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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4-01
 제목  항일의 몸짓 (전주신흥고등학교 90년사 19)
 주제어  
 자료출처  전주신흥고등학교  성경본문  
 내용

목차

 

갑오개혁이후의 신교육   

선교사들의 내한과 기독교학교의 설립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의 내전과 선교 활동의시작

최초의 신흥인 김창국   

시대적 배경

신흥학교의 개교

희현당

일제의 무단정치

초창기의 신흥학교

삼일운동의 배경

전주의 삼일운동

삼일운동과 신흥

일제의 문호정책

기독교의 재흥과 시련

학생수의 증가와 증축

1920년대 신흥학교 개황

인톤교장과 1930년대 초

조선총독부 지정 신흥학교

항일의 몸짓

광주학생운동과 신흥

신사참배 거부와 폐교

종교교육과 신앙생활

 

> 참고자료 :  삼일운동 

 

 

3. 지속적인 항일운동

1) 항일의 작은 몸짓들과 신흥인들의 수난

전주의 3·1운동을 주도했던 신흥학교 학생들은 3·1운동 이후 일제의 소위 문화정치 기간에도 끊임없이 일제에 대한 저항의 몸짓들을 보였다. 그것은 주권을 잃은 나라의 젊은 학도들이 주권을 빼앗아간 자들에 대하여 저항을 한 것이며, 빼앗긴 주권을 되찾고다 하는 열망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학생들을 탄압함으로써 저항운동을 약화시키려 했다. 그러한 가운데도 신흥인들은 끊임없이 일제에 대한 저항을 계속함으로써 선배들이 심어놓은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신흥인들의 의지를 보여왔다.

1921년에 있었던 일본어 시험 사건은 일제에 저항하는 신흥인의 작은 몸짓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당시 4학년 학생이었던 8회 졸업생 안용남(재학시 이름 안갑용)씨의 증언에 의하면 나시다라고 하는 일본어 선생의 일어 시험 시간에 전 학생이 모든 답안에 다 ○표를 함으로써 사실상의 시험거부를 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많은 학생들이 에버솔 교장에게 불려가 혼나고 일이 마무리되긴 하였지만 이러한 사건은 학생들이 평소에 지니고 있던 배일감정이 집단적으로 표출된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10회 졸업생 김형민씨도 "3·1운동 이후 일본어 교과서에 『國語』라고 씌어 있는 國자를 日자로 고쳐 『日語』라고 하였다." 라고 증언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서 당시 학생들은 일본어를 국어로 받아 들일 수 없음을 이러한 방법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신흥학교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몰래 우리나라 역사를 배우거나 창가를 배우기도 하였는데 그러한 책들은 일본 경찰들의 불심검문에 대비하기 위하여 쌀독에 감추어 두었다. 항상 신흥학교 학생들을 감시하기 위하여 학교 주변을 서성거리던 일본경찰은 학교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에게 어떤 질문을 던져 그 질문 내용에 대한 답변 속에 반일 감정이 내포되어 있으면 마구 때리기도 하였다고 하니 당시의 신흥학교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 수난을 받았는가를 알수 있다. 이러한 수난 중의 하나가 소의 태극기 사건이다. 1920년대 초에 일어났던 태극기 사건에 대하여 유기석(10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고등과 3∼4학년 때로 기억된다. 어떤 사람이 선고개와 선고개 너머 미나리 논두럭, 그리고 완산칠봉 봉우리마다 명주로 태극기를 만들어 꽃아 놓았다. 당시로 서는 태극기를 만들거나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죄가 될 만큼 일제의 탄압이 심한 때 였다. 다음날 아침 전주 경찰서에서 순사들이 벌떼처럼 몰려나와 신흥학교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신흥학교 학생들이 하숙하는 집은 모두 수색을 하였다. 당시 나는 기숙사에 있지 않고 산 너머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순경들이 다짜고짜로 달려들어 수색을 하였는데 다행히도 창가채과 역사책은 쌀독에 감추어 두었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가 있었다. 그때 요한대 꼭대기에 안백선 장로의 집이 있었는데 그의 큰아들 안남용이 신흥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경찰들이 이 집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물고기를 잡을 때 사용하는 발이 오죽(烏竹)으로 된 것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전 날 밤 선고개 등지에 꽂았던 태극기의 깃대가 다 오죽이었기 때문에 경찰들이 의심을 하고 당시 신흥학교 재학생인 안남용을 붙잡아 다가 고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여 마침내 신흥학교 기숙사에서 16명의 학생이 모여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허위자백을 하고 말았다. 그 이름 중에 나도 포함되어 있어서 경찰서에 붙잡혀가 모질게 매를 맞았다. 당시 진범은 선교사집에 다니면서 일하던 사람이었는데 그 분이 자수하면서 학생들은 모두 풀려나오게 되었으며, 안남용은 학교 졸업 후 얼마 있다가 사망하였다.


