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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4-01
 제목  종교교육과 신앙생활 (전주신흥고등학교 90년사 22)
 주제어  
 자료출처  전주신흥고등학교  성경본문  
 내용

목차

 

갑오개혁이후의 신교육   

선교사들의 내한과 기독교학교의 설립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의 내전과 선교 활동의시작

최초의 신흥인 김창국   

시대적 배경

신흥학교의 개교

희현당

일제의 무단정치

초창기의 신흥학교

삼일운동의 배경

의 삼일운동

삼일운동과 신흥

일제의 문호정책

기독교의 재흥과 시련

학생수의 증가와 증축

1920년대 신흥학교 개황

인톤교장과 1930년대 초

조선총독부 지정 신흥학교

항일의 몸짓

광주학생운동과 신흥

신사참배 거부와 폐교

종교교육과 신앙생활

 

> 참고자료 :  삼일운동 

 

 

제 4 장 신흥의 옛이야기들


이나라 근대교육의 초창기에 전주에서 최초로 시작된 신흥학교는 일제의 암울한 시기에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성장하여 찬란한 꽃을 피우다가 38년만에 문을 닫았다. 그 38년이라는 기간 동안에 신흥학교에서는 수많은 학생들이 진리를 깨우치면서 성장해나갔다. 비롯 통계상의 고등과 졸업생 수는 200명이 채 못되지만 그러나 실제로 신흥학교를 거쳐간 학생의 수는 수 천명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여러 가지 사정에 따라서 비록 졸업은 하지 못하였지만 모두 신흥학교를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고 살았다. 아름다운 자연환경, 그리고 거기에서의 훌륭한 선생님들의 가르침과 신앙생활은 신흥인들의 마음의 양식이었다. 그들은 신흥학교에서 지(智), 인(仁), 용(勇)을 몸으로 체득하여 일제 식민통치하라는 암울한 현실을 헤쳐 나간 이땅의 지성인들이었다. 1930년 전후에 신흥학교를 다녔던 박철규(재학 당시의 이름 박윤규)씨는 재학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신흥학교는 학교 환경이 좋아서 졸업후에도 나의 마음의 고향이었다. 좋은 환경과 그 속에서의 좋은 교육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우리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뒷산에 올라갔었다. 거기에는 기도하는 학생, 웅변연습을 하는 학생, 연극 연습을 하는 학생도 있었다. 지금도 그 때의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 저녁 식사후에는 학교 주변에 앉아서 서로 토론을 하기도 하였다.

봄이 되면 꾀꼬리와 소쩍새가 울었고, 가을이 되면 단풍이 들어 장관을 이루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노래를 부르는 낭만을 만끽하였다. 그 때 그 자연환경에서 받은 감화와 선생님들로부터 받은 교육에 의한 감화로 인하여 신흥학교는 영원히 나의 마음의 고향이었다.

신흥학교를 거쳐간 수많은 신흥인들의 마음의 고향인 신흥 동산은 38년이란 긴 세월 동안에 이었던 온갖 사연을 간직한 채 묵묵히 말이 없다. 더구나 신흥학교를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고인이 되었다. 그 숱한 사연과 이야기들이 시간 속에 묻힌 채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되고 말았다. 거기에다 남아 있는 기록마저도 거의 찾아 볼 수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유일한 자료는 아직 살아계신 분들의 머리속에 남아있는 과거의 기억뿐이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일은 아직 생존해 계신 분들이 70∼80대의 노령이지만 너무나도 생생한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그 분들의 기억을 중심으로 조금씩 남아 있는 자료에 맞추어 신흥의 옛이야기들을 기술해 보고자 한다.


1. 종교교육과 신앙생활


우리나라에 미국 선교사들이 발을 들여 놓은 궁극적인 목적은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었다. 그 복음전파의 한 방법으로 학교가 세워졌고, 또한 병원도 세워졌다. 따라서 선교학교들은 어떠한 경우라도 종교교육을 양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1915년 조선총독부가 "개정사립학교규칙"을 발표하여 모든 기독교계 학교에 대하여 종교교육을 금지시키자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선교회들은 소위 "교육평의회"를 조직하여 총독부의 종교교육 탄압에 맞섰다. 선교회측에서는 총독부에서 금하고자 하는 성경과목의 교수와 종교의식의 집행(예배)이 기독교 학교의 존립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어떠한 타협이나 양보도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했으며, 각 학교에서는 성경의 교수와 예배의식을 각별하게 엄수할 것을 지시하여 그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에 대하여 총독부에서는 10년 동안의 유예기간을 주고 그 기간내에 이 규칙에 순응하든지 아니면 학교 설립 허가를 박탈당하든지 양자택일하도록 요구하였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소위 문화정치는 기독교계 사립학교에 대한 종래의 탄압을 완화하여 성경의 교수와 예배를 허용했다. 그러나 신흥학교가 모든 시설을 갖추고도 고등보통학교가 되지 못한 것은 역시 종교교육 때문이었다. 조선총독부 지정학교라는 특수한 제도도 결국은 종교교육을 시행하는 학교로서 모든 여건을 다 갖춘 학교에 고등보통학교와 같은 자격을 부여 한다는 궁여지책의 하나였다.

1930년대 중반에 들어와서 신사참배 문제가 크게 대두되고, 결국은 1937년 9월에 이 신사참배 거부로 인하여 신흥학교를 비롯한 전라남북도의 10개 학교가 문을 닫게 되었다. 그것은 신사참배가 일본의 국조신(國組神)인 아마데라스 오호미가미(天照大神)을 비롯한 많은 신들을 섬기는 종교적 행위로서 유일신인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의 교리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결국 신흥학교를 비롯한 모든 선교학교들은 학교의 설립목적인 종교교육과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 없을 때 학교를 더 이상 계속해야 할 명분이 없었던 것이었다.

신흥학교에서 실시되는 종교교육은 크게 성경의 교수와 예배를 통한 신앙지도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학생들은 그 외에도 교회활동이나 하기학교 봉사 등을 통해서 자기성장과 봉사를 위한 신앙생활을 계속하게 된다. 성경을 교수한 시간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매학기 성경을 가르쳤다. 그리고 매일 아침 예배시간을 가졌다. 지정 4회 이강문씨는 저학년때는 일주일에 두 시간씩 김가전 목사에게서 성경을 배웠고, 4학년 때에는 인톤교장에게 배웠으며, 그리고 5학년 때 1시간은 박준영 선생에게서 조직신학을 배웠다고 한다. 한편 지정3회 정병태씨는 당시 종교교육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시간은 주당 3시간이었고, 매일 아침 예배 보는 시간을 가졌다. 성경수업은 교과서가 따로 없었고, 성경책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목사님이 제목과 강의 내용을 프린트하여 공부하였다. 성경시간 중에 죄에 대한 것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특히 간음죄에 관한 말을 많이 들어 졸업 후 일본유학을 갔을 때 전차 속에서 여자의 살결이 몸에 닿을 때마다 간음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몸에 닿지 않게 하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처음 6개월 동안은 이것이 가장 힘드는 일 중의 하나였다."


