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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7-07-12
 제목  무함마드(Muhammad, 570?~632)
 주제어  [이슬람] 마호메트
 자료출처  위키사전, 베다니미전도종족 참고  성경본문  
 내용

무함마드는 6세기 중엽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를 지배한 꾸라이쉬족의 명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지 며칠 전에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도 그가 6세쯤 되었을 때 사망하였다. 어머니가 죽은 후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다가 뒤이어 큰아버지이자 검은돌 신전의 관리인인 아부 탈리브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 아브 탈리브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자라던 무함마드 소년은 검은돌이 숭배되는 모습에 의문을 가졌다고 한다. 12세 때 큰아버지를 따라 시리아로 가는 대상(隊商)에 참가하여 그 곳을 내왕하는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무렵 아라비아인들은 대상을 짜서 상인으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고, 메카는 상업도시로서 크게 번영하고 있었다.

 

무함마드는 ‘알-아민(믿을 수 있는 자)’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사람들에게 진실하였으며 사람들은 분쟁이 생기면 그에게 중재를 요청하곤 했었다. 그러던 중 부유한 상인과 사별한 과부 카디자는 자신이 운영하는 무역단에서 지배인으로 일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무함마드는 그녀의 요청에 받아들여 고용살이를 하며 그녀의 밑에서 대상의 일을 돕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라비아 반도의 안팎을 돌아다니는 동안에 여러 나라와 종교(기독교, 유대교)를 보고 듣고 해서 인생 경험을 쌓았다. 25세 때 과부 카디자와 결혼하였으며 당시 카디자의 나이는 무함마드보다 15세나 연상인 40세였다. 두 사람은 슬하에 아들 3명과 딸 4명을 두게 되었다. 무함마드는 카으바 신전 재건과 관련하여 벌어진 꾸라이쉬족의 분쟁을 조정하기도 하였다.

 

무함마드는 자신이 종교적 명상에 몰입할 수 있는 충분한 여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유대교와 기독교가 중부 아랍 부족에 의해 받아들여졌지만, 우상숭배가 그들의 고대 제의를 대신했을 뿐이었다.

 

무함마드는 명상과 기도를 위해 매년 히라 산으로 가곤 했다. 산에서부터 돌아온 지 1년만에 무함마드는 자신을 신의 선택된 예언자로 선언했다. 무함마드는 자신이 산의 동굴에 있는 동안 첫번째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메카로 돌아오자, 그는 9년 동안 자신의 메시지를 설교했으며, 많은 지지자를 얻었다. 하나가 태동하면, 이것은 다른 기존의 신앙들과 마찰을 일으키는 법이다. 결국, 612년에 그는 자신의 추종자에게서 적이 그를 죽이려 한다는 경고를 받고 도망가야만 했다. 이러한 피신이 이슬람 달력의 시초가 되었고 헤지라(Hejirat) 1년이 되었다. (헤지라는 "도망 또는 이주 후"라는 의미이다.) 그의 도망으로 그는 추종자들을 얻었고 630년에는 코레이쉬족의 손아귀로부터 메카를 빼앗기 위해 돌아왔다. 그는 그 후 모든 아라비아에서 "예언자"로 인정을 받았다.

 

무함마드는 메카로 돌아온 후 2년만에 사망했으며, 그의 일생 동안 그의 추종자들은 조심스레 그의 말과 환상들을 필사했는데, 이것은 그 자신은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645년에 즉. 그가 죽은 지 10년 후에 알리(무함마드의 의형제)와 다른 지도자들은 이러한 모든 필사본들을 모아 합쳐서 "코란"(Qur'an)을 만들었는데, 114개의 장과 6,236개의 절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이슬람 신자들에게 성경처럼 되었다.

 


 

이슬람 창시와 관련된 무함마드에 대한 이슬람의 입장은 아래와 같다.

