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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6-06
 제목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배경
 주제어  [니케아신조] [콘스탄티노플]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3.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배경

 3.1 아리우스파와 반아리우스파의 응전과 이들의 우세 시기인 콘스탄틴 황제의 사망시까지;
     A.D. 325-361.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주의를 정죄했지만, 논쟁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고 그후 50여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일부 감독들이 니케아 신앙 형식에 대해서 진지한 의문을 제기하는 데 있었고 또한 황실의 정책이 돌변하는 데, 즉 콘스탄틴 황제의 개종이 모든 신학적 논쟁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는 데 있었다. 니케아 결정 사항에 대한 감독들의 불만은 일찍부터 예상하던 대로였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그리고 주안점이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해석한 아리우스주의로 축약되는 과정에서 회집한 대부분의 감독들은 사벨리우스주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언급되지 않은 채 아리우스만 정죄했던 신앙형식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어졌었다. 그러나 감독들은 자신이 맡은 교회로 돌아와서 실정을 살펴보니까 아리우스주의는 아직까지 크게 걱정할 것이 못되고 사벨리우스주의가 여전히 골치거리로 성가시게 굴자, 회의의 결정이 현명한 것이었던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니케아에서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함으로 파급된 관심사는 서로 다양하였다. 알렉산드리아에 위치한 오리겐 우파, 안디옥과 소아시아의 반(反)오리겐주의 일파들, 그리고 서방세계의 반(反)사색적 관심들로 나뉘게 되었다. 이러한 동맹관계로 아리우스주의의 사색에 대항해서 서로 이해관계 없이 뭉치게 되었으나, 아리우스파 지도자들의 개별적 공격에 대해서는 공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점차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특히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뛰어난 정략가로서, 교회 고문 자리에서 해임된 호시우스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리우스를 성찬에 참여시킨 행위로 유배를 당한 유세비우스는 감정을 억누른 콘스탄틴의 부름을 다시 받으면서 아리우스 반대 세력 제거에 본격적으로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황실 고문 유세비우스의 용의주도한 반대파 제거 계획은 특히 세 인물에게 초점 맞추어졌다.
 유세비우스가 벌인 공세에 희생당한 첫 번째 사람은 안디옥의 유스타티우스였다. 그는 오리겐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악명 높던 인물로서,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에게 단일신론자로 공식적인 고소를 당했었다. 유스타티우스가 교회 평화의 파괴자이고, 윤리적으로 의심스러운 사람이며,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Helena)에게 가혹한 비판을 가한 사람이란 이야기를 고문들로부터 전해 들은 콘스탄틴은 330년경 안디옥에서 오리겐주의자들이 주축이 되어 열린 교회회의가 그를 폐위하도록 묵인하였고, 그를 트라케로 귀양보냄으로써 그 조치를 더욱 강화하였다.


 유세비우스의 그 다음 희생자는 328년 알렉산더의 사망으로 그 뒤를 이은 아다나시우스였다. 결연하고 요지부동한 니케아 신조 옹호자이자 전임 감독 알렉산더의 대변자로 대변자로 자임한 아다나시우스는 과거에 멜리티우스파들을 다룰 때, 그리고 이집트 교회에 대해 자신의 권위를 강화할 때 사용한 강압적인 방법들을 가지고 비판의 포문을 열였다. 335년 아다나시우스는 철저히 신학적인 정적들로 구성된 두로 교회회의에 소환당했다.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죄목들 중에서 아르세니우스(Arsenius)라는 멜리티우스파 감독에 대해 살해를 음모했다는 죄목으로 고소당하였다. 이 고소 내용은 거짓이었지만 (아다나시우스는 아르세니우스를 폐위하였을 뿐이다), 알렉산더의 후임자로서는 그러한 교회회의에서 정의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아다나시우스는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직접 황제를 만나 호소하기 위해 두로를 몰래 빠져 나왔다. 그러나 황제에 대한 호소도 아무런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와 그의 동료들은 아다니시우스가 수도에 대한 이집트의 곡물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는 말로 황제를 설득했다. 이것은 반역죄에 해당했으며, 그 말을 조사해 보지도 않고 콘스탄틴은 아다나시우스를 독일의 트리어로 귀양보냈다. 바로 이것이 아다나시우스의 생애에서 일어난 첫 번째 귀양이었다.


