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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4-01
 제목  초창기의 신흥학교 (전주신흥고등학교 90년사 9)
 주제어  
 자료출처  전주신흥고등학교  성경본문  
 내용

목차

 

갑오개혁이후의 신교육   

선교사들의 내한과 기독교학교의 설립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의 내전과 선교 활동의시작

최초의 신흥인 김창국   

시대적 배경

신흥학교의 개교

희현당

일제의 무단정치

초창기의 신흥학교

삼일운동의 배경

전주의 삼일운동

삼일운동과 신흥

일제의 문호정책

기독교의 재흥과 시련

학생수의 증가와 증축

1920년대 신흥학교 개황

인톤교장과 1930년대 초

조선총독부 지정 신흥학교

항일의 몸짓

광주학생운동과 신흥

신사참배 거부와 폐교

종교교육과 신앙생활

 

> 참고자료 :  삼일운동 

 

3) 초창기의 신흥학교


1910년 신흥학교 새 건물에서 14명의 보통과 2회 졸업생들이 졸업식을 거행하였으며 이들은 모두 상급학교에 진학하였다.

1911년 그 동안 학교를 키우는 데 많은 공을 세웠던 니스벳 교장이 목포선교사로 이동하게 되자 레이놀드 선교사가 니스벳 교장으로부터 모든 책임을 인수받아 3대 교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이 시기에 학교는 약간 침체기에 접어들지만 1913년 레이놀드 교장 후임으로 에버솔(F.M.Eversole:여부솔) 선교사가 4대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다시 회복시기에 접어든다. 그러는 가운데 1912년 3월 25일에 4년제 고등과의 첫 졸업생 4명이 배출되었다. 이어서 1913년에 제2회 졸업생 8명을, 1914년에는 3회 졸업생 5명을, 1915년에는 4회 졸업생 4명을 배출하였다. 그리고 이후 2년간은 3·1운동으로 인하여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하였다. 졸업생의 숫자면에서 보통과도 고등과와 크게 다를 바 없다. 1915년의 등록학생이 113명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재학생의 수에 비해서 졸업생의 수가 현저하게 적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경제적인 이유로 해서 많은 학생들이 중도에 학업을 포기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1910년 대의 신흥학교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리고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줄 생존한 분이 없기 때문에 1910년대의 신흥학교 역사를 기록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다음의 몇 가지 기록들은 비록 단편적이기는 하나 당시 신흥학교의 실정을 잘 말해준다고 하겠다. 1915년 10월의 선교보고서에서 에버솔 교장은 전주의 남학교(신흥학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15년 3월 24일까지 79명의 소년이 등록했다. 이중에서 29명은 교회의 구성원이었으며, 10명은 불신자, 30명은 신자로 분류되었는데 그들 중의 대부분이 기독교 가정의 아들이었다. 교사들도 추가로 확보되었으며, 교육 평의회에서 작성하여 문교부의 승인을 받은 교과과정에 맞게 교과과정도 개편하였다. 올해의 졸업생은 4명인데 그들 중 3명이 상급학교에 진학하였다.

비록 선교학교의 주목적이 장래 교회의 중추가 될 소년들을 훈련시키는 것이라 할지라도 학교에 배울 학생이 없다면 그 목적은 아무런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 교육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그러한 주목적을 실행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이 규칙적으로 이용되어 왔고,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것은 그러한 방법들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해서 학교에 출석하는 학생수는 기준보다 훨씬 떨어졌다. 그러나 결손에 대한 구제책을 찾는 데 있어 가장 어려움은 가난한 기독교 가정의 학생들에게 그들이 필요한 정도까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도움을 받는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도울 것인가. 어떻게 적은 돈으로 많은 도움을 줄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에 어느 정도의 진전이 이루어졌음을 다음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즉 그전보다 2배의 학생들이 균등하게 학비보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914년 1월 1일에 79불의 적자를 낸 데 비하여, 1914년∼1915년의 기간 동안에는 1.75불의 순 이익을 남긴 것으로 정산되었다. 학생들은 학비보조를 받으려면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학생들은 학비보조를 받지 않는다. 이렇게 된 이유는 그러한 도움을 받으려면 많은 시간의 노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초급반의 수업료는 50시간 일한 대가와 맞먹는 것이다.

