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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6-07
 제목  잉글랜드의 장로교회
 주제어  [장로교] [청교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1. 종교개혁의 요인


(1) 전반적인 요인들


영국의 종교개혁의 분위기가 형성된 것은, 첫째는 종교개혁의 morning star 라고 불리우는 죤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의 추종자들인 롤라드파(Lollards)의 반교회적(反敎會的) 성경 중심 사상이 영국 전역에 확산된 데에서 기인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래서 1521년에는  500명 정도의 Lollards가 런던 주교에게 체포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둘째는 인문주의(Humanism)의 보급에서 찾을 수 있으니 토마스 모어(Sir Thomas More), 딘 콜렡(Dean Colet), 에라스무스(Erasmus)등의 인문주의자들이 헨리 8세(Henry VIII)와 교제를 함으로서 개혁의 바람을 이르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반(反) 성직제도 사상이 확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에 교회는 영국 토지의 3분의 1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토지 소유는 권력을 낳았고, 이 권력이 발휘되는 과정에서 부정이 생겼다. 성직자들은 정부와 행정을 독점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성직자들의 금력(金力)과 부도덕성을 혐오하게 되었다.


넷째는 Luther사상의 침투와 확산에서 찾을 수 있으니 1517. 10. 31에 95개 조항이 게시 된지 4개월 후에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영국에 입수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스포드(Oxford), 켐부리지(Cambridge) 대학에서 연구되어 영국전역에 확산되었던 것이다.


다섯째는 윌리암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이 독일에서 번역한 영어 성경(신약,1525)이 영국에 입수되어  널리 읽혀 진데 있다고 할 것이다.
16세기에 이르면서 두 가지 요인이 추가적으로 나타났다. 평신도들의 문자교육과 성경의 출판이 그것이다. 결국, 기독교를 이해하게 되면서 엄청난 모순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미 종교개혁의 선구자인 위클리프는 속된 성직자들을 비판하였고, 기독교신앙의 유일한 원천인 성경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었다.


여섯째는 국가주의(Nationalism)의 확산이다, 유럽 전역에  교황의 지배와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국가 주의, 국민 감정이 각 나라마다 확산 된 것이다.


(2) 직접적인 요인 :

영국의 종교개혁은 영국왕 헨리 8세의 이혼사건을 계기로 일어났다.
 Henry는 1509. 4. 22. 18세의 나이에 즉위한다. 아버지 Henry VII의 유언에 따라 2개월 후에  당시 24세의 Catherine of Aragon과 결혼한다. Catherine은 Spain의 공주로 이미 Henry VIII의 형인 Arthur와 16세때에 정략 결혼한 몸이었다.  영국이 오랫동안의 전쟁(30, 100년, 장미전쟁)으로 인해 쇠약해진 국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그 당시의 강국이었던 Spain과 손을 잡기 위해 Henry VII가 자기의 장남과 Catherine을 결혼시킨 것이다. Henry VIII는 건강한 미남이었고 모든 낭만적인 기질을 지니고 있었으며, 승마와 궁술에도 뛰어났다. 음악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고, 신학에도 깊은 관심이 있었던 괄목할 만한 학자였다. 만일 그의 형이 죽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는 영국의 대주교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본래 헨리 8세는 그 시대 사람들과 같이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로 잉글랜드 안에 있는 카톨릭 교회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열렬한 카톨릭교도였다.

   Henry가  Catherine과 결혼한 이후 자녀를 7명을 낳았으나 6명이 사산, 혹은 어려서 죽고 오직 연약하고 신경질적인 딸 Mary만 남았다.  1525년 Catherine이 40세에 더 이상 임신할 수 없음을 안 Henry는 다음 세 가지 이유로 이혼을 고려한다.  (1)후계자 문제.  (2)형의 아내를 취한 점에 대한 양심의 가책. Henry는 자녀들의 죽음을 이 탓으로 돌림. 

 

 (3)시녀 Ann Boleyn과의 열애를 했던 것이다.
Henry는 첫 결혼이 무효임을 선언해 주도록 교황 Clement VII에게 요청하고 교황도 이 요구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그래서 교황은 영국 대주교인 Wolsey에게 이문제의 재판권을 부여한다. 그러나  Catherine의 완강한 거부로 이문제는 다시 로마로 회부된다. 이때 Spain의 Chales V(Catherine의 조카)가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점령하여 교황은 포로가 되고 결과적으로 Henry는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에 Henry는 분노하여 Wolsey를 반역죄로 체포하고 자기의 보좌관으로 Thomas Cranmer(1489-1556)를 기용한다. 그리고 Ann을 황후로 대관하자 교황은 그를 파문한다. 
Henry는 잉글랜드 의회 (Se ven Years' Parliment, 1529-1536)를 소집하여 반 성직, 반 교황의 입장을 표명한다. 그리고 로마로 임직세를 바치지 못하도록 하고 수도원을 해산하여 수도원의 제산을 팔아서 평민들에게 나누워 주었다.  


 헨리 8세는 왕위를 계승할 태자를 낳기 위해서 궁녀 앤 볼린(Anne Boleyn)과 결혼하였고, 교황 클레멘트 7세는 헨리 8세의 이혼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 헨리 8세는 캐더린과 결혼하여 여섯 아이를 낳았으나 유일한 생존자는 메리 공주뿐이었다. 후에 이 메리 공주는 개신교도를 박해하는 '피의 메리'가 된다.
1534년 헨리 8세는 [수장령](Act of Supermacy)을 발표하여 영국 성공회의 유일한 수장이 됨으로써 교회 독립을 꾀하였다. 그 후 헨리는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막대한 수도원의 재산을 소유하므로써 로마교회의 세력의 발판을 제어하였다. 3년 동안 헨리는 376개의 수도원들을 철폐하고 그곳의 유물들을 경매로 팔아치웠다.

