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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6-29
 제목  브라질장로교회 역사
 주제어  [장로교] [교회사]
 자료출처  미션매거진 120호  성경본문  
 내용

1. 파종기(1859-1869)

브라질에 장로교 신앙의 발흥은 애쉬벨.그린.사이몬톤(1833-1867)의 선구자적인 정신과 희생의 결과 였다. 사이몬톤은 펜실바니아주 웨스트 하노버에서 태어나 뉴저지대학에서 수학을 하고 처음에는 교수나 변호사가 되려고생각 했다. 1855년 신앙의 재활력을 찾고 신앙입교 고백을 한후 프린스톤 신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의 스승 유명한 신학자 챨스. 핫지의 설교가 그로 하여금 낯선 곳에 가서 선교사역을 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3년 후에 미국장로교 해외선교부에 브라질을 그의 원하는 선교지로 올리면서 선교사 지원신청을 했다. 그는 선교사안수 2개월후 브라질로 떠나 1859년 8월12일 26세로 리오.데. 자네이로에 도착 했다. 1860년 4월에 사이몬톤은 브라질어로 그의 첫 예배를 인도했다. 1862년 1월에 리오.데.자냐이로 장로교회의 설립 성도들이 되는 첫 회심자들을 얻게 되었다. 그는 짧은 삶(8년)을 브라질에 살았지만 어떤 동역자들의 도움으로 개신교 첫 언론지인
장로교신문을 창립하고 (1864년) ,리오.데.자네이로 노회를 설립하며(1865)신학교를 세웠다.(1867) 사이몬톤은 1867년 34세로 황열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아내-헬렌.므르더치 남편보다 3년전에 죽었다) 사역하는동안 사이몬톤의 가까운 조력자들은 그의 동서 (cunhado) "알렉산더.L.블렉포드였다 블렉포드는 1865년 상파울로와 브로따스에 교회들을 세웠다. 동역자 프란시스.J.C.슈나이더는 리오.끌라로 지역에서 독일 이민자들을 위해 일하며, 리오 신학교에서 강의를 했고 바이아주의 선교사였다. 그리고 동역자 죠지.W.챔블린은 큰 전도자였고, 영향력있는 목사였다. 초창기신학교 유일한 네명의 신학생들은 브라질 초대교회에 실력있는 목사들이었다
: “안또니오.반데이라 뜨라자노”, “미겔.곤살베스.또히스”, “모데스또.뻬레스뜨렐로.바호스 디 까르발료자“, ”안또니오.뻬드로. 디. 세르께이라.레이찌“( 4명)

첫 10여년간 몇 조직교회들이 로레나, 보르다 디 마따(뽀우조 알레그리) 와 소로까바에 세워졌다. 다른 교회들을 세우는데 더 많이 헌신한 사람은 알려진 죠제.마노엘.꼰세이셩 목사이다.(1822-1873).그는 이전 신부 였는데 회심하여 외국선교사에게 목사로 첫 번째 안수 받은 현지인이다. (1865)꼰세이셩 목사는 지칠줄 모르게 상파울로 내륙, 발리 디 빠라이바, 미나스 남부지역의 여러 도시들을 은혜의 복음을 전하며 다녔다.

2. 확장기(1869-1888)

