미미하였던 것 같다. 알렉산드리아 학파(the school of Alexandria)의 창시자였던 판타이누스(Pantaenus)에 대해선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나, 그는 스토아주의(Stoicism)로부터 기독교로 개종한 후 185년까지 이 학파를 세운 것 같다. 이 지역은 아마 2세기 중엽 로마교회에 의해 복음화 된 듯하다. Cf. Henry Chadwick, The Early Church(London: Penguin Books, 1967), 64

3) 177년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황제 치하에 리용에 핍박이 있었다. 채드윅, 29.

4) 이레니우스(Irenaeus), Adversus haereses 1. 10.

5) 터툴리안(Tertullian)은 200년경 영국에 기독교가 있었음을 언급하였다. 그의 Adversus Judaeos 7. 50년 후 오리겐은 영국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아마 3세기 중엽 이 지역에 기독교가 뿌리 내린 것 같다. 채드윅, 63.

6) 교회사에 있어서 시대구분은 학자들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고대교회의 시기를 동방에서는 황제 저스티니안(Justinian) 때까지, 서방에서는 교황 그레고리 1세(Gregory the Great) 때까지로 볼 수 있다.

7) 2세기 후반까지 교회는 유대인들 가운데 회심자들 얻기가 더 쉬웠다. 그 이유는 이들이 구약성경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 때에 와서 기독교는 유대교 문화에서 이방문화(gentile culture)로 옮겨가고, 종교들과의 경쟁에서 종교들 및 철학들과의 경쟁으로 이전(移轉)하였다. E. Glenn Hinson, The Church Triumphant: A Histoy of Christianity up to 1300 (Macon, Ga: Mercer University Press, 1995), 44­45.

8)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아카데미와 교회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Quid ergo Athenis et Hierosolymis? Quid Academiae et Ecclesiae?)”라고 말한 터툴리언의 입장(De Praescriptione haerecticorum 7)은 그 당시 교부들의 일반적인 입장이 아니었다. 다수는 철학의 틀을 빌어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에 따르면 철학은 복음 전파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적 예비(providential proparation)였다. 그의 Stromateis 1. 19.

9) 콘스탄틴 황제(Constartine the Great) 이후 로마제국은 기독교의 본향이 되어버린 나머지 정치, 문화, 그리고 종교가 연합된 로마제국의 개념(Romania)이 등장하였다. 비기독교인들은 야만인들(barbarians)이요, 이방인들(pagans)이며, 비로마인들로 지칭되었다. 그러나 어거스틴에 따르면 로마제국은 “종교적 차원”을 상실하였다. 이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이 선택한 도구도 아니며, 이의 실현을 방해하는 사탄의 방해물도 아니다.” 다시 말해 그는 기독교 제국(imperium Christianum)의 개념을 거부하였다. Cf. Robert A. Markus, “The RomeEmpire in Early Christian Historiography”, The Downside Reviews 81 (Oct. 1963): 347.

10) 형이상학적 이원론은 영지주의나 플라톤주의에서 볼 수 있다. 서민들의 운명론은 로마 사람들이 그리스의 운명 혹은 행운의 신(Tyche)을 받아들인 데서 잘 드러난다.

11) 기독교에서는 삶을 변화시키는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이것이 기독교가 철학과 유대교와 다른 점이었다. 고매한 윤리성으로 시현되는 생명력으로 기독교가 “참된 철학”임을 증명하였다. 락탄티우스(Lactantius), Divine Institutes 3.26. 이방종교를 진작시켜 기독교와 대항하게 함으로써 기독교를 간접적으로 핍박하려고 했던 황제 배교자 쥴리안(Julian the Apostate)도 기독교의 뛰어난 윤리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힌슨, 170. 기독교의 선행에 관하여, Didache 1.5; 허마스의 the Shepherd Mandate 2.4.6. 터툴리안의 증언에 관해서, 채드윅, 56. 채드윅은 기독교가 구제 행위에 열심이었던 것은 부분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스토아주의적 윤리적 이상을 배웠기 때문인 것으로 보았다.

