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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4-01
 제목  조선총독부 지정 신흥학교 (전주신흥고등학교 90년사 18)
 주제어  
 자료출처  전주신흥고등학교  성경본문  
 내용

목차

 

갑오개혁이후의 신교육   

선교사들의 내한과 기독교학교의 설립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의 내전과 선교 활동의시작

최초의 신흥인 김창국   

시대적 배경

신흥학교의 개교

희현당

일제의 무단정치

초창기의 신흥학교

삼일운동의 배경

전주의 삼일운동

삼일운동과 신흥

일제의 문호정책

기독교의 재흥과 시련

학생수의 증가와 증축

1920년대 신흥학교 개황

인톤교장과 1930년대 초

조선총독부 지정 신흥학교

항일의 몸짓

광주학생운동과 신흥

신사참배 거부와 폐교

종교교육과 신앙생활

 

> 참고자료 :  삼일운동 

 

 

2. 조선총독부 지정 신흥학교
1) 지정학교의 배경
1915년 3월에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개정 사립학교 규칙"에 의하면 모든 사립학교의 경영은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그 설립·유지방법·학교의 교육목적·명칭·학제 등을 임의로 변경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사립학교에 대한 규칙은 기존 사립학교를 통제하고 탄압하기 위한 것이었고, 또 새로운 사립학교의 출현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기독교 학교에 대해서는 교과과정에서 종교교육(성경교수)과 종교의식의 집행(예배)를 금지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아직 인가를 받지 못했던 순천 매산학교는 종교교육 과목을 제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학교 설립인가를 내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문을 닫고 말았다.

총독부는 "개정 사립학교 규칙"을 시행함에 있어서 10년의 유예기간을 설정해 주고, 그 기간 내에 이 규칙대로 순응하든지 아니면 학교 설립허가를 박탈당하든지 양자택일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래서 순천의 매산학교를 제외한 전주, 군산, 목포, 광주에 있는 학교들은 이미 인가를 받았기 때문에 10년간은 무난히 버틸 수가 있었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정치가 실시되고, 교육정책에도 변화가 왔다. 1922년 2월에 발표된 <제2차 조선교육령>은 "內鮮 共通의 정신에 기하여 동일한 제도하에 시설의 완비를 한다"는 명분 아래에서 발표되었다. 이 <제2차 조선교육령>과 관련하여 1923년에 소위 지정학교라는 제도가 발표되었다. 그것은 표현상으로는 사립학교들을 끌어 올려 고등보통학교와 동등한 자격을 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시설이나, 교사진, 교과과정 등을 학무국에서 요구하는 규정에 맞출 수 없는 학교는 자연도태가 될 수밖에 없는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정학교 제도는 선교학교들에게는 하나의 위기로 받아들여졌다.


35)지정학교라는 제도가 생기기 이전에 신흥학교 고등과 출신들이 상급학교에 진학을 할 수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Mission to Korea"(p.23)에서는 지정학교라는 제도가 생기기 이전에는 각 성교학교의 졸업생들이 공무원이 되거나 상급학교 진학을 할 수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기록을 그대로 옮긴 『한국 기독교회사』(호남편)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졸업생들은 상급학교에 진학을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실제로 8회 졸업생 안용남(재학시 이른 안갑용)씨의 경우는 1922년에 신흥학교를 졸업하고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했으며, 10회 졸업생, 유기석씨나 김형민씨도 자기 동기들 중에 전문학교 진학을 한 사람이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 증언에 따른다면 앞의 책들이 잘못 기록된 것이 아닌가 여겨지며, 또한 지정학교 제도가 생기면서 선교부가 심각한 고민을 한 것도 이를 방증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1923년 선교회의 연례회의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심각한 논란이 있었다. 많은 선교사들이 궁여지책으로 내린 결론은 5개 지역의 학교 중 전북지방의 중심지인 전주에 남학교 하나와 전남지역의 중심지인 광주에 여학교 하나를 집중적으로 지원하기로 하였다. 선교회의 이와 같은 결정은 아주 고통스러운 결정이었다. 목포의 정명여학교는 1922년 새 기숙사와 건물을 짓고 선교학교 중에서 가장 크고 좋은 학교의 하나가 되어 있었으며, 군산의 남학교(영명학교) 또한 선교 초창기에 세워진 학교로서 학교가 잘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래를 위해서는 전남북 양 지역의 중심지인 전주와 광주의 두 학교만을 집중적으로 육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전주의 남학교인 신흥학교와 광주의 여학교인 수피아 여학교가 지정학교 승격의 대상학교로 결정되었으며, 이후로는 두 학교에 대해서 집중적인 지원이 시작되었다.

