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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6-05
 제목  외국의 지배(간추린 이스라엘사)
 주제어  [이스라엘]
 자료출처  이스라엘문화원  성경본문  
 내용

■ 페르시아와 그리스 시대 (기원전 538 ~ 142년)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왕 고레스의 칙령에 따라 일부 유태인들은 그들의 땅으로 돌아왔다. 제1차 귀환 때(기원전 538년) 배를 탄 약 5000명으로 추산되는 이들은 다윗의 직계후손인 스룹바벨에게 인도되었으며, 1세기가 채 못되어 행해진 제2차 귀환은 율사 에스라에 의해 인도 외었다. 그 후 4세기가 넘도록 유태인들은 페르시아 제국 (기원전 538 ~ 333년)과 후의 그리스 시대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 시대)의 대군주 (기원전 332 ~ 142년) 밑에 여러 가지 계급으로 나뉘어 자치하는 법을 배웠다. 유태인들의 귀환, 에스라의 지도력, 두 번째 성전의 건축, 예루살렘 성벽의 중건과 유태인의 종교적, 사법적 최고 기구인 크네세트 하그돌라 (의회) 의 설립은 두 번째 공동체의 시작을 의미한다. 페르시아 제국 안에서는 유다는 예루살렘이 중심인 국가가 되고 대제사장과 장로 회의에 지도력을 위임하였다. 그리스 시대를 거치는 동안 시리아에 본거지를 둔 셀레우코스 왕은 그의 백성들에게 그리스 문화와 관습을 강요하기 위해 유태교 행사를 금지하고 성전을 모독하였다. 그 반발로 거대한 항거 운동이 일어나고(기원전 166년) 강한 전투력이 생겼다. 이 항거 운동은 처음에 하스모니안 왕조의 성직자인 마타티아스에 의해 주도되었고,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유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데, 그는 셀레우스코군에 대항하여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며 성전을 정화하였다(기원전 164년). 이 성전 탈환을 매년 하누카 축제(수전절) 동안 경축하고 있다.

 

■ 하스모니아 왕조 ( 기원전 142 ~ 63년 )
하스모니안의 승리가 잇따르자 셀레우코스는 유다 왕국(이때 이스라엘 땅으로 불리었다) 에게 정치적, 종교적인 자치권을 부여하였고(기원전 147년), 셀레우코스 왕국의 붕괴로(기원전 129년)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졌다. 하스모니안 왕들은 세습하여 왕이 되었는데, 솔로몬 시대의 영토에 버금가는 영토를 차지하였다. 약 80년간 지속된 하스모니안 왕조 시대동안 유태인의 생활은 풍요로웠다.

 

