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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6-05
 제목  한국교회 성장사
 주제어  [한국 교회사]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한국교회사는 교회성장사 또는 부흥운동사라고도 불리우리만큼 약 120년의 역사 속에 부흥과 성장을 거듭하여 왔다.  비옥한 종교적 토양 위에 뿌려진 기독교 복음의 씨앗은 타종교 전통과의 갈등과 대립, 때로는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와 함께 기독교는 국운이 기울어 가던 구한말에 한국에 들어와 민족과 함께 긴 고난의 역사를 호흡하며 내일을 향한 비전을 제시해 주었다. 기독교의 메시지가 고난의 극복과 내세의 소망을 담고 있기에, 기독교는 절망에 처한 한민족의 안식처가 되었고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줄기차게 성장해 왔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일제치하, 6·25 전쟁 뿐 아니라 4·19 혁명, 5·16 군사 쿠데타 등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도 성장을 거듭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긴긴 고난의 터널을 지나 사회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가게 되면서 기독교의 성장이 둔화되고, 전체인구 25%선에서 정체되기에 이르렀다. 전 세계 선교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경이적인 성장을 이루었던 한국교회가 정체된 현상에 대해 국내의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갖고 이에 대한 진단 및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본 글을 통해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 나타난 한국교회 성장을 시대별로 살펴보고, 이같은 급속한 성장이 있게 된 원인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2007.4.8 부활절연합예배, 서울 시청앞 광장



I. 한국교회 역사와 교회성장


한국교회의 경이적인 성장은 일찍부터 세계 교회의 주목을 받아왔다. 교회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놀라운 부흥이 복음의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일어났기에 세계 교회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자국의 선교본부에 이 사실을 계속 보고함으로써 전 세계에 이 사실이 퍼져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교회 성장의 과정을 보면 특이한 점이 있다. 그것은 한국에 선교사들이 들어와 복음을 전하기 이전 이미 복음이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는 것이다.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이전 우리 한국인에 의해 복음이 들어와 전파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1. 가톨릭의 전래

가톨릭의 경우 중국 사절단의 일행이었던 이 승훈은 1783년 북경에 이르러 예수회 선교사들과 만나 여러 차례 학문을 토론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오묘한 교리를 학습하게 되었고, 마침내 신앙을 갖게 되어 세례를 받게 되었다(세례명: 베드로〔Pierre, Peter〕). 그는 선교가 아니라 구도(求道)에 의해 한국 최초로 세례교인이 된 사람이다. 그는 그 해 3월 귀국시 여러 권의 교리서와 십자가상, 성화, 묵주 등을 가지고 왔으며, 복음전파에 힘써 그가 서울 근교에서 선교한 지 5년이 지났을 때 신도의 수가 무려 4천을 헤아리게 되었다. 또한 이 승훈과 함께 선교의 사역에 힘쓴 이 벽의 공헌을 간과할 수 없다. 그는 많은 지도층 인사들을 집교하게 하였고, 그들과 함께 수시로 모여 예배 드리고 교리도 강습하였다. 결국 이 모임이 확장되어 가자 정부의 박해가 시작되었고, 가톨릭이 이 땅에 정착되기까지 순교의 피가 도도히 흘러가게 되었다.

2. 개신교의 전래 및 구한말 기독교회의 성장

개신교 역시 선교사가 들어오기 이전 만주와 일본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우리 한국인들에 의해 복음전파의 길이 열렸던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에 복음을 들고 첫 발을 디딘 선교사로는 네덜란드 선교회 소속 칼 구츨라프(Karl Gutzlaff)를 들 수 있다. 그는 1832년 황해도에서 충청도에 이르는 해안지역을 방문하여 성경을 배포하는데, 약 한 달간 머무르면서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조선 조정으로부터 통상 허가를 얻으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돌아가게 되었다. 그 다음 1866년 미국의 무장한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에 동승한 영국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가 대동강을 타고 평양까지 들어왔으나 조선 군인과의 충돌 속에 배는 불타고 순교하게 된다. 그는 죽기전 그가 가지고 있던 성경을 배포하였고, 이 성경은 후일 여러 사람을 개종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하여 그는 이 땅에 첫 번째 개신교 순교자로 기록되게 된다.

그 다음으로 1870년대 만주 지역에 진출한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복음전파 사역을 들 수 있다. 이들 중 처남, 매부지간이었던 로스(John Ross)와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의 활약이 두드러지는데, 이들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선교의 문이 닫혀 있을 때 한국선교에 교두보를 설치하기 위해 만주를 중심으로 하여 문서선교사역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선교사들은 당시 통상 등의 여러 가지 목적으로 만주에 온 한국인들을 접촉하여 조선의 말과 글을 배우고 역사와 문화를 익히는 한편, 그들에게 기독교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879년 네 사람의 한국인이 만주에서 이들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었으며 , 이를 계기로 신약성경의 한글 번역 작업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1882년에는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각각 3천 부씩 간행되었고, 1887년에는 신약성경이 [예수셩교전셔]라는 이름으로 번역, 간행되었다. 그 이후 기독교는 한국인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한반도에 전파되어져 나갔던 것이다.

만주에서 성경이 번역되어 한국에 도입된 시기에 일본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1881년 말에 일본에 사찰단으로 왔던 이수정은 친구 안종수의 권유로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얼마 후 미국에서 온 장로교 선교사 낙스(George Knox)와 감리교 선교사 매클래이(Robert S. Maclay)와 알게 된 후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미국 성서공회 총무의 권유를 받고 1884년에 [현토한한신약성경]을 출판한데 이어 1885년 초에는 마가복음을 한글로 번역, 출판하였다. 같은 해 4월 한국에 공식적인 첫 번째 선교사로 부임하던 아펜젤러(H. G.
Appenzeller)와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바로 이 마가복음을 가지고 들어왔던 것이다.
이 점은 세계 선교사상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일면이다. 즉 선교사의 도래에 앞서서 자국인에 의해서 성경이 번역, 보급되었다는 점이다.

