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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5-31
 제목  언제부터였을까?
 주제어  [한국 교회사] 소래교회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1885년 설

 

서론

 

소래교회는 서상륜·서경조 형제에 의하여 설립된 교회이다.

이들 형제는 19세기 말 한국의 개화기와 때를 맞추어 나타나 베드로와 바울과 같은 큰 업적을 남기고 간, 한국 교회의 개척자들이다.

평북 의주 태생인 이들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고향을 떠나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소래로 이주하게 된다. 몸은 비록 타향살이 신세였지만 신문화와 복음을 먼저 받아들인 선각자다운 기개와 열의로 충만되어 있는 이들은 조국에 복음의 씨를 뿌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리하여 궁벽한 시골 마을이긴 하지만 열과 성을 다하여 복음을 전함으로 한국 교회의 모체인 소래교회를 설립하였고, 이를 기점으로 복음의 종소리를 인근 마을로 메아리치게 하였다. 수천 년 무지와 가난의 깊은 잠을 깨우는 황금종 소리에 놀라 이 민족은 역사의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것이다.

외국 선교사의 발길이 미치기 전에 내 힘으로 내 동포의 잠을 깨운 이 위대한 업적은 세계 선교사상 유례가 없는 대업적으로 기록되어야 하며, 아무리 높이 칭찬하여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는 일대 장거(一大壯擧)임이 분명하다.

이들로 말미암아 설립된 소래교회는 한국 교회의 [뿌리]이며 원줄기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소중한 역사의 [뿌리]를 무심하게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고, 그 결과 소래교회는 여러 모로 황폐해지고 잊혀지게 된 것이다. 그 구체적인 예가 소래교회 설립연대이다.

이 지구상에 많은 인구가 있어도 그들이 세상에 태어난 생일은 오직 하나일 뿐이다. 소래교회의 설립연대도 역시 하나 밖에 없을 터인데, 연구하는 학자에 따라, 참고하는 문헌에 따라 의견이 백출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사의 현주소이다. 소래교회의 설립연대가 불분명하다는 것은 한국 교회의 기점이 정확하지 못하다는 결론이다. 시작이 정확하지 않은 역사는 왜곡되기 마련이다.

문제는 역사의 왜곡만이 아니다. 교회의 기점을 모르니 한국 교회는 자연히 선교사의 내한을 역사의 기점으로 삼게 되며, 이런 역사는 자연적으로 자주적인 역사의식보다 사대적(事大的)인 역사관을 가지게 되고, 그 결과 내 손으로 애써 일구어 놓은 고귀한 역사는 외면하고, 다른 사람의 역사를 내 것으로 착각하는 중대한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선교사 중심의 역사를 기록하게 되었고, 역사적 기록에도 많은 오류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에 눈을 돌리고 우리 것을 찾아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문제에 대하여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 오늘의 처지를 슬퍼하면서 본 장에서는 소래교회의 설립연대에 대하여 현존하는 자료들과 증인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검토한 후 결론을 얻어보려고 한다.

편의상 설립연대를 1885년 설, 1884년 설, 기타의 주장들, 그리고 1883년 설로 구분하였다.

1. 1885년 설

소래교회 설립연대에 대하여 1885년 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모두 높은 학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분들임을 사전에 언급해 둔다.

1) 김양선목사의 견해

한국 기독교사 연구가인 김양선 목사는 소래교회 설립을 1885년이라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

"맥킨타아어 목사의 집에 우거하면서 성서 번역사업에 간접으로나마 가담하였던 서상륜의 아우 서경조는 1885년에 형을 따라 황해도 소래에 이주하여 살면서 형의 부탁으로 그 곳에 복음서를 전파하여 같은 해 20여명의 세례 지원자를 얻었다."
        (金良善(1971). 韓國基督敎史硏究. 서울: 基督敎文社. 51쪽)

그가 <白山學報>에 기고한 글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을 소개하면서 주목할 만한 연대를 더 지적해 주고 있다.

"1883년에 徐相崙이 서울傳道의 길을 떠날 때 景祚도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가 1885年에 黃海道 長淵郡 大救面 松川洞에 定着하게 되었다. (중략) 徐景祚는 兄의 권고로 松川에서 Ross Version 福音書들을 親友들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하였는데 1885년에는 20여 명의 改宗者가 생겼다."
      ( 金良善(1967). "Ross Version과 韓國 Protestantism" 한국의첫선교사. 啓明大學校出版部. 113쪽.)

이상의 글을 통하여 김양선 목사는 소래교회의 설립연대를 1885년으로 확실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2)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의 기록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자료들을 볼 때 1885년에 소래교회가 설립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는 자료는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이하 [사기 상]으로 표기한다)라고 추리된다. 사실 1928년 총회에서 발행한 <사기 상>에는 소래교회가 1885년에 설립된 것 같은 느낌을 갖도록 기록되어 있으며, 이것이 소래교회 설립연대에 오류를 발생케 하는 중대한 원인이 된 것 같다.

우선 <사기 상>의 본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一千八百八十五年(乙酉)에 義州人 徐景祚가 中國으로부터 福音을 得聞하고 歸國하야 黃海道 長淵縣 大救面 松川洞에 移住하고 其兄 相崙의게 聖經書籍을 多數 請得하야 隣里에 傳播하야 信者를 招集하엿으니 此가 松川敎會의 創立니라. 是夏에 景祚난 上京하여 元杜尤牧師의게 洗札를 밧고 是秋에 元杜尤牧師난 松川에 巡往하야 景祚의 幼子 丙浩의게 洗札를 주어스니 此가 朝鮮敎會의 兒洗의 始니라."
      (車載明(1928). 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 京城: 朝鮮예수敎長老會總會. 9쪽).

<사기 상>이 전해주는 사건 내용들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서경조가 중국에서 복음을 들고 귀국한 일.

둘째, 서경조가 소래로 이주해 온 일.

셋째, 형 서상륜에게 많은 성경을 얻어 전도하여 소래교회를 세운 일.