위의 증언들을 통해서 추측하건대 1930년대 신흥학교에서는 성경을 가르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으며, 또한 신앙생활에 있어서 도덕성을 무척 강조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학교의 설립 목적이 선교에 있었던 만큼 선교사들은 신흥학교 학생들이 가급적이면 선교의 일꾼들이 되어 주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당시에 전주고보는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학교요, 신흥학교는 조사(助事, 오늘날의 전도사에 해당)를 양성하기 위한 학교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더구나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지역별로 분담하여 교회를 개척하거나 개척된 교회를 관장하고 있었는데 모든 교회에 실제로 교회를 책임질 조사가 필요하였다. 신흥학교와 직접 관련이 없었지만 보희열(Boyer) 선교사의 경우는 무주, 진안, 장수에서 50여 교회를 관장하고 있었으며, 인톤 교장의 경우도 7개 교회를 맡아보았다고 한다. 이들 선교사들은 자기가 관할하고 있는 교회에 조사를 파견하기 위하여 신흥학교 학생들과 인연이 많았으며, 학생들을 많이 도와 주었고, 또 조사들을 신학교에 보내어 목사가 되도록 주선하였다 한다.

조사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과정을 마쳐야 한다. 당시 신흥학교 옆에는 성경학교가 있었는데 겨울방학을 이용해서 7-10일 가정, 또는 1개월 과정의 성경공부가 있었다. 그곳에는 한 학년을 "소"라고 했으며, 10소까지가 전 과정이었다. 이 성경학교에는 신흥학교 재학생뿐만 아니라 일반이도 같이 공부를 했다. 지정 4회 이강문 씨의 경우는 보통학교 졸업 후 성경학교를 2소까지 마치고 신흥학교에 입학을 했다 한다. 이 성경학교의 과정을 마친 학생들은 재학 중 또는 졸업 후에 각 교회에 가서 조사로 활동하였고, 그 후에는 다시 신학교에 진학하여 목사가 되기도 하였다.

조사로 활동하거나 또는 앞으로 조사가 될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는다. 지정 2회 이귀동씨가 그 한 예다.


"목포에 기마각이란 선교사가 있었는데 그는 72명의 학생들을 도와 주었다. 그가 나를 잘 보아서 미국에 보고하여 미국의 보이스카웃 장학금을 받도록 하였다. 장학금은 매월 10원씩인데 여름방학 한 달을 제외하고 연간 110원을 받았다. 당시 납입금은 한 학기에 3원50전이었고, 기숙사의 식비는 매월 4원 40전-5원 정도였으니, 이정도면 기숙사비와 학비를 내고도 남은 금액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일본에 가서 공부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나의 후원자인 미국의 보이스카웃에서는 내가 신학을 하기로 원했다. 그래서 나는 졸업 후 2년간 조사를 하다가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었다."


위와 같이 선교사들은 많은 학생들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고, 그 대가로 조사로 활동하거나 목사가 되도록 하였다. 한국의 선교를 목적으로 세운 학교에서 선교의 일꾼들을 양성하는 것은 선교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였다. 대부분 학생들이 기독교 가정 출신이고, 그들에게 성경과목을 매학기마다 가르쳤으며, 매일 예배시간을 가졌으니 신흥학교 학생들은 충분한 종교교육과 신앙훈련을 통하여 모든 학생들이 다 선교의 역군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할 것이다.

2. 기독청년회와 희현회


해방 전 신흥학교의 학생단체로는 기독청년회(Y.M.C.A)와 희현회가 있었다. 희현회는 모든 학교에 다 있는 조직으로 일반적인 명칭은 교우회(校友會)라 하였다. 그러나 기독청년회는 기독교 학교에만 있는 모임이었으며, 기독교 학교에서는 교우회보다는 기독청년회의 활동이 더 활발하였다. 신흥학교의 교우회는 희현당에서 이름을 따 그 명칭을 희현회라고 했는데 기독청년회와는 전혀 별개의 모임이었다. 학교의 공식적인 행사나 행정과 관련된 일은 희현회가 주로 담당하였고, 종교적인 성격을 띤 학생중심의 행사는 기독청년회가 맡아서 하였다.


1) 기독청년회


신흥학교의 기독청년회가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10회 졸업생인 유기석씨의 말에 의하면 박정근 선생이 오신 뒤에 기독청년회가 있었다고 하니 1922년 이후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지만 확실한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기독청년회 회원은 원칙적으로 고등과 학생으로 구성되었지만 보통과 5-6학년 학생 중에도 희망자에 한하여 입회를 허락하였다. 또한 세례교인을 정회원으로 하고, 세례교인이 아닌 사람은 준회원으로 하였다. 기독청년회 안에는 의사부(議事部), 종교부, 지육부(智育部), 체육부, 사교부, 음악부, 자치부의 7개 부서가 있었다. 또한 정회원 준회원을 막론하고 연간 1원 50전의 회부를 납부하였다.

기독청년회 활동 중에서 가장 큰 활동의 하나는 각 교회로 나가 주일학교에서 봉사하거나 하기학교에서 봉사하는 일이었다. 10회 졸업생 유기석씨는 당시 주일학교에 가서 봉사하던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박정근 선생님은 말년에는 신앙심이 떨어졌지만 신흥학교 교감시절에는 신앙생활을 철저히 했다. 박정근 선생님은 우리 학생들과 주로 유상리 교회와 흥산교회에 나가서 주일학교에 봉사했다. 우리들은 토요일 밤에는 야학을 열어 주로 한글을 가르쳤으며, 이튿날 오전 예배를 보고 오후에 주일학교에 나가서 봉사하고 일요일 저녁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주일학교는 예배나 성경공부 외에도 한글을 가르치는 시간이 별도로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학교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침으로서 주일학교가 문맹퇴치에 크게 기여했다. 기전학교에서는 홍산교회의 주일학교를 맡기도 했는데 미국인인 공정순 교장이 여학생들을 인솔하고 왔다. 그때는 남녀구분이 엄격했기 때문에 신흥학교 학생들은 남학생을 가르쳤고, 기전학교 학생들은 여학생을 맡아 가르쳤다.


각 처의 교회에 나가 주일학교에서 일 외에 여름성경학교를 위한 봉사도 매우 활발했다. 여름 성경학교에 대한 봉사활동은 각 교회에서 희망하는 대로 학교에서 학생들을 파견했는데 이에 대해서 전북노회 종교부 보고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제 24회 전북노회록, 1930년 5월 27일>


1. 전주 신흥학교 학생 기독청년회원 중에서 하기 휴가를 이용하여 각기 고향에서 성 경학교를 하겠다는 사람이 많으므로 본부 총무 박진근 씨가 하기 아동 성경학교 경영방침에 대하여 동교 학생에게 강습시킨 일이 있으며

2. 전주 신흥학교 학생 기독청년회에서 금년 하기에 아동 성경학교를 경영코자 하되 지도자가 없으면 7월 10일 이내로 매 교회에서 3인 이내로 신흥학교로 청원하되 지도자 식비는 해당 교회에서 담당하고, 왕복 여비는 학생청년회에서 담당하기로 한다 하오니 청원하시는 교회는 전주 신흥학교 김가전 씨에게나 본부 총무 관진 근 씨에게로 통지하여 주실 일이 오며,


<제 26회 전북노회록, 1932년 3월 9일>


1. 작년 하기 아동 성경학교 지도는 신흥학생청년회에서 7월 20일부터 8월 4일까지 46 처에서 지도자 58인이 남녀 아동 4,336인에게 교수하였으며,

2. 신흥학생청년회에서 금년에도 하기 아동 성경학교를 지도하려 하오니 7월 10일 내 로 직접 청원하시오며, 여비는 학생회에서 부담하고 식비는 당 교회가 부담함.


