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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4-01
 제목  인톤교장과 1930년대 초 (전주신흥고등학교 90년사 17)
 주제어  기독청년회
 자료출처  전주신흥고등학교  성경본문  
 내용

목차

 

갑오개혁이후의 신교육   

선교사들의 내한과 기독교학교의 설립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의 내전과 선교 활동의시작

최초의 신흥인 김창국   

시대적 배경

신흥학교의 개교

희현당

일제의 무단정치

초창기의 신흥학교

삼일운동의 배경

전주의 삼일운동

삼일운동과 신흥

일제의 문호정책

기독교의 재흥과 시련

학생수의 증가와 증축

1920년대 신흥학교 개황

인톤교장과 1930년대 초

조선총독부 지정 신흥학교

항일의 몸짓

광주학생운동과 신흥

신사참배 거부와 폐교

종교교육과 신앙생활

 

> 참고자료 :  삼일운동 

 

 

5) 인톤 교장과 1930년대 초반의 개황(槪況)


1930년 9월 19일 그 동안 교장을 맡았던 에버솔 선교사가 사임하고, 인톤(W.A. Lnton)선교사가 설립자 겸 제 5대 교장으로 취입하여 1937년 폐교될 때까지 시무하였다. 그는 1927년 7월 에버솔 교장이 안식년으로 귀국하자 1년 동안 임시교장을 맡은 적이 있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한국말을 잘 하였으며, 한국에서 출생한 자기의 아들들에게 한국말을 사용하도록 하고 지게를 지워 일을 시키기도 하였다고 한다. 선교사들 중에서 교육면에서는 인톤교장을 능가할만한 사람이 없었으며, 그는 지정학교의 승격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0년대 초 신흥학교의 실정에 대해서는 인톤교장이 1931년 10월 "The Presbyterian Survey"라는 책에 기고한 "한국 전주에 있는 남학생을 위한 중심학교의 간단한 역사"라는 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 그 중 일부를 발췌하여 옮겨 적는다.

…(전략)…지금의 학교 상황은 선교회가 희망했던 대로 각 선교 지부마다 남녀 한 개씩의 고등학교의 운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1923년부터 비롯된다. 방금 나는 그 변화가 1924년에 시작되었다고 말했으나 실제로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고, 모든 교육제도를 변화시켰으며, 고등학교 과정의 학교에 대한 기준을 너무 높게 올린 1920년에 시작되었다. 그 때문에 선교회가 각 지부의 남녀 학교들을 발전시키는 데 13년 동안이나 노력해 왔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각 지부마다 남녀 한 학교씩의 꿈을 포기하기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선교회는 마침내 선교회 안에 중심적인 남녀 고등학교 하나씩을 갖기로 결정하고 전주에는 남학교, 그리고 광주에는 여학교를 두기로 하였다. 그리고 다른 선교 지부에는 보통학교와 경우에 따라 2년 정도의 고등과정을 두기로 하고 그 곳의 자녀들을 중심학교(centeral school)에 보내도록 하였다.

학교를 총독부의 기준까지 끌어올려 정부의 인가(공식적인 칭호로 지정학교)를 얻자는 것이 1923년에 결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학교 시설이 부족하고 운영비가 너무 적다는 어려움과 싸워야만 했다. 우리는 아직 정부의 인가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학교를 졸업한 소년들은 심지어 전문대학 입학시험을 치를 자격조차 없다. 그들은 우리 선교회가 지원하고 있는 연합기관에도 들어갈수가 없다. 지금 우리 선교회가 해야 할 일은 이 학교를 총독부가 정한 기준까지 끌어 올려 인가를 받아서 우리의 학생들이 교육을 계속 받고, 그들에게 기대되는 교회 안에서의 지도자가 되기 하기 위하여 자금을 마련하는 일이다.


** 교직원(Teaching Staff) **


우리 고등학교에는 여덟 명의 정규 교사와 성경을 가르치는 목사가 1명 있다. 이들은 모두 맡은 일을 사랑하고, 학교와 교회의 복지에 관심이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는 데 진정으로 관심을 가진 훌륭한 크리스찬들이다. 그들은 학교업무 외에도 교회에서 활동적인 일을 맡는다. 우리 학교에는 이러한 교사만을 선발하는 것이 우리의 정책이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원리를 믿어야 하고, 세례를 받은 교인이어야 하며, 비록 우리 학교에 근무한다고 하더라도 교회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활동해야 한다. 현재 재직 중인 모든 교사가 이 자격요건에 합당하며, 동시에 총독부로부터도 완전한 교사로 인정을 받는다. 이러한 교사를 확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의 교사들이 가능한 한 오랫 동안 함께 있어 주길 바라고 있다.


