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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6-07
 제목  장로교회의 기원
 주제어  [장로교]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1. 개혁이전의 장로회.

 

(1) 성경에 나타난 장로의 어의


장로라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약 100번, 신약성경에 60번이 나오고 있다
구약 : 1)      (가돌) : 손위. 형(elder)(창10:21 27:42 삼상18:17왕상2:22 겔16:46,61 23:4)
          2)      (자켄) : 나이든 장로, 장자. 수염이 있는 노인(old aged)
                      (창50:7 출3:16,18 4:29 12:21 17:5,6 18:12 19:7, 24:1.14  레4:15 9:1 민11:16 16:25 신5:23, 19:12)
신약 :            (프레스뷰테로스) :
                    손위, 조상(눅15:25 행2:17 마15:2 막7:3,5 히11:2)
                    공직자(마16:21 26:47,57 27:3 막8:31 11:27, 눅7:3 9:22 요8:9 행4:5 6:12 14:23 딤전5:17, 딛1:5 약5:14)
                    영광 받을 자들(계4:4 5:5 7:11 11:16 14:3 19:4)


(2) 구약시대의 장로회


구약성경에 있어서 교회는 어떤 것이었는가?  구약시대에 교회가 있었는가?
스데반(Stephen)은 구약시대에 교회가 존재했다고 한다. 그는 사도행전 7장의 설교에서 모세 시대의 “광야 교회”(the church in the wilderness: 행 7:38)에 대해 말하고, 이 광야교회는 장로들에 의해서 통치되었다는 것이 출애굽기 3장 16절, 민수기 11장 16절 등 많은 성구에서 보여지고 있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구약의 교회와 신약의 교회는 하나이며 같은 것이었으며, 다만 하나님의 교육방법이 달라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갈라디아서 3장 29절에서 바울은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우리들은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라고 말하고 있고, 로마서 11장 17-21절에서는 교회라고 하는 것의 뿌리를 구약성경에다 깊게 내리고 있는 감람나무에 비유하고 있다. 이방인의 교회는 이 오래된 나무인 구약교회에 접목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에베소서 2장 2O절에서는 기독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선지자들”이라는 말에 의해서 우리들은 신약의 교회가 구약의 교회라는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구약의 교회와 신약의 교회가 하나이며. 같은 것이라는 주장이야말로 장로교회의 교회관의 대단히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신자의 자녀는 계약에 의해, 또한 태어나면서부터 교회 회원이기 때문에 세례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믿고 있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아이들이 구약교회의 구성원 가운데 포함되어져 있고 또한 그리스도와 사도들에 의해서 확실하게 제외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신자의 자녀들은 신약교회의 회원이라고 믿고 있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교회는 장로에 의해서 통치되어 왔다는 것이다. 장로교회의 정치원리는 멀리 모세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1) 구약에서의 장로들은 교회 정치의 가장 중요한 위치와 직무를 행했다.
출18:12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번제물과 희생을 하나님께 가져오매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와서 모세의 장인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으니라
레4:15 "회중의 장로들이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
레9:1 "제 팔일에 모세가 아론과 그 아들들과 이스라엘 장로들을 불러다가 "
민16:25 "모세가 일어나 다단과 아비람에게로 가니 이스라엘 장로들이 좇았더라.
출19:7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
 모세는 백성의 대표들인 장로들을 소집 업무를 집행해 나간 것을 보여주고 있다.
 민수기 11장은 백성의 대표로서의 장로에 대한 설명이 나오고 있다.


2) 장로 70인을 세워 대의 정치를 행했다.
출24:1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과 함께 여호와에게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 "
출24:9-10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
출4:29 "모세와 아론이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모으고 ",
수24:1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보인지라 "
삼상8:4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
겔8:11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 중 칠십인이 그 앞에 섰으며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그 가운데 섰고 각기 손에 향로를 들었는데 향연이 구름같이 오르더라
 
3) 구약에서 보여주는 교회와 정부의 관계는 상호의존적이면서도 분리된 관계였다
   왕의 역할과 제사장의 역할이 구분되었던 것이다.


(3) 회당시대의 장로회


1) 회당과 장로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 시부터 신구약 중간 기에 자신들의 신앙을 위해 형성 확산시킨 것이 회당(Synagogue)이었는데 여기서는 성경을 읽고 해석하기도 하고 찬양을 하고 모세를 전하기도 하였다.(행15:21 겔8:1 14:1  20:1-4 33:30-)
그들은 이곳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 모여 예배하고 교육을 받았다.
이 회당의 모든 권위는 장로들로 구성된 조그마한 조직체에서 좌우하였다.
이 때 바벨론에 흩어진 자들은 직접 선거로 뽑았고, 그 이외 지역에서는 도성 가까이 있는 산헤드린과 예루살렘의 대 산헤드린에 의하여 임명되기도 하였다.
장로들에게 가르치는 일이 요청되었을 때는 그들은 공적으로 안수를 받았다.
율법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졌을 때는 회중에 의하여 그들의 우두머리로 또는 서기관(랍비)으로 부름을 받아 이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안수를 받았다.
이 때 집례는 세 장로가 있어야 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숫자가 적은 회중에서는 혼자서 회당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였으며 회의를 사회하였다. 그러나 단독으로는 권위있는 결정은 할 수 없었다. 교의적인 문제나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웃에 있는 동료 장로와 함께 협의하였다.(눅13:14)
각 회당에 있는 장로들의 의회는 한 사람의 우두머리나 의장을 임명했다. 이를 회당장 또는 의장이라 불렀다. 그는 그의 동료들이나 밑의 사람들에 의하여 선출이 되었는데 일시 또는 영속적으로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회당장은 항상 의회원과 같이 그러나 그들과 구별된 사람으로서 예전과 직무를 수행하였고 당회의 당회장으로서 사회를 하였다
회당에서 장로들의 의무는 의장 밑에서 가르치는 일과 다스리는 일이었다.
가르치는 일은 이미 장로가 된 기성인들이 하였고, 다스리는 일은 학식이 있고 전문적인 계층이 하였다. 이들은 모두 율법에 대한 지식과 전통과 해석에 대해 특별히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에스라는 제사장으로서 서기관 일을 한 대표자이었다.(스7:6 느8:1-9) 후기에는 제사장뿐 아니라 일반인 중에서도 서기관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들은 회중의 자연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예수님이 마23:2-7에서 지적한 자들이 바로 이들이다.
개회당은 장로직으로 운영되었고,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그 지역 모든 회당에 있는 모든 장로들을 모아 장로회를 이루어 해결과 해답을 내렸으며, 모든 회중들을 돌보았다.


