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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5-31
 제목  사회 개혁
 주제어  [한국 교회사]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2. 미신타파 운동

 

1) 무속의 뿌리

한국 무속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신라 제 2대 남해왕조(南解王條)의 것으로 A.D. 1세기 초의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 최초로 유입된 외래종교는 A.D. 4세기 후반의 불교로 알려져 있다. 기록상으로 보아도 무속종교는 기원전부터 한반도에 존재하였다고 생각되며, 고고학상의 자료들은 한국 무속의 역사적 배경을 청동기시대까지 소급시킨다. 외래종교가 들어오기 전 아득한 상고시대부터 한민족의 신앙적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 한국의 무속신앙이며, 외래종교가 유입된 후에도 무속은 민간신앙으로서 한민족의 기층적 종교현상으로 전승되어 왔다.

한국에 현존하는 여러 종교 중에 불교, 유교 등은 장구한 세월 동안 조직적으로 포교를 시도하였지만, 소수의 지식층을 상대하였음으로 민중속 깊이 파고 들어가지 못하였고, 기독교는 아직 일천한 관계로 민중의 생활 저변에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무속 신앙은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우리 민족의 생활 저변을 흐르는 민중 신앙의 자리를 굳게 지키며 의식화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생리화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런 현상을 단적으로 표현해 주는 사례가 있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1890년-1900년 사이의 농민의 년평균 소득은 미화 30여불에 불과한데 서울의 무당, 점쟁이의 수입은 월 75불이어서 농민소득의 무려 30배나 되었다. 이 통계는 이들을 찾는 층이 매우 두텁게 형성되었다는 것과, 자신들의 생활을 이들에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런 사회 분위기 때문에 당시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종교적 집단이 바로 무속신앙 집단이었다.

이와 같이 매우 뿌리 깊은 한국의 무속종교의 영향은 각종 외래종교들을 무속신앙화하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한국의 불교나 유교는 모두 경전에 의한 순수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미신적 요소가 가미된 무속적인 불교, 미신적인 유교를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이 민족의 가슴에 뿌리내리고 있는 무속 신앙의 뿌리 깊은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내한한 외국인들의 눈에 쉽게 띄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저들은 다음과 같은 글들을 남겨 놓았다.

"무속은 조선사람의 신앙의 바탕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북부지방의 경우에는 더욱 심하다고 한다. (중략) 오늘날 조선사람들의 사실상의 종교는 불교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과거 2천년 동안 전반적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된다. 天神이나 地神·산·강·샛별에 대한 경배는 아직도 자연적인 물체의 명칭에 나타나고 있으며 양이나 황소를 제물로 바치는 풍습과 함께 옛 모습 그대로 떳떳이 남아 있다."( W. E.그리피스. 신복용 역(1985). 隱者의 나라 韓國. 서울: 평민사. 410쪽).

다음과 같은 글도 있다.

"한국의 모든 종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샤머니즘에 속하는 것이다. 불교와 유교가 한국에 전래되기 이전에도 물론 샤머니즘이 지배하고 있었고 역사를 통해서 보나 오늘날의 현상에서 판단해 볼 때, 심지어 불교와 유교가 가장 성하였을 때조차도 모든 것의 밑바닥 또는 모든 것 중심에는 샤머니즘이 분명히 깔려 있었다."( H.G. Underwood. 앞의 책. 84-85쪽).

이런 과정은 광복 후 교세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기독교에서도 수없이 발견된다. 작금의 한국 교회는 성경에 기초한 순수 기독교의 모습은 점차 퇴색해 버리고, 미신적이며 기복적인 면이 너무 많이 부각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매우 가슴아픈 현상이다.

이런 시점에서 소래교회 창설과 미신타파 운동이 연동적으로 발생하여 우상의 본고장 [당골]에 예배당을 세운 사건은 그 때 뿐 아니라 지금도 대서특필하며 본받아야 할 일이다.

 

2) 당골의 정화

한국에 복음이 들어와 각지에 전파되면서 교회는 복음 전파와 아울러 미신타파 운동도 함께 전개한다. 이런 일들을 추진하려면 외부의 압력과 거센 저항에 부딪치는 난관도 없지 아니하다.( 朴英官(1977). 歷史神學講義 서울: 예수교문서선교회. 306쪽).

