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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6-06
 제목  니케아 회의(니케아신조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비교)
 주제어  [니케아신조] [콘스탄티노플]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1.2. 니케아 회의

 후세인들에 의해 최초의 에큐메니칼 즉 세계 종교회의라고 알려지게 된 모임을 위해 콘스탄티노플에서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소 아시아의 니케아(Nicea)에 감독들이 모인 것은 A.D. 325년 5월 20일이었다. 황제는 안내장을 각 감독에게 보내 장로 2인과 수행자 3인을 동반토록 했으며 왕복 여비와 체재비 일체를 국가에서 부담했다. 정확한 참석 인원은 알 수 없으나 약 3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일부 사가(史家)들이 기록한 318명은 아브라함 시대에 할례를 받은 숫자와 동일하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에 의해 그 진위를 의심받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헬라어를 사용하는 동방에서 왔으나 서방 교회의 대표들도 6명 있었다. 당시 기독교 신자들이 이 회의를 대하는 감상은 각별한 데가 있었다. 이 대회의에 참석한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최근까지도 투옥당하고, 고문당하고, 귀양을 갔던 인물들이었으며, 어떤 이들은 자기들 신앙에 대한 간증으로서 육체적 상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어러한 시련 후 채 몇 년도 지나지 않아 바로 그 감독들이 황제의 융숭한 대접 속에 니케아에 초대되었던 것이다. 이곳에 참석한 많은 이들은 소문과 서신 왕래를 통해 서로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이들은 교회의 보편성을 증거하는 사건에 직접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개회날이 되자 콘스탄틴 황제가 회의장에 참석하였다. 사회는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맡았고, 황제가 라틴어로 개회사를 하였다. 회의의 의사 진행은 호시우스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가 하였다.
 희열에 찬 분위기 속에서 감독들은 박해 후에 시급히 처리해야 했던 많은 안건들을 의논하였다. 이들은 변절자들을 다시 교회 안에 받아들이는 절차와, 장로들과 감독들의 선출 및 안수, 그리고 여러 교구들의 우선 순위에 관한 기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물론 이 회의가 직면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아리우스 논쟁이었다. 이 안건에 관하여는 서로 입장을 달리하는 집단들이 존재하였다.


 우선 확신에 찬 소수의 아리우스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그 후 이 논쟁의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니코메디아 감독 유세비우스에 의해 통솔되고 있었다. 이 니코메디아(Nicomedia) 감독은 물론 역사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와는 다른 인물이다. 아리우스는 감독이 아니었으므로 회의에 직접 참석할 수가 없었으며, 이 때문에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그 입장을 대변하였다. 이 일파는 아리우스의 이론이 옳은 것으로 너무도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그 주장을 명료하게 설명하기만 한다면 회의 석상에서 아리우스의 정당성이 인정되고 알렉산더가 정죄받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소수의 집단은 정통파로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에 의해 이끌어지고 있었다. 이들은 아리우스주의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분명히 그 가르침을 정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확신하였다. 알렉산더의 추종자들 가운데는, 당시 집사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으나 그 후 니케아 정통의 수호자로서 그 이름을 떨치게 되는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라틴어 사용권인 서방 교회를 대표하는 감독들의 대부분은 이 논쟁에 관해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들은 당시의 논쟁이 단지 오리겐의 추종자인 동방 교회 출신들 사이에 발생한 국부적 논쟁으로만 생각하였다. 이들은 이미 오래 전 터툴리안이 선포한 바대로 하나님은 "한 본질에 세 위격"이시라고 정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보았다.


 그런데 여기에는 겨우 세 명, 혹은 네 명으로 구성된 또 다른 집단이 '성부고난설'을 주장하고 있었으니, 이는 곧 성부와 성자는 동일하므로 성부가 고난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 감독들 - 이러한 감독들 가운데 안디옥의 유스타티우스(Eustathius of Antioch)와 안키라의 마르셀루스(Marcellus of Ancyra)가 있다 - 은 아리우스주의가 오류라는 데 동의하였으나, 이들 자신의 신조 역시 그 후 교회가 삼위일체 교리를 보다 명확하게 정의하는 과정 속에서 정죄받게 된다.
 그러나 당시 참여하지 않았던 감독들의 대부분은 이들 가운데 어느 집단에도 소속하지 않았다. 이들은 드디어 박해가 겨우 종식되고 새로운 기회들과 수많은 문제들이 출현하는 가운데 이처럼 교회를 분열시킬 가능성이 있는 논쟁이 발생했다는 자체를 걱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회의 초기에 이들 감독들은 우선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단지 모든 이들의 타협책을 찾기에 부심했던 듯하다. 이러한 태도를 견제한 대표적 인물은 동료 감독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고 있던 학식있는 역사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였다.


 먼저 아리우스파에 속하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18인의 감독과 함께 기초한 그들의 주장을 제출하였다. 그 내용은 '그리스도는 피조물로서 다만 최고의 존재일 뿐 영원성은 없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그 본질이 유사할 뿐 본질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아리우스의 주장은 즉각 반대에 부딪혔고, 그 연설문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조각조각 찢겨져 발에 밟혔다. 그러자 중간파인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는 자기 교회에서 사용하는 '신앙의 규율'을 낭독했는데, 아리우스파는 그 정도 신조라면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통파는 아리우스파를 명확하게 배제할 수 있는 방법으로 교회의 신앙을 표현할 신경의 작성을 원했으며, 두 귀절을 삽입할 것을 요구했다. 하나는 성자가 피조된 것이 아니라는 귀절이고, 다른 하나는 성부와 성자가 동일본질(homoousios)이라는 귀절이었다. 궁정 감독 호시우스는 서방사람으로서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에 익숙했을 가능성이 있고 그런 연고로 정통파의 '호모우시오스'가 니케아 신조에 삽입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마침내 회의는 아리우스주의를 명백하게 배격하였던 신경에 합의하였다. 이 신조 말미에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주장하한 기본 명제들을 직접 정죄하는 짧은 저주 문구들을 덧붙였다.


 니케아 회의에 참석했던 감독들은 그들이 합의한 신경에 의해 아리우스 논쟁이 끝나기를 소망하여 이에 서명하였다. 단지 두 명의 감독만이 서명을 거부하였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저주 문구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다. 회의는 그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직분을 박탈하였다. 그리고 콘스탄틴은 자기 자신이 내린 처벌을 첨가하여 면직된 감독들을 자기들의 도시에서 축출해 버렸다.

 

 

>> 목차고리 : 니케아신조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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