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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6-07
 제목  기타 국가의 장로교회
 주제어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1. 캐나다 장로교회


 

캐나다 장로교회는 노바스코티아 지역에서 미국 혁명이 있기 전 미국에서 그리고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서 이민을 온 사람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온 사람들은 비교적 늦은 편이었다. 1825년에 비로소 그라스고우(Glasgow) 식민 협회가 창립되어 캐나다에 오는 목사들의 후원이 되었다. 이때 온 로버트 번스(Rebert Buns)가 “낙스교회” “낙스 대학”을 토론토에 세우는 데 공헌하였다. 1843년 스코틀랜드 교회가 분열하여 자유교회(Free Church)가 형성되면서부터 캐나다는 장로교회로 열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그러나1861년 “연합 장로교”와 연합하였고 1875년에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와 연합, 캐나다 장로교회의 면모를 갖췄는데 그때 장로교인들은 8만 8천 여에 달했다.
 서부로 개척을 하는 것 때문에 교회 또한 이동을 하였다. 그때 지도자는 로버트슨(James Robertson)이었고, 고포스(Jonathan Goforth)는 캐나다 장로교회를 해외에 널리 알린 자였다. 교회는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조나 미신성 또는 자유주의 등에 대해 심각한 갈등을 가졌으며 칼빈주의는 쇠퇴기에 접했다.
 1925년에는 감리교, 조합교회와 합동해서 "캐나다 연합교회"를 만들었다. 이때 3십 8만 중 40퍼센트는 장로교인들이었다. 그 후 국가적인 경제 문제에 당면한 장로교회는 독자적인 재기를 원했으나 당시 상황은 신학적인 문제로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낙스 대학의 브리든(W.W. Bryden)은 바르트(Barth) 전에 이미 바르트와 같은 사상가로서 영향을 미쳤다. 이 연합교회는 1953년에는 87만 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었으며, 많은 장로교회의 교리와 원리가 살아 있다. 이 연합교회에 참여하지 않은 보수적인 많은 목사들은 "캐나다장로교회"라는 이름으로 남았는데, 1958년에 회원이 196,096명으로 집계되었다.

 

2. 멕시코‘장로교회


 

멕시코 장로교회가 미국 장로교회에서 고무되기는 1872년부터였다.
당시 멕시코의 국민 인구는 약 1천 5백만 정도였는데 대부분은 스페인사람들이었고 그 나머지는 인디안들 이었다. 물론 이들의 대부분은 로마 천주교 교인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로마 천주교회에 대한 불만을 품어 과격한 반(反)로마 천주교 운동을 일으키는 자들이 없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곳에 장로교회가 들어갈 여백이 생긴 것이었다.
그리하여 4개의 노회가 구성된 단일 조직의 장로교회가 미국 장로교회의 뒷받침을 받았다. 물론 그 중의 3개 노회는 미국 북 장로회(美國北長老會)와 연관을 가졌고 나머지 한 노회는 남 장로교회(南長老敎會)와 관련을 가졌다. 이들이 한 곳에서 모임을 가진 것은 1901년 7월 8일 멕시코시에서였다. 그때 그들의 모인 이름은 “멕시코 장로교회 총 대회”(General Synod of Presbyterian Church of Mexico)였다. 이때 총대는 목사 44명이었고, 교인들은 5만에 이르렀다. 1910년 멕시코 혁명이 3O년 간의 독재를 항거하여 일어났다. 이로 말미암아 멕시코의 정치. 경제. 사회의 면모는 대단한 변모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멕시코 사회는 보다 교육 치중으로 성장하였으나 종교적 자유는 오로지 교회 안에서 만이었다. 그러나 로마 천주교회는 다른 종파와 대화의 문을 열 대로 열었으며 그들의 성서적 부홍운동은 괄목할 만하였다. 장로교회와 다른 개신교회는 자립을 하고 있으며 복음협회에 속해있고 신학교도 장로교와 감독교회, 조합교회는 합쳐서 운영하고 있으며 출판사업도 공동으로 벌이고 있다. 특히 멕시코에서는 신구교의 대화가 어느 곳에서보다 앞서 있다.