그러나 서상륜·서경조 형제는 소래에 교회를 설립하자 "신앙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며 그 외에는 어떤 신(神)도 용납될 수 없는 절대적 신앙의 입장에서" 설교와 전도를 시작하였다. 이런 강도 높은 신앙은 강한 반발을 가져왔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주민들의 의식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고 결국 진실한 믿음의 분위기로 정착하게 된다.

그런 변화의 주된 동기는 첫째, 주일마다 전파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둘째, 서상륜·서경조의 신앙적인 인품이고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서구인들의 선진성과 우상을 섬긴 민족의 낙후성이다. 이런 괴리는 한국 뿐 아니라 불교와 유교 혹은 기타 종교를 근간으로 하는 모든 국가의 전반적인 현상이었다.

이런 사례를 들어 설명하며 말씀으로 설득하였을 때, 자연적으로 소래 마을에는 [굿]을 하거나 [점을 치는 일]들, 그리고 [신주목에 복을 비는 행위]들이 현저하게 줄어들기 시작하였고, 마침내는 [무당]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 존재가 되었다. 결국 소래의 주민들은 선사시대부터 이 민족의 신앙적 근간이 되어 온 무속이 혹세무민(惑世巫民)하는 미신에 불과하며 자신들의 삶에 아무 유익이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

1895년 예배당을 새로 건축할 즈음에는 주민들 95%정도가 교인이 되면서 저들의 의식 속에는 별로 유익도 주지 못하는 [미신]을 완전히 소탕해야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첫 기와집 예배당을 무당들의 본거지인 [당골]로 정하고 이 일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이 때의 상황을 소래 교인들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소래를 중심하여 구습에 젖고 찌든 미신을 몰아내는 데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고 어려운 난관에 수없이 봉착했으나 과감히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모든 미신놀음을 깡그리 몰아내어 소래 근방에서는 미신놀음을 볼래야 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대구면지. 앞의 책. 143쪽).

조선조의 국시는 승유배불(崇儒排佛)이다. 그리고 무속에 대하여는 금무(禁巫) 혹은 출무(黜巫)라고 하여 무속은 아주 엄격히 금하고 쫓아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찬무(贊巫)는 이단이요 변태라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무속적인 행위를 금지시키려고 정부가 노력을 하였으나 그들은 겨우 성 밖으로 쫓아내는 것조차 못하였다고 이능화는 말하고 있다.

"상고해 보면 세종조부터 무격을 성밖으로 쫓아낸 명령이 그 몇 백 번인지 모르겠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 정책은 끝내 성공하지를 못하고 말았다."(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756쪽).

강력한 봉건 군주 정권의 힘으로도 할 수 없었던 금무와 출무를 소래교회의 지도자와 교인들은 참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식개혁을 이루고, 자기들의 의식과 생활습관의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지배하고 있던 미신적 무속신앙을 완전히 타파하는 일을 해냈던 것이다.

샤머니즘이라는 용어는 퉁구스-만주어의 샤만(saman)이란 말에서 유래하며, 이 말의 동사형 샤(sa)는 [안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샤만이란 [아는 자]란 뜻이다. 저들은 강신술을 통하여 황홀경에서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를 알아내고 또 미래까지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당에게 자신들의 미래를 묻고 액을 면하도록 굿을 하고 복을 빌기를 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미래를 예견하며 복을 빌어 주는 무당들이 자신들의 칩거지(蟄居地)가 교회의 터가 되고 자신들은 추방을 당한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무속적 신앙이 허구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소래교회는 이 땅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는 민중신앙인 미신과 우상을 타파하고 마침내 승리의 봉화를 높이 든 [한국 교회의 뿌리]이다. 이런 뿌리를 가진 한국 교회는 미신과의 싸움을 계속하였고, 그 때마다 승리를 거둔다.

 

3) 토마스 기념 전도단

황해도 황주에서 출생한 이승길목사는 8·15 광복 직후 월남하여 몇몇 신앙 청년들과 함께 토마스 기념 전도단을 조직하여 옹진반도에 상륙하였다. 이들이 옹진반도를 전도지역으로 선정한 것은 광복 후 38선으로 남북이 분단된 상태에서 옹진반도가 황해도에서 유일하게 남쪽으로 남아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며, 이 곳을 기지로 하여 믿음으로써 실지회복(失地回復)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이들이 전도를 하면서 "가장 많은 노력을 경주한 부분은 미신타파"(박용규(1981).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서울: 한국양서. 159쪽)이다.

