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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6-22
 제목  병인양요(丙寅洋擾)
 주제어  [한국사] [천주교회사]
 자료출처  김인호 교수  성경본문  
 내용

개관

 

● 고종 3년(1866년)에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사건인 병인박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침입한 사건.

 

배경

 

● 1866년초에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리고 프랑스신부와 조선인 천주교신자 수천명을 학살하였는데 이를 병인박해 또는 병인사옥이라 한다.

 

● 프랑스 선교사는 12명 중 9명이 잡혀 처형되었으며, 3명은 화를 면하였는데, 그 중 리델(Ridel) 신부는 중국으로 탈출하여 주중 프랑스 함대 사령관 로즈[Roze, P.G. 로세(魯勢)]에게 박해소식을 전하면서 보복원정을 촉구했다. 이에 로즈가 대함대를 이끌고 침입하였다.

 

● 프랑스 공사 벨로네[Bellonett, H.D., 백락내(伯洛內)]는 "조선은 사전에 청국의 승인을 받고 병인박해를 단행하였으므로 청국은 병인사옥의 공범자"라고 청국정부를 규탄하면서, 조선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고 로즈제독에게 조선에 응징원정을 결행할 것을 명하였다.

 

[사진] 옥천 척화비 /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삼양리 산4-2. 충북 기념물 제6호. 흥선대원군이 서구열강의 무력에 의한 통상교섭을 거절하고 쇄국정책의 일환으로 서울과 전국 교통 요충지에 세웠던 비석 중의 하나이다.

 

● 그러나 청국은 조선은 중국의 조공국(朝貢國)이지만 정치적으로 독립국가이며, 공범은 사실 무근이라고 하면서 거병(擧兵)을 강력히 항의하였다.

 

● 이에 프랑스는 조선과 수교관계가 없다는 점과 조선은 정치적 독립국가라는 점 등을 들어 프랑스정부의 직접 개입 없이 현지사령관인 로즈의 주재하에 군사적 응징원정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차 원정

 

● 로즈의 제1차 원정은 강화해협을 중심으로 한양까지의 수로를 탐사하기 위한 예비적 탐사원정이었다.

 

● 로즈는 군함 3척을 이끌고 9월 18일부터 10월1일까지 한양의 양화진(楊花津), 서강(西江)까지 올라와서 세밀한 지세정찰과 수로탐사를 한 끝에 지도 3장을 만들어 돌아갔다.

 

2차 원정

 

● 로즈는 10월 5일에 한강 봉쇄를 선언하고, 10월 11일에 제2차 조선원정길에 올랐다. 군함 7척, 함재대포 10문, 총병력 1,000명 향도 및 수로 안내인으로 리델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 최선일(崔善一), 최인서(崔仁瑞), 심순여(沈順汝) 등 3명을 대동하고 강화도로 내침하였다.

 

● 10월 16일에 강화부를 점령하고, "우리는 자비로운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우리 동포 형제를 학살한 자를 처벌하러 조선에 왔다." 라는 내용의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또, "조선이 선교사 9명을 학살하였으니, 조선인 9,000명을 죽이겠다."는 강경한 응징보복을 밝혔다.

 

● 강화도 수비에 실패하여 사태가 위급하게 되자, 정부는 순무영(巡撫營)을 설치, 대장에 이경하(李景夏), 중군에 이용희(李容熙), 천총(千總)에 양헌수를 임명하고, 출정하게 하였다.

 

● 양헌수는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있다가 천총(千總)에 임명되어, 대군을 이끌고 통진부(通津府)에 진을 치고, 강화도 수복계획을 구상하였다.

 

●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10월 26일에 문수산성 전투에서 조선군을 압도하였다. 프랑스군이 가진 총포의 화력을 당해낼 수 없어 강화도의 관리, 군인, 백성이 모두 피난갔으므로 강화도는 프랑스군의 독무대가 되었다.

 

정족산성 전투

 

정족산성 동문

 

● 이 때, 양헌수는 화력면에서 절대열세인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제압하는데는 기병작전(奇兵作戰)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어융방략(禦戎方略)으로써 강화도를 수복할 계획을 세웠다.