넷째, 그 해 여름에 서경조가 상경하여 언더우드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은 일.

다섯째, 그 해 가을에는 언더우드가 소래에 와서 서경조의 아들 병호에게 아기세례를 준 일 등이다.

이상 5가지 사건들이 1885년, 한 해 동안에 모두 일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 많은 사건들이 한 해 동안에 일어났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3) 서경조의 논문

더욱이 서경조가 <신학 지남>에 기고한 논문 "徐景祚의 信道와 傳道와 松川敎會 設立歷史"에서 이 사건들이 한 해에 일어났었다고는 하지 아니한다.

이제 서경조의 논문 한 구절만 소개한다.

"一千八百八十三年 癸未年 長淵 松川洞에 移住하게 된지라. 잇때에 伯氏는 심양에 드러가 라목사의게 受洗하고" (중략) 一千八百八十五年 乙酉 春에 伯氏의 下書를 보고 上京하니 元杜尤 牧師가 前年에  왓는대 서울 사람  一人과 의쥬 사람  一인이 세례를 밧앗더라..... (중략) .... 그해 九月에 원목사가 유람 공문을 가지고 숑쳔에 내려온지라. 丙浩가 난지 셕달되어 유아셰례를 밧으니라."
         (徐京祚(1925). "徐景祚의信道와傳道와松川敎會設立歷史". 神學指南. 95쪽.)

서경조는 분명히 1883년에 소래로 이주해 왔다고 하였다. 따라서 [사기 상]의 기록대로 서경조가 소래로 이주하는 것과 그의 아들이 아기세례를 받은 사건이 1885년, 한 해 동안에 모두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사기 상>은 소래교회의 정확한 설립연대를 제시한 것이 아니라 1885년에 일어난 사건을 기술하면서 그에 앞서 원인을 제공한 모든 사건들을 총망라하여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은 <사기 상>의 기록과 서경조의 기록을 대조할 때 서경조·서병호의 수세 연대는 모두 1885년으로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수세 사건은 다음 장에서 자세히 논하게 될 것이다. 소래교회의 설립연대를 1885년으로 주장한 김양선 목사가 <사기 상>을 근거하여 "서경조는 1885년에 형을 따라 황해도 소래에 이주하여 살면서 형의 부탁으로 그 곳에 복음서를 전파하여 같은 해 20여명의 세례 지원자를 얻었다"고 주장하였다면, 오히려 서경조의 논문에 부합하도록 연대를 맞추어 "1883년에 소래로 이주하여 같은 해 20여명의 세례 지원자를 얻었다"고 고치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 같다.

4) 대한성서공회의 견해

한국 교회가 100주년을 맞으면서 대한성서공회는 선교 100주년기념 성경전서 5,000권을 발행하였다. 이 성경에는 로스번역인 <예수셩경전셔>의 표지사진과 함께 소래교회의 초가집 사진을 "카드"로 제작하여 삽입, 판매하였다.

이 "카드"의 초가집 사진 설명문에 "1885년에 설립된 교회"라고 기록하고 있다(사진 참조).

이 카드에 기재한 소래교회 초가집 사진의 출처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발행한 <희년기념화보>이다. 이 화보에는 분명히 "1884년 교회 시작시의 예배처소(松川敎會 前身)"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림의 원본에 연도가 명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서공회는 그 사진을 복제하여 사용하면서 설립연대만은 1885년이라고 바꾸어 사용하였다. 이 사실을 발견하고 성서공회측에 소래교회 설립연대를 1885년으로 기재한 근거를 질의하였더니 다음과 같은 회신을 보내 주었다.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전략)

1) 본 공회에서 소래교회의 창립연대를 1885년으로 기록한 근거는 <한국교회사> (곽안전저, 대한기독교서회 1973) 61페이지에서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귀하의 서신을 접수한 후 조사하여 본 결과 학자에 따라 창립연도에 대한 차이점이 있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2) <기독교 대백과사전> (기독교문사, 1983)에 의하면, 여러 학자들의 창립연대에 관한 설이 기록되어 있고, 이러한 설과 언더우드의 전기 [The call of Korea]와의 시차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3) <한국기독교회사> (민경배 저, 대한기독교출판사, 1983)에 의하면 1884년 창립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4) <조선예수교장노회 사기, 상권> (차재명 편,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1928)에 의하면 1885년 창립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회 창립의 기준이 단순히 교인 몇명의 예배시작에서 되느냐, 혹은 공식적인 창립예배나 예배당 헌당에서 비롯되느냐에 따라서도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이것은 신학적 범주에 속한 문제이므로 본 공회에서는 자체적 주장을 하기 어렵다는 점을 양지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하 생략)"

성서공회가 친절하게 회신을 보내 준 것에 대하여 지금까지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회신 내용에서 성서공회는 <기독교 대백과사전>, 민경배 교수의 <한국기독교회사>, 그리고 <사기 상>의 기록 등을 자세히 열거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이미 상술하였고 앞으로 다시 설명되겠기에 중복을 피하기로 하고, 다만 클라크(Allen Clark, 한국명 곽안전 郭安全)의 <한국교회사>에 대하여만 거론하고자 한다. 클라크가 저술한 <한국 교회사>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이 곳에서 아우 서경조와 함께 복음을 전하여 결국 1885년에 소래교회가 창립되어 한국에 있어서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발생지를 이루어 놓았다."
( 곽안전(1973). 韓國敎會史.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61쪽)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클라크의 <한국교회사>는 현재 출판되지 않고 있어 발행처인 기독교서회에서도 구입할 수 없는 서적이다. 그의 기록이 얼마나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는 앞으로 더 연구해 보아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성서공회가 제시한 언더우드의 글인 <한국의 소명>에는 소래교회 설립연대에 대하여 일체 함구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하여도 다음에 다시 자세히 논하게 될 것이다.

이상에서 1885년 설립에 대한 대표적인 주장들을 소개하였지만 명확한 자료는 <사기 상>에 근거한 듯하며,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부분은 서경조의 논문과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건 전개 자체도 합리적이지 못한 듯하여 아쉬움을 남긴다.

