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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6-07
 제목  아일랜드의 장로교회
 주제어  [장로교]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아일란드(Ireland)는 예부터 왕국(British Isles)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1916년 원주민들의 폭동으로 1920년에 독립이 되었다. 그러나 아일란드는 남과 북으로 나뉘어 북 아일란드는 영국(United Kingdom-England, Scotland, Wales, Northem Ircland)에 속해 있다. 이 북 아일란드는 울스터(Ulster)지역(Cauan, Donegal, Monaghan, Londondery)에 속해 있는데 이곳에는 옛부터 스코틀란드나 잉글란드에서 온 신교도들이 사는 지역이었고 이들을 스코틀란드계(係) 아일란드 사람(Scotch -Irish)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미국장로교회(美國長老敎會)의 뿌리를 이룬 사람들이었다.


1. 아일랜드의 기독교 역사


(1) 아일랜드의 고대 기독교


언제 어떻게 기독교가 아일랜드에 전하여졌는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대단히 일찍이 전하여졌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 섬의 최초의 기독교 지도자는 패트릭(Patrick)인데, 그는 로마카톨릭 신자, 감독교회(Episcopalian), 아니, 장로교회 신자였다고 여러 가지 입장에서 말하여지고 있으나, 그 어떤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의 저작물을 읽으면 로마 카톨릭보다도 오히려 프로테스탄트에 가까운 것 같다. 그의 교회는 로마 카톨릭과 전혀 무관계한 겔틱 교회(Celtic Church)라고 불리운다. 패트릭의 생애는 전설이 섞여져 있어서, 어쩌면 그는 317년경에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16살 때에 노예로서 아일랜드에 끌려와, 거기서 기독교로 회심했다고 보고 있다. 그가 지도했던 고대 켈틱 교회는 아일랜드에 오랫동안 존속했고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2) 로마 카톨릭 화 된 아일랜드


아일랜드는 1170년경 로마 카톨릭의 나라가 되었다. 그 해 로마 교황은 잉글랜드의 국왕으로서 로마 카톨릭 신자였던 헨리2세(Henry 1)에게 아일랜드의 통합을 명하였다. 그 명령은 실행되었고 그 때부터 350년 간 아일랜드는 로마 카톨릭의 나라가 되었던 것이다.


(3) 아일랜드와 수장령(Act of Supremacy)


1534년 헨리 8세 (Henry 四)가 “수장령”을 의회에 제출하고 가결시켰을 때, 그는 잉글랜드와 동시에 아일랜드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던 것이다. 잉글랜드는 “수장령”을 수락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와 완전히 관계를 끊었다. 그러나 아일랜드는 “수장령”에 대한 수락을 거절하고 그 이래로 분쟁이 계속되게 되었다.
아일랜드인과 영국의 지배자와의 사이에 끊임없이 계속된 분쟁의 원인은, 영국의 지배자가 아일랜드인에게 영국 국교의 정치 형태와 예배의 형식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싸움은 때로 전쟁의 형태로까지 되었고, 그 전쟁은 종교적, 정치적인 것이었다. 1603년의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말기에는 얼스터(Ulster)를 포함한 북아일랜드는 전쟁에 의해서 인구가 실제로 감소했다.


(4) 얼스터의 지배


엘리자베스 여왕의 후계자 제임스 1세(James 1)에게 아일랜드 문제에 대한 해결이 인계되었으나. 그는 이 문제를 감당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철학자이며. 정치가였던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에게 상담했는데, 베이컨은 영국 본토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아일랜드에 이주시키도록 진언했다. 이 진언은 실행되었는데 이것이 유명한 “얼스터 식민”(Ulster Plantation)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으로, 이 이주는 아일랜드의 얼스터 현(Province of Ulter) 전체에 미쳤다.