 

● 양헌수의 군대 549명이 덕포에서 프랑스군에 들키지 않고 한밤중에 잠도작전(潛渡作戰)으로 강화해협을 건너 11월 7일 정족산성을 점거하고 농성하였다. 양헌수는 정족진을 결성한 뒤, 남문에는 초관(哨官) 김기명(金沂明) 지휘하에 포수 161명, 동문에는 초관(哨官) 이렴(李濂) 지휘하에 포수 150명, 서문과 북문에는 초관(哨官) 이대흥(李大興) 지휘하에 경군(京軍) 및 향군(鄕軍) 157명을 배치, 매복하게 하고 프랑스 군의 내습을 기다렸다.

 

● 조선군이 강화해협을 건너 정족산성에서 농성을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로즈는 올리비에(Ollivier) 대령에게 정족산성 공격을 명하였다.

 

● 11월 9일 올리비에는 160명의 분견대를 이끌고, 야포없이 경무장한 채 정족산성 공략에 나섰다. 조선군이 동문과 남문으로 쳐들어오는 프랑스군에게 일제히 포격을 가함으로써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 정족산성에서의 접전결과 프랑스군은 전사자 6명을 포함하여 60여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나,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자 1명 부상자 4명 뿐이었다.

 

정족산성 승리의 의미

 

● 첫째, 화력면에서 열세인 조선군이 연전 연패를 하다가, 양헌수의 뛰어난 전략에 의하여 근대식 병기로 장비한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양헌수 장군

 

● 둘째, 정족산성의 패전을 계기로 로즈함대는 원정을 포기하고 강화도를 철수하였다.

 

● 프랑스군은 10월 14일 상륙이래 거의 한달 동안 강화도를 점거하였으나,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로하여, 야포를 동원하여 정족산성을 재 공략할 수 있었으나, 이를 포기하고 11월 10일 함대를 철수하였다.

 

● 이 싸움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구 제국주의 침략세력을 격퇴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문화재 약탈

 

●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철수할 때, 외규장각 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등의 문화재를 약탈해갔다.

 

● 프랑스는 이때 약탈한 외규장각 도서를 대여 형식으로 돌려주기로 약속하였으나, 현재까지 돌려주지 않고 있다.

 

프랑스의 원정 실패

 

● 로즈의 조선 원정은 11월 21일 제2차원정이 끝날 때까지 무려 2개월에 걸친 장기 원정이었다.

 

● 원정을 끝내고 청국으로 돌아간 로즈는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적 보복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사 벨로네를 비롯한 북경의 모든 외교관들은 그의 원정을 실패로 간주하였다.

 

그 이유는,

 

● 첫째, 외교적 견지에서 보면, 수교관계가 없는 조선으로 가서 조선개항을 위해 입약협상(立約協商) 조차 벌이지 못한 채 돌아왔다는 것,

 

● 둘째, 군사적 견지에서 보면, 정족산성에서의 패전 직후 곧 함대를 철수하였다는 것,

 

● 셋째, 종교적 견지에서 보면, 조선원정의 지상목표가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보복인데, 보복은 커녕 오히려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박해와 쇄국정책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 그런데 프랑스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 원정을 성공이라고 간주하였다.

 

● 그 근거로는 1867년 3월에 미국정부가, 미국은 제너럴셔먼호사건 프랑스는 병인사옥으로 인하여 피해를 보았으니 대조선미불공동원정을 제의하였을 때, 프랑스 정부는 이미 조선원정을 통해 응징보복하였기 때문에 새삼스러이 공동원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거절한 것이 있다.

 

 

자료출처 : 강화도닷컴


“만약 대원군의 노력이 위엄이 있지 않았다면 개화를 막고 전통을 고수할 수는 없을 것이고, 만약 대원군이 아니었다면 후일 또한 옛것을 고집하면서 개화로 나아가는 일이 어려웠을 것이다.”[근세조선정감 (近世朝鮮政鑑)]

병인양요하면 대체로 1866년 프랑스 육전대가 강화도에 쳐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면서 온갖 노략질을 다하고, 그것도 모자라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마저 강탈해간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을 단연 대원군 정권의 천주교 탄압이나 쇄국정책에서 찾고 있다. 과연 그럴까?