아주 좋은 감자밭, 딸기밭, 마늘밭, 그리고 고추밭은 수백의 미국인들을 열광시켜 관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고추는 미국인에게 소금과 마찬가지다. 학생들은 씨뿌리기를 마치고, 그것들을 시장에 내기 위하여 돌보고 있다. 지난 여름과 가을에는 충분한 양이 재배되어서 소금, 생강 따위의 김치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와 양배추를 사기 위해 내다 판 것을 제외하고도 기숙사 식탁에 금년 3월말까지 채소를 공급할 수 있었다.

한국의 양반들이 육체노동과 육체노동자를 경멸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나는 작물재배나 재배된 작물을 가려내는 일, 또는 도로공사 등에 참여했던 소년들의 훌륭한 정신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위의 에버솔 교장의 말을 보면, 1915년 당시 신흥학교에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 방법의 하나로 채소재배를 하였으며, 그것을 통해서 노동의 신성함을 깨우쳐 주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918년 10월의 윈(S.Dwight Winn)선교사의 "전주학교의 운동회날" 이라는 제목의 보고에 의하면 신흥학교에서 아주 신나는 운동회가 열렸음을 알 수 있다.


한국 전주의 남학교는 등록한 학생이 100명에 이른 번영의 해를 맞이하였다. 자조부(self-help department)에 속한 학생들에게 고용과 농업기술 교육을 이르러 제공하는 학교 농장은 성공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가 미국으로 가기 위해 전주를 떠날 때는 Mr. Hoover를 기쁘게 할 수확, 즉 보리·밀 등이 추수를 기다리고 있는 때였다.

우리의 중앙학교 외에도 전주지역의 산과 논 사이에는 많은 시골학교들이 산재해 있다. 그 학교들은 지역 시골교회가 그들의 자녀들에게 기초교육을 시키기 위한 필요에 따라 만들어졌으며, 선교학교의 지부(支部)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전주 선교부에 있는 남학교의 성실하고 유능한 교장 에버솔은 전주지방의 모든 시골학교를 책임지고 있다. 그는 전주에서 임무가 허락하는 한 먼 거리에 있는 시골학교를 자주 방문하며, 졸업식에는 꼭 참석하도록 노력한다. 금년에 운동회를 개최하기 위하여 모든 시골학교들을 중앙학교(신흥학교)에 초대한 것은 그의 뛰어난 발상(發想)이었다. 그의 초대는 교사와 학생들, 후원자들 그리고 동료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어느 화창한 여름날 신흥학교 없었던 광경일 뿐만 아니라 한국 교육사상 유일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운동경기가 벌어졌다. 모든 사람들은 훌륭한 정신으로 경기에 임했으며, 선수들의 모든 노력은 경기장 주변에 서 있거나, 계단이나 주변의 언덕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수 많은 관중들로부터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날은 시골에서 방문한 사람들에게는 위대한 날이었으며, 또한 그 행사의 주인임을 입증해주는 뺏지를 자랑스럽게 차는 있는 이 학교의 학생들에도 마찬가지로 위대한 날이었다.


위의 글에 의하면 당시 신흥학교는 학교농장을 경영함으로써 어려운 학생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 또한 농업기술을 가르쳤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흥학교는 전주지방 기독교 학교의 중심이 되었으며, 1918년 여름 신흥학교 운동장에서 전주지역의 각 시골학교가 모두 모여 열광적인 운동회를 벌였음을 알 수 있다.

선교사들의 보고문과는 달리 새로운 시각에서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글은 1회 졸업생 송 철(재학당시 송휘규)씨의 회고록이다. 다음 글은 회고록의 일부를 요약한 것이다.