사이몬톤과 그의 동역자들은 미국북장로교에 속한 자들이었다. (PCUSA) 1869년에는 남장로교 첫선교사들이 도착을 했다. (PCUS): 죠지.네쉬.모르톤, 에드워드.레인. 그들은 미국 남부전쟁 후 브라질로 온 미국교포들이 정착 하고 있는 깜삐나스에 자리를 잡았다. (1861-1865남북전쟁) 1870년에 모르톤과 레인은 깜삐나스교회를 세우고,1873년에는 유명하지만 오래가지 못한 국제학교를 세웠다. 남장로교선교사들은 모지아나지역, 미나스주 서부, 미나스삼각지대, 고이아스주 남쪽지역을 선교 했다. 이들 여러지역을 지칠줄 모르고 사역한 선교의 선구자는 죤.볼리 목사로 1892년에 죽었다.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브라질북동쪽. 북쪽의 선구자적인 장로교 신자들이었다.(알라고아주에서 아마존주까지) 특징적인 선교사들은 헤시페교회의 설립자-죤.록크웰.스미스(1878년),포르딸레자시의 선구자 - “델레시. 워드로”, 뻬르남부꼬주에 사랑받는 의사선교사 “죠지.w.버틀러”였다. 북동쪽에서 브라질현지 목사들 중에서 가장 알려진 자는 큰 장로교 공동체의 원로인 “벨미로.디. 아라우조.쎄자르” 목사 였다.
그러는 동안 북장로교선교사들은 새로운 신임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그들의 사역을 지속하게 되었다. 그들의 주요한 사역지는 쉬나이더,블렉포드,죤.벤자민.콜브 목사들이 활동한 바이아주.세르지삐주, 1874년에 예배당을 헌당한 리오.데.자네이로,죤.M.카일 목사가 일했던 노바프리부르고, 로버트.레닝톤과 죠지. A.란데스가 선구자로 기억되는 빠라나주, 그리고 특별히 상파울로주가 그들의 주요 사역지였다. 1870년 상파울로 중심지에 챔벌린부부는 후에 교육가 호레이스.메인리.레인에 의해 운영된 마켄지대학의 기초가 되는 아메리카나 학교를 세웠다. 지방 내륙에서는 마데이라섬 출신인 포르투갈인-죠앙.페르난데스.다가마 목사가 널리 알려졌다. “리오그랜드도술”주에서는 유대계 화란인-엠마누엘.반오르덴목사가 얼마동안 사역했다. 이기간에 새로 임직받은 현지목사들 사역자들은: 에두아르도.까를로스.뻬레이라, 죠제.자까리아스.디. 미란다, 마누엘.안또니오. 디. 멘데스, 델피노.도스.안조스.떼이세이라, 죠앙.히베이로.디.까르발료.브라가, 까에따노.노게이라.쥬니오르 들이었다. 미국 남.북장로교 선교부는 브라질에 메리.파커.다스콤, 엘미라. 쿨, 나니.헨드슨, 살로찌.켐프 등과 같은 유명한 교육 선교사들을 보냈다.

3. 독립시기(1888-1903)

1888년 9월에 미국장로교 본부교단과 독립을 하며 자치.자립을 위한 브라질장로교 대회가(시노드) 조직되었다. 그 대회는 세 개의노회(리오,깜삐나스-미나스서부, 뻬르남부꼬)로 구성되었고, 20명의선교사,12명 현지 목사들, 약60개현지교회로 이루어졌다.첫 대회장은 선교사 노장 블렉포드목사였다. 대회는 장로교신학교를 세우고, 2명의 첫 교수들을 세웠다. 그리고 깜삐나스-미나스서부지역을 다시 상파울로, 미나스 두개의노회로 재조정했다. 이시기에 교단은 많은 새로운 선교사들, 현지인목사들,지역교회들을 통해 크게 확장 되어갔다. 신학교는 1892년말 노바.프리브르그(리오주)에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1895년 시작무렵 “죤.록크웰.스미스 목사를 앞세우며 상파울로로 옮겼다.1891년 호레이스.메인리.레인박사를 첫 교장으로 세우며 마켄지대학 혹은 장로교대학교을 세우게 되었다.