2) 산헤드린
산헤드린의 역사적 기원은 분명치 않으나 이 산헤드린의 성서적 기원은 신명기 17:8-11, 민수기 11:16에 둔다. 탈무드는 이 기원을 모세에 두며 백성을 재판하는 일을 한 것으로 명시하였다.
이 이름이 옛날에는 게루시아(        )로 통하여 "장로들" "장로들 모임" "백성들의 장로들"로 통용되었다.
이 말이 의회 또는 "재판 법정"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고등법원 대법원을 지칭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를 대 산헤드린이라고 하였다. 지방에 있는 소 산헤드린의 정족수는 23인이었으며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은 71이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은 제사장, 서기관, 백성들의 장로들로서 이들은 대제사장 하에 있었다. 이를 "노회"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백성들 또는 이스라엘의 의회"라고도 하였으며 "산헤드린"이라고 하였다.
산헤드린의 구성원들은 전직 대제사장, 현직 대제사장, 서기관, 율법학자들, 장로들이었는데 이 장로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다른 회당에서 나온 대표가 포함되기도 하였다.


대 산헤드린 아래 예루살렘에 23인으로 구성된 보조적 법정이 둘이 있었으며, 지방에는 유대인 가구 수 120 이상이면 어느 마을에도 산헤드린을 설립할 수 있었는데 이 지방 정족수는 7인이었다.
산헤드린은 축제, 새 달의 계산을 좌우했고, 순례자들을 통하여 올라오는 산적한 종교적 사회적 법적 문제들에 대한 답을 내리는 일을 하였다. 문화적인 전통과 종교적인 독립과 자치에 관한 문제들을 다루었다.
산헤드린은 국가적 차원의 "백성들의 의회"였으며 백성들은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통하여 발언을 하였다. 산헤드린으로부터 율법은 온 이스라엘에게 공포되었다.


그러나 산헤드린의 주 업무는 백성들의 소송 건에 대하여 재판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종족 문제와 거짓 선지자, 고위 성직자의 유죄 유무와 적대국과의 선전포고와 성전의 성소 부분의 가감과 각 지파의 산헤드린 회원의 임명과 우상숭배의 심판등을 성경에 기인하여 판단하는 기능을 행하였다.
이 시나고그(회당)와 산헤드린은 민주적인 대의 정치의 본이었으며, 사람들의 의사를 가장 정당하게 잘 표현할 수 있으며, 가장 적합하고도 적절하게 다스릴 수 있었다. 포로시대를 전후하여 군주중심의 나라들 앞에서 장로회 조직체로 보여준 대의 정치는 오늘 날 까지도 본이 되는 것이다.


(4) 신약(사도)시대의 장로교회
 장로교회라는 말이 역사에서 정식으로 사용되기는 1620년경이었다. 그러나 장로교회의 기원은 사도시대 당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1) 장로직이 공적으로 교회의 직분으로 도입되었다
사도들의 전도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운 교회(에크레시아)에  처음으로 장로직이 언급되기는 행11:30이다.
벌써 이때 유대인 회당의 장로가 아닌 우리 기독교의 장로직이 직분으로 도입된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사도행전 14장 23절에는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이 세운 교회에 “교회마다 그들을 위하여 장로들을 임명”했다고 씌어져 있고, 사도행전 2O장 17절에는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라고 씌어져 있고, 디도서 1장 5절에서는 바울이 디도에게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함이니”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러한 성경구절들은 신약성경의 교회가 보통은 장로들에 의해 다스려졌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2) 신약교회는 장로와 집사 두 직분을 두었다
 장로교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신약교회에 허락한 직분은 장로(또는 감독)와 집사의 2가지 직분만을 인정하며 말씀을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의 직분에는 구별이 없다고 본다. 
 3직분론 자들은(감독주의자, 교황주의자) 목사 또는 감독(teacher elder), 장로(ruling elder), 집사(serving office)의 3가지 직분이라고 주장한다. 신약에서의 장로와 감독은 목사에 관한 언급이지 평신도에 대한 언급이 아니다. 치리장로에게는 가르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고 본다.
두 직분 주장의 성경적 배경 : 빌 1:1  딤전 3:1-2, 8, 12
비록 성경은 2가지 직분만을 인정하나 그 직분의 기능은 셋으로 구별된다. 곧 가르치는 것, 다스리는 것, 섬기는 것이다.


