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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7-06-26
 제목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
 주제어  민비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조선 고종의 황후로서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성은 민씨(閔氏)이다. 여주(驪州) 출생으로 증(贈) 영의정 치록(致祿)의 외동딸이다. 9세 때 고아가 되어 본가에서 가난하게 자라다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부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에 간택 ·책봉되었다. 그러나 금실이 좋지 못했고, 더구나 궁인 이씨에게서 완화군(完和君)이 출생하자 이를 기뻐하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불만과 질투가 폭발하여 흥선대원군 반대파를 규합, 민씨 척족을 정부 요직에 앉히고 세력 기반을 착실히 다져 나갔다.


  점차 고종의 애정도 독점하여, 1871년 원자(元子)를 낳았으나 5일 만에 죽자, 흥선대원군이 진상한 산삼(山蔘) 때문이라고 단정, 더욱 증오심에 불탔다. 1873년 일본에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어 내외정세가 긴박해지고, 경복궁(景福宮) 중건으로 민생고(民生苦)가 가중되는 등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이 계속되자, 그를 탄핵하기 위해 유림(儒林)의 거두 최익현(崔益鉉)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였다. 사실 명성황후의 배후에는 민승호 등 여흥민씨 삼방파(三房派) 세력을 비롯해 조대비(趙大妃)를 중심으로 한 풍양조씨(豊壤趙氏) 세력, 대원군에게 무시된 대원군 문중 내부의 세력, 그리고 대원군 정책에 반대하는 유림세력 등 노론을 중심으로 하는 반(反)대원군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대원군이 당쟁을 근절한다는 명분 아래 등용한 남인 중심의 세력과 정치적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이어 흥선대원군파의 반대 상소와 모든 주장을 배척하고, 고종에게 친정(親政)을 선포하게 하여 민씨의 외척정권이 수립되었다. 결국 대원군파를 숙청하고 쇄국정책을 폐하여 일본과 수교하였다.

 

 

  먼저 개화사상가인 박규수(朴珪壽)를 우의정에 등용하고, 대원군 집권 당시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과 부산훈도 안동준(安東晙), 경상도관찰사 김세호(金世鎬)를 차례로 파면·유배했다. 개화를 위해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삼군부(三軍府)를 폐지했으며,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일본과 청에 파견하여 신식무기·공업 등을 학습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조선책략〉의 연미론(聯美論)이 유포되자 1881년 김윤식이 영선사로 청에 갈 때 밀명을 내려 청에 한미수교를 주선해 줄 것을 요청했고, 또한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을 일본에 보내어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에게 대미수교의 주선을 요청하기도 했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궁궐을 탈출, 화개동(花開洞) 윤태준(尹泰駿) 집을 거쳐 충주(忠州) ·장호원(長湖院)으로 전전하며 충주목사 민응식(閔應植 ; 1844~?)의 집에서 피신생활을 하던 중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전의 국상(國喪)이 선포되나, 윤태준을 고종에게 밀파하여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고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결국 청의 텐진에 가있던 영선사 김윤식(金允植)을 통하여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군란이 진압되자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해 가도록 공작하고, 민씨정권을 재수립하였다. 점차 정권을 농단하여 대원군파에 대한 복수에 열중하고, 무당을 궁궐에 끌어들여 굿을 하며 명산대천을 찾아 치성한다는 명목으로 국고를 탕진하는 등, 민씨 일족의 부패상은 극도에 달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민씨 일족이 실각하자 심상훈(沈相薰) 등을 사주(使嗾), 청나라의 개입으로 개화당(開化黨)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일본세력의 침투로 김홍집(金弘集) 등의 친일(親日) 내각이 득세하고, 1894년 흥선대원군의 재등장으로 갑오경장(甲午更張)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 공사(公使) 미우라고로[三浦梧樓]가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8월 2일 일본 깡패를 궁중에 침입시켜서 건청궁(乾淸宮)에서 그녀를 난자시해(亂刺弑害)하고 시신은 궁궐 밖으로 운반 소각하였다. 그 뒤 그녀는 폐위되어 서인(庶人)이 되었다

  즉, 미우라고로[三浦梧樓]는 일본인 아다치[安達謙藏]가 경영하는 한성신보사(漢城新報社)의 수십 명의 일인 낭인, 일본 수비대와 거류지 담당 경찰관들을 하수인으로 고용하고, 훈련대 간부 우범선(禹範善)·이두황(李斗璜)·이진호(李軫鎬) 등 친일파들도 포섭했다. 훈련대의 해산으로 다급해진 미우라 등은 민비제거 예정일이었던 8월 22일을 앞당겨 8월 20일 새벽에 행동을 개시했다. 일인들은 우선 대원군에게 가서 고유문(告諭文)을 결재받고, 서대문에서 훈련대 병사들과 합류하여 광화문에 도착했다. 여기서 폭도들은 훈련대연대장 홍계훈(洪啓薰)을 죽이고, 왕궁을 호위하던 다이 지휘하의 시위대들과 교전하여 패배시켰다. 폭도들은 고종과 민비의 침소인 건청궁(乾淸宮)에 난입하여 고종에게 미리 준비한 왕비의 폐출조서(廢黜詔書)에 서명을 강요하며 위협했다.