성경 번역의 이러한 독특성은, 그 뒤에 보이는 성경 연구에 대한 열심과 함께 결국 한국교회의 성장, 발전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한국 기독교의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선교사가 들어왔기 때문에, 그들은 한국에 입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교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었다.
1885년 선교사들의 입국은 한국 기독교의 정착과 성장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 뒤 19세기 말에서 1910년 사이 국권상실의 기간 동안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조선 말기 정권의 타락과 사회적 불안으로 생명과 재산을 위협받고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이 기독교에서 희망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3. 1907 대부흥운동과 일백만 구령운동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일제는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군대를 해산시켰으며, 행정권·사법권·경찰권 등을 차례로 빼앗아 갔다. 주목되는 것은  이 기간 동안에 대부흥 운동과 100만 명 구령 운동(Million Souls for Christ)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한국의 절망적인 상황은 방향을 잃고 불안에 처해 있는 한국민이 절대자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게 함으로 교회성장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
이같은 사회적 배경에서 1907년 초 평양에 일어난 대부흥운동은 절망에 처한 한국인에게 큰 힘과 용기를 가져다 주었고, 일제 35년 치하를 견디어 나갈 수 있는 힘을 제공했다. 이 부흥운동은 기도와 성경공부, 전도에 힘쓰는 한국교회의 신앙적 특성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이 운동의 결과 교회는 질적으로 양적으로 급속한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이 부흥회를 가능케 한 근본적인 배경은 1903년 원산에서 있었던 성서연구모임이다. 그 해 겨울 한국을 잠시 다녀갔던 스웨덴의 프란스 목사와 중국 체제의 남감리교 선교회 선교사 화이트(Miss M. C. White)가 원산에서 하디 목사(Dr. R. A. Hardie)를 비롯한 선교사들과 함께 기도와 성서연구를 위해 한 주일을 지낸 일이 있었다. 이 때 캐나다인으로 남감리교 선교부에서 일하던 의사 하디는 강원도에서 몇 년 동안 힘써 일해도 결실을 못 맺은 사실로 고민하다가, 이 모임에 참석하여 기도하던 도중 자신의 선교사업의 실패가 체험적 신앙의 전달이 아닌 지식의 전달 때문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가 회개하고 성경을 읽던 중 누가복음 11장 13절의 말씀을 통해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 그는 은혜를 체험한 후 곧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먼저 자기 집의 요리사에게, 그 다음 선교사들에게, 그리고 한국 교인들 앞에 나아가 자신의 교만했던 모습을 회개하고, 그가 체험한 성령의 은혜에 대해 고백하였다.

이와 같은 하디 목사의 간증을 들은 한국 교인들은 모두 성령의 체험을 갈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듬해 봄 사경회가 계속되었는데 이번에는 교파가 연합하여 사경회를 개최하였고 이 사경회를 통하여 성령의 체험을 한 수많은 성도들이 원산 거리를 누비며 가슴을 치면서 통회 전도하였다. 그리하여 이 부흥운동이 점차 전국으로 확대되어 가면서 1907년 1월 평양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1907년 1월 평양에서 열린 사경 부흥회에는 수많은 성도들이 참석했는데, 이 성회에서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교인들은 눈물과 감격으로 밤새워 기도하기 시작했고 그 감동의 격류는 며칠 동안 계속했다. 통성기도의 음성은 신비로운 조화와 여운을 가지고 있었으며 통회의 울음은 설움의 폭발이라기 보다는 성령의 임재에 압도되는 넘치는 영혼의 찬양의 물결 같았다. 이 부흥운동의 물결은 평양, 서울, 목포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로 파급되었는데, 교회는 물론 신학교 및 각급 학교에까지 그 영향을 미쳐 한국 전역에 성령의 바람을 불어 넣었다.
  이 운동의 결과로 한국교회 성도들은 죄를 고백하고 기도와 말씀공부에 열심하고, 생활이 변화되고, 이웃에게 나아가 열심히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이 운동이야말로 한국교회에 영원한 흔적을 남겨 놓았고, 말씀 연구와 기도를 중시하는 한국교회의 경건주의적 신앙 형태를 결정짓게 하였다.

한국교회에 성령강림을 체험케 했던 이 부흥 운동은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보다는 죄의 깨달음과 용서를 체험케 한 영적 신생과 성결에 더 큰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이 운동은 감리교를 중심으로 한 일백만 구령운동을 태동시킨다.
100만 명 구령 운동은 10만에 달하는 전도인 수와 수백만 권의 소책자, 70만 권의 마가복음이 투입된 대 전도 운동이었다. 국가가 매우 위태로운 시기에 백만 명이 그리스도에게 나아오기만 한다면 국권을 보존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는 이 운동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100만 명 구령 운동이 그 목표만큼의 양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나 이 운동은 앞서의 대부흥 운동과 함께 전도 운동에 일대 전기를 마련하게 되어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 자료에 따르면, 1905∼1910년 간에 한국에서 선교하고 있던 미북감리회가 180%, 미북장로회가 250% 성장하였고 미남감리회는 700%나 성장했다고 한다.

4. 일제치하 기독교회의 성장

일제치하 초기에는 한국교회가 큰 마찰없이 꾸준히 성장해 나갔다.
이러한 성장은 일제 초기의 한국 기독교인들이 나라를 잃은 설움과 시련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신앙으로 전환시켜 갔기 때문에 가능했다. 강제적인 한일합방 후 선교사들이 정교분리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에 장로교 총회는 대대적으로 비정치적인 복음화 사업을 계획하고 이를 조직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전도대 조직과 축호 전도를 본격화시켰던 것도 교회 성장에 영향을 미쳤다.
3·1 독립운동은 기독교가 급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3·1 독립운동 당시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이다.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을 뿐 아니라, 이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 교회가 전국을 연결하는 통로의 역할을 담당했고 곳곳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기독교계의 이같은 활동은 많은 한국인들에게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갖게 하였다. 때문에 복음 전파는 벌써 옥중에서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1920년대에 들어 교회성장에 크게 기여한 또 하나의 요인은 카리스마적 영적 지도자들에 의해 일어난 부흥 운동이다. 그 대표적 지도자들로 장로교의 길선주, 김익두 목사와 감리교의 이용도 목사를 들 수 있다.