위에서는 노회 회의록 중 두 군데만 예를 들었지만 신흥학교 학생들의 하기학교 지원은 기독청년회가 주관하는 연례행사였다. 위의 기록에 의하면 1931년의 경우 46처에서 58명의 학생이 활동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북 노회 안에 있는 교회에 봉사한 숫자를 말한 것에 불과하다. 신흥학교 학생들은 그들의 고향에 있는 교회에 가서 봉사를 했으니 실제로 하기 학교 봉사를 한 학생들의 숫자는 훨씬 많았를 것으로 여겨진다.

하기학교 봉사를 떠나기 전에는 서문밖교회에 모여서 일주일간 훈련을 받았다. 이 기간 중에 하기학교 진행방식이나 노래를 배우기도 했고, 남학생들도 모두 유희를 배웠다. 지정2회 이귀동씨의 말에 의하면 당시 서문교회의 피아노 반주자였던 김진선 장로의 딸 김갑주씨가 유희 선생을 했다 한다.

1930년대 초에 기전학교의 방애인 선생은 서문밖교회 안의 유치원 옆에 방 하나를 얻어 고아들을 돌보고 있었다. 당시 신흥학교 학생들은 기독 청년회가 중심이 되어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크리스마스 기념 매달을 팔아 그 이익금으로 아이들을 돌보는 데 보탬이 되도록 하였다. 1933년 9월에 방애인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는 기전학교 학생뿐만 아니라 신흥학교 학생들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들은 기독청년회 종교부에서 주관한 일들이다. 기독청년회는 위와같은 종교부 활동 외에도 지육부의 활동이 상당히 활발했다. 지육부가 주로 한 일은 토론이나 웅변대회를 주관하는 일이었다. 1920년 초반에 당시 Y.M.C.A의 전국 총재인 월남 이상재 선생이 전주에 시찰을 왔었는데 이 때 이상재 선생을 안내하고 접대하는 일이 지육부 소관이었다고 당시 지육부를 맡았던 10회 졸업생 유기석씨는 말하고 있다.

1930년대 초 지육부를 맡았던 박철규(재학당시 이름 박윤규)씨는 당시 지육부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토론회를 열었고, 1학기에 한 번씩 웅변대회를 개최하였으며, 크리스마스 전날에는 크리스마스 축하 연극공연을 했다고 증언하면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우리지육부가 주최가 되어 한 달에 한 번씩 전 학생들이 강당에 모인 가운데 토론회를 벌였다. 토론은 정해진 주제에 대하여 왼편에 3명, 오른편에 3명이 앉아 자기의 주장을 펴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토론이 끝나면 반드시 두 분 정도의 선생님이 내용이나 제스쳐 등의 잘잘못을 지적해주고 종합 결론을 내려 주기도 하였다. 또 학생들 중에서도 토론을 듣고 자기가 느낀 바가 있으면 나와서 발표하기도 하였다.

크리스마스 전날에는 교내 연극공연을 준비했다. 한 해에는 빅토르 유고의 「레미제라블」을 선생님들이 각색을 해서 공연했는데 내가 장발장 역을 맡고 장평화가 신부 역을 맡았다. 장발장이 감옥살이를 하고 나와서 사회에 대한 격한 불평을 이야기하면서 빵을 먹는 역을 하는데 빵을 먹다가 목에 걸렸다. 숨이 막힌 나는 원 대사에 없는 말로 "신부님 내가 목이 막히니 물좀 주시오"라고 했더니 장평화가 "야! 물 좀 가져와라"라고 말하자 급한 김에 손을 씻었던 비눗물을 가져 와 얼결에 비눗물을 먹은 적이 있었다. 또 한 해에는 세익스피어의 <아더왕>을 공연하는데 내가 자객역을 맡았다. 마침 원수의 목을 베어 칼에다 꿰는 장면이 있었다. 사람의 머리를 무엇으로 만들까 하다가 럭비공을 가지고 사람의 얼굴 형상을 만들었다. 여기에다 빨간 물감으로 피가 흐르는 것처럼 만들어 칼로 꿰어 무대 위로 올라왔는데 그 머리를 땅에 던지자 그 럭비공이 이러저리 튀기 시작해서 앞에 앉은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였다.


박철규씨의 증언을 통해서 우리는 1930년대가 비록 일제 식민통치하의 암울한 상황이었지만 신흥학교에서는 바람직한 교육, 낭만적인 학창생활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신흥인들은 장차 사회의 지도자로서, 그리고 건전한 시민으로서의 꿈을 키워 나갔던 것이다.

기독청년회는 그 외에도 젖 짜는 염소를 길러 그 우유를 팔아서 농촌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기독청년회에서는 음악부와 체육부의 활동도 매우 활발했다. 음악부의 활동에 대해서는 다음에 언급하기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기독청년회는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각 학교의 기독 청년회 회장은 전국 규모의 수련회에 참가했다. 신흥학교 학생 기독청년회의 회장을 맡았던 이귀동(지정 2회)씨는 그 당시를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미션스쿨에는 모두 기독 청년회가 있었으며, 전교생이 다 기독청년회의 회원이었다. 이 기독청년회는 전국 연합회의 조직이 있어 매년 여름에 "하령회"를 금강산에서 개최하였다. 나는 당시 신흥학교 기독청년회 회장을 맡고 있어 일주일 동안 이 모임에 참가하고 돌아왔다. 이 때 경비는 4원을 주었는데 그 돈으로 일주일간 쓰고 구경도 하고 하였다. 당시 수련회에는 윤치호 선생이 강사로 왔었다. 이와 같이 전국 규모의 수련회를 가져 기독청년회의 운영과 활성화에 대한 제반 사항들을 점검하고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함양하기도 하였다.


<全州新興學校 基督靑年會則>


제1장 총 칙


제 1조 본회는 전주신흥학교 학생기독청년회라 칭함

제 2조 본회는 학교와 그리스도 안에서 학생 상호간 우의를 돈독케 하며, 지식을 교환하며, 체육을 장려하며, 자치적 정신을 함양함을 목적으로 함.

제 3조 본회는 조선 기독청년회 연합회에 가입함.


제2장 회 원


제 4조 본교 고등과 생도는 본회 회원이 됨.(단, 보통과 5∼6년 생도 중에 지원자에 한하여 입회를 허가함.)

제 5조 복음주의 교회에서 세례받은 자를 정회원으로 함. 단 헌법개정 결의권과 회장, 총무, 종교부장 피선거권은 정회원에게만 있음.(복음주의 교회라 함은 성경으로써 행위의 규범을 삼으며, 그리스도를 신성(神聖)있는 유일의 구주로 신앙하는 교회를 말함.)

제 6조 전조(前條) 이외의 회원은 준회원으로 함.


제3장 고문 및 찬조 회원


제 7조 본교 직원 및 고등과 졸업생은 찬조 회원이 됨.

제 8조 본회는 본교에서 지정된 고문 약간인을 둠.


제4장 임 원


제 9조 본회 임원은 다음과 같음

회장 1인, 총무 1인, 서기 2인, 회계 2인

제10조 회장은 본회를 대표하며 회무를 총할(總轄)함.