 

 그러나 고종이 이를 거부하자 왕세자에게 칼을 휘두르는 등 극악한 만행을 저질렀다. 이어 궁내부대신 이경직(李景稙)을 살해한 뒤, 옥호루(玉壺樓)에서 민비를 무참하게 학살했을 뿐만 아니라 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신을 화장하는 야만적 행동을 저질렀다. 이후 대원군을 고종과 대면시켜 미리 준비한 조칙 3개안을 재가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왕비학살을 일본인들이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위장처리방안을 세웠는데 그 내용은 "이번 사건은 훈련대와 대원군이 결탁하여 행한 쿠데타이며, 일본군은 고종의 요청에 의해 출동하여 훈련대와 시위대의 싸움을 진압했고, 민비시해는 아는 바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친일적인 김홍집 내각을 세운 다음, 8월 22일 민비의 폐위조칙을 위장 발표했다. 그러나 고종, 러시아인 사바틴, 미국인 다이 등 목격자가 많아 사건의 은폐에 실패했다. 만행을 목격한 외국인들은 외교관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폭로했고, 이에 미국공사대리 앨런과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각각 군병들을 동원하여 시위를 하는 한편, 각국 공사의 회합 후 일본의 관여사실과 폐위 조치 불인정 등을 발표했다.

 

  1895년 10월 복호(復號)되고, 1897년(광무 1)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그해 11월 국장(國葬)으로 청량리(淸凉里) 밖 홍릉(洪陵)에 장사지냈다. 원래는 경기도 양주 숙릉(肅陵)에 묻혔는데, 1897년 11월 청량리 홍릉(洪陵)으로 이장되었다. 1919년 고종이 죽은 뒤 다시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 홍릉으로 이장되었다.

 

두산대백과사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참고


명성황후는 누구인가?

 

