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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4-01
 제목  광주학생운동과 신흥 (전주신흥고등학교 90년사 20)
 주제어  
 자료출처  전주신흥고등학교  성경본문  
 내용

목차

 

갑오개혁이후의 신교육   

선교사들의 내한과 기독교학교의 설립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의 내전과 선교 활동의시작

최초의 신흥인 김창국   

시대적 배경

신흥학교의 개교

희현당

일제의 무단정치

초창기의 신흥학교

삼일운동의 배경

의 삼일운동

삼일운동과 신흥

일제의 문호정책

기독교의 재흥과 시련

학생수의 증가와 증축

1920년대 신흥학교 개황

인톤교장과 1930년대 초

조선총독부 지정 신흥학교

항일의 몸짓

광주학생운동과 신흥

신사참배 거부와 폐교

종교교육과 신앙생활

 

> 참고자료 :  삼일운동 

 

 

2) 광주학생운동과 신흥학교


광주학생 독립운동은 19298년 11월 3일 광주에서 한·일 학생간의 집단적인 충돌 사건이 발단이 되어 광주는 물론 전국 190개교 54.000여 명의 남녀 학도들이 시위운동을 전개하여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외치며 총궐기했던 민족해방 운동으로서 일제의 민족차별과 식민지적 노예교육에 있어서 쌓이고 쌓인 민족적 규모러 폭발시키기에 이른 3·1운동 후 최대의 항쟁이었다.

1929 10월 30일 하오 나주역 출찰구를 나온 한·일 기차 통학생 사건으로 광주학생 독립운동은 점화가 되었다. 나주에서 광주로 통학을 하던 일본인 광주중학생 3년생 수명이 같은 기차 통학생인 광주여고보 3년생 박기옥, 이광춘, 이금자 등의 한국인 여학생을 차 속에서 희롱하며 박기옥의 댕기를 잡아당기기까지 하였다. 이때 마침 박기옥 사촌 남동생이며 광주고보 2년생인 박준채가 이 광경을 목격하고 격분하여 역 광장에서 이들을 불러 세우고,

「후꾸다, 너는 명색이 중학생인 녀석이 야비하게 여학생을 희롱해?」 라고 힐책을 하자 후꾸다가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뭐라고? 그럼 네가 어쩔테냐? 센징놈이 까불긴…」

이 "센징"이란 말이 후꾸다의 입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박준채의 주먹은 후꾸다의 면상으로 날아가 작렬했다.36) 이렇게 해서 시작된 박준채와 후꾸다의 싸움은 일본학생과 한국학생의 집단싸움으로 발전했다. 이 날 집단 싸움에 참여한 일인 학생이 30여 명이요 한국인 학생이 20여 명이었으나 일본 학생들이 훨씬 더 많은 상처를 입었다. 이 일로 한국학생들과 일본학생들의 대립이 더욱 심각했고, 이것은 곧 반일 감정을 자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36) 민족문화협회 편, 민족운동 총서〈제8집〉 학생운동, 251쪽.


11월 3일은 일제의 소위 4대 국경일의 하나인 명치절(明治節)이자 음력으로 10월 3일이어서 우리나라의 개천절이기도 하다. 게다가 〈성진희〉라는 독서 모임의 창립 3주년 기념일이어서 이 날을 기해서 일제히 일어나자는 〈독서회 중앙본부〉의 비밀연락과 지시가 와 있었다. 침략의 원흉 명치의 생일과 우리의 개천절이 겹친 날이었으니 망국의 한이 뼈에 사무칠 수밖에 없는 날이었다. 일제는 이 날이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소집하여 소위 명치적 경축식을 거행하였다. 광주의 고보생들은 이 식에서 일본국가의 제창에 입을 다물었고, 식이 끝나자 떼를 지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학생들은 일인 학생과 한국인 학생들과의 사건에 대해 편파적인 보도를 했던 일제의 기관지 광주일보는 찾아가 항의 시위를 하였으며, 이 날 일본 학생과 한국인 학생들 사이의 치열한 집단싸움이 벌어졌다. 이 날 양측 학생 수는 약 200명 내외로 대등하였으나 한국 학생들이 사기면에서 우세하였다. 마침내

일인학생들이 패주하자 광주 경찰서의 기마경찰대와 소방대까지 출동이 되어 일시 진정되기는 하였으나 학생들은 이 날 다시 시위를 벌여 시민솨 함께 30,000명이 참가하였다. 이어서 12일 제 2차 학생시위운동이 있었는데 이와같은 2차례의 시위로 260명의 학생이 정식 구속되었으며, 그 외에도 백지 동맹등의 단체활동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퇴학을 당했다. 당시 광주고보는 1학년을 제외한 전교 재적생이 460여 명이었는데 그 중 졸업을 한 학생을 160명 내외밖에 안 되었으니 이 학생운동으로 300여 명이 희생을 당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와같은 사정은 광주농고, 광주사범, 광주여고보들도 마찬가지였다.