당시 3·1운동 이후 교회는 안팎으로 무서운 시련과 여러 가지 도전을 받게 되었는데, 그 도전은 대체로 ① 일제의 탄압 ② 반선교사 감정 ③ 경제적 시련 ④ 사회주의 사상의 도전 등을 들 수 있다. 그 결과 한국교회의 신앙도 외향적인 사회관심과 참여보다는 내적인데 관심을 기울이게 되어, 이 세상에 대한 관심보다는 저 세상에 대한 관심으로, 또 이룰 수 없는 현세적인 물질의 축복보다는 내세의 정신적인 축복을 갈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내세적 신앙은 3·1운동 후 감옥에서 요한계시록을 800번이나 읽어서 이 책을 전부 외워버린 길선주 목사에 의해 주도되었다. 길선주 목사는 말세와 재림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주로 선포하였는데 40년 교역생활 중 설교 2만여 회, 청강자 380여만 명, 그에게서 세례받은 자 3천여 명, 개종자 7만여 명을 내었고, 김익두 목사는 한국과 만주 시베리아에 걸쳐 776회의 부흥회와 설교 2만 8천여 회, 새로 세운 교회 150여개소, 신유 인원수가 1만여 명, 그의 설교로 회개하여 목사가 된 사람이 2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러한 내세지향적 신비주의 신앙 전통이 1930년대 초에 감리교 이용도 목사에 의해 더욱 신비적으로, 정열적으로 계승되었다. 그는 33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나 당시의 침체된 한국교회의 새로운 성령의 바람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의 부흥운동은 교회성장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의 부흥 운동은 단순한 개인적 신앙 체험이나 교회성장만을 추구한 것으로 해석되기보다는 1920∼30년대 한국이 처한 민족적 시련을 딛고 일어서려는, 말하자면 암울한 민족 현실을 극복하려는 기독교 신앙의 한 표현 형태로 해석될 수 있다고 본다.
한편 장로교의 김익두 목사는 동시대에 신유와 기적을 동반하는 부흥회를 통하여 이적 중심의 부흥운동을 전개했다. 그의 성회에서 항상 여러 가지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였는데 성회를 통하여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한편 경성기독신보 제259호는 김목사의 이적을 애굽의 미이라와 바벨론의 탑과 함께 세계의 삼대 불가사의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신문 보도가 있자 교역자 중 일부는 이 사실을 신빙할 수 없다고 말하여 황해노회 안에 5명의 목사와 2인의 장로로 이적명증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그들은 김목사의 집회하는 곳에 참석하여 현장을 사진 찍어 증거가 되게 하고 상세하게 사실을 명기하여 김익두 목사의 이적증명이라는 작은 책자를 내기도 하였다.
일제하에 부흥 운동을 인도한 인물들은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외에 성결교회의 이명직과 정남수, 감리교회의 김종우, 유석홍, 신홍식, 장로교의 김인서 등을 들 수 있다.

당시 부흥회를 통해 정착된 한국 기독교인들의 내세지향적, 신비주의적, 신유와 기적을 간구하는 체험적 신앙 성격은 오늘날까지도 한국교회의 신앙형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본다.
이 시기에 감리교와 장로교에서도 각각 교단적 차원의 복음 전도 운동을 추진했다.
1918년 9월, 감리교(남)에서는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백년전진(The Centenary Advance)의  계획을 세웠는데 교회성장을 위해 중보기도, 생명과 물질의 청지기 정신, 개인전도, 자급, 선교 헌신(Missionary giving)등을 실천사항으로 정했다. 이 계획은  3·1운동으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1920년에 재개되었다.

장로교의 경우, 진흥운동(The Forward Movement : 전진운동) 계획을 세우고 1919년 10월의 총회에서 선교사 방위량(William N. Blair)을 책임자로 한 진흥부를 신설하고, 각 노회에 3인씩 총 36인의 위원을 선정하여 진흥 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방위량은 한 특별한 캠페인을 위해서 열 권의 소책자(Tracts)를 준비하였고 모든 장로교 선교지부를 여행하며 집회를 인도하였다. 거의 4천여 개의 장로교회들은 진흥 운동을 위한 집회를 개최하였으며, 1920년 한 해 동안에 5,603명이 결신했다.
  3·1운동 후 한국교회는 일제의 압박과 사회주의 계열의 비판을 받으면서도 계속 성장할 수 있었다. 1920년부터 1925년까지 5년 간의 성장률은 30%에 달하였고 세례 교인도 6만 9천 명에서 8만 9천 명으로 증가하였다. 1934년도 감리교와 장로교를 합한 교세는, 교회수 3,498개, 한국인 전도인수 1,458명, 선교사수 335명, 교인총수 367,220명(이중 세례 교인수 127,067명, 세례 아동수 33,102명, 학습인수 44,692명이었다고 한다)이었는데, 세례교인은 9년 전에 비해 거의 배 이상 증가하고 있었다.
일제하의 극한 탄압하에서도 양적성장이 둔화되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볼 때,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에서 유례없는 성장을 기록헀다. 장로교의 예를 들어보더라도 세례 교인 수가 1910년에 39,384명이던 것이 1942년에는 110,002명으로 나타나 32년 간 279.3%나 증가했던 것이다.

5. 해방 후 한국교회의 성장

해방과 동시에 일제하에서 가장 많은 핍박을 받았던 한국교회는 제일 먼저 교회재건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국토분단으로 인하여 남과 북이 각기 교회재건에 힘쓰게 되었고, 활발한 전도 운동이 전개되었다. 1945년 12월 초에 열린 이북 5도 연합노회는 6개항의 결의안에는 해방을 기념하는 전도 운동을 일으키자는 내용도 들어 있는데 이 전도 운동을 통하여 북한에서는 대대적인 성과가 있었다. 남한에서는 1945년 9월 8일, 새문안교회에서 남부대회가 열렸으나 감리교회의 재건을 주장하는 측의 퇴장을 계기로 각 교파의 환원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어서 감리교는 재건·부흥파로 분열되었고, 장로교에서는 신사참배 문제로 고신이 분열되어 나가고, 성경의 자유적인 해석이 문제가 되어 기장이 각각 분열되어 나갔다. 교단분열 후 각 교단의 경쟁 속에 교회성장이 가속화되었다.
또한 남한은  미군정하에 이승만 정권이 들어섰는데, 이러한 기독교적 정권의 등장은 그 후의 전도와 기독교 세력의 외형적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본다.

한국교회는 한국전쟁(1950∼1953) 중에도 여러 가지 봉사활동과 부흥 운동을 통해 계속 성장되어 갔다. 교파마다 구국 봉사 활동과 피난민 구호 활동 및 구국 봉사 활동과 피난민 구호 활동 전도 부흥 운동을 전개하여 교세가 증가하게 되었다.
장로교의 경우, 총회는 1952년을 전도의 해로 정하고 교인들을 총동원하여 1월부터 3월은 자체의 신앙 부흥, 4월과 5월은 개인전도, 집단 전도, 교회 지도 등의 단계로 나누어 부흥 운동을 진행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54년에 장로교회는 선교 70주년 기념사업으로 교회가 설립되지 않은 전국 500면에 교회 세우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감리교는 1953년 웨슬레 250주년 기념 대부흥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100 교회 세우기 운동을 전개했다. 성결교회도 1952년 3월에 대부흥 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한국전쟁의 발발에서부터 1955년까지 장로교에서 1,200여 개의 교회를 설립한 것을 비롯하여 감리교 500개, 성결교 250개, 기타 교파 100여 개 등 전체적으로 약 2,050개의 교회가 설립되었다.