 

2. 개혁의 진행과 성공회와 개신교

 

   영국 종교개혁의 간단한 흐름:
   HENRY VIII  ---   EDWARD VI ---  MARY  ---  ELIZABETH ---
   (middle way)        (prostantism)     (romanism)    (middle way)
    JAMES --- CHARLES I
   (영국의 Anglican Church 확립)

 

(1) 헨리 8세(Henry VIII)의 종교 개혁 :

 Henry는 1534년에 의회에서 수장령(The Act Of Supremacy)을 통과시킨 뒤 1536년에는 영국교회의 첫 번째 교리 진술인  Ten Articles이 발표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성경이 신앙의 기초와 내용 임.
 (2) 세례를 통한 중생의 은혜와 필요성.
 (3) 고회(참회)의 필요성.
 (4) 화채설.
 (5) 칭의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얻어짐(선행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6) 화상(image)은 숭배의 목적이 아니라 기억의 수단 암.
 (7) 성자는 삶의 모형이며 기도의 대상이 됨.
 (8) 성자를 통해 기도 할 수 있음.
 (9) 의식은 신비적인 의미가 있음.
 (10)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음.
 *여기에서 괄목할 만한 점은 영어성경이 개 교구의 교회마다 비치되고 읽혀져야 한다고 못 박은 것이다.  1539년에는 Six Articles로 개정되었다.

 

(2) 에드워드 6세(Edward VI) 의 종교개혁(1547-1553):

헨리 8세가 죽은 후, 아들 에드워드 6세(1537-1553)가 1547년 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549년 에드워드는 통일령을 발표하였다. <통일령>이란 영국의 종교개혁 때 성공회의 예전 및 기도서를 통일시킨 법령으로 1549년, 1552년, 1559년, 1562년에 걸쳐서 발표되었다. 또한 루터파와 칼빈파의 교의(dogma)를 참고하여 같은 해에 <공도문>의 일반적인 사용을 단행하였다.

크레머(Cranmer)와 그의 보좌관들에 의해서 개신교 정책이 수행되었다.  예배 개혁(liturgical reform)이 우선되었다.  통일령(The Act Of Uniformaty)에 의하여 성상을 파괴하고 예배의식을 통일하고 예배 시 영어를 사용토록 하였다. 영국교회의 첫 번째 기도서인 The First Prayer Book 를 1549년에 발간 하였고. 교리적 개혁도 이루어져서 1552년에는 42조문(Forty-Two Articles)을 포고하였는데 여기에는  루터 및 칼빈주의 적인 요소가 비중 있게 포함됨. 그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믿음에 의한 칭의.
 (2) 성경의 최고 권위(Supreme Authority).
 (3) 7성례를 2성례로 줄임.
 (4)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을 전적 부인.
 (5) 승려의 결혼 승인.
 (6) 고해성사를 폐지.

 

(3) 메리(Bloody Mary. 1553-1558)여왕의 박해:

 1553년에 왕위에 오른 메리는 로마교회를 부활시키고 교황권을 재확인하였다.(Back to Romanism). 이때 개혁파 성직자가 2,000명이나 사형을 당하였다.
 그는 캐더린(Catherine)의 딸로써, 앞 시대에 대하여 매우 반발적이었다. 매우 급한 성격이었고 이때에 많은 박해와 아울러 많은 순교가 있었다. Cranmer를 화형에 처하였고 이때에 많은 개신교도들이 영국 밖으로 도피하였다. 그녀의 이 같은 정책이 오히려 영국을 개신교 국으로 만드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4) 에리자베스(Elizabeth, 1558-1603)여왕:

 앤(Ann)의 딸로서 여왕에 올랐다. 그의 정책은 매우 온건 하였다.  Romanist, Lutheran, Calvinist를 섞어 놓은 듯한 정책을 사용하였다. 이것이 개신교(prostant)의 출현 배경이 된다.
1559년 엘리자베드 여왕은 다시 성공회의 재흥을 도모하였다. 1563년 <39개조>를 제정 반포하였는데, 이것은 앵글리카니즘(Anglicanism) 신조의 기본이 되었다. <39개조)(Thirth-nine Articles)에는 칼빈주의적 요소가 많이 들어있다. 엘리자베드는 '최고의 통치자'(Supreme Governor)로서 자신이 영구국교(성공회)를 위해 통치자로 자리를 굳혔다. 이러한 종교적 정착은 로마교회측의 도전을 받았고, 동시에 열성적인 청교도(Puritans)의 도전도 받게 되었다.
대륙의 종교개혁은 근본적인 면에서 하나의 신학적 개혁(a theological reform)이었다. 즉, 하나의 교리적 운동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종교개혁은 교리적인 형태를 주로하여 표현되지 않았다. 엘리자베드와 그녀의 주교들이 세운 영국교회(성공회)는 세가지 구성 요소들, 곧 정치, 신앙, 예배로 이루어진 구성물이었다. 따라서 영국교회의 정치 형태는 전통에 대한 영국의 강한 존경심을 보여주었다.
영국교회의 교리적 신앙의 표현인 <39개조>는 신조는 가능하면 적고 단순해야 한다는, 그리고 인간의 삶의 방식이 신앙의 지적인 표현보다 궁극적으로 보다 중요한 것이라는 영국인의 감정을 표현해 주고 있다.

 

(5) 제임스 1세(James I, 1603-1625):

 그의 어머니는 메리(Mary, Queen of Scots)였다. Scotland에서 어머니 Mary의 퇴위 후  James VI로 즉위 하였다. Elizabeth의 사후에는 영국에서 James VI로 즉위하였다.  이때 영국 안의  Catholic, Presbyterian, Anglican 이 각각 서로 다른 기대감을 갖는다. 왕은 결국 청교들의 탄원서를 거부하고 영국국교의 편을 들었다. 그는 비국교도들을 박해하고 추방했다. "감독이 없으면 왕도 없다(no bishop,no king)" 는 주의로 국교를 옹호했으며  왕권신수설(王權 神收說, Divine right of kings)로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는 7년 간에 걸쳐서 킹 제임스 번역 성경(Authorized Version of King James)을 완역하여 출간했다. 그가 죽기 얼마 전에 영국과 화란의 100여명의 청교도들이  죤 로빈슨(John Robinson) 목사의 지도로  May Flower라는 이름의 180t의 배를 타고 Plymouth를 떠나 신대륙 동부에 도착했다.