1923년 6월 남장로교 선교회의 결의에 따라 신흥학교 고등과는 총독부로부터 지정학교의 인가를 얻기 위해 준비에 착수했다. 지정학교 승격에서 우선 가장 큰 문제는 많은 경비가 드는 교사의 신축이었다. 그래서 1925년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는 선교사 위인사, 변요한 양씨를 신흥학교의 교사 증축자금 모집위원으로 선정하고 이들로 하여금 미국에 들어가서 건축자금을 모집토록 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그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건축자금이 마련되자 1927년 6월 신흥학교 본관의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이 건물은 1928년 6월 20일에 완공되어 2학기부터 사용되었는데 이 건물의 완성으로 신흥학교는 지정학교 승격을 위한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한 셈이었다.

1929년 신흥학교는 재학생 중 3학년부터는 5년제 졸업장을 수여하기로 하였는데 이는 지금까지의 4년제 졸업을 일반고보와 같은 수준인 5년제로 바꿈으로써 지정학교 승격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1929년 5월 28일 열린 제 23회 전북노회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그 해부터는 학무당국에 지정인가 신청을 제출하기 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라 하였다. 이 노회의 보고내용으로 미루어 본다면 신흥학교가 지정인가를 얻기 위한 구체적인 작업이 본관건물을 새로 지은 후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30년 5월 27일에 열린 제24회 노회에서는 신흥학교의 지정인가를 얻기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 중이라 보고되고 있으며, 1931년 6월 2일에 열린 제25회 전북노회에서는 신흥학교 지정인가를 위한 준비 상황을 특별사건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 남장로회 미꽅회에서 결의된 대로 동교 지정 기성위원회를 본 이사회원으로 조직하고 대표자로 홍종필, 곽진근 양씨를 선출하였사오며,

2. 동교 지정 기성회에 대하여 전라남북도의 교인으로서 조선총독에게 드릴 별지 진정서 를 채용하시고, 각 교회에 명령하여 찬성하신 분을 모집하여 본회 서기인 환산정 232 번지의 곽진근씨에게 보내도록 하여 주시기 바라오며, (별지 진정서에 서명날인하신 분은 후원 회원으로 간주함.)

3. 이 보고를 마친 후 동교 교장인 인톤씨에게 즉시 시간을 허락하시와 동교 지정에 대한 내용을 설명케 하여 주시오며,…


위의 노회 기록에 의하면 이사가 지정인가를 얻기 위한 기성회원이 되었으며, 지정인가를

얻기 위하여 전라남북도의 교인들로 하여금 총독에게 제출하는 진정서에 서명하도록 결정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노력의 결실로 신흥학교 고등과 학생들은 1932년 2월에 지정학교 승격을 위한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이 시험에서 학생들은 무난히 통과되었으나 총독부는 당분간 지정인가가 어렵다는 통지를 보냈왔다. 그러나 이듬해인 1933년 4월 13일부로 신흥학교는 지정학교 인가를 받음으로써 오랜 세월동안의 숙원이 풀리게 되었다. 한편 재학 중인 학생의 경우는 인가 당시 4학년 졸업생까지만 인정해 줌으로 해서 약간 아쉬움이 있었다. 이에 5학년 재학생들 중에는 지정학교 졸업장을 얻기 위하여 한 학년을 유급해서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 상당수가 있었다. 이 해 6월 1일 신흥학교 교정에서 지정학교 승격 축하행사를 거행하였으며, 이로부터 신흥학교의 지정학교 시대가 막을 열게 된다.