 유세비우스가 거둔 마지막 승리는 또 다른 반(反)오리겐주의자인 안키라의 마르셀루스를 폐위하고 귀양보내는 일이었다. 그는 아리우스에 대해 아주 공격적이며 확고한 입장을 취했던 동방 감독이었으나 단일신론적 경향을 분명하게 지님으로써 쉽게 정죄받고 말았다.


 이상 요약하면, 330년부터 7년 후 콘스탄틴이 죽는 때까지 니케아 회의의 옹호자들은 빈번히 패했다. 황제의 주된 관심은 신학적인 면보다는 정치적인 데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을 잘 활용한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의 정치적 수완의 덕분으로 아리우스주의는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니케아의 옹호자들 가운데는 그들의 이론이 사벨리우스주의와 어떻게 다르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어려웠다. 니케아파의 패배는 콘스탄틴 자신이 임종시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의 손에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콘스탄틴 황제 사후에 로마제국은 콘스탄틴의 세 아들에 의해 삼분되었다. 맏아들 콘스탄틴 2세(Constantine II)는 주로 영국, 갈리아, 스페인 등 서방을, 둘째 아들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는 주로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등 동방을, 셋째 아들인 콘스탄스(Constans)는 북아프리카를 포함한 제국의 중앙부를 차지했다. 콘스탄틴 2세와 콘스탄스는 서방의 입장을 따라 아다나시우스를 지지했다. 콘스탄스는 338년에 아다나시우스를 다시 알렉산드리아 감독으로 복귀시켰다. 339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아다나시우스의 주도로 약 백여명의 감독들이 모여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하였다.


 340년 장자 콘스탄틴 2세가 막내 동생 콘스탄스에 대한 주권을 확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기습을 당하여 전사하자 콘스탄스가 서방을 통치하게 되었다. 제국은 이제 서방의 콘스탄스와 동방의 콘스탄티우스로 양분되었다. 동방의 통치자가 된 콘스탄티우스는 아리우스파와 반아리우스파를 지지했고, 서방의 통치자 콘스탄스는 니케아 신조를 옹호했다. 콘스탄티우스가 동방의 통치자가 되자 아다나시우스는 두 번째로 추방되어 로마로 피신하게 되었다(339년 혹은 340년).


 이런 정치적 상황 속에서 재기를 노리는 아다나시우스, 마르셀루스 그리고 다른 감독들은 유배지에서 귀환의 기회를 노렸고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황제의 신임을 등에 업고 세력 구축에 나섰다. 그런데 이즈음 아다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 등 동방교회 지도자들이 폐위한 바 있는 감독들의 지위를 둘러싸고 일련의 논쟁이 일었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자들을 복직시킬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고 아다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는 자기들을 정죄한 자들이 이단들이었으므로 그 결정이 무효라는 입장을 취했다. 아다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는 로마 감독 율리우스(Julius)에게 동정을 호소했고, 율리우스는 340년 교회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교회회의는 아다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에 대한 페위조치의 부당함을 공포하였다.


