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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5-31
 제목  소래교회의 참여
 주제어  [한국 교회사]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2. 소래교회의 참여

 

황해도 내의 민중 봉기 만세시위는 남부 지방에서부터 시작하여 삽시간에 황해도 전역이 만세의 함성으로 뒤덮이게 된다. 그러나 오직 두 곳 만세를 부르지 아니한 무성군(無聲郡)) 이 있었다는 사실을 후세를 위해 고백한다.

 

1) 최초의 봉기

 

해주는 황해도의 도청 소재지이며 3월 1일 당일에 독립선언서의 봉독식과 함께 독립 만세 호창(呼唱)이 남보정 예배당에서 거행되어 도청 소재지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하였다.

이 일을 위하여 서울의 박희도·최성모는 은밀히 제작된 독립선언서 300여 매를 남보정교회 목사 오현경에게 2월 20일 오후까지 전달하여 주었고, 이것을 받은 오목사는 그 날 밤으로 교회 신도 중 황학소·임용하·이동혁·최명현·김찬현 등과 독립만세운동의 방법을 협의한다. 그리고 3월 1일 오후 2시 작고한 이태왕씨의 추도식을 거행한다는 명목으로 180여명의 교인들을 예배당에 회집시킨 후 독립 선언서 봉독식과 아울러 독립 만세를 부르니 황해도 최초로 만세의 함성이요, 서울 파고다공원의 선언식과 때를 같이하여 울린 독립 만세 소리였다. 이 집회를 주동한 오현경·김창헌·황학소 등은 그 날로 해주 경찰서에 구금된다.

만세 동지들이 경찰서에 구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봉영화·최봉직·정만기 등은 3월 9일 남욱정 장터에서 대대적인 만세 시위를 전개하려고 연동면 청풍리의 정계화 사저에서 태극기 및 [조선 독립 만세]라고 쓴 현수막 등을 준비하는 한편, 교회 청년 및 공사립 학교 생도들을 동원할 계획을 세우고 일을 진행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비밀이 누설되어 예정일에 만세를 부르지 못하고 다음날 3월 10일에 결행하였다.

이 때 만세 운동에 참여한 자는 학생들과 예수교 청년들과 300여명의 군중들이 합세하였고, 일본 경찰들은 자동차와 기마병 등을 동원하여 만세 군중을 강제 해산시켰으며, 60여명의 청년들이 검거되었다.

 

2) 장연의 함성

 

장연읍의 만세 함성은 3월 11일에 터져 나왔으나 이는 천도교측이 주동이 되었으므로 기선을 그 쪽에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4월 5일에는 속달면 태탄리에서 태탄교회가 주동역을 맡아 1천여 군중이 동원되는 거사를 성사시켰다.

이 만세의 물결이 얼마나 거세였던지 일본 헌병들도 감히 손을 쓰지 못하였으며, 장연읍에서 증원 부대가 도착한 오후 2시경에야 겨우 진압되기 시작하였다. 이 만세 운동의 주동 인물은 김응규·최창선 등이며 이들은 현장에서 검거되어 2년형을 언도받는다.

4월 8일 밤에는 후남면 남호리에서 횃불 시위가 일어났고, 4월 11일에는 남초리에서 남창 장날,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만세를 불렀다. 이 때 만세 군중들은 친일 면직원들에게 "대한 독립 선언"을 알려 주기 위하여 면사무소로 행진하기도 하였다. 여기서도 부상자와 피검자가 발생한 것은 물론이다.

 

3) 소래와 몽금포

 

소래의 만세 시위는 4월 18일 소래 장날 거행하였다.

이 지역 출신 서경조의 차남 서병호는 중국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파리 평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송하였으며 국내에 잠입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일본 유학생 김마리아도 동경에서 2·8 독립선언에 참여한 후 즉시 귀국하여 독립운동 지도에 적극 임하고 있었다. 이런 전후 사정으로 인하여 일본 경찰의 감시와 경계가 타 지역 보다 훨씬 삼엄하여 기회를 얻지 못하므로 시간적으로 지연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래교회를 중심하여 이행전·김창현·김낙영 등이 비밀리에 태극기 및 독립선언서를 준비하였고, 이행전이 준비된 물품들을 시위 장소까지 운반하는데 성공한다. 약속한 날, 소래 장터에서 김창영 등 청년 약 80여명이 장꾼들에게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며 만세 시위를 전개하자 만세의 대열은 삽시간에 수백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런 상황을 보고 놀란 주재소의 일본 순경 吉田 今朝一은 큰 거리로 나가, 만세 군중에게 해산을 종용하는 한편, 장연읍에 응원 부대를 청원하여 많은 경찰과 일본 군인들이 출동하니 결국 평화 대열은 강제 해산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주동자인 김창현·이행전·김낙영·김윤석·김종일 등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1971). 독립운동사. 제2권. 3·1운동사 (상).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회. 318-319쪽.