가는 곳마다 노방전도를 하고, 결신자를 얻으면 교회를 섭립하였으며, 산당과 서낭당에 불을 질러 미신적 근거지를 태워 버렸다. 이로 인하여 미신 숭배자들이 숙소에 몰려와 돌을 던지며 항의하는 소동을 벌이기도 하였고, 때로는 산신령에게 천벌을 받을 것이라는 저주를 받기도 하였으나 그 때마다 저들은 "참 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고 외치며 전도의 기세를 돋우었다. 이렇게 미신을 타파하며 우상과 싸우며 승리한 것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당골]을 제압한 신앙의 뿌리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런 신앙의 뿌리는 결국 국가의 힘을 등에 업고 공격해 오는 미신과 우상의 세력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신사참배의 도전과 공격에도 기도와 순교의 피로 대항하여 이겨냈던 것이다. 이것이 소래교회에서 자라난 한국 교회의 저력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우기 광복과 더불어 서울에서 총회 신학교가 개교되었을 때 남산의 일본 신사 터에서 시작하였다는 것은 일본의 우상과 미신까지도 완전히 제압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신 사건이 아닌가?

 

당골

우상의 고장을 일소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당을 건축하였던 신앙의 뿌리는 결국 가지를 뻗어 일본 우상의 터에 한국 보수교단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총회 신학교를 개교케 하였고,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게 되었다.

 

3. 단발의 시행

 

1) 단발의 배경

고종 32년(1895) 8월 20일 새벽에 일어난 을미사변(乙未事變)은 매우 불행한 사건이었다. 일본공사 三浦梧樓와 그의 부하들은 치밀한 계획하에 궁궐에 난입하여 일국의 왕후인 명성황후 민씨와 궁내 대신 이경직을 살해하고 국왕을 강압하여 자신들의 야욕을 채우는 일에 어인을 날인하도록 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출범한 것이 김홍집(金弘集)의 친일내각이다. 그는 조의연·유길준·서광범 등 친일파를 등용하여 정권을 장악하였고, 갑오경장의 선을 따라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그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연호를 건양(建陽)으로 하며, 군제를 변경하고, 서울에 소학교(국민학교)를 설치하고, 충주·안동·대구·동래 등에 우체사무소를 개설하며, 태양력을 채용하고, 소아에게 종두규칙을 발표하였으며, 1895년 12월 30일에는 단발령을 선포한 것 등이다.

건양원년(1896) 1월 1일을 기하여 고종은 솔선하여 단발을 하였고, 양복을 입고 등청을 한다. 고종이 단발을 한 사건은 지금까지 상류층을 지배하고 있던 유교적 가치관을 완전히 전도(顚倒)해 버리는 처사였다.

 

2) 단발 시행면(施行面)

국왕이 직접 단발을 시행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 일반 민중들의 반응은 개혁적인 차원에서 결행된 용기 있는 결단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일본의 무력에 굴복한 처사로 해석하고 이해하였으며, 사실도 그러하였다. 따라서 봉건과 구습에 젖은 일반 민중들의 감정은 국왕의 행동에 찬사와 동조보다는 국모살해에 대한 원한과 기존 가치관의 붕괴라는 괴리감 때문에 단발령에 대하여 맹렬한 저항을 시도한다. [두가단(頭可斷)이나 髮不斷(발부단)]의 강한 입장을 고수하는 민중의 저항은 불안한 사회환경을 한층 더 불안하게 몰고 가고 있었다.

당시 단발로 인한 어수선한 사회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 글이 있다.

"단발령으로 인하여 폭동이 일어난 곳에서는 일본인들에 대한 야만적인 행동이 일어났고 때때로 살인까지 이어지기도 하였다."

"지방으로 부임한 어느 관리는 '양(洋)머리 관리'의 다스림을 받을 수 없다는 주민들의 반발에 다시 서울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라안은 상투를 둘러싼 복잡한 문제와 고통과 어려움으로 온통 들끓었다."

한 때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은 오직 단발을 재빨리 시행한 사람들 뿐이었고 상투를 그대로 가진 사람들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서울 거리에 나서지를 못하는 살벌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일본 군관들에 의하여 강제 연금상태에 있던 고종이 아관으로 파천한 후 "반역자들은 힘과 강압을 사용하여 상투 사건을 일으켰다"는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써 사태는 완전히 반전하고 만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단발령의 장본인들은 상투를 튼 노한 군중들에 의하여 무참히 살해되고 말았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감안할 때 자진하여 단발을 단행한다는 것은 비범한 용기와 결단이 없이는 결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저들이 바로 소래 교인들이다.