2. 1884년 설

어떤 사물을 이해하고 주장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 견해를 달리할 수 있다. 더욱이 소래교회와 같이 100년 전의 사건을 취급하다 보면 확실한 자료도 없고, 새로운 자료를 발굴할 수도 없는 형편이어서 그럴 가능성이 더욱 농후하다. 그러기에 소래교회 설립이 1884년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의 의견도 충분히 검토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전제하에 1884년 설을 조심스럽게 소개하고자 한다.

1) <기독교 대백과사전>

한국교회가 100주년을 맞으며 출판한 <기독교 대백과사전>(전 16권)에 소개된 "소래교회" 항목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립연대를 기술하고 있다.

"1884년 초가을, 이 때부터 서상륜은 자기 친척들과 몇몇 동민들을 데리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에 대하여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1918)는 소래교회의 창설연대를 1885년으로 잡고, 로디스(Harry A. Rhodes)는 1887년으로 잡고 있지만 소래 출신 초대 교인인 서병호와 김명선 등은 소래교회의 창설 연대를 1884년으로 증언하고 있는데, 이것이 오히려 타당성이 있는 말이다."

로디스 Harry A. Rodes 한국명:노해리(盧解理) 1875-1965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1908년 8월 18일 부인과 함께 내한. 선천, 만주 지방에서 활동. 연희 전문학교 교수. 한국선교사(History of the Korea mission 등을 저술. 1945년 본국으로 귀국.
(한영제(1883). 基督敎大百科事典. 제9권 서울:기독교문사. 555쪽.(이하 [기독교 대백과사전]으로 표시)

이상의 기록에서 지적해 두고 싶은 것 몇 가지가 있다.

첫째, 로디스는 소래교회가 1887년에 설립되었다고 하나 이 부분은 원문을 다시 보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로디스의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에 상론할 기회가 있기로 여기서는 다만 명제로 남겨 두고자 한다.

둘째, <기독교 대백과사전>과 같은 대작에서도 설립연대를 기록에 의한 자료에 근거하지 못하고 소래교회 출신자들의 구전적 자료인 증언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채택한 두 증인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하게 언급해 두어야 할 필요가 있는 듯하다.

서병호는 서경조의 둘째 아들로 유력한 증인이 될 만하다. 그러나 그는 16세에 상경하여 경신학교(저자 주: 경신중·고등학교 전신)에서 수학하고(1901-1905) 졸업 후 2년 동안 소래교회에서 직영하는 해서제일학교의 교사로 봉직하였을 뿐, 1908년 소래를 떠난 후로는 평양과 서울, 그리고 중국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소래교회의 사건들에 대하여 정확히 증언하기에는 미흡한 느낌을 주는 것이 안타깝다.

그리고 또 한 분, 김명선도 증인으로 등장되고 있으나, <대구면지>를 편찬한 정용하의 증언에 의하면 "<대구면지>를 편집하면서 김명선을 여러 번 면담한 결과, 기록에 의한 정확한 자료는 없고 다만 통속적으로 알고 있는 사항들과 구전으로 전해 오는 것들만을 반복하여 말씀하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김명선도 1921년에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고향을 떠나 있었으니 고향의 사정에 대하여 풍문 외에는 더 아는 것이 없지 않았겠는가?

<기독교 대백과사전>이 채택한 두 증인은 소래가 낳은 명사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명사이기에 완벽한 증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며, 그들이 제시한 증언 내용도 너무 빈약한 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기독교 대백과사전>을 편찬한 기독교문사 측에서도 소래교회 설립연대에 대하여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임을 시인하면서 "김명선·서병호에게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전택부가 김명선·서병호에게서 들은 것을 근거로 기록하였다"고 편집자는 전해주었다.
(서정민씨의 증언; 그는 기독교 대 백과사전 편집위원이다).

[간접 증언]

역사자료 구별에서 일차 자료원과 이차 자료원을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일차 자료원이란 사건에 직접 참여했거나 목격한 사람으로부터 수집한 자료를 뜻하며, 이차 자료원이란 직접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제삼자로부터 사건을 듣고 준비한 문서를 뜻한다. 그러기에 "간접증언"이란 일차 자료원보다 사료가치가 훨씬 떨어지는 이차 자료원에 불과하다. 이런 기록에 얼마나 큰 비중을 두어야 할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2) 박용규 목사의 견해

한국 교회 사가이며 인물사에 대하여 많은 연구를 한 박용규 목사는 소래교회 설립연대를 두 가지로 말하고 있다.

"하여튼 이 두 평북 의주 청년은 황해도에 와서 장연 송천교회를 1884년 6월 24일 최초로 세우고....."
( 박용규(1975). 韓國敎會人物史 (長老編). 서울: 복음문서선교회. P55).

박용규 목사가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알 수 없다. 더욱 당황하게 하는 것은 1884년에 설립하였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기록에는 1883년에 설립된 것으로 자신도 모르게 시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송천교회에서 시무하다 백령도에 와 시무하던 허 간 목사의 증언을 들으면 1943년에 창립 60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했다고 말했다. (중략) 허 간 목사의 증언도 1943년이 60주년 기념이므로 1884년에 창립한 것이 확실한 것이다.
(앞의 책. 75쪽).

60주년 기념행사에 대하여는 1883년 설을 취급할 때 상론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박용규 목사의 주장을 나름대로 이해하는 차원에서 기술하기로 한다.

첫째, 허 간 목사의 증언을 인용한 것은 허 간 목사가 거행한 60주년 기념식을 인정, 동의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둘째, 만일 1943년이 60주년이면 소래교회는 1884년에 설립된 것이 아니라 1883년에 설립된 것이 분명하다. "1943년이 60주년 기념이므로 1884년에 설립한 것이 확실하다"고 기록한 것은 주년 계산의 착오이며, 이것으로 인해 부지불식간에 박용규 목사는 1883년 설립을 인정하고 말았다.