 

(6) 챨스 1세(Charles I, 1625-1649):

 제임스 1세(James I)의 아들로서. 비 국교도들에 대한 박해를 강화하였다. 의회가 이를 비난하자, 이에 왕은 의회를 해산한다(1629). 그러나 1640년, 의회는 단독으로 장기의회(Long Parliament)를 소집하여 왕에게 대항하였다.  이때 의회에는 장로교의 세력이 우세하였다. 1642년 에 시민 전쟁이 일어났고 의회는 청교도와 합세하여 개혁을 수행하고 감독제를 폐지하였다. 장기의회는 웨스트 민스터 총회(Westminster Assembly)를 소집하였다(1643.7).  Westminster Assembly는 1643-1647에 걸쳐서 소집되었으며 120명의 정회원으로 구성되었고 이들의 대부분은 주로 장로교 세력이었다. 처음에는 Elizabeth의 39개 조항을 수정하다가 전혀 새로운 신앙고백서인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스코틀랜드(Scotland)장로교에서는 사절단을 파견하여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이 고백서는 모두 33장으로 되어 있는데 종교개혁 이후 125년 간의 신학활동의 결론이며 청교도적 Calvinism신학의 결정으로 여겨진다.   이 고백서의 특징은 성경 관을 제일 먼저 취급하는 점이며 Assembly는 이기간 동안에 다음과 같은 걸작을 내 놓게 된다.   
 (1)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2) 대,소 요리문답(Larger and Shorter Catechism)
 (3) 예배 모범(Directory of public worship)

 

3. 청교도 운동

 

  (1) 청교도 운동의 역사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여 망명한 프로테스탄트들을 귀국하도록 허용하자 제네바와 대륙의 각지로부터 잉글랜드로 귀국했는데, 그들은 제네바 성경과 칼빈주의 신학과 장로주의를 가지고 돌아 왔다. 많은 사람들은 제네바 성경을 읽게 되었고, 돌아온 망명자들로부터 대륙에서의 프로테스탄트의 성장의 정도를 듣고 잉글랜드에는 참으로 지금까지 종교개혁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영국 국교는  좀더 순수하게, 즉 더욱 성경적인 교회 정치형태와, 더욱 성경적인 교리와. 더욱 성경적인 예배형식과, 더욱 성경적인 생활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에게 청교도(Puritan)란 별명을 붙여주었는데 이 때가 1565년경이었다.
일반적으로 청교도 운동은 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이 선포된 1559년경에 시작되어, 7세기 후엽 1662년의 통일령과 뒤이어 일어난 대 추방령(Great Ejection)과 함께 막을 내린 것으로 간주한다. 바꾸어 말하면 청교도 운동은 그들을 의심한 엘리자베스 1세 때 시작되어 그들을 두려워 한 제임스 1세 때 성장하였고, 그들을 경멸한 찰스 1세와 그의 충실한 추종자인 윌리엄 라우드(William Laud) 때 상당한 세력을 얻게 되었으며, 그들을 존경한 크롬웰(Cromwell)의 통치 하에서 당당한 주도권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미워한 챨스 2세와 감독들 하에서 청교도 운동은 끝이 나게 되었다.

 

1) 16세기 청교도 첫 세대들은 정치적인 수단을 통하여 교회 정치나 예배 의식에 있어서 필요한 개혁을 단행하려고 시도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로마 카톨릭 주의와 제네바의 칼빈주의 사이에서 중도의 길을 가는 정책을 취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성공회(Anglican church)의 원형이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카톨릭의 많은 정치적, 종교적 신조들을 거부하는 한편 국가뿐 아니라 교회마저도 장악하기 위하여 교회 안에 존재하는 청교도들의 극단주의를 배격하였다. 그리고 1559년 수장령(The Acts of Sulremacy)과 통일령, 1563년의 주교회의에 의하여 자신이 만들 앵글리칸 모형에 순응하도록 촉구하였다.
   이 때부터 청교도 운동은 정치적으로 실패하였다. 의회법을 통하여 下向式으로 교회의 개혁을 성공시키지 못하자 이제는 전에 없는 열정을 가지고 강단에서의 설교와 출판 및 개인적인 영향력을 통하여 시민들에게 호소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上向式 종교개혁을 추구한 것이다. 
   청교도 운동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통치 후반기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으며, 같은 목적과 이상과 마음으로 헌신한 수많은 사람이 출현함에 따라 확산되었다. 윌리암 퍼킨즈(William Perkins)의 책들과, 리차드 로저스(Richard Rodgers)의 '일곱 개의 小論文'(Seven Treatise)은 청교도적 경건의 전형적인 표준과 함께 수천의 광채를 일으키며 불꽃을 피우게 하였다.

 

2) 제임스 1세(1603~1625)는 그의 장로교 요람을 버리고 감독주의를 짊어졌고, 또 청교도 지도자들에게 맹세하기를 그들을 이 땅에서부터 몰아내겠다고 하였다. 제임스 1세가 구 잉글랜드(Old England)로부터 몰아내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뉴 잉글랜드(New England)로 옮기셨고, 미국으로 가지 않은 사람들은 화란의 항구에서 은신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제임스 1세의 왕위가 그 아들 찰스 1세(1625~1649)에게 넘어갈 때 대다수 청교도들은 국내에 머물면서 수많은 핍박과 환난을 인내하며 참아내었다.

 

3) 찰스 1세에 의한 영국민의 자유에 대한 박탈과 그의 완고한 추종자이었던 대주교 윌리암 라우드의 행동은 개신교 사상을 핍박하였고, 경건하고 신실한 개인의 존엄성과 책임감에 대하여 바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분노케 하였다. 이로 인하여 호전적인 '청치적 청교도주의'가 탄생되었고 이것은 의회주의를 통하여 공화주의를 활짝 피게 하였다. 그것은 종교적인 청교도주의를 야기 시킨 혁명이었다.

 

4) 마침내 참된 자유의 평온한 시대와 시민전쟁(1642~1648)이 군주주의와 교권주의의 맹위를 감추게 하였을 때 올리버 크롬웰(1654~1658)의 우호적인 통치하에서 청교도주의는 최고의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그들의 사상을 가장 왕성하게 표현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청교도주의는 동료들을 불안케 하였다. 많은 청교도들이 온건한 왕정주의자로서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크롬웰을 신뢰하지 않았다.
   청교도들의 정치적인 모임들과 일반적으로 의회주의자들의 모임은 지배자들과 피지배자들 모두를 산산히 흩어버렸다. 그리고 올리버 크롬웰의 세력이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할 때 무정부주의 상태의 국가는 새로운 군주시대로 전환하였다.

