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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6-07
 제목  프랑스의 장로교회
 주제어  [장로교] [프랑스]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들을 위그노(Huguenots)라 하는데 이들은 교리적으로는 칼빈주의자들이며 교회정치에서는 장로주의를 채택하였다.

 

1. 프랑스의 종교개혁

 

프랑스의 위그노교회를 만든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운동은 멀리 15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6세기가 시작될 무렵, 프랑스는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정부 체계는 이미 왕권 절대주의(royal absolutism)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고, 귀족들은 왕의 권한이 점차 강화되어 가는 것에 분개했다.
프랑스 왕실은 루이 12세(1498-1515) 이래 '한 하나님, 한 신앙, 한 법, 한 왕'이라는 구호 아래 강력한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왕권의 증대를 추구하는 프랑스 왕의 입장에서는 교회가 왕의 지배 하에 있어야 했다. 교회를 자기의 지배 하에 넣기 위한 구실로서 프랑스 왕은 프랑스의 카톨릭교회가 프랑스적 카톨릭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루이 12세의 아들 프랑소아 1세(1515-1547 재위)에 이르러 '갈리아주의'(Gallicanism)로 나타났다. 갈리아란 프랑스에 대한 로마시대의 명칭이다. 따라서 갈리아라는 말을 쓸 때는 프랑스의 고유한 전통을 강조하고자 할 때이다. 그러므로 갈리아주의의 핵심 내용은 프랑스의 교회가 프랑스적 카톨릭교회이기 위해서는 로마 교황보다 프랑스 왕의 지배를 더 많이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1516년 프랑소아 1세는 교황 레오 10세(1513-1521)와 볼로냐 조약(Concordat of Bologna)을 맺었다. 이 조약(협약)은 종교 협약이었다. 이 협약에 의해서 국왕이 주교와 수도원장을 임명하는 권리가 인정되었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 때까지 프랑스 왕과 교황과의 관계를 규정지은 것이었다.
어느 초기 역사가는, 그 협정에 의해 영적 권력이 세속적 이익(temporal advantage)을 얻었고, 세속적 권력은 영적 지배(spiritual sway)를 찬탈했다고 말했다. 교회 회의의 권위는 더 이상 인정되지 않았으며 교회 법에 따른 주교들의 선출은 폐지되고 왕이 주교를 지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프랑소아(프란시스) 1세는 방대한 교회 이권들을 자기 손에서 주무르게 되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승진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의 뜻을 공부하기 보다는 왕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더 열심히 연구하게 되었다.


교회를 절대 왕조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프랑소아는 자기의 통치에 위협이 될 어떠한 변화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르네상스의 새로운 학문을 순수하게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인문주의 학자들을 격려했으며 그들의 다른 학문들뿐 아니라 성경 연구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었다. 그는 불어 성경 읽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둔감했다. 그러한 왕이 총애하고 승진시킨 성직자들이 목회 사역에 필수적인 자질들을 결하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종교개혁 시대의 많은 프랑스 고위 성직자들은 사실상 세속적이고 탐욕적이었으며 방탕했다. 그들 중 일부는 부유하게 살면서 자기들의 본래 활동 영역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프랑소아 1세는 국가의 재원을 낭비했고, 매관매직으로 그것을 충당했으며 자기 곁에 있는 간신배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그러한 낭비를 유지하기 위해 점점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1517년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프랑소아 1세는 내심 종교개혁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환영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왜냐하면 독일의 경우처럼 프랑스가 종교적인 문제로 인하여 정치적 분열까지 맞게 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520년대 초 프랑스에는 모(Meaus) 그룹이라는 인문주의적 종교개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문주의적 종교개혁이란 고전 연구와 원어 연구를 기반으로 하여 성직자들의 지적 수준을 향상시킴으로써 장기적으로는 교회 내의 비리를 척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되 독일의 종교개혁과는 달리 로마교회와의 단절은 추구하지 않는 교회개혁운동을 말한다.