3) 지정학교 시절의 신흥
지정학교 시절의 신흥학교는 일제시대 전체를 망라해서 전성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상급학교 진학이나 취직에 있어서 일반 고등보통학교와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정학교 인가를 받기 위해서 시설도 충분히 확보되었고, 또 교사진도 아주 훌륭했다. 이 시기에 불과 3회의 지정 졸업생을 내고 폐교의 비운을 맞고 말았지만 지정 3회의 총 졸업생 수는 94명이나 되어 일제시대 고등과 전체 졸업생 182명의 반이 넘는다. 지정학교 시절의 신흥학교 학생과 교사의 수를 도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구 분 고등과 보통과
교 사 학 생 교 사 학 생
1933 12 199 5 479
1934 11 207 5 334
1935 19 233 7 424
1936 13 304 7 431
1937 13 234 6 293


위의 도표를 보면 1935년에 223명이었던 고등과 학생이 1936년에는 304명으로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학생 정원이 한 학급에 50명 정도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이 숫자는 6학급에 해당하는 숫자이어서 5학년까지 있었던 당시 신흥학교 고등과에 었떤 변화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신제로 1935년 5월 19일에 열린 제 29회 전북노회의 기록에서 신흥고등학교에 대한 보고 내용을 보면 "하급 연장하기로 연장하기로 결의함에 대하여 매년 예산액 천원으로 5년간 계속 증가하여 달라는 청원은 본회에 맡겨 주심을 바라나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신흥학교 고등과는 이미 1학급을 증설할 계획에 따라 1936년에는 2학급의 신입생을 모집한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인 1937년에는 학생총수의 계속적인 증가가 아니라 오히려 304명에서 234명으로 감소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1937년 5월 4일에 개최된 전북노회의 기록에서는 신흥학교의 특별사건으로 "부득이한 형편으로 금년도부터 신입생을 모집하지 아니 하였나이다"라고 보고되어 있다.
1937년도 신입생을 뽑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미국 남장로회 해외 선교부 총무인 폴튼(C. Darby Fulton)목사가 신사참배 문제로 전주에 왔다가 이해 2월말 "현재 상태에 유의하여 학교 사업은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고 발표하였다. 이 풀튼 성명에 따라 선교회가 경영하고 있는 10개의 중등학교는 신입생을 뽑지 않았고, 당국이 재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않는 한 나머지 학생들에 대한 교육은 계속해 나가기로 하였다. 이때부터 신흥학교는 폐교의 순간을 향해 한 발자국씩 내닫고 있는 셈이었다.

지정학교 당시에도 신흥학교 학생들은 기독교 가정에서 온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대개 기독교계 소학교를 마친 학생들이기도 하였다. 이에 대하여 1935년 5월에 열린 제 29회 전북노회의 기록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학교에 대한 규칙〉

1. 신흥학교 입학에 관한 규칙

가. 교인의 자질은 3분의 2를 받고, 불신자의 자질은 3분의 1로 받음.

나. 교회내에서 경영하는 학교에 한하여는 검정시험을 받지 않고, 보통

입학시험만 받음(조선총독 인가 있는 학교에만 한함)

다. 인가 있는 소학교 보통과 졸업생에 한하여 학교 우등생으로 4분의

1은 무시험 입학하게 함.

2. 신흥학교 각 소학교 연락에 대한 규칙

가. 지방 각 소학교 과정은 반드시 신흥학교에서 지정한 과정으로 교수

할 것.