3) 장로와 감독
성경에서 장로란 단어는 늘 감독이란 단어와 함께 쓰이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어떤 직분을 제정하실 때는 어떤 명칭보다도 그들의 기능과 활동을 위하여 일꾼을 세웠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성경에서 장로의 명칭은 다양하게 장로, 목자, 교사, 감독 등으로 사용되었다
사도들도 바울은 빌 1:1; 딤전 3:1-2, 5:17; 딛 1:5-7에서, 베드로는 벧전 5:1에서, 야고보는 약 5:1을 통하여 감독과 장로는 동일한 직분임을 말하고 있다.
죠지 나이트(George Knight) 커버넌트 신학교 교수는 장로와 감독은 동일한 말이라고 주장하였다. 장로는 구약배경을 가진 말로 어떤 일에 노련하거나 권위, 성숙함과 연결되어 사용되었고 감독이란 말은 헬라계통에 익숙한 말로 교회를 돌보고 감독하는 특별한 책임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예를 들어 요한과 베드로는 감독이었으나 장로로 자신을 소개(요이 1:1; 요삼 1:1; 벧전 5:1)했던 것이다.


장로교인들은 신약성경에서 감독(bishop)이라는 말을 대할 때 당황한다. "감독”이라는 말은 신약성경 가운데 다섯 번 나온다. 그리고 신약의 교회는 감독들에 의해 다스려지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성경을 잘 공부하면 감독이라는 것은 요컨대 장로를 의미함을 알게 된다.
사도행전 2O장 17절을 보면 바울은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에 보내 에베소 교회의 장로를 청하는데, 2O장 28절에서는 동일 인물을 감독이라고 부르고 있다.
 디도서 1장 5절에서는 바울은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도록 명령하고 있으나, 7절에서는동일 인물들을 감독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서는 장로와 감독이 같은 것이었음은 분명한 것이다. 다만 장로와 감독은 같은 직무에 대한 다른 지칭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초대 교회의 지도자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이며 대개의 근대학자들의 견해이다. 장로가 때에 따라서 감독이라고 불려진 것은 다음 시대의 교회정치의 전개에 매우 중요한 관계를 가지게된다.


4) 장로 직의 두 종류
디모데전서 5장 17절에는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일들을 더할 것이니라”는 말씀이 있다. 이 구절은 장로에는 “가르치는 장로”와 “치리하는 장로”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베드로전서 5장 1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자신을 장로 가운데한 사람이라고 하고 있다.


5) 치리 하는 장로의 선택
신약교회의 장로들은 일반 회원(교인)에 의해 선출되어 임직 했다. 거기에는 충분하고 유력한 증거가 있다.
사도행전 1장 23-26절에서 모든 제자가 유다 대신 보충하기 위하여 맛디아의 선거에 참가했다. 6장 3절에는 일곱 사람의 집사를 선출하기 위한 선거에 모든 제자들이 참가하고 있다. 또한 14장 23절에서는 모든 교회에 장로를 임명했다고 한다. 여기서 “임명”(ordain)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헬라어 원문은 문자그대로 번역한다면 “손을 올리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장로 임직식 때에 손을 얹는 “안수”에 관해서라기 보다도. 장로 피택을 할 때 피택 방법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신약성경에서 초기 기독교의 문헌에로 눈을 돌려 볼 때 교회 정치 가운데서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교회의 일꾼들(church officers: 집사, 장로를 의미함-역주)이 회중에 의해 선출되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Rome)는 A.D. 100년경 교회의 일꾼은 “전 회중의 동의에 의해” 그 직무에 임한다고 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신약시대의 장로들이 회중에 의해 선출되었다고 믿는 데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약의 교회가 정치 형태로서 대의제(代議制)를 취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 대의제는 오늘날까지 항상 장로주의에 있어서 소흘히 할 수 없는 것이다. 대의제라고 하는 장로교회의 이 교리에 의해서 시민적, 종교적 자유와 인간의 사회 의식 일반이 증진되고 큰 은혜를 계속 받고 있는 것이다.


(5) 사도후시대교회와 그 이후의 교회정치 형태
초대교회 초기에는 장로주의적 정치형태를 유지했으나 교회가 확장 부흥됨에 따라 강력한 교권이 필요하게 됨에 따라 중기 이후로 감독 중심으로 변천하게 됨을 보게 된다


1) 클레멘트 :  [고린도인에게 보내는 편지(Epistle to the Corinthians)] 에서 사도들이 감독과 집사의 구별을 하지 않았다. 클레멘트 때까지만 해도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정부형태 유지하였다.


2) 폴리갑 : [빌립보인에게 보내는 편지] 에서 클레멘트와 같은 사상을 보여준다, 빌립보 교회에는 두 가지 직분 곧 집사와 감독만이 있으며 어떤 직분의 높고 낮음을 상상할 수 없다고 했다. 적어도 바울이 빌립보서를 쓴 이래 폴리갑 때까지 50-60년 이상 교회의 직분을 집사와 감독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키프리안 : 3세기에 접어들면서 박해, 배교, 교회의 분열 등의 문제에 직면해서 키프리안이 '감독중심'으로 모일 것을 강조하자 '감독우위 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때로부터 감독직의 운영상의 우위성이 주장되기 시작했고 회의 시에 사회를 보는 직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키프리안 자신은 감독을 장로보다 우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키프리안 때까지는 로마교회의 군주적 감독직(monarchical episcopasy)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장로회 정치는 종적을 감추고 긴긴 중세교회시대는 교황정치시대를 이루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왈도파에서는 성경 66권만을 유일한 신앙의 기초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중재자로 주장하고, 연옥은 적 그리스도의 고안물이며, 교회절기, 성자숭배, 성수, 금욕주간, 미사는 인간적 고안물이라 주장하고, 성례는 오직 세례와 성찬뿐이라고 주장하고, 그리스도인은 세속권에 순종하여야 하며, 세금을 바칠 것을 주장하고.
 교회직분을 장로와 집사로 구분하고, 장로회를 인정하고, 목사가 큰 죄를 저질르면 출교 되든지 설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장로는 회중으로 부터 선출하고, 교회 총회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목사는 일년에 한 번 회집해야 한다고 하였다. 초대교회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그룹이므로 피터 왈도파를 장로교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신앙과 교회정부 형태가  오늘날의 장로교회와 같았음을 볼 수 있다.