 제임스 1세는 이 이민의 실시에 대해서 먼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국경선상의 주민을 이주시켰다. 1603년에 양국은 합병해서 하나의 왕을 섬기는 것처럼 되었으나, 그때까지 양국 사이에는 끊임없는 싸움이 있었다.
이러한 숙적 관계의 사람들을 아일랜드에 이주시킴으로써 일석이조의 해결을 바랐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국경지대의 분쟁을 해결함과 동시에 용감한 프로테스탄트 사람들을 북아일랜드에 보내는 데 성공하였다.
얼마 동안 대단히 많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의 신앙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북아일랜드 개척에 나섰으며, 잉글랜드로부터도 프로테스탄트가 이주해 왔다. 더욱이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와 잉글랜드의 청교도에 대해 영국 국교회의 신앙을 강요했을 때 이민의 수는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이렇게 해서 얼스터 지배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프로테스탄트, 그리고 그 가운데 태반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를 배경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북아일랜드의 벌판에 대한 개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한편 남 아일랜드의 주민은 아일랜드 사람으로서, 그들은 로마카톨릭 교도들이었다. 그 당시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북아일랜드의 스코틀랜드 사람과 남 아일랜드의 로마 카톨릭 교도들 사이에 심한 대립이 계속되고 있다. 양자들 사이에는 오늘날도 결코 결혼을 하지 않으며, 그것은 금지되어 있다. 만일 결혼을 한다면 태어난 아이는 로마 카톨릭교도로서 양육을 받게 되어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만에 하나 이 사람들이 결혼하는 경우가 있다면. 양친은 아이를 로마카톨릭 교도로서 양육하겠다는 서약을 하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만 봐도 스코틀랜드 사람과 아일랜드 사람은 전혀 혼혈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에서는 북아일랜드 출신의 스코틀랜드인 장로교회 사람들을 그들이 아일랜드에 살았었다는 이유만으로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미국 이외에서는 그들을 얼스터인(Ulstermen)이라고 부르고 있다.


2. 아일랜드의 장로교회


(1) 장로교회의 얼스틴 이민


북아일랜드에 이민한 스코틀랜드 인들은 모두 교양 있는 경건한 장로교도들만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품행이 방정치 못한 사람들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그들과 함께 생활했던 앤드류 스티워트(Andrew Stewart)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혀 신앙이 없는 사람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에 의지하기보다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해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도피해 있는 때에도 아직 하나님은 그들을 찾고 계셨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그들이 전혀 교회에 눈올 주지 않았으므로 하나님도 또한 그들을 전혀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같은 시대에 또 한 사람의 목사인 로버트 브레이어(Robert Blair)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아일랜드에 이민한 사람들 가운데도 가문이 좋고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재능이 있는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과 범죄 때문에 이곳에 오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상태가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생활의 향상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왔던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종교가 뿌리를 튼튼히 박고 영광을 얻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목사 역시 대개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북아일랜드의 이민 때에 전도를 시작했다. 주님은 이러한 장로교회의 목사들 가운데 가장 유망하게 보이지 않았던 한 사람의 목사를 들어서 가장 위대한 일을 감당하게 하셨던 것을 잊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 목사는 제임스 글렌딩잉(James Glendining)이다. 당시의 어떤 작가는 그에 대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그는 교회의 총회에 의해 선출되어 아일랜드에 개혁을 일으키기 위해 파송 될 만한 남자는 못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산만한 사람이었고. 후에는 참으로 착란 상태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위대한 사역을 시작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방법이라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그것은 이 불신앙의 나라에 거룩한 백성을 일으킨다면, 그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야 하는 것이며. 인간의 힘이나 지혜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적인 사역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다시 글렌딩잉의 전도 방법에 관하여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사람들이 지극히 음탕하고 불경건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오직 하나님과 율법의 저주와 죄에 대한 심판의 두려움만을 설교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이 일에 종사했다. 이것도 그에게 있어서는 그 이외의 것은 거의 설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죄를 깊이 자각하게 되어 ‘우리들이 구원받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라고 외쳤다.”죄를 자각했기에 남자나 여자나 모두가 부들부들 떨며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 이러한 성공적인 소식을 듣고, 다른 목사들이 응원했고, 더욱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진리에 관하여 깊게 가르치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커다란 신앙의 부홍운동의 바람이 북아일랜드에 불게 되었던 것이다.