(1) 총무는 회장을 보좌하여 회무를 집행하며, 회장이 유고한 때에는 이를 대리함.

(2) 회장, 총무는 각 부회(部會)에 출석하여 의견을 제시할 수 있으며, 결의에 참가 할 수 있음.

(3) 서기는 일체의 문서와 장부, 통신을 관장하여 처리함.

(4) 회계는 회계 장부를 관장하며, 의사부에서 결의된 경비를 지불함.


제5장 조 직


제11조 본회는 다음과 같은 각 부를 둠.

의사부(議事部), 종교부, 지육부, 체육부, 사교부, 음악부, 자치부

제12조 부에는 부장1인, 부원 약간인을 둠.

제13조 의사부장은 회장이 겸임하고, 부원은 총무, 서기 회계 및 각 부 부장으로 함.

제14조 사교부장은 총무가 겸임하고, 체육부장 및 부원은 학교에서 인정한 자를 주장으로 함.

제15조 본회 회원은 5인 이상이 특수한 목적을 위하여 클럽을 조직하고 의사부의 인정을 받 을 때에는 세포단체로 인정함.

제16조 전조 클럽에 대해서는 본회에서 보조함.

(단, 보조한도는 매클럽에 대하여 연 5원 이하로 함.)


제6장 선거 및 임기


제17조 임원 및 각부 부장은 제3학기 총회에서 투표 선정함.

제18조 각부 부원은 의사부에서 선정하고, 부장 및 부원이 결석될 때는 사무상 편의에 따라 서 의사부 공천으로 임시 보결함.

제19조 임원 및 부원의 임기는 1개년으로 함.


제7장 회 집


제20조 정기총회는 연 3회로 하되 매학기 초에 이를 소집함

제21조 임시총회는 의사부 결의로 이를 소집함


제8장 회 비


제22조 정회원 및 준회원은 연 1원 50전의 회비를 부담하되 매학기 초에 50전씩 분납함.

제23조 본회의 경비는 총회의 결의로 개정하지 않는 이상 다음의 표준으로 각 부에 분배함.

종교부 15% 지육부 15% 체육부 15%

사교부 10% 음악부 10% 자치부 5%

의사부 5 % 클럽보조 15% 준 비 10%


제9장 부 칙


제24조 본 회칙의 개정은 의사부의 결의에 출석 정회원 3분의 2의 동의를 요함.

제25조 본 회칙의 미비한 점은 관례에 의함.

1928년 2월 4일



2) 희 현 회


희현회는 신흥학교 교우회(校友會)의 명칭이다. 교우회는 공립학교나 사립학교를 막론하고 모든 학교에 다 있는 학생 자치기관이다. 당시는 일본 식민정책이 강화되었던 시기라 학교의 교장이 교우회 회장이 되었다. 따라서 총회때도 교장이 사회를 보게 되므로 학생들은 위축되어 제대로 발언을 할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말로만 학생 자치기관이지 자치기관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신흥학교의 교우회인 희현회도 일반적인 관례에 따라 교장이 되었다. 그러나 신흥학교의 경우는 서무부장에게 상당한 권한을 주어 서무부장이 회의를 통괄하다시피 함으로써 다른 학교에 비해서 학생 자치기관의 역할을 충분히 해 낼 수가 있었다. 이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신흥학교에서는 기독청년회의 활동의 주가 되었기 때문에 희현회의 활동은 상대적으로 미약한 것이 되고 말았다. 희현회에는 서무부와 문예부, 체육부가 있었는데 기독청년회와 중복되는 부분은 일의 성격에 따라 역할 분담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앞에서 보았듯이 자치부는 기독청년회의 부서였다. 그리고 교우회의 회칙에도 자치부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런데 (全新 希顯會 自治部 一同)이라는 1934년도 사진이 있다. 4학년 때 교우회의 서무부장을 역임하고, 5학년 때 기독청년회 회장을 지낸 지정 4회 이강문 씨는 자치부는 희현회에 속해 있었고, 자치부원은 상급반에 부원이 있고, 여기에 하급반 반장 부반장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후의 규율부와 같은 것이라고 증인하고 있다. 우리가 확보하고 있는 기독청년회 회칙이나 교우회 회칙이 1920년대 후반의 것임을 감안한다면 1930년대에 들어와서 기독청년회에 소속되었던 자치부가 교우회를 옮겨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全州新興學校 校友會 會則 草序>


제1장 명칭 및 목적, 위치


제 1조 본회는 전주신흥학교 교우회라 칭함.

제 2조 본회는 지, 덕, 체의 연마와 회원 상호간의 교의(交誼) 돈목(敦睦)과 본교의 발전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함.

제 3조 본회는 전주신흥학교 고등과 내에 둠.


제2장 회원의 자격 및 권리 의무


제 4조 본회 회원은 다음의 세 가지로 함.

1. 통상회원 : 본교 고등과 재적생

2. 특별회원 : 본교 고등과 졸업생

3. 명예회원 : 본교 고등과 직원 및 본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자.

제 5조 본회 회원의 권리는 발언, 결의, 선거, 피선거권이 있음. 단, 특별회원은 선거 및 피선거권이 없음.

제 6조 본회 회원의 의무는 통상회원은 매회 출석, 회비 납부, 회칙 복종의 의무가 있고, 특별회원·명예회원은 본회 발전에 노력할 의무가 있음.

1. 통상회원은 1원 10전씩을 본교 회계에게로 필히 납부할 것.

2. 특별회원은 졸업시 평생회비로 2원을 납부함.

3. 명예회원은 본회 발전 및 제사업을 위하여 원조해 줄 것을 요함.


제 3장 임원, 기관의 조지 및 임무


제 7조 본회의 임원과 임무는 다음과 같음.

1. 회장 1인

회장은 본회를 대표하여 회중 재반사무를 총괄함.

2. 부회장 1인

부회장은 회장을 찬조하며 회장 유고시 회장을 대리함.

3. 총무 1인

총무는 회장을 보필하며 회무를 총리함.

제 8조 본회의 기관 및 임원은 다음과 같음.

1. 의사부(회장, 부회장, 총무, 각부 고문 및 부장으로 조직함.)

의장은 본회 회장으로 함. 본부에서는 각부 예산을 편성하여 총회의 의안을 작 성함.

2. 서무부(기록, 사교, 사찰에 관한 일체 사무를 분장함.)

3. 문예부(회보발행, 강연, 토론, 문예, 음악 및 도서에 관한 일체 사무를 분장함.)

4. 체육부(야구, 축구, 정구, 농구, 탁구 및 육상경기에 관한 일체 사무를 분장함.)

제 9조 각부에는 부장 1인과 부원 약간 인을 둠.


제4장 임원선거 및 임기


제10조 임원은 부장·부회장 및 국부 고문 이외에는 매년 1월 정기총회에서 선거함.

1. 회장은 본교 교장으로 함.

2. 부회장은 명예회원 중에서 회장이 임명함.

3. 총무 및 각 부장은 무기명 투표에 의하여 최다수 자로 함.

4. 각부 고문은 명예회원 중에서 회장이 임명함.

5. 부원은 각부 부장이 각부 고문과 협의하여 이를 임명함.


제5장 집회 및 집회시기


제11조 집회는 정기총회, 임시총회, 의사회, 각부 부원회의 수종으로 함.

1. 정기총회는 매년 1월중으로 함.

