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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5-31
 제목  교육 활동
 주제어  [한국 교회사] 해서제일학교 소래교회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1. 교육활동(1)

 

소래교회가 전개한 사회활동 가운데 첫 손을 꼽을 수 있는 것은 교육사업이다. 더욱이 이 교회에서 실시한 교육에 힘입어 궁벽한 시골 출신이지만 한국 사회에 큰 공을 남긴 유수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는 사실은 신앙의 위대함과 교육의 절대성을 다시 한 번 깊이 깨닫게 한다.

 

1) 해서제일학교 교가

다음은 신학문 교육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해서제일학교의 교가이다. 이 학교 출신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이 교가를 자랑스럽게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1절

불타산맥 내리달아 돌아앉으며

장산곶이 백호 되어 포복한 곳에

우림 강산 우뚝 솟은 기묘한 집은

해서 제일 학교

(후렴)

제일 제일 해서 제일

제일 제일 해서 제일

제일 제일 해서 제일

제일학교 만세

2절

일천팔백구십오년 창설하여서

지금까지 전진하여 나아 왔으니

그 안에서 솟아나는 생명 샘물이

사해에 넘치네

 

이 교가에서 풍기는 기상은 소래의 주변 경관이 수려하고 장엄한 것처럼 학교의 이상 또한 장엄한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저들의 배움이 장차 전세계에 뻗치게 될 것을 고백하며 이런 큰 기상과 포부가 실현되기를 염원하고 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진행할 때 사회개혁을 동시에 진행하였고, 구룬드비도 덴마크에서 경천애인(敬天愛人) 사상으로 사회개혁을 단행하였던 것처럼, 서상륜과 서경조는 한국의 살길은 오직 교육을 통하여 사회를 개혁하고 의식을 고쳐 나가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래서 저들은 신학문을 보급하며 낙후된 국민의 수준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 올려야 할 것에 착안하여 이 일을 추진한 것이 해서제일학교의 개설이다.

 

2) 원대한 꿈의 실현

 

소래교회가 교육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된 것을 언더우드는 다음과 같이 극찬하고 있다.

"한국에 있는 선교사들은 일반인을 위한 교육은 물론 교회의 성도들과 성직자를 위한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처음부터 복음 전도 사업이 너무 벅차서 교육면에 충분한 주의를 돌릴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실제 손을 댈 수 있는 것보다 크고 수적으로도 많았으므로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학교가 크게 도움이 된다 할지라도 당장에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방에서 교회가 세워지자 곧 기독교 신자들의 자제를 어떻게 교육해야 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일어났다. (중략) 따라서 선교 개시 초기부터 기독교계 학교 설립이 필요하였다. 여기서 당시 소래에 세워진 작은 교회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우리들의 선교 사상 이 교회는 처음으로 그 필요를 통감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실현을 위한 수단을 강구하였던 것이다. 즉, 이 교회는 예배당을 건축하기에 앞서 기독교 신자인 교사가 가르치는 부속 소학교를 세웠던 것이다.") H.G.Underwood. 앞의 책. 112쪽.

선교사들조차 필요를 느끼면서도 미처 손을 대지 못하였던 신자들의 자녀교육에 눈을 돌려 이교도가 경영하는 학교에 자녀들을 보내지 않고 독자적으로 가르치기 위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학교 교사를 건축하였다는 기록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고도 남는 일이다

 

3) 금세학교

 

초창기 해서제일학교는 야학으로 시작한다. 교육내용도 빈약하여 강습소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겨우 문맹퇴치와 어설픈 신학문 교육으로 시작하였다(대구면지. 앞의 책. 44쪽).

그러나 신자들의 자녀를 믿음으로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민족의 장래를 멀리 조망하는 살아 있는 생각이었다.

뜻이 있는 곳에는 길이 열리는 법이다.