12) 유세비우스(Eusebius)의 증언에 따르면, 고린도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of Corinth)는 로마교인들이 “탄광에 있는 형제들”을 잘 돌볼 것을 권하였다. 그의 Church History 4.33.10. 그 당시 탄광 노동에 투입된다는 것은 사형에 가까운 형벌이었다. 저스틴은 죄수들의 심방을 집사의 일상적인 의무들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그의 I Apology 66.

13) 기독교 초기 애찬은 성만찬과 동시에 거행되었다. 점차 이 두 예전은 분리되었다. 이는 말 그대로 구제를 위한 식사(charjtable meals)였으며 동시에 교인들 사이의 친교를 위한 식사(fellowship meals)였다. 애찬은 카포크라티아누스파(Carpocratians)와 같은 분파들에 의해 오용됨으로써 이의 기능이 약화되었다. 이는 6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점차 이방인들의 만찬이 되어버렸으며 원래 의미했던 바 구제의 의미는 상실되고 말았다. 구제는 주로 집사들과 여집사들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남자 집사와 달리 여집사는 성례전직 역할을 담당할 수 없었다.

14) Cf. 루키안(Lucian), Peregrinos 13; 허마스, The Shepherd Vision 3.6.6.

15) 전승에 의하면 오네시모(Onesimus)는 에베소의 감독이 되었으며(유세비우스의 Church IIistory 3.36.5.), 노예였던 허마스의 형제로 추정되는 피우스(Pius, d. c. 154)와 노예 칼리스투스(Callistus, 217­22)는 로마의 감독이 되었다.

16) 리용의 대학살 때에 잔인하게 순교 당한 노예 소녀 블랜디나(Blandina)가 그 보기 가운데 하나였다. 202년 카르타고에서 순교한 기독교인들 가운데 한 명은 여자 노예 펠리키타스(Felicitas)였다. 이 순교의 기록이 Passio sanctarum Perpetuae et Felicitatis이다.

17)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는 이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그의 I Clement 55.2.

18) 예컨대 스토아주의자 에픽테투스(Epictetus, Diatribai) 4.7.6. Cf. 힌슨, 50.

19) 저스틴, II Apology 12.

20) 플리니(Pliny)는 황제 트라얀(Trajan)에게 보내는 공문에서 기독교인들이 “고집불통”임을 비난하면서도 그들의 집회가 사회적으로 유해하지 않다고 보고하였다. 그의 Epistola 10.96.

21) 신약시대에 초자연적인 은사들과 행정적인 은사들이 있었다. 신약에서 동일한 인물을 감독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장로라고도 불렀는데, 장로의 역할을 강조할 때 감독으로 호칭하였다. Cf. 딤전 3:27; 빌 1:1.

22) 디다케에서 그들의 역할과 의무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23) 힌슨, 44.

24) 켈수스의 저술 Against the Christians는 현존하지 않는다. 교부들의 작품들 속에서 간접적으로 그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25) 오리겐, Against Celsus 3.9

26) 신약시대의 2중적 사역의 구조, 곧 감독­장로와 집사는 1세기 말과 2세기 초에 걸쳐 3중적 구조로 바뀌었다. 라잇풋(J. B. Lightfoot)의 가설에 따르면 감독­장로의 그룹에서 한 사람이 부상하여 의장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3중적 사역의 이 구조는 로마에서 보다 안디옥에서 먼저 생겨났다. 혹자는 목회서신들에서 3중적 구조를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Cf. 힌슨, 60­61.

27) 하르낙에 따르면 정경(canon), 신조(creed), 그리고 감독제(cpiscopate)를 이용하여 고대 교회가 이단을 지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Cf. 힌슨, 69.