물론 일정하게 천주교 문제와 병인양요는 관련이 있다. 천주교는 대원군의 집정 이전에 이미 유교적 전통에 반항하는 사교로 규정되어 순조 원년(1801)의 신유사옥, 헌종 5년(1839)의 기해사옥과 같은 박해를 받았다. 그래도 철종 재위 때에는 리델(Redel)을 비롯한 프랑스 신부 12명이 입국해 전도를 시작하면서 천주교는 다시 활기를 띠었다.

 

그 결과 고종 원년(1964)에는 2만을 상회하는 교도가 확보됐다. 대원군은 불우한 시절에 남인계 인사들과의 친분으로 천주교를 알고 있었고 그의 부인이나 고종의 유모도 천주교를 믿거나 영세를 받았기에 처음에는 무척 천주교에 관대했다.

실제로 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를 알아차리고 이를 저지하려는 방도로 천주교를 이용하기로 작정하고 그 대가로 포교의 자유를 인정하려 했다. 이에 남종삼 등으로 하여금 베르누(Berneux) 주교에게 간접적으로 교섭해 프랑스 세력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타협을 거부했고, 남종삼조차 대원군을 배신함으로써 대원군은 영상 조두순 등의 배외정책에 이끌려 천주교도를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이것이 고종 3년(1866)의 병인사옥이다. 이로 인해 9명의 프랑스 선교사 및 수천 명의 국내 신도가 처형됐다.

 

이처럼 천주교를 탄압하고 쇄국정책을 표방하자, 대원군과 평화적인 교섭과 통상개국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프랑스는 무력을 통해 통상관계를 맺으려 했다. 이에 병인사옥이 도화선이 되어 프랑스와 병인양요가 일어났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대체로 이상의 구도로 병인양요를 바라보지만, 정작 병인양요(조불전쟁)의 원인은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인삼이었다.

 

오늘날도 우리 인삼은 세계에서 각광을 받는 중요한 수출품이고, 일찍이 고려 태조 때 증포소를 만들어 홍삼을 제조한 이래, 홍삼은 각종 질병을 치유하고 원기를 돋게 하는 중요한 약재로 사용됐다. 난데없이 병인양요라는 전쟁과 인삼은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 경영에 이어 동남아 일대에서 인삼교역권을 독점하면서 대량으로 중국산 인삼을 팔아 막대한 이윤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당시 대원군이 이러한 프랑스의 인삼독점권을 위협하면서 고려인삼의 동남아 진출을 확대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재원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군사력을 육성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한 인삼 장사는 어쩌면 대원군이 정권을 잡기 전에 시장통에서 전전긍긍하던 시절 장돌뱅이들과의 교분 속에서 배운 것으로 추정된다.

품질 좋고 약효 좋은 고려인삼이 동남아로 진출하면서 프랑스의 인삼 독점권은 크게 위협 당했고, 인삼교역을 둘러싼 이윤의 감소는 프랑스에게 조선이 곱지 않게 보이는 빌미가 됐다. 급기야 프랑스 선교사 9명이 처형당하는 병인사옥을 핑계로 잠식당하는 인삼시장에 대한 대대적인 복구에 나선 것이 바로 병인양요이다.
    

전쟁의 경과를 보면,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 P.G 로즈가 프랑스 선교사 살해의 책임을 묻는다는 명분으로 일단 1866년 10월 11일 약 병력 1000명·군함 7척·대포 10문과 리델신부를 대동하고 강화도로 침략했다.
강화도가 함락되자 대원군은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하고 이경하를 대장으로 하여 이용희, 양헌수를 출진시켰다. 문수산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패하자 프랑스 군대는 크게 고무됐고, 그러한 의기양양한 모습에서 허점을 발견한 양헌수는 군대를 이끌고 덕포에서 비밀리에 강화해협을 넘어 정족산성을 점거했다.