 

5) 크롬웰의 죽음과 그의 공화정치 몰락 후에 스튜어트 왕가인 찰스 2세에 의한 잉글랜드 왕좌의 재빠른 복구는 청교도 혁명의 종말로 보였다. 청교도주의가 시민전쟁의 단순한 정치적 혁명이었다면 그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싹튼 많은 것들이 청교도주의가 보다 크고 순수한 영적인 청교도 혁명이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1660년 후에 왕정주의자들의 의회가 대주교들과 다시 공모하여 정치적 청교도주의와 종교적 청교도주의를 구별하며, 청교도들에 대한 핍박을 재개하였다. 곧장 기도 에식서가 재차 강조되었고 1662년 통일령에 의해 이를 통과시켰다. 새로 제정된 기도 예식서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무조건 동의하며 순응해야 함은 물론, 이 법령은 장로교 목사안수식을 포기할 것과 감독주의식 안수를 재차 받도록 강요하고 있었다. 그것은 또한 찰스 1세를 저항할 수 있게 한 의회의 권한을 합법화시킨 1643년의 '거룩한 협약과 언약'(Solemn League and Covenant)에 대한 철회를 포함하여 찰스에게 충성할 것을 서약하도록 요구하였다.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왕의 요구에 서약할 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1662년 교회의 뛰어난 지도자 중 2000여명이 그들의 사역지로부터 추방당하여 세상으로 쫓겨났고, 많은 자들이 빈곤에 허덕였다. 그 다음에 취해진 조치는 추방당한 목사들이 개별적으로 인도하는 예배조차 집전하지 못하게 하였고, 만일 설교를 하다가 적발되면 엄청난 벌금을 부가하는 일련의 잔인하고 무자비한 법령이 제정된 것이다. 더 나아가 전체 청교도 운동을 사이비 종파의 집단으로 몰아세웠으며, 청교도들이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캠페인을 벌였다.
   그러한 일련의 조치가 청교도주의를 파괴하고 실패하게 만들었는가? 역사가 보여주는 답변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청교도주의는 핍박과 정치적 실패로 말미암아 파멸된 것이 아니라 철저한 종교적인 非국교도로 전향하도록 변형시킨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청교도주의는 그들 자신의 새로운 무대를 만들었으며 국가의 종교적인 발전에 있어서 새로운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1688년 명예혁명(The Glorious Revolution)을 성사시키면서 옛날의 주권 자유를 회복하였다. 그들이 이룩한 무대는 1790년대에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로부터 시작하여 빅토리아 여왕시대에 이르기까지 펼쳐진 非국교도 선교운동의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2) 청교도 운동의 특성

 

   청교도 운동의 지도자 윌리암 아메스(William Ames)는 신학(divinity)을 '하나님께 대한 살아있는 교리'(the doctrine of living of God)라고 정의하였다. 그는 청교도 운동에 흐르는 정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청교도 주의란 단순히 일련의 율법이나 교리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의 활력소이다. 거룩한 생활의 아름다움을 보여줌으로 그것을 향하여 움직이게 하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삶의 만족감에 대한 가능성을 감탄해하며, 희열을 느끼게 하는 비젼(vision)이요 충동이다.
더우기 엄격한 규율은 뜨거운 헌신과 어울러져서 청교도주의를 한편으로는 천박한 신비주의로부터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세속적이며 피상적인 종교로부터 보호하였다. 바로 이 율법과 은혜의 절묘한 결합이 청교도적 경건 생활의 주된 요소였다"

 

1) 개인의 경건 생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매일 매일의 삶을 눈여겨 살피며 차분히 경건스러운 개인 및 가족들의 기도모임으로 시작되어 마쳤다. 직업전선에서의 일거리나 집안 일이나 먹고 마시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실행되었고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추구하며 행하여졌다.
   사업상의 관계이든, 개인적인 친분관계이든 상관없이 모든 관계는 영적인 원리에 입각하여 규정되었다. 일하지 않는 시간은 기꺼이 그리고 열심히 성경연구에 몰두하였고, 또 公예배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경건한 대화를 나누거나 열정적인 간증을 나누었고, 영혼의 유익을 주는 모든 다른 수단들로 남은 시간들을 보낸 것이다.

 

2) 건전한 교리
   청교도들은 참된 교리를 구체화함으로 사람들 앞에 분명한 진리의 빛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사는 삶과 무언가 다른 빛나는 삶을 보았으며, 또한 그 많은 부분들이 사람들과 동떨어져 있지 않으면서 깜짝 놀랄만한 풍경의 도덕적, 영적인 대륙으로 이끄는 삶을 보았던 것이다. 영적 삶의 생생함과 더불어서 성경적인 사상 위에 서 있는 성경적인 삶에 기초를 둔 교리적 올바름과 견고함이 반드시 있었다. Richard Baxter는 '건전한 교리는 건전한 판단과 건전한 마음, 건전한 대화(삶)와 건전한 양심을 만든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교리는 올바른 것이 아니든지 바르게 이해되지 못한 것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신학적인 사상에 있어서 다분히 칼빈주의적인 그들은 섭리와 은혜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개념을 아주 높이 다루었다. 이것은 그들이 가장 어려운 역경의 체험 속에서도 자신들을 지탱하게 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와 평강에 잘 반영되어 있는 사상이다.  또한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와 궁핍과 의지를 보여줄 수 있게 한 그들의 강한 복음의 능력에 반영된 사상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교리가 그들을 고양시켰다면 죄에 대한 교리는 그들을 겸손하게 만들었다. 타락한 인간의 심성 속에 있는 사악한 잠재력과 마찬가지로 죄를 범할 가능성이 있는 그들의 경향을 깨닫고 청교도들은 죄를 逆命 중의 역명이요, 모든 악의 근원임을 서슴없이 밝혀내었다. 청교도들은 죄의 사악한 모습을 파헤치면서 자만심을 파괴하고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으로 인간을 인도하였다.
  