■ 로마의 지배 ( 기원전 63 ~ 서기 313년)
로마인들은 그 지역의 강한 지도자로서 셀레우코스로 대체하고 하스모니안 왕 히르카누스 2세에게 다마스쿠스의 로마 총통의 지배 아래 제한적인 왕권을 부여하였다. 유태인들은 새로운 정부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고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이전의 하스모니안 왕조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마지막 노력이 마타티아스 안티고누스에 의해 시도되었으나 로마에게 패하고 사망(기원전 40년)함으로써 이 땅은 로마 제국에 예속된 한 주가 되었다. 기원전 37년에 로마는 히르카누스 2세 고문의 아들이자 히르카누스 2세의 딸과 혼인한 헤롯을 유다왕에 임명하였다. 헤롯은 외교에서는 아무런 힘을 갖지 못했지만 국내 일에 대해서는 대부분 무제한적인 자치권을 부여받았으며, 로마제국의 동부에서 가장 강력한 왕 중의 하나였다. 그레코로만 문화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헤롯은 거대한 건축 계획을 세워 가이사랴와 세바스테스의 도시들, 헤로디움과 마사다의 요새를 세웠고, 당시의 가장 웅장한 건축물인 성전을 재건했다. 이러한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헤롯은 유태 백성들의 신임과 지지를 받지 못했다. 헤롯이 사망한 수 (기원전4년), 주로 헤롯 왕조에 대한 대중들의 반대로 인해 그의 후계자들의 권위는 점차 소멸되었고 유다는 로마가 직접 지배하게 되었다(6년)점점 가혹해지고 이성을 잃은 로마의 지배를 견디다 못한 유태인들은 로마 황제 네로의 후기에는 항거 운동을 시작했다. 그 항거 운동은 예루살렘의 완전한 함락(70년)과 유다의 마지막 요새였던 마사다의 붕괴로 막을 내렸다. 로마군의 대장 티투스에 의해 함락된(70년) 예루살렘과 성전은 유태 민족에게 중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유태 역사가인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에 의하면 예루살렘의 함락만으로도 백만명의 유대인들이 몰락하고 그 밖의 곳에서도 많은 사람이 죽고 수만 명이 노예로 팔렸다. 마지막의 짧은 유대인 군주 시대는 시몬 바르 코크바의 반란(132년) 후에 이어졌는데, 이 기간 동안 유다와 예루살렘이 수복되었다. 그러나 로마군의 막강한 힘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다. 3년 후 로마 관습에 따라서 예루살렘은 '황소의 멍에로 갈라 젖혀졌으며' 이 땅에 대한 모든 유대인의 끈은 점차 소멸되고 유다는 시리아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 아엘리아 카피톨리나로 다시 불리게 되었다.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이 모두 불타버렸지만, 유태인들과 유태정신은 로마와 만남으로써 살아 남았다. 작은 유대인 공동체는 점차 힘을 회복하고 망명에서 돌아오면서 때때로 힘을 길렀다. 제도적인 공동생활이 재건되어 국가와 신전의 통합체 없이 새로운 환경과 만나게 되었다. 최고 의결 기구이자 사법의 주체인 산헤드린(크네세트 하게돌라의 후신) 이 야브네(70년), 그 후에는 티베리아스에서 재소집 되었다. 제사장은 랍비들이 대신하였고 중앙성소가 없는 상태에서 가버나움, 고라신, 바람, 감라, 그밖의 장소에 웅장한 건축물로 정형화된 유대교 회당은 분산된 각 집단 사회의 중추가 되었다. 할라카(종교법)는 유태인들을 맺어주는 공통의 끈으로 대대로 전해 내려왔다.


■ 비잔틴의 지배 ( 313년 ~ 636년 )
4세기 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313년)과 비잔틴 제국 건설에 이어 이스라엘 땅은 범기독교의 나라가 되었다. 예루살렘, 베들레헴, 갈릴리 등 기독교의 성지에는 교회가 세워졌으며 도처에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유태인들은 이전에 가졌던 자치권을 빼앗기고 공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했으며, 단지 일 년 중 하루만 성전 파괴를 애도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었다. 614년 페르시아가 침입해 오자 유태인들은 석방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이를 지지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페르시아는 예루살렘 정부를 승인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3년밖에 지탱되지 않았다. 곧이어 비잔틴 군은 예루살렘에 재 입성하여(629년) 다시 유대인들을 축출하였다.

 

■ 아랍의 지배 ( 636년 ~ 1099년)
무하마드가 죽은(632년) 지 4년 후부터 아랍의 지배가 4세기 이상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다마스쿠스에서, 다음에는 바그다드와 이집트로부터 칼리프들의 지배를 받았다. 이슬람 지배 초기에는 유태인의 예루살렘 거주권이 회복되고 유태인 공동체는 '보호' 아래 사는 것이 승인되었는데, 이것은 특별 선거와 지세의 납부에 대한 보상으로 생명과 재산, 예배의 자유를 보장 받는 보호막으로서 이슬람의 지배를 받는 비 회교도들에 대한 관례적인 지위였다. 그러나 지속적인 비 회교도에 대한 제한법의 도입(717년)으로 유태인의 공적인 행동, 종교 의식, 법적 지위 등은 제한을 받았다. 그 와중에 내려진 경작지에 대한 세금의 중과로 그들 대부분은 시골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였으나 생활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사회적, 경제적인 차별 대우가 심해지자 많은 유태인들은 이 땅을 떠남으로써 11세가 말경 이스라엘 땅의 유태인 집단은 상당수가 사라지고, 유기적이고 종교적인 응집력이 점차 상실되어 갔다.