황열병으로 국제학교가 깜삐나스에서 라브라스로 옮겨지며, 후에는 큰 지도자 삼무엘.R.가몬에 (1865-1928)대한 명예예우로 “가몬 연구소”로 이름을 변경했다. 북동쪽의 첫 미션학교는 위리엄.C.포터의 아내인 캐드린.H.포터에의해 세워진 나따우 아메리컨 고등학교이다. (1895년) 같은시기에 과라늉스도시가 장로교사역 중심지로 변해가고 있었다. 전도사역 외에도 2개의 중요한 교육기관의 기초가 출발하게 되었다.: 하나는 “ 11월15일 고등학교”이고, 다른하나는 오늘은 헤시페에 위치하고 있는 북장로교 신학교이다. 이시기 말엽 북동쪽주에 세워 지는 것 외에도 장로교회는 빠라주와 아마존부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장로교사역이 브라질 남쪽에서는 산타가따리나주 (성프란시스코 도 술, 플로리아노폴리스)에서 시작되었다. 교회개척은 역시 성공적인 행진이 미나스주에서 시작되었다. 아우또.제끼찌바시에서 정착을하고 사역한 첫사역자는 마따찌아스.고메스.도스.산토스목사 였다.(1901) 상파울로와 리오의 교회들은 존경받는 “에두아르도.까를로스.뻬헤이라”(1888)와 “알바로.에미지오.G.도스.헤이스”(1897)와 같은 두 큰 지도자들이 돌보고 있었다.
불행히도 이러한 발전적인 시기가 교회에 닥친 하나의 큰 위기로 어두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시작은 브라질 현지 대회와 뉴욕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사이에 사역에 있어 무엇이 우선인가 라는 차이에서 생기게 되었다. 외국선교부는 마켄지대학을 중추적으로 교육사업에 강조점을 두는 반면에 현지대회는 전도사역과 신학교 설립에 지원을 해야 된다는 것 이었다.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대립의 평행선이 상파울로장로교회목사 “에두아르도.까를로스.뻬헤이라”와 마켄지학교의 실무자- “호레이스.m.레인”, “윌리엄.A.워델” 사이에 발생하고 말았다.

시간에 지남에 따라 에두아르도목사는 심지어 브라질 동역자들의 지원도 잃어버리면서 주장이 더욱 강하여졌다. 에두아르도목사가 경영하는 “에스딴다르찌(십자가군병)”라는 신문에 대응 하면서, 알바로.헤이스목사는 1899년에 “퓨리타노” 라는 신문을 창간했다. 1900년에 에두아르도목사의 교회에서 나온 교인들로 인해 생긴 두 개의 교회가 다시 합하여 새로운 교회가 조직 되었으니 곧 “상파울로 연합장로교회였다. 같은 시기에 아직까지도 어려운 상황을 남겨놓은 새로운 문제거리가 생겼는데 곧 ”마소나리아“에 관한 논쟁이었다. 1902년 3월에 에두아르도목사와 입장을 같이 하는 자들은 선교적인,교육사업적인, 마소나리아등 다섯가지 주제들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을 담은 일종의 정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계속 뜨거운 논쟁이 1년 조금지나 1903년 7월31일 대회기간중 위기가 슬픈 결말로 닥치게 되었다. 에두아르도목사와 같은 편인 동역자들은 그들의 주장이 결렬되자 대회를떠나 “ 브라질 독립장로교”라는 교회를 시작했다.

4. 재건의시기(1903-1917)

1903년 8월초에 독립장로교회들은 15명의 장로들, 7명의목사(에두아르도,까에따노,벤또.페하즈, 에르네스또, 오또니엘, 알프레도, 비센찌)과 함께 노회를 조직했다. 공동체의 분열로 슬픈 시대가, 재산소유에대한 투쟁, 법적소송 등이 발생하게 되었다. 독립노회의 한 목사는 대회 성찬식에 참여 하는 자들에게 방해를 하는 사태도 일어났다. 더 심한 투쟁적인 기간이 1906년까지 이어 졌다. 이시기에 대회는 77교회와 약 6500 성도가 되었고, 1907년 독립교회들은 56교회와 4200 세레교인들을 보유했다.

“이지에노뽈리스”에 위치한 신학교 건물은 1899년 9월에 요식철차 없이 소유하게 되었다. 학교 본 교수들이 죤.R.스미스와 에라스무.브라가(1901년부터)였다. 학교운영진에서 두드러진 사람은 알바로.헤이스목사였다. 1907년 2월 신학교는 옛 국제학교의 건물을 차지하면서 깜삐나스로 옮기게 되었다. 깜삐나스에서 첫 졸업생이 1912년에배출 되었다. 첫 졸업생은- 딴끄레도.꼬스따, 에르꿀라노. 디. 고우베아. 주니오르, 미게우.히조.쥬니오르, 빠쇼아우.루이스.삐따 이며, 그이후 졸업자는 -귈레르미.케르, 죠지.T.굴라르트, 가우디노.모레이라, 조제.까를로스.노게이라 들이었다.