3) 질서있는 교회 생활
   청교도주의는 영국교회를 개혁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그 일을 행함에 있어서 그들은 성경를 따라 행하였고, 오직 성경만으로 개혁을 단행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세속 정권이나 교회정치나 교회생활의 모든 양식에 있어서 신약성경의 충분하고도 명백한 가르침을 더하거나 감할 권한이 없음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성공회의 예식과 의복을 거부하였으며, 전통의 산물인 감독교회 정치를 배격하였다.
   영적이며 교회론적인 문제에 있어서 교회는 세상 군주의 명령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교회의 나아갈 길을 명령하는 것인가? 교회적인 전통이나 경험들로부터 구분되는 것으로서 성경이 교회를 명령하는 것인가? 간단히 말해서 교회와 영적인 삶의 영역을 누가 통치하는가, 하나님인가 사람인가? 이런 것들이 청교도들이 묻는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청교도들의 답변은 성경이라는 유일한 절대 권위 하에 교회의 자유를 위한 분명한 선언이었다. 이것을 위하여 그들은 요지부동한 결단과 더불어 고통받을 준비가 기꺼이 되어 있었다.

 

3. 웨스트민스터 회의

 

(1) 웨스트민스터 회의
  웨스터민스터 회의가 열린 곳은 영국 의회정치(議會政治)의 본거지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다.  웨스트민스터란 서쪽의 대사원(大寺院)이란 의미로 ‘시티’의 서쪽에 있기 때문이다.  8세기에 교회가 있었으며, 국왕이 대관식(戴冠式)을 올리는 고딕 양식의 사원으로 긴 스테인드 글래스가 수없이 나열되어 있다.
에드워드 왕이 세운 교회로 실내는 여러 개의 예배당과 위인들의 관을 세워 놓은 묘가 많이 있다.   사원에 들어서는 순간 한 순간에 수 백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수많은 묘와 조각품들로 가득한 사원이기 때문이다.
1643년 7월 1일-1649년 2월 22일까지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총회에서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信仰告白書,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는 칼빈 사상의 대표적 신조(信條)요 장로교회(長老敎會)의 표준 신조가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작성된 “신앙고백”을 비롯한 “대요리 문답”, “소요리 문답”, “공중예배 지침서”, “장로회 교회 정치 체제”는 영국뿐만 아니라 온 세계 장로회의 헌장이나 다름이 없다.  우리 한국 장로 교회의 신앙고백서는 거의 원안을 따르고 있으나 “장로교 정치체제(政治體制)”만큼은 영국 것을 도입치 않았다. 
 청교도가 주축이 된 의회는 특히 종교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75년에 걸쳐서 청교도는 영국의 교회가 더욱 순수하게, 즉 더욱 성경적인 교회 정치 형태, 더욱 순수한 교리, 더욱 순수한 예배 형식, 더욱 순수한 기독교인의 생활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을 계속했다. 그래서 의회는 교회의 역사에서 이른바 “신학자의 웨스트민스터 회의”라고 불려지고 있는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는 영국의 가장 훌륭한 목사 121명과 하원의원 2O명, 상원의원 1O명, 계 151명으로 구성되었다. 두 명의 목사를 제외하고 목사 모두는 영국 국교의 목사로 안수를 받은 사람들이며, 대부분 모두가 청교도였고 칼빈주의자들이며 대학 졸업자들이었다.


 교회 정치 형태에 대해서는 의원간에 의견의 차이가 있고. 다수의 사람들은 장로정치를 회망했지만, 한편 꽤나 많은 사람들이 회중정치 형태(Congregational form)를 바랐으며, 소수이기는 했지만 감독정치를 바라는 사람도 있었다. 교회 정치의 형태야말로 이 회의에서 가장 열렬하게, 또한 가장 길게 토론하였던 의제였다.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처음 1643년 7월 1일에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에서 열려서 5년 6개월 22일 간 계속되었고, 그 사이에 1,163회의 전체회의가 열렸고, 대단히 많은 위원회와 소위원회도 개최되었다.
회의는 의회군에게 전황이 불리하게 된 상태에서 시작되었기에 거의 진전되지 않고. 의회는 급히 스코틀랜드에 대표단을 파견해서 군사적 원조를 구하게 되었다.

 

 스코틀랜드는 웨스트민스터 회의와 국회의 전 의원이 “엄숙한 동맹”(Solemn Leagueand Covenant)에 서명할 것을 조건으로 원군을 보낼 것을 동의했다. 이 동맹의 초안은 스코틀랜드 측이 만들었고 잉글랜드는 이것에 동의했던 것이다. 또한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는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는 것에도 합의가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회의와 국회의 모든 의원이 “엄숙한 동맹”에 서명했을 때 그들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존속과 방위, 그리고“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교회를 하나님 말씀에 따른 교리, 교회정치. 예배와 권징의 면에서 개혁하여 가장 잘 개혁된 교회, 즉 모범적인 교회를 만들 것”을 굳게 서약했던 것이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6명의 대표단을 파견했는데, 그 가운데 4명은 목사, 2명은 장로로서, 목사는 알렉산더 헨더슨, 베일리, 죠지 길레스피, 사무엘 러터포드였다. 그들은 회의에는 참가했지만 투표는 하지 않았고, 적은 수였지만 회의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643년 9월에 스코틀랜드 대표단이 도착해서 “엄숙한 동맹”에 서명한 때로부터 회의 활동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그때까지는 영국 국교의 “39개조 신조”를 토대로 해서 이것을 개정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했고, 새로운 신앙고백을 만들 것은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39개조 신조”를 버리고 영국 국교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것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훌륭한 신학자들의 모임임과 동시에 기독교사상 보기 힘든 경건한 사람들의 모임이었으며, 많은 시간을 기도하는 데 사용하고, 모든 것이 경건한 마음으로 충만해서 진행되었다.