 

■ 십자군 시대 ( 1099년 ~ 1291년)
다음 200년 동안 교황 우르만 2세의 호소에 따라 성지 예루살렘을 이교도의 손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유럽 각 국의 십자군의 지배를 받았다. 5주간의 포위 후 1099년 7월 제 1차 십자군 원정의 기사들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라틴 왕국을 세웠다. 도시의 비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학살당했다. 회당 안에 장벽을 쌓고 유태인들은 그들의 거점을 방어했으나 모두 죽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그 후 수 십 년 동안 십자군은 조약과 협정으로, 그러나 대부분 유혈 군사 정복으로 이 나라의 다른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해 갔다. 십자군 왕국은 대부분 요새화 된 도시나 성에 한정된 소수 정복자들의 왕국이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땅은 기독교의 지배 아래 들어갔지만 기독교 국가가 되지는 않았다. 십자군이 유럽에서 성지까지의 교통로를 열어 순례의 길이 대중화되고 인기를 얻자, 동시에 늘어나는 유태인들은 그들의 옛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갈구하였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무리를 지어온 300명의 랍비들 중 몇몇은 악고에, 나머지는 예루살렘에 정착하였다. 십자군이 쿠르드 살라딘에게 격파 당하자(1187년), 유태인들은 예루살렘에 정착할 수 있는 권리를 비롯하여 어느 정도 자유를 되찾았지만, 그들의 거주는 요새화 된 몇몇 성에 한정되었다. 마지막으로 이집트에서 권력을 잡은 이슬람 군의 엘리트 계급인 마므룩에게 패하자 이 땅의 십자군 지배는 종말을 맞게 되었다.

 

■ 마므룩의 지배 ( 1291년 ~ 1516년 )
마므룩의 지배아래 이 땅은 다마스쿠스의 지배를 받는 벽지가 되었다. 악고 , 욥바, 그 밖의 항구들은 새로운 십자군의 침입으로 파괴되고 무역은 단절되었다. 중세 말에는 이 나라 도시의 중심은 파괴되고 예루살렘의 대부분은 황폐해졌으며, 유대인들은 궁핍해졌다. 마므룩의 쇠퇴기는 정치적, 경제적인 격동과 질병, 탐욕스러운 자들의 침입과 지진 등으로 암울한 시기었다.

 

■ 오스만 제국의 지배 ( 1517 ~ 1917년)
다음의 4세기 동안 이스라엘 땅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지배를 받았다. 이스라엘 땅은 네 부분으로 분할되고 행정적으로는 다마스쿠스의 한 지방으로 예속되었다. 오스만제국의 초시에는 약 1000호 정도의 유태인들이 이 땅에 살았는데, 주로 예루살렘 , 나블루스 , 헤브론 , 가자 , 츠파트 , 갈릴리 마을에 거주했다. 이 유대인 공동체는 북아프리카와 유럽에서 온 이주민들, 이 땅을 한번도 떠나지 않았던 유대인의 후손으로 이루어졌다. 오스만 술탄 술레이만 1세가 죽을 때까지 (1556년) 자리 잡힌 정부에 의해 유태인의 생활은 개선되고 유태인의 이주를 자극하였다. 새로운 이주민들 중 몇몇은 예루살렘에 정착했지만 대부분은 츠파트로 갔다. 그리하여 츠파트는 16세기 중반에 유태인 수가 1만명에 달하는 직물의 중심지로 번창했을 뿐 아니라 유태학문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카발라 (유대의 신비주의) 가 번성했으며 동시에 슐란 아루크에 성문화된 것과 같이 유태 법률은 츠파트 학파에서 디아스포라(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 전역에 퍼져 나갔다. 오스만제국의 지배가 소홀해지면서 18세기 말에는 많은 토지가 부재 지주의 소유가 되어 가난한 소작 농민들에게 일괄성 없는 세제로 임차되었다. 갈릴리의 대삼림과 카르멜 산맥은 벌목되고, 늪지와 사막이 경작지를 침식하였다. 19세기에 서양 세계의 진출이 시작되자 유럽 열강들은 선교활동을 통해 그들의 지위를 획득했다. 영국 , 미국 프랑스의 학자들은 성서의 지리와 고고학 연구에 착수하고 영국 , 프랑스 , 구 소련 , 오스트리아 , 미국이 예루살렘에 영사관을 개설했다. 정기 기선이 이 땅과 유럽 사이를 왕래하고 우편과 전신이 개설되었다. 예루살렘과 욥바를 연결하는 도로가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세 개의 대륙을 연결하는 전통적인 교두보로서 이 땅의 재 탄생은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가속화되었다. 따라서 이 나라의 유태인들의 생활 조건은 서서히 개선되고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세기의 중반에는 예루살렘 성안의 인구가 과밀하기 때문에 유태인 거주 지역을 세웠으며(1860년), 다음 25년 동안 그 새 도시를 핵으로 하는 교외 지역을 추가로 7개 더 건설하였다. 1880년에 예루살렘에는 많은 유태인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농지가 이스라엘 전역에 걸쳐 매입되고 시골 정착민들이 새로 생겼다. 오랫동안 예배의식과 문학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해오던 히브리어가 다시 부활되었다. 아울러 시온주의의 토대를 위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시온주의에 고무된 두 개의 이주 집단이 19세기 말기와 20 세기 초에 동유럽으로부터 이땅에 도착했다. 땅을 일구어 그들의 고향을 다시 찾으려는 희망으로 이들 개척자들은 수세기 동안 버려진 척박한 땅을 개간하여 새로운 정착지를 세우고, 나중에 꽃피우게 된 농업경제의 기반을 다졌다. 새로운 이주민들은 극히 어려운 환경에 직면하게 되었다. 오스만제국의 행정부의 태도는 적대적이고 압제적이었다. 통신과 교통 수단은 여전히 원시적이고 불안정했다. 늪지에서는 치명적인 말라리아균이 번식했고 토양은 수세기 동안 버려진 상태였다. 토지 매입은 제한되었고 건축은 콘스탄티노플의 특별 승인 없이는 금지되었다. 이러한 어려움과 그 밖의 어려움들은 나라의 발전을 방해하였지만 중단시키지는 못했다. 이전 1500년대에 5000 명에 불과했던 유태인의 수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1914년) 때 85,000명에 이르렀다. 1917년 12월에 알렌비 장군의 지휘아래 영국군이 예루살렘에 입성함으로써 4세기에 걸친 오스만제국의 지배는 끝나고 말았다. 영국군에는 수천명의 유대인 의용군이 포함된 3개의 대대의 유태인 여단이 있었다.

