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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4-01
 제목  희현당 (전주신흥고등학교 90년사 7)
 주제어  희현당
 자료출처  전주신흥고등학교  성경본문  
 내용

목차

 

갑오개혁이후의 신교육   

선교사들의 내한과 기독교학교의 설립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의 내전과 선교 활동의시작

최초의 신흥인 김창국   

시대적 배경

신흥학교의 개교

희현당

일제의 무단정치

초창기의 신흥학교

삼일운동의 배경

전주의 삼일운동

삼일운동과 신흥

일제의 문호정책

기독교의 재흥과 시련

학생수의 증가와 증축

1920년대 신흥학교 개황

인톤교장과 1930년대 초

조선총독부 지정 신흥학교

항일의 몸짓

광주학생운동과 신흥

신사참배 거부와 폐교

종교교육과 신앙생활

 

> 참고자료 :  삼일운동 

 

1906년 봄 기와집 한 채를 지었던 것이 희현당 유적지이고, 또 1908년에 희현당의 북림록하(北林麓下)에 기와집 8칸 을 지었으며, 현재 신흥학교(중학교와 불탄 고등학교 본관) 건물이다 희현당 자리이니 신흥학교는 희현당의 옛 터에 자리를 잡은 학교이다. 외국의 선교사들이 이 땅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세운 신흥학교가 왜 하필 유생들을 가르치던 희현당 자리였을까 하는 의문에 접할 때 우리는 그것이 신흥학교의 미래를 예정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깨달을 수 있다. 이제 희현당이 어떤한 곳이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조선조는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여 태조 6년(1406년)에 태학을 설치했으니 이를 성균관(成均館)이라 한다. 강학(講學)을 한 곳은 문묘(文廟 : 鄕校)에 있는 명륜당으로 유생들은 명륜당 동서재(東西齋)에서 기숙하고 있으면서 공부하고 있었다. 지방의 문묘는 수도 한양의 제도를 본뜬 것으로 행정구역의 제도에 따라 대·중·소로 규모는 달랐으나 모두 관찰사의 감독에 속했었다. 한성의 문묘에는 태종11년(1410)에 사학(四學)이라 하여 동, 서, 남과 중앙에 학당(學堂)을 두었는데 고종31년(1894)에 폐지되었다. 그리고 그 산하에는 무수한 서당이 있어 초등학생을 담당했었다. 또한 서원(書院)을 사설(私設) 하여 지방의 명현(名賢)을 배양하고 유생들의 도덕과 학문을 수련하는 도장으로 삼아 왔으나 여러 가지 폐단이 생겨 고종5년(1868)에 철폐되었다.

희현당은 서원의 양상을 띈 것으로 제도와 규모가 갖추어져 있는 학당이라고 볼 수 있다.

숙종 26년(1700)에 당시 관찰사로 재임한 김시걸(金時難 .安東人, 자는 士興, 호는 蘭谷)이 지방 유지인 진사 오명기(吳命模)와 더불어 황학대(黃鶴臺) 기슭인 옛 사마재(司馬齋 :生員과 進士가 모이는 곳)터에 학당을 창건했으니 이것이 바로 희현당이다. 김시걸은 희현당을 지어 놓고 이듬해에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떴다. 창설당시의 규모를 보면 강당과 주방을 마련했고, 전답을 사들여 그 수입으로 경비를 쓰도록 했다. 책을 비치하여 학업을 돕고 당규(堂規)를 제정하여 규율을 세웠다. 임원을 두어 사무를 처리했고, 식모를 채용하여 숙식을 보살 폈으니 오늘날의 학교 제도나 다름이 없었다. 봄·가을 반으로 나누어 전주에서 10명, 도내에서 20명의 학생을 뽑아 수강케 하였다. 그후 관찰사 이집(李集 ·자는 老果, 호는 醉材, 德水人)이 중수(重修) 하려고 서둘렀으나 임기가 짧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그의 아들 이주진(李周鑛 :자는 六甫, 호는炭翁)이 영조 14년(1738)에 부임하자 선친인 이집의 뜻을 받들어 먼저 규모보다 더 넓게 중수했으며, 새로 당규 40종목을 제정하고 당기(堂記)를 써서 학생들을 격려했다.