 자기들이 요청한 교회회의에 참석을 거부당한 동방교회 지도자들, 특히 동방에서 세력을 장악한 반(半)아리우스파는 341년에 안디옥에 모여 회의를 개최했다. 97명의 감독들은 모여서 네 개의 신조를 발표했는데, 극단적인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하면서도 니케아 신조의 핵심 단어인 '호모우시오스'(동일본질)를 회피하였다. 안디옥 회의는 니케아 신조에 대해서 공식적인 교리적 반발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회의였다.
 반(半)아리우스파와 니케아파간의 대립이 심화되자 콘스탄티우스와 콘스탄스 형제는 지루한 논쟁을 해결해 보고자 343년에 현재의 소피아에 해당하는 사르디카(Sardica)에서 동서방을 다 포함한 대규모 종교회의를 개최했다. 서방의 감독들이 주종을 이룬 이 회의는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하였고, 동방측은 아다나시우스의 감독 복직, 서방측은 마르셀루스에 대한 후원 중단이라는 화해안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일부 동방의 감독들이 사르디카 회의에 폐위된 감독 아다나시우스가 참석한 데 반발하여 사르디카 근처에 있는 빌립보폴리스(Philippopolis)에서 별도의 회의를 개최하고 안디옥 회의의 결과를 재확인할 뿐만 아니라 니케아 신조를 선언한 감독들에게 강한 분개심을 표현하였다.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콘스탄스의 압력에 의해서 346년에 아다나시우스를 다시 알렉산드리아 감독직에 복귀시켰다. 그러나 350년에 서방 황제 콘스탄스는 왕위찬탈자 마그넨티우스(Magnentius)의 지지자들에 의해 살해당했고, 콘스탄티우스는 반란을 진압하고 동서방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353년부터 콘스탄티우스가 사망한 361년까지 8년 동안은 니케아파의 철저한 패배기였다. 콘스탄티우스는 열렬한 아리우스 지지자인 무르사의 감독 발렌스(Valens)를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를 이어 황제 고문에 위촉했다. 콘스탄티우스가 취한 첫 버째 조치는 아다나시우스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351년 시르미움(Sirmium) 회의, 353년 알레스(Arles) 회의, 355년에 밀라노(Milan) 회의 등의 일련의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그는 감독들에게 아다나시우스를 포기하고 동방 교회들과 충분한 교제를 재개하도록 강요하였으며, 니케아파 감독들을 폐위 혹은 추방시키고 반아리우스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아다나시우스도 356년에 다시 감독직에서 추방되었는데, 이것이 세 번째 추방이었다. 그는 감독직에서 쫒겨난 뒤 6년 동안 이집트 오지의 수사(修士)들 틈에 피신해 있었다. 황제는 반대자들을 처리한 뒤 아리우스파 고문들의 조언에 따라 교리 문제에 손을 댔다. 357년 시르미움(Sirmium) 황궁에서 열린 교회회의는 '실재'(substantia), '본질'(ousia), '동일본질'(homoousios) 같은 성경에 없는 용어들과, 또는 성자가 "성부께 종속된다"고 암시하는 구절들을 "언급해서는 안된다"고 못박은 신조를 선언하였다. 이 신조는 니케아 신조를 배척하고 사실상 아리우스주의에 여지를 남겨 준 것으로, 갈리아의 감독 포이바디우스(Poebadius)가 붙인 명칭대로 '시르미움의 신성모독'으로 전해 내려왔다.


 그런데 아리우스 지지자들의 내부에도 두 파로 분열되어 다투기 시작했다. 좀더 온건한 우익파는 성부와 성자는 동일본질이 아니라 유사본질(Homoiousios)임을 주장했다. 이들 가운데 사실상 니케아 신조의 사상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동일본질(Homoousios)이라는 단어는 양태론적인 냄새를 너무나 풍긴다고 하여 유사본질이라는 단어를 선호했다. 이들은 니케아 종교 회의 이후 좀더 온건해진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342년 사망)의 입장과 비슷하다고 해서 "유세비우스파"(Eusebians)라고 불리기도 하고, "반아리우스파"(Semi-Arians)라고 불리기도 한다. 안키라의 바실(Basil of Ancyra)과 라오디게아의 그레고리(Gregory of Laodicea)가 반아리우스파의 대표자 역할을 하였다.


 좀더 과격한 좌익파는 성부와 성자의 "상이본질"(Hetero-Ousios) 혹은 "부동"(不同, Anomoios)을 주장하는 아리우스파였다. 이들은 성자가 성부의 본질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무에서 생성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무에서 발생을 주장하는 파"(Exukontians)라고 불리우기도 하였다. 안디옥의 감독 유독시우스(Eudoxius)와 안디옥의 집사 아에티우스(Aetius)가 이런 주장을 했고, 특히 시지쿠스의 감독 유노미우스(Eunomius of Cyzicus)가 이 사상의 대표자였기 때문에 유노미우스파(Eunomians)라고도 불리운다. 닛사의 그레고리는 12권의 책을 저술함으로 유노미우스의 사상을 심층분석하여 반박했다.