 

■ 영국의 지배 ( 1918 ~ 1949년)
1922년 7월에 국제 연맹은 영국에게 팔레스타인에 대한 위임통치를 수락하고 '유대 민족과 팔레스타인의 역사적 연결' 을 인정하고 유대국가 건설을 촉진했다. 9월 국제 연맹 이사회와 영국은 유대국가 건설 촉진 계획에 위임통치 지역의 4분의 3인 지금의 요르단 왕국을 포함시키지는 않는다는 제안에 동의하였다.

 

(1) 이주 : 시온주의와 벨푸어 선언(1917년)에 고무되어 1919년과 1939년 사이에 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하여 유대인 공동체를 다른 양상으로 발전시켰다. 1919년에서 1923년 사이에 주로 러시아에서 온 3만 5천 명의 이주민들은 몇 년 동안 공동체의 성격과 조직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 개척자들은 포괄적인 사회적, 경제적 구조의 토대를 세웠으며 농업을 발전시키고 키부츠와 모샤브를 설립했으며, 집을 짓고 도로를 건설하였다. 1924년에서 1932년 사이에 주로 폴란드에서 온 약 6만 명의 이주민들은 도시 생활을 발달시키고 풍요롭게 하였다. 이들은 주로 텔아비브, 하이파, 예루살렘에 정착했는데, 그곳에서 소규모의 사업체와 건축회사 경공업체를 설립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의 1930년대에 마지막으로 중요한 이주의 물결이 일어났는데, 히틀러가 등장했기 때문에 독일에서 온 약 16만 5천명이다. 이들 중에는 전문가들과 학자들이 많이 있었다. 또한 중서부 유럽으로부터 온 가장 큰 규모의 이주였다. 그들의 학력과 기술, 경험은 비즈니스의 수준을 높이고 도시와 농촌의 생활 환경을 개선하였으며, 유대인 공동체의 문화생활을 더욱 풍부하게 했다.