2. 임시총회는 의사회의 결의로 소집함.

3. 각부 부회는 각 부장이 수시로 이를 소집함.


제6장 재 정


제12장 본회의 경비는 회비 및 수시 염출함.

본회의 예산은 의사회에서 편성하여 회비의 5분의 2는 체육부, 5분의 3은 서무부와 문예부에 반씩 배당함.(단,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그 금액을 증감할 수 있음.)


제7장 부 칙


제13조 재정 검사는 총회에서 검사원을 선정하여 검사케 한 후 이를 보고하게 함.

제14조 본회 규칙을 개정하고자 할 때는 10인 이상 회원의 제의로 총회에서 결정하여 명 회원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요함. 본 회칙은 공포일로부터 시행함. 회칙에 미비한 사항은 통상회칙을 준행함.(각부 세칙은 별지 참조)


46) 본 회칙은 고 함수만 씨의 유품이다. 여기에서도 독자들의 편의성 한자는 우리말로 바꾸고, 고어투의 말은 현대어로 바꾸기로 한다.

3. 음악과 체육활동


다른 학교에 비해서 신흥학교는 음악과 체육활동이 활발하였다. 선교학교인 신흥학교는 교회음악과 무관할 수 없었고, 기독청년회의 활발한 활동은 음악분야에도 뛰어난 실적을 남겼다. 또한 방과후에 운동장에서 교사와 학생이 혼연일체가 되어 운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 다른 학교와의 시합으로 발전하고 나아가서는 도대회, 호남대회, 전국대회에 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 식민통치하의 암울한 상황 속에서 신흥인 들은 음악을 통해서 신앙심을 기르고 정서를 순화하였으며, 운동을 통해서 쌓였던 울분을 해소하고 심신을 단련함으로써 일제의 강압에 굴하지 않는 신흥인의 기개를 키워나갔던 것이다.


1) 음악활동


신흥학교의 음악활동은 교회활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즉 교회의 찬양 연습이 신흥학교 학생들의 음악적인 소양을 길러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 1920년 전후에 재학했던 8회 졸업생 안용남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때에는 학생들이 서문밖교회에 나갔는데 가운데 포장을 치고 한쪽에는 신흥학교학생, 다른 한쪽에는 기전학교 학생들이 앉아 찬양연습을 하였다. 크리스마스날 새벽에는 새벽송을 불렀는데 목사님 댁에 가서 부르기도 하였고, 기전학교에 가서 부르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남자가 여학교에 들어 갈 수 없었으나 크리스마스 때만은 이것이 허용되어 기전학교에 거서 노래를 불렀다. 그때 음악콩쿨에 나간 기억은 없으나 서문밖교회에 나가 찬송을 배워 크리스마스 때 독창이나 이중창을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교회에서의 음악활동은 신흥학교 학생들의 음악적인 자질을 길러 주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어느 학교보다도 음악활동이 보장되는 신흥학교에 유능한 교사가 부임하게 됨에 따라 신흥학교의 음악은 더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었다. 초창기의 이름 있는 음악교사로는 이경혁 선생과 현제명 선생을 들 수 있는데, 이 중 이경혁 선생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1982년 5월에 이경혁 선생의 아들인 이홍기씨가 아버지인 이경혁 선생이 우리 나라 애국가의 작사자임을 밝히는 글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경혁 선생은 1892년 8월 8일 경기도 양주군에서 태어났다. 1911년 윤치호 선생이 영국에 다녀오면서 외국 가곡집을 처음 가져 왔는데 이때 Y. M. C. A에 음악부를 두어 초대 음악부장에 이경혁 선생을 임명하고, 그에게 가곡집을 주었다. 이 선생은 이 외국가요를 다 번역해서 각 학교에 나누어주었다.

이때 이 선생은 우리 나라 애국가 가사를 작사하여 영국민요 이별곡에 맞추어 불렀고, 이것을 윤치호, 이상재, 이승훈, 이동휘 씨에게 내놓고 이분 을의 찬성을 얻어 애국가로 채택하였다. 그후 1912년에는 홍난파 씨와 안익태 씨가 바이올린을 배우러 Y. M. C. A에 들어 왔는데 이들을 이경혁 선생과 김인식 선생 두 분이 가르치다가 그해 가을 이경혁 선생은 문주 동포에게 애국가를 가르치기 위하여 만주로 떠났다.

1916년 3년여의 만주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다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6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고 고향에 가서 잠시 쉬다가 1917년 전북 완주군 봉동면 봉상리(필자주:12회 졸업생 오기중씨에 의하면 당시 봉동 제네리교회의 김성식 목사가 이경혁 선생의 장인이라고 함.)에서 아이들 10여 명을 모아 교육을 시작했다. 1918년 신흥학교의 에버솔 교장의 초청을 받아 신흥학교에 근무하게 되었으며, 신흥학교 재직 중 우리 나라 13개 도를 의미하는 13도(열세 집) 가극을 만들어 1922년 1월 서문밖교회에서 시연하였고, 동년 3월 1일 전주극장에서 가극 열세집 초로인생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한국에서 최초로 발표된 가극이라고 한다.

1922년 12월 첫 목요일 밤 서문밖교회에 새로 들여온 피아노를 밤늦게까지 쳤던 이경혁 선생은 그날 밤 돌아와 새벽 두 시에 숨을 거두었다. 남장로교 선교회에서는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1923년 3월에 미국유학을 시키고자 하였으나 아깝게도 그 혜택을 받지 못하였고, 미국 유학의 혜택은 그 후에 신흥학교에 부임했던 현제명 선생에게 돌아갔다.

또한 이경혁 선생은 숭실학교 교가와 신흥학교 교가를 비롯하여 많은 노래를 작사하였다. 1930년 3월 6일은 아들 이홍기 씨가 보통과 6년 졸업을 몇 일 앞둔 날이었다. 이날 김인석 선생이 김제에서 전주까지 걸어와 이경혁 선생의 미망인에게 안익태 선생이 미국에서 애국가의 곡을 만들어 보내왔으니 그 곡에 이경혁 선생이 작고한 가사를 붙이도록 허락해달라고 하였다. 이 때 부인은 아들 이홍기씨를 가리키며"저 애가 장남이니 저 애의 허락을 받으시오"하였다. 김인식 선생은 다시 이홍기 씨에게 허락을 요청하였고, 김 선생의 바이올린소리에 맞춰 애국가를 두 번 부른 이홍기 씨는 이를 쾌히 승낙하였다. 이 애국가는 3월 7일 전주에 사는 김원전(金元全) 씨에게, 3월 8일은 임양희 선생에게, 3월 9일은 이홍기 씨의 친구 김창락(필자주 : 지정1회, 현재 미국에 거주)씨에 전파했으며, 그 후에 계속 많은 사람들에게 새 애국가를 전파했다.