28) 역사적으로 로마 감독 스테반(Stephen, 254­67)은 마태복음 16장 18절(the Patrine text)을 이용하여 로마교구 혹은 카톨릭 교회의 우위성을 주장하였던 최초의 인물이었다. 북아프리카의 시프리안(Cyprian)은 그의 입장에 반대하여 “우리들 가운데 누구도 감독들의 감독으로 군림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Epistola 67. 5. 그에 따르면 로마의 감독은 동일한 감독들 가운데 첫 번째일 뿐이다(primes inter pares). 스데반의 주장은 결국 감독들의 리스트를 변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4개의 로마감독의 목록이 존재하였는데, 헤게시푸스(Hegesippus), 이레니우스, 그리고 유세비우스의 목록에는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교회의 공동 설립자로 기술하면서 리누스(Linus)를 최초의 감독으로 언급하였다. 그러나 354년에 기록된 리베리우스(Liberius)의 목록은 베드로가 최초의 감독으로 등장하고 바울은 기록에서 빠져있다. J. G. Davis, The Making of the Church(London: Skeffington & Son, 1960), 55­56. 어거스틴 이전의 교부들은 대체로 “카톨릭(catholic)이란 개념을 신학적으로 “정통적(orthodox)”이란 의미로 이해하였다. 그에게 와서 이는 신앙의 내용상의 “정통성”뿐만 아니라 교회의 지리적, 시간적, 연장, 곧 “보편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Cf. 그의 De vera religione 5.9; 7.12.

29) 325년 니케아 회의(the Council of Nicaea)에서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키르타고, 그리고 예루살렘(의) 대교구가 인정되었다. 그러나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the Council of Constantinople)에서 새 로마 콘스탄티노플이 로마 다음의 위상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는 알렉산드리아 교구뿐만 아니라 로마 교구의 불만을 초래하였으며 이 위상의 변화는 이후의 신학적 논쟁에 영향을 미쳤다.

30) 고대교회에서 세례는 원죄와 자범죄를 용서하는 예전이기 때문에 세례 받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보았다. 세례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피의 세례(lavacrum sanguinis) 곧, 순교뿐이었다. 13세기 스콜라주의자들(Schoolmen)은 성례전의 효과와 관련하여 성직자의 도덕적인 자질을 중시했던 시프리안의 입장을 인효론(人效論, ex opere operantis)으로 성례전 자체의 객관적 능력을 중시했던 스데반의 입장을 사효론(事效論, ex opere operato)으로 요약하였다. 그렇게 구분한 이유는 7 성례전 이외에 구원의 수단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31) 202년 카르타고에서 순교 당한 퍼페투아(Perpetua)와 그녀의 여종 펠리키타스는 세례교육 대상자들이었다.

32) 콘스탄틴에 의해 소집된 알스회의(the Council of Arles, 314)와 니케아 회의는 3위1체의 이름으로 시행된 모든 세례(이단들의 세례와 분리주의자들의 세례를 포함)를 인정하였다. 다시 말해 재세례(rebaptism)를 정죄하였다. 정교회도 재세례를 부인하였으며 트렌트 회의(the Council of Trent, 1547)도 이를 어거스틴은 3위 1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된 세례는 하나님의 세례이므로 어디에서, 누가, 언제 베풀지라도 유효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분리주의자들의 세례와 배교한 적이 있는 보편적 교회의 감독의 세례도 항상 유효하다. 3위 1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된 세례는 인간의 세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례이기 때문에 인간 대리인의 죄가 그 성례의 존재 자체를 해치지는 못하였다. Cf. 그의 De baptismo contra Donatistas 4.15.24; Epistola 88­89. 교회는 초기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세례를 베풀었으나 얼마 후에는 3위1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기 시작하였다.

33) 고대교회의 세례교육의 절차는 217년 저술된 로마의 히폴리투스(Hippolytus)의 the Apostolic Tradition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동시대 사람이었던 터툴리안과 마찬가지로 엄격주의자(rigorist)였다. 따라서 그의 책에 기술된 내용 그대로 2세기 말 혹은 3세기 초에 로마교회가 시행하였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34) 안디옥의 감독 데오빌로(Theophilus)는 기독교인들이 피해야 할 죄의 목록들을 더 구체적으로 나열하였다. 그의 To Autolycus 2.34.