(2) 암흑의 계약과 대학살


찰스 1세는 잉글랜드의 청교도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를 영국국교회의 정치와 교리에 복종시키고자 탄압했지만. 이와 같은 탄압의 손길을 아일랜드에도 뻗쳤던 것이다. 악명높은 토마스 웬트워스(Thomas Wentworth)가 아일랜드의 총독(Lord Deputy)에 임명되었고, 그의 사명 가운데 남아일랜드의 로마 카톨릭 교도들과 북아일랜드의 장로교회를 영국 국교회에 복종시켜야만 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북아일랜드의 장로교회의 사람들에게 “4복음서의 기자(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 대해 맹세하는 서약”(Oath upon the Holy Evangelists)에 서명하도록 요구했던 것이다.“4복음서의 기자에 대한 서약”의 내용은 찰스 1세에게 전적으로 충성하는 것과 왕의 명령에 대하여 언제든지, 어떤 방법으로도 결코 반항하지 않고, 지금까지 스코틀랜드와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할 것 등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사람들에 의해서“암흑의 계약”(Black Oath)이라고 금방 전하여지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에 대해 서명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쇠사슬에 묶여져 무서운 지하실에 갇히게 되었으며, 많은 사람이 습지대나 동굴로 도망갔고, 그 가운데는 바다를 건너서 스코틀랜드로 도망쳐 간 사람들도 있었다.
웬트워스는 바다를 피로 물들게 한 해전에서 아일랜드를 지키고, 아일랜드의 산업을 위하여 많은 공헌을 했으나 그의 처참한 행위가 너무나 잔인했기에 그가 장기의회에 소환되었다. 그리고 1640년에 처형되었을 때 아일랜드에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웬트워스가 실각한 후에 아일랜드의 장로교회 사람들은 한숨을 돌릴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갑자기 청천벽력과 같이 남아일랜드의 로마 카톨릭 교도들이 북아일랜드의 장로교회 사람들을 공격하고, 특히 고립된 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습격을 받아 옷이 벗겨진 채 추위에 방치되어 죽었다. 그 후 아일랜드 사람은 1572년 프랑스의 성바돌로메의 날(St. Bartholomew’s Day)에 있었던 위그노의 대학살(the Massacre of the Huguenots)을 계기로 교회의 역사에서 그와 같이 유례 없이 무서운 방법으로 장로교회 사람들에 대한 대학살을 시작했던 것이다. 1641년에 시작해 수년간 계속된 이대학살에서 수만 명의 장로교회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3) 아일랜드 최초의 노회


 영국의 의회는 폭동을 진압하고 대학살을 중지시키기 위하여 아일랜드에 1만 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스코틀랜드인인 먼로(Munro) 장군이 지휘한 이 군대의 대부분의 병사는 장로교회 사람들이었다. 각 연대에는 종군목사가 배속되었는데 그들은 장로교회의 목사였다. 그들은 진심으로 전도에 대한 열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편의 군대뿐만 아니라 북아일랜드의 장로교회 사람들(이민인)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그들은 각 연대에 장로교회와 노회를 만들고 신앙이 독실한 사관(士官)들이 장로에 선출되었으며, 이렇게 해서 북아일랜드에 장로교회의 조직이 만들어졌다.
1642년 6월 1O일 이러한 교회(당회)의 대표가 벨페스트(Belfast) 바로 북쪽에 있는 캐릭퍼거스(Carrickfergus)에 모여 아일랜드 최초의 노회를 조직했다. 이 노회는 5명의 목사와 4명의 장로로 구성되었다. 이 자리에서 아일랜드에 더 많은 목사를 파송 해 줄 것을 결의해서 스코틀랜드 교회의 총회에 보냈고, 이에 대해서 총회는 가장 모범적인 목사 6명을 아일랜드에 파송 했다.
그들은 북아일랜드 각지에서 복음을 전하고, 각지에 장로교회를 건설해서 1660년경에는 북아일랜드에 8O개의 장로교회와 7O명의 목사, 그리고 5개의 노회와 1O만 명의 교인이 있게 되었다.