개화는 생활의 개혁이 있어야 하고, 생활의 개혁은 사상의 개혁이 뒷받침되어야 성공적일 수 있다. 기독교적 신앙으로 미신을 몰아내며 사상적 일대 개혁을 단행한 소래 교인들은 이제 생활개혁의 제일선에 나서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사회 분위기와 민중의 정서를 초월하여 소래인들은 단발을 자진하여 결행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단발령이 비록 친일정부와 일인들의 강압에 의한 포고였지만 국가 장래를 위하여 필요한 조치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서상륜과 서경조는 고종이 단발을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단발을 단행하였고 교인들에게도 이를 시행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소래 전역은 전국 제일의 단발 시행면(施行面)이 되었고 이 때부터 신자와 불신자의 구별은 단발여부로 식별하게 되었다.

단발의 조기 단행은 단발 반대편의 감정을 격동시켰고 이로 인하여 소래교회는 또 한 번의 위기에 직면한다.

이 일에 대하여 서경조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숑쳔교회는 다 단발을 하엿더니 단발을 반대 하는 쟈들이 숀쳔셔 七十里허에 四·五百名이 듄취하야 명왈 산포 (山包)라 하고 단발은 예수교에셔 난거시니 몬져 숑쳔을 소탕하고 쟝연읍을 소탕한다고 떠들고 숑쳔을 향하고 오니 이 날 숑쳔에 행인이 끊어지고 숑쳔사람에 친척들이 와셔 통긔하고 그 날노 도라가며 동리가 황황하야 피란 가는 사람도 잇난지라. 숑쳔셔 四十里되난 오리정이라 하난 곳에 와셔 자난 날 밤에 본 군슈가 몬져 이 쇼식을 알고 병대를 매복하엿다가 일쟝 대젼이되여 맛참 산포가 패산하고 무사한지라. 그 후에 산포즁에도 숑쳔에 피란하여 와셔 예수를 밋고 령슈까지 한 사람도 잇더라."(서경조. 앞의 책. 101쪽).

이 때에도 서경조는 외부세력에 굴하지 아니하고 민족의 먼 장래를 바라보는 선각자의 길을 담대하게 걸어 갔으며, 한 때 고통을 당하였지만 주님은 언제나 성도들과 의로운 편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섭리의 미소를 지어 주셨다.

단발이 국민의 생활 속에 스며 들기까지는 을사조약 후 일본 정부 당국자들의 강제 집행과정을 통해서 비로서 시행되었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그것보다 국민 모두가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고 생활의 편리함을 인식하고 난 다음에야 본격적으로 생활화하게 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몇 십 년 후에 겨우 시행되는 일들을 미리 예시하며 서둘러 시행할 수 있었던 소래교회의 지도자들은 참으로 훌륭한 선각자들이었고, 이들의 지도에 말없이 순응한 소래 교인들 역시 훌륭한 교인들이었다고 칭찬하고 싶다.

광복 후 임시정부 주석으로 귀국한 백범 김구는 일제와 싸운 애국지사이지만, 단발령을 솔선수범하였고 동지들에게도 단발을 권장하였다고 그의 옛 동지는 말하고 있다.

그 일은 황해도 안악에서 있었던 하기 교사강습회와 관계된 일이다. 1907년 안악의 부호 김해 김씨 가문이 중심이 되어 전국적으로 신문화 교사 지망생들을 모아 1개월간 숙식을 제공하면서 강습을 실시한 일이 있다. 이 때 전국에서 모인 교사 지망생들은 970여 명을 헤아렸다. 이 강습회를 참관하였던 최명식씨는 다음과 같은 글을 그의 자서전에 남기고 있다.

"이 講習會 成果의 하나로 特記할 点은 金九의 强勸에 依하여 聽講生 全員이 削髮을 斷行함으로써 從來의 [상투]가 없어진 点이었다."(崔明植(1970). 安岳事件과 三.一運動과 나. 서울: 傳記編纂委員會. 22쪽).