 

3 . 브라질 장로교회


 

브라질에 장로교회가 들어가기는 1859년 역시 미국 장로교회에 의해서였다. 이곳 상황은 멕시코와 대동소이한데 미국 장로교회가 남북으로 갈라지자 1869년 남 장로교회에서 계속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이곳 브라질의 로마교회는 유럽을 방불케 하였다. 모든 성직자들은 호의호식과 사치에 여념이 없었고 허랑 방탕하였다. 그리고 신교의 목사들인 선교사로 와서 설교를 하면 반동적인 모반을 일삼았다. 그러나 1888년부터는 원주민들의 개종이 늘어났고 그들의 불의한 행동에서 돌아서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때 장로교회는 뿌리를 내려 “브라질 대회”를 열었고 4개의 노회와 4만여 신도를 확보하였다
 1920년대에는 7개 노회에 8만여 명의 장로교인들을 확보하였다. 특히 브라질에는 오순절(Pentecostals)교회가 왕성하여 그들의 토착종교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하나님의 성희”(Assembly of God)라고도 한다. 이들은 1960년대에 “브라질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대성회를 벌였다. 1964년 통계에 의하면 1,689,000명의 신도를 가졌는데 이때 장로교회는 167,000명이었다. 1964년 현재 브라질에 있는 신교인 총수는 2,592,000명이며 구교와 합하면 4백 만에 달하고 있다. .근래 와서 구교와의 관계가 호전되고 있다.

 

4 . 일본 연합교회


 

일본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오기는 16세기 제수잍(Jesuit) 선교사들이었는데 이때의 일본은 외국을 향해 문을 닫고 있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자는 극형에 처했다. 1854년부터 일본 항이 열리기는 했으나 1872년까지는 기독교의 입국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 후 제슈잍 교단에서는 여러 가지 다른 타입의 기독교를 제공한 셈이었다.
 일본에 장로교 선교사가 들어오기는 화란 개혁교회, 북미 장로교회.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교회 등지에서였다. 이때부터 일본은 그들의 국가적 특색을 나타내어 “일본 연합 기독교회”(Union Church of Christ in Japan)의 단일체제를 용납하였다. 이때가 1877년, 유럽이나 미국의 모든 장로교회는 일본 연합 기독교회와 협동하였다.
일본교회가 칼빈주의자와는 관계가 밀접하다고 보지만 그들은 서구적인 교회정책에 종속성은 갖지 않은 특색을 보였다. 1900년에는 6개 노회와 8O여 명의 목사 그리고 11만 명의 교인을 확보하였다. 일본교회가 단일체제로서 특색을 과시하기는 1942년 전시(戰時)에 정부가 강력하게 조종한 것으로 보며 1947년에는 “국립 기독인 협회”(Nations Christian Council)가 형성되어 구 선교협회를 대신했으며 지금에는 이것이 “교회협의회”(Council of Churches)로 변형되어 있다.

 

5. 중국 장로교회


 

중국에 기독교가 처음 나타난 것은 635년 네스토리안(Nestorian:景敎徒) 선교사 시리아인 알로펜(Alopen)이 당나라 수도(Sian)에 도착한 일이다. 당시 경교는 상당한 진전을 보았으나 1O세기에 와서는 몽고의 강세로 경교는 13세기 이후 그 자취를 감추었다.


 그 후 프란시스파 몬떼 코르비노(Monte Corvino)의 조반니 존(John)이다. 1294년 마르코 폴로(Marco Polo)를 동행하여 6천여 명의 개종자를 얻었으나 1368년에 또다시 기독교는 박해에 의하여 사라졌다.
16세기에 와서 일본에 갔던 프란시스 자비엘(1594,일본)이 중국에 가기를 희망했으나 1552년에 광동 가까운 곳에서 죽고 1574년 이탈리아인 알렉산더(Alexander Varignano)가 마카오(Macao)에 도착하여 중국어를 익혔으며 중국 문화도 습득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마태오리찌(Matteo Ricci)가 1601년에 북경(北京)에 도착, 기독교가 어느 정도 공인이 되게 하였다. 그는 1610년에 죽고 기독교는 또다시 1644년 말까지 명(明)나라에 의해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만주의 진(Ching) 황제는 기독교에 호의를 보내 각 지역에 선교사를 허용하였으며 이에 제슈잍들은 맹활약 후에 도미니칸과 프란시스칸 선교사와 2십 5만여 명의 개종자를 얻었다.
 그러나 1717년부터 황제 강휘(Kang Hsi)의 명으로 또다시 기독교는 박해 속으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1세기가 넘은 1840년 제슈잍들은 상해(上海)에 거점을 다시 차렸다. 그러므로 중국은 1841년까지 신교 선교사와 외국상사에게 문을 닫은 것이다. 그러나 아편전쟁이 끝나자 홍콩을 영국에게 활양 하자 선교의 문이 낮아지게 되었다.
1901년 1O월 2일 상해에서 열린 장로교 선교사들의 대회에서 다음과 같은 헌장을 취하였다.