이 모 그룹에 속하는 사람 가운데는 르페브르(Lefevre d'Etaples, 1450-1536)와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이 유명하다.
르페브르는 프랑스의 종교개혁자요 인문주의자였다. 그는 1523년에 신약성경을 번역하였고 후에 구약성경과 외경을 번역하였다(1528년). 이것은 1530년에 함께 출간되었다(Antwerp Bible). 이 번역이 비록 라틴어역(벌게이트)에 가깝기는 하지만 그 후의 번역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
1521년 르페브르는 소르본느 대학 박사들로부터 이단 선고를 받았다. 그들은 르페브르의 작품들을 정죄했다. [사도 바울의 서신 주석]에서 르페브르는 루터의 칭의 교리를 기대하면서 개혁을 소망하고 있었다. 르페브르가 번역한 신약성경은 날개 돋힌듯이 팔렸다.
프랑스의 프랑소아 1세는 집권 초기에 이 모 그룹에 대하여 관용을 베풀었다. 그러나 1525년 2월 파비아(Pavia)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스페인군에 패배하고, 프랑소아 1세가 포로가 되는 굴욕을 당하게 되었다. 그 후 프랑소아 1세는 국력 신장을 위해 국민적 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를 위해서 종교적 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종교의 통합은 전통적 종교인 카톨릭을 중심으로 해야 할 것으로 믿었다.
그리하여 개신교에 대한 억압정책을 개시하게 되고, 모 그룹도 프로테스탄트로 취급하여 박해를 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 수많은 개신교도들이 순교하였고 혹은 국외로 망명하게 되었다. 1525년 이후 프랑스 내에서는 상당한 기간 동안 종교개혁운동은 침체를 면치 못하였다.


2. 프랑스의 종교 개혁과 칼빈


프랑스의 종교개혁은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출판하던 해인 1536년부터 매우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갔다. 칼빈은 프랑스 종교개혁의 사실상 지도자였다. 그가 [기독교강요] 초판을 저작하게 된 것도 프랑스에서의 개신교도 박해 때문이었다. 칼빈은 같은 신앙을 가진 형제 자매들이 잔인한 박해를 받는 것을 차마 그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들을 변호하기 위해 그는 조용한 바젤 시에서 붓을 들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사상 가장 유명한 [기독교강요]가 되었다. 이 책은 기독교 문헌 중 가장 귀중하고 영원히 남아야 할 책으로 지적이며 영적인 깊이와 능력을 소유한 조숙한 천재의 걸작이다.
칼빈은 개혁파 교회의 아리스토텔레스 혹은 신교의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불리었다. 복음주의자들은 [기독교강요]의 출현을 열광적으로 환영하며, 사도 시대 이후 가장 명석하고 가장 논리적이며 가장 확신에 넘치는 기독교 교리의 변호라고 예찬하였다.


[기독교강요]가 유럽의 종교개혁에 미친 영향이야말로 지대한 것이었다. 이 책이 출판된 지 몇 주 후에 부처(Bucer)는 칼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귀하를 그의 종으로 택하셔서, 가장 부요한 은혜를 교회에게 전달하도록 하셨습니다."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출판하기 전에, 프랑스에서는 소위 <벽보 사건>이 있었다. 즉, 1534년 10월 17일 밤에 미사를 반대하는 내용의 벽보가 파리 시내 여러 곳에 붙여졌다.다음 날 아침, 파리 시민들은 자기들의 집과 공공건물과 교회에 벽보가 붙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대담한 전단을 뿌린 자들은 왕의 침실까지 들어가서 왕의 식탁용 냅킨이 놓여있는 그릇에다 그 전단을 한 장 놓고 갔다. 화가 난 프랑소아는 뚜르농(Tournon)의 추기경 및 다른 성직자들과 상의한 후 가혹한 조처를 취했다. 박해는 무차별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화형을 당했다. 교묘하고 야만적인 고문들이 개발되었고, 그 중에는 사람을 간헐적으로 불에 굽는 기계인 에스트라파데(the estrapade)도 있었다. 희생자 중에는 칼빈의 친구도 있었다.
바로 이러한 박해를 배경으로 하여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출판된 것이다. 그 책이 나왔을 때 개신교도들은 자기들의 신앙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서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면 프랑스 개혁교회에 대해 칼빈은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가?
칼빈의 마음 속에는 항상 동족 프랑스인들이 떠나지 않고 자리잡고 있었다. 제네바의 칼빈은 복음적 신앙에 동정적이거나 이미 지지를 하거나 참여한 시민과 귀족 그리고 신자들에게 많은 서신을 보냈다. 칼빈은 조국 프랑스에서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였다.
1549년 6월, 칼빈은 한 부인에게 보낸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된 삶을 살도록 격려하고 있다 .
"우리 구주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the Kingdom of the Son of God our Saviour)가 확장될 때, 그리고 주의 가르침의 좋은 씨앗(the good seed of his doctrine)이 널리 모든 곳에 뿌려질 때 우리가 기뻐해야 하듯이, 나는 당신의 서신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당신에게 이르러 당신으로 하여금 주님의 진리를 아는 지식에 이르게 하였다는 것을 알고서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께서 지옥의 심연까지라도 당신에게 손을 내미셨다는 것과 이와같이 하심으로써 당신을 향한 무한한 동정심을 표현하셨다는 것을 인정 하십시요. 따라서 성 베드로가 우리에게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사용하는 것은 당신의 의무(duty)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그에게 부르심으로써 우리의 전생애(our whole life)가 그의 영광이 되도록 우리를 구별시키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다른 무엇보다도, 즉 생명보다도 더 귀한 것임을 철저히 확신해야 합니다."
또한 칼빈은 말하기를, "우리가 어느 곳에 가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따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또한 칼빈은 복음적 신앙때문에 옥에 갖힌 리용(Lyons)의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격려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두신 능력을 아무 것도 동요시킬 수 없을 확신합니다. 분명히 오랫동안 여러분은 마지막 싸움(the last conflict)에 대해 묵상하여 왔습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주님이 성령으로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다스릴 것이고, 이로써 주님의 은혜가 모든 시험들을 이길 것임을 확신하십시요... 따라서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분이 세상보다 더 강하다는 말씀을 명해야 합니다. 여기있는 우리는 기도 가운데 우리의 의무를 다할 것입니다."