 이 두 파는 자체 내에서 일어난 분열을 치료해 보고자 358년부터 360년 사이에 여섯 번에 걸친 종교회의를 열었으나 해결점을 얻지 못했다. 콘스탄티우스는 권력을 이용해서 해결해 보고자 했으나 그것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한편 이즈음 아다나시우스는 박해의 와중에서도 니케아에서 사용한 '동일본질'을 변호하였는데, 아다나시우스에게 있어서 이것은 성자가 "성부와 동일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가 성부께 속한 것은 무엇이든 충분히 소유하고 있으며, 비록 성자가 성부께 속한 것을 무엇이든 성부로부터 받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두 분 사이에 속성상의 불변의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그의 주장과 안키라의 바실 학파가 주장한 '호모이우시오스' 교리 사이에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따라서 결국 그들의 제휴는 이루어졌고, 이것은 아리우스주의를 타파하는 데 그게 이바지하였다.


 한편, 이 즈음에 아리우스 논쟁은 또 다시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되었는데, 그것은 콘스탄티우스가 361년에 사망하고 그의 사촌 율리안(Julian)이 즉위하였기 때문이다.
 


 3.2 정통 기독교의 최종 승리와 니케아 신경이 완성된 콘스탄티노플 회의시까지 ; A.D. 361-381.

 콘스탄티우스 사후 황제가 된 줄리안은 플라톤 철학자로서 로마 제국 안에 헬라의 이교 사상을 다시 도입하고자 했다. 그는 기독교를 도입한 것이 콘스탄틴의 큰 실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방 종교를 다시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지도자들의 특권을 박탈했다. 또한 기독교인들끼리는 서로 다툼이나 하다가 망하라는 의미로 대립하고 있던 감독들을 모두 용인했다. 그래서 362년 추방되었던 아다나시우스는 다시 알렉산드리아에 복귀하게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에 줄리안은 아다나시우스를 "이방신들의 원수"라고 하며 다시 추방했다. 이것이 아다나시우스의 네 번째 추방이었다. 줄리안은 361년부터 363년까지 두 해밖에 통치하지 못하고 사망했으며 역사 속에서 '배교자 줄리안'이란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아다나시우스는 줄리안 사후에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다.


 율리안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콘스탄티우스의 지원을 받던 아리우스파는 세력의 약화를 겪었다. 아다나시우스가 362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 유사본질파에게 화해를 제안한 것도 그 한몫을 했다. 그가 제시한 화해안은, 먼저 동방 보수주의자들의 구호인 '세 휘포스타시스(hypostasis)'가 '삼신'(三神) 또는 '서로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실체들'을 뜻할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고, 그 다음에 '호모우시오스'가 '본질의 동등'을 뜻하되 성부, 로고스, 성령이 구분된다는 진리를 부정할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이 교회회의는 아울러 성령도 하나님과 '동일본질'을 갖고 계신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이로써 교회회의는 아다나시우스의 주도 아래 공포하기를, 분파들의 화해 조건으로는 아리우스주의를 배척하고, "니케아의 거룩한 교부들이 고백했던 신앙을 고백하고" "성령이 피조물이라고 말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선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하였다.


 줄리안의 후계자인 죠비안 황제(Jovian, 363-364)는 다양한 기독교 분파에 대해서 관용 정책을 썼다. 죠비안의 사후에 통치권은 발렌티니안 1세(Valentinian I)에게 넘어갔는데, 그는 동방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아우인 발렌스(Valens, 364-378)에게 동방 통치권을 넘겨주었다. 발렌스는 니케아파를 완강하게 적대하여 365년에 아다나시우스를 다시 감독직에서 추방했다. 이것이 아다나시우스의 다섯번째이자 마지막 추방이었다. 아다나시우스는 시골집으로 낙향했다. 그러나 아다니시우스는 이듬해에 발렌스의 후계자 그라티안(Gratian)에 의해 다시 직분이 회복되었고, 성령훼방론자들(Pneumatomachi)과 투쟁하다가 373년에 사망하였다.