 

1) 대회는 중국 내의 기독교회의 연합을 진심으로 추구한다. 그러므로 장로교회는 모든 종파들이 협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키 위해 최선을 다한다.

 

2) 그러므로 이 대회는 연합하고 조직하는 일을 위해 특별위원회를 임명할 것을 추천하며 여기에 모든 교회는 동참하고 복종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1903년 11월 11일 위원회는 임명이 되었고 7개 교회가 상해에서 모였다. 그리고 지금의 신.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용하는 데 동의하였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신앙고백(Westminster)과 요리문답집을 교리의 표준으로 삼았다. 만주에 있는 장로교회에서는 그들 나름대로의 표준 신조들을 채용하였다. 그리고 중국에 있는 장로교회는 근본주의 적이면서도 매우 진취적인 자세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것으로 본다. 상해 대회의 융통성 있는 연합 사업으로 중국에는 여러 장로교회가 여러 모양으로 중국교회에 기여를 하였다.

1905년에는 2개의 대회(Synod)에  9개의 노회에서 3만여 명의 교인들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1921년 중국 공산당이 형성되었다. 1927년에는 선교사가 8,318명(신교)에 이르렀다. 교인들은 3백만 명에 가까웠다. 그러나 공산당들은 1926년에서 1934년까지 3천여 명의 선교사를 살해하였다. 1937-1945년의 일본과의 전쟁 중의 중국교회는 또다시 박해 속에 들어갔다. 3천여 명의 선교사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1949년 모택동(Mao)이 의장(議長)이 된 후 1950-1951년에 모든 신교 선교사는 중국을 떠나야만 했다. 1958년 교회는 부동 자세에 들 수밖에 없었다. 1966년 교회는 홍위병(Red Guards)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러나 비밀 집회는 끊이지 않았다. 이들로 말미암아 또 다른 세대의 중국교회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중공이 미국과 국교를 정상화한 후 기독교 선교의 문은 서서히 열렸고 소련과 공산주의가 동구에서 무너지자 또 다른 선교의 길이 열리고 있다.

 

6. 호주(Australia) 장로교회

오스트렐리아는 17세기의 모험적인 네덜란드인들이 발견을 하였다.
선장 룩(C∞k)이 1770년 이곳에 와서 1788년까지 이곳 해안선을 탐험하였다. 지금의 시드니(Sydney)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 후 수십 년 간 잉글랜드의 무법자들이 이곳에서 자비로운 삶을 차지하였다. 귀양도 되었고 개간도 되었고 도망도 되는 곳이었다. 이곳은 6개 주로 나눠졌다.


 

1) 뉴 사우스 웰스(New South Wales)의 교회
오스트렐리아서 제일 일찍 장로교회가 들어선 곳이다. 존 던모어(John Dunmore) 목사가 스코틀란드에서 태어나(1799년) 1878년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이곳 교회를 위하여 대단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이곳 총독 토마스 브리샨(Tomas Brishane) 장로의 초청을 받아 목사로서 보다 의회와 신문에 관여함으로 당시 이민 중에 어려운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다시 스코틀랜드로 가서 이곳에 필요한 교육자들을 많이 데리고 와서 교육에 임하는 동시에 목사들을 5명을 데리고 와서 뉴 사우스 웰스 노회를 조직하였다. 이때가1826년이었다.
 십 년 후 그는 다시 스코틀랜드로 가서 19명의 목사들을 데리고 와서 감독교회에서 성직자들을 대하듯 모든 보장 문제를 정부로부터 받아내었는데 그는 스코틀란드의 장로회와 잉글란드의 감독교회의 공동 보장을 얻어냈다. 그러나 새 대륙에서 구습을 너무 강조하여 두 대회로 분리되었다. 그가 속한 뉴 사우스 웰스 대회와 오스트렐리아 대회였다. 그는 후에 정부의 보조를 떠나 독자적인 노선의 장로교회를 시작하였다.