광주의 시위는 두 차례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계속되었으며, 이 운동은 전남의 각 지방을 비롯하여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다. 전주에서도 이에 동조하여 시위를 벌이고자 하는 여러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전주고보와 전주여고보는 사전에 발각되어 불발로 끝나고 말았으며 기전학교 학생들은 교내시위를 하다가 붙잡혀 갔고 신흥학교만은 유일하게 80여 명의 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하여 시위를 벌였다.

광주 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지고 있을 때 신흥학교 재학생들은 교우회 문예부장 박문수(후의 이름은 박철웅 : 전 조선대 총장), 운동부장 이재영(후의 이름은 이철), 그리고 문예부의 문예계와 서무부의 사교계를 맡았던 함수만, 문예부 도서계와 서무부 기록계를 맡았던 원용덕 등이 주동이 되어 기숙사에서 비밀회합을 갖고 (1) 절대 비밀로 할 것, (2) 준비는 기숙사에서, (3) 거사일은 12월 2일로 할 것 등 3개 항을 결정했다. 그러나 12월 2일은 신흥학교 개교 22주년 기념일이었다. 애초에는 오전 10시에 시작되는 강당에서의 기념식이 끝나면 거사를 하기로 하였으나 오후 7시 반에 음악회 등 성대한 행사가 계획되어 있어서 거사를 연기하기로 합의하고 12월 12일 거사를 하기로 하였다. 12월 12일 전교생이 시위를 할 계획이었으나 사전에 학교당국이 눈치를 챔으로써 조기방학에 들어가고 학생들은 귀가하도록 하였다.

1월 25일 겨울방학이 끝나고 다시 개학이 되는 날이었다. 멀리 시골에 사는 학생들은 미리 학교 기숙사로 몰려들었고, 간부들은 기숙사에서 학생들을 규합하고자 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계속 학교에 나오지 말라고 했고, 일부 학생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학생도 있었다. 이때 앞서 거사를 준비했던 교우회 간부들은 다시 기숙사에서 거사를 준비하였다. 이 거사의 모든 책임은 박문수가 지기로 하고, 또한 외부와의 연락도 박문수가 맡았으며 내부의 행동책은 함수만이 맡았다. 이들의 비밀 회합에서 결의된 내용은 (1) 절대비밀 보장, 경찰에 잡혀도 말하지 말 것, (2) 준비는 기숙사에서 할 것, (3) 거사일은 1월 25일 (4) 가급적이면 기전 등 인근 학교와 같이 거사할 것 등이었다. 그래서 기전의 오원애, 신애덕 등과도 연락이 되어 협력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눈치 챈 경찰은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주변을 엄중히 경계하였다.