위의 글은 이경혁 선생의 아들 이홍기 씨가 부친이 애국가 작사자임을 확인시키기 위하여 대통령에게 올리는 글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요약 정리한 것이다. 구체적 검증자료가 말살된 채 살아 있는 사람의 증언이 중심이 되었기에 객관적으로 인정받기가 어렵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우리가 이 자료를 믿는다면 이경혁 선생이야말로 우리 나라 애국가의 작사지요, 또 신흥학교, 교가의 작사자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현재까지 증언해 준 신흥학교 졸업생 중에 이경혁 선생이 신흥학교 교가를 작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신흥학교 교가의 작사자는 영원히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경혁 선생이 13도의 가극을 지어 공연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폐교 전 신흥학교에 재학했던 김대전씨도 이를 증언하고 있으니 우리 나라 최초의 가극이 신흥학교 교사인 이경혁 선생에 의해서 전주에서 만들어져 공연되었다는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그 외에도 이경혁 선생은 신흥학교 학생과 기전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찬양대를 조직해서 서문밖교회에서 찬양발표를 하고, 또 전주극장에서 찬양발표회를 해서 그 수입금으로 서문밖교회 유치원을 설립했다고 당시 찬양대원 이었던 12회 졸업생 오기중씨는 증인하고 있다. 이경혁 선생이 사망하였을 때 이경혁 선생의 출상은 학교장으로 하였으며, 학생들이 운구하고 공동묘지까지 학생들이 상여로 운반하였다고 한다.

이경혁 선생 다음에 신흥학교 음악선생으로 오신 분은 현제명 선생이다. 현제명 선생은 김가전 목사의 소개로 신흥학교 교사로 오게 되었다고 하며, 11회 졸업생인 이영준씨가 현선생에게 영어를 배웠다고 한다. 현제명 선생은 본래는 영어교사였는데 음악을 잘 했기 때문에 음악을 가르쳤다. 그는 학생들에게 미국의 민요를 "숨은 노래"라고 노래를 불러 우승을 했고, 세 번째는 광주가 고향인 이원주씨가 역시 우승을 하였다. 그리고 지정2회 김현택, 김귀복 지정3회 정학송씨 등이 4중창으로 출전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성적은 당시 지방학교로서는 보기 드문 일로서 신흥학교의 음악적 수준이 얼마나 높았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하겠다.

1930년 초반의 신흥학교의 음악활동에 대해서 당시 재학생인 16회 박철규씨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신흥학교 기독총년회가 주관하여 서문밖 교회에서 음악회를 열었는데 이때 일본여학교 음악선생이 바이올린 독주를 했고, 보통과에 근무하는 교사가 피아노독주를 했으며, 우리 학생들은 합창을 하였다. 또 일반인 기독청년회가 주최하여 시내 극장에서 음악회를 개최하였을 때는 서울에서 일류 음악가들을 초청하여 공연했는데 이 때 신흥학교 합창단이 그 음악회에 출연하여 "저 못 가에 삽살개…"등의 합창을 해 준 일이 있다.

당시 신흥학교에는 밴드부가 있었는데 10여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밴드부의 지도는 보통과 근무하면서 고등과 에서도 음악을 지도했던 나기룡 선생님이 맡았다. 이 밴드부는 학교 행사뿐만 아니라 각 교회의 행사에 참가하여 봉사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신흥학교 학생들의 음악활동은 다른 학교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일이었으며, 이러한 활동들이 전주의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된다."


위의 회고 내용을 통해서 보면 신흥학교의 음악활동은 기독청년회가 주관하였고, 또 교회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음악과 종교와의 연관성 때문에 선교학교인 신흥학교만이 다른 학교에서는 아직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음악 활동을 활발히 할 수 있었으며, 그 음악수준이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는 경지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2) 체육활동


신흥학교 학생들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방과후에 운동장에 모여 축구, 농구, 야구 등의 운동을 했다. 이때에는 교사들도 학생들과 함께 뛰었다. 기독청년회와 교우회인 희현회에도 각각 체육부가 있어서 체육활동을 지원하였으며 거의 모든 학생들이 한가지 운동에 취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흥학교의 축구부, 농구부, 야구부는 그 실력이 전북지역 뿐만 아니라 호남지역을 제패하거나 전국대회에 나가서도 그 실력을 과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1920년 전후의 재학생은 8외 졸업생 안용남 씨는 90을 바라보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모습으로 당시의 체육활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시 신흥학교에서는 테니스를 하기도 했지만 야구와 축구를 주로 하였다. 나는 재학 중에 올 신흥 야구선수, 올 신흥 축구선수였으며, 숭실 전문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전라북도의 백호단 선수이기도 하였다. 여기서 올 신흥 선수란 재학생과 교사를 포함한 인원에서 선발된 선수를 가리킨다.

내가 재학 중에 하와이의 교포 야구팀이 조선 일주를 했는데 이 하와이 교포 팀과의 대전에서 우리가 6:4로 지기는 했지만 이것은 전국에서 가장 적은 득점 차로 진 것이었다. 그 때 하태홍 씨가 피쳐를 보았고, 네가 숏을 보았는데 내가 공중으로 넘어가는 공을 글러브를 던져 잡아냈고 이로 인하여 관중들로부터 열광적인 갈채를 받은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당시 전주고보에는 야구가 없었고 축구만 있어 가끔 축구시합을 하였으며, 야구는 우리끼리(학생과 교사) 연습만 하였다. 그리고 우리들은 일본인들과는 절대로 운동시합을 하지 않았다."


위의 안용남 씨의 말에 의하면 신흥학교는 일찍부터 다른 학교에서는 하지 않았던 야구를 했으며, 그 실력이 상당한 수준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이보다 조금 뒤인 1920년대 초반과 중반에 걸쳐 재학했던 12회 오기준씨는 당시에 야구를 했던 추억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내가 재학 시에는 학교 밖에서 신흥학교 학생들의 야구 크럽이 있었는데 남문교회를 중신으로 한 남문패는 거인단이라 하였고, 하태웅, 배보석이 주축을 이루었던 서문밖교회를 중심으로 한 서문밖 패는 애성단이라 하였다. 이 거인단과 애성단은 교내에서 자주 시합을 하였다. 그리고 거인단과 애성단을 통합해서 뽑은 선수를 스쿨 챔피언이라고 하였는데 나는 그때 야구의 스쿨 챔피언으로서 하태웅과 함께 피쳐를 보았다. 그때 신흥학교의 야구는 전라북도에서 제일이었다."


이와 같이 1920년대에 신흥학교의 야구는 전북 지방에서 독보적이었으니 전북 야구의 발상지가 신흥학교라고 할 수 있다. 야구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축구에도 주력을 해 오기준씨는 그 당시가 축구의 전성기라고 말하고 있다. 이 때 신흥학교 축구를 길러낸 분은 축구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최남식 선생이었다. 그 밑에서 많은 훌륭한 선수들이 배출되었으며, 광주에서 개최되는 호남대회에 출전하여 좋은 성적을 내기도 하였다. 신흥학교의 축구는 1930년까지 계속 그 위세를 떨쳤다. 1930년대 초의 재학생이며 당시 신흥 축구의 대표급 선수였던 지정 1회 졸업생인 이동원 씨는 그 당시를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당시 신흥학교에는 축구부가 있었는데 평상시에는 방과후에 연습을 했고, 방학중에는 합숙을 하였으며, 기본적인 경비는 학교에서 부담했다. 신흥학교는 축구를 키우는 데 주력했고, 다음이 농구와 야구의 순이었다. 당시 신흥의 축구는 상당히 유명하였다. 전주고보는 학생수가 500여 명이었고, 신흥학교는 200여명인데 전주고보와 시합을 하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었다. 신흥의 축구부가 전국대회에 나가기도 했는데 휘문고보에는 이기고, 송도고보에 졌던 기억이 있다. 전주고보 외에도 신흥학교는 1년에 한 번 정도 전주 농업학교와 축구시합을 하기도 하였다."