이른 봄 나는 새로 돋아나는 생명의 훈풍 속에서 청운의 뜻을 수만 리 창공의 그 높은 의지 속에 다져가면서 전주의 1백 50리 길을 걸어서 도착하였다. 나는 성적증명서, 학교장 추천서, 교회 추천서를 신흥학교 교장이며, 미국 선교사인 유서백(Nisbet) 목사님께 제출하여 입학이 허락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식생활 문제와 공부로 인한 여러 가지 잡비 즉 용돈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큰 과제로 남아있었다. 나는 신흥학교의 유교장에게 고학을 위해서 학교청소, 나무심기, 학교 운동장 닦는 일을 하겠다고 제안하였다. 유 교장은 나의 딱한 사정을 선뜻 들어주어 이 고난의 고학길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신흥학교 시절에 나는 공부와 일밖에 몰랐다. 학교에 일이 없을 때는 선교사들의 집을 찾아가서 장작용 나무를 톱으로 썰고 도끼질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 이 때 학교 운동장을 닦는 일은 시간당 15전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장작을 패는일은 이목사(이눌서 : Reynolds) 집에서 제일 많이 하였는데 그 분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는 전주 이가요." 하면서 미국인 특유의 발음으로 자기소개를 하여 곧잘 웃기곤 하였다.

나는 신흥학교에서 문과 분야보다 이공 분야에 특별히 관심이 있어서 장차 이공계통을 택할 것을 작정하였다. 단 한 과목만 빼놓고는 모두 신문화의 물결과 함께 들어온 과목이라서 모두 신기하고 좋았다. 그 한 과목이란 바로 일본어 시간이었다. 이 시간이야말로 비위에 거슬려 울화가 복받혀 견딜 수 없었다. 국권이 일본에 넘어간 이 마당에 일본어를 가르치지 않으면 학교에 존폐에 관계가 있으므로 학교 당국에서는 일본어를 가르쳐야 했다. 나라가 없어진 뒤의 국어시간은 나도 모르게 감격되어 가르치는 김진상 선생님이 더없이 존경스럽게 보였다. 여기에 버금되는 우리나라 역사 시간은 나에게 민족의식과 민족의 자부심을 골수 깊이 심어 주었다. 민족이 반만년의 찬란한 역사를 갖고 있고, 우리말과 우리글이 엄연히 있는데 국권이 없다는 것은 하늘에 일월이 없다는 것과 같고, 땅에 생명이 없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우리의 정신 골수 속에 대한인이라는 지울 수 없는 적백혈이 자자손손 이어지고 있는 이상 우리말은 대한의 어버이들이, 우리글은 그 후손들이 지켜 나갈 것을 나는 확신했다. 민족은 영원한 것이고, 정치는 일시적인 것이라고 할 때 어쩌다가 우리의 국권이 일본에게 유린당하였다하더라도 우리 민족은 타고난 항쟁의 혈투로 국권을 회복할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일시적인 국제정세의 변화와 더불어 우리 민족의 항쟁으로 국권이 회복되었을 때 조국의 근대화의 지름길인 전기공학을 공부하여 조국에 이바지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어린 그 때였지만 부국강병하여 다시는 일본과 같은 나라에게 짓밟히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서구 제국과 같이 근대화하여 나라를 튼튼히 하는 데 있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아프리카, 아시아 할 것 없이 후진국가에 속해 있는 나라들은 모두 서구의 근대화된 열국에 의해서 식민지로 전락되거나 점령되고 있다는 것을 그 당시 나는 목도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매년 강우량이 풍부하기 때문에 이것을 이용하여 수력발전이 개발되어야만 나라의 살림살이가 부유해지리라는 것이 그 때의 내 소신이었다. 그러니 자연과학 계통의 수업시간이 나에겐 더없이 즐거웠고, 따라서 열심히 배웠다.

나는 이 신흥학교 시절에 우남 이승만 박사를 만나 내 생애에 가장 중요한 계기를 만들게 되었다. 그는 죠지 워싱턴 대학에서 문학사를, 하바드 대학에서 문학석사를, 그리고 프린스톤 대학에서 1910년 6월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서울(당시 경성) 기독교 청년회 총무로 초청되어 귀국을 했다. 그리고 대한 남감리회 평신도 대표로서 미국 미네아·폴리스 회의로 떠나기 전까지 YMCA를 발판으로하여 각급학교와 교회를 순회하면서 애국심을 호소하여 민족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이 기간에 이 박사는 내가 다니고 있는 신흥학교까지 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나와 이승만 박사의 첫 대면이었다. 이때가 1911년 여름이라고 기억된다. 이 박사는 교장선생님을 위시해서 우리 전교학생들에게 민족의 피를 들끓게 하는 감동적인 연설을하여 장내를 숙연하게 하였다. 이 박사의 <배움에는 노예가 없다>,< 밤낮으로 노력하여 새로운 민족의 역사를 창조하자>는 내용의 강연은 나를 또 다시 새로운 삶의 세계로 인도하였다. 그 결과 나는 나도 내 분야의 공부를 저 이 박사처럼 민족을 위해서 달성하리라는 결심이 용솟음쳤다. 후에 내가 미국 유학생활을 그토록 오래 계속할 수 있었던 일이나, 또 가정과 정든 고국 산천을 뒤에 두고 미국으로 정처없이 떠날 수 있었던 이와같은 일련의 모든 일들을 이승만 박사의 자극이 있었기 때문이다.