1930년 1월 21일자 동아일보에는 "新興·紀全 兩校 嚴重히 경계중"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도 그 상황을 미루어 알 수가 있다. 당시 거사 책임자였던 박철웅(재학시 명 박문수:15회)씨의 말에 의하면 일경은 학교 주변에 초소를 설치하고 철통같이 경비하고 있었으며, 다가교 근처 천변에는 일경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24시간 경계근무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37) 거사 예정일에 대해서 「기전 80년사」에서는 1월 26일로 예정했던 것을 학교 당국이 사전에 눈치를 채서 이를 앞당겨 1월 24일에 결행했고, 이에 따라 신흥 학교도 하루 앞당겨 25일에 거사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박철웅씨와 박철규씨의 증언 그리고 함수만씨에 대한 거증자료에는 이러한 언급이 없으니 어느 쪽이 옳은 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신흥학교 학생들은 기숙사 안의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해놓고 태극기며 전단 등을 직접 그리거나 붓으로 써서 준비하였다. 전단의 내용은 민족차별 금지, 식민지 교육철폐 등의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드디어 1930년 1월 25일 아침 8시 30분 간부들은 기숙사생 전원을 소집하여 태극기와 전단을 나누어주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가교 쪽으로 나가 등교하는 학생들을 규합하였다. 드디어 9시 30분에 80여 명의 학생들이 모아졌고, 이들은 결의문을 낭독하고 전단을 살포하면서 "자주독립만세! 학생만세! 同感만세! (광주학생들의 운동에 同感한다는 뜻)" 등을 외치며 다가교를 건너 시내로 진출하였다. 시위학생들은 중앙동으로 진출하였는데 이 소식을 알아차린 일본경찰들은 총을 쏘며 닥치는 대로 학생들을 연행하였다. 이 날 경찰에 연행된 학생 총수는 36명이었다. 이 날의 상황에 대하여 1930년 1월 26일자 동아일보는 "全州 新興 또는 童謠 旗 들고 萬歲?唱" 이라는 제목아래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전주에 있는 신흥학교는 지난번 동요사건으로 인하여 임시휴학을 하였다가 금 이십 오일에 개학하게 되었던 바 오전 아홉 시 반경에 등교하던 학생 칠십 명이 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으므로 경찰 측에서 자동차 경관대가 출동하여 학생 다수를 검거 취조 중이라 한다.


위의 기사에는 시위에 참여한 학생이 70명으로 나와 있는데 같은 날짜 조선일보에는 80명으로 되어 있어서 숫자상으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틀후인 1월 28일자 동아일보에는 "全州新興校生 三十五名 收監"이라는 제목 하에 다음과 같은 가사가 실려있다.


전북 신흥고등학교 고등과 생 70여명은 삐라를 뿌리며 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다가 36명이 검거되었다함 기보하였거니와 전주 경찰서에서는 지난 25일에 전기 검거된 학생 35명에게 대하여 최고 29일, 최하 15일 구류처분을 즉결하여 동일 오후 4시경에 전주 형무소로 넘겼다 한다.


일본 경찰은 시위의 배후를 캐기 위하여 모진 고문과 매질을 가했으나 배후가 드러나지 않자 모든 학생들에게 29일 또는 15일 동안의 구류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조사를 받는 도중 또는 구류를 사는 동안의 학생들의 참상은 말이 아니었다. 그 후유증으로 당시 주동자의 한사람인 함수만은 감옥을 나온 후 예수병원에 입원을 하였고, 1930년 5월 19일 예수병원에서 분사하고 말았다. 그는 죽기 전에 부친인 함연우 공에게 자식 노릇 못하고 먼저 가니 자식으로 생각지 말고 동생 정옥을 자식으로 생각하라고 유언하면서 일본은 반드시 망한다고 말했다 한다.


38) 고 함수만씨의 조카되는 함갑주(현 서울명지중 교장)시가 그간의 묻혀진 자료들을 찾아 부친인 함정옥(고 함수만씨 동생)씨의 명의로 독립운동 유공자 신청을 함에 따라 고 함수만씨는 1980년 8월 14일 독립운동 유공자로 인정되어 대통령 표창장을 받았다. 그리고 양근석 씨(현 서울 명지여고 교장)또한 고 함수만씨의 조카가 되는 분으로 외삼촌의 뜻을 잇기 위하여 신흥학교에 입학하였다고 한다.(복교2회)


이러한 사건이 있는 직후에도 신흥학교에서는 모종의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0년 2월 28일자 동아일보에 "新興敎員 檢擧"라는 제목아래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있다.


지난 이십 삼일 오후 아홉 시경에 전북 경찰부에서는 돌연 활동을 개시하고 경계하던 바 전주신흥학교 보통과 교원 이용희씨의 가택을 수색하여 다수의 문서를 압수함과 동시에 전주 서문 밖 예배당으로 급행하여 예배 중에 있는 이씨를 검거하여 목하 취조 중이라는데 그 자세한 내용은 듣는 바에 의하면 학생사건 관계의 모 계획을 했다는 정보가 있었다 한다.