일본 경찰의 신흥학교에 대한 각별한 경계도 신흥학교 학생들의 항일운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30년 1월 광주학생 독립운동에 동조한 신흥학교 학생들은 시가지까지 진출하여 격력한 시위를 함으로써 이 기간에 전주에서 유일하게 시가지에 진훌하여 시위를 벌인 학교가 되었다. (이부분에 대한 서술은 다음 항에서 하기로 한다.) 광주학생 독립운동이 마무리 된 후에도 신흥학교 학생들은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주일학교나 하기학교 등을 통해서 민족정신을 불어넣어 주기도 하고 비밀결사 조직을 통하여 항일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32년 4월 14일자 조선일보에는 신흥학교 학생 7명이 치유법(治維法) 및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예심(豫審)에 회부된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기보(旣報) 전주 신흥학교 2년생 김성배(金聖培)외 육명에 관한 치유법 및 보안법 피의 사건은 그동안 전주 지방법원 검사국 송본(松本) 검사의 손으로 취조 중이던 바 지난 9일에 필경 기소되어 예심에 회부되었다는 바 일반 학부형은 매우 염려하는 중이라 한다.


학생들의 활동내용이 어떤 것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이 없어 확인할 수가 없지만 예심에 회부된 것으로 보아 상당히 시중있는 활동인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 후 몇 일 후인 4월 20일자 조선일보에는 "全北警察部 大活動 學生十餘名 檢擧"란즌 제목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최근 전주에는 사상관계의 검거선풍이 자주 있게 되어 청년 자제를 준 일반 가정에서는 저으기 불안을 느끼게 된 바 요즘 전북 경찰부에서는 또다시 어떠한 단서를 잡았음인지 전주시 고등계의 응원을 얻어 지난 14일 밤에 돌연히 활동을 개시하여 시내 화산정 전주신흥학교의 기숙사를 포위 습격하여 3년생 이모(李某)등 4인을 인치하고, 전주시 황청 고등계 주임과 경찰부 중원 형사부장의 손으로 엄중한 취조를 진행 중인 바 사건은 점차 확대되는 모양으로 18일 아침에는 또다시 모방면에 형사대를 파견하여 십여 명의 학생을 검거하였다 한다. 사건의 내용은 전대 비밀에 붙이므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경찰의 활 동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근거가 있는 모양으로 전기 신흥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한 비밀결사(秘密決社)의 조직이 탄로된 것이라는 말이 유력하다 한다.


위의 기사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신흥학교 학생들은 상당한 규모의 항일 비밀결사 조직을 구성한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와 같이 겉으로 드러나거나 밝혀진 사건이 일제 시대의 신흥학교 학생들이 벌인 항일운동의 전부일 수는 없다. 세월이 흘러 지나간 역사가 묻혀버린 경우가 많았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된 사건으로만 미루어 보아도 신흥학교는 삼일운동 이후에도 꾸준히 항일운동을 전개해 왔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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