위의 노회록에서 볼 때 신흥학교는 기독교 집안의 자녀들은 중심으로 교육하여 교회의 지도자 양성에 그 목표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비록 학교의 교육목표가 종교지도자 양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 할지라고 당시 신흥학교 학생들의 수준은 아주 우수하였다. (지정 1회 졸업생의 경우 당시 아주 입학하기가 어려웠던 세브란스 의전에 3명이 입학을 했다.) 그것은 지정학교 당시 재학생들 중에서 후에 사회적으로 훌륭한 일을 하거나 좋은 직업에 봉사한 사람이 많다는 것이 그 좋은 증거가 된다. 폐교 당시 5학년에 재학중이었고, 고창고보에서 졸업을 한 이철상씨의 다음과 같은 증언은 당시 신흥학교의 학력 수준이 어떠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고창고보 졸업 후 나는 연희전문 상과에 입학했는데 그것은 순전히 신흥학교를 나온 덕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운동을 많이 했고, 음악에도 관심이 많아서 학교 공부를 등한한 편이었지만 연희전문 상과에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다. 나와 함께 연희전문 상과에 응시한 사람은 임주환과 한강수였는데 임주환과 한강수는 성적이 상위권에 들어 있었지만 나는 운동을 하느라고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경쟁률 3∼4:1 이 되는 연희전문 상과에 셋이 다 합격을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당시 신흥학교 교육이 매우 충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정학교 당시의 졸업생들 중에서 사회의 각계 각층에서 활약한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 현재 우리의 귀에 익은 몇몇 분들의 이름을 들어 보면, 1회 졸업생으로 해방 후 모교에서 오랫동안 교장으로 시무하던 장평화 교장, 전북대학교 총장을 지낸 유영대 총장, 〈사랑의 원자탄〉이란 책을 써서 유명한 안용준 목사 등을 들 수 있고, 2회 졸업생으로는 세계적인 민중 신학자 서남동 교수와 최초의 신흥인 김창국 목사의 아들이며 전북대학교 체육과 교수를 지낸 신학자 김현택 교수를 들 수 있다. 또한 3회 졸업생으로는 산골에서 거창고등학교를 세워 전국적인 명문으로 발전시킨 교육계의 풍운아 전영창 교장과 미군정 시절 관제처 총무국장을 지내고 후에는 모교에서 제자들을 교육한 장병태 선생을 들 수 있다.

지정학교 시절에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사진도 아주 훌륭했다. 당시 신흥학교 교사들은 대부분 학벌이 좋았고, 민족주의 사상을 가진 분들이었다. 민족주의 사상을 가진 교사들은 공립학교를 원하지 않았는데 사립학교, 특히 신흥학교는 선교사들의 그늘 아래서 신변보호가 용이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재학생들의 증언에 따라 몇몇 교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지정학교 시절의 교사들〉


김가전 : 평양신학교 출신의 목사로서 성경을 가르쳤다. 전주에서 삼일운동의 주동자였던 서문밖교회 김인전 목사의 동생으로 항일 정신이 투철하여 전혀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 학생들은 모두 그가 일본말을 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해방 후에 북중학교 교장과 전라북도 도지사를 역임하였다. 김목사는 입학시기가 되면 시골 각 교회의 목사, 장로들로부터 자기 자녀들을 입학시켜 달라고 부탁을 받는데 부탁받은 학생들을 모두 수첩에 기록해 두었다 한다. 그리고 그 숫자만도 두 학급이 될 수 있었다고 하며, 실상은 이들을 조금도 배려해 주지 않았다고 한다. 도지사 재직시절에도 "그분에게 부탁하면 안되는 일도 없고, 되는 일도 없다." 는 말이 유행이었다고 하니 그 성품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박준영 : 남경대학교 동지사대학 신학부를 졸업하였고, 조선어를 가르치다가 일본이 조선어를 못가르치게 하자 영어를 가르쳤다. 그는 고사동 교회에 가서 설교를 맡기도 했는데 당시 신흥학교 학생들에게는 서문밖교회 배은희 목사의 설교와 고사동 교회 박준영 선생의 설교가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색채가 강하였고 후에는 월북했다고 한다.