3) 민경배 교수의 주장

한국 교회사 연구가인 민경배 교수도 1884년 설을 주장하는 듯하다. 그의 글을 먼저 소개한다.

"1882년 가을 존·로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어 서상륜의 소임을 밝혀 주고 있다. ..... (중략) ..... 곧, 上海에 있는 貴 주재원을 통해서 徐氏는 3개월간 勸書行路에 나섰다. 그는 朝鮮 전역을 여행할 수 있지만 우선 鴨綠江 연안부터 시작하려 한다. (중략) 1883년 처음 압록강을 건너 입국할 때 병문에서 두 포교의 심문을 받아 그 짐 속에 있는 성서가 발각되어 생명의 위험까지 직면한 일이 있었다. (중략) 서상륜은 마침내 고향인 황해도 장연의 솔내(松川一九美浦)에 가서 가족들과 함께 정착해서 복음을 전했다. 1884년 봄 그는 로스목사가 선편으로 부친 6천 권의 성서를 당시 고문관 격인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예외적인 호의로 인수받고는, 만주에서 온 이성하와 함께 쉬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바로 그 해 솔내에 한국인의 손으로 최초로 세워진 교회당을 설립했다."
(민경배(1983). 한국기독교사. (개정판)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69쪽).

이상의 기록에서 분명한 것은 "먼저 소래에 정착을 하고, 1884년 봄 6천 권의 성경을 인수받아 전도를 하였으며, 그 해(1884년)에 소래교회를 설립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약간 의문이 가는 부분이 있다.

첫째, 서상륜이 소래로 이주한 연대가 정확하지는 않으나 다만 "1884년 봄" 이전에 정착한 것으로 주장하는 것 같다.

둘째, 서상륜은 로스목사에게서 6천 권의 성경을 받기 전에 이미 "소래에 정착하여 복음을 전했다"고 하였는데, 그 때는 결신자가 없었는지 매우 궁금하다. 왜냐하면 한국교회사의 모든 기록들은 전도 당년에 결신자가 있었고, 그래서 전도 당년에 교회를 설립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대종을 이루는데, 민 교수는 이 부분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전도 당년에 결신자가 없었다면 몰라도 만일 다른 사가들의 주장처럼 그 해에 결신자가 있었다면 어찌 다음 해까지 교회설립을 지연시켰을까 하는 것이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요즘도 교회를 개척하는 목회자들이 가족끼리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의 훌륭한 교회로 생각하고 자부심을 갖는데, 전도와 개척에 열의가 대단한 저들이 개종자들을 두고, 뚜렷한 이유도 없이 일 년이 지나도록 교회 설립을 유보한 이유가 무엇인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런 의문을 풀어주는 기록을 민 교수의 다른 글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서상륜은 1883년 이른 봄 고국을 향해 떠난다. (중략) 그는 출신이 장돌뱅이었다. 걸음걸이가 빨랐고 기동성이 있었다. 이 [길을 가는 교회의 이미지]는 한국 초기 교회가 심어 놓은 원형이 되었다. 로스는 그에게 봉천에서 6천 권의 선문(鮮文)성경을 다시 탁송하였다. (중략) 선교사들이 서울에 오자 곧 수십인에게 세례를 줄 수 있었던 까닭도 실상은 서상륜의 전도 때문이었다. 서상륜은 1884년 이른 봄에 고향에 돌아갔다. 황해도 장연의 대구면 솔내(松川一九美浦)가 바로 그 곳이다.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교회를 세웠다. 볼품없는 초가집이었다.
(민경배(1984). 대한예수교장로회100년사. 서울: 백주년준비위원회. 12쪽).

이상에서 서상륜은 1883년에 입국하여 1884년 로스 목사가 탁송해 준 성경을 가지고 서울 등지에서 전도한 후 소래에 정착하였고 교회를 설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매우 합리적인 설명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풀리지 않는 의문은 또 있다. 앞의 기록은 "1884년 봄"에 로스가 보내 준 성경을 인수했다고 했는데, 지금의 기록은 로스목사로부터 성경을 받아 서울 등지에서 전도를 한 후 소래에 정착한 것이 "1884년 이른 봄"이었다고 기록하므로 시간적으로 잘 부합하지 않는 글이 되었다. 이렇게 서로 차이가 있는 기록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민 교수도 소래교회 설립에 대하여 확실한 정설을 가지고 있지 못한 탓에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제 다른 곳에서 민 교수와 만나 본다.

"서상륜과 경조의 형제는 황해도 송천으로 이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 곳에 와서도 열심히 전도하였다. 얼마 안 가서 그 마을의 58세대 중 50세대를 포섭할 정도로 전도는 크게 성공하였다.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마을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전도에 나섰으며 1885년에는 순전히 자신들의 힘으로 8칸으로 된 예배당 건축을 완공하였다."
( 민경배(1971). 장로회신학대학70년사. 서울: 장로회신학대학. 7쪽).

1885년에 8간(間) 예배당을 자력에 의하여 건축하였다는 것은 1895년에 건축한 기와집 예배당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1885년에는 예배당을 건축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소래에 온 서상륜 형제의 획기적인 활동상은 볼 수 있으나 설립연대는 없다. 다만 "그들은 이 곳에 와서도 열심히 전도하였다. 얼마 안 가서"라는 대목에서 저들은 전도 원년에 큰 성과를 얻어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는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상에서 민 교수는 소래교회의 설립을 1884년으로 설정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것을 설명하는 일에도 매우 합리성을 부여하고 있으나, 무엇에 근거했는지 자료를 정확히 제시하지 아니하여 독자의 의혹을 시원하게 풀어주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특히 민 교수는 서상륜, 서경조의 고향을 소래로 말하고 있으나, 실인즉 저들의 고향은 평북 의주이다. 또 소래를 "솔내(松川-九美浦)"로 표시하여 송천과 구미포를 동일시하는 것같은 느낌이 든다. 분명한 것은 소래는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이며, 구미포는 소래에서 약 2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으로, 장연군 대구면 구미포리이다.