이 사건으로 소래교회의 장로와 집사 40여명이 체포되어 6개월에서 4년까지의 실형을 언도받으므로 교회가 2,3년간 남신도는 수명에 불과하고 모두 여신도들로만 교회를 유지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이 때 체포된 김낙영은 서울 고등법원까지 상고하여 법정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그는 법정에서 다음과 같은 논술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피력하였다.

"피고는 경술 국치 이래로 조선의 독립을 갈망하던 사람이다. 천운이 순환하여, 국제연맹에서 민족 자결주의를 결정하였으니 약소민족인 우리 조선 민족의 1분자인 피고도 세계의 평화를 주창하는 이 세대에 당하여 어찌 환영하지 않을 것인가? 이래서 4월 18일에 군중을 모아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 시장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앞의 책. 319쪽).

(이하 생략)······.

소래에서 만세 시위가 있은 후 4월 22일에는 최서단에 위치한 몽금포리에서 봉대교회의 안승화·이창근·안두삼·안교은·이종욱 등 약100여명의 청년들이 주동이 되어 만세를 불렀고 많은 장꾼들이 뒤를 따라 만세를 불렀다. 이 때 야만적인 일본 순경들은 해산하는 군중들을 동구 밖까지 따라오며 총격을 가하여 이종욱 등 수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4) 민족과 교회

 

3월 1일 오후 2시 해주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을 기점으로 황해도 내에서는 2개월간에 걸쳐 167회의 만세 운동이 일어났고, 총 참가 인원은 63,620명으로 집계된다. 그중 사망자 162명, 부상자 323명, 피검 인원 2,501명이 발생하였다.

수감자의 종교별 통계는 장로교 131명, 감리교 75명, 안식교 2명 등으로 개신교 측이 208명의 희생자를 내었고, 천도교 측은 147명의 수감자가 있었다. 천주교도는 불과 4명의 피검자 밖에 없는 것으로 보아 천주교는 3·1독립운동을 거의 외면하고 있었거나 소극적으로 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감자의 직업 중 학생 신분을 가진 자는 거의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생들이며 일반 학교 학생은 10여명에 불과하다. 이 사실은 당시 교회에서 경영하는 학교에서 민족 의식을 강하게 심어 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수감자 중에는 목사 2명, 전도사 9명 교회 직원 2명으로, 전도사의 참여가 매우 두드러지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으나, 목사의 수가 희소하여 참여하는 수도 적어 그렇게 보일 뿐이다.

수감자의 연령을 보면, 18세 미만 33명, 20세 미만 68명, 30세 미만 352명, 40세 미만 266명, 50세 미만 144명, 60세 미만 58명, 60세 이상 24명으로 30-40대가 가장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3.1운동사(상). 독립운동사. 제2권. 332-336쪽.

이 해에 총회에 보고된 황해노회 보고에 의하면 독립 만세 사건으로 입은 상처를 다음과 같이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독립 만세사건으로 조사 6명은 수감 중이요 태형 밧은 자 88명 중에 장로 3명, 조사 2명, 영수 3명, 집사 16명, 남교원 2명, 여교원 2명, 남교인 50명, 여교인 4명등이 복역 중이며, 총 맞은 자 중 사망자는 집사 4명, 부상자는 6명이며, 이 사건으로 허위(虛位)된 교회가 16개 처이다.) 곽안련. 앞의 책. 160쪽.

"獨立 萬歲事件으로 助事는 六人은 收監 中이오 笞刑 밧은 者 八十八인 中에 長老 三人, 助事 二人, 領袖 三人, 執事 十六人, 男敎員 二人, 女敎員 二人, 男敎人 五十人, 女敎人 四人이오 處役된 者 八十五人, 銃에 마즌 者 十人 中 死亡者가 執事 四人, 負傷者 六人 其他多數하다. 以上 事件으로 虛位된 敎會 十六處를 爲하야 老會 當席에서 百八十餘圓 捐補하야" (이하생략)) 곽안련. 앞의 책. 160쪽.

그러나 이상의 여러 통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3·1운동을 통하여 한국 교회가 자신을 확인한 부분이다.

 

첫째, 교회는 민족 속에 존재하며 민족을 위한 교회이지 민족을 외면하고 떠나 있는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이며,

 

둘째, 신앙은 위기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용감하게 참여하여 사생(死生)을 같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하였으며,

 

셋째, 교회는 민족의 고통을 통감하며 함께 고통을 분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민족에 대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교회와 성도들은 용감했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이렇게 교회가 민족을 위하여 희생함으로써 신앙인의 참 모습을 실천으로 보여준 것이다. 한국 교회는 민족 앞에 떳떳했고, 민족의 가슴에 위대한 기독교의 실천적 진리를 뿌리 깊게 심어 주게 되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16:25)

 

 

>> 목차고리 : 숨겨진 한국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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