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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7-07-17
 제목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Gaius Aurelius Valerius, 245?– 312?)
 주제어  [로마] [로마황제] [박해]
 자료출처  J. Cousin 글 | 李順珠 옮김  성경본문  
 내용
로마의 황제(285~305 재위).
 
[생애]

그의 생애는 전설과 과장, 불확실한 기록들, 그의 적들이 가졌던 적개심 때문에 확실하지 않다. 출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의 아버지는 필사자(筆寫者)였거나 원로원 의원 아눌리누스라는 사람의 해방 노예였다. 공식 비문에 나타난 그의 완전한 이름은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이다. 그의 첫번째 이름은 디오클레스였으며, 나중에 갈레리우스와 결혼(293)한 자신의 딸 발레리아의 이름을 따서 발레리우스라는 이름을 썼다. 씨족(gens) 이름인 아우렐리우스는 286년 3월 1일 황제로 즉위한 뒤부터 쓰기 시작했다. 그의 아내 프리스카에 관해서는 당대의 라틴인(人) 그리스도교 작가 락탄티우스 피르미아누스가 〈De mortibus persecutorum〉에서 설명한 것 외에는 자료가 없으며, 이것조차도 그 진실성을 놓고 논란이 많다. 그늘에 가려져 있다가 무력을 이용해 부상한 다른 많은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디오클레티아누스란 이름으로, 군 세력을 등에 업고 권력을 잡아 역사의 무대에 나타났다. 그의 외모는 화폐에 새겨진 초상이나 조각품으로밖에 알 수 없는데, 이에 따르면 키가 크고 말랐으며 넓은 이마와 짧고 다부진 코, 굳건한 입매에 강인한 인상을 준다.
 

[집권과정]

즉위할 때까지 그는 대부분의 생애를 군대 막사에서 보냈으며 로마 황제열전 Historia Augusta〉에 나와 있듯이 갈리아나 모이시아에 주둔했던 것 같다. 또는 황제 카리누스의 호위병이었을 수도 있다. 그는 카리누스 황제가 당시 페르시아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일리리아인들까지 포함하여 모은 군지휘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점만이 그 무렵의 그에 대한 단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다. 전투중이던 AD 284년 카리누스의 동생이자 공동황제인 누메리아누스가 침상에서 시체로 발견된 뒤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근위대장)였던 누메리아누스의 양아버지 아페르가 살인죄와 권력을 잡으려 했다는 혐의로 기소당했다. 이때 부하들이 황제로 추대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줏빛 어의(御衣)를 입고 처음으로 대중 앞에 나타나서 자신은 누메리아누스의 살해와 무관하다고 선언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아페르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그를 직접 죽였다. 여기서도 미사여구들 때문에 당시의 진짜 사태를 판별하기는 어렵다. 그 시대 사람들은 아페르가 유죄라는 주장을 받아들였으나 그전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는 산돼지(라틴어로 아페르)를 죽이는 날 황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다. 또한 그는 산돼지가 제 발로 올 때까지 오래 기다리려 하지 않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누메리아누스는 자연사했거나 벼락에 맞아 죽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아페르를 처치함으로써 경쟁자를 미리 제거했고 덧붙여 자신의 행위에 신성한 의미까지 부여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AD 284년 11월 17일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다스린 지역은 그의 군대가 지배하던 지역(소아시아 지방이며 시리아도 포함된 듯함)이었으며 제국의 나머지 지역은 누메리아누스의 형 카리누스에게 복종했다. 카리누스는 반란을 일으킨 판노니아 주둔군의 지휘관 율리아누스를 베로나 근처에서 격파해 죽인 뒤에 디오클레티아누스를 공격했다. 오늘날의 베오그라드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르구스(지금의 모라바) 강과 도나우 강의 합류지점에서 양 편은 결판이 나지 않는 전투를 벌였으며, 카리누스가 이길 가능성도 있었으나 그는 군인들에게 암살당했다. 결국 285년 한여름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의 주인이 되었다.
 