한편 한국전쟁 이후 서구의 여러 교파들이 들어왔다. 1953년에는 하나님의 성회 1954년에는 그리스도 교회와 나사렛 교회 및 성서 침례 교회, 1958년 경 루터 교회, 그리고 1965년에는 오순절 교회와 하나님의 교회가 들어와 각각 교단을 설립하고 전도활동을 벌여 나갔다. 그밖에 몰몬 교회와 여호와 증인 등 외래 이단 종파도 들어왔다. 이런 교파들이 경쟁적으로 전도활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유례없는 수많은 교파가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교파분열 등으로 사회의 지도자적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을 때, 혼란기를 틈타 이단 종파가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박태선의 전도관과 문선명의 통일교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1960년대에 들어 4·19 혁명 이 후, 분열과 대립을 거듭해 오던 한국 기독교계가 변화되기 시작했다. 한국교회의 새로운 각성은 그 때까지 민족 앞에 보였던 분열과 대립을 지양하고 단합된 모습으로 나라와 민족에 봉사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교파간의 연합운동을 가능케 하였고, 대규모 복음전도 집회를 개최할 수 있게 되었다.

1964년에 발기된 한국 복음화 운동 추진회는 3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를 내걸고, 그 해 12월 3일, 발기인 총회와 창립 총회를 열고 천주교와 희랍정교까지 포함된 21개 교단 300명의 복음화 운동 전국 위원을 중심으로 임원진을 조직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1965년부터 본격화된 이 운동은 지도자 훈련, 전도 집회, 월간지 간행 등에 힘쓰는 한편, 당시 세계적 부흥사로 알려진 중국인 조세광 목사를 초청하여 서울과 전국 중요 도시에서 집회를 가졌다. 민족 복음화 운동은 그 해 11월 5일, 서울 운동장에서의 전국 신도 대회와 12월 30일 서울 후암교회(각 지방은 지역별로)에서의 민족 복음화 운동 봉헌 예배를 드림으로 한해 동안의 운동을 마감했는데 그 해에 동원된 인원은 연인원 1백만 명이었다.

1970년대 이후 교회성장

1970년대에 들어와서 민족 복음화를 위한 초교파 대전도 대회가 있었는데 1973년의 빌리 그래함 전도 대회와 엑스폴로 74, 77 민족 복음화 성회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1973년의 전도 대회는 5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를 내걸었는데, 이는 1965년의 민족 복음화 운동 대에 내건 3천만이 남한을 의식한 것임에 비해 이때의 5천만은 남북한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 대회 중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5일간 열린 여의도 집회는 연 320만 명 이상이 동원되었고, 부산(29만 4천), 대구(13만 8천), 광주(32만), 대전(87만 5천), 전주(25만 5천), 춘천(4만 3천)까지를 합하면 총 442만 5천 명이 넘었으며, 결신자도 서울의 37,455명을 비롯하여 부산(5,233), 대구(1,161), 광주(3,082), 대전(1,178), 전주(3,452), 춘천(1,339) 등 54,158명이 나오게 되었다.

여의도에서 열린 최초의 대규모 대전도집회였던 빌리 그래함 대전도대회와 74 에스폴로대회, 이 두 대회를 치르는 동안 전도를 통해 결신하게 된 수가 35만 명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대성회가 한국교회 부흥의 초석이 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1977년 8월 15일부터 18일까지 여의도 민족 광장에서 77 민족 복음화를 위하여라는 대전도 집회가 열렸다. 1965년과 1973년의 것이 외국인 부흥사들을 초빙하여 거행한 것이라면 이 전도 집회는 한국인 강사진들에 의해 추진된 것이었다. 1907년 대부흥 운동이 일어난지 70년이 되는 이 해에 우리나라에 다시 부흥 운동이 일어나야 하겠다는 간절한 열망이 이 집회를 계획토록 하였다. 민족 복음화를 위하여, 한국인에 의해서, 오직 성령으로라는 주제 아래 연인원 150만 명이 동원되었던 이 집회는, 첫째, 일체 외국의 도움이 없이 집회를 치렀고 둘째, 금식을 선포하고 밤낮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도 자리를 뜨지 않은 교인이 수십만 명이었으나 한 건의 사고도 또 환자도 발생치 않았으며 셋째, 8만 명의 결신자가 있었고 넷째, 상설 국제선교 협력기구가 탄생했다는 것이 특기할 만한 것이라고 지적되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교회는 73 빌리 그래함 대전도대회, 74 엑스폴로대회, 77 민족성회, 80 세계복음화대회, 84 선교100주년대성회, 88 복음화성회 등 굵직한 대회를 치르면서 놀랍게 부흥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러한 대성회를 개최함에 있어 분열을 거듭해 오던 한국교회가 모두 교파의 담을 헐고 서로 협조하고 참여했다는데 있다. 혹자는 이러한 대성회를 비난하여 물량적 겉치례를 과시하는데 그쳤다고 평하기도 했으나 거듭된 대성회가 한국교회 발전에 미친 영향은 말할 수 없이 크다.
그 결과 80년대 중반에 이르러 한국의 기독교인이 1천만에 다다르게 된다.
이와 같은 성장에 있어 민족 복음화 대회 등 대규모의 초교파 집회의 영향은 결정적이다. 이같은 초교파 대부흥 집회와 함께 각 교단의 교회성장 정책 추진은 실질적 교회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에서는 1970년에 이미 5천 교회 150만 신자 확보를 목표로 하는 3차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이 운동은 매년 3백 교회를 새로 개척, 설립한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이 끝날 무렵인 1974년에 639,605명이던 신자가 1977년에는 811,737명으로 증가하였는데 3년 간 172,132명이 늘어 매년 평균 57,377명의 새신자가 생긴 꼴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측)에서도 1975년에 교세 확장을 위해서 1만 교회 증설을 목표로 한 10개년 계획을 수립한 바 있었는데, 이 계획 실행 시기는 그 3년 전인 1972년에 607,870명이던 신자수가 1975년에는 668,618명으로 불어나 매년 평균 20,249명의 신자가 증가되고 있던 때였다. 감리교측도 1975년 총회에서 5천 교회 100만 신도운동을 제창하고 이 운동을 전개해 나가게 되었다.