장로교 사역은 계속 여러 곳에서 성장되었다. 미나스동쪽에서 첫 복음이 이른곳은 알또.제끼찌바(마누아수)이며, 에스삐리또.산또 주에서는 성.조제.도.까우사도 이다. 그지방에서 첫 목사들은 -마따찌아스.고메스, 아니발.노라, 꼰스딴시오.오메로.오메그나, 사무엘 바르보자들이었다. 발리.도.히베이라도시 에서는 역동적인 전도자 윌리스.호베르또.뱅크스가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바싸옹 가족은 교회에 많은 헌금을 바치곤했다. 1907년 브라질대회는 2개의대회- 북대회, 남대회로 분활되었다. 1910년에 브라질장로교 총회가 조직되었다. 대회의 마지막 대회장이며, 총회의 토대를 놓는데 큰역활을 한사람은 40년 이전에 안수를 받은 노장 모데스또.까르발료자였다. 총회는 리오.데.자네이로교회에서 개최 되었고, 첫 총회장은 알바로.헤이스가 선출되었다. 임원들은 칼빈주의자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칼빈출생4세기를 축하하는 뜻에서 빌가뇽섬(리오)을 방문했다. 그시기 브라질장로교단은 만명의 세례자와 많은 미성년자 교인들, 7개노회의 약 150개의 조직교회를 갖게 되었다. 다른교단들-감리교는 6천교인, 독립장로교는 5천교인, 침례교 5천교인, 성공회 약1천교인 이었다. 1911년 브라질장로교단은 포르투갈에 첫 장로교선교사-죠앙.다.모따.소브린요목사를 파송 했으며,그는 1922년까지 그곳에서 사역을 하였다.

미국선교사들은 넘치는 활동을 계속 해나갔다. 남장로교선교사들은 선교 사역에서 교육의 방법 등 입장이 서로 갈리면서 선교지부를 동부(라브라스), 서부(깜삐나스)로 나누었다. 윌리엄.워델 목사는 바이아주 뽄찌.노바시에 영향력 있는 학교를 설립했다. 챔블린선교사의아들 피어스는 1899년에서 1909년사이 바이아주에서 일했다. 마또.그로스주에서 이시기에 장로교선교부 사역이 시작 되었는데 선구자들은 프랑클린.그래함(1913),펠리페 란데스(1915) 선교사들이었다.
1917년에 미국장로교선교부는 선교사역권에서 현지인교단 사역권(노회)을나누면서 브라질장로교단에서 외국선교사들은 스스로 연결을 끊는 소위 “모두스.오뻬란디(modus.operandi) 합의가 조인되었다. 1924년에 외국선교사들은 노회의 총대로 참석하지 않는 첫 장로교총회가 열리게 되었다.

5. 선교협력시기(1917-1932)