 

(2)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업적

이렇게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5년 반 이상 기도하면서 회의를 계속해서 “장로주의 표준”(Prsbyterian Standards)이라고 불리 우는 중요한 문서를 작성했다. 각 문서가 만들어진 순서는, 각 소 회의로부터 “겸허한 조언”을 회의에 보내온 것을, 회의는 단지 그것을 결재만 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을 가지고 토론했다. 이 장로주의 표준이 작성된 순서는 다음과 같다.
회의는 1643년 7월 1일에 개회되었는데,
“공예배 지침”(Directory for the Public Worship of God)을 1644년 12월에 완성하고, 1645년 1월의 회의에서 승인된 이후 교회의 예배에서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 대신으로 사용되었다.
“정치 규준”(Form of Church  Government and Ordination)은 1444년 11월에 완성되었고 회의의 승인은 1648년에 받았다. 이 정치 규준은 그 정치 형태에서 장로주의였고, 이것에 의해서 영국 국교회의 감독과 대사제 제도의 감독정치를 대신해서 장로주의 정치가 탄생한 것이다.
“신앙고백”(The Confession of Faith)은 1646년 12월에 완성되었고, 회의의 승인은 1648년 3월에 났으며, “대 ·소요리문답서”(Larger and shorter Catechism)는 1646년 가을에 완성되어 회의의 승인은 1648년 9월에 났다. 이 회의는 교회의 예배용 시편가(詩篇歌; Palter)를 만들고자 하는 강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몇 개의 대립하는 안들이 있었는데 의회와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양 의원직을 가지고 있던 프랜시스 라우스(Francis Rous)의 안이, 많은 개정을 한 후 1645년 11월에서 승인되어 다음해 의회를 통과했다. 그 안이 더욱 많은 개정을 거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총회도 그것을 채택했던 것이다.

 

 1)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649년)
     교리  1-38
     십계명  39-81
     구원의 방편, 82-97
     주기도  98-107

 

 2)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649년)
     교리 1   1-45 
     교리 2   46-90 
     십계명 1  91-121 
     십계명 2  122-148 
     구원의 방편  149-177 
     주기도  178-196

 

 3)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제1장 성경에 관하여 
     제2장 하나님과 성삼위일체에 관하여 
     제3장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에 관하여 
     제4장 창조에 관하여 
     제5장 섭리에 관하여 
     제6장 인간의 타락과 죄와 형벌에 관하여 
     제7장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에 관하여 
     제8장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제9장 자유의지에 관하여 
     제10장 실제적 부르심에 관하여 
     제11장 의인에 관하여 
     제12장 양자에 관하여 
     제13장 성화에 관하여 
     제14장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에 관하여 
     제15장 생명에 이르는 회개에 관하여 
     제16장 선행에 관하여
     제17장 성도들의 궁극적 구원에 관하여 
     제18장 은혜와 구원의 확실성에 관하여 
     제19장 하나님의 율법에 관하여 
     제20장 신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관하여 
     제21장 예배와 안식일에 관하여 
     제22장 합당한 맹세와 서원에 관하여 
     제23장 관공직에 관하여 
     제24장 결혼과 이혼에 관하여 
     제25장 교회에 관하여 
     제26장 성도의 교제에 관하여 
     제27장 성례전에 관하여 
     제28장 세례에 관하여 
     제29장 주의 만찬에 관하여 
     제30장 교회의 권징에 관하여 
     제31장 대회와 회의에 관하여 
     제32장 사람의 사후 상태와 부활에 관하여 
     제33장 최후의 심판에 관하여 
     제34장 성령에 관하여 
     제35장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과 선교에 관하여

 

선 언 문

 

 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 소요리 문답 구조 비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의 상호 구조를 잘 정리하게 되면 어떤 신학적 구조에 기초되었는지를 알 수 있고 또한 각 신조의 부족한 부분을 그 자체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 지를 확인할 수 있게 해 준다.
조직신학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요리문답      소요리문답
  서론    1장   성경론(1-10항)        성경        1-6문           1-3문
  신론    2장   삼위일체(1-3항)       삼위일체 7-11문         4-6문
             3장   작정(예정)(1-8항)    작정        12-13문       7-8문
             4장   창조(1-2항)             창조        14-17문       8-10문
             5장   섭리(1-7항)             섭리        18-20문       11-12문
  인간론 6장   타락, 죄와 형벌(1-6항) 타락,죄 21-29문     13-19문
             7장   은혜언약(1-6항)       언약   30-35문      20문
  기독론  8장 중보 그리스도(1-8항)   그리스도 36-57문    21-28문
  구원론  9장 자유의지(1-5항)        자유의지 149-152문   82-84문
          10장 소명(1-4항)           소명  58-61, 67-68    29-32문
          11장 칭의(1-6항)           칭의  70-73문         33문
          12장 양자(1항)              양자  74문            34문
          13장 성화(1-3항)           성화 75, 77-78문      35-36문
          14장 신앙(1-3항)           신앙 153, 72-73문     85-86문
          15장 회개(1-6항)           회개  76문            87문
          16장 선행(1-7항)           선행  78문              x
          17장 견인(1-3항)          견인  79-81문            x
          18장 구원의 확신(1-4항)  확신  80-81문 신자의 삶 39-107문
  교회론 19장 율법(1-7항)         일반적 율법 91-98문       39-41문
                                   십계명 98-152문           41-84문
          20장 자유(1-4항)        자유    x                     x
          21장 예배와 안식일(1-8항) 구원유익 153-196문    86-107문
                                  서론  153-154문           86-88문
                                  말씀  155-160문           89-90문
                                  기도  178-186문           98-90문
                                  주기도문 187-196문       91-107문
          22장 맹세와 서원(1-7항)   맹세, 서원  x               x
          23장 국가의 위정자(1-4항)  국가 위정자  x            x
          24장 결혼과 이혼(1-6항)    결혼과 이혼  x            x
          25장 교회(1-6항)          교회  61-66, 69문           x
          26장 성도의 교통(1-3항)  성도의 교통 65-66,69,82-83,86,90
                                                              36-38문
          27장 성례(1-5항)        성례 161-164문            91-93문
                                   말씀 153-160문            88-90문
          28장 세례(1-7항)        세례 165-167문            94-95문
          29장 주의 만찬(1-8항)   성찬 168-177문            96-97문
          30장 교회의 권징(1-4항)  권징     x                  x
          31장 대회와 총회(1-4항)  대회,총회  x                x
  종말론 32장 죽음과 부활(1-3항)  영화   82-86문           37-38문
                                   부활 84-85, 87-88문
          33장 최후 심판(1-3항)     심판 88-90문               38문

 

 5) 예배 모범과 정치의 특징
 
 WMC의 예배와 정치 부분은 엄밀한 개혁주의의 주된 특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역사적으로 장로교가 개혁주의내에서 칼빈의 정신에 가깝고 가장 엄밀한 개혁주의가 된 것은 예배와 교회정치에서의 개혁이었다.  이런 정신은 '칼빈의 종교개혁의 필요성에 관하여'의 논문에서 종교개혁의 중요한 관점으로 '예배와 구원, 성례와 교회정치'로 제시되고 있다.  또한 이 내용은 역사적으로 엄밀한 개혁주의의 노선을 정리할 때도 매우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보통 '6가지 요소'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장로교 정치원리는 성직자회에 있다', '세속정치와 교회의 독립성', '주일성수와 예배의식들'등 3가지가 예배와 정치와 관련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개혁주의(퓨리탄)들의 순수성이란 이런 주일성수와 예배의식에 대해서 생명을 걸고 그 개혁주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며 이것이 WMC의 순수한 정신인 것이다.