그후 오랜 세월 동안 사색당쟁으로 선비들간의 의견이 엇갈리고 경영이 충실하지 못하여

퇴락한 상태에 있다가 이곳에 신흥학교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현재 신흥학교에 남아 있는 희현당 사적비와 희현당 중수사적비는 땅 속(黃鶴臺로 가는 곳)에 묻혀 있던 것을 발굴해서 세운 것으로 희현당을 창설한 김시걸과 이를 중수한 이주진의 곡정을 내용으로 한 것이다. 희현당의 정신과 당시의 사정을 보다 소상히 알기 위하여 다음에 희현당 사적비의 전문(全文)을 옮겨 적는다.


<완산 희현당>


전주부성 서쪽 조금 떨어진 곳에 희현당이 있으니 바로 관찰사 김공이 세운 것이다. 공은

당세에 청아하다는 명망이 있던 분으로 본도 관찰사로 부임하게 되자 학교를 일으키고 인재를 길러내는 일이 선화(宣化 :관찰사가 집무하던 건물을 宣化堂이라고 하였으며, 덕을 베푼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를 펴나가는 데 있어서 급선무라 여겼다. 전주는 선화의 바탕이 되는 고장으로 선비가 많이 나온 것으로 알려진 까닭이었다. 그러므로 공은 여기에 더욱 마음을 기울여 이 사업에 특별히 수천 꾸러미의 돈을 내어 한 군데에 학교를 세워 선비들의 수련하는 도장으로 삼았으니 그 지 역은 사마재 (司馬齋 : 生員과 進士의 講學所)가 있었던 옛 터 이다. 그리하여 잠을 잘 수 있는 집이 있게 되었다. 담장과 문로(門路)와 창고와 부엌이 마련되어 있어 갖추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으며, 밥을 지을 수 있도록 식모 2명을 두었고, 양식을 대는 데 재력이 없을까 걱정되어 많은 전답을 사들여 이에 뒷받침하게 했다.