4) <실록 한국 기독교 백년>의 기록

<실록 한국 기독교 백년>의 기록도 1884년을 주장하고 있다.

"때는 1884년 겨울, 그러나 맵고 찬 만주의 겨울 바람도 그의 뜨거운 신념을 얼게 하진 못했다. 우장을 떠나 봉천을 거쳐 찬바람을 헤치기 한 주일, 마침내 서상륜은 고려문에 당도했다. (중략) 나는 솔내의 당숙한테로 갈테니 연락 있으면 거기로 해 다오. (중략) 그는 곧 의주의 서경조를 불러 함께 전도 사업을 벌여 나갔다."
( 朴浣(1976). 實錄韓國基督敎百年 제1권. 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21쪽>.

<실록 기독교 백년사>를 쓴 저자는 "1883년에 소래로 이주했다"고 말하는 서경조의 글을 참조하지 않고 <실록 한국 기독교 백년사>를 기록하였기 때문에 서상륜과 서경조가 1884년에 소래로 이주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니 이 책은 이름만 "실록"으로 남을 뿐이다.

이상에서 1884년 설을 주장하는 분들의 견해를 소개하였다. 이들의 견해 역시 확실한 사적 근거나 지론을 가지고 독자의 마음을 흡족하게 설득해 주지를 못하는 것 같아 매우 아쉽다.

 

3. 기타의 주장들

이제 1883년 설립에 대한 지론을 설명하기 전에 1884년 설도 1885년 설도 아니면서 또 다른 의견을 개진하는 분들의 의견을 소개하는 것이 이치에 합당할 것 같다.

1) 행사 위주의 사고

한국 기독교사 연구회 석상에서 소래교회 설립에 대하여 발표하는 저자에게 어느 신학교 교수께서 "설립 당시의 교회를 과연 교회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한 일이 있다. 그리고 성서공회측의 회신에도 이와 같은 의견이 있었음을 이미 앞에서 기록하였다.

필자는 이와 유사한 질문을 몇 차례 받은 바가 있다. 물론 교회 설립의 선언적 의미가 있는 의식과 절차를 거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고 가치있는 일이다. 그래야 만천하에 교회의 존재를 알리고 불신자들도 교회를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타당한 이론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의문과 고민에 휩싸이게 된다. 과거에도 요즘과 같은 창립예배 제도가 있었는가 하는 것이 첫 번째 의문이고, 국금(國禁)에 속하는 교회를 설립하는 마당에 과연 창립예배를 공개적으로 드릴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 두 번째 고민이며, 세 번째는 전국에 교인이라야 소래에 있는 몇 명이 고작인데, 가령 저들에게 신앙의 자유가 있어 창립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면 어떤 형태의 창립예배를 드렸을까 하는 것이 마지막 의문이요 고민이다.

이런 것은 신학의 문제도, 신앙의 문제도 아니다. 오직 교회 설립의 역사성에 관한 문제이다. 교회는 한 두 명의 신자일지라도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 처음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그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그 때"가 바로 교회의 시작이고 설립일이고 설립년이 되는 것이며, 조직과 제도는 그 후의 일이다. 교회가 설립되는 것은 조직이 있어야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너무나 화려한 창립예배가 성행하는 요즘도 몇몇 신앙인들이 모여 조촐하게 예배를 드리면서 교회를 설립하는 경우는 수 없이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신학적으로 어떻게 정의를 하여야 하는가?

더욱이 백 년전 한국의 형편은 공식적인 행사는 엄두도 못 낼 시기가 아닌가? 그러기에 소래교회의 설립일은 설립자인 서상륜·서경조가 교회를 설립하겠다는 의사를 가지고 주님의 이름으로 모임을 시작한 "그 시점"을 설립일로 계산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2) 세례식을 기준으로

김양선 목사는 세례식이 거행된 것을 기준하여 교회가 설립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같다. 그의 주장을 먼저 소개한다.

"1882年 봄에 金靑松은 植字工의 職務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賣書人의 새로운 任務를 띠고 故鄕인 輯安縣의 韓人村으로 돌아갔다. 그는 6個月 동안 數千 卷의 한글 福音書와 傳道文書를 그 곳에 있는 교포들에게 팔았다. (중략) 1884년 겨울에 西間島 韓人村에는 75名의 洗禮敎人을 가진 한국 最初의 Protestant敎會가 設立되었다"
(
김양선. 앞의 책. 108).

그러나, 비록 북간도가 한국인들의 정착지이며 한국인들이 세례를 받고 교회를 설립하였다고는 하지만 한국 영토 밖에서 된 일이기 때문에 이 교회가 한국의 최초 교회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는 한국의 두 번째 교회를 새문안교회라고 한다.

"1887년 가을에 비로소 所願이 이루어져서 Ross 牧師는 船便으로 서울에 왔다. 그 때 마침 新來의 Underwood 牧師에 依하여 14명의 洗禮 敎人으로 서울 敎會(長老敎)가 처음으로 組織되었으며......, "
(
앞의 책. 111).

세 번째 교회는 백홍준이 세운 의주교회라고 한다. 백홍준은 이성하의 뒤를 이어 의주에서 전도를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것이다.

"白鴻俊은 數次에 걸쳐서 多量의 한글 聖書를 古紙 속에 넣어서 國境을 넘기는 데 成功하였으므로 (중략) 그의 傳道를 받은 義州人 金利鍊과 그의 아들 灌根 等 33人은 1889年에 鴨綠江 上에서 Underwood 牧師에게 洗禮를 받고 義州敎會를 創立하였다."
(
앞의 책. 112쪽).