2. 칼빈과 개혁 후 장로교회


개혁자 죤 칼빈은 긴 세월 동안 장로교회 교리와 정치의 근본 원리가 완전히 무시되고 잊혀져 버렸던 때에 장로회의 교리와 정치원리를 부활시켜 근대 장로교회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장로교회는 죤 칼빈을 제외하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1) 칼빈의 생애


 1) 성장과 회심
  존 칼빈은 프랑스 피칼디 주 노용 시에서 1509년 7월 10일에 출생하였는데 그곳은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약 60마일 되는 곳이었다.  그의 아버지 제넬코반은 자녀들에 대하여 사소한 일이라도 예사로 생각하지 않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칼빈은 이 아버지에게서 지식욕과 조직적인 두뇌를 물려받았고,  어미니 쟌느르 푸랑에게서는 경건을 배웠다. 그의 가정은 사회적 부와 지위를 함께 가졌었고, 칼빈은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법률가였지만 자신의 아들을 처음에는 신부로 만들 생각으로 칼빈이 12세 되었을 때 그의 생활비에 넉넉할 만큼의 수입이 있는 교회사 직분에 붙여 주었다.  칼빈은 교직을 목표로 훈련받았고, 학교에서는 조수의 일도 보았다.
 1523년 14살 때에 칼빈은 멀리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귀족 몬모르와 젠리의 자제들과 함께 라 마르슈 (La Marche) 대학에 입학하였다.  당시 라 마르슈 대학은 프랑스 인문주의 신문화의 본산이며, 국왕 프랑소아 1세의 교육제도의 중앙 집권 정책에 따라서 견실하게 발전하던 곳이었다. 
칼빈은 이 대학에서 교수 코디어 (Maturin Cordier)에게 라틴어를 배웠고 이것은 다른 개혁자들보다 훨씬 나은 라틴어를 쓸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칼빈은 그해 몬테그(Montaigue) 대학으로 옮겼다.  이것도 아마 그의 아버지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데 더 교회적인 분위기를 가진 곳에서 교직을 목표로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함 같다.  칼빈은 이곳에서 우선 철학을 4년 간 전공하고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1527년 그의 아버지의 심경의 변화로 그는 오를레안(Orlean) 대학에서 법학을 배우게 되었다.  이것은 아들로 하여금 좀 더 명예로운 생애를 보낼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그는 볼슈(Bourges) 대학에서 공부한 결과 큰 성공을 거두었다.
   1531년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칼빈은 법률에서 다시 방향을 바꾸어 고전을 연구하였다.  그는 법률가보다는 문필가가 되기 위해서였다.  칼빈은 이곳에서 "세네카의 관용론"에 관한 해석을 출판하여 학계에 데뷔하였다.
  1534년 그는 갑작스런 회개를 경험하였다.  칼빈 자신의 말에 의하면 "너무나 완고하게 이 로마교의 미신에 몸과 마음을 바쳤기 때문에 그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오기란 실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갑작스러운 회개를 통하여 마음이 완악하기로는  누구보다도 더 강하였던 나의 모든 생애를 정복하여 복음을 가르치는 마음이 불붙게 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다.   (John Cclvin : 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 Grand  Rapids, Michigan, 1949. P. XL) 그는 이 체험을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었고, 이기적 자기 추구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발전을 추구하는 자가 되었다.
 칼빈은 1533년 프랑스 곧 제네바 종교개혁 운동의 선도자로서의 길을 닦기 위해 파기에 있는 프로테스탄트들로 구성된 작은 단체에 가입했는데 그곳에서 얼마 안 되는 지도자가 되어 회원들을 가르치고 설교도 하게 되었다.


2)  회심 그 이후
  칼빈은 1535년 프랑스 남부에 있는 스트라스버그(strassburg)로 가서 다시 스위스의 바젤로 가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경건한 호구라인 부인 댁에 투숙하게 되었고, 그 집에서 1536년  그의 불후의 걸작인 "기독교 강요" 제 1판을 라틴어로 출판하였다.