소래교회의 이러한 염원을 아신 주님은 캐나다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 매켄지(W. J. McKenzie)를 어학 연수차 소래로 보내신다. 매켄지는 소래에 오자 아주 열심히 한국인과 어울리며 문화적인 충격을 최소화, 단기화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소래에서 진행되는 교육사업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야학으로 시작된 교육사업이 신학문을 가르치는 본격적인 학교로 발전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다. 이 때 학교의 이름을 매켄지의 한국명 금세 (金世)를 따서 금세학교(金世學校) (박성겸. 앞의 책. 46쪽)라고 한다. 매켄지로 인하여 해서제일학교가 생기를 얻고 발전하게 된 것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절대적이다.

그러나 교육에 대한 필요와 열의만큼 자금지원이나 정부의 인가 등을 구비하지 못하였고 교사(敎舍)도 없는 형편인 때, 매켄지가 소래에서 뜻하지 않게 서거한다. 그의 죽음은 소래교회와 해서제일학교의 큰 손실이며 동시에 발전의 변곡점이 되었다. 그 까닭은 그가 남긴 3천냥의 유산 때문이다. 이 막대한 돈을 선교부에 청원하여 해서제일학교 재단이 되도록 한 것이 기폭제가 되어 소래의 유지들은 일제히 일어나 학교 재단을 형성하기 위해 모금을 하였고, 이 후 학교는 든든한 재정적 기반 위에 서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한 서경조의 기록을 직접 소개한다.

"학교는 乙未年에 김목사 시에 교인 자뎨를 위하야 션생을 고빙하야 교인 자뎨 칠팔인을 교슈하더니 김목사 도라가신 후 원목사와 윌쓰의사가 영국공사의 사명으로 와셔 김목사의 물건을 셔울노 거져 갈새 내가 김목사의 돈을 맛하 쓰다가 남은 돈 당오젼 三千兩이 있난지라. 내가 원목사의게 알게하고 부탁하야 이 돈을 영국 공사의게 쳥구하야 나를 주면 김목사의 셜립한 학당을 계쇽하야 김목사의 일홈이 끝치지 안케 할터이라 하엿더니 원목사의 쥬션으로 영국공사의 허락을 밧은지라. 이 돈으로 畓二十七斗落을 사고 柴坂三十名刈處를 사고 또 동즁 소유 畓三斗落과 柴坂 四十名刈處와 당오젼 四百兩을 긔부하고 그 후 학교령이 나매 허가를 얻어 海西第一學校라 하니라. 그 후에 동즁에 紫坂 三百名刈處나 되난 거슬 긔부하고 교인들의 긔부금으로 학교당 十八間을 짓고 남녀 소학교와 고등과를 병설하여 이 학교 출신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만히 나니라"(서경조. 앞의책. 102쪽).

매켄지는 소래의 해서제일학교를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한 알의 밀이었다.

 

 

1. 교육활동(2)

 

4) 교육 입국

 

재래의 우리나라 교육제도는 국민 다수보다 소수 양반의 자제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중앙에는 성균관(1399년 설립)이 있고, 그 밑에 4학(중학·동학·남학·서학)과 지방의 향교가 있으며 전국 각처에 서원 혹은 서당이 있었다. 이런 교육기관은 개인의 영달을 수단으로 하는 전통적인 교육기관이며 일반 국민들을 계몽하는 교육기관은 아니었다. 그러나 외국과 통상이 진행되면서 신문화에 대한 국민의 열화와 같은 관심이 쏟아졌고 이런 욕구를 교회가 수렴하여 교육기관을 세움으로 국민 대다수가 갈망하는 교육에 대한 강한 욕구를 다소나마 해갈시켜 주었다. 그리고 이에 호응하여 외국 선교사들도 신문화 교육기관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이때 외국인들이 세운 최초의 교육기관들은 다음과 같다.

고종 20년(1883년), 독일인 정부 고문 묄렌도르프(P. G. Von Moellendorff)는 제동에 동문학교(同文學校) 즉 통변학교(通辯學校)를 세움으로써 새로운 교육 기관을 태동시켰고, 의료 선교사 알렌(H. N. Allen)도 자기가 경영하는 병원의 조수를 양성할 목적으로 의학교육을 시작한 것이 외국인들이 실시한 신식 교육의 두번째 예가 된다.

이 학교는 후에 세브란스 의전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이 실시한 교육은 한국인들을 개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교육을 시작한 것에 불과하다.

