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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6-08
 제목  총회 성장과 민주화 운동(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역사)
 주제어  [장로교] [한국 교회사] [민주화 운동]
 자료출처  예장통합총회  성경본문  
 내용

총회 성장과 민주화 운동

 

 

한국교회의 성장은 6.25 전쟁을 통해서 이북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수 많은 목회자와 일반 신도들이 월남하면서 남한 교회의 성장에 밑거름이 됐다. 여기에 6.25 전쟁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에 의해 엄청난 교회 손실과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6.25 전쟁이 휴전으로 성립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정말중에 있었지만 팝 피얼스 빌리 그레함 전도자들의 대대적인 부흥운동을 일으키면서 교회는 더욱 자리를 굳게 잡아 갔었으며 여기에 교파 분열로 자파의 교세를 확장키 위해서 안감힘을 쏟으면서 교회는 성장하게 됐다. 여기에 70년대를 맞이하면서 농총 인구가 도시로 모요 들면서 대형화된 교회가 하나 둘 생겨나게 됐다.
여기에 박정희 장군의 5.16 군사쿠테타 후 군가 독재 정권을 창출하여 스스로 대통령이 되어 산업화에 많은 공헌을 하였지만 인권탄압 등 비 민주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유지해 오다가 10월 유신헌법 발표 등으로 군사독재가 장기화 되었다. 이때 한국 교회 즉 에큐메니칼 노선에 있던 교회들은 민주와 운동에 팡장을 섰으며 그 후 1979년 10월 26일 자신의 부하에 의해 청와대 안가에서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그 수 서울의 봄이 올 줄 알았던 수많은 시민학생들은 그 봄마저 만나지 못하고 12.12 신군부의 전두환 장군 등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전국을 공포의 분위기로 몰고 갔었다. 1980년 5월 18일 전국에 게엄령을 선포하자 광주지역 시민학생들이 5.18 게엄령을 해제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전두환 군부세력 퇴진을 요구하자 특수부대를 광주에 투입하여 결국 광주는 시민군과 특수부대와의 전쟁이 치열하였다.
이 일로 광주의 수 많은 시민 학생 및 기독교 지도자들이 골고다의 십자가를 메고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면서 싸움을 하였지만 엄청난 민주인사들이 살상을 당해야 하는 역사를 만나게 됐다. 
 
 
 
 총회에서는 박치순 부총회장이 광주의 비극을 접하고 전국교회에 기도와 구호품을 요구하였고 많은 교회가 참여 하자 박치순 부총회장은곧 광주로 내려가 총회장 조원곤 목사(광주 양림교회)에게 구제금을 전달하고 이어 증경총회장 한환석 목사(광주제일교회)를 만나 위로하고 진상을 파악한 후 상경하였다. 광주의 그 엄청난 사건을 민간이 나서야 한다면서 한완석 목사가 광주사태수숩위원장이 되어 총무 이인국 목사(남광교회)와 함께 광주 시내 교회 목사들과 함께 우선 억울하게 총탄에 쓰러져 죽어간 시신을


 

광주도청 상무관에 옮겨 놓고 유족들의 확인을 받은 뒤 입관을 하고 이들이 영원히 쉴 수 있는 광주의 망월동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았던 박치순 부총회장은 곧 상경하여 5월 30일 서울 교역자들이 서울 연동교회에 모여 보고를 득릉 후 6월 1일 전국 교회가 광주 5.18 희생자를 위한 기도회를 갖기로 하고 전국 교회에 알렸다. 박치순 목사는 그해 9월에 총회장이 됐다. 그 후 본 교단에서 민주와 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하였다. 1987년 군사독재정부는 4.13 호헌을 선포하자 즉각 교계는 물론 일반 시민학생들은 호헌을 철폐하고 대통령은 직선제로 선출하자는 운동이 강력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 해 5월에는 총회장 장동진 목사(광주 서림교회)께서 4.13 호헌철폐를 위한 목회서신을 전국교회에 발송하였다. 역시 6월 10일 서울 시민학생들이 일제히 호헌철폐를 부르짖으면서 거리로 나섰다.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았던 총회에서는 그냥 있을 수 없어서 6월 22일부터 23일 총회인권위원회 주최로 호헌철폐를 위한 기도회를 새문안교회에서 갖고 소형 십자가와 촛불을 들고 종로 5가까지 시가행진을 하려고 교회 문을 나서자마자 경찰관의 체류 탄으로 더 이상 진출을 못하고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 철야기도를 갖고


 
그 다음날 아침까지 기도회를 갖기도 하였다. 교계와 일반 시민들의 강한 저항을 받았던 당시 전두환 대통령 후계자였던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4.13 호헌을 철폐하고 식전제로 대통령을 선출한다는 발표가 나자 전국에 픝어져 있는 시민은 말할 것 없고 본 교단에 속한 모든 목회자와 교인들은 즐거워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면서 매년 총대가 증가하자 1,880명까지 이르게 된 일이 있었다. 이를 1,500명으로ㅗ 제한을 하여 작은 노회에 총대수를 많이 배정하고 큰 노회는 숫자를 줄이기도 하여 현재는 1,500명으로 제한하였다.  

그동안 숙제로 남아왔던 여성안수문제가 민주와희 열기와 함께 1994년 9월 제 79회 총회에서 해결됐다. 그동안 꾸준하게 여성안수를 위해 노력했던 여전도회전국연합회 및 전국 여교역자연합회 전국여신학생연합회의 노력으로 이 일이 이뤄졌다.이 일로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가 탄생되는 기쁨도 갖게 되어 그 어느 때보다 여성의 역할이 교회에 큰 몫을 담당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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