당시 교사인 이용희씨가 비록 보통과 교사였지만 당시에는 보통과와 고등과 교사가 서로 왕래하면서 수업을 했던 만큼 고등과 학생들과 연계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월 25일의 거사도 이미 교사들은 알고 있었으며, 교사들의 묵인하에서 시위가 이루어진 것이니 그런 의미에서 당시 항일운동은 학생과 교사가 함께 참여했다고 볼 수 있다. 위의 교원 검거사건도 사전에 발각되어 중단되었지만 만약에 성공했다면 1월 25일과 같은 또 하나의 학생운동이 일어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3) 시위운동에 참여했던 학생의 증언

1930년 1월 25일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으로 주동자였던 박철웅씨와 단순 참가자였던 박철규(재학시명 박윤규)39) 씨의 증언을 들어봄으로써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해 보고자 한다. 먼저 당시 시위의 총책임자였던 박철웅의 증언을 들어보기로 한다.

39) 박철규씨는 당시 교우회(校友會)의 문예부와 운동부의 임원이었다.

"우리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중앙동으로 행진해 갔다. 연락을 받은 일경들은 총을 들고 허겁지겁 시위현장으로 달려왔고, 공포를 쏘면서 닥치는 대로 학생들을 끌어갔다. 역부족인 우리는 뒤로 밀리면서 대열이 흩어졌고, 모두 도망을 가기 시작하였다. 나는 학생들에게 빨리 도망하여 숨으라고 외쳤고, 그러는 사이게 나도 일경에게 끌려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경찰서에는 10여 명의 신흥학교 학생들이 벌써 끌려와 있었고, 일부는 취조실에서 심문을 받고 있었다. 내가 취조실로 끌려갔더니 목포에 사는 박인상이란 학생이 먼저 끌려와 취조를 받다가 일경에 얻어맞아 코뼈가 부러져 있었고, 또 다른 학생은 팔이 부러져 있었다. 아직도 병원에 입원했던 후유증으로 몸이 건강하지 못했던 나는 이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아 일경에게 이번 일은 내가 주동이 되어 일으킨 일이고 다른 학생들은 내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니 죄가없는 다른 학생들은 내보내 달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일본 형사는 「그 녀석 그래도 정직한 놈이구나. 그래 말 좀 들어보자.」하면서 나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이와 같은 용감성 때문에 나는 혹독한 고문만은 면하고 일경들의 동정을 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후 매일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심문은 계속 되었는데 다른 단체나 배후 세력과의 연계가 밝혀지지 않고 신흥학교 단독으로 거사했음이 밝혀져 구속 당한지 1개월 여만에 석방되어 나오게 되었다."


박철웅 씨의 증언에는 당시 사건 전모의 대강이 드러나 있다. 이에 비하여 다음에 나오는 박철규씨의 증언은 그때 당시 상황의 세부적인 면까지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 눈에 보듯이 그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광주학생 사건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신흥학교에도 동요의 기미가 있자경찰은 신흥학교를 엄중히 경계하면서 조기방학을 종용하였다. 그래서 2학기 말쯤에 조기 방학을 실시하였다. 나는 당시에 2학년이었는데 당시 전교생이 조기방학을 한다고 선언하자 학생들은 울면서 교실을 떠나지 않았다. 한참 후에 선생님이 교실을 나간 후 학생들은 하나씩 둘씩 교실을 떠났고, 나가다가 주저앉아 우는학생도 있었으며, 운동장에서 가방을 내동댕이치고 발버둥을 치는 학생도 있었다. 겨울방학이 끝나서 다시 등교를 했더니 학교를 계속 못나오게 했다. 그래서 일부 학생들은 그냥 고향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그때 기숙사에 1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서 거사를 계획하였다. 주동자는 박철웅(재학 시 이름 박문수), 이철(재학 시 이름 이재영), 원용덕, 함수만, 김교의 등으로 박철웅과 이철은 4학년이었고, 나머지 학생들은 2학년이었다. 이들 주동자들은 일부 선생님들과도 연락이 되어 있었고, 24일 밤 기숙사에서 20∼30명이 모이기로 약속을 했다. 드디어 24일 밤 기숙사에서는 담요로 커튼을 쳐서 불빛이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해놓고 전단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만약에 전단을 인쇄하면 죄가 더 커진다고 하여 직접 손으로 써서 만들었다. 그 내용은 「학도야 우리의 붉은 피를 뿌리자. 그래서 검거된 동무들의 놓임을 부르짖자.」와 같은 것들이었다.