 

 ① 예배
  WMC에서 예배에 있어서는 예배의 본질적인 개념도 중요할뿐더러 예배의식문제도 매우 중요한 개념임을 이해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개혁주의에서 예배의식에 대한 논쟁 중, 가장 핵심적으로 제시되었던 내용이 무엇인가를 정리하는 것도 중요하다.  즉 골로새서 2장 23절의 해석문제와 적용이 그 주된 내용인 것이다.  여기서 '자의적 숭배'에 대한 이해가 전 개혁주의 예배의식을 결정하게되는 중요한 정신을 낳게 되었다.
  이것은 예배의 규범적 원리를 개혁주의에서는 오직 성경의 원칙에 따라서 적용하는 중요한 정신인 것이다.  이런 정신에 따라서 웨스트민스터는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최선의 방법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 제정되었고 그 분 자신의 계시하신 뜻에 의해 제한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망상이나 고안이나 사단의 지시에 따라 어떤 가견적 예배 대상 앞에 혹은 성경에 말씀하지 않은 방법으로 예배드리면 안 된다"라고 고백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정신은 예배의 대상으로서 하나님 스스로 자신에 대한 예배를 스스로 결정하신다는 하나님 주권에 대한 인식이다.  이런 주권 사상은 위의 "성경론"과 또다시 연결되어 오직 성경의 규범을 따라서 그 방식을 찾는 정신을 낳게 되었다.  이것은 자연적으로 인간 자의적인 그 어떤 생각이나 아무리 선한 의도나 행동조차도 금지하는 정신인 것이다. 
  결국 WMC 안에서는 다음과 같은 예배의 요소들을 정리하게 되었다.  "신앙고백, 기도, 시편찬송, 말씀, 성찬" 등이다.

 

 ② 정치

 ㉠ 초판의 국가 위정자의 종교 소집권의 권한 문제.
  WMC의 정치 부분에서는 크게 두 부분의 중요한 부분을 들 수 있는데, 첫째로는 원문상의 국가 위정자의 종교회의 소집 권한에 대한 문제이며, 둘째로는 장로 정치에 대한 문제이다.  특히 WMC의 원문과 관련해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초판(1647)에서 23장 3항88)과 31장2항89)이 문제가 되고있다. 이 부분에서 국가 위정자가 종교 회의를 소집하고 또한 대회와 협의회를 소집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한이 있다고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시 웨스트민스터 총회 자체가 의회의 건의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 영향을 입은 것을 많은 학자들은 보고 있다.  그러나 장로교인을 중심으로 한 신학자들을 통해서 이 문제는 곧 수정되었다.  그래서 지금의 재판 원문은 수정된 형태의 조항을 사용하고 있다.  즉 국가 위정자의 종교 회의 소집권한과 대회와 협의회의 권한을 삭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오직 교회 지도자만이 그 권한을 가질 수 있다고 명시되었다.

 ㉡ 장로회(unitati)정치 방식과 "may be"(지교회와 노회와 관계문제)
  첫 번째로 장로교 정치원리는 성직자 개인에게(uni)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 회자체(unitati)에 있다는 것이다.
   장로교주의자들의 비판은 교회의 열쇠가 믿는 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에게도 아니요 교회나 사도를 대표하는 한 개인 베드로에게도 아닌, 사도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에게 주어졌다는 대답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제정된 공직자들을 가진 지교회들로 구성되되, 한 고위성직자(one Lord prelate)나 한 머리교회(one head-Church) 혹은 주교회(the chiefe Church)와 결합된 매어있는 교회들이 아니라, 한 정치형태아래서 다스리는 직책자들과 다스림을 받는 여러 지교회들로서, 그들이 모여 가시적으로 교통하는 지역교회, 국가교회, 세계교회가 완전한 교회라는 것이 장로교의 근본사상이다.
 또한 그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결정에서와 같이 성경에서 증거 된 대부분의 교회들은 회중교회나 관구교회가 아니라, 장로교 정치형태를 가진 교회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장로회(unitati)정치의 중요한 특징은 복수 장로들에 의한 치리인 것이다. 사도는 교회의 정상적인 치리를 수행하기 위해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 원리는 오늘날 많은 회중 안에서 광범위하게 무시되고 있다.  빈번하게, 교회는 ,효력면에서, 종교적인 독재자(dictator)가 되어 가는 목사들의 변덕(whim)아래서 운영되고 있다.  다른 곳에서는 교회가 회중 투표를 통해서 중대한 사안들을 결정하기도 하며, 그 안에서 각 사람들은 다스림 안에 동일한 지분을 갖고 있는 셈이 된고 만다.  근본적으로 이러한 조직은 성경적인 틀을 가지지 못한 것으로 늘 지적되어 왔었다.  성경은 연합된 자격으로 다스리는 장로들로 구성된 집단의 손에 회중에 대한 치리을 부여하였다.  장로들이 집합적으로(collectively) 다스리기 때문에 어떤 개인도 교회의 구속력있는 결정을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장로교의 원리는 어떤 형태로든지 한 회 안에서 혹은 그 회를  넘어서 어떤 한 개인에게 권리가 이양되는 모든 교회의 정치활동을 배제하면서도, 교회의 정치활동도 교회의 성격에 포함시킨다.  지교회로서 완전하다고 보지 않는다.  지교회 밖에 노회나 총회를 두고 있다.
  다만 지교회 안에 다스리는 장로가 있고 가르치는 장로가 의장으로 하는 장로회인 당회가 있지만, 지교회의 당회와 같이 다스리는 성격으로 노회가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노회 안에서의 목사들과 장로총대들 사이에 동등성이 강조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스코틀란드의 교회전통에서 회를 대표하는 상비적인 인물들( 예를들면,  a perpetual moderator)이 있었다라기 보다는, 그 때 회의 중에서 결정되었던 의장들이나 위원회들, 총대들이 있었다는 것은 오래된 바른 가르침이 된 것이다.
 이러한 성격들로 인해서 장로교 정치는 역사적으로 개혁주의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주의 역사 속에서는 늘 교회 개혁을 일으킬 때마다.  위와 같은 정신에서의 정치를 개혁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3) 웨스트민스터 표준과 스코틀랜드교회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는 웨스트민스터 표준이 완성되자 바로 채용했다. 이것은 장로교회의 역사상에 있어서 특별한 사건가운데 하나이며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이 교회는 그때까지 존 녹스(John Knox)이래로 가지고 있었던 그들 자신의 신앙고백, 교리 문답 정치규준, 예배 지침, 시편가와 찬송가를 폐기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 ·소요리문답, 정치 규준, 예배 지침, 시편가를 채용했던 것이다.
 채용한 이유는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의원은 영국의 청교도 목사 121명과 스코틀랜드로부터 파송 된 4명의 목사로 구성했었을 뿐아니라, 웨스트민스터 신앙 표준이 가지고 있는 훌륭한 가치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이렇게 하는 것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장로교회가 합동하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확실히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세 나라에 걸쳐서 위대한 통일 장로교회를 만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꿈은 잉글랜드에서 장로주의가 폐기되었기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다.
 스코틀랜드의 장로주의자가 가지고 있는 꿈은 깨졌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 표준은 그들의 몽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에 커다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장로주의가 영국에서 찬란한 빛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신앙 가운데 계속 살아 있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사람들의 이주와 전도에 의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표준은 북아일랜드.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에 그리고 땅 끝에 까지 전하여졌던 것이다.