김교문 : 일제 학무당국의 눈을 피하여 역사수업 시작전에 10분 정도를 이용하여 조선 역사를 가르치기도 했다. 당시 일본의 명문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출신으로 지리와 역사를 가르쳤다. 수업중에 시를 통해서 애국심을 고취시키려고 했고, 한국의 야담을 이야기해 주거나 우리의 전래민요나 동요를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김종흡 : 일본 경도제대 종교철학과를 졸업한 영어선생이었는데 영어뿐만 아니라 세계 명작을 읽어 주기도 하였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분으로 학생들에게 많은 감화를 주었다. 고창고보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 부총장을 지냈다.

이교선 : 입교대학 출신의 영어교사로서 꿋꿋한 성격으로 타협을 모르는 분이었다. 자유당 시절에 상공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김병수 : 고학으로 일본 동경 물리학교를 3년만에 졸업한 수재이다. (당시 동경물리학교는 무시험 입학하여 3년에 수료하면 수재, 4년에 졸업하면 우수하다고 하였으며, 보통 5년에 수료하였느데 이학교 졸업생들은 모두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수학을 가르쳤는데 수업시간과 상관없이 칠판에 글씨가 안보일 때가지 가르쳤으며, 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집으로 불러다가 가르치기도 한 열정파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일본에 가면 다 쓰고 난 치분(齒紛)만 모아가지고 폐품으로 팔면 고학이 가능하가도 말하여 주기도 하여 학생들의 일본 유학에 대한 꿈을 키워 주기도 하였다. 후에는 한양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박우병 : 구한말 군인장교 출신으로 기숙사 사감 겸 체육교사를 맡았다. 그는 다가산이나 학교 뒷산에 올라가 전쟁연습(요즘 교련인 듯)을 할 때 종종 구한말 일본군과 한국군이 싸우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한다.

이또마사(伊등正俊) : 일본인 교사였지만 학생들과 매우 친했으며, 여성다운 성격에 한국인의 처지를 잘 이해하는 분이었다. 폐교 당시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학생들과 헤어졌다고 한다.

이피득 : 연희전문 수물학과(數物學科)출신의 수학교사.

최계남 : 일본 체육대를 졸업한 체육교사, 해방후 안양중 교장을 지냈다.

김태훈 : 수원 고농(高農) 출신의 생물교사


지정학교 시절의 신흥학교는 체육활동이 상당히 활발하여 호남대회를 석권하기도 하였으며, 음악도 매우 뛰어나서 중앙에 올라가 1위에 입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외에도 기독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여러 가지 활동이 많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서술할 기회가 있어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고 다만 당시의 수학여행에 대해서만 살펴봄으로써 당시 학생 생활의 한 단면을 엿보고자 한다. 이 부분에 대한 서술은 1937년에 5학년 학생이었던 이강문 씨와 이철상 씨의 증언을 참고로 하였다.


〈수학여행〉


수학여행은 흔히 졸업여행이라고도 하는 바 학창시절 낭만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1931년의 4학년 학생들의 수학여행은 백양사와 내장사를 거치는 2박3일 여행이었다. 교통이 불편했던 당시로서는 전주를 출발하여 이리로 가서 기차를 타고 사거리에서 내려 걸어서 백양사까지 가야했다. 백양을 거쳐 내장사를 들린 다음 정읍역으로 걸어나와 기차를 타고 이리를 거쳐서 전주로 돌아와야 했으니 요즘 같으면 당일 여행이 가능한 거리를 2박 3일의 일정을 잡았던 것이다.

그 후 지정1회 졸업여행은 경주로 갔는데 가는 도중 대구 계성학교에 들러 그 규모가 마치 대학처럼 큰 것에 놀랐다는 증언을 하는 분도 있다. 이강문 씨(지정4회)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에는 1학년은 부여, 3학년은 경주, 5학년은 외국으로 수학여행을 갔다고 한다. 지정2회 이귀동 씨의 동기생들은 만주 대련으로 졸업여행을 갔다고 한다. 이제 1937년 당시 5학년 학생들(지정4회)의 졸업여행에 대해서 소개해 보기로 한다.