35) 서방교부들은 대체로 세례를 죄의 용서를 위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저스틴 이래 동방교부들은 이를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게 해 주는 지성의 회복(illumination 혹은 enlightenment)의 과정으로 보았다. Cf. 저스틴, I Apology 61. 12f. 65.1.

36) 어거스틴에 따르면 교회는 “훈련의 집(disciplinae domus)”인데 여기에서 기독교인들은 스승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어떻게 바로 살 것인가(bene vivere)를 배운다. 그의 Sermo de disciplina Christiana 1.1.

37) 허마스의 the Shepherd는 빛과 구원의 길 그리고 어둠과 죽음의 길을 이야기 하였다. 이 두 길들은 이방인들과 기독교인들의 윤리관의 차이에서도 잘 드러난다고 보았다.

38) 이그나시우스, Ephesus 20.2.

39) 고대교회의 성례전 이해는 상징이론(sign theory), 구체적으로 성례전적 상징주의(sacramental symbolism)에 기초하고 있었다. 믿음으로 인해 우리의 감각에 의해 인지되는 가시적 성례전(sacramentum)이 성례전의 효과(res sacrmenti) 곧 구원 혹은 은총을 가져온다. Edward J. Kilmartin, Christian Liturgy: Theology and Practice, vol. 1, Systematic Theology of Liturgy (Kansas City, Mo: Sheed and Ward, 1988), 3. 거룩한 것(구원 혹은 은총)을 상징하는 것은 모두 사크라멘툼이므로 교부들에 따르면 성례전이 무수히 많을 수 있다.

40) 교부들은 화체설(transubstantiation) 보다도 요소변화설(transelementization)을 믿었다. 집례자의 기도와 말씀이 가해진 후 떡과 포도주는 변화된 떡과 포두주가 된다. 그러나 그것이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성례전의 효과와 관련하여 3위 1체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verbum fidei)이 중요하였다. 곧 교부들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 없이 떡과 포도주는 성례전이 되지 못한다. 예컨대 어거스틴은 “Accedit verbum ad elementum, et fit sacramentum, etiam ipsum tamquam visible verbum”이라고 하였다. 그의 Tractatus in Joannis Evangelium 80.3. 칼빈과 루터도 이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Mission in the Early Church :

Its Method, Organization, and Training

Kim, Young Do


I. Introduction

After the fall of Jerusalem (70) through the year 180, almost all the important Mediterranean areas such as Rome in Italy, Antioch in Syria, Carthage in North Africa, and Alexandria in Egypt had been evangelized. By 200 North European countries such as France and England had been (in part) Christianized.

Judging from the viewpoint of church history, missions were not merely a part of the ministry of the church but ministry itself. This was true of the early church. During that period both order and life revolved around missions. In delineating the notion of missions in the early church, therefore, it is appropriate to investigate the efforts of the institutionalization of its structure, theologization of the content of its faith, and witness in the face of persecution rather than to examine its mere geographical expansion.

II. The Method of Missions

1. The Intellectualization of Christian Faith

Initially, due to the expectation of the immanent parousia of Jesus Christ the early church was indifferent in institutionalizing its structure and theologizing its faith. From the period of the Apologists, however, on the verge of the challenges from within and without the church embarked on the hierarchicalization of its structure and metaphysicalization of its cause. Internally the church had to cope with heresies and schisms; externally it had to deal with the pagan intellectualsꆯ accusations and politiciansꆯ persecutions. In response to those challenges, the church attempted to make its faith more intelligible.

To articulate the Christian faith the church fathers borrowed their metaphysics from Platonism. In terms of the concept of the immaterial attribute of God, His transcendence, and the supramundane nature of salvation, Christianity ran parallel with philosophy. On the other hand, the early church introduced ethical thinking from Stoicism. Particularly, the thought of the Logos, the idea of cosmopolitanism, and the notion of impassibility or apatheia in Stoicism affected Christian ethical thought. The majority of the church fathers attempted to explain Christian faith through the help of philosophies though they did not compromise that faith. For Clement of Alexandria philosophy was Godꆯs providential preparation for the spread of the Gospel. Tertullianꆯs position of ꆰChrist against culture몸 was a minority view.