이시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는 신학교 교수이며,총회서기인 에라스모.디.까르발료.브.라가(1877-1932)목사였다. 1916년 그는 파나마에서 열린 라틴아메리카 기독실행위원회에 2명의 동료와 함께 참석하였다. 몇 년후 그는 1920년대 브라질개신교회들 간에 중대한 공조체제를 이끌던 “브라질협력위원회”의 영향력있는 서기 임무를 맡게 되었다. 주요한 협력 분야는 기독교 문학, 기독교 교육, 신학교육이었다. 1932년까지 존재했던 연합신학교가 리오에 설립되었다.
이시기 다른 협력사역들은 이러하다: (1)윌리엄.A.웨들에 의해 상파울로근교에 위치한 잔디라시에 설립된 “죠제.마노엘.꼰세이셩 성경학교”-후에 신학교에 갈 청년후보들을 발굴하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2)후에 까이우아 선교회가 된 인디언들의 교리교육협의회:알버트.S.맥스웰에 의해 계획이되어 전통장로교교단, 독립장로교교단,감리교,성공회교단들이 힘을 합쳐 “마또.그로스”주 도우라도스시에 설립을 했다.
깜삐나스 신학교는 연합신학교가 생기므로 수그러지는 위험에 봉착했으나 결국에는 위기를 잘 넘겼다. 1921년 북장로교신학교는 헤시페로 이전했다. 선교부 주요한 교육기관들은 헤시페에 위치한 아그네스.에르스카인 고등학교, 과라늉스에 세워진 11월15일 고등학교, 바이아주에 세워진 뽄찌.노바고등학교, 살바도르에 세워진 7월2일 고등학교, 라브라스에 세워진 가몬학원, 가스트로에 세워진 크리스챤학원, 그리고 마켄지대학이다. 정기 기독 간행물은 “ 퓨리탄” 과 “복음의 북녘”이었다.
1924년 총회는 포르투갈 리스보아에서 하고 있는 선교사역을 끝냈다. 그러나 동년에 “에라스모.브라가”와 동료들이 포르투갈에 브라질선교지부를 설립하고 “빠쇼아우”목사와 아내 “오데찌”를 파송했다. 부부는 그곳에 15년(1925-1940)을 사역을 했으나, 고정적인 선교지원금의 부족으로 브라질로 돌아오게 되었다.
1921년 안또니오.반데이라.뜨라자노 목사가 죽었다. 그와함께 1860년대 일하던 브라질장로교 사역자들- 첫세대들이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이시기에 세상을 떠난자는 :에두아르도목사(1923), 알바로.헤이스(1925), 까를로따.캠프(1927), 사무엘.가몬(1928), 에라스모.브라가(1932)들이다. 여러 장로교 선구자들은 신앙적인 면 뿐만아니라 지식적인. 문헌적인 값진 헌신을 두고간 자들이다. 그런 선구자들을 기념하는 책들을 쓴 저자들은 다음과 같다. 모데스또.가르발료자(에스끄리뚜라셩 메르깐찌우), 안또니오.뜨라자노(알제브라.엘레멘따르), 에두아르도.C.뻬헤이라(그라마찌카.에스뽀지찌보), 오또니엘.모따(오 메우 이디오마), 에라스모.브라가(세리에.브라가)- ( ) 이름은 저자의 ‘작품명“

6. 조직의 시기(1932-1959)

1930년에서 50년사이 브라질장로교는 여성활동, 청년회, 국내.국외선교사역, 문서.사회활동 등을 위한 기관을 세우며 교단 자체의 구조를 더 확장하고 견고히 다져갔다. 이기간은 브라질 장로교 100주년 기념사업을 하기까지 이어진다. 이시기 장로교회는 다음과 같은대회(시노드)들을 조직하게 되었다. (1) 세뗀뜨리오날 대회 : 뻬르남부꼬주에 많은 교회들을 두면서 알라고아주에서 아마존주까지 확장하게 된다 (2) 바이아-세르지삐대회:이전 선교본부 역활을 한 바이아.세르지삐 노회가 교회수가 많아지며 “살바돌”, “깜뽀.포르모조”, “이따부나” - 3개의 노회로 분활 하면서 그이름은 대회로 승격하게 된다. (3)미나스.에스삐리또대회:1946년 미나스동쪽과 가장 교회 성장지역이었던 에스삐리또.산또주를 포함해서 대회가 조직 되었다. (4)쎈뜨럴대회:1928년 리오주와 미나스 남서쪽을 포함해서 중앙대회가 조직되었다. (5)메리디오날 대회:역사가 깊은 대회로 상파울로,빠라나,산따까따리나주를 포함하여 1910년부터 1947년까지 존재 했던 대회이다 (6)브라질서대회:1947년 상파울로주 북서지역을 전부 포함해서 조직되었다. 50년대 끝무렵 미나스 뜨리앙굴로, 고이아스, 꾸이아바 지역을 선교부 소속에서 노회로 이전하게되었다.