 

참고 : 이슬람 교리에서 이슬람의 창시자이자 교조는 유일신 알라이며, 무함마드는 이슬람의 창시자도 교조도 아닌, 단지 알라의 예언자일 따름이다. 따라서 '이슬람 창시'와 같은 표현은 다른 종교인을 비롯한 이슬람을 믿지 않는 사람이 이해하기 쉽게 하려고 만든 "관용 표현"일 뿐이다.
무함마드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진심으로 행복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주위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메카는 번영하고 있었으나 잘 사는 사람은 얼마 안 되는 부자 상인뿐이었다. 그들은 사치스런 생활을 하였으나, 일반 사람들은 가난하였고, 갓난아기를 입을 줄이기 위해 예사로 죽이는 악습마저 있었다.

또한 아라비아인들은 여러 부족으로 갈라져서 아직 통일되지 않고 있었고, 부족마다 각각 다른 신을 섬기고 있었다. 이 수많은 신들의 신상을 메카의 신전에 모셔 놓고 있었다.

 

어릴 때 뼈저리게 가난을 겪어 보았던 무함마드는 이런 일들을 보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무함마드는 메카 근방의 히라산의 동굴에 들어앉아 조용히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610년 어느 날, 무함마드가 동굴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대천사 지브릴이 나타나서 "무함마드여, 그대는 알라의 사도이다."라고 말하고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이 때 무함마드는 자기가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유일신인 알라의 사도, 즉 예언자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천사를 통해 알라의 묵시를 받은 그는 아내와 11살난 조카에게 먼저 알라의 묵시를 전했으며, 2∼3년여간에 많은 신자들을 이슬람으로 초대하였다.

그의 설교 내용은 알라 앞에서 '만인의 평등'이었지만,이슬람 역사에서는 주인과 노예가 있거나, 비(非)아랍계 무슬림과 아랍계 무슬림간의 갈등이 있는 등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알라의 유일성과 평등에 관한 그의 메세지는 우상 숭배, 즉 검은 돌 숭배를 통해 경제 생활의 토대를 마련해 오던 꾸라이쉬 귀족들에게는 기득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다. 따라서 꾸라이쉬 귀족들은 무함마드를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박해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무함마드는 야드리브로 이주하여(헤지라,(622년)) 이슬람에 기초한 공동체, 즉 움마를 형성하였다. 이슬람 달력이 622년을 기준으로 삼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야드리브에서는 무함마드를 환영하였고, 이 도시는 이후 '메디나(예언자의 도시)'로 불리게 되었다. 이 때문에 메카는 메디나를 미워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때부터 몇 해 동안 치열한 전쟁이 되풀이되었는데, 628년에 휴전이 성립되었다. 무함마드는 오랜만에 메카의 카으바 신전에 참배하였다. 그 당당한 모습을 보고 메카의 시민들이 잇따라 이슬람의 신도가 되었다고 한다.

무함마드의 메세지는 그렇게 메디나 뿐만 아니라 메카에 남아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고, 결국 2년 후인 630년 1월 11일에 무함마드는 1만 명의 신도병(信徒兵)을 거느리고 메카에 무혈입성하기에 이른다. 그 때 카으바 신전에 들어간 무함마드는 거기에 모셔 놓은 우상들을 모두 다 파괴하였다. 이 때 무함마드는 "진리가 왔다! 허위는 멸망했다! 참으로 허위는 멸망하였다!"고 외쳤다고 한다. 그 밖에 무함마드는 민가의 우상들도 모두 파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카으바 신전은 이슬람의 성지로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로부터 2년 동안 무함마드의 세력은 아라비아의 부족 사이에 스며들어갔다.

632년 6월 8일에 사망한 그는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이후에 알라가 보낸 마지막 예언자로서, 그가 전한 알라의 메세지는 꾸란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언행록은 하디쓰에 기록되어 있다. 그가 창시한 이슬람에 의해서 비로소 아라비아인들의 마음은 하나가 되고, 또 부족이 뿔뿔이 흩어져 있던 아라비아 반도도 차츰 통일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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