The reason for the early churchꆯs cultural adaptation was that the historical milieu in which it had to launch missions was Graeco-Roman culture. In the course of its rapid growth, the transition from the churchꆯs competition with religions such as Judaism and the mystery cults to its competition with other religions and philosophies was inevitable. Christianity, with an unswerving conviction of eternal life and a strong zeal for holy life, could outdo Gnosticismꆯs and Platonismꆯs metaphysical dualism and the Roman hoi polloiꆯs fatalism of the Greek Tyche. Justin Martyr inaugurated a new era of cultural adaptation.

2. Christian Presence

The later period of the Roman Empire was encapsulated into the era of competition and hatred. The Roman pluralism, long cherished by the emperors and characterized by harmony or homonia, boiled down to a racial and cultural particularism. The Roman law, marked by equality and justice, presupposed the status quo of the ruling and the ruled. Accordingly, social malfunctions were engendered.

The early church intended to cure these social maladies. It collected relief offerings and food to help the needy. The agape meal was designed to feed the poor. The church did not discriminate among people in helping them. Moreover, it participated in the pan-Roman burial collegia. It purchased burial grounds and dispensed them to the poor. Christians believed in spiritual equality and thus slaves like Callistus were able to be elected the bishop of Rome. Many of them became martyrs. Some Christians emancipated their own slaves and paid ransom for their release. Furthermore, some Christians deliberately became slaves for the purpose of evangelizing them.

Through noble virtues and good conduct the early church could prove that Christianity was a living religion of high morality; unlike pagansꆯ accusations, it was socially innocuous and morally sound. Furthermore, Christiansꆯ noble behavior could drive a decisive wedge between the living religion and hypocritical philosophies. In short, in witnessing to Christ in the pagan world the early church took up indirect methods of evading persecution.

III. The Organization of Missions

1. Charismatic Movement

The understanding of the church in the New Testament was that it was marked by the new creation, the new Israel... and so forth. In other words, it paid little attention to constitutional order. Accordingly, the charismatic functions (ꆰapostles, prophets, and teachers몸) were more crucial than the administrative offices (ꆰbishops or presbyters and deacons몸).

The apostles, prophets, and teachers, the gifts of which were given by the Holy Spirit, amounted to itinerant missionaries. Their authority was not confined to a certain church; they could proclaim the will of God in any church. In contrast, bishops or presbyters and deacons were chosen by local churches in response to their administrative needs. And thus their authority was not universal but local. The church in the New Testament implemented the responsibility of mission on the ground of charismatic exclusivism rather than institutional exclusiveness.

Even after the period of the New Testament itinerant missionaries were in action. They, most of whom were laypeople, executed itinerant missions in the form of travelers, traders, soldiers, and sailors. They did not establish churches nor did they have close relations with the episcopal church. In the early church the Word of God spread more rapidly through their conversations in the kitchen and market than through liturgical worship in the church. In the third century they were incorporated into the episcopal office.

2. The Monarchical Episcopate

Toward the end of the first century, ordained clergy such as bishops, presbyters, and deacons came into existence on a large scale. In the third century the early church accomplished a full-fledged clericalization, the cardinal characteristic of which was the system of monarchical episcopacy. It was marked by a radical distinction between the episcopate, the presbyterate, and the diaconate. Initially this structure was advocated by Ignatius and later completed by Irenaeus.

According to monarchical episcopacy the monarchical bishop took hold of the whole power in the church. This kind of centralized power was inevitable because in response to the influx of gentiles to the church the early church had to maintain the continuity of faith inherited from the Apostles. Moreover, accusations and persecutions from without and schisms as well as heresies from within accelerated the solidification of the structure. The monarchical bishop was conceived to be the custodian of faith and the executive of administration. As a consequence, where the cathedra episcopi was, there was the church.