리용의  신자들은 5월 16일, "용기를 내십시요.  나의 형제여, 용기를!" 이라고 서로 격려하면서 순교하였다.
칼빈은 1557년 9월, 파리의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우리는 여러분께 위대한 스승(the great Master)이신 주께서 가르쳐 주신 바, 인내로써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실천하라고 부탁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육신에 있어서 지극히 힘든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적들(our enemies)이 우리를 공격할 때, 그 때가 우리 자신과 우리의 격정에 대항하여(against ourselves and our passions) 싸울 때라는 사실도 기억 하십시요... 복음 때문에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폭동을 일으킨다는 비난을 하나님의 복음이 받는 것보다는 오히려 우리 모두가 전멸 당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종들의 재로부터 열매를 맺게 하시기 때문입니다(for God will always cause the ashes of his servants to fructify,...). 그러나 지나친 행동과 폭력에는 아무런 열매가 없을 것입니다."
칼빈은 이 서신에서 교회의 하나됨을 깨뜨리려고 하는 사탄의 술책(the craft of Satan)을 지적하면서, 교회가 한 목소리로 일치 단결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1557년 9월, 칼빈은 파리의 감옥에 감금된 여성들에게 보낸 격려의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만일 남자들이 연약하고 쉽게 곤란을 당한다면, 여성의 연약성은 여러분의 타고난 체질(your natural constitution) 때문에 더할 것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그릇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의 연약함(the infirmity of his followers) 가운데 그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법을 잘 알고 계십니다."
칼빈에 의하면, 개신교도들을 박해하는 자들의 증오의 대상은 하나님의 진리이다.
칼빈은 옥에 갇힌 여성들이 그들이 가진 은혜의 분량에 따라(according to the measure of grace)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죽으셨고, 주님을 통해서 여러분이 구원을 소망하며,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여러분은 주님께 속하는 영예를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을 겁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적들이 반박할 수 없을 말과 지혜(mouth and wisdom)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확고함과 불변함(firmness and constancy)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칼빈은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르고, 부활의 증인이 되기도 한 여성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때 여성들이 어떠한 용기와 절개를 지니고 잇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요. 사도들이 주님을 버렸을 때 어떻게 그들이 그와같은 놀라운 불변함으로 주님 곁에 머물러 있었는지, 그리고 여성이 어떻게 사도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전하는 사자(messenger)가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께서 그들 [많은 여성들]의 순교가 열매 맺도록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믿음이 순교자의 영광 뿐만 아니라 세상의 영광도 얻지 않았습니까?"


