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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4-01
 제목  일제의 문호정책 (전주신흥고등학교 90년사 13)
 주제어  
 자료출처  전주신흥고등학교  성경본문  
 내용

목차

 

갑오개혁이후의 신교육   

선교사들의 내한과 기독교학교의 설립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의 내전과 선교 활동의시작

최초의 신흥인 김창국   

시대적 배경

신흥학교의 개교

희현당

일제의 무단정치

초창기의 신흥학교

삼일운동의 배경

전주의 삼일운동

삼일운동과 신흥

일제의 문호정책

기독교의 재흥과 시련

학생수의 증가와 증축

1920년대 신흥학교 개황

인톤교장과 1930년대 초

조선총독부 지정 신흥학교

항일의 몸짓

광주학생운동과 신흥

신사참배 거부와 폐교

종교교육과 신앙생활

 

> 참고자료 :  삼일운동 

 

 

제2장 발전기(1920∼1937)


1. 중흥(中興)하는 신흥

1) 일제의 문화정치와 교육정책의 변화

삼일 운동 이후부터 만주사변이 일어난 1937년까지의 일제의 식민통치 기간을 소위 문화정치 시기라 할 수 있다. 3·1운동을 계기로 일제는 무단적 식민통치가 한국민족의 거센 민족주의적 저항을 받게 됨을 깨닫고, 이때부터 문화정치라는 회유정책을 쓰게 된다. 헌병·경찰의 협박과 공포 분위기 속에서의 한민족 억압방식도 한계점에 도달한 것을 알아차린 일제는 융화정책을 통해 문화면에서부터 어느 정도 숨통을 터주는 체하였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8월 일본 천황은 조서를 내려 한민족을 회유하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한국인도 일본인과 동일한 처우를 해줄 듯이 속였으며, 은근히 한국에 자치부여(自治賦與)의 여론을 환기시켜 민족운동의 분열을 획책하고, 그 중 자치운동세력을 점차로 매수하여 친일파로 만들어 갔다. 언론이나 집회에 대한 억압도 일시적으로 완화하여 민족언론을 통해 민심을 통일시켜 간접적으로는 한국인을 이용하여 한국을 통치한다는 식민지 정책의 고등술책을 강구하였다. 또한 헌병경찰제도를 없애고,(실제로는 헌병과 그 보조원들이 군복을 평복으로 갈아 입은 데 불과하지만)관공립 보통학교 교원이 칼을 차고 견장(肩章)과 금줄이 든 제복을 입었던 종래의 복제를 고쳤으며, 도평의회(道評議會)를 만드는(1920)등 회유책을 사용하였다.

일제가 한국민에게 자치를 부여한다는 구상은 영국 식민지주의의 모형을 따서 인도나 아일랜드와 같은 자치방식을 한국에서도 실시해 줄 듯이 함정을 파놓고 그 함정에 빠진 민족 운동자중 자치주의자들을 친일파로 만들고자 한 것이었다. 그 결과 민족독립운동은 타협과 비타협의 두 계열로 분열되고, 자치주의자들은 일제의 식민정책에 말려들어 타협적 민족자치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0년대 말에 이르러 민족운동 세력이 분열됨으로써 일제의 본격적인 식민지 정책은 그들 나름대로의 기준에 의하면 어느 정도 성공되어 가는 듯하였다.

3·1운동 이전의 일제 식민지 정책이 군국주의적 탄압을 위주로 한 정책부재의 것이었다면, 1920년대의 정책은 보다 세련되고, 보다 기만성이 풍부한 고등식민지 정책이었다. 즉 교묘히 한민족의 역사를 말살시키고, 일본어 교육을 강화하였으며, 일본문화와 그들의 생활양식을 유입시킴으로 해서 한국문화를 파괴하는 등 민족의식을 말살하려는 정책을 썼다. 그러나 한국민족에 대한 기만적인 회유책 또는 민족의식 말살책은 또다시 한민족의 조직적인 저항을 받게 된다. 1919년 기점으로 하여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그후 임시정부에 의한 1941년의 대일 선전포고에 이르는 사이에 수많은 대일항쟁이 국내외에서 계속되었다. 국내에서의 대일항거 중 학생의 항일운동은 이 시기의 교육의 역사와 관련하여 특기할 만하다. 이 시기의 교육의 역사는 일제 교육침략의 측면과 학생 항일운동 측면의 양면에서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일제의 소위 문화정치는 교육에도 융화정책을 반영시켜 교육제도에 대수정을 가하였다. 식민통치 초기에 "시세와 민도에 맞는" 교육을 한다는 구실 아래 피사역인(被使役人)을 만들기에 적당한 종래의 저급한 학교체계를 일본의 그것과 비등한 제도로 개정했다. 한편 기독교계 사립학교에 대한 종래의 탄압도 약간 완화하여 성경의 교수도 허용했다. 그러나 그와같은 그들의 교육정책은 한국인의 격화된 반일감정을 무마하려는 유화정책에 불과할 뿐 밑바탕에 깔린 동화주의(同化主義)와 교육적 차별은 여전하였다.