 아다나시우스가 죽을 무렵에는 아리우스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지적-정치적 지도권이 이른바 '신니케아파'(new Nicene)라는 새로운 집단에게로 넘어갔다. 이 파의 주역들은 '세 명의 위대한 캅바도키아 교부들' 즉 가이사랴의 바실(Basil of Caesarea),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이다. 캅바도기아 교부들이 '옛' 니케아파와 호모이우시오스파로 대표되는 동방전승에 대해 이루어 놓은 화해의 열쇠는 '본질'(ousia)과 '본체'(hypostasis)라는 단어의 뜻을 조심스럽게 구분한 데 있었다. 이 두 단어는 철학적 문헌 속에서, 그리고 심지어 니케아 회의의 결정 가운데서도 동의어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라틴어로는 본질(substantia)로 번역되었다.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이 두 단어를 구분하여서 본체(hypostasis)는 사물의 개별적 존재를 언급하는 뜻으로, 본질(ousia)은 같은 종류의 모든 개체들이 다같이 공유하고 있는 본질로 분리해서 사용했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 안에 세 개의 본체(hypostasis)가 있으나 한 본질(ousia)만 있다고 주장했는데, 다른 말로 하면 세 개의 개별적 존재가 하나의 신적 본질에 참여한다는 뜻이었다.


 더 나아가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신 존재 또는 본질의 통일성은 신의 행위 또는 작용의 통일성을 함축한다고 주장하였다. 달리 말해서, 세 '위격'이 서로 다른 활동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간에 구분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독특한 방법들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모든 신적인 행위에 세 위격이 모두 포함된다고 하였다. 위격들을 서로 구분하게 하는 유일한 것은 그들이 서로 간에 관계를 맺고 있는  - 각각 한 신성의 원천(source), 출생(offspring), 발출(procession)로서 - 방식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캅바도키아 교부들의 신학은 니케아 회의에서 거의 언급하지 않은 성령의 신성을 분명히 한 것으로 큰 의의를 지닌다.


 한편, 니케아파 내에서도 아리우스주의의 상이 본질에 지나치게 반동하다가 다른편 극단인 양태론에 빠진 사람들도 있었다. 안키라의 감독 마르셀루스(Marcellus of Ancyra)와 그의 제자이자 안키라의 집사였던 포티누스(Potinus)는 로고스와 성부의 동일본질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사모사타의 바울처럼 역동적 단일신론에 빠졌다. 이들은 로고스와 성자를 구별하여 로고스는 성부와 동일본질이라고 하였고, 로고스가 인간 예수와 결합하여 성자가 되었다고 했다. 성자로서 구속 사역을 다 마치면 로고스는 다시 성부에게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성자의 발생이라는 말은 로고스가 인간 예수와 결합하는 성육신 사건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성자의 영원발생설을 부인하였다. 사모사타의 바울과는 정반대되는 전제에서 시작했으나 똑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들은 성자직은 임식직으로 생각했고, 로고스와 성령은 위격적인 의미가 없고 분할될 수 없는 신성의 다양한 표현이라 함으로써 삼위일체를 부인하고 양태론적인 주장도 하였다. 그러므로 마르셀루스파는 양태론적 단일신론과 역동적 단일신론이 결합된 형태의 이단 사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라오디게아의 감독이었던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of Laodicea)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무죄성을 옹호하려다가 또 다른 이단 사상에 빠졌다. 인간 구성의 삼분설에 입각하여 그리스도는 영만이 로고스의 영을 취했고, 혼과 육은 인간의 혼과 육을 취했다고 하였다. 영이 죄의 자리인데, 그리스도의 영은 로고스의 영이므로 죄가 없다고 하였다.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아폴리나리우스 사상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불구 인성으로 만들고 결국은 인간 구속에 합당치 못한 존재가 되게 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성령의 신성에 대해서는 니케아파조차도 처음에는 명료하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이라우스파나 반아리우스파는 성령의 신성을 처음부터 부인하였다. 특히 반아리우스파에 속하는 콘스탄티노플의 감독 마세도니우스(Macedonius)는 성령의 위격을 부인하고 "성령은 우주 전체에 분사된 신적 에너지"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닛사의 그레고리는 [성령론]을 저술하여 마세도니우스 사상을 공박했다.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마세도니우스파"(Macedonians) 혹은 "성령훼방론자"(Pneumatomachi)라고 불렀다.