[제국의 재조직]

286년초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니코메디아에 머무르면서 부하들과 함께 변방의 로마 주둔 군대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했다. 그때부터 그는 정치에서 군부세력을 몰아내 제국에 민간인 정치 체제를 회복시키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는 사병 출신이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군인은 아니었다. 그는 권력을 잡자마자 자기가 선택한 동료와 함께 황제의 자리를 나누어 갖겠다는 뜻밖의 결정을 내렸다. 제국은 한 사람이 통치하기에는 너무 방대했다. 아프리카에서, 혹은 브리튼 섬에서 라인 강과 도나우 강, 흑해,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페르시아 만에 이르는 변경에서 거의 매주마다 그는 반란을 진압하거나 침공을 막아야만 했다. 전쟁보다는 통치에 더욱 매력을 느끼고 있던 그에게는 군사방위 책임을 맡아줄 군인으로서 충실한 동료가 필요했다. 286년 그는 시르미움 부근 출신 농부의 아들인 일리리아 사람 막시미아누스를 택했다. 얼마 후 그는 로마는 여전히 공식 수도로 둔 채 두 도시를 황제의 거주지로 정했다. 제국의 서부지역을 책임지고 있던 막시미아누스는 게르만족을 막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에 배치되었다. 디오클레티누스 자신은 동부지역을 지키기 위해서 페르시아 변경에 가까운 서(西)아나톨리아의 니코메디아에 자리잡았다. AD 293년 황제(Augustus) 칭호를 취하고 막시미아누스에게도 똑같은 칭호를 주는 한편, 가축치기 출신의 갈레리우스와 다소 거친 시골사람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그의 집안 전설에 따르면 트로이의 귀족 출신이라 함)를 자신의 동료로 추가했다. 이 둘은 아우구스투스의 아래 지위에 속하는 부황제(Caesar) 칭호를 받았으며 콘스탄티우스는 막시미아누스(트리어에 주둔)에게, 갈레리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시르미움에 주둔)에게 소속되었다.
 

당시 제국은 분할되지 않은 유산(patrimonium indivisum) 상태였지만 행정적으로는 분할되어 있었다. 니코메디아에 거주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트라키아·아시아·이집트를, 시르미움에 있던 갈레리우스는 일리리아, 도나우 지방, 아카이아를, 밀라노에 있던 막시미아누스는 이탈리아·시칠리아·아프리카를, 트리어에 있던 콘스탄티우스는 갈리아·스페인·브리튼을 다스렸다. 동료들의 결속을 굳히기 위해 황제들은 각자 부황제들을 양자로 삼았다. 갈레리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딸 발레리아와 결혼했고, 콘스탄티우스 1세는 아내 헬레나(뒤에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를 버리고 막시미아누스의 양녀 테오도라와 결혼해 이들의 유대관계는 더욱 두터워졌다. 이제 제국은 4명의 주인을 가지게 되었으며, 〈로마 황제 열전〉의 저자들은 이들을 '세계의 4대 군주'라 찬양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러한 혈연 통합을 종교적으로 결속시킴으로써 신성화(神性化)했다. 그는 숙명적인 산돼지 사건이 보여주듯 자신은 신의 의지에 따라 권력을 잡게 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과 막시미아누스를 '신의 아들들이자 신이 만든 창조자'로 여겼다. AD 287년 이후에는 자신을 요비우스(유피테르를 뜻하는 Jove에서 나온 말), 막시미아누스를 헤르쿨리우스(헤라클레스)라 부르게 했는데, 이는 그들이 신의 선택을 받았으며 신적 존재로서 미리 운명지어졌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신적 지혜를 통해, 막시미아누스는 영웅적인 힘을 써서 신에게서 받은 은총의 혜택을 나누어줄 책임이 있다고 여겼다. 뒤에 화폐와 비문에 '주인이자 신'(dominus et deus)이라 표시했듯이 그는 장려함과 예식으로 주변을 치장하고 정규적으로 자신의 독재의지를 명백히 했다. 그의 통치 아래 제국은 신정(神政) 체제 양상을 띠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정책은 성공적이었다. 국내에서는 무정부 상태가 끝났고 과중한 조세에 불만을 품은 갈리아 농민의 무리 바가우다이(Bagaudae)가 일으킨 반란은 막시미아누스가 진압했다. 그러나 게르만족과의 전쟁이 끝나고 겨우 평화가 회복될 즈음 막시미아누스는 카라우시우스와 싸워야만 했다. 제국을 위해 브리타니아에서 프랑크족·색슨족 해적들과 싸우기도 했던 카라우시우스는 287년 브리튼 섬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스스로 황제라 칭했다. 그는 그뒤 거의 10년 동안이나 브리타니아를 다스렸으나 296년 콘스탄티우스 1세에게 패배했다.