25일 아침 식사 후 거사를 시작했는데 9시경 70∼80명이 학교 앞 다리쪽으로 「학생만세!」를 외치면서 뛰쳐나갔다. 다리 중간쯤 가니까 순사 몇 사람이 가로막았다. 그 때 나는 축구를 했기 때문에 윤은익와 함께 앞장을 섰었다. 윤은익은 이리의 어느 교회 목사의 아들로서 키가 크고 체격이 좋으며 운동을 잘했다. 그때 윤은익은 경부가 탄 자전거를 불끈 들어 다리 아래로 내던졌고, 순사 한 사람을 잡아 밀어 부치니 난간에 부딪혀서 넘어졌다. 그렇게 해서 순사들을 헤치고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꺾어서 시내로 진입하면서 학생만세를 외치니 시민들이 운집하기 시작했다. 그때 한문선생님이신 김영국(金永國)선생님이 우리를 보시고 그 자리에 선 채로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학생들은 전단을 뿌리면서 시가지를 돌았는데 그때 나는 몇몇 학생들과 함께 도립병원 쪽으로 갔다가 거기서 경찰에 붙들렸다.

당시 1학년 고영훈은 기숙사에서 막 뛰어 나오다가 제 신이 없자 다른 신을 신었는데 신발이 너무 커서 발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신발 두 개를 포개어 신고 뛰어 나왔는데 일본 순사가 그를 붙잡아 「이 새끼, 어린놈이 나왔다.」고 하면서 목을 잡아 비트는 잔인한 행동을 하기도 하였다.

기전학교 학생들은 신흥학교가 거사하기 하루 전 산 위의 교정에서 만세를 불렀는데 우리가 경찰에 붙들려 갔을 때 기전학교 학생 15∼16명 정도가 감방에서 마침 아침에 일어나 머리를 빗고 있다가 신흥학교 학생들이 붙잡혀 오는 것을 보고 만세를 불렀다. 우리들도 감방 안에서 그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는데 그때의 격앙된 기분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당시 신흥학교 학생들은 모두 35명이 붙잡혀 왔다. 붙잡혀 온 그날부터 우리들은 하루 종일 매를 맞으며 취조를 받았다. 사전에 박철웅은 모든 일을 자기들에게 미루라고 했기 때문에 대개는 그대로 따랐다. 당시 우리 학생들은 여러 조로 나뉘어 일본인 순사와 한국인 순사에 의해 취조를 받았는데 당시 한국인 순사들은 두 종류가 있었다. 어떤 사람은 어린놈들이 뭘 알아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마구 때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바보같은 놈들 상급생한테만 미루지 말고 너희들이 했다고 못해?」하고 우리들의 비겁함을 안타까와하기도 하였다. 취조를 받을 당시의 함수만 씨의 말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일본인 순사가 왜 시위를 했느냐고 묻자 함수만씨는 「나는 한국인이니까 했다. 당신하고 나하고 입장이 다르지 않은가? 당신은 일본사람이니까 반역이라고 하지만 나는 한국 사람이니까 애국이다.」라고 대답했다.

종일 얻어맞고 꿇어앉고 하다가 우리들은 재판도 받지 않고 감옥으로 옮겨졌다. 그때 전주 경찰서 앞에는 학부형, 시민들이 모여서 불안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박수를 치기도 하였다.

감옥 안으로 들어서니까 학생들의 옷을 모두 벗기고 수의를 입혔다. 그 때 학생들에게 죄수번호를 주었는데 나는 207호였다.40) 우리 학생들은 두 개의 방에 수용되었는데 저녁에 들어와서 보니 콩, 보리, 조를 섞어서 만든 밥에다가 소금을 검정 깨 몇 알과 함께 볶아서 반찬으로 주었다. 우리들은 아침을 설친 데다가 점심도 굶은 상태여서 그것으로 저녁을 때웠다. 붙잡혀간 몇 일 후인 1월 30일은 음력으로 설이었다. 감옥 속에 들어가 있으니까 멀리서 농악소리가 들리고 있었는데 그 때 설날의 음식들이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모른다.


40)박철규씨가 이 말을 하는 순간 필자와 대담을 하고 있던 여관의 호실 번 호를 보니 207호였다. 그는 깜짝 놀라 "내가 전에 아파서 입원했을 때도 병실이 207호였는데..."하면서 207이라는 숫자와의 인연을 기이하게 생각 하였다.


