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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4-01
 제목  갑오개혁이후의 신교육 (전주신흥고등학교 90년사 1)
 주제어  갑오개혁
 자료출처  전주신흥고등학교  성경본문  
 내용

목차

 

갑오개혁이후의 신교육   

선교사들의 내한과 기독교학교의 설립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의 내전과 선교 활동의시작

최초의 신흥인 김창국   

시대적 배경

신흥학교의 개교

희현당

일제의 무단정치

초창기의 신흥학교

삼일운동의 배경

전주의 삼일운동

삼일운동과 신흥

일제의 문호정책

기독교의 재흥과 시련

학생수의 증가와 증축

1920년대 신흥학교 개황

인톤교장과 1930년대 초

조선총독부 지정 신흥학교

항일의 몸짓

광주학생운동과 신흥

신사참배 거부와 폐교

종교교육과 신앙생활

 

> 참고자료 :  삼일운동 

 

1. 新敎育의 시작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18세기에 들어서서 당시의 진보적 사상가들인 실학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근대화의 움직임이 채 결실을 맺기도 전에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보수적 정치 세력들은 천주교 탄압을 앞세워 실학자들을 숙청하였다. 그로부터 한 세기는 쇄국주의 정책으로 인하여 급격히 변화하는 세계정세를 외면한 암흑의 시대였다. 새 문명국들을 의식하지 못한 채 쇄국정책으로 외국과의 교섭을 거부하던 조선은 문호개방에 대한 아무런 대비도 없이 1876년 일본의 강요에 못 이겨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최초로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1882년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그 후 계속 영국, 독일, 이태리, 러시아, 프랑스등 여러 열강국들과 통상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문호가 널리 개방되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문호가 개방된 조선은 여러 열강들의 세력확장과 주도권 다툼을 위한 각축장이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도 조선은 근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여 1883년에는 한성순보(漢城旬報)가 발간되었다. 우정국 개국축하연을 기회로 하여 개화파의 중심인물인 김옥균, 박영효 등이 일으킨 1884년 12월 4일의 갑신정변(甲申政變)은 3일만에 실패로 끝났지만 정치, 경제, 사회면에서 상당히 진보적인 개혁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홍집, 김윤식, 유길준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갑오개혁(甲午改革)은 온건파에 의해서 외세의 직접적인 간여없이 개화정권이 독자적으로 추진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나중에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의 힘이 작용함으로써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본격화하는 데 도움을 주는 제도적 개혁의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교육면에서 본다면 갑오개혁으로 종래 학사(學事)를 담당하던 예조(禮曹)가 폐지됨과 동시에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학부아문(學部衙門)이 설치되어 근대적 교육기관의 설치를 담당하게 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1) 갑오개혁 이후의 신교육


우리나라 신교육의 시작은 갑오개혁 이후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이전부터 근대학교가 시작되었다. 개항 직후에 설립된 근대학교로는 1883년에 덕원부(德源府) 민중들이 기금을 모아 설립한 원산학교(元山學校)가 있다. 이 학교는 문예반과 무예반을 두고 근대적 교과과정을 가르쳤다. 이 원산학교는 외세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하여 조선인 스스로 성금을 모아 설립했다는 점과 관청이나 외국인의 주도가 아닌 일반 민중의 근대화 의욕의 일환으로 설립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정부에서 세운 근대적 교육기관으로는 1883년에 일종의 통역관 양성소인 동문학(同文學)을 들 수 있는데 이곳에서는 영어를 가르쳤다. 1886년 한미수호조약 체결 이후 보빙사(報聘使)로 미국을 다녀온 민영익의 건의에 의해 육영공원(育英公院)이 설립되었다. 육영공원에는 나이가 젊은 문무관리나 선비 중 재주 있는 사람을 택하여 입학시켰다. 그러나 신교육 운동의 일환으로 세워졌던 육영공원은 새 사회에 대한 적응력이 약한 양반 고관들의 자제만 입학시킨 결과 이 기관을 통하여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려웠고 그 때문에 1894년에 폐쇄될 수밖에 없었다.

갑오개혁으로 학부아문이 설치된 것과 아울러 1895년에 반포된 홍범(洪範)14조에서도 근대적 교육을 받아들일 것을 거듭 천명했고, 또한 이 해에 교육조서(敎育詔書)를 내려 교육을 통한 국가 증흥의 이상을 표명했다. 그리하여 이 해에 한성사범학교가 개교되었으며, 소학교령(小學校令)을 발표하여 수업 연한을 6년으로 하는 관공립 소학교들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이 소학교령은 국민 의무 교육제도를 지향하고 있었으나 1905년까지 서울과 지방에 모두 60개의 소학교가 설립되는 데 그쳤다. 한편 1900년에는 최초로 한성중학교(漢城中學校)가 개교되었다.

위와같은 정부의 시책과 아울러 민간인들에 이한 민중교육 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민중교육 운동가들에 의해 개교된 학교의 수는 관·공립학교의 수를 훨씬 능가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개화기 민중교육의 대부분을 담당했다. 개화와 자강(自强)을 위해 건립된 사립교육기관의 효시는 앞서 언급한 원산학교이지만, 그후 1895년에 설립된 민영환의 흥화학교(興化學校)를 비롯하여 사립학교의 숫자는 급격히 증가하여 1909년에 이르러서는 전체 사립학교 총수가 2250개교에 이르렀으며, 이 중 1402개교가 민족계 교육운동가들에 의해 설치 운영되고 있었다. 이 사립학교들은 대부분 초등교육기관이었다.

한편, 민중교육 운동가들은 초등교육기관 이외에 중등교육기관 및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에도 나서서 1905년 중등교육 기관인 양정의숙(養正義塾)이 설립되었으며, 1906년에는 휘문의숙(徽文義塾), 숙명학교(淑明學校),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등이 개교했다. 1909년 당시 이들이 설립한 교육기관은 모두 17개교에 이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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