1937년 5월 초 5학년 학생 18명과 김가전 목사, 수원농고 출신인 김태훈 선생을 포함하여 모두 20명이 만주 봉천 하르빈 등지로 졸업여행을 떠났다. 당시 전주고보나 농업학교와 같은 공립학교는 주로 일본으로 졸업여행을 갔으나 신흥학교가 만주로 졸업여행을 간 것은 일본에 가게 되면 신사를 구경하고 참배하는 일을 겸해야 했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러한 배일감정과 별개로 또다른 이유를 들자면 일본은 언제 가도 쉽게 갈 수가 있지만 만주는 가기가 쉽지 않으며, 그곳은 우리 민족의 고향이고, 앞으로 우리가 발전하려면 만주로 뻗어나가야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기차를 타고 봉천역에서 내려 개찰구를 빠져 조금 나오니 거기에는 "이등박문 순난지지(伊藤博文殉難之地)"라는 글자가 유리판 안쪽에 새겨 있었다. 그 곳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권총으로 쏘아 죽인 자리였다. 그 때 선생님은 그곳을 지나가면서 말을 하지 않고 손짓만 해서 학생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도록 하였다. 봉천역에 도착하자 일본인 안내원이 마중을 나왔다. 당시 만주에는 여행자 안내소(tourist bureau)가 있었는데 주로 일본이나 조선에서 여행온 사람들을 안내하는 일을 맡아서 했다. 만주의 각 도시마다 이 여행자 안내소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나온 안내원은 자기가 보이고 싶은 곳만 골라서 보여주었으며, 때에 따라서는 첩보원의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안내원은 학생들을 봉천 시내로 안내하여 탐처럼 큰 비석 앞에 세웠다. 그 큰 비석은 바로 이등박문의 비석이었는데 안내자는 학생들로 하여금 절을 하게 하였다. 몇몇 학생들이 차에서 내리지 않았지만 그는 억지로 내리게 하여 강제로 절을 시키기까지 하였다.


▲봉천의 북릉사진

오른쪽 김가전목사, 왼쪽 김태훈선생

가운데를 일본인 여행 안내원


봉천에서 아침식사를 한 학생들은 마차를 타고 북릉(北陵)으로 향했다. 마차 한 대에 네 명씩 탔는데 그 마차는 두 사람은 앞을 보고 두 사람은 뒤를 보고 앉도록 되어 있었다. 이 날은 마침 화찬한 날씨라 곱게 차려 입고 북릉을 찾아가는 여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우리나라에서 본 중국 여자들은 호떡장사나 하는 더러운 옷을 입은 여인들뿐이었는데 거기에서 본 중국 여인들은 몸에 딱 붙는 비단옷을 입고 있었고, 더구나 옷의 양편에 갈라져 허벅지까지 맨살이 드러나보였다. 처음 이런 장면을 본 학생들은 너무나 희한한 장면에 두 눈이 휘등그래져서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북릉을 구경하고 학생들은 만주에 사는 조선인들의 사는 모습을 보기도 하였으며, 봉천에 있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기도 하였다.

비록 일제 식민통치하라는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었지만 고등학생(당시에는 중학생이라고 불렀다)이 만주에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퍽이나 부러운 상황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러한 여행을 통해서 젊음의 꿈을 키우고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키웠던 선배들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지정학교라는 제도의 배경과 신흥학교 고등과가 지정학교로 승격되어 발전된 면모를 보여 주었던 지정학교 시절의 상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한 마디로 이 지정학교 시기야말로 신흥학교의 최전성기이며, 호남 제일의 사학으로 성장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폐교는 한창 피기 시작한 그 꽃을 한순간에 시들게 하고 말았으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에 폐교가 되지 않고 학교가 계속 지속되었다면 신흥학교의 역사는 훨씬 더 발전된 면모를 보여 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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