우리가 수용되었던 방바닥은 마루로 되어 있었고, 천장은 꽤 높았다. 두 방사이에 구멍을 뚫고 불 하나로 양쪽 방을 밝히고 있었으며, 서로 연락을 하지 못하도록 전등 부분에다 철망을 쳐 놓았다. 한 쪽 구석에는 자그마한 구명이 있었는데 햇빛이 통하는 구멍이었다. 저녁에 잠 잘 때는 얇은 이불을 주어 추위에 떨면서 밤을 세웠다. 다음날 아침 간수들은 6시쯤 어둑컴컴할 때 기상을 시켜 일본 짚신에 두루마기 같은 옷을 입힌 상태로 우리들을 수도가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하는 말일 너희들은 건강하니 냉수마찰을 해야 한다. 고 하며 30분 가량 냉수마찰을 시킨 후에 30분 동안 운동장을 돌게 하였다. 우리들은 온몸이 다 얼어 붙어 감각이 마비될 정도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형무소 생활이 마칠 때까지 계속하였다. 하루는 내가 아침에 이 일을 마치고 덜덜 떨면서 감방 안에 들어와 있으니 친구가 「야! 너 짚신이 발에 붙어 있다.」 고 알려 주어서 그제야 비로소 짚신을 신고 있음을 알았다. 당시에 워낙 감각이 마비되어서 짚신을 신고 있는 지 벗고 있는지를 몰랐던 것이다. 그 여파로 나는 감옥에서 나온 후 그 해 봄에 발통이 다 빠지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아침에 이처럼 고통스러운 일과를 마치고 바에 들어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노라면 아침밥이 들어 왔고, 아침식사를 마치고 하루 종일 앉아 있노라면 해가 질때까지 일각이 여삼추였다. 그리고 방안은 한 겨울이라 몹시 추웠다. 추위 속에서 밥을 먹고 설사가 나면 주위 친구들의 눈총을 받기도 하였다. 추위 속에서 밥을 먹고 설사가 났을 경우 휴지가 모자라 옷에 똥을 묻히기도 하였다. 감방안에서 간혹 이야기를 하면 잡아내다가 매를 때리고 시멘트 바닥에 꿇어 앉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모두 불러내서 일본 중들에게 감화를 받도록 했다.

당시 감옥에서는 학생들에게 책을 넣어 주었는데 그 때 읽은 것 중 부모의 은혜를 노래한 일본시를 지금까지 기억한다. 찌르릉, 찌르릉 비켜나세요. 부르는 동요의 작자인 목일신은 감옥에 들어갈 때 동요를 짓기 위해서 조그마한 연필을 손가락 사이에 끼어 가지고 들어갔다. 하루는 벽 위에 전등 구멍을 막은 철조망사이로 조그마한 종이 쪽지 접은 것이 넘어왔다. 그 종이 쪽지는 목일신이 가지고 온 연필로 대변 볼 때 쓰는 휴지에다 글씨를 쓴 것인데 그 내용은 벽을 두드리는 숫자에 따라서 무슨 의미가 있다는 암호의 내용을 적은 것이었다. 목일신은 감옥에 있는 동안 동요를 많이 지어 그 종이를 똘똘 말아서 가지고 나왔다. 당시 주모자는 29일간, 일반 학생은 15일간을 살고 나왔다.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다시 그때처럼 감옥살이를 한다면 몇 날이 못가서 정신 착란 증을 일으킬 것 같다. 나는 나의 후배들에게 그때 우리들의 고생과 그 기개를 말해 주고 싶다.


위에 적은 두 증언은 신흥학교 학생들이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여 시위를 벌였던 장면과 감옥살이하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작게는 불의에 대한 저항이요, 크게는 외세의 압제에 대한 조국 해방운동의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31운동 이후 신흥학교 학생이 계속해 일제에 항거한 자취들을 더듬어 보았다. 3·1운동이라는 민족 독립운동의 실패 이후에도 신흥학교 학생들은 꾸준히 일제에 대한 저항을 계속해 왔다. 이러한 저항운동은 전주에서는 신흥학교가 가장 두드러지게 활약을 하였으니 신흥인들의 "勇" 행동으로 나타난 결과였다고 할 수 있겠다.


41)목일신이라는 학생은 재학시절부터 동요를 많이 지어 어린이 라는 잡지에 발표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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