  이 책의 출판 동기는 당시 프랑스의 신교도 박해가 있었고 그 박해의 잘못을 시정토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칼빈의 나이는 26세였고, 이 기독교 강요는 사도신경을 줄거리로 하고 모든 성경에 기초하고 있었다.
  1535년 제네바에서는 천주교에 치명적인 두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로마 카톨      릭의 한 여자가 신교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을 독살하려다가 발각된 사건과, 신 구교 공개 신학 토론회에서 신교 측의 승리였다.  그래서 사실상 제네바는 신교 도시로 바뀌고 있었다.  이때 지도자는 화렐이었다. 화렐은 밤에 칼빈에게 찾아가서 개혁 운동의 협력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칼빈은 자신의 성격과 안 맞을 뿐더러 경험도 없어 거절하려 했으나 화렐이 "그대가 만약 하나님의 일보다 고요한 생활로 독서나 즐기는 일을 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대를 저주하리라" 는 말을 했고, 칼빈은 이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느끼고 제네바 개혁 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1536년 10월 1일 로잔에서 열린 성찬 문제로 신 구교파 사이에 토론회가 열렸는데 칼빈은 교부신학을 자유로이 인용하면서 로마 천주교의 잘못을 밝혔고 결국 토론회는 신교의 승리로 끝났다.  그 후 1538년부터 1542년 3년 간 칼빈은 스트라스불그에서 활동하였다.  이곳에서 그의 사상은 더 넓어지고 깊어졌으며, 결실을 많이 맺었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은 멜랑톤과 일생동안 깊은 우정을 맺었고 루터를 존경하였다.  칼빈은 스트라스불그에서 있는 동안 교훈하며 설교하였고, 또한 목회를 했을 뿐 아니라 저술도 많이 하였다.  칼빈은 이때 기독교 강요 제2판을 내고 로마서 주석과 성찬에 관한 통속적인 논문이란 책도 썼다.
  1540년 한 과부와 결혼하였는데 9년동안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많은 내조를 받다가    1549년 그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다시 결혼하지 않았다.


(2) 칼빈의 신학사상


1) 칼빈 신학의 출발점
  칼빈 신학을 이해하는데는  무엇보다도 그의 기독교 강요를 쓴 내적 필연성과 그것으로 목적한 바를 알면 된다. 
칼빈 신학의 문제는 형식 구성이나 사상 연관의 내용적 요소에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다.  사상의  형식이나 내용적 사상 요목은 그 깊은 곳에 있는 연관성을 지시하는데 그친다.  따라서 그의 신학의 출발점은 그의 회심이 가져온 하나님의 체험에 있었다.   칼 홀이 말한 것처럼 "회심의 순간이 그의 전 생애의 진로를 결정했다.  그는 그때이래 루터가 언제나 되돌아간 내적 투쟁에 봉착함이 없는 것처럼 외길로 그 얻은 것의 전개에 돌진하였다." 칼빈의 회심은 이점에서 특징적이며 그것이 그의 신학 사고를 결정지어 주었다. 칼빈의 회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에 억압된 것인 동시에 그를 성서에 복종시킴으로 성립되었다.  칼빈 자신은  자신의 회심을 무가치한 자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믿었고 이것으로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힘은 증명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저항할 수 없는 힘은 언제나  하나님의 지혜나 의와 결합되어 있다고 보았다.
 칼빈의 신학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이 저항하는 자까지도 복종시킬 만한   힘으로 나타나는 은총의 사실이며 이 신학을 특징짓는 것은 회심에서의 '힘'의 감각이었고 하나님을 능력자로 체험하는 것이었다.
  칼빈의 신학은 쯔빙글리주의와  루터주의의  중재적 입장으로 볼 수 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개혁신학을 조직적으로 해석하며, 로마 카톨릭뿐만 아니라 루터파, 재세례파, 반-삼위일체 파까지도 반대하고  있다. 개신교 신앙에 대한 해석을  이룬 이 책은 개혁전통의 근본문서로 칼빈 신학의 주된 자료이기도 하다.


 2) 하나님 지식
  칼빈은 강요의 첫머리에서 인간이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두 종류,  즉 신지식과 인간 자신에 관한 지식으로,  자아에 대한 참  지식은 우리의 절망과 불합당함을 발견케 해주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추구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식 시켜 준다고 한다.  참된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시작해야  하는 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있는 창조와 세계 질서를 통해서는 올바른 하나님의 지식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의  노예가 되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불가능하므로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창조자와 피조자 사이의  현격한 거리 즉, 하나님은 무한하신 데  반해서 우리는 죄인이며 유한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본래의 모습으로 알려고 노력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신 대로, 주로 성경을 통해서 알아야 한다고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증언이고 성경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에 성경은 그 권위를 교회로부터 이끌어오지  않는다.  성경의 권위는 오직 성령의 내적 증거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한다.


3) 하나님, 세상, 인간
  창조를 아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창조의 기원과 현재적 기능에 관한 모든 내 용을 아는 데 있지 않고  이 모든 것이 우리와  함께 마음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데 있다.  칼빈은 "형상"(image)과 "모습"(likeness)의 구별을 배격하면서 이것은 동일한 하나의  대상을 가리키는 병행적인 표현의 히브리 습관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칼빈은 인간의 타락을 매우 중요하게 보았는데, 그것은 타락에 근거해서 인간 본성의  부패를 말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스런 선함을  주장하였기 때문이었다.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전 창조세계의 지배자로서 섭리 가운데 다스리시며, 섭리는 단순한 미리 아심(foreknowledge)이 아니고 현실적인 모든 사건을 실제적으로 생산하심을 뜻한다고 한다. 이러한 섭리로 인해서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고 어려운 때에 인내하며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다고 한다.


4) 인간의 상태
  타락의 개념은 우리의 실제적인 모습과  우리의  절망과 부족함을 보게 하면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수 있게 해주므로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칼빈이 강조하는 자연인의 타락 이론은 타락으로 인해서 아담이 본래적으로 가졌던 초자연적인 은사는 상실되었고 자연적인 은사는 부패한 것이다고 한다. 이러한 상실은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에게서까지도 일어났다고 한다. (원죄)
 인간 지성의  부패는 전적으로 파괴된 어떤 상태는 아니다고 한다. 타락한 인간의 지성 도 여전히 진리를 추구하는 본래적인 욕망을  보전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본래적인 상태를 잃지 않고 간직하고 있음을 뜻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진리에 대한 추구마저도 교만과 환상으로 이끌어 줄뿐이다고 한다.
  의지도 또한 부패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선한 것을 추구하는 경향에 여전히 젖어 있지만, 그것은 모든  동물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는 "자연적인 취향 "(natural appetite)에 불과한 것이다고 한다.  우리의 의지는 죄에 묶여 있으므로 하나님을 진실로  찾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다고 한다. 우리는 죄의 속박에 매여 있기 때문에 의지도 또한  죄에 매여 있어서 선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선에 따라서 살수도 없다고 한다.  이렇게 선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에게로의 회심의 시작인데 성경에서는 이것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돌리고 있다고 한다.