1970-1980년대에 한국교회의 성장을 설명하는 데에 빼 놓아서는 안 될 요소가 있다. 그것은 일명 순복음교회라 불리우는 오순절 교파 교회의 성령 운동이다. 해방이후 한국에 뿌리를 내린 오순절 교파의 교회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것은 1960년대 후반인데 이때로부터 한국교회 부흥과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부흥 운동은 성령체험과 신유, 긍정적 믿음과 십자가 대속으로 주어진 축복을 강조함으로 불안으로부터의 해방과 경제적 번영을 갈망하는 한국인들에게 큰 희망과 용기를 가져다 주었다.
이같은 부흥운동에 있어서 개교회로서 한국교회 부흥 운동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 교회가 있으니 바로 조용기 목사가 담임하고 있는 여의도순복음교회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조목사의 [오중복음 삼중축복]의 메시지를 중심으로 개인전도, 문서전도, 방송전도 등을 통하여 한국은 물론 전세계에 부흥운동을 확산시키고 있다. 김진환 목사는 그의 저서에서 조목사의 메시지를 긍정적이며 소망적이라고 말하면서 성서에 입각한 순수한 믿음을 주장하며 성령의 역사를 주장한다고 덧붙였다.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는 여의도순복음교회가 한국교회 부흥운동에 끼친 공로를 인정하여 [한국교회 성령운동의 현상과 구조]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크리스챤 아카데미 원장 강원용 목사는 이 책의 간행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부터는 이런 대립의 양상이 아주 달라졌습니다. 한국교회             에 관심있는 분들은 누구나 한국에서 일어나는 전혀 새로운 사태에 깊은 관심을 보여       왔는데, 그 새로운 양상이란 한편으로는 거의 기적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한국교회의       급성장 현상입니다. 이것은 성령운동, 삼박자 축복, 안수치료와 축귀를 통한 치병운동       등을 내용으로 하는 운동으로 불길같이 전국으로 번지고 한국인이 살고 있는 세계 도처      에서 일어나게 된 일입니다. 이 운동은 한국교회 안에서만 큰 충격을 주는 일이 아닙니      다. 전세계 교회들의 주목을 받고 있으며, 한국 사회전체에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반응      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958년 불과 5명으로 시작하여 현재 70만의 재적 성도를 가진 세계 최대 교회로 성장하였다. 이 교회의 성장은 많은 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어 왔다.
이 교회의 성장요인으로는 다음의 여섯 가지 사항을 들 수 있다.
첫째로는 기도운동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907년 부흥운동 이후 사라져 가던 합심기도, 통성기도를 활성화 하였고, 금요철야 기도회를 시작하여 한국교회에 철야기도 운동을 확산시켰다. 또한 국제적 규모의 기도원을 설립하여 기도운동을 더욱 활성화했다.
둘째는 성령체험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오순절 교단의 강조점인 성령세례 체험을 초창기부터 강조함으로, 성도들의 신앙을 형식적인데서 체험적이며, 능동적 신앙으로 바꾸어 열심있는 신앙생활을 하게 하였다.
셋째는 메시지이다. 오순절 교회의 특징은 근본주의자들처럼 말씀을 강조하면서도 근본주의자들이 간과했던 말씀의 초자연적 능력에 대한 현재화를 주장하는 데 있다. 조용기 목사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절대긍정의 믿음에 기초한 메시지다. 그가 강조하는 오중복음 삼중축복의 메시지는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넷째는 목회자의 지도력이다. 일제치하 길선주, 이용도, 김익두 목사같은 몇몇 카리스마적 영적 지도자들에 의해 큰 부흥이 일어났는데, 조용기 목사 역시 탁월한 카리스마적 영적 지도력을 갖고 있는 지도자에 속한다. 폐병 3기 죽음의 문턱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기적적으로 회복한 후 그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복음사역을 펼쳐나가 오늘날의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이루어 놓았다. 40년의 역사 속에 세계 최대의 교회가 되기까지 그의 지도력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다섯째는 신유운동이다.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역사 가운데 김익두 목사의 신유사역은 그 당시 교회와 사역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박태선 전도관의 사이비 신유운동이 일어나 한국교회가 신유에 대해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조용기 목사는 신유 사역을 다시 부흥운동의 중심으로 가져왔다. 순복음교회의 신유 사역은 전도와 교회성장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여섯째는 구역조직과 평신도 지도자를 통한 전도활동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평신도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여 일찍이 구역조직을 활성화함으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특별히 그동안 사회에서 그리고 기성교회에서 소외계층이었던 여성들을 적극 활용하여 구역조직의 지도자가 되게 한 것은 교회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 오순절 성령운동과 함께 [민중신학운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순절 성령운동이 보수적인 사회 신앙 노선을 띠고 사회 저변층을 중심으로 폭넓게 확산되었다고 하면, 민중신학운동은 진보적인 신앙노선을 띠고 기독교 장로회의 신학자를 중심으로 하여 지식인층을 파고 들었으며 그들의 저술과 활동은 세계 교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민중신학 운동은 적극적인 사회참여로 인해 정부와 큰 갈등을 겪게 되었고, 많은 지도자들이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 진보적인 민중신학의 해석과 그 방법론, 보수주의 성향을 띠고 있는 대다수의 교회로부터 외면 당하기는 했으나, 성령의 제3시대를 선포하며 소외된 계층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참된 해방을 얻게 하기 위하여 노력한 점이나 사회의 부조리에 대하여 침묵하지 않고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힘쓴 것들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II. 한국교회 성장의 원인


한국교회가 이제 겨우 100년 남짓한 짧은 선교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달성한 교회성장의 모습은 실로 놀라운 일임에 분명하다. 더욱이 기독교의 본고장이었던 서구사회에서 교회가 점차 사양길을 걷고 있고 기독교가 감퇴되어 가고 있는 시대적 추세를 감안해 본다면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은 세계가 주목할 만하다. 20세기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교회의 성장 원인은 무엇인가? 크게 내적·외적 요인으로 구분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내적 요인