이상과 같이 세례식을 기준하여 교회 설립연대를 산정할 때 소래교회는 네 번째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1883年에 徐相崙이 서울傳道의 길을 떠날 때에 景祚도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가 1885年에 黃海道 長淵郡 大救面 松川洞에 定着하게 되었다. (중략) 1885년에는 20名의 改宗者가 생겼다. 1887年 봄에 그들 中에서 徐景祚, 崔明悟들 7人은 서울로 올라가서 Underwood 牧師에게 洗禮받기를 請하였다. (중략) 同年 가을에 松川으로 가서 다른 두 사람과 함께 洗禮를 주었다. 이 다른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徐景祚의 세 살된 아들 丙浩이었는데 그는 우리나라에서 幼兒 洗禮를 받은 最初의 사람이 되었다.
Ross Version을 通하여 松川에 네 번째로 한국 Protestant敎會가 設立되었다"
(앞의 책. 113쪽)
.

그러나 이상의 주장들은 자체적으로 모순을 안고 있으며 인위적으로 의주교회를 소래교회보다 앞세우려는 의도가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사실은 그의 주장들을 비교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즉, 새문안교회는 1887년 가을에, 의주교회는 1889년에, 소래교회는 1887년 봄에 세례식이 거행되었다고 하였는데 어찌 소래교회가 네 번째 교회가 될 수 있을까? 더욱이 토마스목사 연구로 평생을 바친 오문환씨는 1929년 소래교회 방문 수기에서 "1885년 가을 송천에서 세례식이 거행되었고 이로써 교회가 더욱 굳게 확립되었다"(오문환. 앞의 책. 15쪽)고 하였으니, 세례식을 기준하여도 소래교회는 단연 앞서게 된다. 그 뿐 아니라 세례식을 통하여 "교회가 더욱 굳게 확립되었다"는 말은 그 이전에 이미 교회가 설립되어 있었고 교인들이 있었는데, 세례를 받으니 더욱 견고하게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소래교회는 세례식이 있기(1885) 전에 이미 설립된 것이 분명하다.

3) 선교사의 기록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언더우드는 소래교회의 설립에 대하여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이제부터 기록할 내용들을 자세히 읽으면 점차적으로 풀려가게 될 것이다.

우선 <기독교 대백과사전>에서 소개한 로디스(H. A. Rhodes)의 설립연대 1887년에 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한국 선교사>(History of the Korea Mission)에서 <소래교회와 소래해변> 난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겨 놓았다.

"이미 언급한 대로 1816년에는 바실 홀(Basil Hall)이, 1832년에는 구출라프가 이 해변을 찾아 왔고, 1865년에는 토마스가 백령도를 방문하였으며, 소래는 만주에서 로스에게 세례를 받고 귀국한 서상륜의 고향으로서 한국에 개신 교회가 처음으로 설립된 곳이며, 1887년 봄에는 언더우드를 찾아간 이 곳의 교인 13인 중 3명이 서울에서 세례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 해 가을에는 소래를 처음 방문한 언더우드가 그 곳 교인 7명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
(HARRY A. RHODES.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U.S.A. VOLUME 1. Seoul. Korea. PCKDE. 106쪽).

이 후에도 문장은 계속되는데 "1888년 봄에는 언더우드 부부와 아펜젤라가 평양으로 가는 도중에 방문하였고, 1889년 봄에는 게일(J. S. Gale)이 이곳을 찾아와 3개월간 머물게 되며, 1890년 가을에는 마펫(S. A. Moffett)이 펜윅(M. C. Fenwick)과 함께 소래에 와서 2개월간 머물게 되며, 펜윅은 1893년까지 계속 이 곳에 머물게 된다"( 앞의 책. 107쪽)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살피면 첫째, 외국인들이 소래를 방문한 연대는 모두 기록되어 있으나 서상륜의 활동이나 소래교회의 설립 내용에 대하여는 일체 함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둘째, <기독교 대백과사전>에서 언급한 로디스의 1887년 소래교회 설립연대는 설립연대가 아니라 세례식이 거행한 연대이며, 로디스는 이런 기록을 통하여 설립연대까지도 세례식과 연관을 시키고 있는 듯하다. 그러면 어찌하여 세례식이 거행된 연대는 기록하면서도 교회설립에 대하여는 함구하고 있을까? 만일 그가 세례식을 거행한 연대와 교회설립 연대를 동일시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로디스의 기록은 <미국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역사>(HARRY A. RHODES.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U.S.A.)이지 결코 한국 교회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1885년 언더우드와 기타 선교사들이 일본에서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내한하였을 때, 한국에는 이미 서상륜이란 사람이 서울과 의주, 그리고 소래에 6천 권의 성경을 반포하였으며, 많은 결신자가 있었고, 소래에는 교회까지 설립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들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들은 한국 교인들에게는 자랑스러웠지만 선교사들에게는 공을 빼앗긴 듯한 사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소래교회의 설립연대에 대하여 일체 함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유추해 볼뿐이다.

이상에서 소래교회의 설립에 어떤 의식과 절차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진 분들의 주장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런 의견은 당시로는 현실성이 없는 무리한 요구라는 점을 지적해 둔다.

 

4. 1883년 설

이상에서 소래교회의 설립이 1885년과 1884년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학자들과 기타의 견해를 들어보았다. 이제 남은 과제는 1883년을 고집하는 분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주장은 많은 학자들에게서 외면당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더 많은 고증과 확실한 증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소개하려 한다.

1) 60주년 기념 행사

소래교회의 마지막 당회장이었던 허 간 목사가 1943년 소래교회 창립 60주년 기념 행사를 거행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박용규 목사의 글을 통하여 소개하였으나, 그 외에도 많은 분들이 [소래교회 창립 60주년 기념 행사]가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우선 [황해노회 100회사]의 기록을 소개한다.

"1·4 후퇴(1951년) 당시 소래교회에서 시무하시다가 백령도로 후퇴하신 허간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8·15 광복 전 1943년에 송천교회 창립 60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는 것이다. 이 어찌 산 증거가 아닌가?"
(박성겸(1971). 황해노회100회사. 서울: 은성문화사. 44쪽).

<황해노회 100회사>의 저자 박성겸 목사는 황해노회 서기로 재직중 월남하여 남한에서도 황해노회를 계승한 분이다. 이 분은 이 외에도 황해노회에 대한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었고, 그의 자료와 주장은 비교적 정확하였다.