5) 율법의 기능
  칼빈이 "율법"이라고 말하는 개념은 복음과 상반되는 어떤 것을 뜻하지 않고 하나님이  고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의 책"과 구약성경 전반을 통해서 나타내 주신 계시를 뜻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변증법적인 관계를 떠나서 항상 지속적인 것이다.  칼빈은 율법이 3중 적인 목적을 지닌다고 보았다. 
 율법의 첫 번째 목적은 우리의 죄, 절망,  타락을 보여주는데 있다고 한다. 이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은총과 도우심을 추구하게 된다고 한다. 
  두 번째 목적은 사악한 자를 제제하여 사회의  질서유지를 위하는 것이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율법의 세 번째 용도(tertiumususlegis)는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 주는데 있다고 한다.
  율법이 저주의 말씀으로서 자신을  하나님의 은총을 추구토록 계속적으로 부추겨 주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의 행동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결정해 주는 근거가 됨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칼빈의 근본적인 논점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는 깨뜨리셨으나 율법의 효용성은 버리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또한 칼빈은 율법과 복음이 연속성이 있다는 사실에 더 근본적인 강조를 두었으며 두 성경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은 약속과 성취라고 보았다.


 6) 예수 그리스도
  칼빈은 삼위일체를 논할 때와 똑같이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을 논하면서도 전통 적인 정통 신학을 따른다.
칼빈의 기독론의 3가지 관심은

 

첫째로, 전통적인 교리를 손상시키려는 자들에 반대해서  전통교리를 옹호하려는 관심이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3중적 직능(triple office)의 개념으로, 즉 왕, 선지자, 제사장으로, 3중적 직능 (triplex munus) 묘사했으며,


세째로, 본체적 연합 이해는 그리스도가 주의 만찬에 임재한다는 입장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하강은 예수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하늘에도 있을 수 있는 그런 것이므로 동정녀의 자궁으로부터 탄생하시면서도 우주 전체에 가득 차 있을 수 있었다고 한다,  칼빈의 기독론은 엄격한 정통성을 유지하면서  알렉산드리아 학파보다는 안디옥 학파에 좀더 기울었으며, 동시에 형이상학적인  면보다는 구원론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7) 구속과 의인
  칼빈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만족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죄의 용서를 공로로 안겨다 주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동시에 만족되었다. 칼빈은 신앙에 의한 의인론(義認論)을 강조하였다.   의인(義認)은 죄인을 의롭다고 선포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의는 의복과 같아서 죄인이 신앙을 입음으로써 의롭다고 선포되는 것이다.   여기 에 행위에 의한 의인과 믿음에 의한 의인의 차이가 있다.   행위에 의한 의인은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긍정함으로써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로움을 만족시켜 보려는 시도라면, 믿음에  의한 의인은 신앙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고서,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서가 아니고 의로운 사람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은 하나님이 우리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혜택을 베풀어서 받아들여  주심을 뜻한다.   그리고 의인은 죄의 사면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라고 덧 붙여서 말한다.  그러므로 신앙의 역할은 신자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서 그리스도의 의가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가되는 것을 말한다. 


 신앙에 의한 의인론이 중요한 것은 이것이 없으면 참된  종교가 이룩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과  신적 본성과 인간적 본성을 분리시키는 거리감,  인간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필요성 등에 대한 주장이 칼빈신학의 전반에 흐르는 주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에 의한 의인은 기독교인들이 의의 전가에 만족해서 또 다시 죄의 구덩이에 서 헤매고 다녀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의롭게 된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여전히 죄  인이며 이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계속적으로 죄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의롭게 된 기독교인은 그의 의인의 열매를 보여  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은 강요의 "기독교인의 삶에 관한 논문" (Treatise on the Christian Life)의 핵심으로 후기 칼빈주의와 청교도 전통에 큰 영향을 끼쳤다.


  기독교인의 삶의 근본적인  규범은, 기독교인들은 스스로 주인이 아니고 주님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이 따라야 할 원리는 무절제와 금욕주의의 두개의  극단 사이에서 모든 것을 창조의 본래적 목적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다고 한다.
이러한 원리에 입각해서 이 세상 사물을 사용하는 4개의 근본적인 규범은 첫째로, 자신이 사용하는 사물 안에서  창조자를 보면서 감사해야 한다.  둘째로, 이 세상 재화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가난을 극복하고 견디며 풍성할 때에 절제할 준비를 하면서 사용해야  한다.  세째로, 자신이 사용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으로서 언젠가는 계산 할 때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부르심을 고려하면서, 즉  하나님이  자신의 삶 속에 맡겨 놓은 기능을 찾으며 사물의  올바른 이용은 그 기능에 맞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한다.