이시기에 미국장로교선교부는 사역을 계속 해나갔다. (1)남장로교선교부: (a) 북쪽선교부 -북동쪽에서 사역하며 중요한 인물은 윌리엄.칼빈.포터 선교사이다(1939년사망), 가장 중요한사역지는 11월15일고등학교와 북동쪽개신교신문이 세워진 과라늉스이다. (b)동선교부: 미나스서쪽과 후에는 도우라도시와 1951년 조직교회가 세워진 마또.그로스주에서 활동했다. (c)서쪽선교부:1933년 에드워드와 메리.레인부부가 함께 빠뜨로시니오성경학교를 설립한 뜨리앙굴로.미나스 지역에 집중적으로 사역했다. (2) 북장로교선교부-(a)중앙선교부:그들의 주요한 사역지역은 뽄찌.노바/이따시라도시, 성.프란시스꼬강유역,바이아남쪽,미나스북쪽 지역이었다. ,(b);남쪽선교부-1937년경 중앙선교부와 합병을 하면서 빠라나주.산따.까따리나주에서 활동했다. 필리뻬.란데스목사는 마또.그로스(북.남)에서 큰 전도자 였다. 리오.베르지, 고이아스주에서는 목사며 의사인 도널드.고르돈이 활동하며 필요한 병원을 세웠다.

여성활동:첫 여성 단체들은 1884-5년에 생기기 시작하여 1920년대 여성 연맹이 조직이 되었다. 여성활동의 첫 사무장들은 JORGE T.굴라트목사와 여성들 제노베바.마르샨트, 블란세.리시오, 세실리아.시께이라, 네디.워너 들이었다.
첫 여전도회 대회는 1941년 리오시 히아수엘로장로교회에서 개최되고, 제2회도 1954년역시 리오에서 열리게 되었다. 여전도회 잡지가 1954년 창간되었다. 청년조직: 선구적인 단체들은 청년기독협회( 미론.클라크), 기독면려회(끄라라. 훅), 브라질기독학생 연합(에두아르도.P 마갈랴잉스) 등이었다. 벤자민.모라이스.필료는 1938년에 청년사역의 첫 첫 사무장이었다.

1946년 첫 청년대회가 연맹을 조직 하면서 자까레빠과에서 개최되었다. 그당시 청년조직의 리더들은 프란시스코.알비스, 조지.쎄자르.모따, 바울로.쎄자르,발도.쎄자르, 뗄시오.에메리끼, 구덴베르그.디.깜뽀스, 빠울로.히조, 그리고 빌리.가몬 이었다. 국내선교단체: 1940년 국내전도부가 브라질장로교 교단과 미국선교부의 대표들을 뽑아 연합장로교회에서 조직되었다. 첫 리더들은 꼬리올라노.디.아순셩, 귈레르미.케르, 필리뻬.란데스, 에두아르도.라네, 죠제.까를로스.노게이라, 그리고 윌슨.N.리시오 이었다. 1958년까지 국내전도부는 브라질전국에 150개의 전도처와 함께 7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1950년 아마존 장로교 선교부가 조직되었다.

포르투갈 선교: 첫 사역자들은 죠앙.다.모따.소브린요(1911-1922)와 빠쇼아우.루이스.삐따(1925-1940)들 이었다. 1944년 브라질장로교교단은 그 사역을 인수하여 미국교회의 후원과 함께 해외선교부를 설립하게 되었다. 첫 선교사들은 나다나엘.에메리끼, 아우렐리아노.리노.삐리스, 나다나엘.뷰뗀뮬레르 그리고 떼오필로.까르니에르 였다.

그 외 조직들: (a) 출판부-보아느게.히베이로 목사의 지도력과 함께 선교100주년 기념켐페인을 준비하면서 1945년 에 조직되었다. 첫 본부는 후아 헬베찌아에 위치한 연합장로교회의 동의를 얻어 교회안에 두게 되엇다.
(b)고아원: 1910년에 총회는 라브라스에 하나의 고아원을 계획하고 1919년에 발렌시아에서 운영하기 시작했고, 1929년에 자까레빠과시에 있는 꼬빠까바나장로교회의 소유인 대지를 갖게 되었다. 고아원은 “ 알바로.헤이스교육원”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c)장로교국제위원회: 장로교교단을 외국선교단체들과 미장로교선교부와의 관계를 지휘하는 목적으로 1955년에 조직이 되었다. 1917년에 “모두스.오뻬란디”에 따라 자치권을
가지고 이었다.

