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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6-22
 제목  신미양요(辛未洋擾)
 주제어  [한국사] [천주교회사]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진행되던 고종 3년(1866) 7월, 프랑스 함대의 침약이 있기 직전에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며 소란을 피우다가, 평양 군민의 공격을 받아 침몰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를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라고 한다.

 

이 사건은 그 뒤 리델 신부를 통해 각국에 알려졌다. 미국은 즉시 베이징에 있는 미국 공사에게 훈령을 보내어 조선에 대해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고, 통상 조약을 맺을 것을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사진] 신미양요의 희생자 / 1871년(고종 8)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號)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강화도에 무력 침략한 사건으로,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가 차례로 함락되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전사자 3명이었고 조선군은 전사자 350명이었다.

 

미국은 고종 8년(1871)인 신미년 4월에 미국의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로 하여금 5척의 군함과 1230명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게 된다. 조선 정부는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격퇴한 이후, 서양 세력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방을 강화하고, 강화도 연안의 경비를 튼튼히 하고 있었다. 어재연 등이 이끄는 조선군은 광성진을 공격해 온 미군을 맞아 광성진과 갑곶 쪽에서 백병전까지 벌이는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광성진을 일시 점령하였던 미군은, 조선군민의 완강한 저항 때문에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마침내 40일 만에 우리나라에서 물러갔다. 이를 신미양요라 부른다.


신미양요

고종 8년(1871년) 미국의 아시아함대가 1866년 8월의 제너럴셔먼호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강화도에 쳐들어온 사건.

 

배경

미국은 1866년 8월 평양 대동강에서 있었던 제너럴셔먼호사건을 계기로 조선의 개항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제너럴셔먼호사건이 발생한 뒤에, 두 차례의 탐문항행을 실시하였는데, 이 사건의 응징, 손해배상청구, 조선과의 통상관계 수립을 위하여 조선원정 계획을 두 차례 세웠으나 계획으로 그쳤다.

 

진행

1871년 미국은 조선을 개항하기 위하여 조선원정을 결행하였다. 미국은 주청미국공사 로우(Law, F.F.)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는 해군함대를 동원하여 조선원정에 나섰다.

로저스는 기함 콜로라도호(Colorado)를 비롯하여 군함 5청, 수해병 1,230명, 함재대포 85문을 적재하고, 1871년 5월 초순 일본 나가사키에 함대를 집결하여 약 보름동안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한 뒤, 5월 16일 조선원정길을 떠났다.

로저스는 조선이 평화적 협상을 거부할 경우 무력시위와 함께 군사작전에 의해 강제로 협상을 진행시키겠다는 포함책략을 수립한 뒤 인천 앞바다에 침입하였다.

로저스는 서울로 가기 위한 수로를 탐색하려고 조선대표에게 강화해협을 탐측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한 뒤, 6월 1일 강화해협의 탐측항행을 강행하였다. 함대가 손돌목 에 이르자 강화의 남장포대 와 김포의 덕포포대 로 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조선과 미국은 최초로 군사적 충돌이 벌어졌는데, 이를 손돌목포격사건이라 한다.

손돌목포격사건 직후 미국대표는 조선측에게 평화적으로 탐측활동을 벌이고 있는 미군함대에 대한 포격은 비인도적 야만행위라고 비난하면서,
- 조선대표를 파견해서 협상할 것
- 포격사건에 대한 사죄 및 손해배상을 해줄 것
만일 이 요구조건을 거부하면 10일 후에 보복상륙작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하였다.

조선측은 강화해협은 국가 안보상 가장 중요한 수로이기 때문에 미군함대가 조선당국의 정식 허락없이 항행하는 것은 주권침해이며, 영토침략행위라고 규탄하면서 협상을 거부하였다.

협상이 결렬되자, 미국은 6월 10일 초지진 에 상륙작전을 실시하였다. 10개 중대로 상륙군을 편성하고, 포병대, 공병대, 의무대, 사진촬영반 등을 동원하였다. 미국은 해상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초토화시킨 뒤 수륙양면공격으로 초지진을 점령하였다.

이어서 6월 11일에는 덕진진을 무혈점거하였고, 이어서 광성보 전투가 이어졌다. 광성보에는 진무중군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수비병 600여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미군이 광성보에 대한 수륙양면포격을 한 시간 동안이나 벌인 끝에 광성보는 함락되었다. 조선군은 수자기를 빼앗겼으며, 미군은 광성보에 성조기를 게양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전사 350명, 부상 20명이었고 미군은 전사 3명 부상 10명이었다.

 

경과

미국의 강화도 침략은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었다. 다만,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의도는 없었다는 것이 다른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전쟁과는 다르다. 미국은 조선을 무력적으로 굴복시켜 개항을 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침략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이양정책을 이기지 못하여 조선 개항을 단념하고 7월 3일 함대를 철수한다. 조선은 미국함대의 철수가 미국이 패하여 돌아간 것으로 간주하였고, 더욱 문을 굳게 닫게 된다.

 

미국이 실패한 요인

미국은 처음부터 무력으로 조선을 굴복시키려 하였다.
- 외국배의 출입이 금지된 강화해협을 허가없이 미군함대가 들어온 것은 주권침해이며 영토 침략행위였다.

문화적 배경의 차이에 대한 상호이해가 부족하였다.
- 조선은 미국을 오랑캐로 간주하였고,
- 미국은 백인우월감으로 조선을 호전적 야만국으로 간주하였다.

조선은 아직 개항여건이 조성되지 못한 상태였다.
- 조선은 교역항구가 없었다.
- 양반 지도층은 개항이 곧 망국이라고 생각하여 쇄국정책을 고수하였다.

청은 조선이 개항하면 종주권을 잃을까 우려했다.
- 청은 조선이 쇄국정책을 지켜서 청나라의 조공국으로 남길 바랐다.

 

결과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흥선대원군은 신미양요 이후 전국의 각 지역에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여도 싸우지 않는것은 나라를 파는것"이라는 척화비를 세워 쇄국양이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 참고고리 : 1871년 사진

>> 연결고리 : 한국사, 천주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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