신흥의 축구가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낸데 비하여 농구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활발했던 것 같다. 1930년대 중반기의 재학생인 지정 4회 이철상씨는 그 당시의 체육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신흥학교는 농구, 축구에서는 호남에서 제일 가는 학교였다. 나는 음악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야구와 축구, 농구를 다 좋아했다. 당시 야구는 전주고보와 주로 했고, 농구는 광주 호남대회에 나가서 우승을 하고 했다. 신흥학교는 전라북도 농구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운동선수들은 유니폼, 스파이크, 공, 배트 등만 학교에서 사 주었을 뿐 그 외의 모든 경비는 학생들 스스로 부담했다. 그리고 운동은 방과후에만 했다. 그러나 운동시합을 다녀온 후의 공백으로 나는 수학과 과학 성적이 부진하였다."


전북 농구계에서 오랫동안 중책을 맡아왔던 이철상씨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라북도 농구의 역사가 신흥학교 농구부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이 전북의 야구가 신흥학교에서부터 비롯되었고, 축구 또한 전북의 대표경이라 할 수 있었지만 학생들은 학업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모든 운동은 수업시간을 피해서 하였으며, 그 결과 당시 재학생들은 실력면에서도 절대로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 지정 1회가 26명 졸업생 중 당시에 들어가기 어려웠던 세브란스 의전에만 3명이나 합격을 한 것도 그렇고, 운동선수였던 지정 4회 이철강 씨가 비록 고창고보에서 몇 개월간 공부를 하긴 했지만 신흥학교에서 주로 공부한 실력으로 연희전문상과에 입학한 것이 그 좋은 예라고 할 것이다.

신흥학교에서 주로 했던 운동이 축구, 농구, 야구였지만 그 외에도 때에 따라서 씨름을 하기도 했다. 재학시 씨름을 했던 지정 2회 이귀동 씨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당시 우리 반 학생이 서른 세 명이었는데 씨름을 해서 내가 모두 이겼다. 그 때부터 나는 학교의 대표 선수가 되었는데 전주고보나 농업학교와 시합을 갖기도 하였다. 한번은 전주고보와 시합을 했었는데 나의 실수로 신흥학교가 전주고보에 졌던 기억이 있다. 당시 여름철이 되면 전주시에서 주최하여 다가공원 입구에서 납량회(納?會)라는 씨름대회를 개최하였다. 나는 주위 친구들의 권유로 이 대회에 참석하였는데 세 사람을 이겨 선수권을 땄었다. 선수권을 딴다는 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예선통과나 같은 것이었다.


씨름의 경우는 정식으로 학교의 지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단지 취미활동 같은 것이었지만 다른 학교와 시합을 한 것으로 보아 상당한 관심을 끄는 운동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른 학교와의 운동시합. 특히 전주고보와의 운동시합은 학생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전주고보는 공립이었고, 신흥학교는 사립이었으며, 전주고보가 관리양성이 주목표가 되는 학교인데 비해 신흥학교는 선교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고, 특히 신흥학교는 민족주의 교육이 강한 학교였기 때문에 전주고보와의 대전은 사력을 다하는 시합이 되기도 하였다.

예로부터 신흥학교는 운동장 지면이 낮아 풀이 꽉 차 있어서 학생들이 3일 정도는 풀을 뽑아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학생들이 운동을 많이 했기 때문에 풀이 날 겨를이 없었다. 이와 같은 신흥학교 학생들의 운동에 대한 열심은 일제 식민 통치하에서 억압받는 민족의 젊은이로서 그 맺힌 응어리를 푸는 몸짓이며, 이 운동을 통해서 신흥인의 기백과 용기를 길러 나갔던 것이다.

4. 기숙사 생활과 근로 학생들


신흥학교는 전라북도 선교학교의 중심이었고, 남학교로서는 호남지방의 중심학교였기 때문에 먼 곳에서 온 학생들이 많았다. 전라북도 내의 농촌지역뿐만 아니라 전라남도와 충청남도에서도 상당수의 학생들이 신흥학교 고등과에 입학하였다. 이들의 숙식을 해결하기 위하여 신흥학교는 기숙사를 운영하였으며, 또 이들 중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의 학비조달을 위하여 여려 가지 근로학생 제도를 두었다.


1) 기숙사 생활


기숙사의 위치는 현 강당 뒤쪽, 즉 중학교 교직원 식당근처에 있었다. 20여 개의 온돌방이 있었고,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한 방에 평균 4명 내외의 학생이 수용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10회 졸업생 김형민 씨의 말에 의하면 처음에는 학교 위쪽 산에 식당이 있었는데 후에 와서 기숙사에 밥하는 곳을 설치하고, 일을 맡은 학생이 방방이 쌀을 걷어서 밥을 해다가 나누어주었으며, 반찬은 주로 왜간장을 먹었다고 한다. 또한 방을 덥게 하기 위하여 학생들은 맵겨표를 사다가 맵겨와 바꾸어 와서 풀무질을 해가면서 불을 땠다고 한다. 11회 졸업생인 이영준 씨는 기숙사비는 매월 쌀 서 말을 받고, 그 위에 약간의 반찬값을 받았는데 밥의 양이 적어 배가 고팠으므로 학생들은 중국 사람들이 하는 호떡집에서 호떡을 사다 먹었다고 당시의 기숙사생활을 회고하고 있다. 1930년대 재학생인 지정2회 졸업생 이귀동 씨는 당시 기숙사에서 검은콩은 넣은 콩밥을 많이 먹은 기억이 있고, 사감선생님 지도 아래 자치 책임자인 식감(食監)을 두어 기숙사 운영을 자치적으로 하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위의 졸업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기숙사는 실비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고, 사감선생이 따로 있기는 했지만 자치적인 운영이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학생들 중에는 스무 살이 넘은 학생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학생들의 자치적인 운영이 충분히 가능했으리라 여겨진다.

기숙사 생들은 대부분 외지에서 온 학생들이어서 고향에 대안 향수와 객지 생활에 대한 적응에 어려움이 있었으리라 예상되지만 신흥학교의 수려한 경치와 서로 사랑하고 이해해 주는 생활 속에서 그들은 신흥학교에 쉽게 정들 수 있었다. 특히 방과후에도 그들은 교정 안에서 계속 생활하게 되고, 이른 새벽에도 학교의 뒷산에 올라가서 노래와 웅변, 또는 기도를 하는 등 보통학교학생들보다 더 많은 추억들을 학교와 관련하여 지닐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전주와 전주 주변에 사는 사람들보다 신흥학교에 애착을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며,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신흥학교의 정취를 그리워하고 있다.

기숙사에는 학생이 집단으로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에 학생운동의 중심지는 사실상 기숙사였다고 할 수 있다. 3·1운동이나 광주학생 운동 때에 기숙사가 본거지가 되거나 기숙사생들이 쉽데 거사를 주동할 수 있게 된 원인은 바로 기숙사가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모인 곳이기 때문 이였다. 그런 의미에서 기숙사는 신흥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장소라고 할 수 있다.