생각건대 우리고장 사람들은 배우고 익힘에 있어 너나 할 것 없이 몰려들 것으로 모이지 않는 것을 걱정할지언정 공부할 장소가 없음을 걱정하지 않게 되었으며, 부지런히 노력하지 않는 것을 걱정 할지언정 학자금이 없는 것을 걱정하지 않게 되었은 즉 공이 우리 전주 부민에게 베푼 은혜로 학교를 일으키어 인재를 길러내는 일이야말로 지극한 정성 이라 하겠다. 학교가 완성되매 공은 선비들에게 바램(希)이 없으면 과녁이 없이 활을 쏘는 것 같아 마음을 둘 곳이 없고, 그것을 나타낸다(顯)는 욕구가 없으면 갑자가 부지런하였다가도 게을러져 학업을 이어나갈 수 없다고 여겨 특별히 희현(希顯) 두 글자로 당명(堂名)을 삼았다. 희(希)는 무슨 뜻인가! 희현(希賢 : 어진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과 희성(希聖 :聖人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에서 나온것이다. 현(顯)은 무슨 뜻인가. 입신양명(立身場名)하여 그 부모를 나타낸다는 뜻이다. 아아! 선비들이 뜻을 희현에 두고 공부하며, 마음을 부모의 현창(顯彰)에 둔다면 지향(指向)하는 바가 바르고 학습하는 태도가 아름답지 않겠는가 ! 또한 근본을 찾아내어 근면하다면 성공하지 못할 이유가 없으니 무릇 책을 옆에 끼고 배우러 오는 사람이 모두 바른 학문에 젖어들어 큰 과업에 분발한다면 위로는 성현처럼 될 것이요, 아래로는 부모와 더불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니 이른바 희현(希顯)의 공과 현친(顯親)의 일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공이 학교를 일으키어 인재를 길러냄은 희현의 정신에서 그 지극함에 이르렀도다. 대개 공이 전주에서 재임하는 동안 자기의 용돈을 절약하고 세금을 많이 감해 주었으니 그 은혜가 큰 것이요, 돈을 내어 백성을 돕고 민폐를 바로 잡았으니 그 덕화가 융성하였다. 지난날 우리 도에 부임한 관찰사로서 우리 도민에게 혜택을 입힌 분이 대대로 적지 않았으니 공의 덕화는 본디 그들과 같거니와 적잖은 돈을 내어 종전에 없었던 학교를 세워 우리 고을 사람으로 하여금 학예 (學藝)를 수련할 수 있는 지방으로 만들어 준 것은 공만이 크게 베풀어 준 지극한 은혜요, 큰 덕이 아니 겠는가! 아아! 우리 고장은 본디 선비가 많았다고 하지만 수십 년 내려오는 동안 관청에서는 학문을 서두는 일이 없었고, 학자금을 대어 줄 만한 돈이 없어서 비록 뛰어난 재사가 있다 할지라도 자포자기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많았었는데 이제부터는 누구나 학문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생각건대 마땅히 바랄 것을 바라고, 마땅히 나타내야 할 것을 나타냄에 있어서 공이 아니었으면 누가 관연 이 일을 하였겠는가! 학교를 세운 뜻을 엮은 교명(校銘)을 벽에 걸어 놓고 공부하는 방법을 밝히었으니 공이 학교를 세우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음을 살피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한결같이 고을의 선비들은 그 은혜에 감동되고, 그 덕을 칭송하여 서로 비를 세워 길이 전하고자 함에 있어 비문을 다른 사람에게 얻지 않고 나에게 위촉하였다. 아아! 이러한 학교는 유학자의 큰 사업으로 그 업적을 적어 아름다움을 찬양해야 하므로 옛것에 돈독하고 언어가 해박한 자가 말해야 하거늘 이제 나에게 부탁한 것은 무슨 까닭이겠는가? 사람들이 말하기를 들어서 아는 것은 보아서 아는 것만치 자상하지 못한 법인데 그대는 우리고장 사람으로 이 일을 눈여겨 보았으니 그 말하는 바가 믿음직스러운 실증(實證)이 될 것인 즉 사양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감히 서툰 글로 보아서 알고 있는 실적을 간단히 써 보았다. 공의 휘(諱)는 시걸(時傑)이요, 자(字)는 사흥(史興)이다. 성품이 어질고 문학을 좋아하였다. 기묘(己卯 1967)년 7월 24일에 본도 관찰사로 부임했고 신사(辛巳1701)년 5월 10일 내직(內職)으로 들어갔다. 학교의 건립이 완성된 것은 신사년 5월 15일이었다. 이 사적비를 주관한 임원은 다음과 같다.


봉렬대부 전 군수 유백승 유(柳百乘) 지음

유학(幼學) 박초재(朴楚梓) 비문과 두전(頭篆)의 글씨를 씀

집사 생원 홍중연(洪仲衍)

유학(幼學)박초동(朴楚凍)

이 형(李 螢)

유익화(柳益華)

승정 기원후 정해(丁亥) 2월에 비를 세우다


위에 소개한 사적비의 내용에서 희현당의 성격을 드러내는 몇 가지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희현당은 생원과 진사의 강학소(講學所)였던 사마재(司馬齋) 옛 터에 세워졌다. 둘째,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도 돈이 없어서 공부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셋째, 당호(堂號)를 希顯 라고 지음로 해서 賢人과 聖人이 되기를 바라며, 입신(入身) 하여 부모를 현창(顯彰)할 것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

이와같은 희현당의 특징과 정신이 신흥학교 90년 역사에서 그대로 반영되어 있음은 앞으로 서술할 역사에서 분명히 살펴볼 수 있거니와 그것은 또한 미래를 지향하는 신흥학교가 계승해나가야 할 신흥의 정신적 지주(支柱) 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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