 

(2) 행정 : 영국의 위임 통치 당국은 유태인과 아랍 집단 사회에 그 집단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러한 권한을 이용하여 유태 사회는 정당 기구를 선출했다(1920년). 그것은 `선출된 의회'라 불렸는데, 매년 활동을 점검하고 정책과 계획을 수행하는 집행부인 '국가 평의회'를 선출했다. 지방의 자원과 세계각지의 유태인이 보낸 기금을 재원으로 이 기구들은 전국의 유태인을 위한 교육, 종교 , 보건, 사회 복지 시설을 위한 조직망을 발전시키고 유지해 나갔다. 1922년에 영국의 위임 통치령에 명기된 대로, '유태인 대리 기관'이 구성되어 영국 당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외국정부와 국제 기구에 대해 유태 민족을 대표하게 되었다.

 

(3) 경제발전 : 30년의 영국 위임 통치기간 동안이 나라의 발전은 박차를 가했다. 농업은 괄목할 만하게 성장하였고 공장들이 세워졌으며, 요르단 강의 물을 이용해 전력을 공급하고, 세 도로가 전역에 건설되고 사해의 광물자원이 개발되었다. 유태인 노동 총연맹인 히스타드루트가 설립되어(1920년 산업 부문에서 공동 농업의 주민들을 위해 복지를 증진시키고 일자리를 제공했다.

 

(4) 문화 : 유태 공동체의 독특한 문화 생활은 날이 갈수록 더욱 활기를 띠게 되어 미술 ? 음악? 무용 활동이 전문 학교와 스튜디오의 설립과 함께 점점 발전되었다. 화랑과 음악당이 세워져 각종 전시회와 연주회가 열렸다.
새로운 연극의 개막, 새로운 책의 출판, 지방 화가의 회고전 등이 언론에 소개되고, 커피숍이나 사교적인 모임에서 즉시 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히브리어는 영어와 아랍어와 함께 이 나라의 세 가지 공용어로 인정되었으며, 서류, 동전?우표?라디오 등에서 사용되었다. 출판이 증가하고 이 땅은 당시의 히브리 문학 활동의 유력한 중심지로 떠올랐다.
여러 가지 형태와 장르의 극장이 열광적인 청중에게 개방되었고, 히브리어로 쓰여진 희곡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5) 아랍의 반대와 영국의 통제
유대 국가를 재건하려는 유대인 공동체의 노력은 극단의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닥쳤다. 그들의 강한 적개심은 1920년, 1921년, 1929년과 1936~1939년에 걸쳐 격렬한 폭동으로 분출되어 유태인의 교통수단이 공격당하고 들과 숲이 불타 버렸으며 유대인 거주지 또는 개인에 대한 이유 없는 공격이 시작되었다. 아립인들과 대화를 이끌어내려는 시온주의자의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그리하여 시온주의와 아랍 민족주의는 양극으로 치달아 폭발 직전의 상태에 있었다. 두 국민 운동의 반대되는 목표를 인지한 영국은 일찍이 위임 통치하의 지역을 분할했듯이(1922년) 요르단 강 서쪽 땅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유대 국가로, 다른 하나는 아랍국가로 분할할 것을 권유했다(1937년). 유태인 지도층은 분할 권유를 받아들여 유태인 대리 기관에 영국 정부와 협상하여 그 제안을 재공식화하는 국면으로 유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아랍인들은 어떠한 분할 계획에도 강경하게 반대했다. 계속되는 아랍의 대규모 반 유대 폭동으로 유럽의 유대인들에게 나치의 박해에 대한 피난처 제공을 부정한다는 결론임에도 불구하고 유태인의 이주에 단호한 제한을 가하는 백서를 제출했다(1939년 5월). 이러한 정책 때문에 후에 이스라엘의 초대 수상이 된 다비드 벤 구리온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는 백서가 없더라도 전쟁을 하고, 전쟁이 없더라도 백서와 싸울 것이다."
전쟁 동안 약 2만6천명의 유태인 공동체 남녀가 나치 정권에 대항, 연합군에 지원하여 유대인 여단뿐만 아니라 육군 해군 공군으로 영국 부대에서 복무하였다.