 명성황후는 1851년 여흥 민씨 여성부원군 민치록(閔致祿)의 딸로 태어났다. 여흥 민씨는 제3대 태종의 왕비 원경황후, 제19대 숙종의 왕비 인현황후를 배출한 명문가지만 당시에는 몰락한 상태였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8세때 부모를 여의고 고향 여주를 떠나 서울 친척집에서 자랐으며,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책을 열심히 읽었다는 것말고는 말이다. 물론 이러한 이유로 왕비에 간택이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1864년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이 되자 섭정으로 권력을 장악한 대원군 이하응은 부패의 온상인 안동 김씨 일족의 세도정치를 뿌리뽑고 이름뿐인 왕권을 강화하여 봉건왕조를 바로 세우기 위해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그래서 순조, 헌종, 철종 3대 60년 간의 세도정의의 폐단을 시정하려 하였기에 일부러 한미(寒微-구차하고 지체가 변변하지 못함:아! 이 얼마나 친절하고 자상한 설명인가..) 집안의 고아소녀를 며느리로 맞아들이게 된 것이다. 1876년 고종의 나이 15세, 민소녀의 나이 16세 때의 일이었다. 민 소녀는 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혈족이다.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사이가 갈라진 것은 궁녀 이씨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 완화군(完和君)에 대한 대원군의 편애와 세자책립공작 때문이었다. 물론 그 배후에는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노론의 세력과 새로 등용된 남인과 일부 북인을 중심으로 한 세력 간의 갈등이 작용했다. 1871년 11월, 드디어 첫아들이 태어났으나 며칠만에 죽고 만다. 3년후, 두 번째 아들 척(拓 : 나중의 순종)이 태어났다.
 그후 대원군의 정적인 안동 김씨와 장자 재면과 형 이최웅 세력 및 유림 세력과 결탁하여 1873년 유생 최익현이 서원을 철폐하고 양반에게 세금을 내게 한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자 이를 계기로 대원군을 실각시키고 고종의 친정(親政)을 선포케 했다. 그런 다음 민승호, 민규호 등 민씨 일족을 대거 등용하여 요직에 앉혔다. 물론 말이 고종의 친정이지 실제 권력은 명성황후로부터 나오게 되었다. 이로써 10년여 걸친 대원군의 세도정치 혁파정책은 물거품이 되고, 이후 을미사변까지 약 20년 동안 조선은 민씨 집권기를 맞았다. 그 민씨 세력의 정점에 명성황후가 앉아 있었다.  
누가 명성황후를 시해했는가?
 현재 학계에서 나오는 견해는 대원군과 훈련대 주모설, 미우라 주모설, 이노우에 가오루 주모설로 대별된다고 할 수 있다. 대원군과 훈련대 주모설은 대부분 일본 역사가들의 입장으로 일본의 책임회피 및 사건은폐의 의도로 주장된 것이다. 또한 대원군이 명성황후 시해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미우라 주모설 역시 당시 일본 공사였던 미우라의 사건 개입여부가 누가 보더라도 자명해진 상태에서 미우라의 개인적인 공명심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함으로써 그 배후에 대한 인식을 흐리게 하고 일본의 사건 배후조작설을 강하게 부인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노우에 주모설은 실제로 범죄를 실행한 미우라의 범행동기의 허구성을 밝히고 일본정부를 배후로 이노우에와 미우라의 공모에 의해서 명성황후가 시해됐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대원군은 일본정부의 사건은폐 및 조작을 위해 동원된 허수아비에 불과하고 미우라도 일본의 대한정책의 변화에 따라 실행에 옮긴 청부 살인업자일 뿐이며 실제로는 일본정부의 강력한 후원하게 있었던 이노우에가 주모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이노우에 주모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우선 미우라가 조선공사로 부임(9월1일)한지 37일 만에 사건이 일어났고, 특히 이노우에가 외교관례를 무시하고 공사관에서 17일간이나 함께 있으면서 업무를 인계하고 조선을 떠난지 20일만에 사건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미우라는 일본 예비역 육군중장으로 조선문제에 전혀 관여한 적도 없었는데, 이러한 그가 조선사정을 제대로 익힐 겨를도 없이 37일 만에 민비시해라는 국운이 걸린 사건을 계획부터 실행까지 독단적으로 주모하였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시해를 위한 세부계획이 이노우에가 조선을 떠난 직후부터 가시화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미우라는 이노우에의 정책을 수해한 종범 내지는 현지 행동책임자에 불과하고, 주모자는 어디까지나 이노우에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럼 구체적인 시해의 과정을 살펴보자.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새벽 5시 30분 경에 일본인의 공격에 조선인 훈련대 대장 홍계훈이 광화문에서 사망한다. 이에 미국인 다이(Dye)는 시위대 3-4백명을 급히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길에 배치했다. 갑자기 신무문으로부터 대여섯 차레 일제사격이 가해졌다. 시위대 군사들은 응사 한번 제대로 못한 채 흩어졌다.
 궁궐침입에 성공한 일본인들은 곧장 왕비의 거처인 곤녕합(坤寧閤)으로 향했다. 곤녕합에 딸린 옥호루(玉壺樓)에 뛰어든 일본인들은 궁녀들을 마구 끌어냈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달려와 실내에서 왕비를 보호해보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왕비는 처참하게 폭도들의 칼에 맞아 쓰러졌으며, 3명의 궁녀와 이경직도 역시 희생되었다. 살해에 참여했던 낭인배들은 궁녀와 왕태자 이탁을 통해 왕비의 시신을 확인하기도 하였는데, 이 과정이 있기 직전에 시신에 대해 시간(屍姦)의 흉행도 서슴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본래 미우라의 계획은 왕비를 제거하되 대원군을 그 주모자로 내세운다. 왕비의 명에 의해 해산될 예정인 조선인 훈련대를 시해범으로 꾸민다. 거사일은 10월 10일 새벽 4시 30분 으로 하는 것이 었다. 거사일은 10월 10일 새벽 4시 30분 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훈련대 해산이 예상보다 앞당겨져 10월 7일로 결정되자, 미우라는 급히 새벽에 거사를 일으킨 것이다.
 각본에 따라 대원군을 궁궐로 데려오기 위해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가 이끄는 무장한 일본인 30여명이 대원군이 사는 공덕리에 도착한 것은 7일 자정께, 대원군이 집을 나선 것은 이로부터 세 시간이 넘은 8일 새벽 3시 30분경이다.
 대원군을 끌어내는데 너무 시간을 지체하고 또 일본인 수비대와 합류하기 위해 1시간 반 이상을 더 기다린 탓에 어둠 속에서 완전범죄로 해치우려던 왕비 시해 계획은 어슴푸레한 새벽녘에 이루어졌고 목격자들이 많이 생겼다.
 때문에 미우라는 '대원군과 훈련대 주모'라는 처음의 주장을 '일본인이 가담했다 해도 이는 자신과 일본 정부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로 바꾸고 그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짓기 위해 외교채널과 언론을 총동원했다.  강경한 태도로 진상규명을 요구하던 미국, 러시아, 영국 등 각국 공사들도 일본과의 관계악화를 우려하는 본국정부의 방침에 따라 차츰 침묵을 지키게 되었다.
 10월말 일본은 미우라 공사를 비롯한 사건 관계자 47명을 소환하여 재판에 부쳤다. 국제여론을 의식한 때문이기도 하고 사건이 더 확대되기 전에 당사자들을 철수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이듬해 1월 히로시마에서 열린 재판에서 이들은 증거불충분으로 전원 석방되었다. 이로써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영원한 미제가 되어 역사 속으로 사려진 것이다.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이유
 1894년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전리품으로 청나라로부터 요동반도를 빼앗았다. 그러자 극동에서 남하정책을 펴던 러시아가 일본의 팽창을 염려하여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요동반도를 청에 돌려주라고 압력을 넣었다. 이른바 '삼국간겁'이다. 1895년 5월 초순의 일이다.
 소식을 듣고 가장 기뻐한 사람은 명성황후였다. 명성황후는 고종과 자신을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입헌군주로 만들려는 일본의 계획에 반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청일 전쟁 후 막강 해진 일본의 세력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왕실과 세자가 없다면 부녀자의 몸으로 정치에 관여하며 척신을 기용할 이유가 있겠는가? 귀하의 진언을 믿고 금후로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주한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약속한 뒤였다.
 이런 명성황후에게 삼국간섭의 소식은 가뭄 끝의 단비처럼 달고 시원했다. 그는 청나라가 조선에서 손 뗀 지금, 자신이 의지할 곳은 간섭을 주도한 러시아뿐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즉시 정치활동을 재개하여 박정양, 이범진, 이완용을 중심으로 하는 친러내각을 출범시키고 은신중이던 민영환을 비롯해 민씩 척족 16인을 불러들였다. 1895년 7월의 일이다.
 곧이어 명성황후는 1894년 6월 이후 일본이 적극 지원해 온 조선의 내정개혁(갑오개혁)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칙령 제1호를 공표하여 관복을 옛날식으로 환원시켰으며, 친일인사를 모두 내쫓고 친미,친러파로 자리를 채웠다. 그리고 일본군 휘하에 들어 있는 훈련대를 해산시키고자 했다. 이같은 일련의 조치는 일본의 조선 보호국화 계획에 중대한 차질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일본은 조선과 러시아가 가까워지는 것을 막으려 했다. 청나라는 싸워 이겼지만 러시아와 일전을 치르기엔 아직 역부족이라고 판단한 일본은 '친러'의 중심인물인 명성황후를 제거 하기로 했다. 미우라는 이 중대한 임무를 띠고 신임 공사로서 9월 1일에 조선에 도착했고, 한 달 만인 10월 8일에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
 