안악군지에서는 이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革命의 심지는 가슴 속에서만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外觀 外貌까지도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이 일은 1907년의 일로써 서상륜·서경조 등이 단발을 시행한지 퍽 오랜 후의 일이다.

黃遵憲의 [朝鮮策略]에 다음과 같은 귀절이 있다.

"계책의 결정은 國主에게 있고, 輔弼謀議하는 일은 中樞部에 있고, 시대의 사명을 강구하여 分裂을 나타내지 않음은 朝廷大臣에게 있고, 묵은 因襲을 힘써 깨뜨리고 얕은 識見을 啓發하는 것은 士大夫에게 있고, 發奮하여 일어나 同心合力하는 것은 국민에게 있다."(黃遵憲, 조일문역(1983). 朝鮮策略. 서울:建國大學校出版部. 37쪽).

과연 소래 교인들은 국민의 의무와 도리를 다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고 지도자들은 사대부로서의 역할을 너무나도 충실히 감당하였다.

교회는 민족 앞에 처음부터 떳떳하였던 것이다.

 

4. 유색 옷 장려

 

 

1) 정부의 관심

조선왕조는 통치 초기부터 국민들이 입는 옷의 색깔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며 여러 번 특정색깔의 옷에 대하여는 착용을 금지하는 포고를 내린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5년(1396) 6월에 남녀를 막론하고 황색의복을 금지시켰고, 동 7년(1398)에는 사헌부의 진언에 의하여 황색, 회색, 호소(縞素)의 의복을 전면적으로 금지시킨다. 특별히 황색 옷에 대하여 여러번 금지령을 내리는 이유는 중국황제의 의복색깔이 황색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이런 사대주의적 발상에서 유래된 의복색이기에 태종 17년(1417)에 왜사(倭使)가 바친 심황색(深黃色)의 물건들을 일체 받지 않을 정도로 색깔에 대하여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태종은 "백관의 복색이 백색같이 보이어 보기에 해괴하니 채색 옷을 입으라"는 영을 내리므로, 관직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백의보다는 채색 옷을 입도록 권장하기도 한다.

세종 7년(1425) 10월에는 다시 "직임이 있는 사람 이외에는 백색의복을 금하지 말라"고 하므로 백의는 일반 민중들이 안심하고 입을 수 있는 옷의 색깔이 되고 말았다.

 

2) 외국인이 본 백의(白衣)

외국인의 눈에는 한국인의 고유한 인습이 매우 이색적으로 비쳐진 것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저들은 이런 부분에 대하여 많은 기록들을 남기고 있으며, 그 중에는 한국인이 즐겨 입는 백의(白衣)에 대하여 여러모로 언급한 부분들이 있다.

우선 알렌(H. N. Allen)은 그의 저서 [조선견문기(Things Korean)]에서 백의를 즐겨 입는 습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상주가 부득이 외출을 해야 할 때에는 [흰옷]을 입고 우산만큼 크고 치밀하게 짠 갓을 쓰고 나가야 하며 (중략) 왕족이 서거했을 경우에는 온 국민이 3년간 복상(服喪)을 해야 하는데 이 기간에는 애도의 뜻을 표시하는 흰옷만 입어야 한다."

그는 흰색을 [喪의 색깔]로 이해하였고, 부모가 돌아가도 흰 옷을 입어야 하고, 왕족이 서거하여도 흰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흰 옷을 입는 기간이 많아 백의의 습관이 생긴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그리피스(William E. Griffis)도 그의 저서 [隱者의 나라 韓國]에서 백의를 입은 서민들의 한복차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백의를 입은 모습은 마치 유령이나 논에 앉아 있는 백로를 연상케 한다. 반면 미국인들이 보기에는 조선의 멋쟁이들은 주로 잠옷바람에 나다니는 것처럼 보이며 가장 정장을 했다는 모습이 마치 속옷 차림처럼 보인다. (중략) 다소 떨어져 보면 눈처럼 희게 보이는 옷도 가까이서 보면 우중충하고 더러운데 이는 그들은 비누라는 것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

저들은 백의에 대하여 나름대로 이해하고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고유한 옷차림 때문에 또 하나의 회오리가 불어닥친 것이다. 그것이 유색옷 장려이다.

 

3) 개혁의 단행

소래인들은 유색옷 장려운동에도 솔선수범하였다.