마우레타니아와 도나우 강 지역의 소요가 겨우 가라앉자 이번에는 찬탈자 아킬레우스의 지휘 아래 이집트가 독립을 선언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296년 이집트를 다시 정복했다. 마지막으로 297년에는 시리아에 침입한 페르시아 왕 나르세스와 싸워야만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그는 이집트 문제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이 전투를 갈레리우스에게 맡겼다. 오래 싸움이 계속되었지만 갈레리우스는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 인해 로마의 보호를 받던 아르메니아 왕 티리다테스는 왕위를 되찾았고 로마는 동쪽으로 티그리스 강까지 영토를 넓혀나갔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 때(306~337)까지 이 지역에는 평화가 깃들었다.
 
[내정개혁]

그러나 제국 유지에 더욱 중요한 것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내정 개혁 계획이었다. 그의 선대(先代) 황제들 역시 일시적이나마 내정 개혁을 시도한 적이 있었으므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가 처음으로 개혁을 시작했다고는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갈리에누스 황제는 군대에서 원로원 의원을 배제하고 군부와 민간 직책을 분리시켰다. 또한 원로원은 점차 특권을 빼앗겼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개혁의 궁극적인 목적을 자신의 지시가 효과적으로 시달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중앙집권적 절대군주제에 두었고, 이를 위해 체계적인 여러 계획을 세웠다. 따라서 그가 직접 콘술을 임명했으며 원로원은 더이상 입법에 참여하지 않았다. 황제의 고문직(콘실리아 사크라)은 각 분야의 전문 관리들이 나누어 맡았는데, 그들의 기능은 엄격히 제한되었으며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근위대장)들의 권한 역시 제약을 받게 되었다. 행정 업무는 점점 전문화되었으며 관료직의 숫자는 늘어났다. 이것은 결국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관료주의테크노크러시(기술자정치)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이런 조직은 행정부가 한 개인의 손에 움직여지기보다는 법전의 법률 적용에 더욱 의존하게 되는 현상을 낳았다. 지금은 일부만 전해지는 그레고리우스 법전과 헤르모게네스 법전을 개정한 것도 그의 재위 때 일이었다. 그러나 남아 있는 1,200개의 칙령은 그의 성격 중 또다른 면을 보여준다. 보수주의자로서 그는 자식이 나이든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 부모는 자식들을 공정하게 대해야 한다, 부부는 결혼의 법을 존중해야 한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아야 한다, 노예는 주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아야 한다, 사유재산과 채권자의 권리 그리고 계약조항은 지켜져야 한다는 등의 고전적 미덕을 보존하고자 했다. 다른 방법으로도 진위를 가릴 수 있다면 고문을 하지 못하게 했으며 가능한 한 총독들이 자치를 하도록 고무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군대 역시 재조직하고 옛 규율로 복귀시켰다. 후방부대(지방부대)가 전방(변경)으로 옮겨갔고 대기부대(주요기동부대)는 국내에 주둔하게 되었다. 병력은 후대 작가 락탄티우스가 주장한 것처럼 4배로 늘어나지는 않았지만 1/4이나 증가했다. 여기에서도 그는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관점에서 개혁을 했다. 그는 20년간 복무한 군인에게는 세금을 면제시켜 주었다. 생활비를 낮추기 위해 상품 가격을 제한한 조치는 주로 병사들의 생활을 좀더 나아지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락탄티우스의 말에 따르자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을 더욱 경외의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속주(屬州)들을 분할했다고 하지만, 사실 이 조치는 총독들로 하여금 그들이 다스리는 속주에 더욱 밀접해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그들의 권력을 분산함으로써 그들의 지역적 세력을 축소하려는 것이었다. 한편 농업을 회복시키고 건설을 계획해 경제발전을 촉진시키려 하기도 했다.
 

여러 전쟁이 원인이기도 했지만 선대(先代)부터 계속 불안했던 재정상태와 더불어 이들 정책 때문에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의 재정 문제 해결책은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매우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유굼(jugum)과 카피타티오(capitatio)라는 2가지 세금이 새로 생겨났다. 유굼은 경작이 가능한 토지 단위에 매겨졌고 카피타티오는 개인에게 부과되었다. 세금은 비례제였고 세금액은 생산성과 경작 유형에 따라 정해졌다. 그결과 이것은 소유권이나 생산성에 따라 사람과 토지를 한데 묶어 평가의 기준으로 삼은 일종의 사회경제적 과세가 되었다. 과세를 위한 자산평가는 5년마다 실시되었고 이 제도는 그뒤 인딕티오라고 불린 15년 주기로 굳어졌다. 과세대상의 성인에 대한 인구조사는 격렬한 비난을 받았지만 이론적으로는 과거 개인의 자유 재량에 따른 과세보다는 낫다는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재정제도는 결국 무절제해졌지만 그의 목적은 기금을 얻는 것이었으며, 그 목적을 위해 당시까지 토지세 면제 혜택을 받아오던 이탈리아에도 역시 세금을 매겼다.
 