명성황후를 정점으로 하는 민씨 일족이 집권한 1873년부터 1895년까지는 우리나라로서는 정말 중요한 시기였다. 밀려드는 서양열강, 뿌리부터 흔들 리는 봉건체제, 새로운 변화를 구하는 움직임. 이런 다양한 세력들이 얽히고 설키면서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혁명 같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대원군의 대응책이 '쇄국'이었던 반면에 명성황후의 대응책은 '문호개방'이었다. 명성황후는 1876년 일본과 맺은 병자수호조규를 시작으로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과 차례로 수교를 맺었다. 명성황후에게 서양 열강과의 수교를 적국 권한 장본인은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이다. 조선에서 청의 기득권을 지키고 서양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의 독주를 막으려는 생각에서였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이른 바 이이제이(以已制已) 정책이다.
 혹자는 명성황후가 '탁월하고 명민한 판단력으로 서양 여러 나라와 동등한 입장에서 조약을 맺어 이이제이 정책을 씀으로써 일본을 견제했다'고 극찬한다. 그러니 외세를 끌어들여 자기 땅을 각축장으로 만드는 행위는 이이제이의 본뜻과 거리가 멀다. 뿐만 아니라 이때 조선이 서양과 맺은 조약이 명백한 불평등조약이었음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어찌 되었든 문호개방을 한 조선의 당면 과제는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루는 일이었다. 서양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과 산업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낡은 봉건제도를 허물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했다.
 명성황후와 민씨 정권은 이 중 어느 것 하나도 충실히 해내지 못했다. 그 결과 어느 세력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개화 반대를 외치며 임오군란에 참가한 군중은 명성황후를 공격의 표적으로 삼았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도, 동학농민군도 모두 명성황후와 민씨일족 타도를 외쳤다.
 아무의 지지도 받지 못한 명성황후는 외세에 의지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명성황후로 하여금 재집권케 해준 것은 청나라였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청에 원군을 청하였고 일본군의 상륙의 빌미를 제공, 그 결과 청일전쟁이 벌어지게 한 것은 바로 명성황후가 아닌가 한다.
 
참고자료 
한일관계사학회, [한국과일본 왜곡과 콤플렉스의 역사], 1998, 자작나무, 228-237.
박은봉, [한국사 뒷이야기], 1997, 실천문학사, 240-259.
1999.10.26

 

>> 연결고리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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