칼빈은 그들을 격려하면서, 고대의 그리고 최근의 이러한 고상한 본보기들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1557년 10월, 칼빈은 프랑스 왕에게 개신교의 신앙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글을 썼다. 그 내용은 프랑스의 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es in France)의 신앙을 해설한 것이다. 칼빈은 제일 먼저 프로테스탄트의 신관을 설명하고 있다.  칼빈은 고대의 박사들이 거부한 모든 분파들(sects)과 이단들을 혐오한다고 덧붙여 말하였다.
인간관에 관해서는 말하기를, 인간이 순결하고 완전하게(흠 없게) 창조되었으나, 그 자신의 범죄에 의해 그가 받은 은혜로부터 타락했다고 진술하였다
칼빈은 펠라기우스주의의 죄관을 거부한다는 점도 밝히고 있다. 아담의 모든 후손(all the race of Adam)은 원죄에 감염되어 있다. 그 원죄는 유전적 악덕이다(... that original sin is a hereditary vice). 원죄는 단순한 모방(simple imitation)이 아니다.


칼빈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빠져있는 파멸로부터 선택받은 자들(the elect)이 건짐 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이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우리 모두는 멸망할 수밖에 없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와 구원을 주시기 위해 구속자로서 우리에게 주어지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상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셨다. 이 희생 제사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온전한 확신을 가지고(with full confidence)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를 갖는다. 또한 양자됨(adoption)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본래 소유하고 계신 것을 누리게 된다.
칼빈에 의하면 우리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by faith alone) 이 의(義)의 참여자가 된다. 성령의 은밀한 은혜는 우리 안에 이러한 믿음을 불러 일으켜 주신다. 이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가 원하시는 자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선물(peculiar gift)이다.


성만찬(the holy supper)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소유하고 있는 연합에 대한 증거이다. 세례는 우리의 양자됨에 대한 증거이다. 양자됨에 의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가입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깨끗해졌고 성령에 의해 거룩한 삶 가운데서 새로와졌다.
칼빈에 의하면, 우리는 법과 규정에 순종해야만 하며, 세금이나 부과금을 내야 한다. 단, 하나님의 주권적 제국(the sovereign empire of God)이 침해당하지 않는 한, 솔직하고 충성스러운 호의로써 복종의 멍에를 메야 한다.
칼빈의 서신만으로 쉽게 30여권의 책을 만들 수 있다. 칼빈에게 도움을 청했다고 거절당한 사람은 없었다. "실업자가 직장을 구할 수 있도록... 학생들이 기숙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가난한 자들이 구제받을 수 있는 방도를 얻도록, 복음전파자들이 항상 강건한 영혼을 소유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그는 편지를 보냈다." 칼빈은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 "낮에 해가 비치는 동안에는 창 밖을 내다 볼 시간도 없다네. 만약 이대로 계속된다면,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잊어버릴 지경일세. 일상업무를 다 마친 후에도 수많은 편지를 써야 하고, 수많은 문의에 답해야 하지. 이 때문에 잠을 거르는 밤이 너무도 많은 실정일세."


프랑스 개신교의 초기에는 루터파 복음주의와 명백한 차이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550년대에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제네바에 머물고 있던 이들이 고국에 돌아와 자기들의 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하고, 칼빈주의 서적들이 점차 널리 유포됨에 따라, 프랑스의 개신교는 제네바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신자들은 그룹을 지어 개인 주택이나 헛간, 숲 속이나 들, 동굴이나 그밖의 은신처에서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많은 회중이 형성되자 그들은 칼빈에게 목회자를 파송해 주도록 요청했다. 칼빈은 그의 능력 안에서 가능한 한 많은 일꾼을 파송하였다. 그들은 제네바에서 사용하는 시편 찬송, 칼빈의 논문 그리고 프랑스어 성경 등을 소지하고 있었다.
1559년에는 프랑스에 2천 개의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생겼고 이 교회는 정치덕으로 장로주의를 교리는 칼빈주의를 채용하였던 것이다.


1559년 5월에 프랑스의 전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오늘날의 총회와 같은 "대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칼빈주의적 신조와 장로주의 정치 제도를 채용하였다.
지방교회는 지방단위 회의를 구성하였으며, 많은 상류층 남녀가 가입하했으며 귀족들도 들어 이었다.
프랑스 왕정의 박해와 탄압은 거세고 일관성 있고 효과적이었다. 그 결과, 1559년부터 전국적 교회를 조직화하려는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3 위그노의 시련


