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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6-08
 제목  해방과 한국교회 재건(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역사)
 주제어  [장로교] [한국 교회사] [6.25]
 자료출처  예장통합총회  성경본문  
 내용

해방과 한국교회 재건

 

그리고 연합군은 해가 갈수록 일본의 압박하면서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으며 다시 8월 9일에는 나가자끼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도시인구의 절반의 살상자를 내기도 하였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일본 천황은 1945년 8월 15일 낮 정오 뉴스 시간을 이용하여 종전(패전)을 선포함으로 전쟁은 종결됐다. 이일로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목회자 및 일반 신도들이 옥문을 박차고 나왔으며 문을 닫았던 교회들이 다시 문을 열고 주일 밤과 수요일 밤에 예배를 드리면서 신앙을 만끽하였다. 출옥 성도 50여명은 한상동 목사를 중심해서 평양 산정현교회에 모여 한국 교회 재건을 선포하였다.
 
그해 11월 평북 선천 월곡동 교회에서 평북노회 등 6개 노회 200여명의 교역자들이 자숙 논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자리에 참석했던 증경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친일파로서 이를 거부하고 “옥중에서 고생한 목사나 신사 참배를 하면서 교회를 지킨 사람들이나 다 같이 고생하였다 면서 신사참배에 대한 죄의 책별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라” 고 항의를 하자 결국 이 모임은 결론 없이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무너진 제단을 그냥 방치 할 수 없어서 그해 1월 초에 이북의 5도 16개노회가 연합하여 북한 5도 연합회를 조직하고 통일이 될 때 까지 총회를 대행해 갈 수 있는 조직을 하였다. 초대 회장에 김진수 목사를 선출하였다. 5도 연합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결의를 하였다.  
 

1.북한 5도연합회는 남북통일이 될 때까지 총회를 대행할 수 있는 잠정적 협의기관으로 한다
2. 총회의 헌법은 개정 이전의 헌법을 사용하되 남북 통일 총회가 열릴 때까지 그대로 둔다.
3. 전교회는 신사참배의 죄과를 통회하고 교역자는 2개월간 근신한다.
4. 신학교는 연합노회 직영으로 한다.
5. 조국의 기독 문화를 목표로 독립기념전도회를 조직하여 전도교화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한다. 
6. 북한 교회를 대표하는 사절단을 파송하여 연합국 사령관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기로 한다. 
 
이상과 같은 결의를 하였지만 소련군의 힘을 얻었던 북한의 실력자인 김일성의 탄압으로 이 일은 이루지 못하고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다. 첫 북한교회의 수난은 1945년 11월 6일 용암포지역에서 기독교 사회민주당을 결성하였다하여 탄압을 받으면서 교인 및 하생 시민 5천여명이 신의주 공산당 본부로 집결하고 북한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군 퇴각운동을 벌릴 때 소련군과 공산당들은 무차별하게 총격을 가하여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기독교지도자들이 많이 구속되었다. 이를 가리켜 신의주 학생사건이라 부르고 있다.

 

다시 평양에서 1946년 3.1 절 독립 기념식을 거행할 때 평양교역자회에서는 그 장소를장대현 교회로 정하였다. 그러나 공산당은 평양역전에서 기념식을 갖는 등 양 세력이 긴장감속에서 기념식이 거행됐다. 그런데 뜻하기 않게 역전 기념식에 수류탄 투석 사건이 발행하여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이 사건을 기독교 교인들이 조작하였다 하여 탄압이 일기 시작하였다. 같은 11월 3일 주일에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한다는 공포가 있자 교계에서는 이를 반대하였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또 탄압을 받게 됐다. 이 무렵 공산당의 실력자인 강양욱 목사를 중심해서 조선기독교도연맹을 조직하고 증경총회장 김익두 김응순 목사를 강제로 가입시키고 초대 위원장(총회장)에 박상순 목사를 선출하였다. 이들은 11월 3일 주일에 실시하는 선거에서 즉시 지지한다는 성명서를 내는 등 모든 목사는 이 연맹에 가입토로가 하였다. 만일 가입하지 않으면 많은 불이익을 당하는 고통이 그칠날이 없었다. 신앙의 자유를 빼앗겼던 많은 목사와 일반 신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혼자 또는 가족을 이끌고 38선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월남했던 일이 많았다.


 
 

 

남한은 미군의 진주로 신앙의 자유를 누리면서 무너졌던 제단을 재건하는 일에 앞장섰으며 일부 교계지도자들은 과거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세력들도 있었다. . 그러나 이를 반대하고 먼저 감리교회에서 독자 노선을 택하면서 이탈하게 됐다. 장로교회에서도 각 지방에 있는 교구를 노회로 복구 시키고 1946년 6월12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장로회 총회 남부대회를 개회하였다. 대회장은 배은희 부대회장 함태영 목사를 선임하여 헌법은 통일될 때 까지 그대로 사용키로 하였으며 제 27회 총회가 범죄한 신사참배결의는 취소하였다. 
 