고종이 건양원년 1월 1일에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고 등청하였다"는 것은 이미 밝힌 바가 있다. 이 사건은 유색옷 착용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이유는 여하간 우리 민족은 자고로 백의(白衣)를 즐겨 입으며 백의민족임을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백의만큼 자유로운 행동을 저해하는 옷도 없을 것이다. 참으로 비효율적이며 비경제적인 옷이 백의이다.

외국인들과 잦은 접촉을 통하여 서상륜·서경조는 외국인들이 착용하는 양복의 편리함과 활동성을 잘 알게 되었고 저들의 문명이 활동적인 옷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것이 유색옷 장려의 원인이 된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말하면 [상투와 백의]는 우리민족 고유의 전통문화이다. 따라서 [한국사람됨을 상징하는 표시가 바로 상투와 백의]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당시 일반 민중들의 정서는 상투를 자르고 백의를 벗는 것은 양인화(洋人化) 내지는 일인화(日人化)를 의미하며, 민족 정기를 말살하려는 운동이었고 민족의 고유함을 무너뜨리려는 친일분자들의 소행으로 여길 정도였다.

그러나 민족정기는 옷이나 상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소래의 지도자들은 우리나라도 선진국 대열에 참여하려면 의복의 제도를 개선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고, 한복을 벗고 양복을 입는 것은 결코 한국인됨을 해제하고 양인(洋人)이나 일인(日人)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시민이 되는 수순임을 강조하면서, 솔선하여 단발에 이어 색의로 갈아입는 것도 꺼리지 아니하였다.

 

4) 대안의 제시

당시 소래교회는 대안 없이 백의를 배척한 것은 아니다, 즉, 창조적 제안 없는 유색옷 장려를 시도한 것은 결코 아니다. 대안 없는 저항은 저항을 위한 저항일 뿐 미래와 희망을 주지 못하며 다만 암담한 현실과 갈등과 분열만을 조장할 뿐이다.

저들이 제시한 여성의 옷차림은 흰 저고리와 검정 통치마이다. 이 옷은 편리하고 위생적이라는 평을 받으며 파격적으로 보급되었고 한 때 신여성의 상징적 의상으로 각광을 받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정숙함과 단정한 옷차림으로 신여성의 고상한 모습을 돋보이게 하였던 그 상징적인 옷이 현란한 신시대의 옷차림에 가리워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런 청순한 옷차림을 한 여성들의 모습을 화면을 통하여 북한의 거리에서 보게 된다. 참으로 시대의 변화와 생활의 격차를 실감케 한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민중의 지적 수준이 낮아 이를 수용하지 못하면 그 제도는 난관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무지와 몽매, 미신과 맹목적인 구습의 관행을 타파하지 못하는 민중들에게 수십 년이 지나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선진적 일을 일깨우고 순응케 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믿고 따르며 선진대열에 합류해야 한다는 의지와 희망을 불태우며 지도자와 함께 몽매와 완고의 철벽을 조금씩 무너뜨리며 전진을 계속하는 소래 교인들은 위대하였다. 저들에게는 밝아 오는 민족의 미래만이 유일의 소망이었고 혼신의 힘을 다해 희생할 가치가 있는 삶의 목표였다.

 

 

5. 양력문화 정착

 

1) 전통의 개혁

을미사변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한 김홍집 내각은 친일적 성격과 일인들의 무단적 행패에 대한 거센 반발로 인하여 체제상 약체를 면치 못하였으나, 국가장래를 위한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아니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태양력의 채용이다. 이 태양력 채용은 또 하나의 혁명적 조치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국민들의 모든 생활양식 뿐 아니라 사회제도, 그리고 절기와 풍습 등이 모두 음력으로 되어 있었고, 이것은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역법(曆法)이요 전통이었다. 바로 이것을 개혁하려는 것이 태양력 채택이다.

 

2) 과세의 난관

서양의 선진문물이 모두 교회를 통하여 소개, 보급되었는데, 교회가 이처럼 새로운 국가의 제반시책에 적극 호응한 것은 선진국 진입을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소래인들에게는 넘어야 할 또 하나의 장벽이 다가온 것이다. 그것이 태양력에 의한 과세이다.

태양력을 사용하는 것까지는 용납이 된다고 하지만 과세도 양력과세를 해야 한다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는 엄두도 못 낼 혁명적인 사건이며 발상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단행되어야 하고 극복되어야 하는 과제라고 생각하여 저들은 양력과세를 과감히 단행한다.

