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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4-01
 제목  삼일운동의 배경 (전주신흥고등학교 90년사 10)
 주제어  3.1운동
 자료출처  전주신흥고등학교  성경본문  
 내용

목차

 

갑오개혁이후의 신교육   

선교사들의 내한과 기독교학교의 설립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의 내전과 선교 활동의시작

최초의 신흥인 김창국   

시대적 배경

신흥학교의 개교

희현당

일제의 무단정치

초창기의 신흥학교

삼일운동의 배경

전주의 삼일운동

삼일운동과 신흥

일제의 문호정책

기독교의 재흥과 시련

학생수의 증가와 증축

1920년대 신흥학교 개황

인톤교장과 1930년대 초

조선총독부 지정 신흥학교

항일의 몸짓

광주학생운동과 신흥

신사참배 거부와 폐교

종교교육과 신앙생활

 

> 참고자료 :  삼일운동 

 

 

4. 삼일 운동과 신흥학교

1) 삼일 운동의 배경


일본은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에 대한 철저하고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다. 의병에 대한 토벌은 초토작전으로 감행되어 1970년 하반기에서 1908년 말까지 1년 6개월 사이에 전국에서 불태운 가옥이 6천 6백여 호나 되었으며, 이와 같은 탄압으로 국내에서의 의병활동은 급격히 감소되었다. 한편 그들은 애국계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소위 105인 사건 등을 날조하면서 무단통치를 강행하였다. 그러나 합방 후 불과 10년만에 주로 애국계몽운동 계열의 부르주아적 사회계층이 주동이 되고, 여기에 각계각층이 호응한 3·1운동이 일어났으며, 이에 자극 받아 민주에서는 무장 독립운동이 활발해졌다.

3·1운동은 흔히 1차대전 종결과 함께 미국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에 자극되어 동경 유학생들의 2·8선언이 먼저 나오고, 뒤이어 서울에서 종교계를 중심한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을 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민족자결주의는 주로 유럽에서의 패전국의 식민지 문제에 적용시키기 위한 원칙이었을 뿐 뒤늦게 참전하여 전승국에 끼인 일본의 식민지 조선민족의 독립문제에 도움을 줄 만한 것은 아니었다. 민족대표들에 의해 하나의 기호로 이용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3·1운동 본래의 원인과 추진력은 역시 합방 이전부터의 민족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그리고 합방 후 10년간의 민족의식의 변화·성장과 사회경제적 여건의 변화에서 구해져야 할 것이다.

합방 후 의병전쟁의 잔여 병력과 애국계몽운동계의 독립 전쟁론자들이 만주지방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펼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를 눈치 조선총독부는 이들을 탄압하기 위해 소위 안악(安岳)사건, 105인 사건을 만들고, 그 결과 민족운동 대열이 상당한 타격을 받기는 했지만 이 후에도 비밀결사를 통해 기회를 기다리다가 1차대전 종결 후의 민족자결주의 선포를 이용하게 된 것이다.

애국계몽운동계의 국내 세력이 기회를 포착하여 독립을 선언하자 그것이 일시에 전민족적인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일본의 식민통치 10년이 전체 조선민족의 생존에 그만큼 심각한 위협을 주었기 때문이다. 우선 민족자본가 계급에게 있어서도 일본의 식민통치가 준 타격은 큰 것이었다. 문호개방 이후 일부 선진적 민족자본가 층이 형성되어 갔으나 합방 이전에 이미 보호국 체제가 단행한 "화폐정리사업"으로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은 데다가 합방 후 민족 자본의 성장을 억제할 목적으로 실시된 회사령(會社令, 1910)에 의해 다시 큰 타격을 입었다. 이 때문에 1910년대에 있어서의 민족자본의 성장도는 지극히 낮아서 3·1운동이 발달한 1919년 당시 기업에 투자된 민족별 자본액 비율을 보면 조선인 기업이 11.7%에 불과한 데 반해 일본인 기업은 78.4%나 되었고, 나머지 8.9%가 두 민족의 합동기업이었다. 아직 예속되지 않은 민족자본가들이 식민지적 경제구조의 정착화에 따라 그 진로를 봉쇄당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농민들의 경우는 사정이 더욱 절박했다. 조선왕조 후기 이래 점진적으로 발달해오던 농민적 토지 소유가 1918년에 끝난 토지조사사업의 강행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상층농민은 자생적 자본주의화 담당층으로서의 성장이 철저히 봉쇄되고 오히려 소작농으로 전락하기 시작했고, 소작농민층의 소작조건 역시 악화 일로에 있었다.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조선총독부 자체가 거대한 지주로 변하고, 일본인 지주가 증가하는 반면 조선농민의 소작인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1914년에 전체 농가호수의 1.8%이던 지주가 3·1운동 전 해인 1918년에는 일본인 지주를 포함하여 3.4%로 각각 줄어들었고, 소작농은 35.1%에서 37.7%로 증가했다. 극히 일부의 지주층을 제외하고는 조선농민 전체가 식민통치 10년의 피해를 깊이 입고 있었던 것이다.

1910년대에는 일본의 재벌자본이 아직 본격적으로 진출하지 않았고, 그 대신 소규모의 공장과 매뉴팩처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그 때문에 노동자의수는 점점 증가하면서도 그 노동조건은 극도로 나쁜 상태에 있었다. 특히 임금수준에 있어서 조선인 노동자와 일본인 노동자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다. 1913년의 통계를 예로 들면 서울에서의 토목 노동자의 경우 조선인의 하루 품삯이 40전이었던 데 비해 일본인은 80전이었고, 부두 노동자의 경우 일본인은 120전인 데 조선인은 43전이었으며, 서울 철도공장 노동자의 경우 일본인의 월급은 31원 59전이었고, 조선인은 12월 44전이어서 조선인의 임금은 일본인의 2분의 1내지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낮은 임금과 긴 노동시간, 비인간적인 대우, 민족적 차별 때문에 1910년대에도 이미 노동파업이 자주 일어나고 있었다. 1916년 파업건수 8건, 참가인원 458명 중 조선인 참가자가 362명으로 79%이던 것이 1919년에는 파업건수 84건, 참가인원 9,011명 가운데 조선인이 8,283으로 그 비율이 92%로 증가했던 것이다.

10년간의 식민통치 기간에 자본가, 농민, 노동자 등 사회구성원 각계 각층이 식민통치의 피해를 직접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입음으로 해서 그들의 정치적 인식과 사회의식이 급격히 높아져 갔고, 여기에 기회를 포착한 일부 종교인, 지식인들이 불을 지르자 항일 민족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적, 전민족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어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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