2) 근로 학생들


신흥학교 학생들은 가정 형편이 비교적 가난하였다. 생활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공립학교에 전학을 하였고, 신흥학교에는 기독교 가정이나 생활이 어려운 가정의 자녀들이 주로 입학하였다. 더구나 충청남도나 전라남도와 같은 타도에서 기독교 교육을 받으러 온 학생들에게는 학비와 생활비가 동시에 필요했으므로 그만큼 부담이 컸다. 이와 같이 어려운 학생들의 처지를 생각하여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학비를 벌 수 있는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학교뿐만 아니라 선교사들도 학생들이 학비를 벌 수 있는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한 일자리들을 대강 열거해보면 교내의 일로서는 매점, 변소청소, 강당청소, 기숙사의 식량관리, 교내 공장에서 일하기 등이 있었으며, 선교사들의 집에 가서는 장작패기, 물긷기, 등사, 전도지 배부등의 일을 하였다. 1920년경에 재학했던 8회 졸업생 안용남 씨는 당시 학생들의 근로 활동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김영구 선생님의 주관하에 공장에서 비누와 양초를 만들었는데 학생들의 방과후 여기에서 두어 시간 일을 하고 그 대가를 받아 학비를 충당했다. 당시 월사금은 30전이었고, 쌀 한말에 30∼35전 이었는데 공장에서 일하고 받는 돈은 월사금과 학용품을 해결하고도 여유가 있었다. 학교의 수업은 오전 4시간, 오후2시간 도합 6시간을 했는데 학교의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은 운동장에 나가서 운동을 하거나 공장에 가서 비누 만들기, 또는 선교사 집에 가서 물긷기와 등사 등의 일을 하였다. 비누 만드는 학생들도 그 일을 끝내고는 운동장에 나와서 축구나 야구를 하였다.”


학교에서 많은 학생들이 일을 하고 거기서 얻은 돈을 학비를 충당했지만 대부분의 일들을 개별적으로 하는 일이었고, 오직 공장에서만 집단으로 일을 하였는데 이들은 수공생(手工生)이라 하였다. 그런데 공장에서 비누 만든 것이 경제성이 없어지자 학교에서는 이 일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수공생들에게는 다른 일자리가 주어졌다. 그때의 상황을 당시 수공생의 한 사람이었던 10회 졸업생 유기석 씨는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비누 만드는 일이 중단된 후 수공생들은 방과후에 기숙사에서 일을 하거나 학교 뒤 담 장 너머에 있는 큰 밭을 매기도 하였다. 수공생들이 딸기밭을 맬 때 학교에서는 휘파람을 불면서 매라고 하였다. 그것은 밭을 매면서 딸기를 따먹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서로 교대로 휘파람을 불면서 딸기를 따먹곤 하였다.”


위에 기록한 유기석 씨의 이야기는 조금 우스꽝스러웠던 기억을 말한 것이지만 어쨌든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일자리를 잃지 않게 하기 위하여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학생들이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은 학업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에 따라서는 식비와 학비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서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해야하는 경우도 있었다. 1930년 전후에 재학했던 16회 박규철씨는 기숙사의 식량을 관리하여 식비를 해결하였고, 강당청소를 해서 학비를 면제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한편 1931년에서 1935년까지 재학했던 지정 3회 장평태씨는 당시의 학생들의 근로활동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 강당자리에 철공장과 목공장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1∼2시간 일해서 학비를 벌었다. 학교 내의 근로장학생으로는 매점, 본관 바닥 청소, 변소 청소 등이 있었는데 학비감면 특대생이 1명뿐이어서 대부분 학생들은 이러한 근로활동으로 학비를 마련하였다. 또한 선교사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경우 5원 50전을 주었는데 수업료는 월 1원 50전이었고, 시골에서 전주에 와서 학교를 다닐 경우 월 10원 정도의 학비가 소요되었다. 당시 신흥학교 학생들은 3분의 1정도만이 자기 집에서 돈을 가지고 와서 공부를 하였고, 나머지 학생들은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를 마련하였다. 나의 경우는 3형제가 신흥학교를 다녔는데 셋 다 아르바이트를 했고, 부족한 금액만 집에서 부쳐왔다. 비록 가난했지만 아르바이트로 어렵게 공부한 학생들은 반수 이상이 전문학교에 진학했다. 그 이유는 일본에서 고학으로 대학을 마친교사들이 일본에서 고학했을 때의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고, 이미 신흥학교 재학시부터 아르바이트에 익숙한 학생들이라 고학에 자신을 가졌지 때문이었다. 학교 매점에서 일하던 김상진씨는 당시 합격하기 어려웠던 세브란스 의전에 입학하였으며, 전 거창고등학교 교장이었던 전영창씨는 재학시절 변소청소를 하여 학비를 조달하였다.”


이처럼 신흥학교 학생들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근로활동을 통하여 학비를 조달하였고, 그러는 가운데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자기의 꿈을 실현해 나갔다. 이와 같은 다양한 근로활동은 신흥학교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제도로서 무산계층을 중심으로 선교의 지평을 확대해 나가고자 했던 선교사들의 정책과 희현당의 흥학정신(興學精神)이 접맥되어 이루어진 결과였다고 하겠다.

희현당에서 공부했던 우리의 조상들이 여러 가지 경제적인 여건이 갖추어진 가운데 공부만 할 수 있었던 데 비해 신흥학교의 학생들은 스스로 노력의 대가를 치르면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것은 자조와 자립정신의 함양이라는 면에서 오히려 발전적 계승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처럼 학생들이 근로활동을 해가면서 학업을 수행하는 일은 복교 후에도 계속되었으며, 시기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었지만 재능이 있으면서도 가정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학업의 기회를 주는 일에 어느 학교보다도 더 앞장 서 있었다. 이와 같은 일은 앞으로도 계속되고 확장되어야 할 신흥학교의 전통이며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5.남은 이야기들


1900년 9월 9일 한 선교사의 집에서 김창국이라는 소년을 교육시킴으로써 시작된 신흥학교는 9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민족의 역사와 함께 고락을 겪어 왔으며,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선교와 교육의 사명을 수행하여 왔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숱한 사건들이 발생하였고, 온갖 의미들이 창출되었겠지만 지금 그것들을 다 밝혀 낼 수 없음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단적인 예로 현재의 신흥학교 교가는 누가 지었으며, 언제부터 불려왔는지, 그리고 현재의 교훈은 언제부터 사용되어 왔는지 정확히 그 근거를 밝힐 수가 없다.

이경혁 선생이 만주 신흥 군관학교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만주 신흥 군관학교의 교훈을 모방하였고, 이경혁 선생이 신흥학교 교가를 짓지 않았는가 하는 추측도 가능하지만 신흥이라는 명칭의 사용이 만주 신흥 군관학교보다 신흥학교가 먼저라는 점에서 그 역도 추론이 가능하다. 1918년 입학해서 1922년 봄에 졸업한 안용남 씨가 지금도 신흥학교 교가를 그대로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1920년 전후에 신흥학교 교가가 불렸으며, 교가 속에 교훈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교가 이전에 교훈이 정해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어쩌면 지·인·용의 교훈은 학교가 정식으로 발족했던 1908년부터 사용되었으며, 교가는 그 후에 작사되어 이미 있었던 곡에 맞춘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해방 전의 역사는 더 많은 자료들이 보완되고, 더 많은 증인들이 나와 바로 잡아 줌으로써 좀더 완벽해 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 곳에서 못 다한 이야기들은 자료가 보안되는 대로 100년사에서 다시 논의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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