(4) 장로교회의 빛과 그림자


스코틀랜드 사람들(이민한 장로교인들)은 천신만고 끝에 북아일랜드의 농업과 공업을 놀라울 정도로 발전시켜, 해가 더해감과 함께 번영한 마을과 도시가 되었으며, 장로교회도 번영과 성장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들의 태반은 행복하다고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이웃 아일랜드 사람들로부터의 침략의 위험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아일랜드 사람들은 이주해 온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사악한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찰스 2세가 1660년에 즉위하자마자 매우 엄청난 “통일령”(Act of uniformity)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모든 국민에게 영국 국교회의 정치, 즉 감독 대주교 제도와 로마 카톨릭에 가까운 고교회(Hight Church)의 예배 방식에 따르는 것을 요구했다.
북아일랜드의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 인은 이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1695년 로마 카톨릭 교회에 심취해 있던 제임스 2세가 즉위했지만 그들에 대한 도움이 되지 못했다.
1688년 영국에서는 명예혁명(great revolution)이 일어나 제임스 2세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윌리엄과 메리(Willam and Mary)가 왕위에 올랐다. 윌리엄은 네덜란드 사람으로 장로교인이었기에 당연히 장로교회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때가 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사실 윌리엄의 제위 기간 중에 그들의 제언으로 “관용령”(Toleration Act)이 통과되어 그 기대는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아일랜드에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불행한 때가 찾아왔다. 제임스 2세는 아일랜드로 도망했고 왕위를 되찾기 위하여 아일랜드의 로마 카톨릭 교회 신도들 가운데서 군대를 모집했다.
윌리엄은 즉시 영국으로부터 군대를 파견해 아일랜드는 전쟁터가 되었다. 런던데리(Londonderry)의 포위와 보인(Boyne)의 격전은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의 장로교회 역사에서 피도 얼어붙는 듯한 생각이 나는 곳이 되었다. 보인 전투에서 제임스 2세는 패배했고, 윌리엄과 메리의 왕위는 부동의 것이 되었으며, 그 후 얼마 동안 북아일랜드 장로교회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찾아 왔다.


3. 대이주(大移住)와 현대의 아일랜드 장로교회


(1) 대 이주


1702년 윌리엄이 죽은 후에 제임스 2세의 딸 앤(Anne)이 즉위했고, 그 직후에 심사령(Test Act)을 발표해 공직에 있는 모든 사람은 피선되었을 때든지 임명되었을 때부터 3개월 이내에 영국 국교회의 기도서에 따른 성찬식을 받도록 요구 되었다.
이것은 장로교인들에게는 커다란 압박이 되었다. 그들에게는 로마 카톨릭의 미사와 거의 다를 바 없는 것 같은 영국 국교회의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 양심적인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러는 동안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북아일랜드로부터 수출되는 물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고 이와 더불어 수년간의 기근이 계속되었다. 그래서 북아일랜드의 장로교회 사람들은 대량으로 미국에 이주하기 시작했고, 그 숫자를  1705년부터 1775년 사이에 적어도 5O만 명이 넘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북아일랜드는 더욱 빈곤해졌고 반면에 미국은 풍요롭게 되었다. 그들이 북아일랜드에서 받은 고통을 안다면, 그들이 미국에 갔을 때 왜 미국의 독립을 위한 싸움을 했는가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2) 현대의 아일랜드 장로교회


현재 북아일랜드에는 600개 이상의 장로교회와 15만 명의 신자가 있으며, 더욱이 많은 지지자들을 가지고 있다. 인구 5O만의 벨페스트는 장로교 도시라고 일컬어지고 아일랜드 장로교회의 중심지이다.
여기에는 장로교회의 시설이 많이 있는데 유능한 교수진을 가지고 있는 신학대학이 있고 런던데리에도 하나의 신학대학이 있다.
1660년 이 교회의 통계와 현재의 통계를 비교해 보면 약 3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성장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적어도 그 숫자 위에 미국이나 그 밖의 여러 나라로 많은 교인을 보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뿐만 아니라 이 교회는 오랫동안 분열과 논쟁에 시달렸는데, 그 분열의 원인 가운데는 교리상의 일과 예배할 때 악기를 사용하는 데 대한 시비를 둘러싸고, 더욱이 시편가와 함께 찬송가를 사용할까말까 하는 것에 의해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싸움들을 통해서 아일랜드 장로교회는 강하고 통일된 보수적인 교회로서 성장했다. 이 교회는 세계의 장로교회 가운데서 가장 보수적인 교회 가운데 하나이다.


 

>> 목차고리 : 장로 교회사

>> 연결고리 : 장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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