** 학생부(Student Body) **


금년에는 사상 최대의 숫자인 250명의 학생이 우리 고등학교에 등록을 했다. 우리 학생들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목사와 장로의 아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이 소년들은 학교의 정신을 결정한다.… 우리 학교에는 매우 활동적인 기독청년회(Y.M.C.A.)가 있다. 모든 학생들은 이 기독청년회의 회원이며, 그들은 많은 활동을 한다. 그들은 수많은 일요일 오후의 주일학교, 여름성경학교 그리고 다른 사업들을 지도한다. 크리스마스 때에는 학생들에게 헌금을 걷어서 요즈음 도회에서 볼 수 있는 많은 거지들 중의 몇몇을 불러들여 약간의 쌀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그들은 상당히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었다. 그 중에는 등에 아이를 업고 있는 부인들도 있었다.

어려운 시대로 인하여 우리들은 많은 훌륭한 학생들을 잃고 있다. 한 소년이 기숙사에 머무르고 학교에 출석하는 데 한달에 5달려가 조금 넘게 든다. 그러나 시골에 사는 우수한 학생들의 대다수는 집으로부터 그만한 돈을 얻어 올 수 없었다. 우리는 1학년에 재학 중인 총명한 한 학생의 아버지로부터 슬픈 편지를 받았다. 그 학생은 그의 훌륭한 장학금으로 인하여 정규 공납금이 면제됨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는 다음 학기에는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없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 학생이 학교를 계속하는 데 충분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34) The Presbyterian Survey, October, 1931, The Presbyterian Church, U. S. p. p. 611∼612.


윗글의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1931년 현재 신흥학교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점이 지정학교 승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지정학교 승격을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함을 본국에 알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당시 교사들은 학교와 교회에서 아울러 봉사하는 철저한 크리스챤들이었다. 총독부에서도 그들을 완전한 교사로 인정한 것을 보면 이때에는 모든 교사가 완전한 자격 요건을 갖춘 사람을 채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20년대 초기와 중반을 넘어 설 때까지 갑작스러운 학생수의 증가와 함께 자격을 갖춘 교사의 확보가 어려운 상태에서 여름방학 때마다 교사들의 강습을 노회가 주관해서 실시하던 것이 1920년 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교사들의 강습이 사라진 것을 보면 점차로 유자격교사로 대체된 것 같다. 더구나 신흥학교는 지정학교의 인가를 얻으려고 했던 만큼 유능한 교사를 많이 확보했던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당시 재학생들의 증언에 의하면 1920년 후반부터 30년대에 들어서면 교사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거나 국내에서 전문대학교를 마친 유능한 선교사들이었다고 한다.

학생들의 활동은 전교생이 회원이 된 기독청년회가 주가 되었고, 기독청년회에서는 주일학교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많은 봉사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기독청년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으로 미룸) 여기서 또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은 당시 신흥학교 학생들은 시골출신으로 가정 형편이 어려우면서 우수한 두뇌를 가진 학생들이 많다는 점이다. 전주고보에 다니는 학생들이 대개 부유한 집이나 관리의 자제들이었는데 비하면 신흥학교 학생들도 대부분 시골에서 가정이 어려운 학생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학교에 입학하였다. 따라서 이런 학생들에게 공부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학교에서는 여러 가지 형태의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1930년 신흥학교는 고등과 졸업생 6명을 배출하였고, 31년에는 졸업생이 없다. 1929년 5월 28일에 열린 제 23회 전북노회에 보고된 신흥학교의 경영에 대한 보고서에 "1. 현재 3년생부터는 5년제 졸업을 수여하기로 하오며, 2. 금년도부터는 학무당국에 지정인가 신청을 제출코져 제반준비를 하오며"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지정학교 인가를 앞두고 지정학교 체제에 맞추기 위하여 학제를 5년제로 늘렸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929년 당시 3학년 학생부터는 1년을 더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1931년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하고, 그 학생들이 1932년 봄에 5학년 졸업을 하게된 것이다. 1932년 봄에 졸업한 학생은 3명이고, 이듬해인 1933에는 5명이 졸업하였으며, 1934년에는 졸업생이 없고 1935년부터 지정학교의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지정학교 인가를 받기 직전인 1933년 3월 『신흥학보』창간호가 발행되었으나 현재까지 전하지 않음을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 후 신흥학교는 1933년 4월 지정학교 인가를 받음으로써 지정학교 시대의 새장을 열고 보다 성숙한 면모를 보여 주기 시작했다. 3·1운동 이후부터 지정학교 인가를 받기까지의 14년간의 신흥학교는 여러 가지 난관이 있었지만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한 중흥의 시기였다. 먼저 학생수가 증가하였고, 본관 건물이 새로 지어졌으며 실업교육과 학자금 보조를 위한 공업과의 설치 등이 두드러진 특징으로 언급될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삼일운동 이후 급격히 향상된 교육열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총독부로부터 지정학교 인가를 얻어내기 위한 준비과정에서 학교가 내적, 외적으로 충실해졌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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