1) 부흥회와 부흥운동

나일선 박사는 한국교회의 성장 요소들 중의 하나로 부흥 운동과 부흥회를 꼽고 있다.
1920년대 신유 부흥사로 활약한 김익두 목사의 경우를 살펴보더라도 그의 부흥 집회를 통해 얻은 열매로는 결신자가 총 28만여 명, 병 고침을 받은 자가 1만 여 명에 이른다.
1930년대 부흥운동을 주도한 성결교 이성봉 목사는 해방 이후에도 전국을 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사중 복음의 전파와 성결교의 재건에 힘썼다. 그는 1천 교회 확장 집회, 미국 순회 집회, 1959년 성결교 희년 전도 대 순회 집회 등을 계속하였다. 그의 부흥성회에서는 김익두 목사의 집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놀라운 신유의 이적이 일어났다.
동시대 인물인 감리교 박재봉 목사 또한 전국을 순회하며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그는 그의 성역 54주년이 되는 1974년까지 1,552개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했으며, 31만여 명의 결신자와 수백 명의 목사, 전도사를 배출하였다.
이러한 카리스마적 영적 지도자들에 의해 일어난 부흥운동은 1970년대 들어서면서 개 교회 단위를 벗어나 범 교회적 대중운동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1965년 김활란 박사의 주도하에 일어난 전국의 복음화 운동은 73 빌리그래함 대전도대회, 74 엑스폴로대회, 77 민족성회, 80 세계선교대회, 84 선교 100주년 대성회 등으로 이어졌으며 이러한 굵직한 대회를 치르면서 한국교회는 놀랍게 부흥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대성회가 한국교회 성장의 초석이 되었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2) 기도에 대한 열정

발달된 과학문명에 젖어있는 서구 크리스챤들은 기도를 소홀히 하는데 비해 상대적으로 한국교회 크리스챤들은 기도를 대단히 강조해 왔다. 절망의 고비고비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복 주심을 위해 필사적으로 기도하는 모습이 오늘의 한국교회 성장을 초래했다.
세계 최대 교회를 섬기고 있는 조용기 목사는 교회성장의 중요한 열쇠는 기도이며, 기도는 교회성장의 근거가 될 뿐 아니라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는 열쇠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조용기 목사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고 깊은 영적 생활을 하며 사단의 능력을 실질적으로 파괴하는 것이라고 한다.
세계 많은 사람들은 한국교회를 기도하는 교회로 생각하고 있고 실제도 그러하다. 한국교회는 1907년 평양 대부흥회시 새벽 기도회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대부분의 교회들이 새벽 기도회를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매주 1회 이상 철야 기도를 한다. 철야기도회는 여의도순복음교회(당시 순복음 중앙교회)가 서대문에 자리잡고 부흥하던 시절 시작한 것으로 모든 교파에 파급되었다고 본다. 요즘 한국교회들은 오순절 교회나 비오순절 교회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교회가 금요 철야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리고 성도들은 기도원을 찾아가 특별 작정 기도와 금식 기도를 함으로써 계속적인 영적 갱신을 하고 더욱 충성되고 역동적인 신자들로 변화되어 간다.

3) 선교사들의 선교정책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은 한국교회 성장에 기여했다. 특별히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네비우스 선교방법이다. 3자운동(자립, 자영, 자전)을 주축으로 한 이 선교 사업은 교회의 수를 늘리고 개체교회를 확장시켜 가는데 길잡이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찍부터 한국교회의 주체적인 조직(노회, 총회)이 생기고 구체적으로 교회를 확장해 가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또한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방법이 선교의 주대상을 사회에서 소외되고 억압된 하류계급으로 두었다는 점도 교회성장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그후에도 사회에서 정체위기를 느끼거나 상황정의의 곤란성을 체험하는 자들이 별다른 거부감 없이 종교로 귀의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뿐만 아니라 가톨릭이나 개신교의 선교사들의 엄격한 정교분리원칙은 사회참여에 소극적이 되게 하였다는 부정적 측면도 있으나 사회의 불안으로부터 도피코자 하는 자들의 개종동기와 쉽게 부합될 수 있었다.

4) 구역예배(또는 속회) 운동

구역예배는 가족중심의 한국 사회를 복음화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일찍이 요한 웨슬레에 의해 시도되었던 구역예배 운동이 오늘날 서구 교회에서는 거의 사라졌고 실효를 거두고 있지 못한 데 반하여, 한국교회에서는 구역예배(감리교에서는 속회로 부름)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기독교의 복음이 각 가정에 파급되어 나가는 데 크게 기여했다.
대형교회로 급성장한 여의도 순복음교회 역시 구역으로 이루어진 대형교회라 할 만큼 구역조직이 교회성장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 소그룹 운동은 구역원의 영적 정신적 육체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데 일조한다. 비슷한 처지의 다른 크리챤들과 축복과 문제들을 함께 나누며 친구와 이웃을 초대하여 전도의 방편을 삼는다. 초대된 사람들은 사랑과 관심을 주는 크리스챤들의 그물에 걸리기만 하면 곧 신자가 되고 교회에 출석하게 된다. 현재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구역조직(또는 속회)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이 세포조직이 한국교회성장의 한 원인이 된 것이다.

5) 성경번역과 성경공부에 대한 열심

한국 기독교는 선교사 입국에 앞서서 한국인이 성경을 먼저 번역하고 번역된 성경을 수용하여 교회성장의 확실한 기초를 마련하였다. 성경보급의 열성과 성경공부의 열심은 선교사들이 한국 기독교를 성경 기독교로, 한국 기독교인들을 성경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부르게 했다.
특별히 성경공부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성경구락부는 버림받은 청소년들과 근로 청소년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성경을 가르쳤다.
이러한 성경 구락부 운동은 200여 개의 교회를 탄생시키는데 공헌했으며 성경 구락부의 확장은 곧 교인수의 증가로 이어졌다.
중국에서 선교하다가 한국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했던 선교사 화이트 양이나 하디 목사나 방위량 선교사, 이길함 목사 등 모두가 성경공부에 열심이었던 선교사들이다. 이는 요한 웨슬레가 복음운등의 불을 지르기 이전에 규칙적인 성경연구가 있었고 이것이 그가 일평생 부흥운동을 이끌고 갈 수 있었던 기반이 된 것처럼 한국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즉 성경공부에 대한 열심이 결국 한국교회의 성장과 부흥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6) 오순절 교회를 중심으로 한 성령운동

이원규 박사는 한국교회 성장은 역사적으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경이적인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신앙적으로 표현한다면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성경은 교회성장과 성령운동이 불가분의 관계임을 증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시작하였고 성장했음을 마가의 다락방 사건에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의 오순절 교단의 성령운동에 대해 서광선 교수는 병든 민중 하나 하나에 관심 갖고 치유해 주는 성령운동은 모성적 성령운동으로 특징지워지는데  모성적 성령운동이 한국교회에 양적인 급증현상을 초래하게 해 주었다고 말한 바 있다.
물질주의와 세속중의에 대한 종교적 반발과 기존 신앙에 대한 혁신 신앙의 혼합현상으로 일어나게 된 교단을 중심으로 한 오순절 성령운동은 70년대 224만이었던 교인수를 75년에 400만 명, 80년대에는 720만 명으로 급증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2. 외적 요인