8)  예정
  칼빈은 예정론을 일반  하나님의  섭리론과 분리시킴으로써 예정을 하나님의 전능이나 전지로부터 증명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스런 계획을 뚫고 들어가는 것이며 교만과 불경건의 탑을 높이 쌓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신의(神意 : decree)라고 부르며,  예정에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장차 이루어질 것(선택과 유기)을 스스로 결정하셨다고 정의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우리는 죄를 지었으며, 유기된 자는 자신의 죄 때문에 정죄 받았음을 계시를 통해서 안다. 이러한 모든 사실이 어떻게 동시적으로 참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헤아려 알 수 없다고 한다.
  칼빈의 예정론은 하나님의 전능이나 전지에 대한 사유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성경의 증언에 근거하고 있다.  성경적 예정은 이중적인 것으로서-(선택과 유기의 예정)-인간의 미래적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선지를 근거로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이중 예정은 커다란 신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결코 저버리지는 않는다.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예정론은 이중적인 기능을 갖는데, 하나님의 온전하신  은총에 의한 확실한 구원의 보장이며 동시에 교회론의 근거가 된다.


9) 교회
  칼빈은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를  구별하였으며, 불가시적 교회만이 모든  선택된 자들에 의해서 산 자와 죽은 자를 막론하고 세워졌기 때문에 참된 교회이며 우주적인 교회로 보았으며, 가시적 교회는 우리가 이 지상생활에서 알아 볼 수 있도록 주어진 유일한 교회이며, 불가시적인 선택된 자들과 교제 (연합)를 나누고 있다는 징표로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가시적인 교회를 "외적인 수단"으로 두셔서 말씀의 선포와 신자들의 성화를 담당케 하셨다. 칼빈의 교회론은 가시적 교회에 관심을 가지며,  참된 교회의  두 가지 특성을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의 집행으로 보았다. 재세례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교인들의 개인적인 거룩성으로는 참된 교회를 가름하는 지표로 삼을 수 없으며 교회의 거룩성은 교회 교인들의  도덕적 순수성에 있지 않고 교회의 머리되신 분의 거룩성과 선택된 자들이 장차 받게 될 약속에 있다.
  칼빈은 루터보다도 교회의 조직면에  훨씬 더 많은 강조를 두었으며 루터는 성경 에 위배되는 요소만 교회의 전통에서 배제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반면에, 칼빈과 개혁파  신학자들은 종교개혁을 좀더 철저하게  전개해서 신약성경 유형의 원시 기독교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칼빈의 교회의 질서에 관한 가르침은 신약성경시대의 행습을 문자적으로 회복해서  그대로 따르자는 뜻이 아니고,  신약성경이 교회에 대해서 말하는  내용을 되살려서  교회 질서의 모범으로 삼아 보려는 노력이었다.


  칼빈의 교회론의 2가지 중요한 요소는 목회자의 선택과 훈련의 집행이다. 목회자의 선택은 교회와 목사가 연합으로 정해야 한다.  여기에서 칼빈의 주장이 갖는 의의는 개교회의  유일한 교회로 삼았다는 점이다.


  둘째로, 치리가 교회에서 필요한 것은  교회의 거룩성을 보증해 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이 교회의 뜻에 의해서 공개적으로 짓밟히는 것을 방지하고 그리스도의 영예를 보전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훈련의 목적은 3중적이다.  그리스도의 몸과 주의 만찬이  황폐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교회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 마저 부패되는 것을 방지하고, 죄인들을  회개로 이끌기 위함이다.  칼빈은 로마 카톨릭의 행습을 반대하면서 훈련은 목회자와 교회가  연합해서 집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0)  성례전
  성례전의 정의를 칼빈은 성례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인데, 외적 인 징표로 확증되며 또한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 향한 경건을 상호간에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례전 이론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칼빈은 로마 카톨릭의 입장과 또한 쯔빙글리파와 재세례주의자들의 이론도 다같이 피하려고 했다. 칼빈은 성령이 곧바로 성례전을  효과 있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성례전은 일차적인 것에 대한 상징으로서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과, 성례전은 의롭게 하는 능력과  은총을 부여하는 능력을 갖는다는 주장을 배격하며 성례전을 예수그리스도를 제공해 주고 나타내주는 말씀의 목적이외  다른 목적을 가질 수 없다고 하며 "주어서는 안될 것은 하나도 주어지지 않았으며, 역으로 거 기에 주어진 것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고 하였다.
  성례전은 세례와 주의 만찬 뿐으로서 세례의 목적은 신앙을 북돋아 주고 다른 사람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신앙에 대한 도움으로서 세례는 죄의 사면과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죽고 부활하며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참된 징표이다.  
 칼빈은 세례가 집전 순간에만 효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서 효력을 갖는다고 보았다.  또한 재세례주의자에 대해서 칼빈은  어린이들도 세례를 받아야 하며, 이 의식은  집전하는 사람에 관계없이 효력이 있다고 하였다.
  세례를 집행하는 방법에 대해서  침례와 물 뿌리기(sprinkling)를 다같이 받아들일 수 있으나  이 가운데서 어느 쪽을 택하든지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의 만찬은 신약성경에 있는 하나의 성례전으로서, 성찬식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가시적인 징표로서 성찬행위 그 자체가 이러한 연합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앙의 결과이며,  따라서 성령의 활동이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찬행위 그 자체가 이러한 연합에 효력을 어느 정도 미친다고 보는 생각 은 마술적인 것으로 배제되어야  한다.  더우기 "징표"와 "본질"은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고 한다.
  칼빈이 징표와 본질을 구별하는 것은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혼돈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며,  또한 먹고 마시는 행위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와의 영적 연합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칼빈은 만찬을 단순한 기념행사, 혹은 성물(elements)의 기능을 영적 상징주의로 전락시키려 하지는 않았다.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대신한다는 단순한 뜻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성령의 활동을 통해서 참여자에게 유효함을 보여 준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의 오류를 경계해야 한다고 한다.