 

조선군이 정족산성에 도달하자, 11월 9일 올리비에 대령이 이끈 프랑스 육전대와 정족산성에서 전투를 벌였고, 전투의 결과 프랑스군은 전사자 6명을 포함해 60∼7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조선군은 전사자 1명, 부상자 4명이 나왔다.

재래식 무기를 무장한 조선군이 당대 나폴레옹 3세가 이끄는 세계 최고의 육전대를 격파한 사건은 실로 서구 제국주의에 투쟁한 자랑스러운 조선의 승리였다. 프랑스군대는 패배의 쓴잔을 마신 후, 철저히 강화도의 문화유적을 파헤치고 문화재를 반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대체로 이러한 경과로 한 달간의 전투는 조선측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 전쟁은 대원군의 쇄국양이정책을 더욱 강화하고, 서구의 약탈적 모습을 조선 민중의 가슴에 심기에 충분했으며, 이후 조선이 반서구, 반개항의 움직임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그런데 정작 대원군은 그러한 프랑스와 전쟁을 정치적으로 쇄국을 이끄는 단서로 제공하면서도 일면 동남아 일대는 물론 북경 지역에까지 인삼교역을 확대하는 등 적극적으로 경제적 측면에서의 실용주의 노선을 채택했다.
늘 대원군하면 쇄국정책의 수호자로 알고 있고, 고루하고 시세에 뒤지는 고집불통의 늙은 정객 정도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봉건적인 체제를 유지하려는 것이지만 그 안에는 왕권강화를 통한 절대주의적 국가건설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시장통에서의 경험을 살려 중상주의적 무역활동을 전개해 억상말본의 논리를 스스로 붕괴시킴으로써 봉건적인 것과 결별하는 자세를 보였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군사력을 육성해 외적을 몰아내고자 했고, 그 힘이 민중의 정서와 맞아 들어가 병인양요는 물론 신미양요 등 두 차례의 양요를 승리로 마감했다. 그것은 바로 절대주의를 향한 움직임의 일부였던 것이다.
알고 보면 역사는 참으로 묘한 것이다. 늘 우리가 믿고 있는 진실이 모두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늘 대장금처럼 착하거나 원균처럼 용감한 사람이 승리하는 것 같지만, 정작 진정 역사적인 위인들은 집념이 강하고 독선적이었다.

그렇지만 정작 차이가 나는 것은 수많은 욕을 얻어먹어도 기존에 있는 것만 지키려고 고루하거나 고집을 부렸던 것은 아니었다. 집념과 독선이 강하더라도 비록 그것이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하더라도 정당한 역사적 진행 방향과 함께 할 때 영웅이 있었다. 그 안에는 대원군이 있었고, 이순신 장군도 있었다.

 

한국사회에 하나의 병폐가 있다면 그것은 잘못을 보고도 주위의 눈치를 보고, 복지부동하면서 자기만의 안일을 위해 숨죽이는 사람이 오히려 귀여움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저 조용하게 문제없이 눈에 띄지 않게 숨죽이고 사는 것, 적절히 아부하면서 시세에 영합하여 자신의 안일에 누가 안되는 범위에서 일하는 것이 무척 오랫동안 전승된 소인들의 처세술이다.

그래서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어도 그저 편한 눈웃음으로 상대에게 평화를 주는 사람에게 기회는 더욱 커진다는 것이다.

대원군은 바로 그러한 복지부동한 조선의 고질병을 은근히 바꾸려던 사람이었다. 그가 추진한 쇄국정책은 어쩌면 개혁에서 오는 진통을 노련한 쇄국의 언술로 뒤집어 여론의 화살을 피해간 것일 수도 있다. 그 덕분에 조선은 한동안 서구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됐다.


글: 김인호 교수
출처: 침략과 패권의 역사

 

 

 

>> 참고고리 : 병인박해

>> 연결고리 : 한국사, 천주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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