 결국 니케아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신조아리우스주의, 반아리우스주의, 마르셀루스파, 아폴리나리우스파, 마세도니우스파 등의 이단적 사상과의 투쟁 속에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발렌스 황제 이후의 황제들은 대체로 니케아 신조를 옹호했다. 발렌티니안 1세의 아들 그라티안(Gratian, 375-383)은 발렌스의 사후(378)에 동서방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그라티안은 동방을 효울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데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379-395)를 동방 통치자로 임명했다. 데오도시우스1세는 급한 성격으로 인해 암브로스(Ambrose)와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기독교를 국교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제국 내의 모든 이단과 이방 종교를 제거하고자 했다.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종교 회의는 이런 동기에서 데오도시우스 1세가 소집한 것이었다. 이 회의에는 서방 교회 감독들은 참석치 아니했으나 동방 교회 감독들은 약 150명 참석하였다. 이 중 36명은 반아리우스주의인 마케도니아파 곧 성령 훼방론자들이었다.


 3.3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전능자시요, 하늘과 땅, 곧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유일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며,
 또한, 유일하신 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노니], 이는 성부에게서 만세 전에 태어나셨고, 빛에서 나온 빛, 참된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된 하나님이시며, 출생하셨으나, 창조되지는 않으셨고, 성부와 동일본질이시며, 이를 통해 만물이 지은 바 되었으니, 이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사,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수육하여, 인간이 되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못박히사, 고난을 당하시고, 장사되셨으며,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하늘에 오르셨고, 성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영광 중에 다시 오시리니, 그의 나라는 무궁하리라.


 또한, 성령을 믿노니, 이는 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고, 성부에게서 나오신 자로, 성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이며,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분이라.
 유일하고,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우리는 믿노라].
 우리는 죄 사함을 통한 한 번의 세례를 믿으며, 죽은 자들의 부활과, 장차의 영원한 생명을 대망하노라. 아멘.]


4. 니케아 신조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비교

325년에 작성된 니케아 신조와 381년에 작성된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기본 내용을 같이하면서도 표현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니케아 신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데, 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 삭제된 내용은 괄호로 표시하였다.

 <니케아 신조>

 [우리는 전능자시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유일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노라.
 우리는 또한, 유일하신 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노니], 이는 성부에게서, (곧 성부의 본질로부터 태어나신 독생자시며,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 빛에서 나온 빛, 참된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된 하나님이시고, 출생하셨으나, 창조되지는 않으셨으며, 성부와 동일본질이시고, 이를 통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지은 바 되었으니, 이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사,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셨으며, 고난당하신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하늘에 오르셨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우리는 또한, 성령을 믿노라.


 (그러나 "성자께서 안계신 때가 있었다"든지, "그가 태어나시기 전에는 그가 계시지 않았다"든지, "그가 무로부터 생성되었다"고 말하거나, "성자가 다른 본체나 본질로부터 유래했다"든지 "피조물"이라든지, "가변적"이라든지, "변화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보편교회가 저주하노라.) 

 <니케아-콘스탄티노믈 신조>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니게아 신조를 기본으로 하되 확대된 부분도 있고 삭제된 부분도 있다. 니케아 신조와 차이가 있는 부분은 괄호로 표시하였다.

 [우리는 전능자시요, (하늘과 땅), 곧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유일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며,
 또한, 유일하신 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노니], 이는 성부에게서 (만세 전에) 태어나셨고, 빛에서 나온 빛, 참된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된 하나님이시며, 출생하셨으나, 창조되지는 않으셨고, 성부와 동일본질이시며, 이를 통해 만물이 지은 바 되었으니, 이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사,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수육하여, 인간이 되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못박히사), 고난을 당하시고, (장사되셨으며),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하늘에 오르셨고, (성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영광 중에 다시) 오시리니, (그의 나라는 무궁하리라).
 또한, 성령을 믿노니, (이는 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고, 성부에게서 나오신 자로, 성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이며,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분이라.


