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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6-27
 제목  1910년 가슴 아픈 한일합방 당시의 풍경
 주제어  [사진] [한국사]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일본 역사를 연구하는 미국인 학자가 쓴 글이라.. 어찌보면 비교적 객관적일수도, 혹은 서양인의 시각으로 묻혀진 것들도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며 읽어주시길...) 
  
 

1910년 8월 25일 한일 합병이 양국에서 조인되어 정식으로 선언되었다.
 
 
이 합병에 박차를 가한 것은 하얼빈에서 10개월 전에 일어난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이었다.
 
가장 존경할 만한 일본인 정치가를 한국인이 살해한 사실은, 한국인이 무법적이며 자제심이 없다는 일본인의 국내 감정을 의심할 나위 없이 강하게 했다.


 

 만일 점진주의적인 이토가 암살되지 않았더라면, 합병에 억제력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여겨지기도 하지만..
애초에 합병의 결단은 이미 2년전에 내려져 있었다.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단행한 외면적 이유는 한국의 독립이었지만 이것은 일본인 대다수에겐 별로 마음에 와 닿는 문제가 아니었다.  소수의 한국 사람들은 양국이 합병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부르짖기 시작했다. 


 

한반도 전역에 걸친 반일 의병운동은, 한국인 대부분이 일본의 지배에 분개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했다.
 
그러나 한국인 중에는 일본의 개혁에 감명 받은 자도, 일본과의 협력이 한국에 이익을 가져올 것이라 기대하는 자도 꽤 있었다.


 

이완용 내각은 한결같이 친일파였지만 이완용 자신은 친일조직 '일진회'에 적대적이었다. 이완용은 귀족 출신인 반면 일진회를 이끄는 송병준은 낮은 신분 태생이었기 때문이다.


 

송병준은 '지금처럼 보호국으로 이도저도 아닌 어설픈 현상 보단, 합병을 하면 한국의 행정 정책이 성공적으로 이뤄질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일진회의 '이용구'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기본적으로 같은 동족'이라고 주장 했고 이것은 이후 수년 동안 일본이 한국 정복을 정당화할때 두고 두고 이용 되었다.
일부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반도인'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한국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한국인으로선 아주 모욕적인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한국을 점령하는 정당성에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았다.  한국은 군사적 약체였고, 근대화에서는 동아시아중 가장 뒤쳐져
있었다. 일본은 자신들이 내미는 근대 문명에 저항하는 한국에 당혹했으며, 그것을 전적으로 그들의 무지 탓으로 돌렸다. 
 
 

한국의 일본헌병을 대폭 증원한 데라우치 육군대신은 이렇게 말했다.
'미개한 사람들을 통제하는 데는 경찰보다 헌병이 간편하다.'
 
 
 

가혹한 의병진압이  1909년 9월 착수되었다. 많은 한국인이 오늘날까지 품고 있는 일본에 대한 강한 증오는
어쩌면 이 시기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1910년 8월 16일. 데라우치는 이완용에게 합병 조약에 관한 각서를 내밀었다.
한국의 이익을 약속하는 일본의 방침을 들은 후, 이완용은 두 가지를 요구했다.
1. 합병 후에도 계속 한국이라는 국호를 남길 것.
2. 한국 황제에게 왕의 칭호를 허용해달라.


 

이완용은 원래 합병을 환영했다. 그가 걱정한것은 국호와 왕이 보존되지 않으면 한국의 주체성이 사라진다는 점이었다.
이완용이 생각하는 합병이란, 오스트리아-헝가리처럼 양국이 독립국의 형식을 유지한 채 합병하는 것을 의미했다.
 
 
최종적으로 국호는 구칭 '조선'.. 황제는 '이왕 전하'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왕'이란 황족의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서구 열강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일본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고, 일본의 세력이 한국에 뻗치는 것을 지지했다.
 
 
한국에게 번영을 가져다 준다는 일본정부의 공언을 순진하게 믿었던 일본인들은 깨달아야 했다.
일본의 한국 지배는 대륙을 향한 다음 단계 침략을 위한 도약대 기능 말고는 한국에 관심을 기울인 흔적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합병 조약에서는 왕과 귀족의 우대가 강조되었다. 일본은 상류 계급이 만족하는 한 무지한 국민이 불만을 가진다 한들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이와 비슷한 태도는 인도에 대한 영국의 지배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다.
 
 
 

머지 않아 단순한 '왕'이 될 순종 황제는 쇠약 장애를 가졌고 치아가 없었으며 회복 가능성도 없었다.
황제는 밤낮으로 걱정 하며 노력했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상황을 수습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전부터 동양평화와 한국인의 생활을 보전할거라고 신뢰해 온 '메이지 덴노(천황)'에게 맡기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다.
 
 

순종 황제는 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번잡스럽게 소요를 일으키지 말고 차분히 생업에 열중하라. 동시에 일본 제국의 문명화에 복종해서 행복을 누리라.
짐이 오늘날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오로지 그대들 민중을 구하고 싶은 필사적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


 

일본에 유학중이던 한국의 황태자 '이은'은 더 이상 황태자의 칭호를 쓸 수 없었고, '창덕궁의 어린 왕자'라고 칭했다.
메이지 덴노는 난폭하고 소심한 자신의 아들 '요시히토'보다 훨씬 활발한 '이은'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매일 과자와 과일, 각종 장난감등의 선물을 보냈다.
 
 
메이지 덴노는 한국의 황제와 황족에게도 자주 선물을 보내며 예의를 다했다. 놀라운 동양의 예절이다.
그러나 메이지는 합병이 장차 한국의 군주제를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할 것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초대 총독이 된 데라우치는 한국의 연호 '융희'의 사용을 금하고 일본 황제의 연호 '메이지'를 따르게 했다.
조선 왕조가 500년 이상 사용한 '한성'은 '경성'으로 개명했다.  합병 초기 단계부터 벌써 조선인의 국가 의식을 파괴하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 특히 상류 계급의 한국인들은 행정의 효율이 좋아지고, 일본 통치하에서 그들의 안전이 증진한 데 감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 대다수는 외국인의 통치하에서 매우 불행했다. 일본은 한국인을 열등한 자로 취급하며 ..
나중에는 한국인의 국어와 이름까지 뺏으려 했다. 
  

일본인 대다수는 일본이 대만,사할린,한국까지 통치하에 둔 것을 기뻐하고 자랑으로 여겼다.
일본은 극동에서 홍콩과 두세개의 중국 항구밖에 소유못한 영국,인도차이나에서 더 진출하지 못하는 프랑스, 그리고
필리핀 통치로 골머리를 싸매는 미국보다 더 큰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당시의 일본인 거의 모두가 식민주의가 그 희생자뿐 아니라 당사자에게까지 해독을 미칠것이라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목차고리 :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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