 

(6) 3개의 유대인 지하 조직
영국의 위임 통치 기간 동안 세 개의 지하 조직이 활동하였다. 가장 규모가 컸던 '하가나(1920년에 결성됨)'는 유태인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자위 단체로서 유태인 공동체의 공식 기구에 의해 설립되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아랍의 공격에 대한 보복을 단행하고 유태인의 이민에 대한 영국의 통제 조치에 대규모 시위와 사보타주로써 항거했다. '에쩰(1931년에 결성됨)'은 하가나에 대해 유대 지도층이 내린 자치제를 거절하고 아랍과 영국의 두 목표에 대항하여 독립 운동을 시작했다. '레히'는 가장 소규모의 호전적인 단체로 주로 반영국적인 동기를 가지고 조직되었는데,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유태인 공동체의 모든 무장 지하 활동 금지를 에쩰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에쩰로부터 분리됐다 (1940년). 이 세 개의 조직은 1948년 5월 이스라엘 방위군(IDF)이 설립되자 해산됐다.

 

(7) 2차 대전 동안의 유대인 지원병들

이스라엘 내 유대인 공동체 26,000명이 넘는 남.녀 유대인들이 영국군의 육군, 해군, 공군등에 자원입대 하여 나치와 독일, 이탈리아, 일본 동맹국에 맞서 싸웠다.
1994년 9월 유대인 기구와 해외의 시온주의 단체는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이 전쟁에 참가했던 노력을 인정 받아 영국군에 유대인여단을 두게 되었고, 유대인여단은 차제 깃발과 휘장을 가졌다. 약 5,000명으로 구성된 이 부대는 이집트, 북 이탈리아, 북서 유럽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945년 연합군의 승리 후에 많은 부대원들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귀환시키는 일에 참가하였다.

(8) 홀로코스트(대학살)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나치 정부는 유럽의 유태인 사회를 말살하려는 세부적인 계획을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수행했다. 그 계획 아래 그들은 150만 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600만 명의 유태인을 살해했다. 나치 독일 군대가 유럽을 휩쓸 때 유태인들은 잔인한 박해 아래 온갖 고통과 굴욕을 받았으며 유태인 거리로 내몰려 그곳에서 산발적인 무장저항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거센 탄압을 받았다. 유태인 거리로부터 수용소로 옮겨져서 무차별 사격을 받았으며 가스실에서 대량 학살되었다. 소수의 사람만이 대학살에서 벗어나 몇몇은 다른 나라로 가고 몇몇은 게릴라로서 살아 남았으며, 그 밖의 사람들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쓴 비 유대인들의 도움으로 숨었다. 결국, 한때 세계에서 가장 활기찬 유태인 사회를 구성한 약 9백만 명의 인구 중 전쟁 전에 유럽으로 떠난 사람들을 포함하여 3분의 1만이 살아 남았다. 전쟁 후 영국은 이 땅에 와서 정착하는 유태인의 수를 더욱 제한하였다. 유태인 사회는 이에 대해 폭 넓은 '불법 이민'활동 단체를 조직했다.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약 5천 명의 난민들이 비밀리에, 대부분 위험한 경로를 택해 이 땅에 들어왔다. 영국은 해안을 봉쇄하고 국경 순찰대를 만들어 난민들이 이 땅에 도착하는 것은 차단하여 사이프러스 섬에 있는 수용소에 포로로 가두었다.

 

(9) 독립으로 가는 길
유태와 아랍 사회의 상충된 요구를 조정하지 못한 영국 정부는 유엔 총회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의제로 상정할 것을 요구했다. 마침내 특별 위원회가 구성되어 이 나라의 장래에 관한 제안을 준비하였다. 총회는 투표로서 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1947년 11월 29일) 요르단 강 서쪽 지역에 세우도록 제안했다. 유태인 사회는 그 분할 계획을 받아들였지만 아랍인들은 거절했다. 유엔의 투표에 이어 주로 아랍 국가들로부터 비정규적인 지원군의 지원을 받는 지역의 아랍 전투병들은 유태인 사회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개시하여 그 분할 결정을 좌절시키고 유태 국가의 수립을 방해하려고 애썼다. 여러 번의 후퇴 끝에 유태 방위 단체는 공격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유태 국가에 할당된 지역을 모두 되찾았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땅)에 대한 영국의 위임 통치가 끝난 후(1948년 5월 14일)에 약 65만 명의 유대인이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이미 충분히 기반을 이룬 조직적인 사회로 명목상의 국가 명칭을 제외하곤 사실상 하나의 국가였던 것이다.

 

>> 목차고리 : 간추린 이스라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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