In accordance with Paulꆯs policy of establishing churches in the regions which could serve as hubs to interconnect the churches in remote areas, in a later time Antioch, Ephesus, Corinth, Alexandria, and Rome gained prominence. The churches in these areas exerted a patriarchal authority over the churches adjacent. This patriarchal system had a intimate relationship with the development of monarchical episcopacy in the individual churches.

IV. The Training of Missions

1. Baptism

Before the ꆰCopernican revolution몸 of Constantine the rite of baptism was tantamount to a Christiansꆯ vow of martyrdom on the verge of persecution. This understanding of baptism in the early church was well presented in Tertullianꆯs rendering of Greek mysterion into Latin sacramentum, a vow of allegiance to their seniors among the Roman military. In other words, to be resolute in witnessing under any circumstances, the catechumens needed a period of long and hard instruction or the catechumenate. It was a formation period during which the catechumens eradicated pagan customs and an unchristian way of thinking and clothed themselves with a Christian life style. After the first scrutinies the candidates were accepted as trainees.

Through the second scrutinies, after three years of the catechumenate, the final candidates were selected. After forty days of intensified instructions, they were baptized. Overall, for the West baptism was for the remission of both original sin and actual sins; for the East it was the recovery of the intellectual faculty of understanding divine Revelation. Through baptism they moved from the kingdom of Satan to the Kingdom of Christ. Accordingly it was a rite for eternal rebirth(renatus in aeternum). At the moment of immersion the catechumens had to take a trinitarian oath, renouncing Satan. As the militiae Christi they were equipped with power and authority to win in spiritual warfare or evangelism. Since Christians were baptized after the rigorous procedure of the catechumenate, rigorists such as Hermas and Tertullian asserted that grave sins, such as idolatry, murder, and adultery could be forgiven only once after baptism.

Since these Christians had to witness in the period of late antiquity, an era of brutality as well as immorality and in a pagan society of superstition and polytheism, the early church required noble morality and spiritual power. Through the formation of a Christian life style in the catechumenate and through empowerment of the Holy Spirit in the sacrament of baptism, the catechumens were able to be supplied with weapons against evil powers.

2. The Lordꆯs Supper

The Communion was a rite through which Christians reconfirmed the initial oaths they had taken in the sacrament of baptism. Accordingly, the Didache limited this rite to baptized Christians because only they knew the way of life and the way of death.

For the church fathers bread and wine were the ꆰmedicine of life몸 and the ꆰantidote몸 against death and sin. The Lordꆯs Supper symbolized the ꆰtrue sacrifice.몸 In other words, for them the sacrament was not just a mere religious symbol but a powerful and holy symbol(sacrum signum) which generated salvation.

Through the reiteration of the Lordꆯs Supper the early church reinforced its faith. The rite reminded them of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In other words, the sacrament enabled them to experience His presence and to become one with Him. It made the reality of salvation available at hand. In short, it recharged ChristiansÕ spiritual ammunition so that they could continue to take part in spiritual warfare or the battle for souls.


V. Conclusions

The notion of mission in the early church cannot be fully explained through an examination of its geographical expansion. It is important to understand its concept of missions through an investigation of its order as well as its life. Moreover, the churchꆯs social and cultural background should be taken into consideration because the church had grown in dialogue with it and in confrontation with it.

The reason for the early churchꆯs employment of its particular method of missions, origination of missions, and training of missions had a close bearing upon its historical milieu: the internal problems of heresies and schisms and the external problems of accusations and persecutions. Furthermore, the churchꆯs intellectual background of late antiquity helped the church to crystallize the content of its faith.


YOUNG DO KIM is Full-time Lecturer of Historical Theology at Youngnam College and Theological Seminary. He is a graduate of Korea University (B.A.), Seoul National University (M.B.A.), Presbyterian College and Theological Seminary (M.Div.),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Th.M.), and 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Virginia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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