3·1운동 발발의 주된 원인이 조선의 독립에 대한 욕구라고 판단한 일제는 조선인이라는 관념을 버리고 일본인이라는 관념을 갖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일시동인(一視同仁),내선공학(內鮮共學),내선일체(內鮮一體),일선융화(日鮮融和),내지준거주의(內地準據主義),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 등의 논리를 내세워 동화주의 교육을 더욱 본격화해 갔다. 이러한 동화주의 교육은 1922년 2월에 "內鮮共通의 정신에 基하여 동일한 제도하에 시설의 완비를 期한다"는 이름 아래 발표된 <제2차 조선교육령>에 의하여 구체화되었다.

모두 32개 조로 된 <제2차 교육령>의 특징은 첫째로, 일본과 동일한 학제를 채택한 점(학교종류 및 수업년한 등), 둘째로 소위 내선공학(內鮮共學)을 정한 점(고등교육 기관에서),셋째로 형식상 소위 일시동인(一視同仁)을 내세운 점이다. 그러나 사실은 국어(일본어)를 상용하는 자(일본인)와 국어를 상용하지 않는 자(한국인)라는 기준을 엄격히 정해서 민족적 차별교육을 실시하여 한국인 청소년과 일본인 청소년 사이에 민족적 차별관념을 싹트게 하는 한편, 그들이 말하는 "국어를 상용하지 않는 자"인 한국인 학교에서는 더욱 일본화의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24)


24) 韓國敎育史 硏究會編, 前揭書, 292∼302 쪽


한국인을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교육정책은 공립학교에서 먼저 실시되었으며, 나중에는 사립학교에까지 압력이 가해졌다. 명분상으로는 유자격 교사를 채용하도록 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인 교사를 채용함으로써 동화교육에 박차를 가하기 위함이었다. 1926년 4월 22일자 조선일보에서는 "各私立 高等普通學校에 日本人 敎員採用을 필경 노골적으로 命令"이라는 제하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있다.


종래 조선총독부 학무 당국에서는 각 사립학교에 대하여 유자격 교원을 채용하라는 구실로써 은근히 실질에 있어서 일본인 교원을 많이 채용하게 되도록 방침을 취하여 오더니 지난 3월 16일 이르러 경기도 내무 부장은 도내 각 사립 중등학교장에게 대하여,


一, 修身, 國語, 歷史 及 地理科 담임교원은 可及 當該 科目에 就하여 자격이 有한 <內地人>을 채용할사, 라는 통첩을 발하여 노골적으로 일본인 교원을 채용할 것을 지시하였으므로 학교 당국자간에 불안을 느끼게 됨은 물론이요, 일방에 있어서 조선인은 종차로 고등사범교육을 받더라도 그의 취직조차 용이치 못하리라는 염려까지 있는데 우선 금년 3월 중에 일본 각지의 고등사범을 마친 이 중에서도 아직 취직하지 못한 사람이 십여 명이나 있다더라.


이에 대하여 역시 같은 날짜의 신문에 "資格만 있으면 조선사람도 상관없는 일"이라는 제목으로 총독부 시학관(視學官)은 다음과 같이 해명하고 있다.


종래 사립 중등학교 교원에 대하여 아무쪼록 유자격자를 채용하도록 권고하였을뿐 아니라 법령에도 교원의 삼분의 이 이상은 반드시 유자격을 채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지에 있어서 보면 인수(人數)는 설령 삼분의 이 이상이 된다 하더라도 담임시간수는 그렇지 못하여 이것은 법령의 정신에 위반됨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없지 아니한데 그 중에도 일어, 수신, 지리, 역사와 같은 과목은 특별히 중요한 과목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유자격자를 채용하도록 통첩을 발한 것이요, 특히 일본 사람을 채용하라고 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비록 일본 사람이라도 무자격자이면 될 수 없는 일이요. 조선 사람으로도 자격만 있으면 당연히 채용할 것이다. 만약 일본 사람이 아니면 채용할 수 없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하면 그는 도청 당국자이니 혹은 학교 당국자의 오해로 그러함이 아닌가 하다.


위의 두 신문 기사를 보면 당시 총독부 학무 당국에서는 유자격 교사를 채용한다는 명분하에 일인교사의 채용을 강요한 것을 알 수 있으며, 특히 그 과목에 있어서 수신(修身), 일어, 지리, 역사와 같은 우리나라 국민들을 일본인에 동화시키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과목에서 일인교사를 채용하고자 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표현상으로는 조선 사람도 자격만 있으면 누구나 채용이 가능하다는 해명을 하고 있지만 이는 내용상으로는 일본인 교사를 채용하기 위한 것이며, 당시 일제가 동화교육을 위하여 지능적인 술책을 사용하고 있는 한 예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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