이런 전후 사정을 살핀 고종은 교육입국의 뜻을 품게 되며 그 첫 작업으로 미국에서 교사를 초빙하여 육영공원(育英公院 1886-1894)을 개설한다. 그러나 이 육영공원도 역시 귀족 자제들에게 한하여 입학이 허용되었고, 이들에게 정부 직영으로 외국의 신문학과 외국어를 가르쳤을 뿐 일반대중은 이런 혜택을 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1894년 12월에 공포한 한국 최초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홍범(洪範)14조 중에 다음과 같은 글이 한 조항 삽입됨으로써 교육입국의 뜻은 구체화된다.

"제 11조 國中 聰俊子弟를 널리 파견하여 外國의 學術과 技藝를 傳習시킨다."(이기백. 앞의 책. 315쪽).

이런 고종의 교육입국의 뜻이 구현되어 漢城師範學校(1895년)가 개설되었고 뒤를 이어 많은 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한다.

 

5) 학교 인가

 

야학에서 시작한 소래의 신학문 교육은 매켄지의 도움으로 금세학교로 발전하였고, 1895년에는 드디어 정부로부터 정식 인가를 얻어 해서제일학교로 개교한다. 이 사실을 교가에 명시하기를 [일천팔백 구십오년 창설하여서 지금까지 전진하여 나아왔으니]라고 하였으며 학교명은 해서지역 전부를 포함하는 교육기관이라는 의미와 이와 같은 교육기관이 제 2, 제 3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해서제일학교로 정하였다.

이 당시 국내정세는 순탄치 못하여 동학란과 청일전쟁 등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었으나 소래교회는 계속 부흥되었고, 교육열은 대단하여 예배당을 건축하기 전에 학교 건물을 건축할 정도였다. 이 때 건축한 학교 건물은 교회 전면에 위치하며 남녀 별개의 교사(敎舍)를 건축하여 우편은 여학교로, 좌편은 남학교로 사용하였다.

정부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고, 쾌적한 학교 건물과 튼튼한 재단이 형성되니 전국에서 유능한 교사들을 초빙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해서제일학교는 명실공히 해서지역 제일의 학교로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6) 학교 운영방침

 

이 학교의 운영권은 물론 교회가 전담한다.

그러나 교회 안에 이런 신학문 교육기관을 전담·관리할 만한 인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목회자가 학교 운영을 겸하는 것도 그리 용이한 일은 아니었다. 더욱이 학교는 효율적인 경영이 필요한 기관이기에 성공적인 경영과 만족한 교육을 위해 반드시 전문인력이 필요한 기관이다.

이런 사정을 직시하고 교회는 운영권만 가지며 교회 안에 전문인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교장을 비롯하여 교사(敎師)에 이르기까지 유능한 인사들을 초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이 때 초빙받은 강사들 중에 특기할 만한 인물은 도산 안창호이다. 그는 수 삼차 초빙을 받아 때로는 학교에서, 때로는 교회에서, 때로는 마을 사람들에게 신문화와 애국애족의 사상을 강의하여 큰 감명을 주었다.

 

1. 교육활동(3)

 

7) 교육이념

 

이 학교의 교육이념은 철저하리만큼 기독교적 신앙에 기초하여 기독교적인 인간형성과 사회봉사 그리고 당시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애국애족의 민족사상을 특별히 강조하고 고취하는데 진력하였다. 이런 사상을 배경으로 하였기 때문에 교사와 학생들은 모두 한 덩어리로 뭉쳐 있었고 교육을 받은 후 이들이 사회에 진출하여서도 민족정기와 기독교적인 사상의 기반에서 활동들을 전개하였다.

이 학교의 교육이념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부분을 열거하면,

첫째, 졸업생들 중에 많은 이들이 일제(日帝)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관직보다는 자유롭게 사회를 섬길 수 있는 길을 선택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의학계에 진출하는 것이다. 그 결과 이 학교출신으로 의학계에 공헌한 기라성같은 인물들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세브란스에 평생을 바친 김명선박사이며, 심장 의학계의 권위자 조광현박사도 이 학교 출신이다.