이들 개혁정책에는 통화개혁이 수반되었다. 그는 일정한 도안의 안정된 금화·은화를 부활시키고 청동 주화를 새로 만들었으며 일상의 통화거래를 쉽게 하기 위해 조그만 동전을 유통시켰다. 그밖에도 중앙에 집중되어 있던 화폐주조를 분권화시키고 화폐주조소를 8개에서 15개로 늘렸다. 이런 조치들은 모두 재정상의 위기를 피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301년에는 유명한 최고가격령을 발표해 임금을 고정시키고 최고가격을 정해 인플레이션, 지나친 이윤, 구매자 착취 등을 막으려 했다. 이 법령에는 물품 1,000여 개의 이름이 하나하나 나와 있었으며, 위반자는 사형까지 당할 수 있었고 암시장 상인들은 무거운 벌금을 물어야 했다. 그러나 가격과 임금 규제는 시행되지 못했고 훗날 칙령은 결국 취소되었다.
 
[기독교도 박해]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치세 말기는 최후의 그리스도교도 대박해로 어두운 시절이었다. 박해를 가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대두되는 이유들로는 로마의 전통 종교를 열광적으로 믿던 갈레리우스의 영향, 외래 종교를 믿는 자들을 분리주의자로 보고 제국 안에 일종의 또다른 국가를 만들려는 시도를 허용하지 않는 완전한 단합을 회복시키겠다는 욕구, 철학자 포르피리오스와 총독 히에로클레스 같은 반(反)그리스도교적 인물들이 지식계급과 제국의 황실에 끼친 영향, 반항적인 군사들이 황제 숭배에서 멀어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 이론상의 논란 때문에 동요되고 있던 그리스도교도 자신들이 일으킨 소요 때문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런 요인들의 일부 또는 전부가 작용하여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03~304년 4개의 칙령을 발표했는데, 이에 덧붙여 결코 유혈 박해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의 공언은 무시되어 제국 전역에서 매우 가혹한 박해가 일어났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를 말살하지는 못했고, 오히려 순교자들의 신앙을 더욱 불타오르게 하는 결과만 빚어냈다.
 
[평가]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병 때문에 일찍 늙었다. 그는 20년간의 통치 끝에 제위를 버리는 것도 '숙명'이라 여긴 듯하다. 그는 스스로 제국의 업무를 젊은이들에게 맡기기로 마음먹고 니코메디아로 돌아갔다. 그뒤 아드리아 해변의 살로나이 근처에 지어두었던 웅장한 궁전(지금은 크로아티아의 스플리트 시가 그 유적지에 세워져 있음)으로 옮겼다. 305년 5월 1일 정식으로 퇴위했으며 주위의 무관심 속에 죽었다.

그는 정치적 낭만주의 성향이 전혀 없이 제국을 재조직했다. 그의 개혁은 사전에 계획해 추진된 일이 아니라 역사적 필요에 의해 실시된 것이었다. 그의 몇 가지 행위 중에는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도 있다. 잔인하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의 가혹한 행위는 뿌리 깊은 야만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또 탐욕스러워 보이는 행위는 국가를 위한 자원을 얻으려는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얼빠진 몽상가라는 비난도 있으나 이런 기질 덕분에 방대한 영토를 다스릴 좀더 나은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었다. 관료주의와 테크노크러시를 창시했다는 비난도 가능하지만 이는 좀더 효율성이 클 것을 고려해 실시한 정책이었다. 개인적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신앙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믿음이 유별나게 깊지 않았던 것은 확실하지만 황제의 신(神)이 전세계를 지배한다고 늘 생각했다. 그는 절대적이고 '신성한 권리'를 행사하는 군주제를 실시했으며 동양적인 위엄을 군주제에 도입했다.

그의 과업 중 일부는 실패였다. 그가 만든 나라는 "건설하고자 했던 새로운 나라가 아니라 차라리 비상 피난처"로서 폭풍을 피할 수 있게끔 신의 도움으로 얻은 보호처였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 및 신앙이나 그가 활약한 시대를 보더라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국가에 필요한 사람'(vir rei publicae necessarius)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 목차고리 : 로마의 황제들

>> 참고고리 : 로마의 10대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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