다른교단들: (a) 독립장로교교단-1957년 총회가 약 3만세레교인, 105명의 목사들,189조직교회들, 10개의 노회들, 3개의 대회와 함께 조직이 되었다.
교단신문 “십자군병”이 공식신문으로 계속 이어졌다. 1930년대 말 신학적인 논쟁이 있었다
1942년 지적인 자유주의 흐름의 그룹(에두아르도.P.마갈랴잉스-그들중 한사람)이 독립장로교단을 이탈하여 “상파울로 기독교회”라는 교단을 조직하였다. (b)보수장로교단:1940년에 독립장로교단안에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들에 의해 창립되었다. 1957년 보수장로교단은 4개주에 약20 교회이상의 교세와 하나의 신학교를 갖고 있었다. 공식적인 교단이름은 “보수장로교”이다 (c) 근본주의 장로교회:1956년 헤시페 제일장로교회의 이스라엘.게이로스목사에 의해 창립되었으며, 미국인 칼.멕킨타이어에의해 시작된 “국제기독교회협의회(I.C.C.C)와 연관되어 있다. 이시기에 브라질장로교단은 여러 연합운동에 참가하였다. :개신교자선단체 협의회(1928년 오또니엘.모또에 의해 창립), 에벤에젤 자선 기독협의회(벤자민.후니커트박사가 이끌고 있었음)
까이우아 선교부, 죠제.마노엘.곤세이셩 연구소, 브라질개신교연맹(1934년창립),브라질성서공회, 개신교시청각본부(1951년창립), 60년대초 브라질교단에 속하게 된 마켄지대학교.

브라질장로교 헌법: 1924년에 1888년 대회가 창립될때 채택된 헌법에 약간의 수정을 하여 통과 되었다. 1937년 총회에서 채택된 새로운 헌법이 발효하기 시작했다.(독립장로교는3년전에 자신의 새헙법을 채택했음). 몇가지 항에서 북쪽 지역에서는 반대가 있었다.
:집사직의 혼성건(남.여), 신앙입교라는 단어“PROFISSAO 대신에 확신(CONFIMACAO)을 대치하는건, 교단이름을 기독장로교회(IGREJA CRISTA PRESBITERIANA)로 변경하는건. 1950년에 새헌법은 발효되었고, 권징조례와 예배모범은 그 이듬해에 발효되었다.

교단통계:1957년 브라질장로교회는 6개의 대회, 41개의 노회,489개의 조직교회,883개의 미자립교회, 369명의 목사들,127명의 목사 후보생들, 89,741명의 세례교인,71,650명의 학습교인을 보유하고 있었다. 첫 총회장들은 귈레르미.게르, 죠제.까를로스.노게이라, 나다나엘.고르데즈, 벤자민.모라이스.필료, 죠제.보르지스.도스.산토스.쥬니오르 들이었다.

1946년 다음과 같은 목표를 갖고 선교100주년기념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영적 부흥‘ “교회양적성장”, “교단의 정체성확립”, “개혁신앙의 확립”, “초대교회 선구자에 대한 명예” 등 이었다. 100주년 기념 준비 중앙본부는 1948년에 조직이 되어 많은 어려움도 있었다.
1950년이 지나 100주년캠패인은 힘을 얻었다. 100주년 준비 연합위원회(브라질장로교단, 독립장로교단,항가리개혁교회)는 1952년 브라질전국에 퍼져있던 큰 국내전도캠페인을 “에드윈.오르 , 윌리엄.던랲의 동참으로 계획을 세웠다. 다른 준비들은 장로교 박물관설립,100주년 세미나들, 신문 ‘퓨리타노”와 “복녁전도”(1958)의 합병으로 “브라질장로교신문”의 창간 등 이었다. 제18차 세계장로교연맹 총회가 1959년 7월27일부터 8월6일까지

상파울로에서 모였다. 선교100주년 기념대회 슬로건은 “축복의 1세기를 위해 1년의 감사를“ 이라는 표현을 했다.


출처 : 브라질 노시영 선교사 번역(2007.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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