비록 이 제도와 법령이 친일정권에 의해서 발표된 것이지만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오늘의 용단을 내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제시대는 물론 8·15 광복 후 대한민국이 수립된 후에도 이중과세를 철폐하기 위해 정부차원의 노력과 선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정(舊正)을 선호하는 국민정서는 수그러들지 아니하였고, 결국 구정을 [민속의 날] 또는 [설날] 등으로 지정하여 공휴일화시키는 현실을 감안할 때, 백 년 전에 이런 일을 시도한 김홍집 내각의 용단과 소래 교인들의 극복은 불가능에 도전한 용단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이었을까? 그러나 소래 교인들은 이 일도 해 내고 말았다.

이런 일을 단행하는 데는 외부적인 압력 외에도 자체적인 난관도 없지 아니하였다. 양력 정초를 지키려 해도 달력이 없어서 양력 정월 초하루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선교사들은 달력을 복음서와 함께 판매하며 보급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해마다 입수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소래 교인들은 지혜를 동원하여 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창안하였는데, 그것은 날자계산의 기준을 동지에 두는 것이었다. 즉 "동지가 지난 후 3일이면 성탄절, 성탄절이 지난 후 일주일이면 양력 정월 초하루(설날)로 지켰는데, 날자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하였다. 매우 지혜로운 방법이었다.

양력을 사용하는 것은 외국인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고 특히 양력설은 일인(日人)들이 지키는 [설]로 알고 있었던 당시, 척양왜(斥洋倭)를 소리 높여 외치며 쇄국을 민족주의로 승화하던 당시, 친일 정권이라는 이유 때문에 나라 안이 모두 거세게 반발하며 저항의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던 당시, 민중의 흐름을 무시해 가면서, 따가운 시선을 받아 가면서, 친일파의 누명을 써 가면서, 때로는 군사적인 위협을 받아 가면서, 상투를 자르고 유색옷을 입고 양력설을 지켰다는 것은 범인(凡人)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사(擧事)라고 아니할 수 없다.

더욱이 소래와 같이 해변이 가까와 음력과 관계를 맺고, 물때(海潮)에 맞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이런 일을 단행하였다는 것은 여간한 용단이 아니면 이루어낼 수 없는 혁명적인 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소래 교인들은 해 냈던 것이다.

양력과세를 통하여 세계의 흐름을 따르려고 애쓰던 선각자들과 이를 말없이 순복하며 민족개화를 실천하던 소래인들의 경건하고 용기 있는 모습이 너무나 거룩하고 아름답다.

 

3) 과세를 유용하게

음력과세를 철폐하고 양력과세를 지킨다는 것 만으로도 저들은 이미 높은 신앙적인 점수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저들은 과세를 하는 며칠간일망정 허송하지 않고 시간을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였다는 기록을 볼 때, 오늘을 사는 우리 기독인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야 하는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이 일에 대하여 언더우드의 글을 인용, 소개한다.

"한국에는 휴일이 매우 적다. 전국적으로 갖는 명절이 있기는 하나, 가장 즐거운 명절은 신년이라 할 수 있다. 이 때 모든 한국인은 새옷으로 갈아 입는다. 정월 초하룻날은 누구나가 밝고 기쁜 낯으로 새옷을 입고 있는 광경을 보면 아름답다. 3일간은 모두 일을 하지 않고 가게문을 닫으며 나라 전체가 휴일을 즐긴다. 많은 가정에서 사정이 허락하는 한 1일에서 15일까지는 논다. 그 동안에 친구나 이웃을 방문하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낸다. 기독교신자들은 이런 날들을 매우 실용적인데 이용하였다. 많은 지방에서 이 휴일을 복음전도를 위한 특별기간으로 이용하고 있다. 기독교신자들은 자주 가가호호를 방문하며 이 2주간 전부를 전도에 바치고 있다. 이처럼 한국에 있어서는 이교도의 풍습과 관습이 도리어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과연 저들은 정초에도 휴가를 위해 시간을 보내지 아니하고 전도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민족 대이동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근년의 [신년맞이] 행렬에 예수를 믿는 성도는 끼여 있지 않은지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수없이 늘어서 있는 고속도로상의 승용차 행렬에 예수믿는 사람의 승용차는 없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저들은 이런 시간들을 어떻게 소비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 가면서 사회를 개혁하는 일에 앞장 서 왔다. 잠시라도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전도에 모든 것을 투자하였다.