허간 목사의 60주년 기념 행사에 대하여는 천주교 신부로 백령도에서 교회를 섬기며 <백령도>라는 책을 저술한 오백진 신부의 글에서도 같은 내용을 유출해 낼 수 있다.

"1939年에 形便에 의하여 대구면 구미포에 있는 봉대교회에서 시무하였고 1942년에는 소래교회의 당회장직을 역임함과 동시에 대구면과 백령면에 소재하는 여러 교회의 당회장직을 역임하였다. 더우기 광복 직후 1945년 10월에는 소래교회로 이사하여 소래 및 봉대 양 교회를 겸하여 시무하였고 1946년에는 소래교회만을 전담하였다. "
(吳栢陳(1979). 白翎島. 서울: 샘터사. 99쪽).

이상의 내용으로 보아 1943년의 교회 창립 60주년 기념 행사는 당시 소래교회 당회장이었던 허간 목사가 직접 주관하였을 것이 분명하며, 그가 창립 60주년 기념 행사를 거행한 것은 오늘날 설립연대가 문제될 것을 예견하고 거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래교회의 설립연대를 측정하는 가장 좋은 객관적 자료라고 생각된다. 즉, 허간 목사는 소래교회가 가지고 있는 자체 자료에 의하여 설립연대를 알고 기념식을 거행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소래교회는 1883년에 설립된 것이 분명하다.

2) 소래교회의 [당회록]

허간 목사는 소래교회 설립일을 1883년 5월 16일이라고 제시하는 결정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자료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면 이 부분에 대하여는 논란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나 기회는 상실되고 말았다. 그가 제시하는 결정적인 자료란 그가 지참하고 월남한 소래교회의 [당회록]이다. 그는 이것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으며, 뜻이 있는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보여 주면서 "한국교회사에 기록되어 있는 소래교회 설립연대가 당회록과 맞지 않는 것을 지적하며 개탄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김대인(1987). "소래교회 창립일". 기독신보).

한편 1960년에 백령도 중화동교회(허간 목사 시무)에 부흥회 인도차 갔던 이찬영 목사가 이 당회록을 직접 목격하고 설립연도를 메모하였고, 저서 <한국 기독교사 연대표>에 소래교회 설립일을 1883년 5월 16일이라고 소개하였다. 이 기록은 그가 직접 당회록을 보면서 메모한 것이므로 틀림이 없다고 자신있게 증언한다.
(李贊英(1979). 韓國基督敎史年代表. 서울: 創美書館. 196쪽).

이 [당회록]은 중화동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한 서동혁 목사도 "허간 목사님이 자랑스럽게 보여 주시어서 본 일이 있다"고 증언한다. 허간 목사가 소장하였던 소래교회 당회록은 그의 사후 유실되었다. 이 당회록을 찾기 위하여 그의 아들 허태운(부산), 생질 허태영(미국 뉴욕), 손자 허경진 교수(대전) 등에게 문의하며 백방으로 알아보았으나 모든 노력은 허사로 끝이 났고, 당회록의 행방은 묘연할 뿐이다. 이 당회록의 분실은 한국 교회의 막대한 손실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서동혁목사. 황해노회소속 목사, 서울 종로구 평창동 소재 평창교회에서 시무. 정년은퇴).

3) 소래 인들의 증언

8·15 광복과 함께 북한에는 공산정권이 수립되었고, 저들은 가진 자들과 믿는 자들을 무차별하게 숙청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4 후퇴 시까지 많은 신자들이 월남하여 왔고 이 대열에는 많은 소래 교인들이 끼어 있었다. 이들 중에는 1·4 후퇴 시까지 고향에서 소래교회를 지키며 봉사하던 분들도 적지 아니하다. 이들은 잊혀져 가는 고향을 그리며 후세대에 정확한 사실들을 알리고자 <大救面誌>를 편집하였다.

저들이 펴낸 <대구면지>를 통하여 느끼는 것은 소래인들은 신·불신을 막론하고 소래교회가 한국 최초의 교회라는데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역력하였으며, 그러기에 <대구면지> 도처에 소래교회와 소래교회를 중심한 기사들을 대서특필하고 있다.

특히 "송천교회 회고"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서두를 장식하고 있다.

"1883년 5월 16일 소래교회는 한국의 기독교 개신교의 맨 처음인 어머니 교회로 창설되었다."
(대구면지. 앞의 책. 135쪽).

송천교회 회고편을 쓴 정용하를 직접 만나 설립연대에 대하여 질문하였더니 다음과 같은 증언을 들려주었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서경조 목사님의 가르침에 의하여 1883년 5월 16일에 교회가 창립된 것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고향에 있을 때 5월이 되면 어린이 주일, 어머니 주일, 그리고 이어서 교회생일(저자주: 칭립기념일)이 있었고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온 교회가 축제 분위기에 젖어 들었으며 설립일에는 야외예배, 토론회, 웅변대회 등등 여러 가지 특별 행사를 하면서 이 날을 지켰습니다. 이런 교회의 분위기 때문에 누구에게서 특별히 전문하는 일이나 참고문헌이 없어도 소래교회에서 자라난 사람이면 자연적으로 교회 창립일은 몸에 익히고 생활에 익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의 증언은 역사적 문헌을 근거한 것이라기 보다는 소래에서 출생하고 자라며 주일학교에서부터 소래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 결과, 몸으로 익히고 생활로 익힌 것이다.

4) 또 다른 방법

소래 교인들은 자신들의 출신 교회가 한국의 최초 교회라는데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 사실을 정확하게 후손들에게 남기고자 하는 열의 또한 대단하다. 저들이 <대구면지>를 기록할 때 편집위원들은 자주 모였고 이 모임에서 소래교회의 설립연대를 유추하는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였다고 편집위원이었던 이상수씨는 고백한다.

"<대구면지>를 기록하면서 고향의 여러 동지들이 여러 차례 회합을 하면서 교회 설립 50주년 기념 행사를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우리의 연령, 직업, 자녀 관계, 가정이나 이웃지간에 일어났던 사건 등등 생활 체험을 통하여 50주년 행사를 상기하였고 연도를 확인하였습니다. 그 결과 모인 여러 동지들은 여출일구(如出一口)로 1933년이 50주년이었음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김대인(1987). "소래교회창립일". 기독신문).