첫째, 우리는 징표를 너무 소홀히 한 나머지, 징표와 징표가 나타내는 비밀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나누어서는 안 된다.  둘째, 우리는 빵과 포도주를 과도하게 높임으로써 신비 그 자체를 어느 정도 흐리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만찬에서 가시적인 징표와 영적인 실체를 구별한 다음에도 그 실체에는 명확하게 밝혀야 할 3가지 사항, 즉 의의(the signification), 질료(the matter)와 효과(the effect)가 있다.
  의의는 신체적인 징표가 말하는 약속에 있다. 성찬의 질료는 그리스도 자신이지만 신자들이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영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효과는 신자들에게 있는데 신자들은 구속, 의, 성화와 영원한  삶을 부여받는다.  따라서 성찬의 중심은, 그 내용은 그리스도 자신이며, 그리스도는 성찬 안에서 제사장의 직임을 계속한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신자들은 그 몸과 연합되며 또한 그 연합의 이익을 받게되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게 된다고 한다.


11) 교회와 국가
  칼빈은 교회와 국가 사이에는 관할 영역이 서로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의 관심은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국가를 어떻게 보며 국가와  어떠한 관계를 가져야 할 것인 가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재세례주의자들이 국가는 불결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국가와는 어떠한 접촉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을 배척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국가는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며 하나님이 국가의 공직자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공의를 받들어 섬기는 기능을 부여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통치자들이 연약하거나 악독할지라도 그들의 권위에 개별적으로 항거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두 가지 예외가 있는데 이  두 가지 요소는 후대의 칼빈주의자들이 폭정이라 고 간주하는 체제에  항거하였던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첫 번째 예외는 백성의 이익을 옹호해야  할 의무를  가진  하위직 공직자들이 만일 폭군의  폭정을 중지시키지 못하면  그들의 책임을 기피하는 것으로 본다.   두 번째 예외는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왕권에 근거해서, 우리는  인간 통치자보다도 하나님께 더욱 복종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에 위배되는 시민법이나 요구를  할 경우에는 복종을 거부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신학의 출발점은 성경이라기보다는 은총의 경험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이었으며 그의 목표는 정확한 교리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에 있었다.


(3) 칼빈과 장로회
16세기 이후 서구문명의 흐름은 칼빈주의를 모르고서는 바로 이해할 수 없다. 당시 사회의 중심은 교회였고, 교회의 개혁은 바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예술 전반에 걸쳐서 영향을 끼쳤다.
칼빈주의는 칼빈으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진 사상체계를 가리킨다. 칼빈이 이 사상을 모두 창작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 사상의 중요한 해설가였다. 칼빈은 하나님 중심의 신학사상을 목회 현장에서 실천하였고, 그의 성경 강해와 논문 및 서신들은 말씀 중심의 그의 신학 체계를 잘 보여 준다. 칼빈은 단순한 신학자나 사상가가 아니었다. 그는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다 간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의 [기독교강요]는 300년 동안 개혁교회들의 필수적 신학 교과서가 되었다.


복음적 신앙에 대한 칼빈의 짜임새 있는 확증은 프로테스탄트 운동을 그 반대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였다. 칼빈의 가르침은 어떤 다른 개혁가의 그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정신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위그노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화란인들을 준비시켜 그들의 국가적 이익을 영웅적으로 수호하게 했으며,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가능케 했으며, 영국의 청교도주의를 형성했고, 뉴잉글랜드 특성의 기반이 되었다. 칼빈의 신학은 그것이 침투해 들어간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형태들을 취했으나 그것의 근본적인 특징들은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장로회 정치를 실현하여 장로회의 표본이 되었다. 칼빈은 제네바 시의회에 시와 교회를 위하여 교회의 정치와 훈련에 관한 "교회 규정"의 필요성을 호소하여 결국 1542년 시의회의 인정을 받았다.
칼빈은 교회에 관한 모든 것, 교회 정치, 교리, 예배, 훈련, 그리스도인의 생활 등의 모든 것을 성경에 기초해서 만들어 이 교회 규정에 담았던 것이다.


칼빈은 성경의 교회는 장로들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단순한 대의제이며, 장로 이외의 직원으로서 목사, 교사, 집사를 가지고 이었다고 믿어 교회 규정에 이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그리하여 제네바 교회는 사실상 장로교회가 된 것이다. 제네바 교회는 명칭상으로는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고 일컬어졌으나 정치 형태로는 완전한 장로교회였다.
제네바에서는 5명의 목사와 12명의 장로로서 장로회가 조직되었는데 현대 장로교회의 당회와 닮았고 어떤 점으로는 노회와 비슷했다. 장로회의 임무는 교회를 치리하고 교회 규정을 집행하는 것이었다.
칼빈은 장로의 피택은 교회 회중 전체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고 있었으나 시의회가 장로 선거에 강하게 개입하여 실현할 수 없었다.


제네바 장로회는 교인들의 훈련을 강조했고, 기독교 생활에 관한 상세한 규칙을 정해서 사람들이 이 규칙을 지키는가 감독하는 일을 하였다. 제네바 장로회가 남긴 기록에는 여러 가지 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징벌을 받은 기록들이 남아 있다. 매우 엄하게 교회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짓을 했을 때 징벌을 가하였던 것이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신앙고백과 교리 문답서를 만들어 교회에서 채용케 했다. 이 두 가지는 오늘 날 까지 장로교회의 교리 체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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