 

5. 잉글랜드의 장로교회

 

잉글랜드의 의회가 전술한 “장로주의 표준”을 채택한 결과 잉글랜드의 교회는 감독정치를 폐기하고,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장로교회가 되었다. 장로주의 규준은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거부한 2,OOO명의 국교회(國敎會) 목사는 그들의 교회와 목사관으로 부터 추방되었다. 그러나 의회는 추방된 목사에게 정부가 지급하던 이전 급여의 5분의 1을 계속 지급하도록 했다.
장로교회가 잉글랜드의 국교가 되었다는 것으로 민중의 마음을 확실히 사로잡는 것은 어려웠다. 민중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교회의 정치 형태가 감독정치로부터 장로정치로 갑자기 전환하는 사태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영국의 정치적 흐름이 변하는 것과 함께 국민은 감독정치로 복귀하게 되었다.
 이 역사의 변화에 대하여 간단히 말하자면, 찰스 1세와 의회 사이에 내전이 시작되었다. 스코틀랜드의 군사 원조를 받고. 올리버 크롬웰(OliverCromwell)의 지휘를 받은 의회군은 찰스와 그 군대에 대해 완승했다. 1649년 1월에 찰스는 런던 탑에서 처형되고. 올리버 크롬웰을 호민관(護民官)으로 하는 공화정치가 수립되었다. 그는 1658년에 죽고, 1660년에 찰스 2세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다.

 찰스 2세가 국왕이 되자마자 영국의 교회는 감독정치로 복귀됐다. 이전의 영국 국교회의 정치와 예배 형식을 강요하는 엄한 법률이 통과되고, 이 강요에 동의하지 않았던 약 2천 명의 장로교회 목사는 목사관과 교회로부터 추방되었다.

 또한 추방된 목사가 전임지(前任地)로부터 5마일 이내에, 그리고 자치도시로부터 5마일 이내에 출입을 금하는 법률〔5마일령(Five Mile Act)과, 목사가 전직 가능한 유일의 직업인 선생도, 비국교회의 목사가 되는 것은 금하는 법률〔지방자치체법(Corporation Act〕도 만들었던 것이다.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의 치하에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장로주의자가 받은 박해는 교회의 역사상 가장 엄한 것 가운데 하나이다.
  영국에서 감독주의의 부활이 있은 후에도 영국에서 장로주의가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잉글랜드에서는 이후에 고난의 행진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윌리엄과 메리(Willam and Mary)가 공동 통치자가 된 1688년의 명예혁명과 그것에 이어진 “관용령”(Toleration Act)이 발동된 후조차도 장로주의를 믿는 자유만이 허락되었고, 노회(Prsby Lenes)와 대회(synods)를 조직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목사는 고립되었고, 한 사람 한 사람은 자기가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유니테리안(Unitarianism)을 포함한 여러 종류의 이단이 교회 내부에 침입해 잉글랜드의 장로주의는 쇠퇴했다.
그러나 19세기가 시작됨과 더불어 잉글랜드의 장로주의자들 사이에 복음적인 신앙 부홍 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존 웨슬레(John Wsley)의 지도 하에 영국에 퍼져나간 메도티스트의 신앙 부홍 운동의 영향에 의한 것이지만, 더욱이 잉글랜드에 이주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사람들의 감화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1876년에 여러 장로교회의 그룹이 합동해서 “영국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England)를 결성했다.

 

 이 교회는 270개의 지교회와 5만 명의 교회 회원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7만 5천 명의 회원을 가지고 케임브리지(Cambrigde)에 신학교를 가지고 있고, 이 신학교는 케임브리지 대학(Cambrigde University)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충실한 교수진을 가진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Westminster Theological Collage)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영국 장로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신학적, 비평학적인 면에서 자유주의이다. 오늘날 전세계의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대·소교리 문답, 정치 규준과. 예배 지침이 주어진 것에 대하여 영국 장로교회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기독교의 생활과 사상에 이러한 장로주의 규준이 준 감화는 헤아릴 수 없다. 예를 들어 소교리 문답 하나만 보더라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린아이까지 그 생활 형성에 있어서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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