1) 한국인의 종교적 영성

우리 민족은 우랄 알타이 산맥으로부터 하늘을 우러러 동진해 온 소수민족으로서 본래부터 중국대륙의 민족이나 러시아의 민족들중에 특별히 종교적 영성이 강한 민족이었다. 그리하여 한국의 역사는 종교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시대별로 그 시대를 지배하는 종교가 있었고, 한국인의 영성을 충족시켜 왔다.
바로 이와같은 한국적 영성의 토양에 기독교의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기에 기독교가 빠른 시간 안에 정착을 하고 급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라는 용어도 한국 기독교가 신 개념을 수용하는데에 크게 공헌을 하였다고 본다.

2) 사회 불안감의 증대

근대화를 이루기 시작한 60년대 이후의 한국의 정치상황은 긴장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독재화된 정치권력은 수많은 문제들을 노출시켰고, 국민들의 불안은 가중되었다. 사회가 불안하면 불안할수록 사람들은 종교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혼란과 불안정, 불안과 스트레스속에서 사람들은 불안의 해결과 안정된 삶을 찾아서 대거 교회의 문을 두드리게 했다. 이러한 사회의 불안감이 증대함에 따라 교회가 급성장한 현상은 과거의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서도 잘 나타난다.
인간은 언제나 안정을 추구한다.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심리적 안정을 가져다 주는 가장 적합한 종교로 여겨졌기에, 교회로 모여 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중에 네 영혼이 잘됨같이... 라는 마음의 안정을 강조해 왔던 오순절 교회가 특히 성장했다는 것은 우연히 결코 아니라고 본다.  한국의 불안한 정치적 상황은 한국교회 성장을 가능케 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3) 상대적 박탈감의 증대

196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은 몇 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워 경제성장에 역점을 두는 정책을 펴왔고 외형적으로는 그 정책은 성공한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경제 우선 정책으로 물질주의 배금주의가 팽배하여 졌고 소득분배의 불균형과 상대적인 박탈감의 역기능들이 나타났는데 이것이 한국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소득분배의 불균형과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종교는 보상을 약속함으로 그들에게 현실에서의 도피처 혹은 안식처를 마련해 주고 있다.
박탈감이 경제적인 것이든 혹은 정치적, 사회적, 심리적인 것이든 종교가 그것에 대한 보상의 길을 제시함으로 그들은 종교에 귀의해 위로도 받고 용기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난 20년간 한국이 경제성장을 이루며 동시에 전통 가치의 붕괴와 박탈감의 상승이라는 부작용이 심화되면서 교회가 아울러 급격히 상승할 수 있었던 요인이 된 것이다.

4) 급격한 도시화 현상

70년대 이후 한국교회의 급성장은 60년대 중반 이후 실시된 급격한 도시화 현상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급격한 도시화는 도시의 인구적 생태적 측면에서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두드러진 현상은 공동체의 붕괴와 정체성의 상실이다. 도시로 이주해 온 많은 인구들이 농촌 각 지역에서 몰려 들었기 때문에 이질감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서로 다른 문화적 지역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는 낯선 도시생활, 직장 등을 따라 끊임없이 거주지를 이동해야 하는 떠돌이 도시생활은 그에게 연대감이나 소속의식을 빼앗아 가 버렸다. 이러한 공동체성 결여는 그들은 고독한 군중으로 만들어 버렸다
김병서 교수는 같은 맥락에서 교회성장 요인은 관주도의 명령경제와 성장제일주의, 외연적인 성장전략으로 불안한 경제성장이 우리에게 다가왔고 불안한 정치상황과 도시화 산업화로 이농민이 증가되었고 근대화로 인간이 상실되어서 인간으로서의 새로운 의미를 찾기 위하여 교회로 모여들었다고 보았다.


III. 평가

1. 교회성장의 문제점들

한국교회의 급성장은 많은 긍정적인 영향과 함께, 급성장에 따른 문제점들로 나타나게 되었다. 한국교회성장의 우선적 결과는 그 영향력의 증대이다. 교회수의 증가는 당연히 목회자와 신도수의 증가를 수반했고, 신학교의 날립까지도 초래하게 되었다. 기독교 계통의 출판사업이 크게 번창했고, 기독교 예술이 크게 발전했다. 세계 제5위의 해외 선교사 파송국이 되었고, 수많은 기도원, 수양관들이 건립되었다. 각종 대형집회가 수시로 열렸고, 거대한 교회당 건물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인 성공과 성장의 이면에는 급성장에 따른 문제들이 함께하고 있음은 직시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1) 기복신앙의 문제

성경은 하나님이 복의 근원임을 말씀하고 있고, 인간이 하나님께 복을 빌고 복을 받는 일은 당연한 것이다. 기복신앙 그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 기독교 신앙 자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구원의 복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복을 기원하는 것이 개인적이고, 이기적으로 될 때 문제가 생겨나게 된다. 이것은 샤머니즘의 토양에서 성장한 한국인들에게 있어 보편화된 현상으로, 기독교내에도 깊이 침투해 들어 와 있다.
이같은 기복신앙은 왜 문제인가? 그것은 이웃과 사회에 대한 관심의 결여를 초래하는 개인주의 신앙이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단순히 개인의 축복에만 집착하는 신앙이 중심을 잃을 때 이것은 다분히 샤머니즘적인 기복신앙으로 흘러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복신앙은 한국교회가 극복하고 해결해 나아가야 할 문제라 하겠다.

2) 교회의 계층화 현상

한국교회 성장에 뒤따른 다른 문제는 교회의 계층화이다. 한국교회가 성장한다고 할 때 이는 주로 도시의 교회를 가리키고 있다. 도시에서는 그 인구가 증가할 뿐만 아니라 소득증대로 인하여 교회가 점차 중산층화 되어가고, 또한 교회의 숫자나 그 규모에 있어서 대형화 되어가고 있다. 이에 반하여 농촌에서는 이농현상으로 인구가 줄어들고, 열악한 농가 조건으로 농민들의 경제생활은 점차 어려워지고, 농촌교회도 그 숫자나 규모에 있어서 점차 쇠퇴하고 있다. 이러한 교회의 도농간 계층적 양극화 외에도 도시 자체 안에서도 대부분의 교회가 중산층화 되면서 도시 빈민지역, 공단지역은 선교의 사각지대가 되어가고 있다.
비록 1980년대에 들어 소위 민중교회들이 이들 지역에서 생겨나고 있으나 한국교회의 중산층화는 대다수의 교회로부터 가난한 이들, 특히 도시 빈민과 도시 근로자들이 외면을 당하는 결과가 생겨나게 되었다.