 

2) 갈등과 성장
오스트렐리아 교회는 스코틀란드 교회를 기반으로 하여 형성되었는데 1843년 스코틀란드 내에서 있었던 논쟁에 의거하여 22명의 목사와 16개의 교회가 “스코틀란드 국립교회”에 남았고 6개 교회가 “스코틀란드 자유교회”로 남았다. 이런 상태가 1865년까지 계속되다가 뉴 사우스 웰스 교회로 통합을 보았다.
이 나라는 점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인구도 성장하였고 교회도 따라서 성장하였다. 이런 일은 전적으로 스코틀란드 교회의 영향이었다. 스코틀란드의 성 안드레(St. Andrew) 대학이 1881년 시드니 대학과 유대관계를 맺으며 설립을 뒷받침하였다. 이는 장로교대학이나 다름없이 호주의 교역자를 배출해 내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스코틀란드의 선교활동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3) 빅토리아(Victoria) 교회
1851년 뉴 사우스 웰스에서 빅토리아 주가 분립되었다. 바로 이 해에 금(金)이 발라라트(Ballarat)에서 발견되었다. 황금 열풍이 몰아쳤다. 빅토리아 주의 인구가 7만 7천에 이르렀다. 3년 안에 3배가 된 것이다. 여기에는 설교자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교회보다 황금에 더 눈이 밝았고 마구잡이 생활로 들어가 거칠기가 짝이 없었다. 그러므로 1834년 빅토리아가 남 웰스 주에 속해 있을 때 멜보른(Melbourne) 근교 필립 항구에 정착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스코틀란드 장로교회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에게 처음 설교자는 동인도(東印度)에서 은퇴한 제임스 클로우(James Clow) 목사였는데 1842년 4명의 다른 목사가 가담하여 멜보른 노회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들은 남 웰스 주에서부터 여러 가지로 영향을 받았는데 금광 때문에 장로교회의 분파를 이루었다.
 그러나 1870년에 빅토리아 교회는 하나가 되었다. 이 영향은 여러 주로 번져나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호주 장로교회는 하나로서 모범을 보이고 있다. 오스트렐리아의 6개의 교회는 하나의 총회로 묶여졌다. 그들은 또한 선교사업에 열중하였다. 

 패톤(John G.Paton) 목사는 당대에 알려진 선교사였다. 그는 또한 멜보른 대학교의 올몬드 대학(Ormond College)을 신학교의 역할을 하게 하였으며 많은 기여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빅토리아 주는 오스트렐리아의 절반 이상의 장로교인들을 확보한 주로서 모든 면에 앞서 가고 있다


7. 뉴질랜드 장로교회
184O년 스코틀랜드로부터 이민 온 대부분은 장로교인들이었다. 그들은 수도 웰링턴(Wellington) 근교에 정착한 후 1856년에 첫 번째 노회를 조직하였다. 물론 이들의 목사들은 스코틀란드에서 왔다. 그러나 후에는 자체에서 모든 것을 자립(自立)하게 되었다. 얼마 후 노회는 8개로 늘어났다. 이 곳에는 아일란드에서 온 장로교인들도 뉴질란드 장로교회에 크게 기여를 하였다. 1900년에는 96개 교회의 12만 명의 장로교인들로 늘어났다. 남쪽 지역에서는 북쪽보다 약간 늦게 교회조직이 되었는데 1848년 자유 스코틀란드 장로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1854년 목사 3명과 2명의 장로로 노회를 열었다. 

 1861년 금광이 터지자 이민의 수는 늘어났고 듀네딘(Dunedin) 대학교에서 목사 양성을 맡았다. 그러므로 국립 스코틀란드 장로교회의 후예들인 북쪽 섬 사람들과 자유 스코틀란드 교회의 후예들인 남쪽 섬 사람들의 반목이 있었으나, 1862년에 하나가 되었지만 그 다음에 또다시 반목하였다. 1900년대에 와서 그들은 한 총회에 다시 연합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뉴질란드 장로교회로 성장하여 나갔다. 지금은 7만여 명의 장로교인들을 확보하였다. 근래 와서 호주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회중교회가 함께 연합하였다.
8. 남아프리카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South Africa)
이교회도 스코틀랜드사람에 의해서 설립되었는데 회원은 1957년에 36,807명이었다.
이 교회 교인들은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이며, 이 교회만큼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했던 교회도 없을 것이다. 특히 인종 문제는 엄한 시련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했고, 반투족 장로교회(the Bantu Presbyterian Church)도 1923년에 설립되어 독자의 노회와 총회를 구성하고 있다.


또한 남아프리카, 화란개혁교회(The Dutch Reformed Church in South Africa)는 65만 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으며. 교리에 있어서는 칼빈주의, 정치는 장로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이 교회의 회원은 대부분 화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며. 화란어로 예배를 드리고 신학교는 케이프타운(Cape town) 가까이에 있는 스텔렌바하(Stellenbach)에 있다(Dutch theological Semi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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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결고리 : 장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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