이런 신앙의 뿌리에서 자라난 가지가 오늘의 우리가 아닌가? 길에서 시간을 낭비하며 한담을 즐기고 있는 동안, 뿌리는 상하고, 가지는 마르며, 열매는 시들어 가는 것은 아닐까? 그 결과 복음을 듣지 못하는 주변의 영혼들은 죽어가는 것이다.

 

 

7. 산림 녹화와 도로 정비

 

1) 산림 녹화

치산치수(治山治水)는 국가진흥의 근본이다. 이 사실을 도산 안창호는 "저 문명스럽지 못한 강과 산을 개조하여 산에는 나무가 가득히 서 있고 강에는 물이 풍만하게 흘러 간다면 그것이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큰 행복이 되겠소"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도산의 생각만이 아니라 지각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함께 가지는 생각이었다. 그러기에 소래의 지도자들은 산림녹화 사업에도 적극적이었다.

본래 소래는 소나무와 물이 많아 솔샘(松泉)이었으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산이 헐벗기 시작하였고, 국가장래를 생각하지 못하는 우둔한 민중은 식목을 게을리하여 아름다웠던 [솔샘]의 모습은 점차 자취를 감추어 가게 된다. 그리하여 소래교회는 마을의 장래를 위하여 식목을 장려하는 사업을 전개한다.

이 때 저들이 선택한 수종은 속히 성장하고 번식도 수월하게 시킬 수 있는 [포플러](美柳나무)였고, 이 나무를 소래마을 전역과 대구면 일대에 보급하여 쓸모 없이 버려진 땅이나 개천 둑에 대량으로 심기 시작하였다.( 대구면지. 앞의 책. 145쪽).

이 때 심은 포플러가 산림녹화의 효과 외에 소래교회 창립 50주년 기념 예배당 건축시 기둥이 되고 들보가 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을 못하였으리라. 이 사실은 우리에게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쓸모없는 땅과 같은 우리에게 복음의 씨가 심겨지면 교회의 기둥이 되고 하늘 나라의 들보가 된다는 사실과 교훈이다.

 

2) 신작로 (新作路)

저들은 식목에만 관심을 쏟은 것은 아니라 도로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소래교회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문화는 길을 따라 들어오는 것이라고 교인들과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여 마을 중심을 통과하는 도로의 노폭을 국도(國道) 보다 두 배나 넓게 만들고 노면도 자갈을 심어 잘 정리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신작로(新作路)이다.

도로가 확장되고 곳곳에 나무를 심어 푸른 동산을 이룬 소래이기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은 수목이 우거지고 신선한 공기로 가득한 소래의 풍경을 마치 신천지에 들어서는 느낌으로 받아 들이게 되었다.(앞의 책. 145쪽).

 

3) 남은 이야기들

이상에서 소래교회가 전개한 사회개혁 운동에 대하여 간략하게 소개하였다. 그러나 그 외에도 이 교회가 전개한 사업들을 열거하려면 아직도 지면이 부족한 형편이다.

1896년 배재학당 학생들이 협성회를 조직하여 자주적 민족의식을 앙양한다는 소식을 들은 소래 교인들이 독자적으로 [25명의 회원으로 협성회를 조직하고 중앙본부와 긴밀한 유대를 가지며 지역발전을 도모]한 일이며, 농촌청년회 운동을 통하여 농한기 동안 부업을 장려하여 농촌 경제를 부흥시킨 일이며, 도박과 밀주를 자진 단속하여 도덕적 부패와 경제적 파탄에서 이웃을 구출한 일이며, 관혼상제의 의식을 기독교 의식에 의하여 간소화함으로써 경제에도 유익하고 생활도 개혁하여 기독교적 문화가 생활화될 수 있도록 한 일이며, 금주단연(禁酒斷煙) 운동을 전개하여 사회의 악습을 타파하고 건전한 사회질서와 문화를 정착시킨 일이며, [성극 예술인단]을 조직하여 예술활동과 수준 높은 문화행사를 통하여 향토예술 발전을 도모할 뿐 아니라 예술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주민들에게 심어준 일이며, 노동력이 없거나 부양가족이 없는 불우한 노인들을 교회청년들이 돕거나, 성미를 거두어 춘궁기(春窮期)에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며 도와줌으로써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세운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한 일들을 모두 기록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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