 유일하고,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우리는 믿노라].
 우리는 죄 사함을 통한 한 번의 세례를 믿으며, 죽은 자들의 부활과, 장차의 영원한 생명을 대망하노라.) 아멘.]

 이 두 신조의 형식상의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니케아 신조에 "성부의 본질(     )로부터 태어나신"이라는 표현이 콘스탄티노플 신조에는 생략되었다는 점인데, 이는 확실치 않은 철학 용어를 삽입함으로 공연히 물의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자가 성부로부터 나셨다는 표현과 동일본질이라는 표현으로도 성경의 진리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는데, 반드시 "성부의 본질로부터"라는 표현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니케아 신조에 있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콘스탄티노플 신조에는 탈락되었다는 점인데, 이것은 "참된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된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건재함으로 사실상 동어반복적인 표현을 제거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셋째, 니케아 신조에 없던 "만세 전에"라는 문구를 "성부에게서 태어나셨고"라는 말 가운데 삽입시켰다. 이는 성자의 출생과 관련하여 존재론적 추리방식을 포기하고 형상적 표현방식으로 대치한 것이다.
 

넷째, 기독론 마지막 부분에 니케아 신조에 없는 "그의 나라는 무궁하리라"는 문구를 삽입했는데, 이는 로고스가 영원하지 않다고 주장한 안키라의 마르셀루스의 가르침을 배격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종말 완성 상태에서도 자신의 인격성이 완전히 보존된다. 이로써 교리적 진술이 바울의 단일 진술, 곧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고전 15:24-28)라는 진술 위에 승리하게 된다.
 

다섯째, 니케아 신조에서 너무나 간단한 고백("성령을 믿노라")으로 그친 성령론이 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 성숙한 내용으로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1)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         "은 주권자 곧 피조물과는 구별된다. "거룩한 영"이라고만 하여도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거룩"이 그 본성이므로 신(神)일 수 밖에 없지만, 그 위에 "주" 혹은 "하나님"이란 말이 덧붙여져서 더욱 강조되었다. 2)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은 영의 활동을 말하는 것인데, 성부와 성자와 동질(同質)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말씀 안에 생명이 넘침과 같이 성령 안에 생명이 넘친다. 생명의 영이므로 만물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만물에게 생기를 주시며, 마지막 날에 죽은 자들을 일시에 다시 살리신다. 3) "성부에게서 나오신 자"란 성령이 주권자요 생명의 수여자로되, 독자적인 신성을 소유한 분이 아니라 성부에게서 나오시는 분임을 말해 준다. 4)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이란 성령이 성부와 성자와 완전히 동질일 뿐 아니라 동등(同等)임을 결정적으로 단언한 것으로서, 성령 자신이 다른 두 분과 함께 "함께" 경배를 받으신다는 뜻이다. 5)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분"이란 말씀하신 이가 성령이라는 뜻으로서, 구약에 항속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여섯째, 성령 발출에 대해서 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는 성부로부터 발출했다는 점만을 밝히고 성자와의 관계는 침묵하였으므로 후대 동서방 교회 간에 필리오케(Filioque) 논쟁의 여지를 남겨두었다는 점이다. "아들로부터"라는 의미를 가진 "필리오케"는 589년 스페인의 톨레도(Toledo) 종교 회의 이후로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삽입되었는데, 교황 니콜라스 1세(858년) 때부터 전 서방교회에서 점진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결국 개신교에서도 인정되는 교리가 되었다.