1546년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모(Meaux)에 세워졌으나 곧 폐쇄당해 버렸다. 지도자 14명은 고문을 당하고 화형당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다양한 처벌을 받았다.
앙리 2세(1547-59)도 역시 박멸 정책을 썼다. 그는 파리 의회에 '불붙는 방'(the burning chamber)이라 불리던 종교재판소를 설치했다. 감옥은 차고 넘치고 화형이 흔해졌다. 성경에 관한 책들과 제네바에서 온 모든 책이 금서가 되었다. 화형수들은 혀를 잘라 불 속에서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했다.
커다란 위험 가운데 1555년 9월에 파리에서 교회가 조직되었다. 이제 프로테스탄트들 중에는 저명한 귀족들도 있었다.
파리의 목사 앙뚜완느 드 샹디외(Antoine de Chandieu)는 뿌와띠에(Poictiers)의 교회를 방문했는데 거기서 목사들은 전국적 교회의 조직을 위한 '교회 정치의 조항들'(Articles of Polity, 1557)을 작성했다. 파리에 돌아온 그들은 신앙과 조직의 표준을 채택하기 위한 총회(General meeting)를 계획했다. 1559년 5월 파리에는 약 50개 교회의 대표들이 모였다. 신속히 완전한 합의를 거쳐 그들은 권징의 형식과 신앙고백을 채택했다. 교회 정치에 관해서 그들은 제네바의 영향 하에 있었다.
이때쯤 해서 프로테스탄트들은 보통 위그노(Huguenots)라고 불리게 되었다. 위그노들의 사상은 철저한 칼빈주의였다.


국민적 규모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설립은 프랑스 카톨릭 교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그들은 군대를 동원해 신교 교회를 탄압하려 했다.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도 대제독 코린(Admiral Coliny), 나바르공 앙리(Henry of Navarre)왕자, 꽁드(Conde)와 같은 유명한 군인들이 있어서 그들은 신교도들을 지키는 조직을 만들었으나 칼빈 등은 이를 반대 만류했다.  이로 인해 엄청난 피의 강이 흐르게 되었다. 약 1세기에 이르는 신교도와 카톨릭 교회간의 분쟁으로 엄청난 신교도들이 희생되었다.


1572년 8월 24일 기독교 사상 최대라고 할 대학살이 있었다.
다수의 신교도들이 신교도인 나바르 공 앙리와 카톨릭 교도인 마그리트의 결혼식을 구실로 파리에 유인되어졌다.  정부에서는 이 결혼식을 통하여 신구교도가 화해할 것을 바랐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파리의 모든 신교도들을 학살하고자 하는 사상 최고의 음흉한 계획이 굳혀져 있었다. 8월 24일 미명 성 제르만 사원의 큰 종소리와 함께 신교도들이 무참하게 학살 개시가 되었던 것이다. 신교도는 발견되는 데로 용서 없이 학살되었다.
파리와 프랑스 전국에서 학살된 신교도는 한 주간에 7만~10만에 이른다고 한다.
이렇게 끊임없는 박해로 인해서 프랑스 개신교회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던 것이다.
신교도인 왕자 나바르공 앙리가 국왕이 되어 그를 앙리 4세라 불렀는데 왕위 획득 후 그는 프랑스의 평화를 위해 카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러나 그는 1598년 "난트의 칙령"을 발표하여 프랑스의 신교도 신앙에 자유를 부여하였다,
1598년 <낭트 칙령>이 발표되자, 위그노들에게 어느 정도 종교적 자유를 주었다. 위 '개혁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자유가 약 200개의 동네들과 약 3,000명의 귀족들의 성에 허용되었다. 개혁교회의 대회들이 간섭없이 허용되었다.

 

그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① 프로테스탄트에게 개인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다.
② 200개의 도시와 300개의 성채에서 프로테스탄트의 공공연한 신앙을 인정한다.
③ 프로테스탄트의 학교에 국가의 재정적 원조를 준다.
④ 프로테스탄티즘의 서적의 출판을 허가한다.
⑤ 프로테스탄트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준다.
⑥ 프로테스탄트에게 집회의 자유를 주며, 스스로 재판할 수 있게 한다.
⑦ 8년간 약 200개의 성채에서의 완전한 자치를 인정한다.

이 칙령으로 위그노 전쟁은 정치적으로 해결되었으나, 종교적 대립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특히 루이 13세와 루이 14세 시대에 프로테스탄트는 끊임없이 탄압 당했다. 루이 14세는 1685년 10월에 이 칙령을 폐지하였고, 그 결과 신교도 약 40만 명이 다른 나라로 망명하였다.
오늘날 프랑스 안에 있는 장로교회 교세는 미미하다. 프랑스에서는 로마 카톨릭이 유력하다. 장로교회는 약 백만에 불과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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