3) 사회참여의 부재

한국교회 성장은 탈사회적 교회를 조성하는 역기능도 초래하고 있다. 교회는 보수적이어야 성장하고, 성장하는 교회는 대체로 보수적인 신앙노선을 걷는다. 이는 한국에 처음 복음의 씨앗을 뿌린 선교사들이 청교도적 신앙에 입각한 보수주의 신앙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보수신앙은 개인구원을 중심으로 한 신앙 제일주의를 견지한다. 따라서 시간, 관심, 노력, 금전을 많이 교회에 드리게 되고, 이와 같은 교회는 자연히 성장이 따르게 된다. 그러나 보수적 신앙의 약점이 바로 개인구원에 초점을 맞추는 데 있다. 모든 개인이 예수 믿으면 사회의 문제들은 저절로 다 해결된다고 믿는다. 보수적인 교회일수록 인적, 물적자원을 사회구제나 봉사에 활용하는 경우가 드물고 사회참여에 전혀 무관심한것이 이를 말해 준다. 이러한 태도는 정치적 부패,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불의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방조함으로 결과적으로 동조하는 셈이 되어 결국 교회는 반사회적, 반민주세력으로 날인 찍히는 결과도 초래될 수 있는 것이다.

4) 공동체 의식의 약화

또다른 교회성장의 문제는 수단과 목적이 바뀌어 버리게 되는 위험성이다. 교회성장에만 주목하다보면 성장 자체가 교회의 궁극적 목표, 최종적 과제가 되어버려, 자칫 잘못하면 내실없이 외형만 비대해지고 신앙의 참된 방향을 잃어버리게 될 수가 있다. 그리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심한 경쟁을 하는 경우도 생겨나게 된다. 즉 다른 교단, 다른 교회에 대한 비판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타교회 교인의 쟁탈전을 전개하기까지 함으로써 신앙 공동체로서의 품위와 면모를 잃어버리게 될 수 있다. 교회성장을 목표로 삼는 교회는 개교회주의를 계속 표방하게 된다. 개교회의 성장에만 모든 관심을 쏟기 때문에 타교회나 교단과의 관계가 소홀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교회가 자체로는 커지겠지만 사회적으로, 교단적으로는 폐쇄적이 되며 게토(Ghetto)화 될 가능성이 있다. 교회가 대형화 되면 비인격적 인간관계가 교회안에서도 형성되게 된다. 공동체 의식이 약화되고 정체성의 위기가 다시 초래될 수 있다. 그리고 교인들이 질적성숙의 문제에 대하여는 점차 소홀해지고, 단지 교회의 관심은 오로지 선교와 신도의 증가에만 있게 된다. 그리하여 교육, 봉사, 친교와 같은 교회의 기능은 크게 위축될 수 있다. 이와같이 한국교회의 성장은 여러 가지 긍정적 기능을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수행해 왔던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 이와 같은 역기능을 초래해 왔던 것이다.
이와 같은 한국교회의 성장은 여러 가지 긍정적 기능을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수행하여 왔던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 여러 가지 역기능을 초래해 왔고, 또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살펴 보았다. 이제 한국교회는 이러한 교회성장의 문제성을 직시하여 제1세기의 교회성장을 성서적이고 신학적인 차원에서 새롭게 재조명하여 다시금 문제성을 동반하는 제2세기의 교회성장이 되지 않기를 간구하면서 그 자세를 새롭게 정립해야 할 것이다.


맺는 말

하바드대 하비 콕스(Harvey Cox) 교수는 최근 그의 저서 하늘로부터의 불(Fire from Heaven)에서 오순절 성령운동이 21세기 교회를 주도하게 되리라 예측한 바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오순절 운동의 개관과 함께 각 대륙별로 일어난 오순절 성령운동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특별히 11장 전체를 한국교회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그는 한국교회를 아시아 지역을 대표하는 교회로 보고 한국교회를 비중있게 다루었던 것이다.

한국교회가 초기에는 민족의 운명을 걸머지고, 민족 종교의 역할을 담당하며 고난을 겪으며 많은 박해와 어려움 속에 성장되었다. 그러나 정치적·사회적 상황의 변천에 따라 청교도적 신앙의 선교사로부터의 영향으로 보수적 성향을 지닌 한국교회가 개인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사회참여와 개혁에 미진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교회성장에는 큰 효과를 거두었으나 사회를 개혁시키고 변화시키는 데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유교의 잔재로 한국 기독교에 흘러들어 온 교권주의, 계급주의, 지방색, 파벌주의의 영향을 극복하지 못하고 끝없는 분열을 보임으로서 한국 사회에서 그 지도력이 크게 약화된 감이 없지 않다. 뿐만 아니라 샤머니즘의 풍토 속에 물질만능주의, 배금주의가 교회내에 침투해 들어와서 신앙의 순수성을 파괴하고, 십자가와 고난이 결여된 채 오직 현실적 축복에만 관심을 가진 이기주의적 신앙인들을 양산해 내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초창기 갖고 있던 민족의 종교로서 영성과 지도력을 회복하여 민족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교회성장 일변도에서 나타났던 많은 문제점들을 보완해 나가며, 소외된 이웃을 향해 사랑의 팔을 펼친다면 한국교회의 제2의 도약기가 다가 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를 위하여 양극화 되어있는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의 지속적인 대화와 연합사업의 추진 등이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힘을 합하여 한국 사회 변화와 개혁에 앞장서야 한다.
모든 상황이 새롭게 변화 될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는데, 아직 한국교회가 이에 대한 적절한 대처를 하고 있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다가오는 새로운 한 시대를 바라보면서 모든 교회가 손에 손잡고 힘을 모아 21세기 한국과 세계를 이끌고 나갈 주역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해 나아가야 하리라 본다. 한국교회의 고질적 병폐였던 분열과 대립이 사라지고 연합과 일치에로 나아간다면, 한국교회는 다시 한번 이 나라의 미래를 영도해 나갈 지도자의 위치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 연결고리 : 한국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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