교역자 양성은 조선신학원을 직영신학교로 결의를 하였으며여장로 안수 문제는 통일될 때 까지 보류하기로 하였다.
1947년 4월 제 2회 남부총회로 모였으며 이 남부총회를 대한예수장로회총회로 이름을 바꾸고 1942년 제 31회 총회가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해산되었기에 에 그 역사를 이어야 한다면서 제 2남부 총회를 제 33회 총회로 계승하기로 결의를 하여 그 회수를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이때 1947년 제 32회 총회와 제 33회 총회 총회장은 1924년 총회장직을 역임했던 이자익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임하였다.
부산을 중심으로 고려신학교가 출범하면서 1차로 교회 분열은 시작되었다.
1946년 5월 한상동 박윤선 주남선 목사 등이 중심이 되어 경남 진해에 모여 보수신학의 설립을 위한 기성회를 조직하였으며 따라서 그해 6월에 제 1회 하기신학강좌를 개설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총회 인준을 받으려 하였지만 
 

실패하자 만주신학원에서 교수했던 정통보수의 대부인 혁형룔 박사를 교장으로 초빙하였다. 그러나 신학교 운영 문제와 신학노선 차이로 더 이상 머물수가 없었던 박형룡 박사는 1948년 서울로 상경하여 개인적으로 월남한 이북세력의 힘으 얻어 한국 보수 신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면서 남산 조선신궁 자리에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무렵 조선신학교 재학생 51명이 김재준 목사의 신학벙법론으로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하면서보수와 진보가 서로 충돌하게 됐다. 이 문제로 1948년 4월 제 34회 총회가 모인 새문안교회내에는 조선신학교 
 
 


재학생과 진정서를 받고 심의하는 과정에서 고성이 오고갔으나 해결을 보지 못하고 6.25전쟁을 만나게 됐다. 여전히 부산에서는 고려신학교 장로회신학교 조선신학교가 계속해서수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총회 내의 신학교 문제로 갈등이 증폭되자 1951년 5월 피난지 부산에서 모인 제 36회 총회에서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총회 직영신학교를 각기 취소를 하고 그 해 9월 피난지 대구에서 총회가 직영하는 신학교라 하여 총회신학교를개설하고 교장에 감부열 선교사를 임명하였다. 
 

이로서 대구에서 문을 연 총회신학교는 보수진영에 있던 신학생들은 이곳에 입학하여 수업을 맏았으며 이 무렵 감부열 교장이 안식년을 맞아 도미하자 곧 임시 교장으로 박형룡 박사가 교장직무대행을 맡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고려파는 고려파대로 부산을 중심해서 자리를 잡데 됐으며 1965년 6월 조선신학교(후 한국신학대학) 출신 및 김재준 목사 지지 세력들은 총회를 이탈하여 서울 동자동에 위치한 한국신학대학 강당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를 조직하고 김세렬 목사가 초대 총회장이 됐다. 이 겨로가 한국교회는 같은 장로교회인데 3개파로 분열 되었다. 막형룡 박사는 한국교회의 주류인 보수정통신학의 자리를 잡고 대구에서 총회신학교를 이끌고 갔었다.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자 이와 때를 같이해서 1954년 4월 옛 조선신궁자리로 이전하였다. 당시 학제는 예과 2년제 본/별과 3년제였다. 다시 학교명을 대한예수고 장로회신학교로 하고 수업을 계속 진행해 오다가 장로회신학교 신축을 위해 옛 조서신궁 부지를 불하 받기 위해 교섭을 해 오던 중 학교 재정 3천만환의 사기 사건이 발행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이사회에서는 독 1959년 3월 이사회를  
 


개회하여 일단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박형룡 박사는 명예고수로 남게 하고 교장서리는 노진현 목사를 임명하고 수습하려고 하였지만 이 일이 전국교회에 알리어지자 두 세력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박형룡 박사의 사기범에 걸려 날려버린 3천만환 사건은 전국 노회와 교회로 확산되면서 봄노회를 맞이하게 됐다. 이 때 서로 자파세력을 강화하려고 안간힘을 쏟기도 하였다. 이 일로 경기노회 총대 명단이 각각 다르게 접수되자 총회를 개회하기 전에 에큐메니털파와 NAE 파 의 명단을 놓고 투표를 하여 에큐메니컬파의 총대 명단을 받아들이고 개회를 사였지만 
 

계속해서 NAE 파에서 무효를 주장하면서 에큐메니칼파는 용공주의 신신학 단일교회 운동이라고 왜친 소리에 장내가 몹시 소란하게 됐다이 일로 더 이상 총회를 계속 할 수 없어서 총회장 노진현 목사는 정회를 선언하고 나자 회의장내는 더욱 소란해지면서 에큐메니칼파와 Nae 파가 갈라서게 됐다. 에큐메니칼파는 즉시 서울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속회하였으며 총회장에 이창규 목사가 피선됐다. 후에 이 파를 통합측이라 부르게 됐다. nae 파는 합동측이라 부르게 됐으며 그해 11월 서울 승동교회에서 총회를 속회하고 양화석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출되자 예장은 두 교파로 분립하게 됐다.

 

그 후 두 파가 서로 등을 돌리고 갈라서자 자연히 남산에 소재하고 있던 장로회신학교도 둘로 갈라지게 됐다. 1959년 9월 이사회에서 계일승 박사를 교장으로 선임하였으며 이 일로 신학교에 교장이 2명이나 됐다.통합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통합측은 광나루에 교사를 마련하여 장로회신학교라 부르게 됐고 합동측은 ICC(국제 기독교연합회)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 용산 역전에 빌딩을 매입하여 총회신학교라는 간판을 내결로 신학교를 운영하였다.이 일로 함께 공부했던 많은 이들이 상처를 안고 서로 갈라서야 하는 아픔을 격게됐다. 현재는 통합 측의 신학교는 장로회신학대학교로 발전하였으며 역시 합동측도 그 후 사당동에 자리잡고 총신대학교로 발전하여으며. 사당 캠퍼스는 학부만 운영하고 신대원은 경기도 용인시 양지리 캠퍼스에서 운영하고 있다. 두 신학교 모두 2001년 학교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를 갖기도 하였다. 
 

 

 

 

>> 목차고리 :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역사

>> 연결고리 : 장로교장로 교회사, 한국 교회사,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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