 일곱째,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성경대로"라는 귀절을 삽입함으로써 진리의 절대적인 기준으로서 전통보다도 성경의 권위를 더욱 높혔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아울러 그 내용에 있어서도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교회들의 "신앙의 규율"의 내용을 니케아 신조보다 더욱 많이 반영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아리우스파에 대한 저주문은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와서 삭제되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또한 "유일하고,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라는 문구 속에서 교회에 대한 신앙 고백을 첨가시켰으며, 구원의 길로서 "죄 사함을 통한 세례"를, 그리고 내세와 과련하여 "죽은 자들의 부활"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의 소망'을 추가하였다.
 이로써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여러 이단들을 정죄하였다. 과격한 아리우스파로서 성부와 성자의 "상이본질"(Hetero-Ousios) 혹은 "부동"(Anomoios)을 주장한 유독시우스(Eudoxius)와 아에티우스(Aetius), 유노미우스(Eunomius)를 정죄하였다. 그리고 성령의 위격을 부인하고 "성령은 우주 전체에 분사된 신적 에너지"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성령의 신성을 부인한 마세도니우스(Macedonius)와 성령훼방론자들(Pneumatomachians)을 정죄하였다. 또한 순수 양태론을 가르친 사베리우스(Sabellius)파를 정죄하였으며, 그리고 로고스와 성부의 동일본질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사모사타의 바울처럼 역동적 단일신론에 빠져 로고스를 성부의 계시방식으로 본 마르셀루스(Marcellus of Ancyra)와 포티누스(Potinus)를 정죄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무죄성을 옹호하려다가 그리스도의 인성을 불구 인성으로 만들어 인간 구속에 합당치 못한 존재가 되게 한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of Laodicea)를 정죄하였다.


 니케아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공존하다가 451년 칼케돈 종교회의 이후로는 점차 콘스탄티노플 신조가 니케아 신조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신조라는 이름보다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 아리우스 논쟁에서 비롯된 그리스도의 신성 교리는 니케아 회의에서 '성부와 성자의 동이본질'로 일단락 지어졌다가, 니케아 이후에 계속된 논쟁에서 성령의 신성이 문제로 부각되면서 삼위일체 논쟁으로 확대되었다. 콘스탄티노플 회의는 이런 면에서 정통 삼위일체론을 정립한 회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의 본질에 있어서의 일치와 위격에 있어서의 명확한 구별이 정통 교리로 선언되면서, 상이본질론, 유사본질론, 양태론, 성령훼방론, 종속설 등 모든 이단들이 정죄되었다. 아을러 성자의 불완전한 인성을 주장한 아폴리나리우스도 극복하였다.


 그러나 본질의 일치성이 숫자적 일치성이냐 총칭적인 일치성이냐 하는 문제와, 성자의 출생과 성령의 발출이 완성된 것이냐 아니면 미완성된 것이냐 하는 문제, 그리고 성령의 발출이 성부로부터 발출되었다고 선언했는데, 성자로부터의 발출을 내포한 것이냐 배제한 것이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후대의 숙제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삼위일체를 설명하라. 그러면 네 정신을 잃을 것이다. 삼위일체를 부인하라. 그러면 네 영혼을 잃을 것이다"라는 격언이 시사한 바대로, 신비의 영역을 인간의 제한된 지성으로 온전히 파헤치려는 교만은 삼가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니케아 신조와 비교할 때 성령론, 교회론, 구원론, 내세론의 면에서 크게 진보했으며, 성경의 권위를 크게 인정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Grand Rapids: Wm. B. eerdmans, 1974.
Henry Chadwick, The Early Church. [초대교회사].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1987.
Justo L. Gonzalez,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vol. 1. [기독교 사상사 (I)], 고대편. 이형기, 차종순 역. 서울: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1988.
Justo L. Gonzalez, The Story of Christianity. [초대교회사]. 서영일 역. 서울:은성, 1987.
Bernhard Lohse, A Short History of Christian Doctrine. [기독교 교리의 역사]. 차종순 역. 서울: 목양사, 1990.
Williston Walker,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4th edition. [기독교회사] 제4판. 송인설 역. 서울: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정수영, [새 교회사 I]. 서울:규장문화사. 1992.
박용규, [초대교회사]. 서울:총신대학출판부, 1994.
차영배, [개혁교의학: 삼위일체론]. 서울:총신대학출판부, 1992.
피영민,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삼위일체론," 제9차 기독교학술원 학술 심포지움 미간행 자료집(1994).
서철원, 교리사 강의안 (미간행).

 

 

>> 목차고리 : 니케아신조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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