저들은 어느 사가의 기록을 참고한 것이 아니라 생활 속의 인맥을 더듬어 설립연도를 확인하려 하였다. 저들에게 가장 인상 깊게 남은 것은 50주년 기념 행사인데 이 행사는 예배당 건축과 전국적으로 축하를 받은 기념예배이다. 이 두 가지 사실과 자신들의 생활을 연계하면서 설립연대를 추적하고 확인한 결과 자신들이 섬기던 교회의 설립연도를 정확하게 1883년이라고 단정지를 수 있었다.

5) 일반 문헌의 기록

소래교회는 한국 최초의 교회이며 자력에 의하여 설립된 자랑스런 교회이기 때문에 한국 교회의 자랑이며 황해도의 자랑이다. 그리고, 이 교회의 이웃 지방들은 이 교회의 영향을 음으로 양으로 받았기 때문에 신자들 뿐 아니라 불신자들도 이 교회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관계로 소래와 이웃하고 있는 고을들의 기록인 군지(郡誌)에는 종종 이 교회의 내력을 기록한 것들이 있다.

우선 소래와 이웃하고 있는 은율군민들이 편찬한 <은율군지>에 기록된 소래교회 설립연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883년에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장연군 송천리(솔내)에 초가집 예배당이 서자 그 전파력이 점차 북상하여 1900년대에 벌써 은율에 예수교가 전래되었다."
(郡誌發刊委員會(1975) 殷栗郡誌. 서울: 殷栗郡民會. 107쪽).

<은율군지>에 소개된 설립연대가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히 <은율군지>는 <대구면지> 보다 먼저 발행된 것으로 보아 <대구면지>에 근거한 것이 아니며, 또 다른 자료에 의한 것이 분명하다.

<은율군지>보다 앞서 발행된 <황해도지>에서도 소래교회의 창립을 1883년이라고 하였다.

"高宗 20년 서기 1883년에는 당시 滿洲로부터 파견된 徐相崙등 전도사에 의하여 基督敎의 福音이 솔내를 중심하여 傳播되었다."
(김용국(1970). 황해도지. 서울: 황해도. 287쪽).

이 기록은 교회사의 기록이 아니고 황해도의 역사를 기록한 일반문헌이라는 데 더 의미가 있다. 즉, 소래교회가 1883년에 설립되었다는 사실은 황해도에서 생활한 사람이라면 교인이 아니라 일반인들까지도 인식하고 있는 상식인 셈이다.

이상에서 소래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목사와 소래 본고장 사람들, 그리고 황해도민의 증언을 수렴해 보았다. 특기할 것은 1883년을 증언해 주신 분들은 대개 서경조 목사에게서 교회 설립 내력을 직접 청취한 분들이라는 사실이다. 서경조목사의 증언은 산모가 자녀의 생일에 대하여 증언하는 소리요, 그의 지도를 받은 소래 교인의 증언은 자신의 생일을 들으며 어려서부터 생일떡을 먹으며 자라난 사람들의 증언이다. 산모의 증언은 호적 이전의 것이면서 호적 이상으로 확실한 것이다. 그러기에 황해도민은 이것을 하나의 상식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6) 한국교회사 중에서

다음으로 한국교회사 중에서 1883연설을 인출해 낼 수 있는 듯한 기록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김성준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볼 수 있다.

"1878년에 성서 번역 사업에 가담하였던 서상륜은 1883년 봄에 모국에서 전도할 것을 결심하였으므로, 전도사의 임무를 지워 서울에 파송하였다. ... (중략)... 서상륜은 황해도 소래(松川)로 이주하여 전도하였고, 메킨타이어 목사의 어학 선생으로 있으면서 간접적으로 사업에 종사하던 서경조도 형을 따라 소래로 이주하여 형의 부탁으로 그 곳에 복음서를 전파하여 동년에 20여명의 세례 지망자를 얻게 되었다."
(金成俊(1981). 韓國基督敎殉敎史. 서울: 韓國敎會敎育硏究院. 33쪽).

이상의 내용에서 서상륜·서경조가 소래로 이주한 연대가 명시되지는 아니하였으나 "1883년 봄에 소래로 이주한 것"이 분명하며 "복음서를 전파하여 동년에 20여 명의 세례 지망자를 얻게 되었다"고 하면 소래교회의 설립은 1883년일 수밖에 없다.

김광수 목사의 저서에도 명확한 연대 표시는 없지만 1883년으로 추리할 수 있는 소지의 대목이 있다.

"로스 목사로부터 전도사의 직임을 맡은 그는 1883년에 봉천을 출발하여 고려문에 이르렀다. 그는 불행히 이곳에서 순포(巡捕)에게 신분을 수색당하여 몸에 지닌 성경책이 발각되어 별정소(別定所)에 구금되었다. 이곳에는 서상륜의 친척되는 김효순이가 관리로 있어 밤 사경(四更)에 비밀히 탈출시켜 주었으므로 그는 말을 달려 당일로 국경을 넘어 강을 건너 다음날 새벽에 의주의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중략)...... 그는 동생 경조와 함께 황해도 장연의 송천으로 주거를 옮겼다. 그들은 송천에서도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리하여 몇 달 후에는 18명의 적지 않은 공명자를 얻었다. 서상륜은 이들과 함께 주일마다 집회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金光洙(1984). 韓國基督敎傳來史. 서울: 기독교문사. 272-273쪽).

이상의 내용은 서상륜·서경조 형제가 1883년에 봉천과 의주를 거처 소래로 이주하였고, 열심히 전도한 결과 그 해(몇달 후) 18명의 적지 않은 공명자를 얻어 이들과 함께 주일마다 집회를 가지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소래교회의 설립연대는 자연적으로 1883년이 된다. 따라서 김광수 목사도 1883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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