둘째, 졸업생들 중에 국가 유사시에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며 애국운동에 헌신, 순절한 인물들이 있다.

이런 이들의 대표적인 인물이 김마리아가 될 것이다.

그는 3·1운동 당시 일본 目白女學院 졸업반에 재학 중이었으나, 1919년 2월 8일 동경 한국 유학생으로 구성된 2·8선언에 가담하여 독립선언을 하고 즉시 귀국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독립 사상을 고취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는 것을 위시하여 독립운동과 옥중생활을 반복한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을 그에게 서훈하였고(1962년), 학생들에게는 그의 생애를 통한 [忠]의 정신을 배우도록 가르쳤다.

셋째, 후진 양성을 위한 학계 진출이다.

이런 분의 대표적인 사례는 김마리아의 고모인 김필례이다. 그는 여성이지만 미국유학을 거처 광주 수피아여고와 서울 정신여고의 교장과 재단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이상에서 보는 대로 해서제일학교는 신학문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철저한 기독교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한 민족교육을 실시함으로서 사회에 기여하는 훌륭한 인물들을 배출한 유수한 교육기관이 되었다.

 

8) 역대 교직원

이 학교에 봉직한 역대 교장 및 교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교장편>

서상륜: 창설자이며 초대 교장 역임

서경조: 창설자이며 제2대 교장 역임

서병호: 서경조의 차남으로 교장 및 교사 역임

김응순: 평양 신학교 졸업, 소래교회 제 3대 목사,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 역임, 교장 역임

안경화: 소래교회 장로, 교장 역임

홍종옥: 소래교회 장로, 교장 역임

김구련: 소래교회 장로, 교장 역임, 후에 목사가됨

이진희: 이승철목사의 장남, 일제 말기에 어려움을 홀로 담당함, 소래교회 장로로 교장 및 교사 역임

 

<교사편>

김홍섭: 소래지방 3·1운동의 주동적 인물.

이윤건: 법률가로 주민의 법적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한 인물.

이영혁: 여선생으로 8·15광복시 감추어 두었던 태극기를 보이면서 제자들을 감격케 했던 인물.

 

9) 졸업생 일람

이 학교 졸업생 명단 전부는 공개할 수도 없으려니와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 학교 출신으로 걸출한 인물들을 소개하는 것은 필요한 것으로 알고, 다음에 그 명단을 소개한다.

 

<남학생>

김필운: 김마리아의 숙부, 세브란스 제 1회 졸업생, 의사

홍종은: 홍순환의 부친, 세브란스 제 1회 졸업생, 의사

서광호: 서경조의 장남, 세브란스 제 2회 졸업생, 의사

서병호: 서경조의 차남, 중국 남경 대학 수업, 독립 운동가, 해방 후 경신 중·고등학교 교장, 새문안교회 장로.

박헌식: 세브란스 제 3회 졸업생, 의사

김명선: 의학 박사, 연세대학교 부총장, 원자력병원장, 유한공전 재단 이사장 역임

조광현: 의학 박사, 세브란스 병원 내과 과장 및 조광현 내과 설립

최창수: 의학 박사, 세브란스 병원 안과 과장 및 최창수 안과 설립

홍순각: 의학 박사, 세브란스 병원 암 센터 소장 역임

박상근: 의학 박사, 보건 소장 역임

김경선: 숭실 전문 및 일본 입교대 졸업, 육군 준장 역임

윤명숙: 서울 시립 농대 및 강원대 교수 역임.

 

<여학생>

김마리아: 독립운동가로 건국 공로 훈장 수여

김필례: 김마리아의 고모, 미국 콜롬비아대학 석사, 광주 수피아 여고와 서울 정신여고 교장 및 재단 이사장 역임

김함라: 김마리아의 큰 언니, 정신여고 졸업 후 11년간 교원생활, 남궁혁박사 부인.

홍은윤: 신학교 졸업 후 교회 및 유아 교육사업에 종사.

최죽임: 신학교 졸업 후 교회 전도사 및 유아교육 사업에 종사

김순애: 김마리아의 고모, 남경대학 졸업, 김규식박사 (상해 임시정부 입법원장)의 부인으로 독립운동에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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