송철씨는 1912년 봄에 졸업한 고등과 1회 졸업생으로 그의 회고록에는 가난을 딛고 고학을 하던 학창시절의 어려움과 꿈, 그리고 민족정신이 잘 드러나 있으며, 특히 이승만 박사와의 만남은 그 후 그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신흥학교 고등과 정식인가 후의 1회 졸업생은 송휘규(송 철), 김용학, 윤진선, 안영열 등 4명이었다. 물론 그들과 같이 공부한 학생은 1909년에 소학교를 포함하여 등록인원이 150명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상당수 더 있었으리라고 추측되지만 당시 경제적인 어려움 등으로 인하여 졸업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들 중 '송철회고록'을 중심으로 송휘규와 안영일에 대하여 간략하게 소개해 보겠다.


송철(송회철) : 1894년 충남 금산군(당시는 전북) 부동면 경당리에서 출생하였다. 1912년 전주 신흥학교 고등과 1회로 졸업하고 군산영명학교에서 교사겸 학생으로 생활하다가 1914년 봄부터 1916년 여름까지 목인 신흥학교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쳤다. 1916년 중국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미국에서 1915년 Polytec High School을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그 후 Berkley 대학에서 한국에서부터의 꿈이었던 수력발전학(水力發展學)을 전공하여 1930년 봄 10년간의 유학공부를 마치고, 그 공부한 것을 조국을 근대화시키는 데 공헌하고자 귀국하였다. 그러나 식민통치하의 상황 속에서 그 꿈을 실현시킬 수 없으며 나라의 독립만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농장을 경영하였고, 이승만 박사와 함께 〈대한인동지회〉를 창설하여 미주 한인 광복운동의 재정총책을 맡았으며, 이승만 박사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재무총책을 맡기도 하였다. 그 후 〈대한인동지회〉북미 총회 총회장을 역임하였으며, 〈北美時報〉편집장을 역임하였고, 해방 후와 6·25사변 후에는 조국에 구호품 보내는 일을 주도하였다. 대한민국 건국 당시에는 막후활동과 대미 로비 외교의 주역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또한 재미 유학생 재정보증 및 방미 국군, 공무원들에 대한 재정지원을 하였으며, 〈재미한인회〉,〈한인센터〉 등을 창설하였고, 미주 한국학교의 전신인〈무궁화학원〉을 창설하여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1956년에 모국을 방문하여 경무대에서 대통령과 요담하고 대한민국 애국장을 받았으며, 중앙대학교에서 명예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0년에는 박정희 대통령과 면담하고 대한민국 동백장을 수상하였으며, 〈재미 한인 방공연맹〉의 창립대회장이었고, 1985년 현재도 〈대한인동지회〉총회장을 맡고 있다.


안영열: 전북 용담군(현재의 진안군 용담면)출신으로 갑부의 아들이었다. 그는 수차에 걸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재산만 허비하다가 이승만 박사를 만나 신학문의 필요성과 애국의 지침을 깨달아 신흥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는 학교에 올 때 자기의 아내와 함께 남종·여종을 모두 거느리고 왔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문의 인생관과 도덕관의 영향을 받은 그는 아내와 의논하여 남녀 종을 해방시켰고, 거기에다 그들의 생계를 위하여 얼마간 전답도 붙여 주었다. 그리고나서 그는 학교 운동장을 닦으며 고학을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후에 그는 아내를 동반하고 미국으로 건너 가 많은 일을 했다. 고학을 하면서도 형편이 쪼들리자 선교사들의 어학 선생을 맡아 하면서 학업을 계속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후에 그는 아내를 동반하고 미국으로 건너 가 많은 일을 했다. 그 중에서 미국에 사는 한국 교포들을 위해서 가장 두드러지게 한 일은 소위 "사진결혼"이다. 많은 한국인 남자들이 미국에 와서 거의 모두가 혼자 살던 때라 이 사진결혼은 미주 한인 사회에 큰 공헌이 되었다.


위에 소개한 두 사람의 1회 졸업생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교포사회와 조국을 위해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었다. 이 외에 1910년 대의 졸업생들이 신흥학교에서 배운 신학문과 민족애의 정신으로 국가와 민족,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큰 업적들을 남겼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들의 행적을 밝혀 낼 수 없음이 아쉬울 뿐이다.

앞에서 언급한 "송철 회고록"을 통해서 1910년대 일제의 교육탄압과 당시 학교상황을 알아 볼 수 있다. 송철씨는 1914년 여름까지 모교인 신흥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는데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1914년 봄에 나는 모교인 신흥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교장 선생님인 여부솔(呂副솔) 목사님은 독일계 미국인 선교사였는데 나를 물리와 수학교사로 임명하였다. 여 교장은 남달리 공학에 관심이 있는 분으로서 내가 학생시절의 유교장과는 달리 학생들에게 이공계통을 강조하였다. 그는 비교적 도구를 갖추기 쉬운 목공분야를 손수 가르치는 정력가가 되어서 나와는 아주 친근하였다. …부임초부터 가르침을 통한 나의 애국운동 전개에 대해서 나대로의 포부와 계획도 많았지만 그것은 한낮 꿈에 불과하였다. 왜냐하면 일본의 교육에 대한 지나친 간섭은 무엇하나 속시원하게 민족의 독립운동을 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총독부의 고위층에 있는 일인 한 사람이 순시차 나왔다. 우리 교직원 일동이 한자리에 모여서 이 일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좌담회를 가진 일이 있다. 좌담회 석상의 용어는 일본어로 이야기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앞자리에 앉아 한국말로 이야기하고 질의하였다. 그랬더니 일인은 "선생께서는 왜 국어를 사용하지 않습니까?"하고 힐난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받아 나는 "지금 나는 국어로 말하고 있는데요."라고 말하면서 일본인 시학관을 무시한채 우리말로 대답하였다. 뒤에 앉아 있던 일어 담당 동료교사가 나에게 그러지 말라고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러자 그 일인은 얼굴을 붉히면서 의자를 박차고 휙 교장실로 나가 버렸다. 조금 후에 교장이 나를 불렀다. 교장인 여목사님은 그 일인 앞에서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책임질 것을 약속하고 또 정중히 사과를 한 모양이었다. 나는 여목사님에게 "교장 선생님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나의 국어는 한국어인데 국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니 대관절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했더니 교장선생님은 "송 선생님의 애국심은 충분히 압니다만 제발 참아 주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이후로는 일인이 우리 학교에 오면 나를 일인이 볼 수 없는 방에 가두어 버리고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럭저럭 나의 교편생활도 2년이 넘은 때였다. 학교에서 주는 18원의 봉급은 먹고 살기에 궁색한 데가 없었고, 또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이었지만 도무지 나의 마음에는 하루도 평화가 없었다.


윗글에 의하면 1910년대에 신흥학교에서는 목공과 같은 기술을 학교에서 가르쳤으며, 일제는 학교에서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였고, 그 결과 애국심이 강한 교사들은 심한 갈등을 겪은 것을 알 수 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을 한 이후 일제는 조선사람들 저항을 막고 식민통치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무단정치를 실시하였다. 그와 같은 무단정치는 교육에도 영향을 미쳐 사립학교까지도 그들의 통제하에 두고자 하였으며, 일본어의 보급을 통하여 민족혼을 말살시키고 조선민족을 일본에 동화시키려 하였다. 이와 같은 무단정치하의 교육적인 탄압 속에서도 신흥학교는 꿋꿋하게 그 명맥을 이어왔으며, 전북지방의 선교학교들의 중심이 되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운 학생들은 학교 내외에서 노동의 대가로 고학을 하면서 공부를 계속했고, 그 가운데서 신앙심과 함께 민족혼을 키워 "성현이 되고, 부모를 현창(顯彰)하는" 희현당의 정신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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